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담
- 감독
- 백수아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한민석, 김아영, 윤연경, 장예지, 구한림
영화에서 사라진 위대한 전통 중 하나는 변사(辯士)일 것이다. 물론 인간문화재처럼 기예를 갖추고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기회가 되어가고 있다. 토키영화는 그들을 무대에서 쫓아냈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영화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나는 그걸 늘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그건 슬프게도 일제강점하 식민지의 유산이기도 하다. 영화와 함께 일본에서 건너온 변사는 일본영화의 발명 중 하나이다. 일본에서는 변사라는 말 대신 가쓰벤(活辯)이라고 불렀다. 일본에서 가쓰벤이 언제 나타났는지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가쓰벤은 그 전통이 17세기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때 그림과 이야기를 하나의 화폭에 담는 에도키(繪解)의 전통이 나타났고(전문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일본 불교화의 전통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런 다음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에도키를 읽어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읽기만 했지만 점점 더 거기에 감정을 담고 심지어 자기가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에도키가 곧장 영화로 넘어온 것은 아니다. 분라쿠 인형극이 진행될 때 그 곁에 사미센 연주자들과 함께 해설자들이 앉았다. 그들은 단지 인형의 대사만을 낭송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여러 명의 해설자가 앉기도 했지만 진정한 대가는 혼자서 여러 인형의 목소리를 번갈아가면서 낭송했다. 이 전통의 섬세한 구분이 좀 더 필요하지만 내가 다시 만나고 싶은 영화사의 순간은 가쓰벤의 고고학이 아니다. 어쩌면 활동사진을 구경하러 온 20세기 초의 일본 관객들에게 가쓰벤의 존재는 너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일본에서 상영될 때부터 가쓰벤은 무대에 함께 올라왔다. 심지어 일부 극장에서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입담 좋은 가쓰벤들이 일종의 여흥으로 재담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게다가 가쓰벤의 존재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입한 영화의 자막을 구태여 번역할 필요 없게 만들면서 경제적인 기능도 수행했다. 영화가 점점 대중의 관심을 모으자 점점 더 많은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점점 더 많은 가쓰벤이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부 열렬한 관객들은 같은 영화를 다른 가쓰벤의 공연으로 보기 위해 구태여 찾아가기도 했다. 일본 영화사는 위대한 가쓰벤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공연(!)은 1912년 요코다상회(橫田商會)에서 제작한 <곤자키야샤(金色夜叉)>를 혼자서 낭송한 가쓰벤 쓰치야 쇼토(土屋松濤)의 무대라는 데 일본영화사 연구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곤자키야사>는 말 그대로 ‘돈 귀신’이라는 뜻인데, 오자키 고요가 요미우리신문에 1897년 1월 1일부터 1902년 5월 11일까지 연재한 대중소설이 원작이다. 이 소설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당시 식민지 조선에도 조중환이 번안해 「장한몽」으로 소개했다. 좀 더 간단한 설명이 있다. 우리에게는 ‘이수일과 심순애’로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수일이 사랑하는 여인 심순애가 돈 많은 김중배에게 시집을 가자 “김중배의 다이야 반지가 그렇게도 좋더냐”라고 한 다음 고리대금업자로 변신해 복수하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전형적인 신파. <곤자키야샤>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가쓰벤 쓰치야 쇼토는 “칠색음(七色音)이라는 그의 명성에 걸맞게 인물들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그 감미로운 음성으로 관객의 넋을 빼놓다가 하지마 간이치(말하자면 이수일)가 비통하게 죽어가는 연인 시가사와 미야(말하자면 심순애)에게 후회를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객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절찬을 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쓰치야 쇼토의 공연을 담은 기록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토키영화의 등장으로 가쓰벤은 설 자리를 잃었지만 아직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여성 가쓰벤 아소코야타(麻生子八咫, 사진2)와 그의 아버지 야소야타 (麻生八咫, 사진1) 의 공연 모습 일본에서 가쓰벤은 점점 더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첫 번째 토키영화 < 재즈싱어 The Jazz Singer >(앨런 크로슬랜드)가 미국에 등장한 1927년에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가쓰벤이 6,818명이었며, 그중 180명이 여성 가쓰벤이었다고 한다. 영화는 계속해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발명하면서 한편으로 그 자신의 역사를 살해했다. 영화사의 순간들은 언제나 그렇게 섬광처럼 지나갔다. (계속)
지난해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이 주관해 온 ‘사사로운 리스트’라는 기획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작품의 완성도나 품격, 내외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영화들의 목록. 이 기획은 ‘좋은 영화’, ‘가치 있는 영화’, ‘완성도 높은 영화’의 순위를 매길 때 준용되는 식상한 목록의 기준을 저버려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공인된 평판작이나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먼저 알려진 영화들은 가급적 배제하고자 했다. 기획자들의 취지에 부응하는 의미로 순전한 사사로움을 기준삼아 아래 10편의 작품을 골랐다. 가장 먼저 무빙 이미지의 창조적인 화용론을 보여주는 신작들이 눈에 띈다. 로이스 파티뇨의 < 나이트 위드아웃 디스턴스 >, 피터 보 랩먼드의 < 토포필리아 >, 가이 매딘/ 에반 존슨의 < 금지된 방 >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이트 위드아웃 디스턴스>와 <토포필리아>에서 이미지의 탐험가인 두 감독은 때로는 회화, 때로는 사진을 연상시키는 풍경의 경이로움을 통해 순수 이미지의 조형과 리듬이 주는 감흥을 만끽하도록 만든다. 영화적 풍경의 영기가 발산되는 두 작품은 오늘날 영화가 닿을 수 있는 표현의 지평이 어디까지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역작이다. 무성영화의 영혼이 전편을 장악하고 있는 가이 매딘의 <금지된 방>은 매딘의 전매특허와 같은, 유령과 환영을 따라 꿈의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신비로운 체험을 제공한다. 칠레의 대문호 로베르토 볼라뇨의 역작 ‘2666’을 모체로 한 <산타 테레세 앤드 아더 스토리스>는 신성과 악의 미로를 헤매는 시대의 정황을 ‘산타 테레사’라고 하는, 멕시코의 가상공간을 무대로 구성하고 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 아방가르의 화법을 유려하게 오가는 이 영화는 올해 본 가장 혁신적이고 용기가 있는 작품이었다. 지난 10월 5일 영면한 벨기에 출신의 아방가르드 감독 샹탈 애커만의 유작인 <노 홈 무비>는 더 이상 거주할 수 없는 ‘집’의 상실을 메타포로 헐벗고 굶주린 이미지들을 만들어놓은 에세이 필름이다. 극영화 중에는 찰리 카우프만과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감독 듀크 존슨이 합작한 < 아노말리사 >가 단연 돋보인다. 찰리 카우프만이 왜 위대한 작가인지를 통절하게 만드는 <아노말리사>는 한 작가의 강박적인 정신세계를 탐문하는 고도의 심리드라마이다. ‘사운드 연극’으로 기획되었다가 최종적으로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된 이 영화는 집착과 강박, 로맨스, 악몽이 교차하면서 무엇이 우리를 진짜 인간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루마니의 뉴웨이브의 주역인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의 < 트레저 >, 아르노 데스플레샹의 < 내 청춘 시절의 세 가지 추억 >, 미겔 고미쉬의 < 천일야화 >,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의 < 슈발리에 >도 해당 작가의 개성과 스타일이 십분 발휘된 작품들이다. 이들 가운데 < 슈발리에 >를 간판으로 소개하고 싶다. <슈발리에>는 그리스 여성감독이자 제작자로 명성이 높은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가 < 아텐버그 > 이후 6년 만에 발표한 장편영화이다. < 비포 미드나잇 >, < 송곳니 > < 더 랍스터 >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프로듀서이기도 한 창가리의 이 야심작은 배타적인 남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경쟁 본능이 야기하는 우스꽝스러운 결과에 대한 냉정침착한 관찰기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유럽영화계에서 새로운 문명의 발상지라고 할 정도로 괄목상대한 주목을 받고 있는 그리스 영화의 저력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연출자는 여성이지만 영화에는 (전화 목소리로 출연하는 이를 제외하면)단 한 명의 여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는 2012년 창가리가 만든 중편영화 <캡슐>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다. 등장인물이 모두 여성으로 이루어진 <캡슐>은 동성 집단 안에서 권력과 통제에 관한 영화였는데, <슈발리에>에서 창가리는 남자들의 커뮤니티로 표적을 이동하였다. 에게 해 한가운데에 뜬 럭셔리 요트에 6명의 남성 선원들이 모인다. 다소 권태로운 호화 요트 여행. 남자들은 어느날 저녁을 먹다 ‘슈발리에’라는 게임을 하기로 뜻을 모은다. 게임의 ‘목적은 누가 더 멋지고 훌륭한 남자인가?’ 를 가리는 것. 요컨대 의협(義俠)을 선발하는 이 게임은 한 사람에 대해 나머지 다섯 명이 점수를 매겨 최고점을 얻은 이에게 승자의 영예가 돌아간다. 한 마디로 선하고 의로운 말과 행위를 통해 용기와 정의를 수호하는 사도를 찾는 게임인 셈이다. 게임에 돌입한 선원들은 잠자는 자세에서부터 다이어트 습관, 발기된 성기의 길이 등을 측정하면서 누가 더 멋진(?) 남성인가를 겨룬다. 그러나 반지를 획득하기 위해 벌이는 이들의 황당무계한 게임은 아군이 없는 적대적인 무한경쟁으로 치닫는다. < 슈발리에 >는 시스템의 통제에 대한 우화이자 블랙코미디이다. ‘버디가 없는 버디무비’ 라는 카피를 단 영화는 여섯 명의 이성애자 남자들이 수컷의 공격성을 한껏 부풀리면서 벌이는 경쟁을 희화화한다. 남성들 간의 경쟁심이 점점 체면과 품격, 선의를 상실하는 과정이 점입가경의 상황들을 통해 전달된다. 요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이는 게임은 얄팍한 이해관계 앞에 신의와 우정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입증한다. 남자들만의 공동체를 무대로 한 이야기라는 점, 저들의 어리석음을 구경하는 관찰적인 시선이 긴장과 쓴웃음을 자아낸다.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 영화의 특징은 흡사 동물의 행동을 대면하는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하면서 인간 행위를 응시하게 만드는 인류학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그는 럭셔리 요트라는 제한된 공간에 남성-동물을 가두고 그들의 기벽을 관찰하면서 섹슈얼리티와 죽음, 폭력, 사회구조의 속살을 파헤친다. 수컷들의 드잡이 싸움이 벌어지는 비합리성의 세계는 남성들의 집단의식을 풍자하는 비틀어진 코미디로 형상화된다. 창가리는 남성의 세계, 통제와 길들이기, 인간의 아둔함, 집단 안에서의 불가사의한 영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거리두기의 방식을 동원하여 인상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집단의 광기와 이기라는 이슈를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연출자의 감정이나 의도가 거의 섞여 있지 않은 영화는 사회적 관계와 태도를 질기게 붙잡고 있다. < 슈발리에 >는 남성성의 신화와 그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조롱한다. 남성, 부성, 가부장의 어위군들이 불신의 눈초리를 받는 이 시대에 남성들의 세계는 타자성의 세계로 묘사된다. 이성애 집단 안에서 하나의 성(여성)을 제거한다면 그들 내부에서 권력과 욕망은 어떻게 일그러지는가? 이 불구적인 욕망의 일탈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의 산물인 영화는 용렬한 인간의 민낯을 가차없이 발가벗긴다. 한편으로 <슈발리에>는 창가리가 ‘스크루볼 비극’이라고 부르는 장르에 대한 실험이기도 하다. 부분적으로 영화는 스크루볼 재담극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일부는 그리스 비극의 전통과 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장르에 대한 실험으로도 보이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배우들이 주고받는 대사의 억양과 톤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말의 억양은 하나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언어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했다. <슈발리에>에서 모든 인물들은 양식화된 대화를 나누고 때론 웅변을, 때론 노래를, 때론 시를 읊는다. 내러티브가 진행될수록 말의 리듬과 운율이 희비극의 양면을 내포한 작품과 기이하게 호응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 슈발리에 >에서 자기애에 들든 과시적인 남자들을 통해 세상을 풀이하려 하는 창가리의 시선은 염세적이다. 풍자코미디의 끝은 대게 허무하지만, 이성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광기에 대해 준열히 꾸짖기보다 속절없이 인간의 괴상한 행동을 목격하도록 만드는 것이 연출의 목적이다. 전투적인 경쟁과 교활함, 자애로운 연대를 가장한 탐욕은 점점 더 불신과 배반을 전염시킨다. 여기에 가담하는 것이 통제의 매커니즘이다. 상호견제와 긴장으로 점철된 게임은 질서유지와 통제의 수단이 된다. 여섯 남자들의 게임을 주관하는 시스템(선장과 그의 조력자들)은 불모의 경쟁을 부추기면서 체제유지의 밸런스를 부산물로 얻으려 한다. 이 지배와 통제의 무한질주를 제어할 만한 시스템은 없으며 관객들은 점차 쩨쩨하고 비열해지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군데군데 유머아 기지가 넘치는 장면들이 여럿 있고, 존재의 무능을 확인하는 나른함이 사지를 옥죈다.
< 메리와 맥스 >(2009) 이후 6년 만에 애덤 엘리엇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 어니 비스킷 >(2015)이 완성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작부터 가슴이 설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감독의 신작은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 어니 비스킷 >은 감독의 전작들과 다름없이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장애를 가진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색감을 제거한 흑백 화면의 차분한 정서와 미니멀한 연출 스타일도 그대로 이어진다. 간결하고 명료한 스토리와 함께 희비극이 교차되면서 드라마와 유머를 맛깔나게 그려냈던 감독의 독특한 시선이 이번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전사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1960년대 파리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파리지앵 어니 비스킷은 박제사이다. 어니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어니는 후천적 청각 장애인이다. 어린 시절 여름 캠프에서 만난 어느 고약한 아이의 장난으로 영원히 들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어니의 기구한 운명은 어쩐지 감독의 작품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불운의 아이콘들과 많이 닮아 보인다. 그렇지만 이런 암울한 어니의 유년 시절에도 네넷이라는 옆집 소녀에 대한 행복한 기억이 있다. 새를 좋아하고 머리에서 계피가루 향이 나는 네넷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어니를 지지하고 이해하는 친구이자 그의 첫사랑이다. 어니는 늘 그녀와 베니스행 신혼여행을 꿈꾸며 풋풋한 첫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뿐, 독일 침공과 동시에 유대인이었던 네넷과 그녀의 가족은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어니의 첫사랑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세월이 훌쩍 지나 노년이 된 어니, 네넷이 남기고 간 오리와 단둘이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 어니 앞에 죽은 비둘기가 우연히 떨어지게 되고, 이를 계기로 어니는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첫사랑의 옛 추억을 떠올리며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베니스행을 감행한다. 그런데 인생이란 게 늘 계획한 대로 될 리가 만무하다. 특히 꼬일 데로 꼬인 지지리 운도 없는 어니의 인생이 그렇게 쉽게 술술 풀릴 리가 없다. 그토록 꿈에 그려왔던 베니스 대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황량한 호주의 오지 마을뿐. 여기까지의 스토리 전개와 캐릭터가 어쩐지 그의 또 다른 단편 < 하비 크럼펫 >(2003)을 닮아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라졌다.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였던 이전의 수동적인 캐릭터들과 달리 어니는 용기를 내어 스스로 뭔가를 쟁취하고자 노력한다. 인생이란 게 전적으로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운명에 달린 것도 아니기에... 이번 작품은 여러모로 감독의 전작과는 확연히 다른 텍스처를 드러내는 실험적인 시도들을 보여준다. 물론 감독의 시그니처인 흑백 화면과 전통적인 스톱모션 기법 그리고 내레이션 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간결한 스토리와 모노톤의 화면, 희비극이 교차하는 캐릭터가 가장 어둡고 드라마틱한 정서를 건드리며 동시에 유머를 머금고 있는 아이러니한 조화를 생산하는 것도 여전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반적인 작품의 톤이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감독은 본래 장편으로 기획된 시나리오에 25번이나 수정을 가할 만큼 시간과 열정을 쏟았으며, 작품이 주는 역동성과 리듬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전환했다는 후문이다. 또 다른 변화의 시도는 바로 캐릭터에 있다. 캐릭터들이 한층 더 풍부해진 질감과 왜곡된 아름다움 그리고 성격화를 드러내고 있다. 감독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캐릭터들과 늘 충분한 교감을 이룬 후 작업을 진행해 나가는 편인데, 이런 이유로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단순히 클레이로 만들어진 인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감독의 삶 속에 존재하는 실재처럼 다뤄진다. 특히, 어니의 새로운 인연으로 등장하는 앤젤리나라는 캐릭터를 통해 감독은 스스로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반영한다.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감성을 지닌 이전의 캐릭터에서 보다 단단하고 강한 캐릭터로 진화해 나가는 모습을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역력히 드러낸다. < 메리와 맥스 > 이후 정신적, 육체적으로 방전됐다던 감독의 창작 세계가 이 작품을 통해 완전히 에너지를 재충전한 것처럼 보인다. 미니멀한 스타일이 보여주는 미학과 번뜩이는 재담은 한층 더 긍정적이고 유쾌하게 진화했다. 애덤 엘리엇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위트에 또 한 번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수밖에 없다. 조급한 감이 없지 않지만, < 하비 크럼펫 >, < 어니 비스킷 >에 이어 제작될 예정인 단편 3부작의 완결편을 어서 빨리 만나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