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급자를 위한 이태리어
- 감독
- 론 쉐르픽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안데르스 W. 베르텔센, 피터 간츨러, 라스 칼룬드, 카렌-리즈 민스터, 아네트 스퇴벨배크, 마틴 브리그먼, 예스퍼 크리스텐센, 수잔 올덴버그
중앙관은 1921년 10월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에서 영락정 상품진열관 앞에 세운 영화관이다. 중앙관을 세운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朝鮮活動寫眞株式會社)는 1920년 8월 나카무라 히코(中村彦) 외 두 명이 영락정 상품진열관 건너편에 극장을 짓기로 출원하자, 이를 계기로 세키상점(關商店)의 운영주이자 경성상업회의소 상의원 대표인 세키 시게타로(關繁太郞)와 마쓰모토 민스케(松本民介), 이와모토 요시후미(岩本善文), 후지토미 구니다로(藤富國太郞), 나리키요 다케마쓰(成淸竹松), 사노 히고쿠라(佐野彦藏), 미나미 겐베이(南源兵衛) 등 경성의 일본인 실업가들이 중심이 되어 자본금 50만원에 불입금 12만 5천원 규모로 세운 흥행 목적의 주식회사이다. 1921년 4월 설립한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에서는 활동사진관 신축에 나서 1921년 10월 15일 중앙관을 개관했다. 개관 당시 중앙관은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직영관이자 제국키네마(帝國キネマ) 특약관으로 “막대한 자본과 좋은 입지조건, 그리고 비교적 잘나가는 변사와 오케스트라로 경성 키네마계를 지배”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앙관에서 상영한 필름은 제국키네마에서 제작한 일본 영화와 이태리 영화가 중심이었다. 중앙관 신축을 시작으로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는 경성과 인천에 있는 활동사진관을 인수하여 흥행 및 배급을 강화하고 영화촬영소를 세워 영화제작에 나설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풍부한 자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이러한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앙관에 근거지를 둔 영화제작 조직은 극동영화구락부(極東映畵俱樂部)였다. 극동영화구락부는 1922년 9월,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주요 인물들인 나리키요 다케마쓰, 이와모토 요시후미, 이와타 센타로(岩田仙太郞)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나리키요 다케마쓰의 아들인 쇼치쿠 촬영기사 나리키요 에이(成淸榮)가 전속 촬영기사였으며 중앙관에서 연쇄극을 공연했던 오미 후미노스케(五味文之助)가 이끄는 연쇄극단이 전속 배우로 합류하였다. 극동영화구락부에서는 가장 먼저 경성일일신문사(京城日日新聞社)에서 주최한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大阪毎日新聞社)와 만철(滿鐵) 간의 야구경기의 실사 영화를 촬영했고 이어 극영화 <국경>을 제작했다. 극동영화구락부에서 제작한 <국경>은 조만국경 지역을 배경으로 조선인 무장독립운동가들로 상상할 수 있는 마적단을 토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23년 1월 13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조선인 학생들의 야유로 인해 상영이 중단되었고 이후 상영이 재개되지 않았다. 영화 개봉 하루 전, 경성 시내에서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조선인을 자극시킬 만한 내용의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경찰이 금지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극동영화구락부는 제대로 된 활동 없이 문을 닫았다. 1920년대 중앙관은 제국키네마의 영화를 비롯해 마키노키네마, 동아키네마 등의 영화를 상영했다. 개관 당시 중앙관은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직영으로 제국키네마의 영화를 상영했는데 1922년 10월에는 제국키네마가 중앙관을 직영하게 되면서 이름을 제국관(帝國館)으로 바꾸었다. 제국키네마에서는 새로운 경영진을 보내 중앙관을 운영했는데 개관 당시 경영을 맡았던 히라노 후쿠마쓰(平野福松)를 비롯해 나카야마 로게쓰(中山朧月)가 다시 경영자로 들어왔으며 변사진도 새롭게 바꾸었다. 하지만 제국관으로의 전환은 큰 효과를 얻지 못한 채 적자만 누적되자 문을 닫게 된다. 1923년 제국관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이름을 중앙관으로 다시 바꾼 인물이 오모토(大本)와 모리(森) 두 사람이었다. 이들 새로운 경영자들은 제국키네마와 관계를 끊고 오사카로 건너가 쇼치쿠 을부(乙部)영화를 수입하기로 하고 쇼치쿠 특약관으로 전환했으나 경영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관은 경성의 유서 깊은 여관인 파성관(巴城館) 주인이자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주주인 마쓰모토 민쓰케가 경영권을 인수한 후 후지모토 쇼죠(藤本省三)를 지배인으로 내세워 경영을 시작했다. 후지모토는 쇼치쿠 영화를 대신하여 마키노키네마의 영화를 상영하였는데 마키노 영화에 대한 호평이 늘어나면서 중앙관의 운영은 점차 안정되었다. 1925년 마쓰모토 민쓰케가 중앙관 운영에서 손을 떼고 마키노키네마와 합병한 도아키네마(東亞) 직영으로 바뀌었으나 마키노 쇼죠가 도아키네마에서 나와 마키노프로덕션을 설립하게 되자 중앙관은 도아키네마 직영에서 마키노프로덕션 직영으로 바뀌게 된다. 자연히 중앙관의 영화도 마키노 계통의 영화를 상영하였다. 이 시기 중앙관은 다른 영화관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불황과 1926년부터 시행된 필름검열 수수료 부담으로 인한 비용 증가 등으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따라 1930년 8월 15일부터는 위층 20전, 아래층 10전의 입장료를 받는 등 프로그램에 따라 입장료를 탄력적으로 운용하면서 경성의 일본인 상설관의 가격 인하를 주도하였고 캐러멜회사와 제휴하여, 입관자들에게 캐러멜을 위층 6개 아래층 4개씩 나눠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중앙관은 1930년 1월 경성의 일본인 극장 중 처음으로 토키영화를 상영하였으며 1930년 4월 25일 데이코쿠키네마의 히트작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가>(何が彼女をさうさせたか)를 시작으로 데이코쿠키네마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조선극장에서도 상영되었는데 5년여 동안 조선으로부터 차단된 제국키네마 영화가 조선에서 상영되는 계기였다. 1931년 11월 중앙관은 오다 유키치(小田勇吉)가 경영을 맡았다. 이 당시 데이코쿠키네마가 신코키네마로 바뀌면서 중앙관 역시 신코키네마의 특약관으로 있었다. 하지만 중앙관 운영권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기자 중앙관 경영자 오다는 1934년 11월 경성흥행협회 회장인 경성극장(京城劇場)의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와 부회장인 조일좌(朝日座)의 오이시 사다시치(大石貞七)를 공동경영자로 끌어 드렸다. 1936년 들어 약초극장과 명치좌, 황금좌 등 신축 영화관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경성의 영화관은 크게 요동치게 된다. 같은 해 9월 중앙관은 신코키네마와 절연하고 다이토영화사의 조선봉절관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되지만 경영 악화로 인해 고전하게 된다. 1940년 10월 17일 중앙관 역시 새롭게 개장 후 개관하게 되면서 이름을 중앙영화극장으로 바꾸고 신코키네마 2번관이 된다. 운영자 역시 바뀌어 조일좌 운영주 오이시 사다시치가 맡았다. 하지만 중앙영화극장은 인근에 위치한 신코영화 봉절관인 경성극장에 비해 입장료가 불과 10전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에 관객들을 유치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경성극장이 영화관으로 전용된 후 경성의 일본인 전용 연극극장이 전무하던 상황이었기에 운영자 오이시는 중앙영화극장을 연극극장으로 전환할 것을 고민하게 된다. 오이시는 가장 먼저 조선악극단에 위탁경영을 제의했으나 교섭에 실패했다. 이어 조선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던 도호와 협의를 시작하여 1940년 12월 중앙영화극장을 신코영화의 2번관에서 도호의 2번관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이름도 동보문화극장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문화극장이라는 이름이 문화영화와 시사영화 전문 상영관이라는 인상을 주었기에 1941년 7월 이름을 동보중앙극장으로 개칭하였다. 영화배급 통제가 실시되면서 홍계 상영관으로 있었던 동보중앙극장은 1944년 9월부터 연극장으로 전환하게 되면서 중앙극장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1945년 5월에는 전창근, 김태진 등이 주축이 된 극단 태양을 전속 극단으로 두었다. [자료] 1960년대 중앙극장(국가기록원) 해방 후 중앙극장은 연극전용관에서 영화관으로 바뀌었으며 흥행업계에서 오랫동안 활약하던 김상진(金尙鎭)이 적산관리인으로 있었다. 1950년대 벽산그룹의 모태가 된 불이무역(不二貿易)의 김인득(金仁得)이 소유하고 있던 중앙극장은 1998년 3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영화관으로 전환하며 이름을 중앙시네마로 바꾸었으나 벽산그룹이 도산하면서 2010년 폐관하였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 [사진](상단) 중앙관 개관 광고(《경성일보》, 1922.10.15) [자료] 매일신보, 1921.03.09. 경성 ( 京城 ) 에 우 ( 又 ) 상설관 ( 常設館 ) / 일홈은 즁앙관이고 자본금은 오십만원 경셩의 연예계ᄂᆞᆫ 종ᄅᆡ로 잘 발뎐이 못되고 도리혀 쇠하 야 가ᄂᆞᆫ 모양이오 졈졈 활동사진을 인하야 시민의 연예와 오락 ᄎᆔ미가 ᄉᆡᆼ기여 오ᄂᆞᆫ 바 현ᄌᆡ는 내디인 편이 활동사진 상설관이 셰시나 잇고 됴션인 전문의 상설관은 다만 둘밧게 업ᄂᆞᆫ데 또 이것ᄲᅮᆫ으로도 시민의 긔ᄃᆡ를 맞츄어 줄 설비와 ᄉᆡ로운 ᄉᆞ진을 속히 뎨공하지 못하ᄂᆞᆫ 것이 유감되여셔 이 결ᄒᆞᆷ을 보츙하고 ᄯᅩ 됴선 만주에 자랑ᄒᆞᆯ만한 완전히 설비한 상설관을 건설하야 보려고 지ᄂᆞᆫ번 ᄅᆡ로 시ᄂᆡ 유지ᄌᆞ들에 의하야 그 계획이 진ᄒᆡᆼ되ᄂᆞᆫ대 이번에 아죠 허가를 엇어셔 됴선활동사진주식회사가 츌현하게 되엿ᄂᆞᆫ대 ᄌᆞ본금은 오십만원이요 쳐소ᄂᆞᆫ 영락뎡 1 뎡목 상품진렬관 압이오 ᄅᆡ월에 챵립 총회를 열고 쇽히 역사를 하야 ᄶᅡ른 긔ᄀᆞᆫ에 쥰공하고 즁앙관 ( 中央館 ) 이라고 일홈을 진다ᄂᆞᆫᄃᆡ ᄆᆡ우 찬셩자가 만타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1.03.08 . 조선활동진보 ( 朝鮮活動進陟 ) 경성 영락정 상품진열관 전 ( 前 ) 에 상설관을 건설하고 활동사진 급 ( 及 ) 차 ( 此 ) 에 부대하ᄂᆞᆫ 영업을 행ᄒᆞᆯ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는 기보와 여 ( 如 ) 히 창립사무가 진척하여 발기인의 부담주를 정한후 찬성주의 할당에도 착수하였ᄂᆞᆫᄃᆡ 하여간 자본금 50 만원으로 총 주수 1 만주에 불과ᄒᆞᆷ으로 주주를 광 ( 廣 ) 히 일반 시민에 모집하고 발기인의 독점의 폐를 피 ( 避 ) 키 위하야 발기인의 특주ᄂᆞᆫ 150 주씩 4 천주로 정하였ᄂᆞᆫ대 발기인 중에 다수히 주를 요구하ᄂᆞᆫ 자가 유하야 점차 주식분배 상 부심 ( 腐心 ) 중인바 여하여간 유리한 활동사진흥업의 영리 회사임으로 찬성인이 속출하야 기히 이배 반의 신입 성적을 거 ( 擧 )하 얏스며 일양일 ( 一兩日 ) 중에 찬성주의 할당을 요 ( 了 )하 고 일천주를 할 ( 割 )하 야 일반에 모 ( 募 )하 기로 ᄒᆞᆯ 터이며 창립사무소를 영락정 경매조합에 치 ( 置 )하 야 창립사무를 급속히 하ᄂᆞᆫ 중이라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1.03.16 . 조활창립총회(鮮活創立總會) 조선 활동사진 회사 래 ( 來 ) 십구일부터 이십삼일 지에 제일회 불입을 료 ( 了 ) 고 래 사월 칠일 창립 총회를 개최 터인대 창립 총회 종료와 공 ( 共 ) 히 직 ( 直 ) 히 상설관 건축에 착수 다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1.10.11. 중앙관 개관 ( 開館 ) 피로 ( 披露 ) 예 ( 豫 ) 히 공사중이든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경영에 의한 중앙관 ( 영락정 1 정목 ) 은 수 ( 遂 ) 히 공사 준공 되얏슴으로쎠 10 일 당국 검사를 종료하얏슴으로 13 일 개관피로연을 겸하여 제국활동사진을 시사ᄒᆞᆯ터인대 초대 인원은 관민 유력자 신문기자 주주 전부에 긍 ( 亘 ) 하야 약 1,500 명의게 각각 초대장을 발하얏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4.06.26. 미국영화 상영중지 / 대정관과 중앙관 일본이 미국의 쳑하 형셰 로 고됴되야 최근에 이르러셔 젼국에셔 각죵 물품을 쳑하 동시에 일반 화 ( 華客 ) 의 환심을 사고 부심하 민쳡 상인들은 벌셔브터 간판 ( 看板 ) 의 미국이라 글발을 삭졔하며 혹은 미국품을 팔지안는다 광고를 널리하야 연히 미 긔분이 농후하야 가는 터인바 경셩 활동 진 상셜관 ( 活動寫眞 常設舘 ) 에셔 내디 각 디방에서 미국 「 필림 」 을 쳑하 영향을 바다 관 들도 미국 사진을 죠와하지 안는 경향이 잇슴으로 대졍관 ( 大正舘 ) 에셔 솔션하야 불일간 미국영화 ( 米國映畵 ) 를 즁지하고 시대물 ( 時代物 ) 로써 보츙하고 계획한다하며 한 동업 즁앙관 ( 中央舘 ) 에셔 이에 공명하야 미국 진 대신에 목야 ( 牧野 ) 의 독특한 시대극 ( 時代劇 ) 으로쎠 보츙하고자 게획중이라 대 대졍관에셔 벌셔브터 문압을 장식하야 잇 만국긔에셔 미국긔를 여바렷드라 .
극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영화 평론가였던 오영진(1916-1974)은 대단한 영화광으로 알려져 있다.태평양전쟁 전에는 일주일에 4, 5회나 극장에 갈 정도였고, 경성제국대학 재학 중에는 제국대학생들의 문예지였던 『성대문학(城大文學)』 동인들과 함께 영화동호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1936년 출범한 이 영화동호회는 경성제대 학생식당에서 창립 모임을 가졌는데, 오영진은 이 자리에 법문학부의 경제학 교수 스즈키 다케오(鈴木武雄)를 초대해 ‘영화담’을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경성 부민관에서 ‘총후 학생 문화 운동’을 명분으로 영화 관련 행사를 여는 등 영화동호회 활동에 꽤 열성적이었다. 솔직히 말하여, 20년 전에 나로 하여금 대학 안에 ‘영화동호회’를 조직케 한 큰 원동력은 불란서영화이었다. 그때, 우리들 젊은 대학생들은 불란서영화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러시아문학보다도 더 광범히 사랑하였다. 일본을 거쳐 우리에게 소개된 불란서영화의 수효는 지극히 소수의 것이었다. 그러나 1년에 5, 6 작품밖에 안 되는, 이 정선된 작품, 하나하나가 마치 주옥같은 걸작들이었다. 쥬리앙‧뒤비비에, 자크‧페에데, 르네‧클레에르 등등의 예술품이 20년이 지난 오늘도 생생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1 영화동호회를 결성하고 20여 년이 지난 후, 오영진은 자신과 친구들을 영화광으로 만든 것이 ‘불란서영화’였다고 회고했다. 원래 문학청년이던 그는 쥘리앙 뒤비비에(Julien Duvivier) 감독이 연출한 일련의 ‘문예영화’들, 즉 <상선 테나시티(Le paquebot Tenacity, 1934)>나 <우리들의 동료(La belle équipe, 1936)> 같은 영화를 좋아했다. 프랑스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당시 오영진만의 유별난 취향은 아니었다. 일본과 조선의 문화 엘리트 사이에서 이른바 ‘프랑스 4대 명장’―르네 클레르(Rene Clair), 쥘리앙 뒤비비에, 자크 페데(Jacques Feyder), 장 르느와르(Jean Renoir)―의 영화는 각별한 애호와 지지를 받았고, 그중 장 가뱅(Jean Gabin)이 주연한 뒤비비에 감독의 영화 <망향(Pépé Le Moko, 1937)>은 영화 좀 본다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언급할 정도로 화제작이었다. 프랑스영화 외에도 이태리,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등에서 제작된 영화들이 일본을 거쳐 조선에 도착했고, 젊은 학생과 지식인 관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식민지 시기 조선에 수입되는 외국영화 중 유럽영화는 수적으로 줄곧 열세였고 스크린 점유율도 낮았다. 수입 외화의 90% 이상을 할리우드 영화가 차지했다. 그러나 문화 엘리트들에게는 유럽영화가 근대인의 교양이자 이상적인 예술이라 인식되었고, ‘우수한 좋은 영화’라는 의미로 ‘명화(名畫)’와 동일시되곤 했다. 오영진이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1930년대 중반, 경성의 극장가에서 유럽에서 온 ‘명화’는 실패가 없는 흥행 상품이기도 했다. 유럽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이 높아서 각종 단체나 언론사는 부민관과 같은 비영리 공간을 빌려 ‘명화감상회’를 주최하고 경성의 영화광들이 ‘명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시기 경성의 유럽영화 관객층은 이전 어느 때보다 폭넓어졌으며, 유럽영화에 대한 담론 공간 역시 크게 확대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7월, 오영진은 《조선일보》에 「영화예술론 - 그 예술성과 오락성」(1937년 7월 6일~9일)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전문적인 영화 글을 쓰게 된다. 경성제대 영화동호회의 짧은 역사는 전쟁 발발 직후 막을 내렸지만, 영화동호회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 영화인 오영진의 시대는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 일본 유학길에 오른 그는 동경발성영화제작소에 입사해 조연출로 일하며 일본의 제작 현장을 경험했고, 1942년 조선에 돌아와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촉탁을 지내며 『배뱅이굿』, 『맹진사댁 경사』 등의 시나리오를 발표했다. 해방 후에는 예술원 회원으로서 남한 문화 권력의 중심에서 영화계 원로로 활동했다. 특히 대종상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우수영화’ 선정에 관여하기도 했는데, 당시 영화평론가 이영일이 진행한 좌담회 「꿈을 키워준 시절의 영상 / 나의 영화적 낭만의 시대」(『영화예술』, 1965년 4월 호)를 보면 그에게 ‘좋은 영화’란 청년 시절에 사랑했던 영화들을 모범으로 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오래전 그 영화들을 ‘명화’로 기억하는 것은, 영화광이었던 청년 시절의 자신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1941년에 개봉된 영화 <반도의 봄>(이병일)은, 묘하게도 이처럼 유럽의 ‘명화’에 열광하며 좋은 영화는 몇 번이나 다시 보았던 1930년대 경성의 영화광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춘향전>의 제작 과정을 담고 있는데, 눈 밝은 관객이라면 <춘향전>의 대척점에 있는 또 다른 ‘영화 속의 영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미장센의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는 유럽영화 포스터들 말이다. 전쟁 중,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이 표출되던 때이던 만큼 외국영화에 대한 열기가 유럽영화로 집중되었을 수도 있지만, 작품 속 영화인들의 사무실과 분장실, 극장 계단에 걸린 유럽영화 포스터들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반도의 봄>이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리라. 단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데에도 온갖 곤경을 겪어야 하는 조선의 영화인들에게 <마주르카(Mazurka, 1935)>, <청춘의 바다(Abel mit der Mundharmonika, 1933)>, <부르크 극장(Burgtheater, 1936)>, <제니의 집(Jenny, 1936)>, <어여쁜 청춘(Hélène, 1936)>, <열풍(Amok, 1934)>, <소곤거리는 나무 그늘(So endete eine Liebe, 1934)>, <고향(Heimat, 1938)> 등 저 유럽영화들이 가리키는 세계는 아득히 먼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영화인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분투했던 힘은, 동경하던 예술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 싶어하던 영화광들의 열정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1) 오영진, 「불란서영화의 금석(今昔) - 젊은 팬을 위하여(1956)」, 『오영진전집 5. 영화평론‧수필』, 범한서적, 1989, 16쪽 사진 2, 3, 4. <반도의 봄>에서 * 상단사진1. <반도의 봄>의 한 장면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음악명화(音樂名畫)의 던진 거탄(巨彈) “동․키호테”는 살었다」, 《조선일보》, 1938년 7월 8일자, 4면. 지난 5, 6 양일간 본사 주최로 부민관에서 개최된 음악명화 감상회는 절대의 인기로써 대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때마침 공습관제 하에 긴장되었던 민중이 5일 이 비상경계가 해제되자 그들은 비로소 새로운 광명의 세계에 해방된 듯 다시 보기 어려운 이 명화를 찾아 정각 전부터 모여들었다. 이제 여기 이모저모의 풍경과 각 방면 인사의 소감편편을 엮기로 하자. 이를 통하여 느낀 첫 인상을 한 말로 한다면 예술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이며 위대한 예술일수록 인류에게 더 강한 친화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이 영화감상회는 어찌 보면 영화라는 한정된 세계보다도 영화가 표현한 순수한 영화의 경지 이외의 더 큰 문학적, 음악적, 예술적인 거룩한 생명을 우리에게 느껴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 이유가 이 영화 감상미를 더 의의 깊게 한 것 같다. 그렇길래 좀체로 외출 안하시던 조선 문단의 선구이신 벽초 홍명희 선생도 시간을 놓치지 아니하고 정각 전에 시원한 푸른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오셨고, 이화전문에서는 요새 근로봉사로 모두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전 학교 선생, 학생 백여 명이 단체로 구경 왔던 것이다. 눈에 제일 많이 띄는 학생 중에는 연전(延專), 세전(世專), 불전(佛專), 법전(法專)의 전문학생과 흰 테를 두른 대예 [필자주: 大豫, 즉 경성제대 예과를 가리킨다.] 학생이 그중 많았다. 중학교는 마침 학기 시험인 관계가 있기는 하면서도 참다운 문학과 영화를 사랑하는 4, 5학년 학생들의 씩씩한 얼굴들이 보이는 것은 매우 반가웠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정답게 예술과 사상으로 맺어진 안호상, 모윤숙 부부와 이태준, 이순옥 내외의 양자가 보이는 것도 이 감상회의 이채일 것이요, 동덕고녀(同德高女)에서는 비가 쏟아지는 둘째 날 시험 때의 바쁨도 무릅쓰고 음악선생 정순철, 이형우, 정갑 외 여러 선생이 오신 것도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평론가 백철 씨가 이 감상회 때문에 평양으로 급히 가야할 일을 하루 연기하는 정성도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이 명화감상회를 보신 이 중에서 감격된 인사 몇 분의 자발적 감상의 편편을 모아보자. 김상용 씨 : 시인이요, 겸하여 이전(梨專) 문과 과장으로 계신 씨는 이 영화회가 세상에 알려지기가 급하게 여러 해를 두고 기다렸던 듯 감격하여 “참 내가 솔선하다시피 해서 이번 학생애들을 단체로 구경 가도록 했습니다. 영화도 위대한 예술이라면 위대한 산 교훈과 감격을 줄 수 있는 데 있을 줄 압니다. <동․키호테[Don Quixote, 1933]>는 내 일생에 가장 감격된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좋은 회합을 가지는 게 퍽 좋겠지요.” 김재훈 씨 : 경성음악전문학원을 경영하시는 음악가인 씨는 매우 만족한 웃음을 띠며 “처음으로 <동․키호테>를 영화에서 봤습니다. 물론 샬라핀[Feodor Chaliapin Sr.]의 예술은 음악학도로서 높이 평가합니다. 아무쪼록 자주 이런 훌륭한 예술적 회합을 가지도록 노력해주십시오. 아주 감격했습니다.” 안석주 씨: 열정적인 씨는 상기된 얼굴에 그 음성까지도 다소 떨리는 듯 “참 좋아요. <동․키호테>를 5년 전 처음 볼 때보다도 이번이 더 감격되는데요, 다시 보니까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흥분과 가슴에 넘치는 감명이 있습니다. 참 최고의 예술적 표현과 생명을 가진 것이 <동․키호테>라고 하겠어요.” 안호상, 모윤숙 여사 : 두 분은 나란히 앉아서 이 영화에서 얻은 감명을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하신다. 안(安) : <동․키호테>는 물론 문예작품으로 위대하니까 감명이 큽니다마는 영화로 보기에는 현대 감정을 담은 <윈나의 황혼[Maskerade, 1934]>이 더 나아 뵙니다. 모(毛) : 나는 의상으로나 분위기로나 오히려 <동․키호테>의 그 비장한 장경이 더 좋아요. 두 분의 이야기는 다시 아돌프 월브류크 [필자주: 원문에는 '아돌프 월브류크'로 되어 있으나 안톤 월브류크(Anton Walbrook)의 오기로 추정된다.] 의 연기에 대해서 논하신다. 김성진 씨 : 조선에서도 최고로 가는 영화팬인 씨는 좀 창백하신 얼굴에 다소 긴장된 흥분을 감추어가지고 겸손하게 “자주 이런 회합을 가지도록 해주십시오. 적어도 한 달에 한번쯤 해주셨으면 구경하는 사람으로는 여간 좋은 기회가 아니겠어요. 아주 감격했습니다.” 이날 밤 관중의 그 어느 얼굴에나 긴장되고 흥분되고 감명된 빛이 없는 이가 없었다. 서로 쳐다보는 얼굴에는 비상한 산 교훈을 받은 감이 있었다. 산쵸가 마지막 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우는 장면에서 울음이 난다는 이, 동․키호테가 운명한 후에 들리는 비통한 노래에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감격을 했다는 이……. 악수로 퍼붓는 비에도 밀려나오는 군중에도 옆에 와 이야기하는 데도 전연 무감각한 채 지극한 감명 속에 외로운 듯 초연히 서있는 무서워 보이는 한 얼굴, 돌과 같이 굳어진 그 표정이 분이 솰라핀의 음악과 베토벤의 인간에 지극히 감격되고 숭모하는 정순철 씨인 것은 아마 알아본 이가 그리 많지는 못했으리라. 2. 「꿈을 키워준 시절의 영상 / 나의 영화적 낭만의 시대」, 『영화예술』 창간호(1965년 4월), 30~37쪽, 부분 발췌. [...] 이영일: 그래서 이제부터서 선생님들이 보신 영화 중에서 가장 감동을 많이 받은 영화 한두 편씩 말씀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오영진: 해방 전 것까지 해서—. 이영일: 네… 네, 어린 시절부터 학생 시절에 걸쳐서……. 선우휘: 네, 사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배우 위주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가 하면, 스토리가 좋아서 오래오래 남는 수도 있는데, 제가 지금도 기억 남는 것은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7]>인데 그때가 바로 유럽에서 전쟁이 한창일 땐데 스탭‧캐스트가 나오기 전 자막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영진: 원작자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이었죠. 선우휘: 네… 네. 전문(前文)에 “이렇게 피로써 피를 씻는 동란이 계속되는 시대에 우린 이런 환상적인 꿈을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느냐?” 이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말하자면 유토피아적 세계를 그린 건데, 항공기가 추락되어서 비행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눈보라를 헤치고 가다보니까 석문(石門)이 있어서 열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때부터는 봄과 같은 날씨에 내(川)가 흐르고 새소리가 들리는 돌연변이의 세계가 화면에 나옵니다. 그런 영향에서 그런지 전 꿈이란 것을 생각하면 곧 영화를 생각하게 되더군요. 여석기: 저도 동감인데, 좀 다른 의미로 해석해서, 내가 대학 때니까 1929년입니다. 1차 대전 [필자주: 원문에는 '1929년입니다. 1차 대전’이라고 되어 있으나 오기로 추정된다. 연극평론가이자 영문학자인 여석기는(1922-2014)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있었던 1939년에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 벌어져 독일이 폴란드를 침입해서 주위는 회색으로 변하고 연령적으로 우린 청춘으로서의 꿈도 있어야겠고 윤택한 정서도 필요하고… (추억에 의존할 나이는 아니니까) 그걸 어디서 찾느냐? 결국 문학이나 예술에서 인생을 관조하고 지식을 얻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여기에서 영화가 당당한 역할을 하는데, 그 점에서 꿈의 대용품이라 하겠지요. 영화적 기교는 알 턱도 없고 다만 막연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인생을 다시 찾아보고 싶다는 거겠지요. 선우휘: 그 다음에 생각나는 것으로 ‘페페 르 모코’ <망향>이 있고, <황혼의 비엔나[Maskerade, 1934]>도 좋습니다. 오영진: 윌리 폴스트[Willi Forst]가 나오지요. 선우휘: 그리고 음악영화론 조예가 없지만 <미완성 교향곡[Unfinished Symphony, 1934]> 같은 거……. 오영진: 그것도 윌리 폴스트일 거에요. 이영일: 이제까지 선우 선생께서 명작을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내셨는데…… 최 선생님은……. 최정희: 두 분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참으로 영화는 인생의 꿈을 많이 길러주는 것 같아요. 여석기: 뜻은 좀 다르지만 ‘꿈의 공장’이란 말이 있지요. 일동 : 그렇지요. [...] 이영일: 이런 점에서 영화가 개인 개인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전체적으론 사회적 영향력이 방대하다는 의미도 되겠지요. 매스컴 시대라고 불리는 현대에 있어서 영화의 미디어적 영향이 실로 지대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것은 반대로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관객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영화사회학의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영화예술지는 건전한 관객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은 관객을 많이 가질 수 있느냐? 한국영화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훌륭한 관객사회가 형성되어야 하겠다는 의도에서 ‘시네 클럽’ 운동을 구상했습니다. 그런데 오 선생님, 어떻습니까. 요 먼저 말씀하시던 중에 옛날의 ‘시네 클럽’ 운동이 있었다고 기억되는데요……. 오영진: 우리 대학 땐 영화동호회란 것을 만든 일이 있어요. 학생끼리였지만 교수 한 분을 모시고 연구적인 모임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무의식적으로 영화를 보는 분에도 소설을 쓸 분도 있을게고 영화계에 종사할 분이 있겠지만…… 영화를 어떻게 감상하느냐란 문제를 서로 연구‧토론할 클럽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젊은이들의 교양 향상을 위해서 우리도 대학 때 그걸 만들었다가 일본 학생이 이상하게도 점점 많아져서 오래가진 못했습니다. 이영일: 여 선생님은 어떻습니까? 여석기: 나도 오 선생님 말씀에 절대 동감입니다. 우리들의 대학 때보다는 영화 서클이 적은 것 같아요. 요새야 사회‧정치 서클이 많은데 우리 문학, 연극, 영화 동호회가 보다 활발하여야 되겠습니다. 극장 측과 교섭해서 반액 정도로 감상한 다음에 자유스러운 디스커션을 통해서 인생의 폭을 넓히고 교양을 쌓아야 한다는 것은 유치하건 말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영화계에 들어가려면 직행합니다. 박모(朴某) 감독한테 가서 현실적으로 교섭하거든요.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영광의 주역인 여자 핸드볼선수 임오경에게는 ‘투혼의 또순이’라는 말이 뒤따랐다. 어렵게 번 돈을 낭비하지 않고 모아 시골 사는 부모에게 송아지를 사주었다는 ‘버스 안내양’에게도 ‘또순이’라는 말이 훈장처럼 따라왔다. 그런가 하면 IMF 경제위기를 전후한 시기, 방송드라마에는 이른바 ‘또순이’ 형 캐릭터들이 ‘신데렐라’ 형 캐릭터를 밀어냈다. 이 ‘또순이’들의 원형은 ‘김희창 작 HLKA 방송극으로 억센 함경도 기질 여성 또순이를 부각하여 만인의 갈채를 받은 <행복의 탄생>’의 영화화를 통해 실현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웃으며 살아가는 또순 또순/즐겁게 살아가는 또순 또순/가슴에 태양 안고 희망에 꽃 피우며 슬픔도 괴로움도 세월과 같이/사랑만이 행복만이 꿈같이 벌려져/웃으며 살아가는 또순 또순” 라는 주제가가 ‘억척스러우리만큼 굳건히 생활을 개척해나가는 명랑한 여성상’으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며 청취자의 귀를 만족시킨 데 이어 영화 < 또순이 >( 박상호 , 1963)의 등장은 ‘백만 청취자의 심금을 울린 명작드라마의 영화화, 거센 세파를 휩쓸고 살아가는 함경도 아가씨 또순이의 눈물과 사랑’이란 내용으로 제작 전부터 대중의 관심과 화제를 몰고 왔다. 여성 청취자들의 수요에 부응해 방송드라마에서 영화화 되었을 <또순이>는 가정과 사회의 벽을 무너뜨리고 당시 가정 안에만 머물던 여성들에게 사회를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을 열어준 라디오 멜로드라마가 갖고 있는 친밀감과 근접성 그리고 공공성이 영화로 확장된 것이다. 하지만 영화 < 또순이 >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가파른 세파에 부딪히면서도 ‘남성을 능가하는’ 생활력을 가진 여성을 등장시켜 체념과 인종을 미덕으로 삼는 눈물짓는 여성상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켰기 때문이다. 이영일에 따르면 “이태리 영화에서 소피아 로렌이 그러했듯이 도금봉 을 주인공으로 그려졌던 작품들은 지금까지 슬픔을 받아들이기만 했던 여성들의 생활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여성상을 제공했다. 이 영화는 도금봉의 스타성에 기반하고 있는데 여성 관객에게 도금봉은 이러한 다양한 역할의 총합이면서 자신들이 본 영화와의 상관관계에 따른 기억의 결과물이다. 도금봉은 황진이였는가 하면 류관순이었고 진성여왕이었는가 하면 심청이었으며 <동심초>의 부잣집 딸이었는가 하면 <또순이>의 억척스러운 함경도 처녀였기 때문이다. ‘형이 순이인데 또 계집애가 나왔다 해서 또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녀는 애시당초 집안의 기대가 별로 크지 않았을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서울놈’에게 시집가서 허구한 날 친정으로 돈을 꾸러 오는 언니( 이빈화 )와는 차별되는 60년대가 요구하는 생활형 인간이다. 더구나 한국 전쟁 후 일과 돈밖에 모르는 생활력과 무쇠 같은 성격을 요구했던 월남 피난민들을 대변하면서도 동시에 근대적인 새로운 아버지상이 요구되던 시대상 안에서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대항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갈테니 십 오년 동안 뼈저리게 일해 온 월급을 줘야 할 게 앙이겠소.” 해서 자신의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요구하는 모습이나 짐꾼, 떡장수, 연탄장수 등, 일을 가리지 않는 모습은 ‘자력으로 자신의 생활을 창조한다는 신념’ 아래 부질없이 남을 믿거나 감상적으로 남을 돕지 않는 새로운 인간형의 탄생을 알린다. 영화는 애인 심재구( 이대엽 )가 당한 타이어 사기는 물론 무슨 일이든지 해결해내는 또순이와 운전수로 취직하겠다고 시골에서 올라왔지만 소극적인 태도로 실패를 거듭하는 심재구를 대비하면서 결국 또순이가 심재구에게 새나라 택시를 안기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과년한 딸자식이 집을 나간 것에 대해서 걱정하던” 부모들을 안심시키고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월남한 아버지와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애인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대립과 반목의 완충지로서 국민 대통합에 대한 은유가 된다. 동시에 노동과 일을 통해 국가의 근대화에 통합되었던 미혼 여성들과 공적인 노동의 관계는 어차피 일시적인 것이며 평생의 정체성인 모성을 획득하기 위한 결혼은 당연한 귀결이 된다. 하지만 이성애 커플의 완성을 통한 핵가족의 구성이 근대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불완전함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명랑한 낙관성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희망 잃은 남편/애인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자신은 철저하게 미래의 남편에게 자리를 내주며 그동안의 억척스러움마저도 이를 위한 밑거름이 되는 설정 때문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