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 핑크
- 감독
- 이건설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박소현, 박기량, 박일, 윤소라, 정희선, 홍승옥, 정승현, 최방랑, 김태훈, 이성, 김순선, 최상기, 이도련, 이종오, 김정신, 이윤연, 김혜정
하길종 의 문제적 데뷔작 < 화분 >(1972)을 나는 1990년대 후반에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근 20여 년 만인 최근에 다시 보았다. 아주 가끔씩은 생각나기도 했고 접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그러기 어려운 작품도 아니었는데 재회하기까지는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한 가지 거리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 테오레마 >와 비교되며 지적됐던 표절 논쟁 때문은 아니었다. 내게는 다른 거리낌이 있었고 그게 <화분>을 다시 보지 않게 했다. 내게 < 화분 >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강렬한 상징의 저택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예컨대 영화의 배경이 되는‘푸른 집’은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하의 청와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듣기도 했다. 그렇다면 <화분>은 당대 한국사회에 관한 상징인가. 감독 하길종 자신도 영화를 개봉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대담 자리에서“어디까지나 저로서는 <화분>을 대표작으로 생각”한다며, “금권만능주의의 몰락을 테마로 해서 미래의 한국을 진단”하고,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만들어 지성적인 팬들의 심판을 받고자 했었던 거지요”라고 말한다(「하길종 전집 3」, 262~263p). 그런데 20여 년 만에 < 화분 >을 다시 보며 나의 기억에도 감독의 말에도 의문을 갖게 됐다. 이 영화에는 상징이 없고 메시지가 없다. 그것들의 완성을 목표로 한 감독 자신의 의지와 의중이 있었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미완의 상태거나 실패의 상태다. 상징은 빗나가면 안 되고 메시지는 혼동되면 안 될 것인데 <화분>은 비약의 내러티브, 과잉된 제스처, 모호한 관계 등을 거치며 오히려 오발과 혼선의 흔적들로 가득해진다. 그 명료하지 않은 웅성거림이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에 해당한다고 말해야 더 적절해 보인다. 푸른 집의 주인 현마( 남궁원 ), 그 집에 살고 있는 현마의“첩”애란( 최지희 ), 애란의 동생 미란( 윤소라 ), 집안의 가정부 옥녀( 여운계 ) 그리고 현마가 데려온 그의 부하직원 단주( 하명중 )는 계층과 욕정과 질투와 비하와 차별과 억압과 폭력 등의 문제로 서로 모호하게 얽힌다. 단주가 미란과 사랑에 빠진다, 단주와 현마는 동성애적 관계였다, 따라서 현마가 단주와 미란의 관계를 질투하고 분노하게 된다, 등으로 이야기를 요약해볼 순 있지만 정작 주조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과 감정의 결 등은 불명료하거나 불투명한 편이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웅성거림의 영화 < 화분 >이 당대 우리 사회를 기민하게 포착해 낸 것으로 자타 공인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요인은 여럿일 것이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느낌을 앞세워 한 가지 정도만 말해 볼 수 있겠다. 나는 그동안 < 화분 >이 푸른 집을 주 무대로 하여 모든 장면을 촬영한 영화라고 기억해왔는데 그 기억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집안에서의 장면들이 전부이기는커녕 적어도 절반에 가까운 장면들이 푸른 집 바깥에서 형성된다. 단주와 미란은 아주 괴상한 서사적 동기에 힘입어 푸른 집을 벗어나게 되는데 일단 벗어나자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는다. 영화는 핍진성의 희생을 감행하면서까지 집 바깥에서의 둘의 시간을 연장하려 한다. 미란은 기어이 단주와 하룻밤을 보내고서야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푸른 집을 벗어나 단주와 밀월여행에 오른다. 신중현 의 음악과 유영길 의 촬영이 더해져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해안가 장면. 뒤쫓아 온 현마에게 붙들려 단주와 미란은 푸른 집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에야 푸른 집은 마침내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데 이때 이 집은 평범한 집이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감옥이고 이물스러운 정사와 비명이 횡행하는 유령 들린 묘지가 된다. 인물들은 어느 찰나마다 '제발 절 이 집에서 내보내 줘요'라고 외치거나 “왜 이 집을 안 떠나는 거지?”라고 질문받게 된다. 끌려 들어온 미란은 모든 걸 포기하고 현마의 지배 아래 다시 놓인다. 끌려 들어와 폭행당하고 감금된 단주는 마치 억울한 유령처럼 혹은 이 절망의 나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고 자인해 버리는 어느 순교자처럼 이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내 배회한다. < 화분 >에서는 두 개의 힘이 무작정 겨룬다. 한쪽은 무작정 벗어나려는 힘이고 또 한쪽은 무작정 붙잡아두는 혹은 끌고 들어오는 힘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영화 속 젊은이들인 단주와 미란을 중심으로 벗어나려는 힘이 우세하다. 때문에 영화는 그 힘의 강세를 위해 얼마간의 핍진성이 훼손되는 것도 감수한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을 넘어설 즈음 현마를 중심으로 끌고 들어오는 힘이 강력하게 발휘되고 그 힘이 강해지는 동시에 푸른 집은 더 기괴한 아수라장이 된다. 그렇지만 막강한 독재자처럼 보인 현마 조차도 이 힘에 관한 한 부차적 인물이다. 힘의 소용돌이의 중심부는 현마라는 인물이 아니라 푸른 집이라는 공간이다. 예컨대 종반부에 이르면 이 집의 주인으로 기승을 부렸던 현마 자신이 빚쟁이들을 피해 저 혼자 푸른 집을 벗어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 화분 >에서 푸른 집은 상징의 공간이 아니라 장력(張力)의 공간이다. 이곳을 독재자 박정희의 거처라거나 혹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명명할 지표를 우린 영화 속에서 끝내 찾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화분>이 당대 한국사회에 팽배했을 법한 한 가지 불운한 정서는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화분>이 당대 우리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영화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면 누군가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대개는 그럴 수 없었던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화분>에서는 힘의 충돌로 발현된다. 이 벗어남과 잡아둠이라는 힘의 충돌과 그 충돌로부터 발생하고 드러나는 소음과 비명과 불쾌감들이 다시 현실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분>은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가 아니라,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로 착각될 수밖에 없었던, 낯선 불온과 부조리의 영화다. 미국에 머무르며 오랜 시간 동안 바깥의 사람이었다가 안으로 들어온 하길종 에게서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얼핏 역설적이어서 더 그럴법하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단주의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만의 모든 것들을 밀어 버리는 부르도저가 되고 싶지 않을까” 젊은 하길종이 < 화분 >으로 성취하고 싶었던 일면이었을 것이다. 20년 만의 재회로 나는 이 영화의 일면을 조금은 다시 느끼게 되었다.
하길종의 문제적 데뷔작 <화분>(1972)을 나는 1990년대 후반에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근 20여 년 만인 최근에 다시 보았다. 아주 가끔씩은 생각나기도 했고 접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그러기 어려운 작품도 아니었는데 재회하기까지는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한 가지 거리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테오레마>와 비교되며 지적됐던 표절 논쟁 때문은 아니었다. 내게는 다른 거리낌이 있었고 그게 <화분>을 다시 보지 않게 했다. 내게 <화분>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강렬한 상징의 저택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예컨대 영화의 배경이 되는‘푸른 집’은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하의 청와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듣기도 했다. 그렇다면 <화분>은 당대 한국사회에 관한 상징인가. 감독 하길종 자신도 영화를 개봉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대담 자리에서“어디까지나 저로서는 <화분>을 대표작으로 생각”한다며, “금권만능주의의 몰락을 테마로 해서 미래의 한국을 진단”하고,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만들어 지성적인 팬들의 심판을 받고자 했었던 거지요”라고 말한다(「하길종 전집 3」, 262~263p). 그런데 20여 년 만에 <화분>을 다시 보며 나의 기억에도 감독의 말에도 의문을 갖게 됐다. 이 영화에는 상징이 없고 메시지가 없다. 그것들의 완성을 목표로 한 감독 자신의 의지와 의중이 있었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미완의 상태거나 실패의 상태다. 상징은 빗나가면 안 되고 메시지는 혼동되면 안 될 것인데 <화분>은 비약의 내러티브, 과잉된 제스처, 모호한 관계 등을 거치며 오히려 오발과 혼선의 흔적들로 가득해진다. 그 명료하지 않은 웅성거림이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에 해당한다고 말해야 더 적절해 보인다. 푸른 집의 주인 현마(남궁원), 그 집에 살고 있는 현마의“첩”애란(최지희), 애란의 동생 미란(윤소라), 집안의 가정부 옥녀(여운계) 그리고 현마가 데려온 그의 부하직원 단주(하명중)는 계층과 욕정과 질투와 비하와 차별과 억압과 폭력 등의 문제로 서로 모호하게 얽힌다. 단주가 미란과 사랑에 빠진다, 단주와 현마는 동성애적 관계였다, 따라서 현마가 단주와 미란의 관계를 질투하고 분노하게 된다, 등으로 이야기를 요약해볼 순 있지만 정작 주조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과 감정의 결 등은 불명료하거나 불투명한 편이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웅성거림의 영화 <화분>이 당대 우리 사회를 기민하게 포착해 낸 것으로 자타 공인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요인은 여럿일 것이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느낌을 앞세워 한 가지 정도만 말해 볼 수 있겠다. 나는 그동안 <화분>이 푸른 집을 주 무대로 하여 모든 장면을 촬영한 영화라고 기억해왔는데 그 기억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집안에서의 장면들이 전부이기는커녕 적어도 절반에 가까운 장면들이 푸른 집 바깥에서 형성된다. 단주와 미란은 아주 괴상한 서사적 동기에 힘입어 푸른 집을 벗어나게 되는데 일단 벗어나자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는다. 영화는 핍진성의 희생을 감행하면서까지 집 바깥에서의 둘의 시간을 연장하려 한다. 미란은 기어이 단주와 하룻밤을 보내고서야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푸른 집을 벗어나 단주와 밀월여행에 오른다. 신중현의 음악과 유영길의 촬영이 더해져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해안가 장면. 뒤쫓아 온 현마에게 붙들려 단주와 미란은 푸른 집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에야 푸른 집은 마침내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데 이때 이 집은 평범한 집이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감옥이고 이물스러운 정사와 비명이 횡행하는 유령 들린 묘지가 된다. 인물들은 어느 찰나마다 "제발 절 이 집에서 내보내 줘요"라고 외치거나 “왜 이 집을 안 떠나는 거지?”라고 질문받게 된다. 끌려 들어온 미란은 모든 걸 포기하고 현마의 지배 아래 다시 놓인다. 끌려 들어와 폭행당하고 감금된 단주는 마치 억울한 유령처럼 혹은 이 절망의 나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고 자인해 버리는 어느 순교자처럼 이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내 배회한다. <화분>에서는 두 개의 힘이 무작정 겨룬다. 한쪽은 무작정 벗어나려는 힘이고 또 한쪽은 무작정 붙잡아두는 혹은 끌고 들어오는 힘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영화 속 젊은이들인 단주와 미란을 중심으로 벗어나려는 힘이 우세하다. 때문에 영화는 그 힘의 강세를 위해 얼마간의 핍진성이 훼손되는 것도 감수한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을 넘어설 즈음 현마를 중심으로 끌고 들어오는 힘이 강력하게 발휘되고 그 힘이 강해지는 동시에 푸른 집은 더 기괴한 아수라장이 된다. 그렇지만 막강한 독재자처럼 보인 현마 조차도 이 힘에 관한 한 부차적 인물이다. 힘의 소용돌이의 중심부는 현마라는 인물이 아니라 푸른 집이라는 공간이다. 예컨대 종반부에 이르면 이 집의 주인으로 기승을 부렸던 현마 자신이 빚쟁이들을 피해 저 혼자 푸른 집을 벗어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화분>에서 푸른 집은 상징의 공간이 아니라 장력(張力)의 공간이다. 이곳을 독재자 박정희의 거처라거나 혹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명명할 지표를 우린 영화 속에서 끝내 찾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화분>이 당대 한국사회에 팽배했을 법한 한 가지 불운한 정서는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화분>이 당대 우리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영화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면 누군가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대개는 그럴 수 없었던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화분>에서는 힘의 충돌로 발현된다. 이 벗어남과 잡아둠이라는 힘의 충돌과 그 충돌로부터 발생하고 드러나는 소음과 비명과 불쾌감들이 다시 현실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분>은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가 아니라,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로 착각될 수밖에 없었던, 낯선 불온과 부조리의 영화다. 미국에 머무르며 오랜 시간 동안 바깥의 사람이었다가 안으로 들어온 하길종에게서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얼핏 역설적이어서 더 그럴법하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단주의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만의 모든 것들을 밀어 버리는 부르도저가 되고 싶지 않을까” 젊은 하길종이 <화분>으로 성취하고 싶었던 일면이었을 것이다. 20년 만의 재회로 나는 이 영화의 일면을 조금은 다시 느끼게 되었다.
소실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는 최대한 이들의 원래 모습 그대로를 상상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김기덕 의 1969년 작 < 흑장미성의 미녀 >에 대한 글을 쓸 때는 그게 잘 안 된다. 김기덕 자신도 그게 쉽지 않을 것이다. 강조원이 쓴 이 영화의 오리지널 각본은 척 봐도 해머 호러 영화나 로저 코먼의 에드거 앨런 포 영화에 나올 법한 장엄한 유럽의 대저택이나 고성을 요구한다. 제목부터 보라. <흑장미성의 미녀>! 빰, 빰! 빠! 5, 60년대 해머 영화의 컬러풀한 세트가 떠오르지 않는가? 오프닝 크레디트에 깔리는 음악으로는 이런 걸 상상하시면 되겠다. James Bernard - Vampire Rhapsody 아쉬워라. 이 영화엔 흑장미성이 안 나온다. 대신 나오는 건 흑장미관이라는 시골집이다. 야심 차게 제목에 성이라고 박아놨는데 조국의 현실이 못 따라준다.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가지고 있는 걸 모아 대신 쓸 수밖에. 물론 피터 쿠싱이나 잉그리드 피트 대신 김희라 와 남정임 , 윤소라 를 캐스팅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 기영욱과 한지숙이라는 20대 청춘이 주인공이다. 영욱은 신문사 사회부 ‘민완’ 기자이고 지숙의 남자친구이다. 척 봐도 지숙은 영욱보다 몇 단계 위인 부잣집 딸이다. (이런 커플링에 대해서는 저번 연재분을 참고하시길.) 지숙은 다음과 같은 애절한 편지를 받고 여학교 때 단짝친구였던 민혜련을 방문하려는 중이다. “지숙아 지숙이밖에는 아무도 호소할 데가 없기에 이 편지를 써! 지숙이 나를 구해 줘! 나는 지금 어떤 생명의 위협 앞에 벌벌 떨고 있어! 자세한 얘기는 밝힐 수 없지만 너무나 무서운 사실이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어. 지숙이 나를 도와 줘! 아 불쌍한 혜련이를 구해 줘! 아 무서워! 흑장미관 혜련이로부터” 옛 단짝친구에게 이런 편지가 왔다면 귀찮은 남자친구 없이 혼자 가야 하는 건데 말이다. 하지만 당시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리가 없다. 당연히 영욱은 지숙을 따라나선다. 지문은 흑장미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두 사람의 시야에 석양의 역광을 받아 검게 우뚝 솟는 삼 층 건물. 지붕은 화재로 내려앉고 기둥만이 솟아 있다. 어떤 귀기마저 감돈다.” 김기덕 과 그의 미술팀이 작가의 야심을 얼마나 만족시켰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해머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하련다. 계속 이어지는 장면도 마찬가지. ‘어둠 속에 백발 흑의의 노인이 서 있지 않은가. 마치 중세기 서양의 고성에 사는 사람과 같은 풍모다’같은 지문을 보라. 감독을 대신해서 작가에게 괜히 미안해진다. 지만이란 이름의 그 노인의 안내를 받아 흑장미관으로 들어간 두 주인공은 ‘하얀 까운에 긴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돌아서 있는 여인’이며 ‘창백한 얼굴에 가끔 경련이 스치고 우수 깃든 눈에 어떤 슬픔이 잠겨져 있는’ 민혜련을 만난다. 편집자가 밑에 윤소라의 사진이라도 한 장 박아주었으면 좋겠다. 잉그리드 피트 이름을 들먹이며 투덜거리긴 했지만 이국적이고 선이 굵은 미인이었던 윤소라는 지숙 역의 동글동글 남정임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임팩트가 있었을 것이다. <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의 윤소라 혜련의 사연은 무엇일까. 집에 귀신이 나온다는 것이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나타나는 머리를 푼 여인. 이 정도면 같은 학교를 다닌 단짝 친구가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저택엔 막 교도소에서 나왔다는 혜련의 먼 친척인 달수가 산다. 평판 나쁜 남자랑 같이 사는 외딴 집에 단짝 친구를 불러들인다? 한밤중. 지숙과 영욱이 ‘드라큐라 엄마 같은 심부름하는 할멈’, 하얀 유령처럼 생긴 빨래, 사람 다리처럼 생긴 나무떼기의 습격을 받으며 저택을 수색하는 동안, 고고하게 혼자 피아노를 치고 있던 혜련은 귀신과 마주친다. 바람에 꺼진 촛불을 다시 켜는 동안 뒤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피아노가 혼자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비명 소리를 듣고 두 주인공이 달려왔을 때는 피아노는 멀쩡하다. 아침에 수상쩍은 남자 달수는 의외로 여기서 정보전달자 역할을 한다. 달수 어머니가 이 저택에 살았을 때 억울한 일을 당해 독약을 먹고 죽은 여자의 유령이 나왔고 그 유령을 본 혜련의 할머니와 어머니 모두 미쳐 죽었고... 그날 밤은 더 파란만장하다. 드디어 같이 자다가 없어진 혜련을 찾아 나섰던 지숙은 영욱과 함께 혜련이 말한 산발한 여자 귀신을 목격한다. 귀신을 쫓아가던 둘은 기절한 혜련을 안고 나오는 노인과 마주친다. 잠시 뒤 검은 복면을 쓰고 지하실을 털러 내려간 달수가 커다란 검은 상자를 낑낑거리면서 여는데, 아까 본 여자 귀신이 그 안에서 튀어나와 달수를 덮친다. 달수 퇴장. 하지만 그리워하지 마시길. 달수가 남긴 빈자리가 그렇게 아쉬웠던지 작가는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곧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킨다. 혜련의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데려와 키웠다는 벙어리 꼽추이다. 포스터 다시 밤.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여자 유령 때문에 지숙과 혜련이 기절하고 비명 지르고 달아나는 동안, 일 때문에 돌아간다 거짓말을 하고 혼자 떠났다가 몰래 흑장미관으로 돌아온 영욱은 지만 노인이 지하실에서 달수의 시체를 꺼내 땅에 묻는 걸 발견한다. 지만 노인은 혜련을 놀라게 해서 죽이면 전 재산이 자기 것이 될 거라고 믿고 귀신 흉내를 냈으며, 그 사실을 눈치챈 달수도 죽였다고 자백한다. 지숙은 아무래도 그 귀신은 여자 같았다며 영욱의 설명을 믿지 못하지만 영화가 사라져버렸으니 정말 그런지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이 점점 지겨워진다. 이야기가 재미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반대로 필름이 발견되어 영상자료원에서 8월쯤에 호러 특집으로 튼다면 관객들 반응이 썩 좋을 거 같다. 호러 효과는 별 게 아니겠지만 뻔뻔스러운 유원지 스타일의 재미는 상당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직접 보면 재미가 있을 것 같다고 해도 귀신 나타났다, 여자들 비명을 지른다, 귀신 사라진다...를 끝도 없이 반복하다 보면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지치기 마련이다. 이런 이야기는 글로 요약하는 것보다 이 유튜브 클립을 소개하는 것이 더 이해가 빠르다. Scooby Doo Openings 내가 불평하는 동안 각본가는 서양 공포 영화와 추리 소설을 보고 읽으면서 품었던 마지막 판타지를 현실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아까 달수가 끙끙대며 열었던 상자를 기억하는가? 그 밑에 비밀통로가 있었다. 수색하러 들어갔던 지숙과 영욱은 그만 꼽추가 입구를 막아서 갇히고 마는데, 다행히도 다른 출구가 있어서 빠져나온다. 알고 봤더니 그 꼽추는 꼽추도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밤이다. 이번엔 짧게 끝난다. 영욱의 방에 꼽추가 칼을 들고 들어온다. 기다리고 있던 영욱이 반격한다. 혜련의 방에는 귀신이 칼을 들고 들어온다. 지숙을 찌르려는 귀신을 영욱이 막는다. 귀신은 달아나다가 떨어져 죽는다. 가면을 벗겨보니 혜련이다. 그러고 보니 혜련과 귀신이 같은 화면에 나왔던 적이 없긴 했다. 이 줄거리 요약을 읽은 독자들은 몰랐겠지만. 영욱은 혜련이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화재도 혜련이 친척들을 내쫓기 위해 낸 것이고, 꼽추는 계속 혜련을 돕고 있었던 것이고, 귀신소동도 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며 녹음기에서부터 피아노 줄에 이르는 온갖 장치들을 동원해 설명하는데, 그런다고 이 이야기가 설명이 될까? 성도 안 나오면서 < 흑장미성의 미녀 >란 제목을 씩씩하게 달고 나온 영화에게서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정신병을 앓던 단짝 친구가 자기를 죽이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막 알게 된 여자가 “노 노 천만에 이제 모험하군 담을 쌓기로 했어요. 그저 겁많은 주부가 될래요” 따위의 대사나 읊으면서 남자친구에게 까르르거리는 걸 보면 이 여자, 신경이 좀 이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