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의 의자
- 감독
- 임성구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법정, 최불암, 안준원, 김현수
‘남촌’이란 원래 서울의 남쪽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남산 왜성대에 일본영사관이 들어선 이후 그 일대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지금의 충무로역 부근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거류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일본인 거류지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남촌의 범위도 확대됐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일반적으로 청계천이나 황금정길을 경계로 그 이남 지역을 남촌이라 불렀다. 남촌의 일본인 거류지에 언제 처음 극장이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인 흥행업자가 19명이나 거주하고 있던 1902년 즈음에는 상설극장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경성 거주 일본인 수가 급격하게 늘면서 극장 역시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 경성의 일본인 이주민의 수는 3만 8천명을 넘어섰는데, 얼마 지나지 않은 1914년에는 6만 6천명으로 러일전쟁 직후보다 6배 정도의 증가를 보였다. 1914년 당시 남촌의 일본인 상설영화관은 대정관(大正舘), 제2대정관, 황금관(黄金舘) 등 세 곳이었고, 수좌(寿座), 수관(寿舘), 어성좌(御城座) 등 몇 곳의 연극장도 존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10년 이전 경성에 일본인 극장이 몇 개나 있었고, 이 극장들을 누가 어떻게 설립했으며, 이것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등의 전모를 알려주는 확실한 자료는 없다. 경성 거주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에 그러한 내용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이 중 강점 이전 경성의 일본인 극장에 대해서는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에 소략하게 설명되는데, 이에 따르면 러일전쟁 직후인 1907년을 전후한 시기 일본인 거류지 중 수정(壽町) 3정목에 수좌, 남대문 밖에 어성좌(御成座), 욱정(旭町) 1정목에 가부키좌(歌舞伎座), 본정(本町) 2정목에 본정좌(本町座), 본정 7정목에 경성좌(京城座) 등 총 5개의 극장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2. 수좌의 모습(岡良助, 『京城繁昌記』, 東京: 博文社, 1915년.) 『경성번창기』에 언급되지는 않지만 당시 신문자료를 토대로 살펴보면, 1906년 11월 일본인 거류지인 본정 7정목에 송도좌(松嶋座)라는 극장이 있었고 여기서 활동사진을 상영한다는 기록이 있다. 송도좌는 1907년 2월 4일 화재로 전소되었는데, 당시 기사를 보면 건물은 2층 양옥으로 확인된다. 또한 화재 진압에 감사하는 신문 광고를 보면, 일본인 다니가와(谷川與一), 이치가와(市川熊太郞), 미즈노(水野庄太郞) 등이 송도좌와 관련되어 활동했다고 한다. 송도좌의 경우처럼 언제 처음 건설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06년 무렵에는 확실히 일본인 거류지에 극장이 존재했다. 당시 경성의 일본인 거류지인 수정 2정목에는 경성좌가 있었다. 경성좌 역시 설립자나 운영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바, 대신 연설회 개최를 알리는 기사가 1906년 9월 《조선신문》에 실렸고 1907년에도 인천가부키좌에서 상연했던 연극을 경성좌로 옮겨 공연한다는 기사가 실리는 등 다양한 공연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 1908년 8월 경성좌는 수정 2정목(본정 4정목)에서 본정 7정목으로 자리를 옮긴다. 보통 새로운 극장은 이전에 극장이 있었던 자리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경성좌는 화재로 사라진 송도좌 자리로 이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의 충무로역 대한극장 건너편 옛 극동극장 부근이다. <단장록(斷腸錄)>, <금색야차(金色夜叉)> 등 유명한 신파 레파토리를 공연했던 경성좌는 1911년 3월 시설 낙후를 이유로 폐관되었다. 조선인들에게는 혁신단의 임성구가 일하며 신파 연극을 배운 곳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강점 이전 경성의 일본인 극장을 대표하는 곳은 경성가부키좌였다. 1907년 1월 5일 낙성식을 거행하고 개관한 경성가부키좌의 좌주는 이토(伊藤)라는 인물이었는데, 1910년 무렵의 좌주는 노구치(野口松五郞)였다. 건물주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기간을 두고 흥행업자에게 대관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가부키공연을 할 수 있는 규모의 대극장으로 다양한 흥행물 공연이나 활동사진 상영은 물론, 경성에 주재하던 일본인들의 각종 행사까지도 치룰 수 있는 장소가 경성가부키좌였다. 1911년 8월 26일에는 ‘키네오라마’라는 장치를 설치하여 극장의 설비를 강화하는 등 경성의 일본인 극장을 대표하던 경성가부키좌는 1912년 2월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경성의 다른 유서 깊은 극장으로는 판본좌(坂本座)와 그의 후신인 수좌를 꼽을 수 있다. 판본좌가 설립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인 지금의 충무로 남산스퀘어빌딩 북편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뒤에 이야기 할 본정좌와 더불어 경성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었으나 공연 내역을 밝혀주는 자료는 많지 않고, 1907년 5월 사카이(酒井)일좌가 공연했다는 기록 정도가 남아 있다. 1908년 판본좌를 헐고 그 자리에 수좌(壽座)가 건립된다. 수좌는 남촌의 일본인 극장을 대표하며 1919년까지 영업을 지속하다가, 같은 자리에 경성극장(京城劇場)이 신축되면서 사라졌다. 사진3. 수관의 개관 광고(《朝鮮新聞》, 1912년 12월 26일 자.) 사진4. 수관의 무대(岡良助, 『京城繁昌記』, 東京: 博文社, 1915년) 본정좌는 판본좌와 마주하고 있었다. 이곳은 심훈이 19세기 말 영화가 처음 상영된 장소라고 지목한바,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보면 1907년 7월 30일 개관했고 당시 흥행주는 이토(伊藤友松)였다. 다만, 1907년 이전 동일한 이름의 극장이 다른 장소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본정좌는 경성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일본인 신파 극단 기타무라(北村)일좌의 근거지였으나 1909년 2월 16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됐다. 1912년 본정좌 자리에 새로운 극장이 설립되어 이름을 수관(壽館)이라 했다. 수관은 1920년대 중반 다시 이름을 본정좌라 바꾸어 운영하기도 했으나 곧 사라졌다. 남대문통에서 명치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한 낭화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샤미센을 뜯으며 창을 하는 나니와부시(浪花節) 공연을 위해 만든 작은 규모의 극장이었다. 현재 명동1가 65-2번지 자리로, 1909년 12월 1일 개관했으며 관주는 니시다 가죠(西田嘉三)였다. 라쿠고(落語)와 같은 작은 규모의 공연이 주로 펼쳐졌고 1930년대 영화관으로 개축되었으나, 해방 후 낭화관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명동극장으로 바꾸었다. 1974년도에 폐관되었다. 남대문 밖에 위치한 어성좌는 강점 직전인 1910년 5월 31일 낙성식을 열고 영업을 개시했다. 1913년 당시 좌주는 다나카(田中駒次郞)라는 인물이었고 조루리와 인형 연극과 같은 작은 규모의 흥행물 공연을 주로 했다. 1910년대 중반 사라진 어성좌의 현재 위치는 남대문 YTN타워 주변이다. 사진5. 1920년대 초반 낭화좌의 모습 이들 극장 외에 1910년 이전에 만들어진 극장으로 영락정(永樂亭)이 있었다. 강담(講談), 라쿠고(落語), 나니와부시(浪花節) 등 일본의 전통 연희를 전문으로 흥행하는 이른바 요세(寄席)였다. 1910년대 중반에는 신정(新町) 유곽 입구에 극장이 들어섰다. 이 극장은 시기에 따라 문락좌(文楽座), 도하좌(稻荷座도화자? 桃花座?), 낭화좌(浪花座), 조일좌(朝日座)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나아가 1910년 경성에 포함된 용산 지역에는 용산좌(龍山座), 좌구랑좌(佐久良座=사쿠라좌) 등이 있었다. 특히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발달하기 시작한 1910년대, 신용산과 구용산 지역에 각각 한 개씩의 극장이 있었다. 신용산에서 구용산으로 들어서는 길에 위치한 영정(榮町)에는 1906년 용산좌(龍山座)가 들어섰는데, 1910년대에 이름을 개성좌(開盛座)로 바꾸었다. 신용산이라 불린렸는 용산역 앞 한강통에 자리잡은 사쿠라좌(櫻座) 역시 구용산에서 신용산이 만나는 자리에 있었다. * 참고문헌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 사진1(상단). 황금유원 관련 기사(《매일신보》, 1913.06.23.) [자료] "경성 활동사진계의 내막 - 기대가 무너진 유락관과 수좌는 어떻게 되나?" - 「京城活動寫眞界の內幕-當て事の外れた有樂館と壽座は何うたる」,『朝鮮及滿洲』, 통권 103호(1916년 2월호), 122~124쪽: 김태현 편역, 『일본어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39~47쪽. 수지타산이 맞을 것인지 아닌지 눈 쌓인 북한산에서 매섭게 불어오는 찬바람이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전봇대 위에 걸쳐 있는 전선이 꽁꽁 얼어서 소리 나는 추운 밤에도, 마음이 굳세고 당찬 과부가 울며 탄식하는 듯 한 겨울 밤비가 조금 내렸다. 지나가는 저녁에도, 시내의 좁은 골목에 위치한 ‘활동사진 거리’로 불리는 앵정정(櫻井町) 부근에는 행인의 발걸음을 붙잡는 요란한 색채의 그림간판이 버젓이 걸려 있다. 그리고 펄럭이는 깃발, 향락적인 느낌을 자극하고 조장하는 녹일(綠日)날 행사의 악대소리, 이 악대 소리가 황금정의 큰 도로를 슬픈 소리를 내면서 가로지르는 노면 전차의 울림 사이사이로 간간히 들리고 있다. 재작년 연말 언저리부터 작년 여름 사이에 경성 흥행계 전체를 장악할 기세였던 활동사진은, 공진회가 결성된 전후부터 금년(1916년)까지 흥행의 변화추이를 살펴보면, 다소 열기가 식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다른 흥행물과 비교해도 여전히 현격한 차이가 날 정도로 대단한 기세이다. 현재 경성 활동사진상설관은 대정관, 황금관, 유락관, 수좌, 우미관 이외에 용산에는 황금관의 분관 용강관(龍江館)이 있다. 이것들을 세어보면 모두 6관이 있다. 그 중 조선인 전용관 우미관을 제외하면 일본인 전용 상설관이 5개가 된다. 경성과 용산을 합하여 일본인 인구 7만에 불과한 곳에 상설관 5개의 존재는 조금 많은 감이 없지 않다. 비록 조선에 육군사단 설치를 염두에 두고 장래 발전을 기대한 설립이었지만, 지금 상태로 각 상설관이 수지타산이 맞을 것인지 상당한 의문이 든다. 세계관의 권리 5천원! 이중에서 유락관, 수좌 2개관은 한 달에 2주간 밖에 흥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에는 2개관의 경영자들은 대정관, 황금관과 마찬가지로 연중 내내 흥행을 하고 싶었다. 수좌는 종전 체재를 완전히 바꾸어 활동사진 흥행 상설 전문관으로 신장개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개축은 어떻게든 허가를 받을 수 있었지만, 흥행은 총독부로부터 장기간 흥행불허 판정을 받았다. 유락관은 수좌의 전례를 여러 방법으로 검토하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판단 하에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그 결과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양척식주식회사 옆에 있었던 세계관의 권리를 5천원 가까운 금액으로 구입하였다. 이 정도 조건이라면 불만은 없을 것이며 틀림없이 장기간 흥행허가가 승인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의외였다. 기대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 근처 다카기 도쿠야(高木德彌), 미쓰코시(三越)오복점, 백삼십은행, 쓰카타니(塚谷)잡화점 등에서 “이렇게 여염집이 즐비하게 늘어진 장소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천만한 활동사진을 연중 내내 상영한다면 과연 괜찮을 것인가? 그렇게라도 해도 억지로 활동사진 흥행 전문관을 만들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도 생각이 있다.”는 강한 항의도 있어서 첫 번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5천원으로 구입한 세계관의 권리도 거의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것을 처분, 양도한다면 한 달에 2주간 했던 흥행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동일한 닛카쓰 작품으로 3개 상설관 경쟁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겨우 활동사진관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이 시기부터 활동사진에 대한 시민들의 열기도 그리 뜨겁지 않았다. 이러한 힘든 상황 속에서 생긴 2개의 상설관을 위해서 시민들이 다시 발길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시민의 활동사진 열기는 상설관 증설과는 무관하게 반대 방향으로 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연일 입장객 만원을 꿈꾸고 있던 2개관 업자들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고, 흥행하면 할수록 경영은 점점 악화될 뿐이었다. 왜냐하면 유락관이든 수좌이든 둘 다 대정관과 동일하게 닛카쓰와 계약을 맺어 닛카쓰 영화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 상설관은 서로 제휴도 연락도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 영화는 거의 같은 밭에서 수확한 작품을 반복하여 상영하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같은 회사의 영화로 경쟁하려고 하니 돈은 돈대로 나갔고 관객에게는 ‘아 그래 바로 이것이야’라는 자극도 주지 못했다. 더군다나 비록 2주간 정도밖에 할 수 없는 흥행이라고 해도 상설관 입장에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악대, 변사, 매표소 직원에게 상당한 보수를 지불하고 자리를 지키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 힘든 것은 이들의 급여는 일본과 비교하면 이외로 상당한 고액이여서 수좌와 유락관에서는 변사를 융통하는 문제가 제기될 정도였다. 하지만, 쌍방이 자신들의 주장만을 펼쳐 결국 협상은 결렬 되고 말았다. (이하 생략)
연흥사(演興社)와 장안사(長安社)는 러일전쟁 직후 만들어진 조선인 극장이다. * 연흥사는 1907년 11월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송지만(宋芝萬), 이준동(李俊東), 이종진(李鍾振) 등이 절골, 즉 사동(寺洞) 장윤직(張潤稙)의 집을 개조하여 연희루(演戱樓)를 건축하고자 경시청에 청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연희장이 연흥사가 아닌가 한다. 이 정확한 위치는 탑골공원 왼편 훗날 조선극장 자리로,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30번지이다. 1912년 연흥사에서 연극공연을 본 바 있는 연극인 박진(朴珍)의 회고에 따르면, 동향(東向)에 비계목(飛階木)으로 만든 이층짜리 건물이었으며 일층 객석은 나무로 만든 장의자를 길쭉길쭉하게 놓았고 이층에는 삿자리를 깔았다고 한다. 당시 여느 조선인 극장과 마찬가지로 객석은 성별에 따라 나누어져 있어서 일층은 남자석, 이층은 여자석이었다. 1912년 여름에는 극장 천장에 선풍기를 달아 관객들로 하여금 한여름의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여 관람의 편의를 높였다. 사진 2. 딱지본 소설 『산천초목』의 표지에 그려진 연흥사의 모습(이해조, 유일서관, 1912) 초기 극장이 대게 그러하듯 운영자는 자주 교체되었다. 1908년 연흥사는 박원근(朴元根)이 총무를, 송종오(宋鐘五)가 감독을 맡았다. 개장 초기에는 창극을 주로 공연했으나, 극장을 경영해본 경험이 일천했던 데다가 전황으로 경영난이 닥치자 극장을 방매한다. 이후 전당포 주인 석숭환(石崇煥) 등이 돈을 대어 유지해 나갈 수 있었는데, 1909년 당시 석숭환이 연흥사에 투자하여 손해 본 액수만 3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연흥사가 언제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 1908년 초부터 신문지상에 연흥사 광고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대 들어 연흥사는 다른 어떤 극장보다 신파극을 자주 공연한다. 이로써 경영난을 극복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신파극은, 1910년대 초반 조선인 극장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는데, 특히 연흥사는 신파극 공연을 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신파극 전용 극장이라 선전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진 역시 연흥사에서 이뤄진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 공연을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당대 사람들에게 연흥사는 신파극의 본산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혁신단의 연흥사 공연은 1912년 2월 18일 <육혈포강도>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수전노(守錢奴)>, <소위휘선사자친죄(少尉揮善捨子親罪)> 등의 작품을 올렸는데, 쌀값 폭등으로 불경기가 도래하자 임시로 공연을 중단, 다시 개연하여 <선탐후개(先貪後改)>, <서승어적(庶勝於嫡)> 등을 공연했다. 이후 <눈물>이나 <장한몽> 같은 대표적 신파극 레퍼토리 공연이 큰 인기를 끌면서, 임성구의 혁신단은 신파극의 대표 주자로 인정받게 된다. 예컨대 <눈물> 공연을 본 ‘사동생’이라는 이름이 독자는, “나는 눈물 연극 구경을 갓다가, 부인셕에셔 일졔히 우는 것을 보면은, 졀로 눈물이, 것잡지 못하게 쏘다져요” 1 라며 극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장한몽>을 본 '애극생'이라는 관객은, “연흥샤 쟝한몽 연극은, 참 재미잇습듸다. 사람은, 엇지도 그리도, 만히 드러 가는지 매일 여젼하던 걸이오. 잇흔날브터는 즁편이라지오, 샹편 보고, 즁편 안 볼 슈 잇나, 불가불 일즉 언이 가, 보아야 하겟스니, 할인권 백인 신문이나, 오날은 일즉이 돌이게 하십시오” 2 라며 연흥사의 신파공연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을 표현했다. 신파연극의 흥행 성공과 더불어 연흥사는 탕자음부가 모이는 곳이라는 오명도 쓰게 되었다. 이에 조산부(助産婦)양성소의 자선연주회 같은 공익적 역할의 공연을 개최하는 등 인식 개선에 나서기도 했다. 1914년 10월 8일, 연극장이 협소하여 공연하기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경무청에서 허가를 취소함으로써 연흥사는 돌연 문을 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이 바로 철거되지는 않았는데, 신파극을 대신하여 김창환, 이동백 등 명창들의 판소리 공연장으로 활용되다가 1915년 5월 무렵 철거된다. 철거된 자리는 빈터로 남아 있다가 7년 뒤인 1922년에 조선극장이 들어선다. * 장안사는 동구(洞口) 내(內) 장대장동(張大將洞) 장사골에 건립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진은 장안사의 위치에 대해 “낙원동과 익선동 사이, 즉 단성사에서 동관대궐이라던 창덕궁을 향해 가는 큰 길과, 낙원동에서 경운동으로 가는 큰 길과의 사이”에 “동궐나뭇장(柴場)이라고 해서 넓은 공지가 있었는데 그 공지가 장안사가 있던 터”라고 회고했다. 장안사의 건설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성사, 연흥사와 비슷하게 1907년 말에서 1908년 초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개장 초기에는 전통 연희를 비롯하여 중국의 경극을 상연하고,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개관 초기에는 관람자가 적어 여타 극장들처럼 경영난을 맞았지만, 연흥사나 단성사에서 연행하지 않는 “꼭두각시의 홍동지, 박첨지놀음과 광대 줄타기, 남사당패의 무동 서기, 서도잡가, 경기 입창 등”의 전통 연희를 주요 레퍼토리로 삼아 공연하면서 장안사만의 전문성을 살려 나갔다. 사진 3. 장안사에서 상연된 중국연희 공연(《황성신문》, 1909년 4월 21일자, 3면.) 장안사는 최홍석(崔弘錫)이 사장이던 1910년 4월 무렵 활동사진 영사기를 도입하여 프랑스 파테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3 이에 학부(學部)에서는 장안사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을 중등 이상의 학교 교육에 활용하도록 지도하기도 했다. 4 같은 해 5월부터는 파테회사가 아닌 일본인 흥행업자 가즈토키(和常)와 필름 배급계약을 체결하고 일본에서 오는 필름을 상영했다. 5 1912년에는 잠시 서양인이 극장을 임대하여 지만관(志滿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요컨대 1910년대 초반 장안사는 활동사진관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12년 말 대정관, 우미관, 황금관 등 본격적인 활동사진관이 설립되어 운영되기 시작한 이래로는 송만갑, 김창룡 등의 명창이나 채란, 해선 등의 기생들에 의한 노래 공연이나 소위 구(舊)연극을 상연하는 장소로 더 유명했다. 장안사는 1915년경에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단성사가 화재로 소실된 뒤 단성사에서 연행하던 김재종(金在鍾) 일행이 장안사로 옮겨 연행을 계속한다는 기사가 있는 한편, 그들이 연흥사에서 연행한다 기사도 있다. 미루어 짐작컨대, 장안사의 극장 상태가 공연에 부적절했다기보다 시설이 괜찮은 연흥사를 택해 연행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장안사는 아마도 이즈음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1) 「독쟈구락부」, 《매일신보》, 1913년 10월 29일자, 3면. 2) 「독쟈구락부」, 《매일신보》, 1913년 11월 4일자, 3면. 3) 「광고」,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1일자, 3면. 4) 「교육에 활동」, 《황성신문》, 1910년 4월 17일자, 2면. 5) 「활동사진 계약」, 《황성신문》, 1910년 5월 17일자, 3면. * 참고문헌 유민영, 『한국근대극장변천사』, 태학사, 1998, 116~151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50~52쪽. * 사진1(상단). 혁신단 단장 임성구(《매일신보》, 1914년 2월 11일자, 3면.) [자료] 《대한매일신보》, 1906.03.30. 奉常劃提調李苾和氏가 人民敎育하기를 爲하야 上䟽한 全文이 如左하니 續 此臣所謂敎育一事庶可以爲日後來復之基也雖然所謂敎育者亦有古今之異其泥於古而昧於今者子莫之執也 若專尙今而棄舊則忘其本者也盖有國有民必有宗敎故宗敎興則其國興宗敎衰則其國衰環天下亘萬古不易之典也 夫孔孟之道我 國之宗敎也惟我邦國之不振由於宗敎之不興如欲振興其邦國必先懋興其宗敎也 今以遭世界更新之運不得不學今之學者又事勢之不得已也孔孟之敎係是三綱五常之道也必使幼冲之子弟經之以三經五常之道使不失其本然之彜性然後學今之學則中散萬事末合一理可以並行之不悖矣臣願 陛下深留聖意於斯亟令學部益勵敎育之責任 規模則先興孔孟道學之宗敎次修開明之新學節次則特加尊崇文廟仰瞻羹墻而俎豆絃誦升降拜揖使靑年子弟咸知慕聖之本義而尊重其宗敎焉 以成均舘爲大學校而京師則一署各置一中學校而一面各置小學校一里各置一村塾 小學校卒業之人陞之中學校焉中學校卒業之人陞之大學校焉定其課程第其高下歲拔其優等者薦之於政府而充補其相當職不出十年之間而仕於 朝者皆大學校卒業之人至於農商工亦莫不然而隨其人才派送各國各修其藝焉 又錄其敎師之勤者而薦用之又採私立學校者優施補助者而褒賞之不數年之內不費國金而學校之設必遍滿於 國中 然則三千里內養成之聰明子弟亦不少矣夫何患乎人才之不能就乎雖然敎育一事爲近日之例套語而已則終未見其效而今日之勢惟在實踐二字而已 臣願 先下詔勅令學部改定敎育一致之法上自太學至于各郡鄕校置大中小學校實行其作成人才之方 今漢城及各道道臣上 奏學校私立之人以勳章褒章以勸以奬焉臣雖不學的知今日 國家之興惟在敎育之興惟在宗敎之興故 忘其僭陋而爲 陛下國家一言之伏乞 陛下勿以臣之卑微而少 垂察其言則 國家幸甚生民幸甚 完 [자료] 《황성신문》, 1906.04.19. ●李氏上疏 奉常副提調李苾和氏가 皇帝陛下께 上䟽한 全文이 如左하니 伏以臣向以興學校振敎育一事猥陳荒說優蒙 聖批至有令政府禀處之旨旣而大 詔煥發如綸如綍使於敎育人才事方專心講究俾有實効臣伏讀 詔書感極涕發窃有少湏臾無死之願而計以爲此時此 詔不啻若大旱之逢甘霈則其舉而行之宜必汲汲如不及以對揚休命矣伏竢累日以臣之躁妄實不能無滋惑焉盖今日百獘之本惟以虛文二字爲詐飾若幷此敎育一事而亦歸虛文則臣所謂國家來復之基永無其望矣然則臣安得不心枯膓焦疾聲㪅籲於 天陛之下哉我國素穪文明而至于近日禮義都毀而學問盡味則昔之爲文明者旣不可復見矣又於新學問者亦未有一人能窺其藩籬者然則可謂東敗西傷矣爲今之計莫如尊重太學申明先聖之道責任學部篤習當時之務使宗敎復明繼聖訓開來學以忠愛爲義務然後弱可爲强野可爲文國權可以光復文運可以賁篩臣旣以敎育不行爲憂而冒此煩陳則固不當㪅攙他說而區區忠激之意有不容不一陳者尙有數事焉其一即掌禮院旌褒例納錢事也夫忠孝烈旌閭乃是國家所以扶植綱常敦尙風化之大柄也有其實者亦當精擇審知然後可許其棹楔之典况乎無其實者乎今則不然不問事行之虛實惟視例納金八百之有無而許之碍之則是行迹爲虛而例納爲實也雖有忠孝烈實蹟必湮沒於千古而不得闡揚於世矣此豈 廟堂立法之本意哉伏乞 亟下嚴勅于掌禮之臣永革其旌閭例納錢凡干係 恩典者必令道臣博釆而審知之然後 奏聞請褒若有循私納賄誣虛而爲實者該呈狀人及道臣幷論罪以勵風化千萬幸甚其一即判任官及地方官俸金與兵丁巡檢掖庭所屬吏胥皂隷之月料事也夫仕者祿足以代其耕然後可以忘父母妻子之憂而能盡心職事不生他念矣今夫判任官及地方官之俸給僅足以資其一身而不能食其父母妻子則雖持心淸白者不爲事勢所牽者鮮矣書曰旣富方糓富而後能善古昔帝王之使臣工先富其身而使善其心此所以必先重祿使之忘其憂也伏乞陛下垂察焉內而府部院廳判任官巡檢兵丁掖庭所屬吏胥皂隷之屬外而觀察守宰鄕將吏輩使喚之屬當厚其俸給使之忘其家憂而盡其職事如是而有不用命者論罪而正法綱焉則千萬幸甚其一卽協律社貽獘事也臣聞孔子於顏子以爲邦之道必曰放鄭聲今夫協律社者臣雖不知其主倡之爲何人然臣聞其通宵設戱男女雜遝鬪爭易起亂淫相屬此豈非鄭聲乎大抵習舞演劇之戱於外國亦皆有之不過是俳優丐賤之軰區區營生者而如今協律社之穪以 宮內府所管發票營利者東西列邦所未聞見事也淫聲亂色眩惑耳目傷風敗俗年少之學問實業一不留心淫風從生實爲國家人民憂者此也伏乞 陛下亟令警廳不日嚴禁以絕亂階申飭掌樂之臣復講法樂千萬幸甚右臣所言諸條雖皆當今之可行而語其最急且大者則果能上下一心務進敎育之實而國家人民之知識一開則如貪賂之俗淆雜之風亂淫之戱雖不禁而人自耻焉而不爲矣伏望 陛下留 神裁察焉하소셔하얏더라
단성사는, 연예계를 발전시키고 그 수익으로 교육을 장려하는 동시에 자선 사업을 할 목적으로 지명근(池明根), 박태일(朴太一), 주수영(朱壽榮) 등의 한성 상인들이 발기하여 1907년 파조교(罷朝橋) 인근에 세운 극장이다. 개관 초기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신파극을 연행하는 데 적절치 못할 정도로 무대가 좁아서 임시로 내부를 수리하기 위해 영업을 정지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다른 극장들처럼, 경영 미숙과 전황(錢荒)으로 인한 곤란으로 단성사의 경영자와 소유자는 자주 교체되었다. 단성사는 경영 상태 정상화를 위해 파노라마식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는데 승전무(勝戰舞), 승무(僧舞), 전기호접무(電氣胡蝶舞), 환등, 활동사진 등이 공연되었다. 1913년 안재묵(安在黙)이 단성사의 운영권을 획득하며 대대적인 신축을 단행한다. 1914년 1월에 신축 낙성된 단성사는 총 건축비 1만 1천 원의 2층 건물로, 외관은 서양식으로 장식했고 내부는 일본식 극장 구조를 따랐다. 정원 1,000명 규모의 객석은 1, 2등석(2층 객석 및 박스석)에 다다미를 깔아 신을 벗고 입장하도록 했고, 1층의 하등석에는 장의자를 깔아 앉아서 볼 수 있도록 했다. 호화롭게 신축한 단성사는 1915년 2월 18일 화재를 당해 벽만 남은 채 소실되었다. 상등석 옆방에서 차를 팔던 안성범(安聖範)이 연극이 파한 후 화롯불을 끄지 않고 퇴근했는데, 이것이 다다미에 옮겨 붙어 극장 전체를 태운 것이었다. 화재의 원인을 제공한 안성범은 안재묵의 아버지로, 결국 실화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사진 2. 화재 직후 단성사(《매일신보》 1915년 2월 19일자, 3면) 김연영(金然永)에게 돈을 빌려 극장을 신축했던 안재묵은 이 화재로 파산, 단성사의 소유권은 채권자 김연영에게 넘어갔다. 김연영은 내부를 수리하여 1915년 5월 단성사를 재개장했으나, 그 시설은 화재 전보다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1917년 2월 김연영은 황금유원의 소유주인 다무라 기지로(田村義次郞)에게 단성사를 매각한다. 다무라는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광무대를 운영하던 박승필(朴承弼)에게 그 운영을 맡겼다. 단성사의 관객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으므로 이들을 대상으로 활동사진관을 운영하는 데는 조선인 경영자가 적합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단성사의 활동사진관 전용 허가를 신청한 지 수개월 만인 1918년 6월, 드디어 경기도 경무부로부터 허가 지령이 떨어진다. 이에 종로경찰서는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부적절하다며 신축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아 허가를 내주었다. 박승필은 1918년 8월,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 창립 9주년 기념 공연을 마지막으로 기존의 건물을 헐고 1만 원의 예산을 들여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단성사를 개축한다. 사진 3. 1918년 활동사진관으로 다시 지어진 단성사(《매일신보》 1918년 12월 21일자, 3면) 활동사진관으로 재탄생한 단성사는 수만 원의 보증금을 내고 일본의 영화회사 텐카츠(天活, 天然色活動写真株式会社)와 특약을 맺어 필름을 확보했으며, 조선인 변사 중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서상호(徐相昊)를 변사주임으로 한 5~6인의 변사진을 구성했다. 또한 활동사진관 운영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경성고등연예관과 우미관에서 실무를 맡아 왔던 영사기사 박정현(朴晶鉉)과 손을 잡았다. 박정현은 1918년 단성사로 건너와 지배인(감독)으로서 실무를 책임졌으며, 박승필 사후에는 직접 단성사를 이끌었다. 박승필은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이용하는 동시에 공연장을 구하지 못해 경영이 곤란하던 양대 신파 극단, 즉 임성구의 혁신단과 김도산(金陶山)의 신극좌를 후원하는 데도 활용했다. 이 두 극단은 단성사 전속 극단 역할을 수행하며, 서울 공연과 지방 순회를 번갈아 공연했다. 이와 관련한 박승필의 회고를 인용해 보자. “ 신극운동을 발뎐식키려 틈틈이 배우 량성에 주력하엿스니 한 비극 ( 悲劇 ) 과 검극 ( 劍劇 ) 으로 장안에 일흠을 치든 림성구 ( 林聖九 ) 며 말 잘하고 모험극 ( 冒險劇 ) 잘하기로 유명하든 김도산 ( 金陶山 ) 가튼 명배우도 모다 박씨의 문하에서 나온 것이다 . 세상에는 림성구라면 모르는 안악네가 업고 김도산이라면 모르는 청년이 업지만은 그들의 배후에 박승필 씨가 잇슴을 아는 사람은 적엇슬 것이다 . 이와 가티 박씨는 구극과는 새이가 멀어지고 신극에만 주력하게 되엿다 . 라서 신극흥행 ( 新劇興行 ) 을 서울에서만 치지 안코 전 조선적으로 진출하려 림성구 군을 중심으로 혁신단 ( 革新團 ) 을 조직케 하고 김도산 군을 중심으로 신극좌 ( 新劇座 ) 를 조직케 하야 혁신단과 신극좌가 서로 교체하여 지방을 순회하게 하엿다 .” 1 활동사진관으로 개관한 직후 단성사는 텐카츠로부터 키네오라마 [필자 주: 특수 기구를 이용하여 여러 가지 환영을 보여주는 무대 장치] 기술을 도입하여 장치하고, 1919년 5월부터 변사들을 출연시켜 제주도에서 일어난 살옥(殺獄) 사건을 소재로 <탐라의 사몽(詐夢)>이라는 변사극을 공연했다. 그러나 곧 변사극보다는 전문 신파 극단에 의한 전기응용신파극 [필자 주: 전기(電氣) 장치를 동원하여 효과를 내는 무대극 ] 이 나으리라 판단, 신극좌와 혁신단로 하여금 전기응용극을 만들기로 하여 우선 신극좌의 좌장 김도산을 일본에 보내 키네오라마 기술을 배워 오도록 했다. 그리고 흩어진 혁신단도 재조직하여 키네오라마를 이용한 전기응용극을 시작하도록 한다. 단성사 전속 극단으로 서울과 지방을 번갈아 가며 공연하던 신극좌와 혁신단은 전기응용극에서 더 나아가 차례로 연쇄극을 제작한다. 첫 작품은 신극좌의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 이어 <형사의 고심(刑事苦心)>과 <시우정(是友情)>이 만들어진다. 사진 4. 연쇄극 <의리적 구토> 광고(《매일신보》 1919년 10월 26일자, 3면) 1919년 10월 27일부터 상연된 <의리적 구토>는 원래 5일만 상연하기로 했으나 큰 인기에 힘입어 11월 18일까지 무려 25일이나 계속 상연되었다. 수지를 맞추기 위해 파격적으로 비싼 가격에 상연됐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이 연쇄극은 최초의 한국영화로 인정받고 있다. 연쇄극의 황금기를 지나 무성영화 시대가 시작되자 단성사에서는 촬영기사 이필우를 초빙하여 <장화홍련전>(1924)을 직접 제작한다. 나아가 영화 제작자들이 영화 제작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를 통해 금강키네마, 원방각사 등이 조직되었으며 나운규와 같은 걸출한 영화인이 영화 제작을 할 수 있었다. 1930년대 토키영화의 상영이 본격화되자 단성사는 이에 발 빠르게 대처한다. 1930년 설날을 맞아 조선 최초로 토키영화를 상영했고, 나아가 토키영화관으로의 전환을 꾀했다. 더불어 신무대라는 전속 극단을 두어 연극 공연에 대한 여전한 관심을 이어갔다. 1931년 1월 단성사를 이끌던 박승필이 사망한다. 전술한 대로, 이후에는 박정현이 운영자가 되어 단성사를 이끌게 된다. 박정현은 토키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할 수 있도록 단성사 신축을 결정한다. 1934년 신축된 단성사는 650석 규모로 이전보다 객석이 대폭 줄었으나, 토키 상영용 영사기를 비롯하여 냉난방 시설과 각종 설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신축 후 단성사는 지속적으로 경영난에 봉착한다. 단성사 보다 조금 늦게 신축된 약초극장, 명치좌, 황금좌 등은 단성사보다 객석도 많았고 시설도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영화 의무상영제도가 실시되자,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단성사와 남촌의 일본인 극장들 사이의 프로그램 차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여기에 서양영화의 대여 비용까지 증가하면서 단성사의 경영난은 피할 수 없었다. 이에 연극 극장으로 전환 등 자구책이 강구되었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외화 가격이 폭등하면서 경영난도 가속되었다. 부채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박정현 등의 단성사 운영진은 결국 파산했으며, 1939년 그 운영권이 명치좌를 운영하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넘어간다. 이시바시는 단성사를 명치좌의 2번관으로 두었으며 이름도 대륙극장이라 바꾸었다. 해방 후 이름을 되찾은 단성사는 줄곧 한국영화사를 상징하는 장소로 존재하다가 2001년 철거, 2005년 멀티플렉스로 재건축된다. 그러나 이 역시 경영난으로 부도 처리되었고, 2015년 영안모자가 인수하여 현재 단성골드쥬얼리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1) 「각 방면의 성공 고심담 (8) / (2) 흥행계의 노장 박승필 씨」《중외일보》1929년 11월 2일자, 조간 3면 참고문헌 이순진, 『조선인극장 단성사 1907~1939』, 한국영상자료원, 2011.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 사진 1(글 상단). 토키영화관으로 신축된 단성사 [자료] "신축 낙성한 단성사", 《매일신보》, 1914.01.17. 경셩 즁부 동구안에 잇 , 연극쟝 단셩샤를 헐고 , 로 짓 다 은 , 이젼에 여러 번 , 긔 한바 , 작년 七 월에 , 역 를 시작 야 , 임의 집 건츅은 다 맛치고 , 구력 안에 부 슈졍 지 , 젼혀 맛칠 터이라 간 수가 , 일 륙십팔 간에 , 무 가 삼십이 간이오 , 관람쟈의 뎡원이 , 일쳔 명이오 , 뎐긔 등이 , 합 일 오십 오 , 안은 일본 졔도 , 밧갓 졍면은 , 셔양 졔도인 일이등셕은 젼부 다다미를 랏고 , 하등셕도 쟝교의에 , 안져 보게 되얏스며 기타 여러 가지 구죠와 쟝식이 , 조션의 연극쟝으로 젼도에 뎨일이 되겟스며 , 구력 졍월 초하로날브터 , 기 의 연쥬회로 , 첫 번 무 를 연다더라 , 총 건츅비 일만 일천 원 [자료] "단성사가 팔려", 《매일신보》, 1917.02.18. 경셩에 다만 한아 잇 조션인 측의 연극쟝이라 동구안 단셩샤 그 소유주인 김연영 ( 金然永 ) 으로브터 황금뎡 거 황금관 쥬인 뎐촌 모의게 팔쳔오 원의 가 으로 도되야 십륙일에 금젼 여슈 지 맛추엇 댱 에 연극댱은 활동사진 젼문으로 곳쳐서 조선인 관람자를 흡슈 기로 위주 야 죵 이것을 경영 우미관과 경 을 리라더라 . [자료] "단성사의 개축, 활동사진을 한다", 《매일신보》, 1918.06.21. 됴션의 연극장 즁 한아 되 동구 안 단셩샤 작년 봄에 황금관 쥬인 뎐촌이란 사 이 팔쳔오 원에 가지고 활동사진을 영 기 위 야 광무 박승필 씨에게 경영쟈의 권리를 위임 야 그 일홈으로 당국에 쳥원 고 허가되기를 긔다리던바 다소 년 월을 지 여 지나간 십삼일부로 경긔도 경무부로부터 소관 경찰셔에 허가 지령이 왓슴으로 죵로경찰셔에서 십 일 활동 진의 흥 주 되 박승필 씨를 불너다가 신긔 셔댱으로부터 장 쥬의 건에 야 세히 일너준 후 그 지령을 주엇다 지금의 단셩사 집으로 영사 적소가 못됨으로 확댱 기 위 야 일만 원의 예산으로 그 안을 모다 헐고 다시 지은 후 오 구월부터 시작되리라 목하 설계가 맛치 로 곳 역 에 착수 다 이 뒤부터 신구파 연 극장은 아죠 업셔진 모양이라더라 . [자료] "본관 신축 낙성 후 대갈망 중의 모범적 활동사진은 금일부터 대대적 영사", 《매일신보》, 1918.12.21. 동구안 단셩사를 여러 천원의 거 으로 사드린 후 본 목뎍 바와 갓치 세샹에 모범뎍 활동사진을 영 야써 일반 관람에 졔공 기로 작뎡 얏던 결과 그 뒤 모든 범 ○ 과 계획이 쥰비되야 슈만의 거 과 슈삭의 공졍으로 오날 단샹사 신츅 얏도다 이 젼혀 영리를 위 야 금거히 쥰비 것이 안이오 다만 활동사진의 영 다 쇼문이 퍼지 이를 라 경향의 활가 졔씨의 갈망이 졀졍에 다을 외라 겸 야 녯것을 양 고 것을 요구 것이 현 됴 ( 現代思潮 ) 임으로 본 관주가 미리 이를 닷고 급셩 공 로 이에 쥰공을 맛치엿슴니다 본관은 본 쥬지가 타관에 비 야 현져히 다른 뎜이 잇 바 즉 만흔 돈으로써 참신긔발 됴흔 사진을 가져다가 아모죠록 일반의 호평 즁에셔 영업도 발뎐코져 주지임으로 디 유명 활동사진쥬식회사 몃 곳과 임의 특약을 고 수만원의 보증금을 붓치엿스니 이를 보더라도 가히 본관의 로심초 을 아실 일이라 그 안이라 활동사진에 야 본 관주 항샹 유감히 각 바 갑 만코 용 죠흔 진을 영 때에 변 의 셜명이 불충분 야 일반 관람 시는 니의 불만족과 불평의 셩이 남을 라 역시 진의 가치도 업셔지 일이 잇셔셔 본 관주의 삼슉고 『 熟考 』 로 활동게의 호평잇고 갈 밧 ... 안이 구변으로 뎨일류되 셔상호 『 徐相昊 』 군을 특이 초빙 야 변 쥬임으로 뎡 고 텬연 표졍과 그럴듯 익살 잘부리 변 와 희로 락을 긔묘 게 아 변 합 오륙인이 잇셔 일 밤 무 우에셔 일거일동에 셜명은 참으로 본 관주의 랑 안이오 장 보아가시 로 평판이 잇 오리다 겨울밤은 졈졈 길고 눈이 나와셔 에 가득이 싸인 실상 젹막 기 이 없슬 별별 겨울에 감상이 만단으로 일어날 본관에 오시고 보면 란로 몸을 듯하게 야 주고 셜 갓흔 하얀 포장에 참 쳐음보 긔긔괴괴 진이 다 빗치일 적마다 여긔가 졍말 락쳔디인가보다 감샹이 유연히 발 실 터이요 야반에 소견거리 이 우에 더 업슬 줄로 각 니다 敬具 本館 映寫 中 은 年中 晴雨 를 不計 고 開演 기로 酌定 이온바 特 히 日曜日 及 祭日 에 晝夜 映寫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