심청전
- 감독
- 이경손
- 제작년도
- 1925
- 출연
- 나운규, 최덕선, 이경손, 김우연, 주삼손
<벤허>(1925) 중 (사진: “ Ben-Hur A Tale of the Christ ”, IMDb)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면서 동원한 ‘우승열패(優勝劣敗)’의 논리는 식민지 통치 전략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제국은 힘의 우위를 과시하며 찍어 누르기 위한 ‘무단통치’를 내세웠으며, 이는 ‘강자’가 곧 ‘적자’라는 인식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무장한 헌병들이 백주에 대로를 활보하고 일반 문관뿐 아니라 교사들까지 칼을 차고 다닐 만큼 살풍경한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조선 사회는 급격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해 왔던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3.1운동’은 예기치 못한 ‘사고’와도 같았다. 고종의 장례식에 맞춰 대규모 인파가 몰릴 것이 충분히 예상되었던 상황이었고, 실제로 2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한꺼번에 상경했지만 치안 당국의 대응은 미온적인 수준에 그칠 따름이었다.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자진 체포되었으나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시위 행렬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만세운동의 기운은 조선 각지로 퍼져나가며 끈질기게 이어졌다. 여러모로 ‘3.1운동’은 제국의 통치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비껴난 장면들을 연출해 냈던 셈이다. ‘3.1운동’을 기점으로 물리적 폭력에 의존한 통치 방식은 뚜렷한 한계에 부딪혔다. 만세운동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잔혹성은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부담을 느낀 제국은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유화책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것이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눈에 띄기 쉬운 헌병의 수는 줄었을지언정 실질적인 경찰력은 증대되었으며, 언론의 창간을 허용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듯했지만 이것 역시 식민지 조선 사회의 동향을 철저히 모니터링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조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화통치의 요체는 감시와 처벌을 짝패로 한 안정적 관리 기술에 있었다. 주목할 것은 극장 이 새로운 식민통치 기술의 주요한 시험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문화통치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다 해도, ‘3.1운동’의 전례를 상기할 수밖에 없었던 제국은 집단을 이룬 조선인들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였다. ‘광장’을 둘러싼 정치적 상상력이 봉쇄당한 상황에서 극장은 거의 유일하게 허용되었던 종족의 회집 장소였다. 극장업은 엄연한 합법의 영역 속에 놓여 있었을 뿐 아니라, 제국은 극장이 사회적 압력에 대한 배출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치안 유지에 유용한 기관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극장에 모여든 관객들은 돌발적 사건에 의해 쉽게 자극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잠재적 위협 요인으로 치부되었다. 비록 극장에서의 소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 여파에 대한 추정치는 ‘3.1 운동’이라는 역사적 전거를 환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1920년대 들어 검열 규정 들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1922년에 공포된 「흥행장급흥행취체규칙취급심득」은 공연에 대한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는 점과 함께 무단 공연 시의 처벌조항도 적시했다. 이어 1923년에는 경기도 경찰부가 경성에 소재한 극장 경영자들을 불러 모아 개선사항을 주문한 바 있었다. 특히 비밀결사와 음모단이 활동하는 내용의 활극은 유해하므로 피할 것, 변사가 사전 검열 내용과 다른 풍자적 언어를 쓰지 말 것 등의 내용이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1] 1926년부터 시행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은 일본의 법규를 소급적용한 것이 아닌 식민지 조선에서 별도로 적용된 최초의 법적 근거였다. 또한 이 규칙은 극장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급성장한 영화 를 명백한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필름 상영 전에 검열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뿐 아니라, “공안, 풍속 또는 보건상” 지장이 없어야 한다는 검열 기준을 명시하고 있었으며, 상영 시의 임검을 비롯한 현장취체 규정도 명문화되었다. 한편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가장 명시적인 표적은 외화 였다고 할 수 있다. 1923년에 < 월하의 맹서 >(윤백남, 1923)가 제작된 이래 조선영화계는 본격적인 생산의 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했지만, 상영된 영화의 절대 다수는 서양에서 수입해 온 외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국은 어떤 이유로 먼 나라의 이국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상이한 풍속의 세계에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식민지기 극장이 형성해 온 무성영화의 상영 관습 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식민지기 극장에서 상영된 무성영화는 자족적인 텍스트라 보기 어려웠다. 무성영화는 항상 변사와 악사를 비롯한 인간매체의 개입을 동반하고 있었기에 상영이라기보다는 연행 에 가까운 형식을 띠고 있었다.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대표적 표징으로 지목했던 영화의 성격이란 적어도 식민지기 극장에서는 유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를 관람하던 당대의 관객들은 화면에 나타난 낯선 시각적 코드 와 변사를 통해 중계된 익숙한 구두적 코드 를 결합시켜야 했다. [2]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법한 방식이라 해도 관객들은 극장 경험을 축적해 나가며 이를 자연스러운 관습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백문임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무성영화의 관객들은 ‘소리’를 들었다고(혹은 상상했다고) 반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의 관객들 역시 외국 배우의 벙긋거리는 입술에서 모국어 발화를 연상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법하다. 그리고 변사의 연행은 그러한 상상력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무성영화의 수용은 매우 혼종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국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외국인들의 이야기, 즉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의 내러티브는 ‘지금, 여기’에서 공유된 코드에 의해 토착화되고 전유 되었으며 더 나아가 종족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계기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또한 변사의 역할은 단순히 간자막의 내용을 ‘번역’하여 전달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변사의 수준이란 관객이 지참해야 할 손수건의 수로 가늠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을 만큼, 그들의 해설은 객석을 선동하여 집단적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때때로 그 과정에서 오독에 가까운 변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제멋대로인 해설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던 관객들도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변사들은 스스로의 역할을 일종의 창작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관객들의 기대와 욕망을 자극하는 해설을 통해 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유선영은 헐리우드 영화 < 동도(Way Down East) >(데이비드 W. 그리피스, 1920)가 식민지 조선에서 변사 해설을 동반하여 상영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었으며, 특히 변사 김영환의 강조점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과 다소 비껴나 있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다. <동도>는 남자에게 배신당해 미혼모 신세가 된 젊은 여성이 사회의 냉대 속에서 온갖 고난을 겪지만 자신의 선한 행실을 통해 끝내 행복을 되찾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동도>는 권선징악의 시적 정의를 구현하는 데 초점을 둔 전형적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다. 여주인공 안나는 자신의 진실한 내면을 알아본 데이빗의 구애를 받게 되지만, 과거 그녀를 버렸던 레녹스와 다시 만나 과거사를 폭로 당했고, 데이빗의 아버지인 스콰이어는 부정한 행실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안나를 면전에서 모욕한다. 쫓겨난 안나는 눈보라 속에서 기절하고 강물에 휩쓸려 흘러가다가 폭포로 추락할 위기를 맞이하지만 뒤쫓아온 데이빗은 유빙들을 징검다리 삼아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며 극적으로 안나를 구해내게 된다. 이 장면은 <동도>의 메인 포스터 이미지로 활용될 만큼 스펙터클의 요소가 부각되는 곳이며, 내용 측면에서도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영환이 가장 ‘통쾌’한 대목으로 회고했던 것은 데이빗이 아버지 스콰이어에 대해 ‘후레질’을 하며 대드는 장면이었다. 특히 데이빗은 ‘종교, 도덕, 법률’이 부재한다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데, 아버지의 ‘종교와 도덕’은 무엇이냐고 되묻는 장면이나, 안나에게는 ‘종교, 도덕, 법률’ 어느 것도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유선영은 이러한 반복이 다분히 변사 김영환의 강조점에 따라 취택되고 덧붙여진 장면에 가깝다고 보았다. 즉, 김영환이 느꼈던, 그리고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통쾌감’은 낡은 구질서와 도덕의 파괴, 자기혁신을 통한 개조, 정의와 인도주의에 대한 절박한 기대감, 식민지민이자 약소민족이라는 자의식이 결합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4] 변사 김영환 / <동도>(1920) 중 (사진: “ Way Down East ”, IMDb) 이처럼 변사의 해설은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의 세계를 식민지의 서사로 환치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관객들은 은밀한 해석의 코드를 공유하면서 전유의 독법을 체화해 나갔다. 더군다나 인간매체인 변사는 복제매체와 달리 돌발적 수행성 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해설 대본도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지만, 무대 배우의 애드립처럼 변사 역시 현장 분위기에 맞추어 임의로 발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 필름 검열과 별도로 임석경관을 동반한 현장취체가 필연적으로 요청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 대구 만경관 활동사진 순업단이 지난 팔일 진주에 도착하여 연일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는데 십일 밤 영사하는 사진, <암흑의 시(市)>에 설명 변사 김성두 군이 동 영화 중에 나타나는 주인공이 빈한한 사람을 위하야 일하다가 결국 감옥생활을 하게 되고 전기의 판결을 담임한 판사의 아들이 역시 법망에 걸리는 경로를 설명하면서 현대사회 조직이 불합리할 뿐 아니라 법률이 없어도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잇다는 설명 을 마치자 곧 임석경관이 검속을 시키고 다음 사진도 못하게 함 에 오백여 군중이 이유를 설명하라고 고함을 쳐 장내는 대소란을 일으켰는데 활동사진 설명까지 가혹히 취체함은 처음 일이며 진주경찰서의 근래 언론취체는 너무 가혹하다 하여 일반의 비난이 자자하다더라. (진주)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6 』, 한국영상자료원, 2014, 177쪽. - 기사, “활동사진 설명 중 – 변사 돌연 검속”, 《조선일보》, 1926. 3. 13. (나) 지난 십육일 밤에 시내 조선극장에서 다수한 격문을 살포한 사건 이 있은 이후 경찰 당국의 극장 경계는 더한층 삼엄하여져서 시내 단성사 , 조선극장 , 우미관 등의 각 극장의 입구는 말할 것도 업고 밑의 층 위층에는 두어 간통만큼씩 십수 명의 정, 사복경관이 벌려서서 철통 같은 경계를 하고 잇는데 그중에도 무대 정면에는 바로 변사 옆에 순사부장 한 사람이 걸상에 걸어 앉아서 활동사진을 영사하는 암흑한 속에서 끊임없이 관중과 눈싸움 을 하고 잇는 등 일찍이 극장에서 볼 수 없던 진기한 광경을 보이고 있다더라.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 한국영상자료원, 2019, 132쪽. - 기사, “각 극장마다 수십 경관 배치 – 변사 옆에 순사가 앉아”, 《조선일보》, 1930. 1. 19. (가)는 임석경관이 변사의 임의적 해설을 문제 삼아 흥행 자체를 중지시킨 사례에 해당한다. 대구 만경관 소속의 활동사진 순업단이 진주에서 영사회를 열었을 때, 변사 김성두는 감옥에 갇힌 주인공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볼온하게 해석될 만한 해설을 덧붙였다. 현대사회의 조직이 불합리하며, 법률이 없어도 충분히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막연한 인도주의적 발상에 기댄 이 해설이 명시적인 불온성을 띤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년도 5월부터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등 국사범들을 처벌하기 위한 ‘치안유지법’이 시행되어 왔음을 고려한다면, 치안 당국은 법률 무용론을 설파한 해설의 저의에 의구심을 품기 충분했을 것이다. 한편, 1929년에 일어난 원산 총파업과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치안 당국을 긴장시켰던 사건이었다. 이 시기 극장은, 동맹휴학 분위기가 급속도로 퍼져나가던 학교와 더불어 경찰의 일급 감시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어두운 공간 속에 다수의 조선인이 모여들었던 극장은 격문을 살포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나)는 조선극장 격문 살포 사건 이후 임석경관의 감시가 매우 노골적으로 표변한 순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임석경관을 위한 자리는 객석의 가장 뒤편, 즉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5] 그런데 격문 살포 사건이 발생하자, 경관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었을 뿐 아니라, 순사부장이 아예 변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관중과 눈싸움”을 벌이는 “진기한 광경”이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치안 당국의 주안점이 변사의 해설 자체보다 그것이 촉발하는 객석의 정동을 감시하고 제어하는 데 있었다는 점을 함의한다. 그러나 가시화된 임석경관의 존재는 외려 극장에 내재한 정치적 상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임석경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제국의 감시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와 같은 시스템이 인간의 육체를 빌려 현존하고 있었다는 점은 극장에 내재된 불온성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던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극장의 프로그램은 언제나 임석경관에 의해 중지되거나 취소될 수 있었기에, 임석경관은 극장에 모여드는 관객들로 하여금 불안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 다시 말해, 임석경관으로 대표되는 감시기제의 존재는 관객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응시하면서 극장을 둘러싼 심상지리를 ‘불온한 공간’으로 스케치했으며, 관객들은 그 시선을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구성 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극장 흥행주들은 이러한 불온성을 흥행 코드로 치환 하는 데 은근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특히 민족의 수난 서사와 해방서사를 담아 낸 외화들은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예컨대 1928년에 개봉되었던 <가우초>와 <이스라엘의 달>은 압제에 시달리는 약소민족의 해방서사를 그려 낸 영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가우초>는 남미의 안데스 산맥에 터전을 둔 유목민 ‘가우초’의 영웅담을 조명한 작품으로, 그들의 수령인 주인공은 신전을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신관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후 신전의 보물을 노린 도적들이 쳐들어오고 열세에 처한 주인공은 위기를 맞이하지만, “신출귀몰한 책략”을 발휘하여 끝내 신전을 지켜낸다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6] <십계>의 ‘자매편’이라 소개되었던 <이스라엘의 달>은 성경의 ‘출애굽기’에 나타난 유대 민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아 허구를 가미한 작품이다.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로 끌려가 가혹한 노역에 시달려 왔다. 그들을 동정해 왔던 이집트 왕자 세티는 ‘이스라엘의 달’이란 별칭을 가진 메라피와 만나게 된 후, 이스라엘 민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투쟁에 동참한다. 신문에 게재된 감상평은 동포의 자유를 위해 “어여ᄲᅳᆫ 청춘”을 바친 메라피의 희생을 ‘잔 다르크’에 비견하고 있으며, 신의 저주를 받아 비참하게 죽게 된 이집트 왕의 최후를 “확연한 인과의 결실”이라 규정한 바 있다. [7] <가우초>, <이스라엘의 달> 포스터 이듬해 식민지 조선에서 개봉한 < 벤허 >(프레드 니브로, 1925)는 유대민족의 수난사가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현실을 환기하는 계기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극장 운영자와 실무자들은 서양영화를 경유하여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것이 ‘관객몰이’에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영화가 극장에 내걸리기 위해서는 먼저 필름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단성사 영업부장으로 재직하며 <벤허> 검열 과정에 참여한 이구영 의 ‘무용담’은 흥행 실무자의 예민한 감각과 더불어 당대 검열행정의 공백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이구영) 영화검열을 이거 통과해나가면, 대본을 보니까 이거 암만해도 위태로워요, 내가. 거기 몇 마디 다이알로그가 이건 아주 불온 천만한 얘기란 말이에요, 저 노예선이..., 거 지중핸가 거기 나가지 않습니까? 거기에 전부 철사로 묶이고 거기에 이제 그..., 이... 저...? (면담자) 북? (이구영) 네, 북을 울리면서 리듬 맞춰가지고 노를 젓지 않습니까? 거기에 소위 선장이라고나 할까? 그게 나왔어. 나와서 채찍으로 갈기는 겝니다. 막! 덜 움직인다고... 그래 반항하는 거야. 이쪽에서. 그 주인공의 이름이 마리오스인가요? 반항하는 거야. 직접 대고. 그 선장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저어서 한 시간씩 늦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빨리 배를 저으란 말이야. 그 때 반항하는 거야. 그래서 대사 하나가 나옵니다. 너의 한 시간은 말이야, 우리 유태 민족의 백 년이단 말이야. 우리 민족의 백년한을 알겠느냔 말이야. 그 대사가 하나 탁 튀어나옵니다. 이것이 하나 유일하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겝니다. 이것이 통과되야만, 되면 이거 아주 히트란 말이에요, 영화는... 그런데 검열관은, 소위 성격을 내가 파악하고 있었어요. 오까라고 하는 검열관한테 이것이 가는 날에는 틀림없이 전부 가위질 다 당해서 아마 한 200피트 이상은 없어질 겝니다. 그 화면 전체를 막 끊고, 그런데 다행히 내가 거기 급사로 있던 사람에게 물었어요. 이 대본이 어떤 사람의 손으로 가는 걸 알아다오. 그래 나중에 전화를 걸으니깐드루 요시다란 사람의 손으로 갔다, 길전(吉田)이한테... 됐단 말이야. 그럼 내가 성격을 아니깐 이거 꼭 내가 방법론을 써야 되겄다. 이제 검열실에 올라갔어요. 영화 돌아가는데..., 그 사람이 소위 하이꾸라고 해서 그 배구(俳句)를 좀 할 줄 압니다. (면담자) 네, 하이꾸? (이구영) 네, 그게 경무 월간지가 있어요. 《경무월보》라고... 그걸 내가 찾아냈어요, 일부러, 그래서 고 문구를 외고...,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줄담배입니다. 줄담배, 소위 아사히라고 하는 것을 밤낮, 이놈을 입에다 종일 물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눈이 좀, 시력이 이상해서 아주 그냥 안경을 굉장한 걸 썼습니다. 도수가 깊은 것, 그래서 이제 고 화면이 한 5분이면 벌써 나타나기 쉬운 방면까지 왔어요, 벌써. 그래 내가 화면 보면서 대본 읽으면서 얘기하면서 이거 볼 거 아닙니까? 그러면은 그때는 그 배구에 대한 것, “당신 참 배구 참 멋지다 말이지. 이런 문구, 암만 생각해도 이건 정말 걸작인데, 이런 걸 왜 문단에 발표하지 않고 이런 데다 이렇게 내슈?” 막 칭찬하구 말이야. “당신, 자꾸 쓰슈, 자꾸 이런 글을. 이래야지, 우리도 좀 보지. 당신이 나 이런 걸 쓰는지 몰랐단 말이야. 오까~ 같으면 이런 걸 안 쓴단 말이야. 당신이니까 썼지.” 그렇게 하니까 칭찬해서 누가 싫다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아, 그러냐?구,’ “그래 평판이 대단하단 말이야, 요시다상, 이거 정말 문학에도 이렇게 조예가 있고 검열관으로 있기에는 참 아깝다”고 그런 얘기를 하니까, ‘아! 그렇냐’고 말이야. 그래 그러는데 그 화면이 지나가요. (면담자) 네, 그걸 지키기 위해... (이구영) 내 아주 잊질 않죠, 이제. 그 지나갔어요. 지나가서 얘기 딱 끊고, 뭐 참, 얘기가 너무 길었단 말이야. 그러고 영화 보는 게죠. 그러니까 지나갔죠. 그러니까 이제 노컷으로다가 무제한 도장 콱콱 내줬어요. 내가 춤을 추고 혼자 나오는데,(웃음) - 한국예술연구소 편,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복혜숙, 이구영 편』, 소도, 2003, 283~284쪽. <벤허> 중 (사진: “ Ben-Hur A Tale of the Christ ”, IMDb) <벤허>는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하에 놓여 있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 벤허는 귀족 집안 출신의 자제이며, 체제에 반항하는 동족들을 밀고하라는 로마인 친구의 부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함을 받아 노예로 전락한 인물이다. 이구영이 주목했던 것은 벤허를 비롯한 유태인들이 노예선 위에서 학대 받는 장면이었다. 채찍질하는 노예선의 선장에게 맞서 “우리 민족의 백년한”을 부르짖었던 대사가 “히트”를 예감케 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구영이 보기에도 반항기가 농후했던 이 대사가 온전히 검열을 통과할 리 만무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구영은 ‘꼼수’를 동원한다. 어떤 검열관이 배정되었는지를 사전에 파악하고, 필름 검열 당시 문제의 장면이 지나갈 때 관심을 돌릴 요량으로 그의 ‘하이쿠(일본 정형시의 일종)’ 실력을 일부러 추켜세웠다는 것이다. 결국 “노컷으로다가 무제한 도장”을 받아 낸 이구영은 희희낙락하며 검열실을 나올 수 있었다. 당연히 <벤허>가 상영되었을 때, 이 대사는 문제를 일으켰고 즉각 임석경관의 중지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벤허>는 필름 검열을 통과한 작품이었던 데다가 변사가 설명대본에 없는 대사를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검열 당국은 당혹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이구영이 회고한 뒷이야기에 따르면 검열관들 사이에 다툼까지 일어날 정도로 큰 난리가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 <벤허>는 계속 상영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연장상영까지 진행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검열 역시 사람의 손으로 수행하는 작업인 이상 빈틈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이구영은 그 허점을 절묘하게 파고들었던 셈이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극히 예외적이었며, 극장의 핵심 프로그램이 발성영화로 전환된 1930년대 이후부터는 더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요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발성영화는 별도의 소리 연행자를 둘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결된 텍스트였기에 필름 검열만으로도 불온한 장면들을 걸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발성영화의 사운드와 충돌할 때가 잦았던 변사의 목소리는 영화 감상을 방해하는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재래의 취향’으로 낙인찍히며 점차 주변화되었다. 이는 곧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돌발적 수행성이 발휘될 여지(餘地)가 급격히 좁아져 간다는 점을 의미했다. *** [1] 기사, “활동사진 개선의 요점 - 비밀결사나 모험뎍 활동사진은 조선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금지”. 《조선일보》, 1923. 4. 11. [2] 유선영, 「초기 영화의 문화적 수용과 관객성 : 근대적 시각문화의 변조와 재배치」, 『언론과 사회』 12, 사단법인 언론과 사회, 2004. [3] 백문임, 「식민지 극장의 무성영화 관람성」, 『한국언어문화』 38, 한국언어문화학회, 2009. [4] 이러한 전유의 구조를 적용해 본다면, 안나는 피억압 약소민족으로 치환되며, 레녹스는 거짓과 위선으로 식민지를 강제 병합한 제국 일본으로, 스콰이어는 종교와 도덕을 말하면서도 침략자인 일본을 지지하거나 방조하는 서구 강대국들로, 데이빗은 약소민족을 대변하기 위해 아버지에 대항하고 더 나아가 약자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조력자이자 인도와 정의를 구현하는 선인으로 전치될 수 있을 것이다. (유선영, 「식민지의 할리우드 멜로드라마, <동도>의 전복적 전유와 징후적 영화경험」, 『미디어, 젠더 & 문화』 26,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2013.) [5] 광주극장은 1930년대에 건축되어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온 극장이다. 광주극장은 ‘임검석’의 위치도 보존해 놓았는데, 객석의 가장 뒤편인 출입구 바로 옆에 임석경관을 위한 자리가 별도로 마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기사, “신영화 - 『더글라스』의 가우초”, 《조선일보》, 1928. 2. 15. [7] 기사, “내가 본 이스라엘의 月”(一), 《동아일보》, 1928. 2. 10.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배우 이월화(1904~1933,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배우의 표현수단인 몸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인 동시에 작품과 관객을 잇는 최초의 통로가 된다. 텍스트가 추상적인 문자로 쌓아올린 성채라면, 관객은 배우의 육체를 안내자 삼아 비로소 비밀스러운 문을 발견한다. 객석에 불이 꺼지면 관객들은 광막한 어둠을 불안스레 응시하지만 무대 위나 스크린 속에서 익숙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안도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텍스트의 내적 질서는 배우의 몸을 통해 구체적 형상을 얻고, 눈앞에 놓인 허구의 세계는 비로소 인간 사회를 들여다보기 위한 창문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배우는 몸을 통해서만 관객에게 현시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배우는 필연적으로 공공의 시선 앞에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출이란 배우라면 응당 짊어져야 할 숙명이겠지만 문제는 그 시선이 배우의 몸을 대상화하여 눈요깃거리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더군다나 전근대적 도덕관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던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여배우는 훨씬 더 가혹한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시각적 쾌락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여배우들은 종종 화류계 여성들과 동일시되곤 했으니 이런 환경에서 여배우가 쉽게 출현할 수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여배우는 끝내 근대극장의 당당한 주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여배우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설움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을테니 각도를 조금 달리해서 질문해보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배우의 역할은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일까? 또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여배우는 어떻게 필연적인 존재로 인식될 수 있었을까? 역사의 지층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사실 여성 연행자들의 존재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예기(藝妓)들을 양성하기 위한 전통적 교육 체계가 마련되어 있었고, 이들 중 몇몇은 협률사, 장안사, 연흥사 등의 초창기 극장들이나 ‘구극’을 주로 제공하던 광무대에서 전문 소리꾼으로 활약한 바 있었다. 그러나 여배우는 기술을 통해 여성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존재감 그 자체 를 전시하던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차별화되었다. 즉, 여배우는 생물학적 성의 동일성에 힘입어 기술로 모두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단번에 뛰어넘는 것이 가능했다. 여배우의 등장을 필연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재현의 사실성을 둘러싼 당대의 인식체계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성이 여성 역할을 맡는 것이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일이라는 생각은 특정한 시기를 거쳐 비로소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1910년대까지 배우와 배역의 성적 불일치는 그리 이상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 유래하여 1910년대 극장가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한 신파극은 남성 배우의 여장 연기를 일반적인 관습으로 채택했다. 이른바 ‘여형배우(おんながた)’는 여성의 무대 출연이 불허되었던 에도 막부시대 이래 가부키의 관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여형배우’는 형식미학을 중시하는 가부키의 특징과 맞물려 미학적 경지로서 숭앙되기도 했다. 남성 배우가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여성보다 더 여성스럽게 보이는 재현의 기술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예의 궁극적 도달점이라 여겨졌다. 한국의 신파극단들도 이러한 관습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신파극단들은 여성 역할을 맡아 일세를 풍미했던 여형배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수철은 <장한몽>의 여주인공 심순애 역할을 통해 당대의 대표적 여형배우로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사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수철의 사진을 보면 그의 외형은 여성스럽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비록 가발과 분장으로 가려놓긴 했지만 겉보기에도 그의 체격은 굉장히 건장해 보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는 여성을 흉내낸 그의 연기가 당대의 관객들에게 충분히 그럴싸한 것으로 보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고수철 (사진: 《조광》, 1935. 12.)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당대의 관객들은 극의 등장인물을 통해 구체적인 인간의 형상을 발견하기보다 그 인물이 표상하는 인간 유형이나 그들의 갈등을 통해 제의적으로 모방된 도덕체계를 떠올릴 때가 많았다. 한국의 전통연희인 탈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관객들은 탈 속에 숨겨진 배우의 진짜 얼굴보다는 부네나 각시탈로 표상된 캐릭터의 고유한 성격에 관심을 기울이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극은 사유하는 존재 로서 내면을 가진 인간의 형상을 그려내고자 했고, 이때 표정이나 동작은 이를 외화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새롭게 규정되었다. 이제 배우는 표현하기에 앞서 존재해야 하는 이 로 지목된 것이다. 이른바 이성장(異性裝) 연기란, 남성들의 여장 연기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반대로 여성들이 남성성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본에서 시작된 소녀가극은 오늘날까지도 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도 ‘배구자악극단’을 비롯한 소녀가극단이 조직되기도 했다. 또한 해방 후에는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창극의 형태가 유행하여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는데, 얼마 전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드라마 < 정년이 >(정지인, 2024)가 소재로 삼았던 ‘여성국극’이 그것이다. 다만 이러한 사례들이 특수한 흥행가치를 만들어내며 인기를 끌었던 것과 달리 신극운동이 본격화된 1920년대에 들어서며 ‘여형배우’는 아마추어의 영역에서만 통용될 법한 결여태라 인식되기 시작했다. 1921년에 전 조선을 순회하며 공연활동을 펼쳤던 ‘극예술협회’는 식민지 조선 신극운동의 효시를 쏘아올린 집단이었다. 재래의 신파극단과 차별화되기 원했던 그들은 무대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환기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여형배우’라는 기존의 관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는데,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인 <최후의 악수>의 여주인공 ‘화봉’ 역할은 마해송의 몫으로 돌아갔다. 물론, 이것은 공연 준비가 촉박한 상황에서 여배우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반면, 2년 뒤인 1923년에 창립공연을 가진 토월회 는 여배우의 출연이 곧 공연의 성패와 직결된 요소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배면에는 토월회가 여타 학생 소인극단들과 쉽게 동일시되기 어려웠던 사정이 개입되어 있다. 토월회 역시 극예술협회와 마찬가지로 동경 유학생들의 모임이었지만, 극예술협회가 재일본 노동자와 고학생 단체인 ‘동우회’ 후원을 목표로 순회극단을 조직했던 것과 달리, 토월회는 공연 그 자체에 방점을 찍고 자신들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토월회 공연 당시 촬영 추정 사진 일본 동경에 있는 조선 유학생 중에서 예술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있는 사람들이 조직한 토월회에서는 이번 여름 휴식을 이용하여 경성에 돌아와 임시 사무소를 낙원동 149번지에 두고 연극회와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겠다는데, 연극은 금 6월 하순에 시내 수은동 단성사에서 유-젠․피롯트의 『기갈』과 안톤 체호프의 『곰』과 사람의 영혼까지 웃기게 하고야 만족하는 희극작가 버나드 쇼 씨의 희극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무엇이라고 거짓말을 하엿나』와 박승희 씨의 『길식』 등을 올릴 터인데 전부 한 막거리로 의복과 배경은 다 동경에서 마치어 가지고 나왔다 하며... -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3 』, 202쪽. “토월회 제일회의 연극공연회-동경 류학생 속의 유지자로 조직된”, 《동아일보》, 1923. 6. 13. 기존의 학생극단들은 연극을 매개로 삼아 사회사업에 소요되는 기금을 조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토월회의 경우, 별도의 공연 취지 대신 조선의 문화 향상이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목표를 내세웠을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토월회의 공연에서는 으레 학생 순회연극단의 공연에 수반되었던 사회자의 행사 취지 소개나 개막 선언과 같은 순서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동우회순회연극단이 《동아일보》의 공식적 후원을 얻어 전 조선을 대상으로 한 순회연극을 기획할 수 있었던 반면, 토월회는 자발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토월회는 그들의 활동에 호의를 보이던 일본인에게 600원의 자금을 얻어 공연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일개 학생단체에 불과했던 토월회가 거금을 융자할 수 있었던 것은 중심인물인 박승희의 아버지가 최초의 주미공사 박정양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토월회의 동인들 중에는 박승희와 같은 유력가의 자제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의 존재는 언론이 기존의 학생극단에 부여했던 표상, 즉 ‘고학생 단체’로서의 성격을 희석시킨 요인이었다. *주1 그렇기에 토월회는 동경 유학생 중 예술에 뜻을 둔 ‘유지자’들의 단체로 소개되었을 따름이었다. 즉, 토월회에게 있어 ‘예술’이라는 레토릭은 그들의 공연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했던 최소한의 전제조건이었다. 예술이라는 막연한 지향점은 ‘ 무대 사실주의의 확립 ’이라는 목표로 구체화되었으며, 토월회가 무대장치에 역점을 두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다행히 토월회는 동경미술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아마추어의 수준을 넘어선 무대장치를 갖출 수 있었다. 1923년 8월에는 부속기관인 ‘토월미술연구회’가 결성되어 무대장치를 전담했는데, 안석주, 윤상열, 이승만 등 다수 화가들의 열성적인 참여는 토월회가 보다 정교한 무대장치를 구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 결과 토월회의 무대장치는 일본 신극운동의 본산이었던 ‘축지소극장’의 수준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라 평가되기도 했다. 토월회가 여배우를 섭외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던 것도 ‘무대 사실주의’ 확립을 위한 노력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촉박한 연습 기간을 고려할 때, 토월회가 선정한 네 편의 작품에서 여성 등장인물을 모두 여배우로 채우기 위해서는 복수의 여배우가 필요했다. 이서구와 박승희는 교대로 귀국하여 여배우를 찾아 헤맸는데, 우여곡절 끝에 진명여고 학생이었던 이정수와 이혼 후 가정에 머물던 이혜경을 섭외할 수 있었다. 다만, 배우 경험이 전혀 없었던 이들만으로 공연을 진행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했기에, 신극좌와 민중극단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던 이월화 가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된다. 동경에서 연극을 연구하던 어린이들의 모임이 곧 토월회이올시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모국 한 끝에 극에 대한 새 빛을 찾으라고 그 첫소리를 금 29일부터 조선극장에서 외치려 한 것이올시다. 각본은 구미의 문호의 작품을 중심으로 차림은 전부 동경에서 가져다가 오직 열성 하나로만 모든 것과 싸워 앞길을 개척하려 하는 것이올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뜻과 같지 못한 우리의 일이오라, 뜻밖에 여배우에 대한 문제가 돌발하여 저희는 도저희 저희의 양심을 거스르지 못하겠으므로 다시 7월 4일로 공연날을 두 번 연기하였사오니 깊이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3 』, 223쪽. “토월회 공연 연기”, 《동아일보》, 1923. 6. 29. 위의 인용문은 예정된 창립 공연을 앞두고 토월회가 신문에 게재했던 광고문이다. 토월회는 구미 문호의 작품을 각본으로 선정했음은 물론, 무대 배경을 전부 동경에서 가져다 만들었음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변별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광고문의 실제 목적은 공연 일정을 미루게 된 사정을 밝히면서 관객들의 양해를 구하는 데 있었다. “여배우에 대한 문제”가 생기면서 부득불 공연일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월화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박승희의 회고에 따르면 문제를 일으킨 여배우는 이월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2 여배우 중 가장 뒤늦게 합류했던 이월화는 공연을 얼마 남기지 않은 때에 어머니가 연극 출연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갑자기 출연을 고사한 바 있다. 이월화의 출연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토월회는 공연일정을 연기하기로 하는데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토월회는 이미 창립 공연 일정과 장소를 한 차례 변경한 전력도 있었다. *주3 그렇지만 토월회는 “도저히 저희의 양심을 거사리지 못하겟슴으로” 연기를 결정했다고 밝히면서 양해를 구하고자 했는데, 이것은 그만큼 토월회가 여배우의 존재를 중시했다는 점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김기진을 비롯한 동인들은 직접 이월화의 집에 찾아가 그의 어머니를 설득한 끝에 겨우 출연을 성사시킬 수 있었으며, 다행히 창립공연은 애초의 캐스팅대로 진행되었다. 안타깝게도 토월회의 창립공연은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큰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박승희가 회고했듯, 토월회 공연은 “은그릇에 담아 놓은 설렁탕”과 같다는 평가를 받는 데 그쳤다. 훌륭한 무대장치와는 대조적으로 아마추어의 티를 벗지 못한 연기가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토월회 동인들의 애초 계획은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한차례 공연만을 올리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명예회복을 위해 곧바로 2회 공연 준비에 돌입한다. 동경대진재 이후 급격히 흉흉해진 분위기 때문에 그들이 쉽게 일본에 돌아갈 수 없었던 상황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토월회가 절치부심하여 준비한 2회 공연은 연일 만원관객을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둔다. 창립공연의 레퍼토리가 네 편의 단막극으로만 구성되어 단조로웠고, 대중들에게 난해한 내용일 수 있음을 파악한 그들은 보다 대중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자 했으며, <알트 하이델베르히>와 <부활>을 새로운 레퍼토리로 선정했다. 그리고 두 작품의 주연을 맡았던 이월화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사실 이월화를 캐스팅하는 과정에는 약간의 마찰도 있었다. 이미 기존의 신파극단들도 제한적이나마 여배우를 기용하기 시작했으니 여배우를 섭외하기 위해서는 기성극단에 문의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토월회 동인들은 “신파에 물들지 않은 무경험자”를 찾고자 했기에, 신파극단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던 배우들을 선호하지 않았고, 당연히 이월화의 영입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월화는 토월회에 합류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판단의 배후에는 다름 아닌 영화의 영향력이 가로놓여 있다. 이화진이 지적한 것처럼 당대의 관객들은 같은 시기, 심지어 같은 극장에서 서양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를 만날 수 있었다. *주4 카메라의 기계적 재현성에 기반한 영화가 이미지의 리얼리즘을 태생적으로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여형배우는 영화에서 쉽게 용인될 수 없는 관습이었다. 흥미롭게도 이월화는 조선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였던 < 월하의 맹서 >(윤백남, 1923)의 주연배우이기도 했다. 토월회 공연이 있기 불과 몇 달 전에 공개된 이 영화를 통해 이월화는 실제 여성에 의해 재현된 여성성의 표본을 식민지 조선의 관객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던 바 있다. 어쩌면 토월회가 이월화를 통해 획득하고 싶었던 것은 여전히 신파극의 태를 벗지 못한 그의 무대 경험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보증된 이미지의 사실성 그 자체 였다고 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분명 토월회의 공연은 여배우의 기용을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보편적 상식으로 격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점차 영화 관람에 친숙해진 당대의 관객에게 배역과 배우 성별의 불일치가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토월회가 그러한 흐름을 민감하게 읽어내고자 했다는 점이다. 식민지기 극장은 연극과 영화가 공존했던 공간이었고, 이곳에서 형성된 관객들의 취향은 생산자들의 기획과 긴밀한 피드백 고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은 극장 속에서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 ‘자기만의 방’을 마련해 나간다. < 지나가의 비밀, 일명 흑진주 >(유장안, 1928) 중 이월화(우)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 주1. 김기진, 김복진 형제의 아버지는 충북 영동의 군수였으며, 이서구는 안양 부호의 자제였다고 알려져 있다. (박승희, 「토월회 이야기」, 『사상계』, 1963. 5.) 주2. 박승희, 「토월회 이야기」, 『사상계』, 1963. 5. 주3. 토월회의 당초 계획은 “륙월 하순에 시내 수은동 단성사”에서 공연하려는 것이었으나, 공연 직전에 “예뎡을 번경하야 오는 이십구일부터 시내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닷세 동안을 흥행”하는 것으로 변경을 고지한 바 있다. (“토월회 공연 연기-이십구일부터 개시”, 《동아일보》, 1923. 6. 28.) 주4. 이화진, 「여배우의 등장 - 근대 극장의 신체와 섹슈얼리티」, 『여성문학연구』 28, 한국여성문학학회, 2012.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1931년 《동아일보》(4.14.)와 《조선일보》(4.15.)에 조선영화제작연맹의 제작발표회 기사가 실렸다. 당해 4월 8일에 일어난 홍옥임과 김용주의 철도동반자살 사건을 기반으로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소식이었다. 기사에는 <명일의 여성>이라는 제목뿐 아니라 출연과 제작진도 함께 발표되었다. 감독 및 각본 홍개명 , 각색 김서정, 촬영 한창섭 , 진행 홍찬 , 출연 나웅 · 윤봉춘 · 김연실 · 임운학 등이 제작 동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두 젊은 여성이 자살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지 이제 막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음에도 한두 달 내에 제작에 착수할 것이며 야심 차게 상해로 수출할 것이라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관련된 후속 보도는 이어지지 않았다. 홍옥임, 김용주 철도동반자살 사건 관련 《조선일보》 기사(1931.4.10.) 당시 식민지 조선의 영화계를 보면 1923년 윤백남 의 < 월하의 맹서 >가 개봉된 이후 본격화된 조선의 영화제작이 점차 그 수를 늘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특히 1926년 < 아리랑 >(나운규, 1926)의 전국적인 흥행으로 1927년에는 무려 14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MGM이나 파라마운트와의 특약 계약을 통해 영화를 수입하는 회사도 세워져 외화배급이 원활해졌다. 영화와 관련된 담론 역시 활발해져 농민과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을 구현한 영화를 옹호한 카프와 작품성이나 상업성에 주안을 둔 그룹이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무식한 광견(狂犬)’, ‘무지한 필님충(film蟲))’으로 날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이르면 세계 영화계는 발성영화의 시대에 진입하고 극장은 신기술을 도입할 새로운 자본과 혁신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명일의 여성> 제작발표 기사가 났던 1931년에는 조선 총독부의 검열이 체계화되고 경제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1 』) 개봉되고 제작된 조선영화는 그 수가 대폭 줄었다. 영화창작을 향한 열망은 여전해서 <명일의 여성>처럼 제작발표를 했지만 실제로는 아예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완성되지 못한 영화 목록이 꽤 길었다. 한국 퀴어 영화의 역사 쓰기를 고려할 때 <명일의 여성>은 흥미로운 위치에 있다. 이 영화는 아마도 제작조차 들어가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만들어진 적 없는 ‘허구의 영화’다. 하지만 제작되었다면 첫 번째 레즈비언 영화로 불렸을 수도 있는 영화다. <명일의 여성>은 그런 면에서 허구의 기원, 기원 없는 기원이다. 그러나 이 허구야말로 늘 퀴어 역사와 존재에게는 실재의 또 다른 말이 아닌가? 존재하면서도 부정당하거나 가짜와 위장으로 의심받는 섹슈얼리티, 정체성 그리고 수행. 심지어 스크린 위에 가시화될 때도 마치 없는 것이나 오점처럼 지워지는 역사들. <명일의 여성>은 시간을 특정할 수 없다. 백퍼센트 제작이 안 되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영화, 그래서 영원히 제작 ‘중’인 영화. 과거의 사건이지만 지속적으로 현재일 수밖에 없으며 어딘가에서 비틀어지고 왜곡된(pervert) 씨를 뿌리는 시간 속에 있는 영화. 어제의 시간 속에 있으면서 오늘일 수밖에 없는 영화다. 과거라는 시간(1931년)에 단단히 묶여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현재와 미래로 열려 있을 수밖에 없는 기이한 시간의 모양을 갖는다(“시간의 구속Time Binds”이란 용어는 엘리자베스 프리먼[2010]의 저작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과거는 희뿌옇고 부실하고 오염되어 있으며, 현재와 미래는 부재 중이다. 어쩌면 우리는 <명일의 여성>에서 허구의 세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어디에도 없는 곳이자 결코 규정되지 않아 끊임없이 규정이 필요한)유토피아’를 조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허구’라는 방법론으로 퀴어의 역사를 쓴다면 어떤 역사를 쓸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먼저 ‘허구’는 그저 공상이 아니라 공통세계에 공존하는 틀을 만들 수 있는 도구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흥미로운 영화의 ‘허구’에 어떤 현실감, 수용가능성, 개연성을 불어넣어줄 수 있을까? 먼저 두 범주로 나눠 질문들을 던져 보자. 조건의 질문들과 상상의 질문들. - 조건의 질문들 : 당시 비극적인 자살사건이 일어난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어떻게 이렇게나 빠르게 동인을 모아 제작발표를 할 수 있었을까? 더불어 영화가 (아마도) 제작을 할 수 없거나 완료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젊은 여성의 동성애 소재는 신선함, 대중성, 이국성을 갖는 매혹적인 영화 소재였을 것이다. 당시 엘리트들에게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들 간의 동성애는 이질적이고 새롭지만 거부감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신문칼럼이나 잡지는 여성 동성애 ‘유행’을 자세히 소개하면서도(1930년대 잡지 <별건곤>의 ‘여류명사’들의 동성연애기 투고기사) 제대로 된 남성을 만나기 이전의 소녀들의 일시적 실험이나 정사 없는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가부장제 이성애에 위협을 주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남성 엘리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항문성교를 한다고 알려진 남성 동성애자들이었다(《동아일보》 1932.3.17.). 더군다나 이 영화는 당시 젊은 세대의 연애관과 결혼관을 비판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볼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반드시 두 여성의 시점에서 서사가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홍옥임(21세)은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홍석후의 딸이자 음악가 홍난파 의 조카였으며, 김용주(17세)는 종로 덕흥서림 사장 김동진의 딸이자 비행사 심종익의 아내였다. 스스로도 엘리트 교육을 받은 신여성인 동시에 조선 최고 엘리트 집안이었기 때문에 세간의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도 연인관계에 있던 노동계급의 젊은 여성들의 철도동반자살 사건이 있었지만 해당 사건은 워낙 유명한 집안이었던 만큼 더 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박차민정의 『조선의 퀴어』(2018) 참고). 또한 상해 수출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이 주제가 그만큼 해외에서도 수용될 만한 소재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소재의 대중적 매력만으로 영화를 완성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자본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동인들 간에 이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복의 처녀Mädchen in Uniform>(1931) 중 한편 독일의 유명 레즈비언 영화 <제복의 처녀Mädchen in Uniform>(1931)가 같은 해 독일에서 개봉되었다는 것은 우연이지만 조선영화가 세계적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성작가인 크리스타 윈슬로가 쓴 극본 <어제와 오늘>을 여성 감독 레티오네 사강이 연출한 <제복의 처녀>는 1933년 3월에 조선에도 개봉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변사 박창원의 녹음으로 1936년 12월 영화해설 음반이 발매되었으며, 일본에서는 1934년 《키네마 준보》에서 최고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언론은 영화의 인기에 여학교 학생들을 ‘제복의 처녀’라 부르기도 했다. - 상상의 질문들 : 실제로 이 영화가 모종의 이유로 제목을 바꿔 해당 영화인지 알 수 없게 제작되었는데 개봉을 할 수 없어 프린트의 일부가 상해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 당시 <명일의 여성>의 출연 및 제작 동인(이름을 올리지 않은 이들을 포함)에 퀴어는 없었을까? 퀴어적 관계나 정체성을 가진 제작진이 포함되었다는 상상 속에서 <명일의 여성>을 갖고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영화가 실종되었거나 완료되지 못한 이유를 추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의 1930년대 버전이 될 것이다. 조선의 영화현실 뿐 아니라 당시 젊은 여성 동성애자들에 대한 성적 억압과 다른 여러 불만들(가부장제, 교육, 계급, 식민지적 억압 등)을 교차해 서사화할 수 있다. : 조선영화가 1930년대 이미 여성 동성애 소재로 트랜스내셔널하게 연결되었던 역사와 현재 식민지 조선 혹은 경성이라는 시공간이 종종 퀴어화 되는 것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 청연 >(윤종찬, 2005), <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이해영, 2014), < 아가씨 >(박찬욱, 2016), < 유령 >(이해영, 2022). <명일의 여성>처럼 시간의 구속을 가진 퀴어화된 영화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나는 이 모든 질문에 답할 수도, 답하려는 욕망도 없다. 단지, 시간의 구속에 얽혀 실종되고 왜곡되고 흐릿한 퀴어 영화들의 파편 더미들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경성 퀴어로 시작해보고자 한다. (계속)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해영, 2014) 중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