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클로스는 푸른 눈을 가졌다
- 감독
- 장 으스타슈
- 제작년도
- 1966
- 출연
- 장 삐에르 레오, 제랄드 짐머맨, 앙리 마르티네즈, 르네 길슨
언제부터 관객으로서 우리 극장에 드나들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 있던 시절, 부천영화제에서 몇 편을 보고 반했던 쇼브라더스의 무협 영화들을 다시 봤고, 무엇보다도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을 보며 열광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2003년부터 우리 극장을 다녔다는 얘기가 된다. 2005년 낙원동으로 이사 온 후엔 한동안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칼럼에서 밝혔듯 자크 드미의 < 로슈포르의 숙녀들 >을 보고 나서야 낙원동 극장에 비로소 마음을 붙였다. 번역 후원회원이 된 게 그즈음이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어느덧 만 4년을 넘기고 5년 차 이곳에서 일하는 정식 스태프가 되어 있다. 낙원동을 떠나 서울극장으로 이사하기로 결정됐을 때, 솔직히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재정적 어려움과 위기를 이미 여러 차례 가까스로 넘겼지만 사정은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이사회를 통해 극장 이전이 결정된 건, 이미 심각한 회의들이 여러 차례 열리고 내부의 진통과 마음 상하는 일들이 연이어 있었던 후였다. 그런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된 방법이 바로 이사였다. 이사 자체가 워낙 큰일이기도 하거니와, 이사를 한다고 과연 사정이 좋아질 수 있을까, 기대보다는 걱정과 우려 때문에 매일 한숨을 쉬었다. 4월 15일 이사를 했으니 이곳으로 온 지도 벌써 두 달이 가까워져 온다. 그동안 장 으스타슈와 모리스 피알라의 영화들을 ‘비타협’이라는 표제를 내세워 상영했다. 우리의 새로운 다짐과 각오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제목. 작년 늦여름부터 준비해온 오슨 웰스 탄생 100주년 회고전도 치렀다. 전 세계적으로도 오슨 웰스의 생일에 맞추어 올해 5월에 회고전을 치른 단체나 시네마테크가 많지 않다고 자랑에 자랑을 거듭했었다. 지금은 이탈리아문화원과 함께 비스콘티의 영화들을, 그리고 조금 더 주목이 필요한 한국 독립영화들을 상영하고 있다. 이제 곧 내가 그렇게 열광하며 이곳에 단단히 홀리는 계기가 됐던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을 상영한다. 올해 여름도 시네바캉스를 개최할 예정이며(이미 준비에 들어갔다), 하반기 프로그램들 역시 대략 윤곽이 나온 상태다. 일단 이사를 와서 좋은 점은 사무실이 넓어졌고 10년 치 짐과 서류들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들도 많아졌다는 점이다. 또한 우리만의 라운지가 생겨 관객들이 조용히 영화 시작을 기다리며 각자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제는 술에 취한 채 극장에 입장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다 저지당하자 사무실로 뛰어들어와 쌍욕을 쏟아붓는 걸 당하거나, 굳이 화장실 밖에서 바지 지퍼를 올리는 할아버지들과 눈을 마주치곤 난처하게 고개를 돌릴 일도 없다. 다른 상영관의 관객들이 우리 관객들을 막 대하는 모습을 볼 필요도 없다. 벽에 가득 꽂힌 책들 때문인지, 관객들은 동행과 웃고 떠들기보다 책을 읽거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이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라니! 라운지 무엇보다도 극장 안 상영/관람 환경이 좋아진 것이 가장 기쁘다. 이사와 단장과 기계 세팅을 마치고 처음으로 상영을 하던 날, 일부러 객석에 앉아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오슨 웰스 회고전 때도 몇 편의 영화를 챙겨 보았다. 낙원동에서의 관람이 나 또한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면, 이사 온 후 아직까지는 ‘극장 관계자로서’ 상영 환경을 체크하는 것에 가깝다. 나뿐 아니라 동료들도 틈나는 대로 상영관에 앉아 영화를 보며 ‘체크’하곤 한다. 의자도 편하고 온전히 영화에 집중할 수 있고 화질도 스크린도 원래의 필름 상태 이상으로 나빠지는 일도 없고, 앞좌석에서 스크린을 가리는 일도 없고, 이제야 비로소 영화를 영화답게 본다는 기분이다. 좌석 수는 줄어들었지만 스크린과의 거리는 조금 더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스크린이 더 크게 느껴진다. 더 이상 영화관 바깥의 공연장이나 다른 상영관에서 틈입해 오던 소음과 진동에 시달릴 일도 없다. 이전보다 설비가 훨씬 좋아지긴 했지만, 영사실에 새로이 들인 기계들에는 역시 적응과 길들임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기계에 둔한 나는 잘 모르겠지만, 영사팀은 계속해서 기계의 정밀한 세팅을 하느라 요즘도 바쁘게 시간을 보낸다. 게다가 사무실과 상영관이 떨어진 만큼 무전기 시스템이 도입됐다. 혹시라도 돌발적인 사고가 있을까 봐, 그런 때의 대응은 또 이전과 달라야 하기에, 운영팀은 계속 긴장의 연속이다. 내 경우는 일요일 당직 근무에 걸리면 그 전날부터 긴장하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곤 한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비로소 시네마테크에 대해 내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꿈을, 욕심을, 조금씩 시도해볼 용기가 난다. 다행히 서울시에서도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새로운 상영공간 이사를 온 후 종종 매표수에서 각 회차별 관객수를 확인하곤 한다. 나는 사실, 새로 옮긴 곳에 익숙해지는 기간 동안 관객 수가 대폭 줄 수도 있다고 각오에 각오를 거듭하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좋은 프로그램으로 계속 영화를 상영하고 더 열심히 홍보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극장에서 고전을 보는 경험을,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생전의 모습이 담기거나 그런 사람들이 만든 영화를 바로 지금 이곳의 극장에서 보는 경험이 왜 특별한지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고. 우리 같은 극장은 영화를 상영하는 이와 보는 이가 크게 구분되지 않는 곳이다. 나를 포함해 내 동료들은 모두 이곳에서 일하기 전 이곳의 관객이었다. 관객들의 특별한 애정과 지속적인 관심 없이 절대로 유지가 될 수 없으며 의미를 찾을 수도 없는 곳, 그게 우리 극장이다. 다행히 관객 수는 낙원동 시절보다 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주 조금 늘어난 것도 같다. 비록 아직도 매진작이 나오진 않았지만, 작년부터 야심 차게 준비했던 오슨 웰스 회고전에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수의 관객이 오긴 했지만… 그럼에도, 오슨 웰스 영화를 보기 위해 교복을 입은 채 극장에 찾아온 관객 몇과 마주친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오슨 웰스가 < 시민 케인 >을 내놓은 25살을 훨씬 넘기고서야 처음으로 <시민 케인>을, 그것도 비디오로 보았다. 10대 때 <시민 케인>을 극장에서 35mm 필름으로 접한 그 관객들은 이 영화를 과연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꼈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그들과 이곳에서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영화가 주는 특별한 경험들을 나누고 싶다.
음울했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짧은 메모 중에는, 혁명을 추동하는 것은 계급이 아니라 세대일지도 모른다는 글이 있다. 물론 이 말은 논쟁적일 수 있다. 계급은 명확하고 특정한 주체를 구분하지만, 세대는 모호하고 상대적이다. 그러나 간혹 혁명의 역사 속에서 세대라는 구분과 표현은 매혹적이고 주체적으로 표방된 바 있다. 프랑스의 필립 갸렐과 장 으스타슈를 배출했던 68혁명이 그랬고, 제3영화를 실천했던 중남미의 60-70년대가 그랬다. 불현듯 ‘혁명과 세대’라는 거창한 개념들이 떠오른 것은 최근 20대 젊은 영화감독들, 학생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무수한 독립영화들에서 발견되는 어떤 경향성 때문이다. 이 경향성을 구성하는 주요 키워드에는 주로 ‘곤경’과 ‘무력감’이 포함되고, ‘우리’나 ‘공동체’가 아니라 ‘나’와 ‘개인’이 중요하며, 열려 있는 공공의 장소보다는 우울하고 암울한, 내가 기거하는 골방과 뒷골목들이 빈번하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성이 다소 이상해 보이는 것은 분명 이들이 세상의 어떤 부조리함을 담고는 있지만 그것에 분노하거나 그 부조리를 생산하는 사회나 시대를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조리함을 하나의 영화적 유머로 빚어내거나 개인화하는 방식들 때문이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부터 주목받고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까지 초청된 소상민 감독의 < 나는 곤경에 처했다 > 역시 이러한 코드 아래 놓여있는 작품이다. 나이 서른을 목전에 둔 있는 선우는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가작으로 당선한 시인이지만 이후에도 딱히 시를 쓰거나 다른 노동은 하지 않는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연인 유나와는 오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빈번한 이별과 화해를 반복하고 있다. 선우가 기대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은 절친한 대학 선배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 남은 그는 경제적으로 성우가 기댈만한 좋은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으나 성실한 유나와 시인인 선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종종 충고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나는 선우를 아버지에게 선보이고자 점심 약속을 잡지만, 전날 선배와 술판을 벌인 선우는 늦잠을 자다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곤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유나에게 발각되고 결국 또 다시 이별을 통보받는다. 항상 이별을 당해야만 유나에게 절실해지는 선우는 또 다시 그녀를 잡기위한 행동을 시작한다. < 나는 곤경에 처했다 >는 자칭 시인이지만, 지리멸렬한 일상에 빠져 허우적대다 간혹 술독에 빠져 온갖 진상 짓을 해대는 한 20대 백수의 청춘백서다. 무언가 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더욱 곤경으로 몰아가는 남자의 영화적 상황들은 소위 ‘일상적 리얼리티’라 불리는 대사와 행위를 통해 구성되고,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의 그 부조리한 상황과 성격에 대해 유머와 쾌락을 느낀다. 분명 이 영화에는 잘난 척 하지 않으며, 현실의 무력감을 전달하는 생생한 질감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상한 것은 이 영화가 20대 청년의 곤경을 다루는 방식이다. 영화는 많은 20대 청년들이 공감할만한 사회적 이슈들을 전제로 한다. 영화 속 대사처럼, 비정규직과 실업자, 사회적 성취와 실패, 부와 빈곤의 문제,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파생되는 남녀간의 연애와 결혼까지 말이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러한 상황들에 대해 푸념하거나 무력감에 빠질지언정 그것에 대해 사회적인 방식으로 비판하거나 돌파하려는 의지나 의식 자체를 지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선우는 시인이지만 단 한 번도 시에 대해, 혹은 시인이라는 직함에 대해, 시인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무랑태수 같은 삶의 면죄부로 쓸 뿐이다. 오히려 선우가 몰두하는 것은 비루한 연애와 쉽게 무릎 꿇는 비굴한 사죄들뿐이며, 그것은 희극적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적 수사는 종종 홍상수 감독의 표면과 비교된다. 얼핏 이 영화의 캐릭터와 상황들은 홍상수 감독의 이야기적 요소와 흡사해 보인다. 그러나 홍상수 영화의 캐릭터와 플롯들은 마치 체스판 위의 말들처럼 전체 영화적 구조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획득한다. 반면 지금 독립 단편 혹은 장편 영화들 속에서 가장 흔히 발견하게 되는 이러한 일상적 부조리함과 유머에 관한 영화들은 그러한 구조나 의미를 배제한 채, 매 순간의 유머와 쾌락에 안주한다. < 나는 곤경에 처했다 >는 분명 최근 독립 장편 영화들 중에서 돋보이는 이야기 진술의 힘과 대사력을 지닌 영화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곤경에 처했다>의 가장 큰 장점과 한계는 모두 같은 곳에서 출발한다. 곤경에 대한 태도 말이다. 그저 쾌락할 것인가, 넘어 설 것인가? 난 후자를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