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폭탄
- 감독
- 김성철, 윤금미, 이성휘, 이준우, 허정은
- 제작년도
- 2006
최근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를 중심으로 비극영화(非劇映畫) 연구가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데에는 해방 후의 문화공보선전에 관한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역시 구술사 프로젝트와 수집⋅발굴 활동을 통해 꾸준히 비극영화(非劇映畫)에 관한 연구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발간된 구술 편집본 『한국영화사 구술총서』 시리즈를 비롯해 2008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와 『한국영화사 구출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그리고 험프리 렌지(Humphrey W. Leynse)의 문화영화 컬렉션과 시어도어 R. 코넌트(Theodore Richards Conant)의 문화영화 컬렉션과 수집자료 해제 『이방인이 기록한 전후 한국, 영화: 시어도어 코넌트 컬렉션』 등이 소위 비극영화에 해당하는 다양한 영화인들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그 중 2006년 구술을 진행한 양종해(梁宗海, 1929~2009)는 문화영화 감독으로는 첫 번째 구술자로 선정되어 이후 문화영화 구술을 설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60년 <발전은 협력으로>로 아시아영화제 비극영화 부문에서 한국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수상하며 1950~1960년대 국립영화제작소의 대표적인 문화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1971년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한 후에는 서울문화프로모션을 설립해 다수의 문화영화와 광고영화를 제작했다. 양종해 감독의 구술이 문화영화 조사⋅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데에는 그가 국립영화제작소를 대표하는 감독이기도 했지만 국립영화제작소의 설립과 문화영화의 제작 배경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의 구술을 바탕으로 국립영화제작소와 대한원조의 상관관계를 살펴 볼 것이다. [사진 1] 국립영화제작소 건물 공보실 영화과와 대한영화사 1955년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신태양사(新太陽社)에서 기자로 취직한 양종해는 대학 시절부터 관심 있던 영화 일을 하고 싶어 안양촬영소 설립을 기획 중이던 수도영화주식회사 사장 홍찬을 찾아간다. 당시 안양촬영소 설립을 통해 한국의 할리우드를 꿈꾸던 홍찬은 양종해에게 영어를 공부해서 다시 찾아올 것을 조언한다. 안양촬영소의 개소를 기다리며 서울대학교 어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하던 양종해는 1956년 우연히 공보실 공무원 채용 소식을 듣고 응시하여 합격한다. 공보실 영화과에 입사한 그에게 주어진 첫 업무는 영화과 업무의 통과의례나 마찬가지인 <대한뉴스>의 기획이었다. “테레비(television)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여서 “노상 청탁이 올” 정도로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대한뉴스>를 담당하게 된 그는 공보실 영화과 대한영화사에서 녹음과 현상, 편집 등의 후반작업을 “곁눈질로 배우며” 습득했다. "그 당시는 나이 들은 오래된 사람들이 있었지. 그 사람들한테 배운 거지, 곁눈질로. 기술진은, 그때 영화관데 영화과의 방계(傍系)회사가 대한영화사라는 방계회사가 있었어. 기술진 다 거기 속해 있는 거야. 왜 그러냐 하면 영화과의 공무원 직급 가지고는 이 사람들 월급을 줄 수 없어. 그리고 직급이 없잖아. 녹음 기사라는 직급이 없으니까 그렇게 대한영화사라는 방계회사를 만들어가지고 거기 다 있어가지고. …… 영화제작소 생기기 전에는 대한영화사에 다 있었어. 그 안에 있었어. 그 후에 영화제작소가 생겨나서 이건 없어진 거지." 1 양종해의 구술은 1950년대 중반 당시 공보실 영화과와 대한영화사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공보실 영화과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1월 설치되었는데 미군정청 공보국 영화과가 담당했던 행정업무를 이어받았다. 전쟁 전까지 공보실 영화과의 주요업무는 검열과 극장에 관한 정책수립과 이행이었다. 공보실 영화과는 한국전쟁 시기까지 부족한 기재와 인력으로 인해 사실상 영화제작을 통한 교육⋅선전을 수행했다기보다는 외국영화의 극장 상영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 업무를 진행했다고 볼 수 있다. 공보실 영화과가 영화제작을 중심에 둘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 한정된 영화 인력들이 공보실뿐만 아니라 미공보원, 미502부대, 육군, 해군, 공군 등에 설치된 영화과 또는 영화촬영대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중복⋅관련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때문에 1949년 영화과 산하에 영화제작 업무를 담당하는 대한영화사가 설치되었지만 이곳에서 실질적인 제작 업무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휴전 후인 1953년 이후로 볼 수 있다. 공보실 영화과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인 부산에서 월 2~3회 <대한뉴스>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환도 후에는 미공보원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이하 UNKRA) 영화과에 재직했던 이형표를 사무장으로 촉탁하고, 박희영, 유장산(촬영), 김흥만(편집), 이경순(녹음) 등의 영화 인력들을 영입해 대한영화사를 재정비했다. [사진 2] 이형표 감독 1950년대 중반 <춘향전>(이규환, 1955)과 <자유부인>(한형모, 1956)의 흥행 성공으로 한국영화 제작 열기가 일어나기 전까지 공보실 영화과는 극영화의 인력을 활용하여 문화영화를 기획⋅제작했다. 이 시기 극영화 인력과 결합해 제작한 대표적인 영화로는, 한형모⋅이성휘 촬영의 한국 홍보 기록영화 <한국의 시각(Korean Perspective)>(이형표, 1953~1954)과 전창근 감독, 한형모 촬영, 나애심 주연의 극영화 <불사조의 언덕>(1955) 등을 들 수 있다.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이 보다 더 활발해진 이후에도 대한영화사는 반관반민의 성격을 유지하며 공보실 영화과의 뉴스⋅문화영화 제작소의 역할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한국 극영화 후반 작업을 수행하는 포스트프로덕션의 역할을 했다. [사진 3] 영화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촬영 현장 대한원조로 이루어진 국립영화제작소 설치 1958년 공보실 영화과에 미국의 원조가 이루어지며 양종해는 본격적인 문화영화 감독으로서 활동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때는 영화과고. 나중에 어떻게 됐냐면 이 영화과가 그때 미국이 전쟁복구 원조를 많이 했다고. 미국 원조기관이 크게 있었어. 운크라(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국제연합한국재건단)도 있고, 거기에서 우리나라 영상 관계의 진흥을 위해서 120만 불이면 큰 돈이야.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도 그래 이제 문교부하고 우리 공보처하고 서로 가져갈라고 싸움이 붙은 거야. 결국 공보처가 이겨가지고 우리한테 온 거야. 그래 오니까 엄청난 큰 돈이거든. 그때 영화제작소를 짓고 거기서 뭣이 왔는고 하면 우리 교육 시켜주는 미국 시라큐스대학에서 왔어. 거기서 뭐 하여간 일곱 명이 왔어. 제일 책임자가 매카론(James W. McCaron). 그리고 또 연출하는 사람이 있었어, 메이브리(Mably)라고." 2 [사진 4] 국립영화제작소의 전경(출처: e영상역사관) 양종해의 이 간략한 설명에는 1950년대 후반 공보실 영화과에 이루어진 대한원조의 세부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대한원조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국립영화제작소의 설립과 전문 인력을 투입한 교육이 그것이다. 공보실 영화과는 대한원조의 카운터파트로서 원조정책 홍보와 교육계몽을 위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상영했다. "변화가 많았지. 우선 시설이 동시녹음 스튜디오가 생기고, 칼라 현상을 하고, 기자재가 많이 들어오고 사람들도 뭐 한 열댓 명이 더 늘어서 120명 정도 늘어나고 공채를 하고 그런 식으로 외적으로 변화가 많았고, 내적으론 영화는 우리나라 별로 예산이 많지 않아 가지고 많이 못 만드는데, 미 원조기관에서 몇 십 편 만들었잖아. 그래서 바빴고, 농촌 순회하는 것도 그때 생긴 거고." 3 양종해가 설명하는 것처럼 <대한뉴스> 제작을 제외하면 극영화의 포스트프로덕션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던 공보실 영화과는 원조를 통해 큰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원조는 공보실 영화과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산업이 변화하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대외원조의 결과로 영화 인력의 이동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영화에 대한 미국과 UN의 대한원조는 직접적인 재원 원조(UNKRA, ICA), 전문 인력의 파견과 연수(ICA, OEC), 시설과 기재 원조(UNKRA, 아시아재단) 등 여러 기관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원조의 직접적인 수혜대상이 공적기관인 공보실 영화과가 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경우에 따라서 공보실 영화과는 이러한 원조를 연결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1958년 “현대식 영화제작 시설이자 시청각에 의한 매스컴의 총아로써 영화가 지닌 사명을 다하는” 4 영화제작소의 완성을 앞두고 공보실과 OEC는 이 시설의 향후 운영과 활용을 위해 시라큐스 계약 교육진을 투입하고, 연출, 촬영, 미술 등 영화제작 각 분야의 신진인력을 공채 모집했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 USIS 출신의 인력을 일부 흡수했다. 이러한 과정은 1958년부터 급증한 한국영화 제작 편수로 알 수 있는 한국영화의 성장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 부분으로서, 이 과정 자체가 기존의 반관반민의 성격을 갖고 있던 한국영화가 상업 극영화와 비극영화로 분명하게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기존의 영화 인력들인 이형표(신필름), 이경순, 손인호(안양촬영소→한양녹음실)를 비롯한 상당수의 인력이 극영화로 이동하고, 그 자리에 신진 인력이 충원됨에 따라 공보실 영화과의 세대교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58년을 전후로 충원된 영화과의 인력은 USIS에서 이동한 배석인(연출), 정윤주, 백명제(이상 음악), 김형중(기술, 녹음‧현상), 김영권(아나운서, 행정), 정도빈(작화), 공채로 입사한 양종해, 김행오, 임학송, 한호기, 나한태, 강대철, 황왕수(이상 연출), 한규설(촬영), 박영일, 김인태, 봉상균(미술), 이은덕, 강신규, 이재웅(이상 녹음), 배동순(연출/행정) 등이다. [사진 5] 국립영화제작소의 인력들 시라큐스 계약의 영화교육 영화과의 기존 인력들은 교육영화보다는 뉴스영화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고, 문화영화 연출 경험이 있는 감독도 양종해, 배석인 등 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이 제작한 문화영화도 실상은 <대한뉴스>의 특별판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시라큐스 계약의 영화교육이 시작되자 제작 경험이 있는 양종해와 배석인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일 연출력을 인정받아 국내 교육용 영화뿐만 아시아영화제를 비롯한 해외 영화제 출품용 비극영화와 해외 배포용 한국 홍보영화를 도맡으며 국립영화제작소를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다. 어찌되었든 경력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신규 인력들과 함께 영화제작의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시라큐스 계약의 개요는 “시라큐스 인력들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규 교육에 주안점을 두고 글쓰기, 연출, 촬영, 편집 및 사운드 녹음 분야에 대해 매주 교육을 실시하고, 프로그램 목표에 부합한다면 영화 관련 행정 업무, 프로그래밍 등의 관련 업무에 관해서도 기술 지원을 제공하는 것” 5 이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2년에 걸친 교육과정을 ‘정규 교육’과 ‘현장 실무(on the job training) 교육’, 2단계로 나눠 계획을 세웠다. 작업보고서에는 “시나리오 작가-감독은 50%의 시간을 정규 교육에, 50%의 시간을 ‘현장 실무’ 교육에 할애” 6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실제로 감독 양종해는 오전에는 콘티 작성법을 비롯해 실무에 필요한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작업을 했다고 증언했다. 7 학교 수업처럼 진행된 이와 같은 정규 교육은 대략 1년 6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사진 6] 시라큐스의 인력들(출처: 이성철 기증 자료) [사진 7] 시라큐스와의 계약 서류 (콘티 작성법을) 교육받으면서 배운 거야, 이건. 이게 아주 좋아. 그러니까 첫째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거지. 이걸 벽에 탁 붙여 놓거든 매일 본다고. 봐야 돼. 누구 불러다 “너 이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이야. 이런 식으로 시나리오 하기 전에 이 기본 골격을 한눈에 볼 수 있어야 돼. 그래 안하면 그림 생각해야지, 효과 음악 생각해야지, 복잡하다고. 이건 예를 들어서 효과 무슨 효과다. 음악이 뭐다. 문화영화엔 하나 또 있어, 해설. 그러니까 해설이 있어야 되거든, 문화영화는. 이게 제일 좋은 것이 해설 있고, 음악 있고, 또 해설 있고, 효과 있고, 이런 식의, 이게 바란스(balance)가 잘 맞아야 돼. 너무 음악만 있으면 그렇고 너무 해설만 있으면 그렇고. 이것도 종이로다 해보면 여긴 해설 두고, 여긴 음악 두고, 이런 식으로 해두면 녹음해두면 비슷하게 바란스가 맞는 거지. 8 [사진 8] 양종해 감독과 연출 교육을 담당했던 메이블리 위의 구술에서 알 수 있듯이 시라큐스 교육진이 지속적으로 강조한 것은 명확한 주제 전달을 위한 연출 기법이었다. 말하자면 정해진 시스템 안에서 각 부처 정책에 따른 주제를 변주해야 하는 영화제작소 교육영화의 특성에 맞춰 기본적인 틀을 반복해서 제시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게다가 적은 자본과 인력으로 진행해야 하는 제작 여건상 연출자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교재로 삼을 풍부한 견본들이 필요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견본을 밑그림으로 영화제작소의 감독들은 소위 1인 제작 시스템이라 불린 환경을 조성하고 영화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진 9] 문화영화 촬영 현장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의 역할 모델이 된 <발전은 협력에서> 시라큐스 계약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농촌 지도’를 주제로 하는 다수의 교육영화들이 만들어졌는데 <발전은 협력에서(둑)>(1959)는 이러한 원조정책의 대표적인 영화였다. 양종해 감독의 대표작이기도 한 <발전은 협력에서>는 강원도 명주군 모전리 주민들의 협력으로 제방이 건설된 것이 화제가 되며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완성 후 대대적인 상영회를 통해 농촌 각 지역에 ‘협력과 자립’이라는 교훈을 주었고 모전리는 성공한 시범부락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또한 영화가 1960년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아영화제 비극영화 부문에서 기획상을 수상하며 원조 당국과 공보실 그리고 한국영화계 모두에 서로 다른 의미의 성공을 안겼다. 그리고 이 수상 경력은 이후 <발전은 협력에서>가 공보실 영화제작소와 국립영화제작소의 대표적인 문화영화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아시아영화제 수상으로 <발전은 협력에서>는 원조 당국으로부터 대한 경제 기술 원조의 성공사례로 활용되는 동시에 이승만 정권의 선전물로 활용되는 모순을 보여주는 아이로니컬한 상황에 직면했다. [사진 10, 11] <발전은 협력에서(둑)>(양종해, 1959) 속 장면들(출처: e영상역사관) 실제 현장에서 주민들이 참여하는 이러한 방식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 영화의 특징을 강조하는 동시에 실제 지역사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사업이 아닌 특정 마을의 사업을 원조기관과 정부 부처의 신(新)사업의 성과로 포장하여 시범마을과 농촌교육영화의 역할모델로 활용해 선전에 활용하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기획은 매우 성공적인 전략이 되어 향후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 사업의 보급⋅육성에서 핵심적인 선전영화의 역할모델로 이용되었다. 1970년대 초반 새마을운동의 대대적인 선전에서도 사업 시행에 앞서 완성형의 마을 혹은 마을 지도자의 성공사례를 ‘실화’라는 특징을 앞세워 마치 새마을운동의 성과물처럼 제작한 경우가 다수 있는데 이 영화들의 형식과 구성은 명백하게 <발전은 협력에서>를 모델로 하고 있다. [사진 12] 1960년 제7회 아시아영화제에 참가한 한국 대표단의 모습(출처: 이성철 기증 자료) [사진 13] 제7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발전은 협력에서>는 비극영화 부문 기획상을 수상했다. 사진 왼쪽부터 남우주연상을 받은 김승호, 당시 영화과 과장으로 있었던 이성철, 감독상을 받은 성동호(출처: 이성철 기증 자료) 덧붙여 정치적 격변 속에서 공보실 영화제작소가 오히려 그 위세를 확장해 독립된 국립영화제작소로 재탄생하게 된 배경에 선진화된 시설과 영화제작 교육을 받은 전문 인력을 갖춘 영화제작소의 시스템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자금투자가 필요 없는 최적화된 공보선전 기관으로 활용 가능한 영화제작소의 존재를 매력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 출범 후 공보국이 공보부로, 영화제작소가 ‘국립’영화제작소로 격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전은 협력에서>를 비롯한 한미협조 교육영화들은 문화영화로 재구획 되고 국립영화제작소 농촌계몽 문화영화의 역할 모델이 되었다. 주) 1. 공영민, 「양종해 편」,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한국영화사구술총서03 :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이채, 2006, 253쪽. 2. 공영민, 「양종해 편」,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한국영화사구술총서03 :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이채, 2006, 256~257쪽. 3. 공영민, 「2006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양종해 편>」,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52쪽. 4. <Welcome to Motion Picture>(1959). 5. "Work Plan-Contract No. ICA/W-644 between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Syracuse University",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앞의 책, 171~178쪽. 6. Ibid. 7. 앞의 책, 「양종해 편」, 256~258쪽. 8. 앞의 책, 「양종해 편」, 279쪽.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2006년까지 170편의 한국영화를 촬영한 베테랑 촬영감독으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땡볕>(하명중, 1984), <깊고 푸른 밤>(배창호, 1985),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1999) 등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했다. 특히 그는 1980년대 주목받던 신진 감독들의 데뷔작에 단골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당시 그는 신인감독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제작자들의 신뢰를 얻을 만큼 빠르고 노련한 촬영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50년대 중반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의 조명부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장화홍련전>에는 조명감독인 함완섭의 조수로 참여했는데 이때 임권택 감독은 이 작품의 제작부 막내 스태프로 소품을 맡고 있었다. (사진1) 1956년 4월 15일 <장화홍련전>의 촬영장 사진을 보면 가운데 한복을 입고 여장을 한 인물이 임권택 감독이다. 테스트 촬영을 위해 장난처럼 여장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오른쪽이 서병수 조명감독, 왼쪽이 정광석 촬영감독이다. 후에 임권택 감독과는 <왕과 상노>(1965)에서 감독과 촬영자로 다시 만났지만 촬영감독으로서의 자의식과 자존심은 임권택 감독에게 뷰파인더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둘은 작품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중간에 결별한 뒤 단 한 작품도 함께 하지 않았다. 정광석은 일본 유학파 출신 김영순 촬영감독의 권유로 촬영부 조수로 옮겨간다. (사진2) 1959년 <부부>(곽건, 1960)의 촬영 현장이다. 카메라를 잡은 이가 김영순 촬영감독이고 왼쪽에서 장갑을 끼고 렌즈의 포커스링을 만지는 이가 당시 촬영 제1조수 정광석이다. 삼각대 옆에는 여성 스크립터가 앉아서 기록을 위해 초시계를 잡고 있다. 당시 제1조수는 노출과 포커스를 책임졌고 흑백필름용 현상통을 가지고 다니며 촬영현장에서 테스트현상을 해야 했다. 2조수는 트래킹 쇼트 촬영에서 이동차 밀기, 제3조수는 촬영기자재 운반을 맡았다. 그나마 카메라 같은 고가장비는 제2조수가 운반했다고 한다. 이후 <비련의 섬>(정창화, 1958),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1960) 등의 작품에서 김영순, 이성휘를 비롯한 여러 촬영감독의 조수로 14편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1962년 정광석은 이봉래 감독의 권유로 <새댁>을 통해 촬영감독으로 데뷔한다. <새댁>은 김영수 작가의 KBS 인기 라디오 연속극을 영화화한 것이다. 당시 신문에는 <새댁>의 원작료를 30만원으로 밝히고 있는데, 정광석은 이때 촬영감독을 포함한 촬영부 전원의 인건비로 8만원을, 즉 천자 분량의 필름 세통 값과 비슷한 비용을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3년 12월 14일자 기사를 보면 당시 영화제작비 평균 중 총 촬영료는 20~30만원으로 여기에는 촬영기자재비용 12만원이 포함되어 있다 하니 그의 기억과 대체로 일치하는 금액이다. 이 조차도 주로 어음으로 받아 몇 달을 수입없이 기다리거나 급할 때는 많은 수수료를 떼고서라도 현금화시켜야 했기에 당시 많은 스태프들은 늘 빚을 지고 사는 형편이었다. (사진3) <새댁>(이봉래, 1962)은 흑백 시네마스코프 작품으로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리플렉스 카메라에, 공보부에서 비공식으로 빌린 250미리 줌렌즈를 장착해서 촬영했다. 당시 초점길이가 긴 줌렌즈는 신필름과 정부 홍보영화를 제작했던 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 밖에 없었기에 충무로 촬영감독들은 공보부에서 몰래 빌려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촬영 데뷔작인 <새댁>은 “물에 올라온 고기처럼 화면마다 생동이 퍼덕거리지만 시종 재미있다.”는 경향신문의 영화평처럼 3대의 대가족이 벌이는 에피소드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새댁>은 종로의 세운상가 3~5층에 위치했던 아세아극장의 개관작으로 1962년 12월 23일 개봉했다. 1965년에 그는 <성난 독수리>(김기, 1965)를 촬영한다. 이호영 공군 대령의 수기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가 대성공을 거둔 후에 만들어진 공군 전투영화이다. <빨간 마후라>는 비행장면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전투기 동체에 부착시켜 촬영했으나 제작비와 지원규모가 그에 못 미쳤던 <성난 독수리>는 정광석 촬영감독이 전투기 뒷좌석에 탑승해 비행장면을 모두 촬영했다. (사진4) <성난 독수리>(김기, 1965) 포스터 (사진5) <성난 독수리>(김기, 1965)는 원작자인 이호영 대령의 도움을 받아 대구 비행장에서 촬영되었는데, 실제 한국전쟁 때 사용한 전투기 T33이 이용되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은 전투복에 헬멧을 착용한 뒤 아리플렉스 ⅡC카메라에 필름이 담긴 200자 매거진 세 개를 여분으로 가지고 T33 뒷좌석에 탑승해, 핸드 헬드로만 항공촬영 전 분량을 촬영했다. 이 촬영으로 정광석 촬영감독은 25시간이 넘는 비행기록을 갖게 된다. 촬영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감독과 함께 화면의 비율을 결정해야 한다. 1968년에 개봉한 <황혼의 부르스>(장일호)는 정광석 촬영감독의 주장으로 스탠다드 화면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황혼의 부르스>는 일본을 배경으로 몰락한 일본귀족과 북한 간첩, 남한의 비밀요원이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여인을 둘러싸고 벌이는 첩보 액션영화이다. 1960년대 영화계는 TV와의 경쟁을 와이드 스크린으로 극복하고자 가로의 비율이 넓은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탠다드 사이즈로 이 영화를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화려한 컬러의 색감을 보여주고 다양한 렌즈를 이용한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아나모픽 렌즈를 마스터 렌즈에 덧대어 구현했는데, 1960년대 후반 노후된 아나모픽 렌즈는 화면의 색감이나 선명도를 보장할 수 없었고 아나모픽 렌즈의 왜곡 때문에 사용 가능한 마스터렌즈의 구경이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파독광부 출신으로 독일에서 아리플렉스ⅡC 카메라를 구입해 온 신영필름 김태우 사장이 마침 정광석 촬영감독의 조수로 들어왔던 시기라 최신 카메라로 선명하고 깨끗한 화면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도 또한 더 해졌을 것이다. (사진6) 의사로 위장한 가네야마(오지명)기 여자주인공 시즈코(윤정희)를 도와 몰락한 일본 귀족인 가다키리 남작(박암)의 저택에서 도망치려는 장면이다. 망원렌즈로 인물들을 촬영해 전경의 배경을 흐리는 방식으로 인물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물론 윤정희의 심리적인 불안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다. (사진7) 이 영화에서 박암은 몰락한 일본 귀족임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 내내 제대로 여미지 않은 유카타를 입고 있다. (사진8) 호텔 객실에서 윤정희는 원하지 않는 청혼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받고 있다. 윤정희는 이유를 모른 채 남자들에게 결혼을 강요당하고 살인사건에 연류 되고 협박받는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부친이 막대한 재산을 딸의 남편에게 주기로 했기 때문인데, 물론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도 모르고 있다. 오로지 ‘황혼의 블루스’라는 노래가 들리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뿐이다. 컬러영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60년대 후반의 컬러 작품에는 화려한 색감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언제나 세 가지 색으로 구성된 꽃꽂이가 탁자 위에 놓여있다. 이 작품에도 회사, 병원 등의 책상과 탁자 위에는 어김없이 삼색 꽃꽂이가 놓여있다. (사진9) 말끔한 양복에 뿔테 안경을 쓴 신사 오지명은 안경을 벗는 순간 북한간첩이 되어 윤정희 가족을 북송선에 태우려 한다. 심지어 오지명의 날카로운 두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보여줘 긴장감을 갖게 했다. (사진10, 11, 12, 13) 이 작품은 액션영화이다. 오지명의 정체가 드러나자 북한간첩단과 몰락한 일본 귀족의 하수인들이 총격을 벌이고 남한에서 온 공작원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결투장면이 등장한다. 한 간첩단이 윤정희를 찾으러 온 귀족의 하수인들에게 총질을 해대는 장면은 피격당하는 인물들의 화려한 리액션이 다소 단순한 동선을 무마해준다. 심지어 오른쪽 인물은 총에 맞아 엎어져 있다가 다시 총을 맞고는 일어나 휘청거리는 연기를 보여준다. 발포할 때마다 총구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는 90년대 <투캅스>(강우석, 1993)까지 등장한다.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액션장면 중 장동휘의 공격에 오지명이 360도 회전하며 쓰러지는 장면은 설정 상 어두운 실내에서 촬영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1968년부터 정광석은 매년 10편 내외의 작품을 촬영했다. 현재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작품수인데 그는 두 가지의 이유에서 다작 촬영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첫째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따라가기. 신성일, 김지미, 남정임 등 당시 인기 있는 주연들의 작품을 촬영하면 두, 세 작품을 동시에 가케모치 즉 겹치기 촬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제작자 또한 그런 겹치기 일정을 고려해서 주요 스태프를 고용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후시녹음으로 진행했기에 촬영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후시 녹음이 미완의 영화를 어떻게 완성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성우 고은정, 오승환의 구술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70년대에도 이러한 다작의 흐름을 이어갔다. 1971년에 개봉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액션영화이다. 물론 영화는 전편 다 국내에서 촬영되었다. (사진14)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애국지사와 갱 그리고 밀정이 처음 만나는 황량한 만주의 술집은 워커힐 호텔이 보이는 한강 상류의 모래밭 위에 세운 오픈세트이다. (사진15) 주인공들이 스키를 타고 일본군을 유인하는 만주의 눈밭은 강원도 횡계에서 촬영했다. 아찔하게 따라오는 일본군 스키부대원들을 찍기 위해 사각으로 기울기를 조정해서 촬영했다. (사진16) 위 장면을 찍기 위해 바닥에 바짝 붙인 카메라를 틀어 앙각으로 촬영하고 있다. 바닥에 누워 카메라를 잡고 있는 이가 정광석 촬영감독이고 그 바로 뒤에서 사진 밖 피사체를 응시하고 있는 이가 이만희 감독이다. 이만희 감독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 또한 영화에 대한 감각이 아주 뛰어났다고 평가한다. “앞뒤가 이러니까 이런 사이즈로 간다. 이게 아니라 한번 쭉 시켜본 다음에 그냥 나눠서 가니까.” (사진17) 장동휘가 촬영 중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로 구르게 되자 이만희 감독은 즉흥적으로 커트를 나눠 촬영해 사고로 NG가 난 장면을 살렸다고 한다. 콘티나 모니터 없이 즉석에서 머릿속으로 편집이 가능한 감독이었던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라면 기세가 등등한 배우들도 어려운 액션장면을 군말 없이 직접 연기했다. 물론 배우들도 인물을 줌렌즈로 당겨 찍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배우 황해가 한 겨울에 한강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장동휘가 오토바이에서 넘어지는 정도의 위험은 그리 과한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과거 그가 촬영조수로 참여한 <햇빛 쏟아지는 벌판>에서는 정창화 감독이 총격장면에서 실탄을 사용했고 이만희 감독 또한 대단한 사격실력으로 때로 배우 근처까지 직접 총을 쏘며 촬영을 진행 했다는 무용담 같은 증언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리얼한 장면에 대한 욕심과 부족한 안전장치로 인해 배우와 스태프들이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아찔한 시기였다. 그가 촬영한 전쟁영화인 <전우가 남긴 한마디>(이원세, 1979)에서도 군용보트를 타고 도강하는 장면에서 강 밑에 묻어놓은 TNT폭탄 위로 배우 장혁이 탄 보트가 지나가며 폭파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다행이 아무도 다치지 않아 며칠 쉬다 촬영을 재개했다고 한다. 정광석은 1960,70년대를 거치며 전광석화처럼 빠른 시간에 탁월하게 촬영을 끝낼 수 있는 노련한 촬영감독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다보니 1980, 90년대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에서 그의 이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곽지균 감독의 데뷔작 <겨울나그네>(1986), 박종원 감독의 <구로아리랑>(1989), 이현승 감독의 <그대안의 블루>(1992), 김성수 감독의 <런 어웨이>(1995),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1998)등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감독들의 데뷔작에는 늘 그의 이름이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의 선두주자였던 배창호 감독과의 콤비로 유명한데 배창호 감독과는 <꼬방동네 사람들>(1982)부터 시작해 모두 8편의 작품에서 함께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판자촌의 모습을 리얼하게 담아 호평을 받았는데, 그는 성공적인 헌팅이 빛을 발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꼬방동네는 고척동 그러니까 당시 영등포에서 시흥으로 가는 길의 좌측 둑 너머 외딴 고지대에 있던 판자촌이다. 벌판 쪽에 우뚝 솟은 철탑, 저수지 같은 분위기를 내는 뚝방 등 그 동네 전부가 이 작품에 적절하게 맞아 떨어져 세트 없이 영화 전편을 그 곳에서 촬영했다. 스태프들은 인근 여관에 숙소를 잡고 2개월간 머물며, 동네 주먹들의 방해가 있으면 술값을 줘가며 밤낮으로 촬영했다. (사진18) 주석(안성기)이 검은 장갑(김보연)을 따라가며 꼬방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유려하게 훑는 장면은 스테디캠 처럼 느껴지지만 정광석 촬영감독이 광각렌즈를 사용해 핸드헬드로 촬영한 장면이다. (사진19, 20) 꼬방동네에서 열린 환갑잔치에서 공옥진 여사가 춤을 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 또한 사진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이 핸드헬드로 촬영했음에도 유려하고 안정적이다. 사진20번에 카메라를 든 이가 정광석이고 사진의 왼쪽 끝 안경을 쓴 이가 배창호 감독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배창호 감독과 한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적도의 꽃>(배창호, 1983)이다. 아파트에 혼자 살며 이웃들을 망원렌즈로 훔쳐보는 미스터M(안성기)은 맞은편 아파트에 이사 온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해 그녀를 스토킹 한다. 미스터M이 아파트를 훔쳐보는 도입부는 히치콕의 <이창>(1954)처럼 촬영되었다. (사진21,22,23,24) 미스터M(안성기)의 시점쇼트로 표현하기 위해 팬으로 앞 동 아파트 두어 가구를 훔쳐 보다 아래에 이사 오는 오선영(장미희)에게 시선이 닿는 흐름으로 이어지는데, 현장에서는 이 모두를 한 컷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세트에서 촬영된 <이창>과 달리 <적도의 꽃>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여러 가구의 협조를 구하며 어렵게 촬영이 이루어졌다. 미스터M은 타락한 오선영을 구원하고자 그녀를 강으로 끌고 가 물에 빠트린다. 비정한 내용만큼이나 촬영 환경 역시 좋지 않았다. 구파발 근교의 일영에서 촬영이 이뤄졌는데 장마철에 물이 불어 있는 강에서 빗줄기가 잘 보이도록 역광으로 조명을 쳐야했다. 결국 조명 설치를 위해 10키로 조명기를 매고 강을 건너던 조명조수가 물에 휩쓸려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희생 속에서 만들어진 장면이자 작품이었다. <고래사냥>(배창호, 1984)은 2,3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3년 11월에 촬영이 시작되었다. 삼영필름 명의로 제작자 황기성이 대명 제작한 작품이다. 병태 역할에 적합한 배우가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안성기가 김수철을 단성사 2층 다방으로 불렀다. 황기성 대표, 최인호 작가, 배창호 감독, 정광석 촬영감독 모두 그 자리에서 김수철을 병태로 캐스팅했다. 로드무비인 이 작품은 서울역 앞 사창가에서 시작해 과거의 창경원을 거쳐 대관령 너머 임계, 강릉 변두리 시장 등지에서 촬영되었다. 영하 20도 날씨에 염소차에서 내려 걷는 곳이 임계 읍내였고 춘자(이미숙)가 어머니에게 줄 안경을 훔치고 민우(안성기)가 이를 구출하는 곳은 강릉 변두리 시장이었다. (사진25,26) <고래사냥>의 강릉 변두리 시장 장면은 엑스트라 하나 없이 시장 사람들 그대로 촬영했다. 사진25의 오른쪽 하단 동그라미 친 부분에 안성기와 이미숙이 있다. (사진27,28) 춘자(이미숙)가 안경을 훔쳐 소동이 벌어지는 장면도 시장에서 엑스트라 없이 자연스럽게 촬영되었다. 주인공들이 포주일당에게 쫓겨 석탄차에 기어 올라가 기차를 타고 도망가는 장면은 카메라 한 대로 촬영이 이뤄졌다. 석탄차를 대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유를 두고 여러 커트로 나눠서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진29) <고래사냥>에서 석탄차를 타고 도주하는 시퀀스는 한 대의 카메라로 줌렌즈를 이용해 원경에서 접사까지 한 커트로 촬영을 끝내고 편집과정에서 여러 커트로 나눠서 사용했다. 물론 석탄차 위에서 안성기가 “잘 있거라 나는 간다.”포주들을 놀리는 장면도 접사에서 원경까지 한 커트로 촬영해 나눠서 사용했다. 과거 충무로 촬영감독이 갖춰야할 덕목 중 하나는 제작자의 입장에 서서 효율 좋게 촬영해 예산을 줄여주는 것이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의미 있는 장면으로 꼽는 것이 <땡볕>(하명중, 1984)의 한 컷이다.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한 <땡볕>(하명중, 1984)은 일제강점기의 민족수난사를 다루고 있다. 무기력한 남성과 수탈당하는 여성의 신체가 수난의 알레고리로 영화 전편을 메우는데, 주인공 춘호가 죽어가는 순이를 지게에 지고 물길을 거슬러 가는 장면은 인물들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배치되어 잔인한 운명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은 임계의 산중턱에서 오후 4시쯤 촬영을 끝내고 철수 하는 중에 정광석 촬영감독이 우연히 바라본 풍경에 영감을 받아, 하명중 감독에게 제안하여 만들어 낸 장면이었다. 이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23회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다음해도 연이어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이다. 미서부에서 단시일 안에 올로케로 촬영했고 흥행에서도 성공한 작품이다. 모든 화면이 감각적이고 할리우드 작품 같다는 평을 받았는데 배창호 감독 또한 미국 수준의 기술력만 받쳐준다면 할리우드 만큼의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작품이라 말했을 정도로 촬영기술과 감각을 강조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제작비와 물량을 들이지는 않았다. 열다섯 명의 인원이 필름 4만 5천자로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년, 데스밸리, 자브리스키 포인트, 산타모니카, 말리부에서 로케하며 40일 만에 촬영과 현상을 모두 끝내고 귀국한 작품이었다. 한때 배창호 감독의 전매특허였던 현기증 나는 360도 트래킹 쇼트도 할리우드에서 완성된다. (사진30) 호빈(안성기)과 제인(장미희)의 말리부 해변 키스씬을 360도 트래킹 쇼트로 촬영하기 위해 준비하는 현장이다. “그때만 해도 원형이동차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어요. 제일기공사라고 청계천에서 반원형 그니까 160도, 180도 돌아가는 이동차를 쓰는 경우가 있었고. 360도가 꼭 필요하다고 감독이 생각하고 찍으려하면 다 핸드헬드로 찍는 수밖에 없었다고. 정밀하게 원형이동차로 돌아가는 차가 없었어요. 근데 막상 미국 가서 기재를 다 렌트해서 썼거든. 카메라를 BL2를 썼고 거기서 원형이동차 360도 돌아가는 걸 갖다 찍을 때 아주 정밀하게 제작이 돼 있더라고. <깊고 푸른 밤> 보면은 서울에 와이프한테 영주권을 땄다고 전화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이동을 갖다가 360도 두 번은 돌아갔을 거야. 마구 빙빙빙. 업 되는 감정으로 전화하는 상태거든, 안성기가. 그거를 원형으로 돌아주니까, 찍는 나부터도 감정이 올라가더라고. 그리고 말리부 해변가에서 둘이 키스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360도 원형으로 쓴 게, 저렇게 원형이 되는 구나하는 걸 처음 느꼈을 거야, 아마.” 1990년 작품인 <꿈>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겨울에 촬영이 이뤄졌다. 낙산사 대웅전 촬영을 위해 강릉에서 양양으로 가는 길에 폭설에 갇혀 눈으로 허기를 채우며 20시간이나 걸려 촬영장소로 갔다. 폭설예보가 있었지만 스케쥴 미룰 경우 추가 경비가 발생하기 때문에 촬영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인내와 순발력이 필요했다. 강릉과 낙산사 사이 삼팔선 경계가 있는 곳에 마치 해금강을 떠올릴 것 같은 해변에 조신의 판자집을 오픈세트로 만들었다. 2, 3일 동안 눈이 오기를 기다린 뒤 동트기 직전 약 한 시간 십분 사이에 여덟 컷을 찍어야 했다. (사진31) 조신(안성기)을 찾아온 모례아손(정보석)에게 조신이 용서를 비는 장면으로 동 트기 직전, 순발력있게 촬영한 장면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처음으로 전 편을 동시녹음으로 촬영한 작품은 <베를린 리포트>(박광수, 1991)이다. 신철이 기획을 했고 오정완이 제작부로 파리 촬영에 동참했다. 사실 촬영진이 모두 파리에 도착한 뒤에도 시나리오는 완성되지 않아 파리 현지에서 스태프들은 열흘 넘게 박광수 감독이 시나리오를 탈고하도록 초조하게 기다렸다. 촬영현장에 미리 가 시나리오를 토대로 최적의 동선을 파악하는게 몸에 배어있는 정광석 촬영감독과는 작업방식이 잘 맞지 않았다. 스테디캠 장면은 독일 현지의 스테디캠 오퍼레이터를 고용해 촬영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은 <구로 아리랑>(1989) 이후 박종원 감독과의 두 번째 작품이다. 대동흥업의 도동환 대표가 제작했고 대부분 강원도 정선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영화의 절반을 정선의 국민학교에서 찍었는데 오픈세트로 진행된 엄석대(홍경인)의 아지트는 미술팀을 정선으로 데려오는 비용을 절감하고자 스태프들이 공간을 채워 만들었다. 기차가 달려오는 교각의 철로에서 오래 버티기 내기를 하는 인물들을 촬영하는 장면은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기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박진감 있게 잡기 위해서는 광각렌즈로 촬영해야만 했다. 누워있는 인물들의 시선에서 찍기 위해 교각으로 들어가 달려오는 기차를 핸드헬드로 촬영하는데 광각렌즈 특성상 피사체와의 거리감이 길어 보이니 기차가 바로 앞으로 올 때까지 버티며 촬영해야 했다. 그래서 달리는 기차에 옷깃을 스치는 긴박한 상황도 겪었다. (사진32,33,34)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오래 버티는 내기를 하고 있는 엄석대(홍경인). 사진32와 33이 광각렌즈로 촬영한 커트이다. 1973년 정창화 감독의 <흑야괴객>촬영 현장에서 자동차 추격 장면을 가까이에서 촬영하다 질주하는 자동차에 부딪힌 삼각대에 머리를 맞고 결국 현장에서 숨을 거두고 만 최호진 촬영감독을 떠올릴 만하다. 1993년에 촬영한 <투캅스>(강우석, 1993)는 1990년대 코메디 영화의 부흥을 알린 신호탄이 된 작품이다. 제작은 이화예술필름이 시작해 어음으로 계약금을 받았으나 중간에 이화예술의 임상돈 사장이 제작을 포기한다. 그러다보니 제작경험이 있고 지방장사들과 안면이 있던 강우석 감독이 직접 제작을 진두지휘 하게 된다. 강우석 감독이 발행한 새로운 어음으로 계약을 진행하며 제작이 시작되었다. 이 작품의 촬영에 있어서 인상적인 장면은 악당과 투캅스가 싸우는 영화의 마지막 총격전이다. 몹씬이라 많은 엑스트라와 자동차, 경찰까지 동원되었고 TNT를 묻고 총기를 테스트 하는 등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장면이었다. 강우석 감독이 워낙 일을 빨리 하다 보니 하루에 120커트를 촬영하는 불가능한 일정으로 계획은 세웠으나 다음날로 촬영은 이어졌고 마침 폐공장인 촬영장소에 눈이 쌓이게 된다. 개봉날짜가 잡혀있고 촬영을 미루면 비용이 발생하고 어쩔 수 없이 모든 스태프가 눈을 쓸고 흙으로 묻어 촬영을 재개시켜 이틀간 총격씬 120커트의 촬영을 마쳤다. “왜 군에서는 무엇이든지 안 되는 게 없다고 하더니 영화인들도 마찬가지라고. 안 되는 게 없어들.” (사진35,36) 강형사(박중훈)와 조형사(안성기)가 악당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장면 중 일부로 눈이 쌓인 현장을 스태프들이 모두 치우고 촬영한 장면이다. 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촬영감독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열악한 기자재와 제작환경 속에서도 저비용으로 순발력 있게 다양한 장르의 영화 한편을 촬영해내는 능력을 길렀다. 1980, 90년대에는 새롭게 대두하는 젊은 감독들이 믿고 작품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2000년대에는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생소했던 DP시스템을 시도한 원로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촬영담은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가 촬영한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사진37) 정광석 촬영감독이 아리플렉스 필름카메라를 잡고 있다.
1960년대 한국영화계엔 흔히 ‘가케모치(掛け持ち)’라고 하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관행이 있었다. 입도선매(立稻先賣), 즉 영화가 제작되기 전에 미리 지방 흥행업자들에게 영화상영권을 팔아 그 돈으로 영화를 제작하던 당시 한국영화의 제작방식에서 자본을 투자하는 지방 흥행업자들이 선호하는 몇몇 스타 배우들의 출연은 중요한 요건이었고, 또 얼마나 많은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는지가 당시 배우들의 인기를 가늠하는 잣대로 여겨졌기 때문에 생겨난 웃지 못할 진풍경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겹치기 관행은 비단 배우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감독을 비롯한 기술 스태프들도 겹치기를 했다. 가능한 한 빨리, 많은 작품을 만들어야 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소위 몰아 찍기에 능한 감독이나 스태프들이 선호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이들 인기 감독, 스태프들도 배우들처럼 여러 작품을 동시에 작업해야 했던 것이다. 사실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후시녹음의 시대였기 때문에 대사를 외우지 않고도, 역할에 대한 완벽한 이해 없이도 얼마든지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독이나 스태프들이 여러 작품을 동시에 작업한다는 것은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일이다. 빨리 만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빨리, 잘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광석 은 바로 이 신기에 가까운 일을 했던, 그것도 단연 최고의 촬영감독이었다. 1956년 < 장화홍련전 >( 정창화 )의 조명부 조수로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김영순 , 이성휘 등 촬영감독의 문하에서 촬영부 조수로 경력을 쌓고 1962년 이봉래 감독의 < 새댁 >으로 촬영감독으로 데뷔했다. 흑백 시네마스코프의 안정되고 유려한 촬영으로 데뷔작에서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감독을 능가하는 뛰어난 기억력과 작품 해석력으로 몰아 찍기에도 능해 여러 제작자들의 부름을 받았는데, 이 시기 여러 편의 영화를 겹치기 촬영하면서 한 해에 7~8편은 기본이고 심지어 1968년에는 12편의 영화를 촬영하기까지 했다. 특히 그는 ‘몰아 찍기의 귀재’라고 불린 장일호 감독과 황금 콤비를 이뤄 < 생명은 불꽃처럼 >(1965), < 일지매 필사의 검 >(1966), < 서울아줌마 >(1967), < 황혼의 부르스 >(1968), < 단발기생 >(1968), < 상사초 >(1968), < 제4의 사나이 >(1969)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자신의 영상미학을 완성해나갔다. 하지만 그는 오랜 연륜으로 힘들게 쌓은 기술과 노하우를 자신의 영달(榮達)이 아닌 후배 영화인들을 위해 썼다. 혈기만 왕성하고 연출의 틀이 완전히 잡히지 않은 신인 감독들에게 그는 든든한 조력자였는데, 데뷔작인 < 꼬방동네 사람들 >(1982)부터 < 젊은 남자 >(1994)까지 8편의 작품을 그와 함께 작업했던 배창호 감독은 이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를 들려준다. “<꼬방동네 사람들> 마지막에 안성기 씨와 김희라 씨가 막 싸우고 하는 장면 있잖아요? 그걸 하룻밤에 다 찍었어요. 그게 콘티상으로 60 몇 커트예요. 밤에 라이트 다 설치하고 슛 들어가면 10신데, 새벽 4시 반, 5시까지 7시간을 찍었는데, 어려운 신 아니에요? 동네에서 쫓겨나게 생겼으니까 더 이상 찍을 수도 없고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서 소위 몰아 찍기 하고. 물론 리허설은 다 해놨죠. 연기자하고 이렇게, 이렇게 미리 맞춰놓고, 찍고…. 근데 ‘배 감독, 이거 라스트 커트지?’ 탁 아는 거예요. 그렇게 정신없이 찍었는데…. 그 호흡들이 기가 막혔어요. 그런 몰아 찍기의 능률성. 그런 계산하는 거. 그런 면에서 정말 많이 배웠죠.” 배창호 를 비롯해 신승수 (< 장사의 꿈 >), 곽지균 (< 겨울나그네 >), 박종원 (< 구로아리랑 >), 이현승 (< 그대 안의 블루 >), 김성수 (< 런 어웨이 >), 김지운 (< 조용한 가족 >) 등 1980~90년대 한국영화 대표 감독들의 데뷔작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고, 강우석 감독의 < 투캅스 >(1993), < 마누라 죽이기 >(1994), 이명세 감독의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1999), 김상진 감독의 < 광복절 특사 >(2002) 등도 그의 열정이 듬뿍 담긴 작품들이다. 2006년 < 아랑 >( 안상훈 )까지 근 50년 넘게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그는 때론 엄하기도 했지만, 늘 따뜻한 애정으로 후배 영화인들을 격려하고 다독여주었던 한국영화계의 ‘큰 어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