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의 재판
- 감독
- 스탠리 크레이머
- 제작년도
- 1961
- 출연
- 스펜서 트레이시, 버트 랜카스터, 리차드 위드마크 , 마를렌 디트리히, 막스밀리안 셀, 주디 갈랜드, 몽고메리 클리프트, 에드 빈스, 베르너 클렘페러, 토븐 메이어, 마르틴 브란트, 윌리암 샤트너, 케네스 맥켄나, 알랜 박스터, 레이 틸, 버지니아 크리스틴, 벤 라이트, 조셉 버나드, 존 웬그라프, 칼 스웬슨, 하워드 케인, 오토 왈디스, 올가 파비안, 폴 버쉬, 버나드 캐츠
사진: <키노 프라우다> 제1호 중 (사진: “ KINO-PRAVDA ”, MUBI)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단순하게 설명할 수도 있다. 지가 베르토프, 1896년 제정 러시아 시기에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비아위스토크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집안. 태어났을 때 이름은 다비드 아벨레비치 카우프만(David Abelevich Kaufman), 1918년에 데니스 아르카디에비치(Denis Arkadievich)로 개명했다. 문헌에 따른 소개. 1917년 11월 7일 볼셰비키 공산당을 이끄는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 아래 무장봉기를 일으켜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켰고 데니스 아르카디에비치, 그러니까 지가 베르토프는 키노 프라우다(Kino-Pravda, 영화-진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통해서 혁명의 진행 과정을 기록하였다. 기계적인 설명. 영화사의 문장을 옮겨쓰는 것은 ‘세계영화사의 순간(들)’ 연재의 목표가 아니다. 나는 순간(들)이 하늘의 별자리처럼 펼쳐져서 성좌(Kostellationen)를 이룰 뿐만 아니라 그 순간들이 서로 충돌하여 새로운 섬광을 만들어내면서 고정되었다고 생각한 자리들이 동요하기를 바란다. 상투적인 순간이란 없다. 상투적인 지식이 있을 뿐이다. 지가 베르토프는 언제 영화사의 지식 안으로 돌아왔는가. 서로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있다. 대부분의 설명. 레프 쿨레쇼프와 함께 러시아 혁명 시기에 아방가르드 미래주의자로 불렸으며, 영화의 기록이라는 성질에 관한 ‘이념적인’ 테제를 제시하였고, 그것을 실천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라는 설명에서 끝낸 다음 에이젠슈테인과 그의 세대에 관한 몽타주 이론과 작품들에 관한 설명으로 넘어갔다. 언제 다른 설명이 시작되었는가.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사 안에서의 좌표는 언제 이동하였는가. 1969년에서 1970년 언저리. 파리. 그 가운데에는 물론(!) 고다르가 있었다. 공식적인 발언은 고다르가 장-피에르 고랭, 제라르 마르탱, 나탈리 비야르, 아르망 마르코와 함께 마르셀 마르탱의 질문에 인터뷰하면서 선언하였다. 이 인터뷰는 1970년 12월 《시네마 70》 제151호에 실렸다. 고다르는 장-피에르 고랭과 함께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고다르만 지가 베르토프에게 눈을 돌린 것은 아니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1970년 5월-6월호, 220/221호 특집호에서 ‘20년대 러시아’ 영화를 다루었고, 이미 지가 베르토프를 에이젠슈테인보다 앞에 놓은 다음 영화사학자 조르주 사둘에게 재평가의 지면을 맡겼다. 한 해 뒤에 1971년 5월-6월호, 229호에서 지가 베르토프를 표지로 다룬 다음 베르토프의 글을 번역해서 실었다. 물론 1968년 5월이 끝나지 않았다는 정치적 입장이 포함된 것이었다. 그때 카이에를 이끌었던 편집장은 장-루이 꼬몰리와 장 나르보니였다. 마오주의에 경도된 극좌파. 그들은 파리에서 문화혁명이 가능할 것인가, 라고 질문했다. 누구에게 이 관점을 배운 것일까. 그때 그들은 루이 알튀세르를 열심히 읽었다.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은 마르크시즘이 1924년 1월 21일 ‘이후’ 소비에트에서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좌) 고다르와 고랭이 지가 베르토프 그룹 결성 후 제작한 < 동풍(Le Vent d’est) >(1969) (사진: “ Le Vent d’est ”, IMDb) (우) 카이에 뒤 시네마 1971년 5월-6월호(229호) (사진: “ 1971 CAHIERS DU CINEMA French Movie Magazine #229 FN+ 6.5 Dziga Vertov ”, ebay) 자, 알겠다. 고다르와 카이에는 먼저 역사의 좌표를 수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에이젠슈테인이 늘 맨 앞에 있었다. 그 이름을 끌어내리고 베르토프로 수정한 다음 몽타주의 개념을 다시 질문하자고 제안했다. 정확하게 같은 방법을 되풀이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고다르(와 고랭)는 베르토프의 몽타주를 다시 검토하였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이 자리로 되돌아왔을 때 따져 물어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가 베르토프는 에이젠슈테인의 곁에 있는 이름이 되었다. 다시 소비에트의 1920년대로 돌아가자. 지가 베르토프는 이미 레닌의 지시로 러시아 전역에서 진행되는 혁명을 인민들에게 전하는 프로파간다 순례 열차를 타고 ‘키노 네델리아(주간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1] 지가 베르토프는 이 방법을 좀 더 밀고 나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신의 동생인 촬영기사 마하일 카우프만과 그의 아내이자 편집자인 엘리자베스 스빌로바와 함께 볼셰비키 공산당의 일간지인 《프라우다》의 영화 신문인 <키노 프라우다>를 제안하였다. ‘프라우다(Pravda, Правда)’는 러시아어로 ‘진리’라는 뜻이다. 《프라우다》는 1912년 5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 기관지로 창간되었고, 1918년에 모스크바로 편집국을 옮긴 이후 소비에트 공산당 공식 기관지가 되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1922년 5월 21일 《키노 프라우다》 1호가 제작되었다. 첫 호는 혁명에 성공한 인민들을 위한 여흥과도 같은 것으로 내용을 구성했다. <키노 프라우다> 제1호 중 (사진: “ KINO-PRAVDA NO. 1 ”, MUBI) 하지만 지가 베르토프는 혁명이 진행되는 지금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배워나갔다. 무엇보다도 그는 학습효과를 통해서 제작하는 순간마다 성장했다. 에이젠슈테인이 이론에 몰두하고 있었다면 지가 베르토프는 끊임없이 새로운 개념을 발명해 나갔다. <키노 프라우다>가 진정한 ‘키노 프라우다’가 된 것은 5월 26일의 <키노 프라우다>가 제작되었을 때였다. 혁명 지도자 레닌은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에서 공장 연설을 마치고 나오다가 볼셰비키 숙청에 반발한 좌파 사회혁명당원 파니 카플란의 암살 저격 총에 맞았다. 파니 카플란은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좌파 사회혁명당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34명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모두 총살형 판결을 받았다. 지가 베르토프는 이 재판을 촬영하였다. 이 촬영 과정에서 베르토프는 기록에서 멈추지 않고 영화와 당파성이라는 문제, 그리고 기록과 편집의 관계에 관해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놓치면 안 된다. 이 질문과 대답은 그 자체로 지가 베르토프의 투쟁이었다. 공산당 내에서 토론이란 사상투쟁이며, 이 투쟁은 패배하면 자기비판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사상을 검증받아야 했다. 레닌은 영화가 인민을 위한 ‘교육(pedagogy)’이 되어야 한다고 교시했다. 지가 베르토프는 그 말을 단순히 세상에서 벌어지는 뉴스를 통한 혁명의 교육에서 멈추지 않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혁명적으로 교정하는 교육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키노 프라우다>는 수명이 짧았다. 모두 23편이 제작되었고, 매호 상영시간은 20분 정도였다. 매번 구성이 바뀌긴 했지만 대부분 3개 정도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베르토프는 점점 더 <키노 프라우다>에 기술적인 실험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인민의 일상생활을 전달하는 뉴스라기보다는 실험영화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키노 프라우다>는 1925년에 끝났다. 하지만 지가 베르토프가 <키노 프라우다>를 만들면서 발표한 1922년 선언문은 어떤 영화가 상영되는 어떤 자리에 가서 낭독하고 싶어진다. “부르주아 연애소설로 만든 영화들은 문둥병에 걸린 것이다. 이런 영화들을 멀리하라, 이런 영화들을 보지 마라, 이런 영화들은 생명에 위험하다. 전염에 주의하라. 그런 영화를 만나면 도망쳐라!” 지가 베르토프 (사진: “ DZIGA VERTOV ”, Collection at the Austrian Film Museum, MoMA) *** [1] ‘세계영화사의 순간들’ 연재에서 이 순간을 이미 다루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1918년 8월 13일 로 되돌아가기를 권한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사진: “ Häxan ”,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반드시, 라고 단언하고 싶은데, 자신을 시네필이라고 자처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일시적으로 이상한 영화를 찾아보느라고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는 재빨리 빠져나오고 다른 누군가는 여기에 머문다. 그 영화들이 ‘불법적인’ 대상이 아니라면 (이를테면 스너프 필름, 아동성애 영화, 기타 등등) 각자의 취향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이 영화들을 ‘이상한 영화’의 수호성인 아모스 보겔은 ‘전복적인 예술영화(subversive art film)’라고 불렀다. 아모스 보겔을 이야기할 자리는 1974년까지 기다려주길 바란다. 여기서 질문은 영화사의 순간들에서 ‘이상한 영화’라고 부르는 영화가 언제 나타났느냐는 것이다. 물론 방점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다른 계보를 열거하게 될 것이다. 다른 예술들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사회적 위반, 법적 금지의 경계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했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선을 넘고 싶어 했다. 누군가는 한계를 부수길 원했고, 다른 누군가는 돈을 원했다. 누군가는 예술적인 실험을 하고 싶어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거기서 쾌락을 향유했다. 여러 영화 제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여기서 시작해보겠다고 결심했다. 세계영화사의 순간들은 그렇게 가끔 하나의 선처럼 느껴지는 앞과 뒤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옆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내가 ‘이상한 영화’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다가 가장 멀리서 마주친 영화는 벤야민 크리스텐센의 스웨덴 영화 < 헥산 >(1922)이다. “Häxan”은 번역하면 ‘마녀’라는 뜻이다.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19세기인 1879년에 태어났다. 처음에는 배우가 되기를 원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18년부터 ‘흑마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서점을 뒤지던 벤야민은 독일 베를린 서점에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 사본을 구하게 되었다. 이 책은 1486년 독일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하인리히 크라메르가 쓴 마녀 처단에 관한 책이다. 주술을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마녀로 규정된 여자의 마법의 악을 ‘끝내기 위해서’ 자백을 끌어내는 고문 기술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에 유럽에서는 마녀로 내몰린 여자들이 산채로 화형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하인리히 크라메르는 마녀의 존재를 신학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주장하고, 더 나아가 마녀사냥을 제도화하는 데 기여하고, 심지어 이 책은 마녀재판의 법전이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소설에서 사용된 장면들, 마녀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어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들이 여기 실려 있다. 교회 내부에서도 이 책은 논쟁이 되었으며, 오히려 그래서 많은 독자를 얻게 되었다. 1519년에 야콥 스프렝게르가 이 책에 새로운 저자로 나서서 마치 개정 증보판처럼 추가해서 1533년에 출간하였다. 손에 손을 거쳐 이 책은 마녀를 자백시키는 안내서가 되었고, 잔인한 고문 기술자들은 상상으로 쓰인 이 책의 내용을 감옥에서 불행한 여자들에게 실행하였다. 『마녀의 망치』는 일시적으로 판금 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왕실 궁정에서 공공연하게 읽히는 금서가 되었으며, 16세기 이후에 마녀재판에서 더 잔인한 기술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마녀의 망치』 표지와 <헥산> 포스터 (사진: “ Häxan ”, IMDb) 벤야민 크리스텐센이 구한 사본 『마녀의 망치』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여러 개의 판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본이 15세기라는 것을 셈에 포함해주길 바란다. 1부에서는 먼저 마녀의 존재와 악행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2부에서는 마녀들이 저지른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범죄와 악마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3부에서 마녀재판의 실제 절차와 고문을 통한 자백 유도 방법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마녀의 망치』에 만족하지 않고 벤야민은 1919년부터 거의 2년 동안 마녀사냥과 재판에 관한 상세한 규정들, 사례, 실제로 실행하는 집행과정을 담은 삽화들, 여기에 더해 각종 문건을 모았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벤야민은 1920년까지 발표된 마녀들에 관한 소설과 희곡도 모았다. 그런 다음 자료들을 바탕으로 영화제작을 결심하였다. 벤야민이 준비한 것은 단지 마녀에 관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준비한 <헥산>은 유럽 중세로부터 400년에 걸친 마녀사냥과 재판에 관한 백과사전이었다. 벤야민은 제작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구한 도판들을 그 앞에서 전시하다시피 했고,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재판기록과 집행을 낭송하기도 했다. 이 기괴하지만, 분명히 야심적인 프로젝트에 스웨덴 필름 인더스트리가 관심을 보였다. 벤야민과 촬영 감독 요한 안케르스트예르네는 덴마크에 오직 <헥산> 촬영을 위한 영화 스튜디오를 사들였다. 그런 다음 야외는 중세를 재연하였고, 실내는 모두 밀폐시킨 다음 어두운 그림자와 빛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해가 떨어진 다음에만 촬영을 시작해서 새벽이 오면 멈추었다.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헥산>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중세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제단화를 스크린 위에 펼쳐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가장 비싼 무성영화가 되었다. <헥산>은 1921년 2월에 촬영을 시작해서 그해 10월까지 이어졌다. 빛과 그림자 간 대조가 두드러지는 장면 / 우주를 둘러싼 천사 합창단의 모습 (사진: “Häxan( 1 , 2 )”, IMDb) 영화 <헥산>은 7개의 연대기로 나누어져서 진행된다. 첫 번째 시작은 마치 학술 발표를 위한 도판 설명처럼 이어진다.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주변에 공기와 불이 둘러싸고 별들이 주변을 떠돌면서 천사 합창단이 보인다. 그런 다음 악마와 마녀의 조각상, 목판화, 삽화를 차례로 소개한다. 이 화면자료들이 펼쳐지면 IMAX 스크린으로 벽화처럼 보고 싶을 것이다. 사탄이 나타나서 부부가 잠든 침대에서 아내를 유혹하고, 질식시키고, 살해하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랑의 묘약을 구하는 여인, 성에 눈뜨는 여인, 그 여인이 몰래 먹이는 묘약에 흥분하는 승정(僧正), 게걸스러운 폭식, 들린 자들(the possessed)이 사탄의 북소리에 맞춰 한밤중에 불을 피우고 춤을 추는 축제,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이 장면들을 종종 멜리에스 영화에서 본 특수효과를 이용해서 펼쳐 보인다. 하지만 이 장면들이 우스꽝스럽기는커녕 오싹해지는 것은 만들고 있는 쪽에서 지금 이걸 진심으로 믿고 있구나, 라는 설득을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민담과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들처럼 보였지만 여기에 교회가 개입하면서 고문이 등장한다.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그 과정의 세부를 묘사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여기서 이 영화가 그런 이야기들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졌단 생각을 해야 한다. 게다가 신성모독 장면을 재연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그래서 <헥산>을 보고 있으면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라는 장면들과 마주치게 된다. (상) 마녀와 악마에 관한 삽화 / (하) 사탄의 북소리에 맞춰 춤추는 들린 자들(the possessed) (사진: “Häxan( 1 , 2 )", IMDb) 벤야민 크리스텐센이 1921년에 이 영화를 만들면서 프로이트의 저술을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아직 살아있었고, 『쾌락원칙을 넘어서』를 발표한 직후이다. <헥산>의 마지막 연대기는 동시대에 이른다.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여성은 몽유병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녀는 몇 가지 과정을 거쳐서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그 당시 정신병원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셀 푸코의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고문 장면뿐만 아니라 성상 모독, 마녀에 관한 찬양, 중세 교회에 대한 적나라한 재판 장면과 함께 여성의 누드, 신체 훼손, 시체 손상에 이르는 장면들이 등장하면서 개봉 당시 스웨덴과 덴마크의 검열은 통과했지만, 독일과 프랑스, 특히 미국에서는 검열에서 문제가 되어 개봉을 위해 재편집이 불가피했고 상당 부분이 삭제되어 국가별로 여러 판본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러 판본이 만들어졌다. (내가 보지 못했지만) 가장 흥미로운 판본은 1968년 메트로 픽쳐스 코퍼레이션이 <헥산; 옛날 옛적부터의 마녀들(Häxan; Witchcrafts through the ages)>이다. 이 판본에서는 『네이키드 런치』의 윌리엄 버로스가 영어 나레이션을 한다(고 한다). 이 무렵 윌리엄 버로스는 마약중독 상태에서 장 주네를 둘러싼 친구들과 친교를 맺던 시기였다.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작 이 판본의 복원 소식은 들리지 않고 1976년부터 1922년 판본을 원본에 가깝게 몇 차례에 걸쳐 복원하고 있다. 물론 원본을 복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윌리엄 버로스의 판본이 궁금하다. 아마 언젠가는 될 것이다. 나는 기다릴 수 있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취향에 맞는 영화라는 것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이미 정전으로 기록된 작품 목록의 외부를 끊임없이 훑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지영 감독의 이력에서 데뷔작인 <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 >(1982)나 대표작으로 꼽히는 < 남부군 >(1990), < 하얀전쟁 >(1992)을 아는 사람들은 많아도, < 산배암 >(1988)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당대의 영화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다음과 같이 보았다. “이 작품 <산배암>의 광고 문안이나 포스터를 보면, 바로 그런 류의 한탕 영화라는 짐작을 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그러한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오히려 ‘벗기기’와 ‘지방 장사’가 기피하는 사회현실의 반영과 약간의 정치의식마저 담고 있기 때문 이다. 필자는 이 작품이 중견 정지영 감독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요즘 나온 영화 중 장선우 감독의 < 성공시대 >와 더불어 사회성 영화로 퍽 드물게 성공한 예에 속한다고 보았다.” - 정재형, “[영화평] 한국영화가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 정지영 감독의 <산배암>”, 《스크린》 1988년 10월호(통권56호), 284쪽. “4년여의 긴 공백 끝에 만든 < 거리의 악사 >는 검열로 인해 부분적인 사회묘사마저 생략됨으로써 평범한 멜로드라마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으며 화제작이었던 < 위기의 여자 >는 과다한 나눠찍기에 의한 편집이 거슬리는 1930년대 할리우드의 여성관객용 멜로드라마의 재판이었다. 1988년에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 < 여자가 숨는 숲 >과 <산배암>은 정지영 감독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최악의 작품이었다. 정신분석학적 접근과 계급의식이 배제된 이 두 편의 여성 심리를 다룬 영화들은 충무로의 장르영화에 불과하다 .” - 전양준, “젊은 평론가가 본 한국 영화감독 10인 (5) 정지영”, 《한겨레》, 1990년 7월 1일자 11면 기사. 음?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평가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위의 글이 <산배암>의 사회현실 반영과 정치의식(이 글의 뒤에서 이를 계급의식이라고 보충한다)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반면, 아래의 글은 ‘계급의식이 배제된’ 영화로, 심지어 정지영 감독 작품 중 최악의 영화로 평가한다. 당연히 하나의 영화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같은 지점에 대해 전혀 다르게 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도대체 <산배암>은 어떤 영화인가? 탄실이는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뱀도 잡고 벌레도 잡는 이 구역의 최상위 포식자이자 순박한 산골소녀이다. 그러나 집은 가난하고 산골에는 일자리도 마땅치 않기에 탄실이는 소개를 받아 부잣집으로 들어간다. 마을 사람들은 떠나는 탄실의 뒤에서 ‘식모살이’를 가게 되었다고 수군대고, 일을 소개해 준 사람은 펄쩍 뛰며 ‘건강이 안 좋은 부잣집 사모님을 돌봐주는 일’이라고 정정해준다. 실제로 탄실이가 도착한 부잣집은 이미 나이 든 식모가 일을 봐주고 있으며, 탄실에게는 사모님의 휠체어를 밀어주거나, 목욕을 시켜주는 정도의 일이 주어진다. 오히려 사모님은 자신의 비싼 옷을 탄실에게 주며 앞으로 자신의 것은 모두 탄실의 것이기도 하다는 다정한(?) 말도 해준다. 하지만 이들의 평화로운 나날을 깨뜨리는 인물이 나타나니 이 집의 주인인 사장님이다. 사장님은 수상한 여자로부터 반복적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피하고, 사모님은 자꾸만 사장님과 탄실 둘만 방에 남을 기회를 만들려고 한다. 그렇다. 탄실이는 사실 불구가 된 사모님을 대신하여 씨받이가 되기 위해 이 집에 온 것이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1년 전에 < 씨받이 >(임권택, 1986)가 국내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강수연 이 여우주연상을 탄 이후라 이러한 소재가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아, 또 뻔한 이야기겠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묘미는 이 다음에 있다. 탄실은 결국 아기를 빼앗기고 집에서 쫓겨난다. 이런 상황에서 탄실은 무엇을 원할까? 복수? 우리의 탄실이는 이래 봬도 산골에서 뱀도 잡고 벌레도 잡고 놀던 건강한 소녀이다. 그녀는 복수에서 더 나아가 이 집의 최상위 포식자가 되고자 하고, 그 과정이 영화 속에서 반전에 반전을 더하며 펼쳐진다. ‘산배암’이 된 탄실이는 독으로 상대를 단박에 물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커멓게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천천히 숨통을 조이며 이 집안에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나머지는 영화를 통해 직접 확인하도록 하자. 그래도 명색이 ‘구술로 푸는 한국영화사 미스터리’가 아닌가. 구술에 대한 이야기 한 마디 하지 않은 채 끝을 낼 수는 없다. 그럼 이제 한 집안을 집어삼키려는 ‘산배암’보다 더욱 어둡고 음습하고, 찝찝한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여러분 이 영화 한 번만 봐주세요 정지영과 1988년 정지영 감독은 여러모로 1988년 한 해 동안, ‘뱀’과 인연이 많았다. <산배암>은 8월 27일 코리아극장에서 개봉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미국 직배영화 < 위험한 정사 >(아드리안 린, 1987)가 한창 상영되고 있던 신영극장과 코리아극장에 영화감독 장길수 와 조감독 최진식 이 뱀을 풀며 소란을 피웠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업무방해혐의로 체포했다. (“미영화 직배 반대 시위 두 영화감독 즉심 넘겨”, 《동아일보》, 1988년 9월 27일자 14면 기사) 사건이 그렇게 끝나는 건가 싶었는데, 1년 뒤인 1989년 9월 4일 정지영 감독은 포항에서 <남부군> 촬영 도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혐의는 코리아극장과 신영극장에 뱀을 집어넣도록 사주했다는 것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정지영 감독에게 직접 들어보자. UIP 직배반대시위 (사진: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정: 매일 코리아극장하고 신영극장 양쪽에, 그때 미국영화 직배가 상영될 때니까. 남: <위험한 정사>. 정: 어어. 그래 양쪽에 가서 매일 데모를 하면서 저녁에 들어와서 회의를 하고 헤어지고, 매일을! 그랬어요. (중략) 그런데 그렇게 데모를 할… 그때 88올림픽을 앞두고 어느 구역 안에서는 일체의 시위가 금지돼 있었다구. 근데 그거를 우리는 무시하고 한 거거든? 근데 신문에 안 나. (웃음) 신문에 단신으로 “영화인들이 이렇게 데모하고 있다” 나오고. (중략) 그래 그것이 쌓이다가 사람들이 지쳐가고 그러니까 누가 뱀 얘길 꺼낸 거지. “언제까지 이렇게 싸울 거냐” 정부에서 무슨 반응이라도, ‘자, 보자. 왜 그러냐. 너네들 만나나 보자’ 이런 반응도 없고. 기자들이 와서 취재도 안 하고. “이거 어떡할 거냐.” 그래서 누군가가 “이거 사고 치지 않으면 신문에 안 납니다.” (웃음) 그래서 “사고를 어떻게 치냐” 그랬더니, “사고를 곱게 치는 법이 하나 있다. 지금 <위험한 정사>를 하고 있는 극장에 뱀을 놓으면은… 물론 독 없는 뱀을 놓으면은,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그걸로 크게 신문에 나면 극장은 며칠간 문을 닫고, 그럼 그건 사고다. 기자들이 안 다룰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됐는가를. 그걸 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을 하는데, 그 주장을 한 사람은 옛날에 그런 사건이 있었대요, 충무로에. 어느 극장에 뱀을 넣어서 며칠 뭐 ‘일주일간의 휴관을 했다’ 이런 게 있었대. (136~137쪽) ‘뱀 얘기’를 제안한 사람의 “어느 극장에 뱀을 넣어서 휴관을 했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이 사건도 매우 재미있으니,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살펴보고 가면 좋을 듯하다. 1958년, 충무로 극장 주변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깡패끼리 백주에 집단폭행이 일어나더니 그 보복을 하기 위하여 극장 관람석에다 뱀까지 집어넣어 관객들이 한때 혼란을 일으키고 다시 복수전을 전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중략)… 지난번 29일 낮 11시경 세기극장 주변의 주도권을 빼앗으려고 극장 주변에 모였던 소위 명동파와 종로파 간에 패싸움이 벌어져서 …(중략)… 2일 밤에는 세기극장 관람석에다 뱀 두 마리를 집어넣어 관객들이 일대혼란을 일으킨 일이 있으나 이 뱀은 어느 파에서 집어넣은 것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다. - “새로 개관한 세기극장에 뱀 소동”, 《조선일보》, 1958년 6월 5일자 2면 기사. 이전에 “ 한국영화 야인시대 ”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지만, 1958년에는 임화수 로 대표되는 종로파와 이화룡 으로 대표되는 명동파를 통하지 않고는 극장의 운영이 불가능했다. 이정재라는 든든한 뒷배를 갖고 있던 명동파는 틈만 나면 종로파와 세력 다툼을 벌였는데, 여기에 영화계에 갓 뛰어든 세기상사의 ‘세기극장’이 애꿎게 세력 결투의 장이 된 것이다. 사실 이 시기 명동을 중심으로 한 영화산업의 흐름은 조용히 충무로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건달 세력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명동도, 종로도 아닌 ‘충무로’에 사업가 출신의 영화제작자(수입업자)들이 새로운 터전으로 잡고 모여들면서 시작되었다. 최근 진행하고 있는 신창영화사의 전석진 대표의 구술을 살짝 스포하자면, ‘화성영화사(이화룡)-한흥영화사( 최관두 )-대원영화사( 원선 )-한성영화사( 정진모 )’는 명동을 중심으로 하는 ‘명동파’의 대표들이었다. 이들은 각각의 회사인 듯 보이지만 하나의 쩐주를 통해 굴러가는 한 덩어리였다고 한다. 이를 깨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 무역을 통해 크게 성장한 기업가들이었다. 세기상사가 그랬고, 이우석 이 영화계에 뛰어든 것도 이 시기였고(아직 동아수출공사는 설립 전이다), 불이무역이나 동양영화사와 같은 영화사들이 모두 무역업으로 시작해 충무로에 극장을 세우고 영화계로 들어왔다. 이 이야기는 그 나름으로 크고 재미있는 얘기니까 이쯤에서 접어야겠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다루어볼 것이다. 아무튼 저 ‘뱀 소동’의 이면에는 이러한 충무로 vs 명동의 세력 다툼이 배경에 있었다는 사실만 알아두자. 직배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극장에 ‘뱀을 넣자’라고 제안한 사람은 무려 3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기억해내고 의견을 낸 것인데, 이는 다시 말해 그가 1988년 직배저지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당시 영화계 원로의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 번만 더 스포를 하자면, 역시 올해 진행하고 있는 주제사의 구술자인 정병각 감독은 이 시기 직배저지투쟁과 스크린쿼터사수투쟁을 떠올리며, “원로영화인들의 참여가 매우 활발했다”라고 회고했다. 당시 영화계에서 원로영화인들은 딱히 일거리를 찾지 못해 그 지위가 매우 약해진 상황이었는데, ‘직배’라는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자신들의 역할이 생긴 것에 내심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직배저지투쟁이나 이후 이어진 스크린쿼터사수투쟁과 영화진흥법 투쟁은 겉으로 보기에는 ‘미국영화 직배’라는 외부 세력과의 투쟁인 동시에 기존 충무로 세력과 새로 유입된 충무로 신진 인력들 사이의 세력 투쟁 또한 내재하고 있었다. 세력 다툼엔 역시 ‘뱀’이 등장하기 마련인가보다. 뱀은 사라졌지만… 다시 1988년으로 돌아오자. 저 뱀 제안을 듣고 회의가 진행 중이던 장내에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정지영 감독은 공식적으로는 저 의견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정: 내가 말은 나왔지만 이것은 공식화 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여러분들이 박수를 쳤지만은 이것이 실현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사고를 어떻게 칩니까. 일단 이건 없던 걸로 합니다. 회의록에도 지웁니다.” 이렇게 하고 헤어지고난 다음에 그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사람을 불렀어, 내가. “어떻게 뱀을 넣냐?” (모두 웃음) “뱀을 어떻게 넣냐. 누가 넣냐, 도대체?” “아니 이거 사람 사서 넣으면 되는 거지 우리가 어떻게 넣냐” “그러면 뱀은 어디?” “아이, 청계천 가면 뱀 많다.” (웃음)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해 시켜서 청계천 가서 꽃뱀 사 가지고, 사람 사 가지고 뱀을 넣었지. 그러나 ‘뱀들은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차갑고 거친 시멘트 위에서 독이 올라 몽글몽글 자기들끼리 엉킨 채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라고 한다( 2022년 주제사 1권 <김형종> 2차 구술채록문 , 90~91쪽 참조). 결국 뱀의 출현은 다소간의 소요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대세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조용히 지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사이 싸움의 방향이 바뀌었다. 영화인들은 ‘직배’가 영화산업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외교의 문제이기 때문에 저항을 한들 그 거대한 흐름 자체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직배저지’가 아닌 ‘스크린쿼터사수’와 ‘영화진흥법 제정’ 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런데 앞서도 말한 대로, 이 사건은 1년 후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남부군> 촬영 현장. 이 사진의 뒷면에는 ‘이 장면을 찍고 밤에 서울로 연행 당함’이라는 메모가 적혀있다. (사진: 정지영 기증) 정: 그러다가 어느 날 포항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데 형사들이 갑자기 와 가지고 나를 연행해 갔지. 여기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있는 건데, 내가 한참 촬영을 하는데 형사들이 왔다고. 계곡 위에서 찍고 있는데 형사들이 계곡까지 올라왔어요. 올라와 가지고 “왠일이냐?”고 그랬더니 “감독님, 서울로 올라가셔야 되겠는데요” 그래. “아니 서울은 왜 갑자기 올라가느냐?”고 내가 그랬더니 신문을 딱 주는데 보니까 거기에 ‘정지영 감독 구속’으로 돼 있어. 나는 여기서 지금 촬영을 하고 있는데 《조선일보》에 ‘정지영 감독 구속’ (1989년 9월 3일자 15면 기사-편집자 주) 그래서 “이게 무슨 소리냐?” 그랬더니 “아 글쎄 말입니다” 그래. “근데 왜 나를 연행해 가냐?” 그랬더니… 재밌다고, 이게. “아니 여기 구속으로 돼 있는데 감독님 여기 있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말이 돼? 그렇게 한심한 시대였다는 거지, 말하자면. (웃음) 그러니까 신문에 ‘구속’으로 돼 있으니까 나는 구속돼 있어야 된다는 얘기 아니야? 신문의 오보를 내가 몸으로 실현해 주라는 거 아니야, 그건? (웃음) 남: 아, 그러면 그거는 어디서 정보를 미리 제공받아서 나온 기사가 아니라 오보가 난 거였던 거네요? 정: 오보를 일부러 쓴 거지. 나를 잡아오려고 일부러 오보를 낸 거지 . 물론 본인을 잡기 위해 일부러 오보를 냈다는 것은 정지영의 추측이다. 그러나 오보를 실현시키기 위한 구속이든, 구속을 위해 일부러 정보를 흘린 것이든 둘 다 어이가 없는 이유이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정지영 감독은 1989년 <남부군> 촬영 도중 체포되어 UIP영화 상영 극장에 뱀을 풀어 영업을 방해한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구치소에서 석방된 날, 정지영 감독(2열 좌2)과 정회철 감독(2열 우2)의 모습 (정지영 기증) 어쨌든 시작은 이렇게 과격하고 무모했지만, 이후 투쟁은 대학가에서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새로운 세대의 합류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렇다고 1980년대 후반의 ‘직배저지투쟁’이 완전 실패라고는 볼 수 없다. 정지영은 이 시기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스스로 평가를 내렸다. 정: 우리가 이 운동을 통해서 ‘우리 영화는 우리가 살려야지 누가 보호해 주는 게 아니다’란 생각을 한 거지. 왜냐면은 직배저지투쟁할 때 극장 앞에서 막 데모를 할 때 관객들이 표를 사 가지고 들어가요. 영화인들이 와서 데모 하고 있는데 표 사 가지고 들어가. 누군가가 이제 “관객 여러분, 이거 직배영화입니다. 영화 구경하지 마세요!” 그랬을 때 뭐라고 대답을 들었냐면, “당신들이 영화 잘 만들어 봐. 우리가 한국영화 보지 왜 미국영화 보겠어, 이 사람들아. 영화나 똑바로 만들어!” 그러고 들어갔다구. 그만큼 한국영화가 관객들한테 우습게 보였을 때란 말이지. 그것이 나한테 자극을 줬는데 다른 사람한테 자극을 안 줬겠어? ‘우리한테 책임이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그래서 그런 것들이 모두 자극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 운동이 모든 영화인들에게 (사이) 용기도 만들어 주고. 또 열심히 해야겠다는 어떤 자세를, 사명감 이런 걸 만들어 주지 않았겠는가. 나는 직배운동이나 스크린쿼터투쟁이나 검열 투쟁 이런 것들이 그냥 ‘표현의 자유 문제를 우리가 지적한다’ 이런 차원이 아니고, 그 운동 자체가 영화인들 개개인에게 ‘우리가 우리 영화를 잘 만들어야 사랑을 받을 수 있어’ 이런 어떤 사명감 같은 걸 심어주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해요. 2023년 『1980년대 한국영화: ‘서울의 봄’부터 코리안 뉴웨이브까지』 중 ‘구술로 보는 1980년대 한국영화’ 챕터를 쓸 때도, 이 ‘뱀 소동’은 무조건 넣는다는 일념으로 글을 구성했었다. 개인적으로 이 ‘극장에 나타난 뱀’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상당히 무모하긴 하지만, 한편으로 굉장한 시대적 위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디아나 존스 >가 상영 중인 극장에 뱀을 풀었으면 완전 4D 체험이 가능했을 텐데’ 같은 상상을 해보면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한국 영화시장을 집어삼키기 위해 (질적으로나 물량적으로 한국영화와 비교도 되지 않는) 미국영화들이 물밀듯 밀려들어올 때, 한국의 영화인들은 뱀을 내세워 이를 물리치려 했다. 마치 거대한 폭풍 앞에 부채 한 장을 들고 서 있는 형세였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다시 <산배암>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해볼까 한다. 정지영 감독(우3)과 <산배암> 출연 배우들. (《스크린》 기증) 위 사진 속 집과 마당은 묘하게 < 기생충 >(봉준호, 2019)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산배암>과 <기생충>은 ‘계급’과 ‘계단’이라는 모티프에서 매우 유사함을 갖고 있다. 1988년 도덕적으로 타락한 상류층 가정에 들어간 순진한 산골소녀는 자신이 가진 건강한 생명력까지도 착취하려는 이들에게 ‘산배암’이 되어 저항했다. 그리고 지금 3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계급에 대한 인식은 ‘뱀’에서 ‘기생충’으로 바뀌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언제든 자신이 받는 억압에 대해 ‘뱀’으로 돌변해 상대를 위협할 수 있었던 이들이, 이제는 숙주에게 붙어 사는 기생충이 되었다. 기생충은 숙주가 없이는 살 수 없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숙주에게 붙어 그 체계 안에서 피와 고름 같은 것을 먹으며 살아남든가, 아니면 공멸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생존방식은 제3의 길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오늘날의 한국영화 안에, 그리고 극장 안에 다시 ‘뱀’이 나타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