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어눈깔
- 감독
- 이유나
- 제작년도
- 2018
*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2022 영화 글쓰기 키트: 영화 기자가 알려주는 리뷰 작성>의 과제 선정작입니다. 이 영화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하얀 눈밭 위에 놓인 빨간 자동차일 것이다. 이는 상처받은 두 사람이 만나 치유하는 서사의 정점이다. 끌어안은 두 사람의 형상에서는 다소 직접적이고 고전적인 위로와 연대가 묻어난다. 감독은 전작 <아사코>, <우연과 상상>에서도 두 인물의 만남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했다. 아사코는 우연히 전 남자친구와 동일한 얼굴의 남자를 만났다. <우연과 상상>3부의 나츠코는 우연히 첫사랑과 닮은 여자를 만난다. 여기 <드라이브 마이카>도 예외는 아니다. 우연히 배정된 드라이버는 꼭 가후쿠처럼 가족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여기서도 가후쿠가 우연의 힘을 빌려 위로받고 나아가도록 만들까? 앞서 언급한 설산의 이미지를 보면 이는 결과적으로 사실이다. 하지만 <드라이브 마이카>에는 차별점이 있다. 그동안의 서사에서 연기자는 주인공이 아니라 상대편에 부여된 몫이었다. 주인공은 첫만남에 상대를 오인하는 쪽인 관객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인공 가후쿠가 아예 연극배우로 설정되었으며 그의 연극은 극중극 이상의 존재감을 갖는다. <아사코>와 <우연과 상상>을 떠올리면 주인공을 미사키로 설정하는 서사도 있음직하다. 그녀가 연극배우인 가후쿠와 그의 연극을 차례로 만나 상실을 극복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왜 이번에는 관객, 즉 연기를 듣는 위치(청자)의 시선이 아니라 연기자, 즉 연기를 발화하는 위치(화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여줄까. “그의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그렇게 되면 난 이 역에 자신을 바칠 수가 없어.” 부인 오토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이어지는 씬은 가후쿠의 클로즈업한 눈물도, 오토가 떠난 빈 집도 아니다. 그것은 연극<바냐 아저씨>의 실연 장면이다. 여기서 가후쿠는 공연 도중 연기를 중단한다. 무대에서 뛰쳐 나온 가후쿠의 등 뒤로 “나도 말할거야. 내 아내는 달아났다고.”라는 대사가 지나간다. 영화를 위해 발췌된 <바냐아저씨> 대사들은 매번 가후쿠의 상황에 부합한다. 하지만 이를 보고 대사가 곧 그의 속마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1차원적이다. 그보다는 연기가 불가능한 상태를 선언하는 이 장면이 영화 2부의 시작임에 집중해보자. 시간이 흘러 2부의 마지막은 이전처럼 연기가 가능해진 상태의 가후쿠를 보여주며 닫힌다. 사실 그는 배우들의 뒷모습만 보고도 ‘무언가 일어났음’을 캐치하는 능숙한 연기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2부는 그가 대사를 발화할 수 없는 순간에서 시작해 대사를 발화할 수 있는 순간까지의 과정이다. 영화는 연기불가능 상태에서 출발해 가능 상태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을 우리가 따라가게 만든다. 발화의 사전적 의미는 ‘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현실적인 언어 행위를 하다’이다. 부인 오토가 죽던 날, 가후쿠는 자동차 안에서 시간을 끌면서 대화를 미루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실은 가후쿠를 이 상황 속에 가둔다. 오토는 첫 등장부터 흐릿한 형체와 또렷한 목소리를 보여주었고 딱 그 모습대로 자동차 속에서 반복재생된다. 2년 후, 달리고 있는 자동차의 바퀴는 여전히 카세트테이프의 릴과 겹쳐 보인다. 가후쿠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청자인 오토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바냐아저씨’의 자리를 빌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후일 미사키에게 ‘아내는 2년 전 죽었어. 그 테이프를 듣기가 무서워졌니’라고 물은 적이 있다. 2년 전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듣는 행동은 스스로도 무섭다고 생각한 걸까. 그럼에도 오토에게 할 말이 남아있는 한 가후쿠가 선택할 수 있는 언어는 ‘바냐의 언어’밖에 없다.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아저씨>에는 독특한 점이 눈에 띈다. 다국적 배우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대사를 하되 연극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점이다. 2부가 새롭게 시작되는 표면적인 이유는 가후쿠가 이 ‘다국어 연극’의 연출직을 위해 히로시마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곧 2부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영화를 추동하는 힘이다. ‘바냐의 언어’에 갇힌 가후쿠의 앞에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언어들이 기다리고 있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터뷰에서 “연기의 바탕에는 불안이 깔려 있다”는 사고방식을 밝힌다. 이 말은 야외 리허설 장면에서의 연출가 가후쿠를 떠올리게 한다. 연기 현장의 하마구치 감독과 가후쿠는 둘 다 ‘날 것의 섬세한 무언가를 어떻게 지켜낼지’ 고민하며 그 불안을 누그러뜨리려 노력한다. 야외 리허설 장면에서 소냐와 엘레냐 역의 배우들은 연기 도중 가후쿠를 등지고 선다. 가후쿠는 연기를 볼 수 없음에도 확신있게 “방금 무언가가 일어났어”라고 외친다. 여기서 가후쿠가 발견한 ‘무언가’를 탄생시킨 주체는 잎사귀를 주워 내민 이유나의 손이다. 수화언어로 연기하는 이유나의 등장마다 우리는 그녀의 손이 보여주는 움직임에 빨려 들어간다. 첫 등장인 오디션 장면에서 카메라는 ‘손의 언어’를 복잡한 동선과 숏의 변화 없이 차분하게 보여준다. 다른 배우들의 다국어 오디션이 카메라로 쪼개지고 붙여지는 동안에도 침묵 속 ‘손의 언어’는 굳건하다. 유나와 윤수가 마련한 식사자리 장면 또한 마찬가지이다. 카메라가 나머지 세 사람 의 등을 비추며 어둠 속에 위치할 때도 그녀의 손은 중앙의 빛나는 공간에 놓여있다. 가후쿠가 히로시마에서 만난 새로운 언어는 ‘손’외에도 존재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침묵하되 매번 섬세한 응답을 보내 주는 드라이버 미사키의 언어이다. 미사키는 어디든 가 달라는 가후쿠의 질문에 긴말없이 ‘있다가 없어진 흔적의 공간’으로 차를 몬다. 가후쿠의 과거사를 들은 뒤엔 “소중하게 대해 온 게 느껴져 그의 자동차가 좋다”는 말을 고른다. 그 정점은 가후쿠가 생각할 만한 장소를 물을 때 그녀가 자동차를 툭툭 두드린 몸짓이다. “차 안이 좋겠네요”같은 말은 구태여 하지 않는다. 어쩌면 겉으로는 상응하지 않는 듯 보이는 문답이지만 드라이버 미사키가 가진 ‘운전수의 언어’는 결국 가후쿠를 아픔에서 건져낸다. 그를 설산 위의 빨간 자동차까지 데려간다. 다시 하마구치의 말로 돌아와 보자. 섬세한 연기의 탄생은 불안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 불안은 ‘바냐의 언어’를 붙잡고 싶은 가후쿠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정해둔 청자를 놓치기 싫은 불안감이다. 자신이 선택한 언어는 곧 자신이 선택한 청자와의 연결통로를 만든다. 이 다국어 연극 속에서는 상대배우의 낯선 언어가 끊임없이 낯선 연결통로를 만들고 있다. 가후쿠는 이 연극의 연출가로서 배우들이 감정을 제외하고 대본의 글자만 읽게끔 지시한다. 미리 결정하고 외워서 재현하는 감정표현과 그것을 서로의 큐사인으로 사용하는 순간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정작 가후쿠 자신은 그것에 실패했다. 그는 오토가 가진 ‘꿈의 언어’를 습관적으로 되돌려 주었을 뿐이다. 꿈이야기의 소녀처럼 징표를 남기고 싶어한 오토의 부유를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가후쿠가 ‘대본의 언어’뒤로 숨고, 오토가 ‘꿈의 언어’뒤로 숨었을 때 둘은 ‘좀 더 제대로 상처 받았어야’ 했다. 경계했어야 했다. 야외 리허설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유나가 상대 배우를 등 뒤에서 껴안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는 불쑥 상대의 눈 앞으로 수화를 등장시킨다. 통상의 음성언어에서는 두 사람이 한 방향으로 서 있을 때 껴안지 않아도 의사 전달이 가능하다. 하지만 낯선 손의 언어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나뭇잎을 주워 주며, 바냐 아저씨의 가슴과 턱을 두드리며 말한다. 이 낯선 연결통로의 생성은 ‘무언가’를 만든 힘이고 가후쿠와 미사키가 서로를 안아주게 한 동력이다. “실제로 섬세한 연기가 탄생하는 것과 가후쿠를 비롯한 상처받은 영혼들이 재생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 전개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감독의 대담 속 한 구절을 통과하며, <드라이브 마이카>의 차별점에 대한 실마리가 보인다. 물론 영화는 전작들의 장기인 ‘어긋남과 기다림’의 테마를 가후쿠-오토의 관계 속에 능숙하게 녹여낸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숏은 ‘오토를 외면한 가후쿠가 상처를 직면하고 나아간다’는 하마구치 식 서사구조 역시도 또렷히 전달한다. 다만 이번에는 여기에 연기자 가후쿠의 시선을 덧붙인다. 연기 불가능 상태인 가후쿠에서 시작해 연기 가능상태인 가후쿠에 도착하는 과정. 가후쿠가 연극을 둘러싼 새로운 언어들을 만나 불안을 겪고, 그 불안에서 탄생한 섬세한 위로를 경험하는 과정. 왜 이번에는 맞은편인 연기자의 시선을 경험하게 하면서 이 서사구조를 보여주었을까. <아사코> 속 아사코의 맞은편에는 새 남자친구인 료헤이가 있다. 료헤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아사코가 전 남자친구와 갔던 사진관에 놓인다. <우연과 상상> 속 나츠코의 맞은편에는 미카가 있다. 미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대화 속 첫사랑의 자리에 놓인다. 이때 주인공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상대를 오인하고 맞은편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가후쿠의 시선을 경유하며 이 시간이 단순한 오인이나 관찰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연기를 ‘요구’하는 중임을 안다. 맞은편의 상대에게 낯선 언어와 낯선 연결통로를 제안하는 중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 제안이 상대방의 재생을 촉구한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이는 그동안 스크린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관객석에도 해당된다. 우리도 가후쿠처럼 하마구치 영화에서 주인공의 맞은편에서 자리한 채 낯선 언어를 제안받아 재생을 경험했을지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냐는 야외리허설 장면과 동일한 정면샷으로 가후쿠를 안아준다. 하지만 객석을 등을 지는 것이 아닌 정면으로 마주보며 안아준다. 그렇게 연습 당시 두 배우 사이에 일어난 ‘무언가’가 드디어 객석의 미사키에게도, 스크린을 보는 우리에게도 허락된다.
성미산 마을에 살고 있다. 생면부지의 열 가족과 함께 돈을 모아 대지를 구입해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4호(먼저 지어진 건물이 3개가 있다)라는 이름의 공공주택을 지었다. 성미산 마을 주민들이 대개 그렇듯이 마을에서 이름 대신 불리는 별명도 생겼다. 과메기를 좋아해 과메기라고 지었다. 몇몇 코흘리개들은 ‘꽈배기’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에 이사 온 지 딱 1년 됐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까닭에 집단보다는 개인 생활이 훨씬 편했던 내가 이곳에 온 건 거창한 이유나 사명감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아이가 없기 때문에 공공육아는 큰 관심이 없다. 마을 생활을 하고 싶다는 대단한 로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천정부지로 치솟는 전셋값과 이것을 붙잡을 마음조차 없는 정부의 주택정책에 신물이 나 있던 차에 공공주택 입주자를 모집한다는 전단지를 우연히 보고 참여하게 됐다. 덕분에 내 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다큐멘터리 < 춤추는 숲 >처럼 음식을 나눠 먹고, 마을 체육대회에 참여해 함께 운동하며, 문제가 생기면 함께 고민해서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마을 살이’라는 걸 해보니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때로는 무척 귀찮다. 먼저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이웃이 음식을 선물해주면 그 고마운 마음에 보답해야 하고, 주말에 체육대회 같은 행사가 있으면 낮잠은 포기해야 한다. 공공주택이나 마을 일에 큰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시간을 내서 머리를 맞대야 한다. 신경 써야 할 일이 곱절은 늘었고, 그 과정에서 이웃과 소리를 높일 때도 많다. 혼자서 온갖 짜증을 내다가 이 집과 마을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던 중 마을에 살기 전에 봤던 < 춤추는 숲 >을 최근 다시 감상했다. 예전에 알고 있던 그 작품과 너무나 달랐다. 다시 본 <춤추는 숲>은 서울에 이런 공동체 마을이 있다는 호기심,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성미산 마을과 다르다는 상대적 박탈감과 질투심, 마을이 자본주의의 대안이라는 교훈 등 이런 메시지를 말하려는 작품이 아니었다. 남들과 함께 살려면 노력과 수고로움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다큐멘터리였다. 특히,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모여 성미산 개발 반대 운동을 하는 장면은 사람들이 공동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고, 여러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다른 이웃끼리 많은 갈등을 겪었는지, 추운 겨울에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로움을 들였는지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여 개발의 광풍으로부터 산을 지켰다고 생각하니 공동체 생활에 익숙하지 않는 나로서는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머리가 아찔해진다. 뭐든지 간절히 바라기만 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아주 냉혹한 현실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강석필 감독과 홍형숙 감독은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신작 < 소년, 달리다 >를 선보였다. 이 다큐멘터리는 < 춤추는 숲 >에 이은 성미산 마을 3부작 중 2부작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성미산 개발 반대 운동 당시 어렸던 민수와 상호, 두 소년이 성년이 된 이야기인데, 일 핑계로 아직 보지 못했다. 지나온 시간 동안 두 소년이 어떻게 자랐을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어떤 일이든지 시간이 지나면 물이 고이듯 발전이 정체되고 때로는 본의와 다르게 퇴보의 길을 걷게 된다. 한 개인의 삶도 그러하고 국가도 그러하고 사회도 예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러한 성찰적 인식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도 않고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일정한 시간이 쌓이고 그 속에서 조금씩 문제가 누적되어 언젠가는 임계점에 다다를 때 문제가 불거지게 되고 해법을 찾기 시작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해결되기도 하고 문제가 드러났을 때는 이미 고칠 수 없는 단계에 다다르기도 한다. 이를 인식하는 것이 쉽지도 않지만 스스로 문제점을 알아내기란 더더욱 어려운 법이다. 결국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보다 객관적으로 문제점을 알아나가게 된다. 결국 우리 모두는 타인의 타인이자 서로의 자신이므로 이 관계망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고 거기에서 보다 나아지려는 진보의 씨앗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은 예전처럼 안녕하십니까? 식사는? 등의 생존적 가치에 대한 물음보다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보셨습니까? 라는 사유적 관계망의 형성과 유지가 삶의 이유나 가치를 더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가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독립영화도 이런 틀에 비추어 보았을 때 현재 어떤 길을 가고 있으며 지향점이 무엇이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좋은 경로를 확보하고 있는 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의 가치를 드러내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독립영화는 그것을 드러낼 기회가 여전히 부족하고 또 그것을 쉽고 대중적으로 전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이것은 비단 제작비의 조달이나 배급여건이 좋지 않다는 등의 일반적인 측면의 분석이라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혹여나 왜 만들고 있는 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아닌지 타인의 집단적 실체인 관객이라는 분명한 대상에 대한 파악이 없는 공허한 자족적인 영화들이 아닌지 등 여러 고민이 녹아든 영화로서의 독립영화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독립영화가 예전처럼 거대한 담론을 담거나 사회비판의 선봉에 서거나 하는 역할들은 상당히 줄어들었고 자연스러운 결과로 사회 참여적 영화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재의 영화들이 사라져도 좋을 만큼 우리 사회가 태평성대가 아니듯 현실에서 이러한 영화들에 대한 요구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제작방식을 답습하는 형태가 아니라 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동일한 문제의식도 시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듯 독립영화도 이 시대의 관객들이 사랑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자족적 이슈파이팅이 아니라 다수가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그 지점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연 지금의 독립영화는 이런 요건들을 갖추고 있는지 자문해 보고 싶다. 사회가 팍팍해지면 질수록 사람들이 느끼는 일상의 피로감은 가중된다. 이것이 영화라는 상품과 만나는 지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 피곤함을 해소해 줄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겠지만 특히 영화가 상품으로 기능할 때 관객들은 일상의 피로감을 조금이나마 식혀주기를 원한다. 사회적 현상에 대한 새로운 문제 제기보다는 지친 심신을 위무해 줄 그런 역할을 요구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서는 할리우드처럼 오락상품으로서의 영화라는 역할이 점점 커지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환경적 요인을 배경으로 독립영화는 자신의 위치를 설정해 보아야 한다. 독립영화에서 거대담론을 다루는 부분이 줄어들자 이 자리를 일상이 파고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꽤나 오래전부터 있어온 것이지만 이 일상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자신의 프리즘을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극히 일상적이거나 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사고의 틀 속에서만 제시되곤 한다. 원점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만드는 독립영화가 과연 타인 또는 관객이라는 거울을 잘 들여다본 결과인가를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자신만의 공허한 메아리로 그친다면 그리하여 관객으로부터 독립되어버린 외딴 섬과 같은 영화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여기에 시장 상황을 비롯해 다양한 핑곗거리가 있긴 하겠지만 구차한 변명으로 그 생명력을 이어가서는 안 된다. 대중의 지친 일상에는 여러 정치·경제적 상황이 근저에 자리하겠지만 이 일상의 위로가 되지 못하는 영화와 할리우드라는 거대 상품으로서의 영화가 오락을 부추기는 상황까지 겹쳐진 이 상황은 더욱 영화를 한 측면으로만 몰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위치선정이 불분명한 독립영화가 양산된다면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누구도 만족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우리들의 독립영화들이 사실은 자신을 가장 잘 모르고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가 아닐까라는 자성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오늘의 독립영화는 자신이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동시에 가장 잘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타인이라는 관객에 주목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