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ight
- 감독
- 이현진
- 제작년도
- 2000
최근에 《애니메이툰》에서 한국 애니메이션 50년사를 돌아보는 취지로 인물 열전을 기획했다. 사람이 모이고 이야기가 쌓여 한국 애니메이션사를 돌아볼 수 있는 한 권의 오롯한 책을 만드는 게 목표다. 인터뷰의 첫 주인공은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 < 홍길동(1967) >을 연출한 신동헌 감독님이었다. 그 뒤로 네댓 분을 더 만나 뵙고 이제 막 80년대를 지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그 세월을 짚고 오르기가 숨이 차다. 이제는 백발노인이 된 그들이 작품의 연도는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이구동성으로 “말도 못한 고생”을 외치는 걸 연거푸 듣다보면 내가 전쟁사를 듣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감독님은 애니메이션의 ‘애’자도 듣기 싫어했다. 원로 감독님들이 가난과 고생, 눈물을 섞지 않고 애니메이션을 말할 수 없었던 근거는 ‘창작하기 어려운 환경’에 있다. 고혈을 짜내 애니메이션 만드는 걸 당연하게 여긴 것도 문제지만, 일본에서 ‘아톰’이 히트를 치면 ‘아텀’이라도 만들게 했던 힘센 자본의 논리도 큰 산이었다. 게다가 70년대 들어서는 아류작보다 더 돈이 되는 하청제작의 붐이 일었고, 여기에 부응하지 않고 창작을 하기란 더 어려웠다. 애니메이션이 가난과 직결되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과 달리 하청제작이 쏠쏠한 사업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몇은 창작을 그만뒀고, 몇은 아예 애니메이션을 그만뒀다.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건만 다루는 손길은 엉성하고 거칠었다. 신동헌 감독님의 < 홍길동 >은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도 2007년 일본에서 발굴될 때까지 필름 없이 기록으로만 존재했다. 장편보다 앞서 1961년 제작된 최초의 단편애니메이션 < 개미와 베짱이 >은 완성 당시, 정작 고생해서 만든 정도빈 감독님은 필름프린트를 받을 수 없었다. 자료는 보관하던 사람의 분실로 몇 장의 콘티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이제는 중풍 때문에 말을 듣지 않는 손으로 정 감독님이 인터뷰 때 그려준 <개미와 베짱이>의 개미 캐릭터는 그냥 유치원생의 그림과 다르지 않았다. 소중한 가치들이 증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가와모토 기하치로 감독이 얼마 전 작고한 일은 알아도 50년 전 한국의 여관방에서 셀 200여 장을 물로 씻어가며 첫 단편애니메이션을 만든 사람이 백발이 성성한 채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만들 때나, 만들고 나서나 빛을 보지 못하는 건 매한가진데 누군들 애니메이션 하고 싶을까. 그렇게 많은 작가가 재능을 등지고 애니메이션계를 떠났다. 놀랍게도 창작애니메이션하기 어려운 환경은 먹고살기 어려웠던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아주 오래 전에 애니메이션을 그만 둔 한 원로 감독님이 “지금은 컴퓨터가 있어서 환경이 많이 좋아졌지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딱히 꾸며낼 말을 찾지 못했다. 셀을 씻어서 찍을 필요도 없고, 여러 지원기관도 생겨 좋은 세상이 됐지만 여전히 창작애니메이션을 고난과 함께 이야기하는 일이 익숙한 것은 왜일까. “자기가 만들고 싶은 작품은 자기 돈으로 만들라”는 어느 지원기관 전문가의 조언처럼 아직도 한국애니메이션에서 창작은 곧 외로운 싸움이다. “한국의 ???를 만들자”는 힘찬 구호는 “아텀을 만들라”는 예전의 강요와 약간의 온도 차이만 있을 뿐이다. 대세를 따르지 않은 창작물은 원로 작가들의 작품이 사라졌던 것처럼 선보일 새도 없이 증발하고 있다. 그런 2010년을 지나고 있는 애니메이션사에서 또 몇 명의 작가가 창작을 그만두고 떠나게 될지 모르겠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고난과 역경을 섞지 않고 한국 애니메이션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터뷰가 끝나면 책의 제목을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한국 애니메이션사》 혹은 《한국 애니메이션 전쟁사》라고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다. 더 이상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가 역설적으로는 가장 고됐던 시기가 되지 않기를.
2D 애니메이션이 정지된 그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은 욕망을 채워준다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생명을 얻은 무생물을 마주하는 쾌락을 선사한다. 이 쾌락은 ‘실제가 아니라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컴퓨터 기술 없이, 인형이 움직인다던지 사람이 날아다니는 등 존재할 수 없는 광경의 연출이 가능한 스톱모션은 실사와 확연하게 구분된다. 때문에 스톱모션에서 어느 정도의 부자연스러움과 조악함, 그러니까 ‘가짜 티’는 굳이 숨기지 않아도 좋다. 환상과 실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스톱모션 세계의 묘미는 가짜가 용인되는 데 있으니까. 로알드 달의 동화 《멋진 여우씨》를 원작으로 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애니메이션 < 판타스틱 Mr. 폭스 >는 그 쾌락의 지점을 영리하게 짚어낸 여우같은 영화다. 《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 》, 《 찰리와 초콜릿 공장 》 등 판타스틱 영화의 단골 원작으로 쓰이는 로알드 달의 동화와 <로얄 테넌바움>, <다즐링 주식회사> 등의 영화에서 결핍된 인간 군상들을 그려온 웨스 앤더슨의 만남은 너무나 사람 같으면서 지극히 야생동물인 Mr. 폭스를 만들어냈다. 닭털이를 업으로 삼아오다가 처자식이 생기면서 신문 칼럼니스트로 전업해 고상하게 살고 있는 중년 여우다. 그는 번듯한 슈트 차림에 뻔뻔하게 이족 보행을 하고 신문을 본다. Mr. 폭스 역을 위해 태어난 듯한 조지 클루니의 목소리는 사람보다 여우가 젠틀하고 섹시할 수 있다는 믿음마저 준다. 반면, 식탁 위에 정숙하게 차려진 식사를 으르렁대며 뜯어먹고 굴착기보다 빠른 속도로 땅을 파는 모습은 영락없는 야생여우다. 의례 인간이 동물 캐릭터를 치장할 때 덧붙이는 귀여움도 그들의 외모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불완전한 의인화가 주는 기괴한 매력과 조악한 움직임은 가짜의 ‘환상’을 보여준다. 반면, 소품들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동물들이 입고 있는 옷, 집 안의 가구, 건물 등의 재질과 디테일은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섬세하다. < 판타스틱 Mr. 폭스 >는 스톱모션이라는 기법 안에서 ‘진짜’와 ‘가짜’ 사이의 간극을 장점으로 끌어안아 동화책과는 다른 매력을 갖게 됐다. 어설픈 교훈을 내세워 착한척하지 않는 쿨한 동화작가 로알드 달의 장기 ‘골탕 먹이기’는 애니메이션에도 잘 살아있다. 그 진가는 Mr. 폭스가 닭털이 여우로서의 본능에 충실한 삶을 택하면서 발산된다. 그는 농장주 3인방 보기스, 번스, 빈의 거대한 농장을 상대로 도둑질을 일삼고, 인간들은 자신의 소유물을 훔친 여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숲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Mr. 폭스와 동물들은 더 치밀하고 과감하게 농장으로 침투하지만 이야기가 조롱하는 대상은 Mr. 폭스가 아닌 사회의 권위가 만들어낸 정의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야생동물의 편에 서서 엄숙한 권위만 남은 인간들이 골탕 먹는 것을 관람하며 낄낄거리게 된다. 물론 우리가 거들고 싶은 부분은 동물들의 권익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가 강요하는 반듯함을 거부하고 생긴 대로 사는 삶에 대한 응원이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도발이 불편하지 않다면 스톱모션의 다듬어지지 않은 영상도 매력 있게 느껴질 것이다. 오히려 스톱모션을 선택했기에 < 판타스틱 Mr. 폭스 >는 가장 판타스틱한 방법으로 동화책에서 나올 수 있게 됐다.
문화를 향유하는 행위 중에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문화로 인정하지 않거나 저급하게 인식하는 엄숙한 사회에서 애니메이션 마니아는 썩 사회 친화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안여돼(안경+여드름+돼지)’라는 달갑지 않은 외모 가이드라인도 마련돼 있다. 방구석에서 미소녀와 메카닉 애니메이션을 탐닉하며 마우스를 클릭하는 것 외에 운동을 하지 않는 일부 행태를 희화화해서 일반화한 농담조다. 게다가 이들의 전문성은 어찌된 게 드러낼수록 손해다. 그러니 취미를 넘어선 해박한 지식은 자랑하지 말고 넣어두길 권한다. 우리는 이들을 흔히 ‘오타쿠’라 부른다. 오타쿠는 일반적으로 한 분야에 심취한 정도가 마니아보다 심한 사람을 일컫는 용어지만, 그 안에는 그들의 광적인 취미활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인들의 조롱도 덤으로 얹혀있다. 때문에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면서도 이를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거나 애니메이션은 좋아하지만 오타쿠는 아니라고 반색하는 경우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사회부적응자라는 뜻을 내포할 것만 같은 일본어 오타쿠(お宅)는 그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댁’, 그러니까 상대편을 높여 부르는 대명사다. 일본에서 동호회 회원끼리 서로를 오타쿠라 부른데서 유래해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분야에서 주로 사용돼왔다. 사실 ‘존중’의 의미가 ‘폄하’로 퇴색된 데에는 오타쿠들의 탓도 있다. 가상 세계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는 자폐성향이나 아키하바라(전자상가가 밀집한 도쿄의 한 지역으로 오타쿠들의 성지로 알려짐)를 배회하며 부모가 준 용돈으로 관련 상품을 사들이는 민폐성향의 마니아들은 애니메이션의 천국인 일본 사회에서도 암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오타쿠 덕분에 먹고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감독들조차 그들을 혼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안노 히데아키는 < 에반게리온 >의 세계를 비틀면서까지 그들을 각성시키려했고, 건담의 아버지 토미노 요시유키는 오타쿠와 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비꼬았으며,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정열이 없는 오타쿠는 고용할 생각이 없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 대로 오타쿠의 경제적인 파급효과는 엄청나다. 일본에서의 오타쿠 시장은 무려 조(兆)단위를 웃돈 지 오래다. 이들이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큰 축을 지탱해왔다는 점은 비난하는 사람들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재밌는 건 그들을 꾸짖는 거물급 감독들 역시 대단한 오타쿠 출신이라는 것. 소비활동만으로 욕을 먹던 오타쿠의 생산적인 역할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이래저래 오타쿠라는 존재 없이 그들의 신화와도 같은 애니메이션도 만들어질 수 없었다. 문제는 이제 비난의 이유가 단순히 “오타쿠라서”가 됐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엮어 모욕을 하기 위해 오타쿠라고 부르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미 심각한 오류는 오타쿠 자체가 아닌 고정관념에 와 있다. 여기에는 드라마나 영화보다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문화로 여겨지는 애니메이션, 특히 일본 작품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타심도 작용한다. 작품에 대한 토론과 지지 활동으로 문화의 동력이 되는 이들의 긍정적인 면은 평가절하되다 못해 잘못 포지셔닝됐다. 이런 상황에서 “미소녀물을 보면 오타쿠”라거나 “나는 오타쿠와는 차원이 다른 애니메이션 마니아”라는 식의 프레임은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다 못해 의미가 없다. 필요한 것은 격리가 아니라 오타쿠 또는 오덕후, 오덕, 덕후들의 재발견이다. 문화의 다양성은 서로 다른 취향이 공존하고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대중에 의해 소비되지 않는 서브컬처의 이해 없이 성숙한 문화 형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특히 다양성이 결핍되고 고유의 특색이 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 애니메이션 판에는 오타쿠와 같은 전문적인 팬덤이라도 있어야 흥이 날 판이다. 오히려 오타쿠가 문제가 아니라 소위 ‘덕질’을 하고 싶을 정도로 즐길만한 콘텐츠가 우리나라에 있는지가 걱정이다. 보고 싶고, 사고 싶어 애니메이션을 소비하는 오타쿠 문화는 차라리 자연스럽다. 적어도 자국 애니메이션이니까 재미없어도 무조건 격려하고 봐줘야 한다는 고역보다는 낫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