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졸업반
- 감독
- 정운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60년을 이어온 공간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아카데미극장의 대표이자 소유주였던 정운학은 황해도 해주 태생으로 해방 전까지 해주극장을 비롯해 신주, 안악, 겸이포, 개성 등지에서 당시에는 희귀했던 영사기사로 활약한 이력이 있다. 아카데미극장의 전신인 시민극장을 운영하면서 원주시와 인연을 맺은 정운학은 과거 C도로라 불렸던 원주 평원로에 1956년 원주극장, 1962년 시공관, 1963년 아카데미극장, 1967년 문화극장을 순차적으로 열었다. 그와 별개로 한국전쟁 동안 동부전선 전투를 담당한 육군 1군 총괄사령부가 원주에 주둔하면서 1956년 1월 개관한 군인극장이 있었다. 민간인의 극장 출입도 허용된 곳이었기에 상업극장과 다르지 않게 운영됐다. 이렇게 원주시 원도심에는 5개의 단관 극장이 성업했다. 극장마다 특성이 달라 극장마다 다른 장르의 영화가 상영됐다. 영화뿐 아니라 공연, 연극, 웅변대회 등 지역행사와 다양한 공연이 열려 복합문화공간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정운학은 자신과 같은 이북 출신 이주민들을 극장에 취직시키거나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고, 극장 폐관 이후에도 사무실은 이북5도민회에게 내주는 등 이주민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지역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극장 내부의 이북5도민회 사무실 2005년 원주시에 멀티플렉스가 개관하면서 2006년 4개의 단관 극장이 일제히 문을 닫았다. 아카데미극장도 철거 위기에 놓였지만 지역사회 시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극장을 지키기 위한 운동에 나섰다. 2016년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아카데미극장 보존방안’ 시민 포럼을 시작으로 상영회, 다큐멘터리 제작, 포럼, 타 지역 재생 사례 연구 등이 이어졌다. 2021년 2월 철거 위기에 맞서기 위해 ‘원주 아카데미극장 보존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1인당 100만원씩 기부하는 시민운동 ‘100인 100석 프로젝트’를 통해 3주 만에 1억 원의 모금을 달성하기도 했다. 전국 54개 영화문화단체 및 원주시 주민자치협의체 등에서 지지성명이 이어졌다. 이러한 활동과 노력에 2021년 5월 원주시는 사유재산인 아카데미극장을 매입하여 시민 커뮤니티 공간으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문화유산 국민신탁과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꼭 지켜야 할 문화유산으로 아카데미극장을 선정하며 ‘문화재청장상’을 전달했다. 전임 시장 때 극장 건물과 토지 매입에 32억 원을 집행하고 리모델링을 앞두고 있었으나 글을 쓰는 현재 민선 8기 원주시장직 인수위원회가 들어서면서 아카데미극장 복원사업 중단을 권고한 상황이다. 단관극장의 원형을 가장 오랫동안 보존하고 있는 극장 아카데미극장은 강원도 원주시 중앙동에 자리 잡고 있다. 중앙동은 우산동, 태장동 등 주변 일대와 함께 원도심 권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원도심 일대에는 상지대학교,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한국폴리텍대학 등 3개 대학교가 있으며, 원주종합운동장 등 체육시설과 원주시민문화센터, 원주역사박물관 등 주요 문화시설이 자리한 곳이다. 원주는 혁신도시와 기업도시 설치, 규제 자유 특구 지정 등 도시의 변화로 인구 유입이 증가하고 있지만, 원도심의 경우 핵심 인프라의 이전과 도심 외곽의 팽창으로 40대 미만의 인구 비율이 적고 60대, 50대, 70대 순으로 전체적으로 고령화되어 있다. 아카데미극장은 단관 극장의 원형을 가장 오랫동안 보존하고 있는 극장으로 외관을 온전히 유지한 채 보존된 근대극장으로서 희소가치가 높다. 극장이 소유주의 살림집과 연결된 독특한 구조로 인해 산업화 시기의 건축적 특징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전쟁의 폐허를 극복한 전쟁 복구기의 사회·경제 성장의 역사를 도시의 중심에서 증거하는 중요한 근대 건축 자산이기도 하다. 상영관 내부 전경 "아카데미극장은 단관극장의 원형을 가장 오랫동안 보존하고 있는 극장 중 하나다" 더불어 아카데미극장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원주 시민의 영상문화 수요를 충족해 주고 만남과 소통의 공간으로 복합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현재 상업극장으로서 활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지역사회 도시재생의 중심적 입지에 위치해 있다. 이에 아카데미극장을 기억하는 원주 시민들이 참여해 기억을 공유하고 문화를 나누며 기성세대의 기억과 경험을 후속세대와 함께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기획되고 있다. 원도심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아카데미극장은 원도심의 상권, 문화예술, 복지 인프라 등의 자원과 결합이 쉽고 중앙동의 도시재생사업 등 기존 사업과의 연계 가능성이 큰 공간이기도 하다. 아카데미극장 매입 및 활용계획을 수립할 당시 원주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이에 따르면 ‘아카데미극장을 원주시가 매입해 보전’하는 문제에 관해 응답자 중 435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보였고, 시민 문화 향유 및 추억 공간과 근현대 건축유산의 가치 보전을 그 이유로 꼽았다. 아카데미극장에 보존되어 있는 입장권 수입 장부 공간개요 ■위치: 강원도 원주시 평원로 20 ■설립일: 1963.09.23(개관일) ■규모: 1,237m²(374.4평) ■건물구조 1층 - 상영관(1관, 662석), 매표소, 매점(2006년 폐관 이후 이북5도민회 사무실로 사용됨), 사무실, 정원 2층 - 살림집(거실, 부엌, 화장실, 방 3개로 구성), 영사실, 창고 인터뷰: 변해원 센터장(원주영상미디어센터, 원주아카데미극장보존추진위원회) 변해원 센터장 김수영 _과거 원주에는 다섯 개의 단관극장이 있었습니다. 이후 원주 아카데미극장만 남기까지 간략하게 역사를 설명해주세요. 변해원 _(한국)전쟁 기간 원주는 폭격으로 초토화가 됐어요. 남아있는 건물이 거의 없던 상태고, 1군 지사(지원사령부)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민군이 같이 도시를 재건하는 형태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정치, 사회가 좀 안정되면서 산업도 발전하게 되고 그런 연장선으로 극장들이 하나둘 생기게 됐고요. 원주극장, 시공관, 아카데미극장, 문화극장이 순서대로 만들어졌고 전국 유일한 상설극장인 군인극장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총 다섯 개의 단관극장이 있었고 1990년대 전후가 되면서 멀티플렉스들이 만들어지면서 하나둘 극장이 팔리기도 하고 철거도 되면서 2016년에는 아카데미극장만 남게 된 거죠. 김수영 _아카데미극장의 공간은 현재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변해원 _1층, 2층 전형적인 단관 극장 형태로 662석이 갖춰져 있고요. 극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소유주가 살았던 가정집이 있습니다. 소유주가 영사기사 출신이어서 가정집에서 영사실로 바로 갈 수 있는 구조로 디자인을 했습니다. 극장 왼편 발코니 공간에는 예전에 공연할 때 사용한 흔적이 있는데요. 배우 대기실이 무대와 연결되어 있어요. 지금은 창고로 쓰는 공간에 80년대 영화 포스터들이나 극장에 띠지 같은 것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극장 공간에 있었던 전 소유주 정운학 님의 사택 공간 내부 김수영 _이곳이 한국전쟁 후에는 이북5도민의 연락사무소로도 활용되었다고요. 변해원 _원주에는 생각 외로 이북5도민분들이 많으세요. 극장 소유주인 정운학 옹이 황해도 해주 출신입니다. 전쟁 전에는 해주에서 영사기사를 하시다가 전쟁 후에 넘어오셨고, 극장을 유지하시다 보니 재력도 좀 풍부했고 이북5도민의 초대 회장도 맡으셨어요. 그분들끼리의 단합된 활동도 하고 북한에 대한 소식들도 같이 공유하고 연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경제적 공동체로 만들어가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극장에 이북 분들이 취업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김수영 _아카데미극장은 극장을 넘어 지역의 커뮤니티센터처럼 느껴지는데요. 원주 지역에서 이곳은 어떤 역할을 해왔나요. 변해원 _이곳에서 새마을대회도 열리고 신용협동조합의 총회도 열리고, 대부분의 초중고등학교의 졸업식이 여기서 많이 열렸어요. 그래서 영화를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지역에서 시민들이 모이고 또 원주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커뮤니티 공간으로 작용해왔던 거죠. 그런데 그 역할들이 계속 분화되면서 영화관으로만 남게 되었고,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폐관까지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극장성이라는 게 무대와 영화만을 뜻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지역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문화를 접하는 공간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게 지금의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수영 _극장이 다시 열린 데에는 시민들의 애정과 적극적인 응원이 크게 작용했는데요. 그에 걸맞게 보존추진위원회에서도 '시민 한마디'나 '영사기 조립반' 등 다양한 교육과 전시행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새롭게 발견하게 된 점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변해원 _단순하게는 아카데미 정원 만들기를 통해 정원을 정리해 보니까 극장 안에 연못이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뭔가를 아카이브 해 가다 보면 새로운 모습들을 모르던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것이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라 시민들과 같이 발견하고 만들어간다는 데 제일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원주시에서 매입했기 때문에 극장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재생이라든지 지역의 콘텐츠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 수준이 굉장히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지역의 콘텐츠와 이런 자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해 가야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같이 해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주 아카데미 극장 내부의 정원 김수영 _극장 보존과 관련된 이슈들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설명해주세요. 변해원 _저희가 보존 활동을 할 때는 극장주였던 정운학 옹 일가가 극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2년 뒤 사적 거래로 다른 분께 극장이 넘어가게 되죠. 새로운 소유주와도 만나서 재정사업에 관해 논의하고 관계를 이어왔었습니다. 철거 위기가 있었지만 시민들이 상징적인 모금 운동을 해보자고 나서주셨고, 한 사람, 한 단체에서 1백만원씩 기부를 해서 1억원을 모아보자고 했던 게 3주 만에 달성되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영화문화단체 42개에서도 지지 성명에 동참해 주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작년(2021년) 5월에 원주시가 매입을 하겠다는 발표가 있었고 올해(2022년) 1월에 행정적으로 매입이 완료된 거죠. 그러면서 안전진단도 거치고 활용 방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구상이 나왔는데 민선 8기 원주시장직 인수위원회가 들어서면서 입장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보전 문제를 재논의하자는 말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상영관 입구와 극장 로비 김수영 _현재 보존추준위원회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변해원 _보존추진위원회는 보존에 대한 문제들이 완전히 해결되면 해산됩니다. 원래 시와 시민들로 구성된 민관협의체를 만들려고 했었어요. 그래서 민관협의체에서 아카데미극장의 재생 방향을 같이 정해가는 게 애초의 계획이었고 지금도 계획 중인 부분입니다. 극장 자체의 가치도 있지만 시민들이 힘을 모아서 보존했다는 것도 아카데미극장의 굉장히 중요한 가치인 것 같아요. 그렇게 극장이 보존 재생되고 난 이후 어떻게 시민들이 그 구조에 접근하고 사업의 의견을 낼 수 있는가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걸 구조적으로 만들고 싶은 거죠. 그래서 원주시와 저희가 민간협의체를 구성해서 재생의 방향을 정하자고 기본구상을 해왔던 거고요. 내년이라도 민관협의체를 만들어내는 게 목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수영 _마지막으로 원주 아카데미극장을 향한 관심과 당부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변해원 _원주 아카데미극장이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으로도 활발하게 소식을 전하고 있으니 SNS 계정을 팔로우해주셨으면 좋겠고요. 그래서 계속 소식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원주 사람들은 아카데미극장이 원주만의 것처럼 느껴져서 그 가치에 관해 가끔 잊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오히려 외부에서 찾아 주고 언급해 주는 데에서도 힘을 얻고 있습니다. 원주 안팎의 관객들이 ‘이 극장이 이만큼 괜찮은 곳이구나’ 느끼고 공유할 수 있는 교류와 연대를 많이 해갔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신동화 시민활동가(<아카데미극장> 인터뷰집 제작) 신동화 활동가 김수영 _원주 아카데미극장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신동화 _아카데미극장은 원주 사는 분이라면 대부분 다 아실 거예요. 여기 원도심의 제일 중앙을 거쳐 가는 버스 정류소가 바로 앞에 있어서 오며 가며 ‘저 낡은 건물은 뭘까’ ‘극장이라고 하는데 멋있네, 한번 안에 들어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계속해 왔어요. 지역에서 책방을 운영하다 보니까 지역의 문화 자산에 관심을 좀 더 가지게 된 것도 있어요. 그렇게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안녕, 아카데미’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됐어요. 그 행사를 통해서 처음 아카데미극장에 들어와 봤거든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지더라고요. 1960년대에 개관을 했으니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갔고, 여기서 웃기도 했었고 울기도 했었고, 그런 묘한 기운들이 이 공간에서 느껴졌고 되게 좋았어요. 그때 이 극장이 진짜 사라지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멀리서 본 아카데미극장 건물 전경 김수영 _'안녕, 아카데미'라는 프로그램을 소개해주세요. 신동화 _‘안녕, 아카데미’는 2020년에 있었던 극장 재생 시범 사업이에요. 극장이 2006년도 이후 계속 문이 닫혀 있던 상황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안에 엄청난 먼지도 쌓였을 텐데 시민들이 그걸 일일이 닦고, 다시 극장을 오픈하기 위해 시민들이 처음부터 투입됐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그림책 워크숍도 하고 저 같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북토크도 하고 연극도 하고 앨범도 녹음했다고 하더라고요. 극장이 열리는 날 오프닝 쇼로 ‘아폴로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미디어 파사드 행사가 있었어요. 원주에서 활동하시는 미디어 아트 창작자들과 일렉트로닉 음악 하시는 분이 협업해서 극장 외관에 프로젝트 매핑 작업을 한 거였는데 무척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라이브 드로잉도 한 적 있거든요. 다양한 콘텐츠를 극장이라는 공간에 녹여냈던 기억이 많이 나요. 이걸 계기로 원주 시민들이 낡고 허름한 원도심의 어떤 건물이 아니라 이 안에서 어떤 가능성을 볼 수 있겠구나 느끼게 했던 사업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생각에 동의해서 활동을 시작하게 됐고요. 극장 입구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 백 투더 퓨처 > 간판 김수영 _오오극장 주변은 동성로 번화가에 비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역사가 유구한 곳입니다. 신동화 _저는 원주의 토박이는 아니에요. 원주에 9년을 살면서 원주가 어떤 상징성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게 뭘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문화예술 관련 일을 하다 보니 어떤 활동 거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러던 중에 ‘안녕, 아카데미’를 접하게 된 거죠. 이런 것들이 일반 시민들에게는 원주가 이런 비전을 꿈꿀 수 있다든지 낡은 공간들을 활용해서 과거와 현재 가치의 접점을 만들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공간이 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되어주는 것 같아요. 김수영 _시민 모금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신동화 _우선 ‘100인 100석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100만원을 기부하면 극장 의자 뒤에 이름을 새겨주는 프로젝트였어요. 그 다음에 더 많은 시민을 대상으로 ‘아카데미 3650’ 모금 프로젝트가 시작됐어요. 3650명이 적은 금액으로도 모금할 수 있도록 한 프로젝트인데요. 여기에 참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누구나 찾아갈 수 있는데 이렇게 경제적인 지원을 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라고요. 3650명이 다 모이기도 전에 목표로 한 금액이 다 차서 마감되었어요. 한두 명의 사람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인 또 시간적인 에너지를 더해서 참여했다는 것 자체가 극장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를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상영관 출구 쪽. 오른쪽 벽에 "아카데미극장 보존활동 시민 연대기" 설명판이 있다 김수영 _어떤 마음으로 시민 활동을 계속하고 계신가요. 신동화 _저는 시장 옆에서 자랐어요. 서울에서 자라긴 했는데 굉장히 낡은 동네였어요. 그때 그 동네의 감수성이 저한테 남아있는 것 같아요. 오래된 건물들이 제게는 익숙해요. 오래된 것들이 그냥 사라져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이 공간을 주차장 정도로밖에 안 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 담긴 가치를 보는 눈을 저는 더 많은 사람들이 가졌으면 좋겠어요. 저는 제 아이가 그런 가치를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이 보존운동을 나름대로 열렬히 지지하고 응원하는 까닭은 제 아이까지 이 극장을 향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극장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아카데미극장이 사라지지 않도록 시민의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계속 지지하고 싶어요. 필자: 김수영(씨네21) 사진촬영: 손홍주(씨네21) 인터뷰 일자: 2022년 10월 17일
<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2019)은 이젠 거의 멸종위기라고 전해지는 ‘시네필’의 영화다. 시네필은 영화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순간, 장소, 인물, 움직임, 빛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에 빠질 만한 영화적 이미지와 조우하면 흘러가는 그것을 소유하고자 절박한 몸짓으로 반복적으로 관람하는 물신주의자다. 실제로 영화를 재생해볼 뿐만 아니라 기억에 각인된 강렬한 이미지를 꺼내 가상적으로 돌려보기도 한다. 시네필의 반복강박을 야기하는 영화적 이미지들은 파편적이고 비인과적이며 그래서 자주 서사와는 상관없이 떠오른다. 영화학자 로라 멀비는 그의 저서 『1초에/24번의 죽음』에서 이러한 시네필을 ‘소유적 관객(possessive spectator)’이라 칭한다. 필름 시대를 지나 디지털 환경에서도 시네필은 돌려보고, 뜯어보고, 반복해 보는 매체의 특징을 맘껏 누리며 “텍스트 본래의 응집력을 공격하면서 예상치 못한 감정으로 열리는 즐거운 회상을”(35) 가져오고 그 과정에서 사색의 여지를 마련한다. <남매의 여름밤> 역시 인과적이고 극적인 서사보다는 여름밤의 빛과 공기, 냄새와 소리를 감각하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아빠(양흥주)는 살던 집을 빼고 옥주(최정운), 동주(박승준) 남매와 함께 할아버지의 오래된 이층 양옥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곧이어 부부 갈등 때문에 집을 나온 고모가 이들에 합류한다. 옥주와 동주, 아빠와 고모,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는 그렇게 여름 한 계절을 함께 보내게 된다. <남매의 여름밤>은 캐릭터에 대한 서사적 정보를 거의 주지 않는다. 아빠와 고모가 겪고 있는 경제적 곤란과 부부 갈등이 무엇인지, 왜 옥주는 엄마를 미워하는지, 할아버지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옥주는 남자친구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의 사연은 극도로 절제된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공감각적이고 중첩적인 감각과 단편적 기억의 환기를 통한 다중적 시간성이다. 관객들은 여러 겹으로 이뤄진 감각과 시간의 미장아빔(mise en abym)에 포획된다. 그러면서 감각과 시간은 공간화 되고 관객은 남매와 함께 ‘영화-집’에 머물게 된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빛은 소리가 되고, 소리는 빛이 된다. 한낮의 뜨거운 빛은 끈적이는 장판에서 맨발이 떨어지는 소리가 되고,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는 밤공기는 오래된 이층 양옥집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냄새가 되며, 환하게 열어젖힌 창으로 흘러나오는 저녁밥 냄새는 안팎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와 섞이고, 마당의 풀벌레 소리는 어두운 밤 잠 못 드는 할아버지가 켜놓은 낡은 전축 스위치의 초록색 전구불빛이 되고,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옛날 노래 소리는 할아버지의 삶과 그 삶이 가꾸고 거주해온 집이 된다. 그리고 커다란 마루 창문 덕택에 안이 훤히 다 보이는 집, 시시각각 다르게 빛이 들어오며 변신하는 집은 그 자체로 네모난 프레임의 영화가 된다. 그 ‘영화-집’에서 옥주와 동주 남매가 보낸 여름방학은 아빠와 고모의 지난 추억과 중첩되고, 그 시간이 옥주와 동주 남매가 성장해서 기억하게 될 특별한 순간이 될 것이라는 암시로 이어진다. 심지어 아빠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장난(방학인데도 학교 갈 시간이라고 깨우기)을 동주에게 반복하고,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모실 요양원을 알아보고 오는 길에 옥주 남매가 자신이 병이 들면 동일하게 처리할까봐 걱정한다. 엄마가 보고 싶어 꾸었다던 고모의 꿈은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만난 옥주의 꿈으로 반복되며 옥주의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연극처럼 상연된다. 시간의 반복 속에서 차이를 각인하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처럼 <남매의 여름밤>은 삶의 시간을 담담히 관조한다. 하지만 시간의 반복을 통달하고 희미한 회한만 남은 노년의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즈의 영화와 달리, <남매의 여름밤>에는 그 시간의 초입에서 허우적대는 생경함과 혼란스러움이 공존한다. 그 시간을 경험하고 바라보는 주체가 사춘기 소녀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흔한 짝패인 장난기 많고 철없는 어린 남자 아이가 아닌, 사춘기 소녀의 시선으로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보게 한다. 이제 막 인생을 진지하게 성찰하기 시작한 옥주와 인생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들어선 할아버지는 삶의 주기에서 가장 사색적인 시기를 살고 있는 이들이다. 옥주는 자신의 정체성뿐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시공간에 대해 고민한다. 독립적이고 자존심이 센 옥주는 자기 영역이 중요하다. 그래서 모기장으로 자기 영역을 확실히 주장하는 만큼, 할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을 허락받았는지 아빠한테 반복해 확인하고 할아버지의 집을 아빠와 고모가 자신들의 편의대로 처리해버리려는 것에 반발한다. 옥주는 할아버지에게 호기심이 있고 도움을 주고 싶지만 독립된 개체로서의 그의 삶에 무례하게 침입하기를 원치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옥주 자신에게도 그렇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옥주는 할아버지의 시간이 깃들여 있는 공간을 존중하고 그의 존엄을 지켜주고 싶다. 그 집을 포함해 맨들맨들해진 재봉틀, 오래된 사진첩과 담금주, 사용하기 편하게 나무에 묶어둔 정원용 가위와 물뿌리개, 방울토마토와 포도나무, 낡은 액자와 전축은 그와 함께 나이 들어 온 것이다. 아빠와 고모는 나이가 많고 병든 할아버지의 시간을 앞서 계산한다. 할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계산하는 순간, 그의 현재는 덤이 된다. 하지만 옥주는 다르다. 현재 자기의 시간과 공간이 소중하듯이, 할아버지도 그렇다. 할아버지가 어색하고 낯설지만 잘 해드리고 싶은 옥주는 가족 중 유일하게 생일선물을 준비한다. 옥주는 할아버지가 생일선물인 모자를 쓸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옥주의 태도는 할아버지가 한밤중에 나와 홀로 낡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미련>을 듣고 있는 장면에서 특별한 순간을 만든다. 노래 소리를 듣고 이층에서 내려온 옥주는 거의 말이 없고 가족에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할아버지가 순수한 즐거움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여행을 하며 노래를 감상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러나 옥주는 더 다가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을 이층 계단으로 올라와 앉는다. 옥주는 그 노래를 함께 듣지만 그의 시간과 공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삶에 대한 존중이다. 할아버지가 소파에서 맥주 한 병을 탁자에 놓고 음악을 즐기는 방식은 그야말로 시네필적인 태도다. 앞뒤의 시간(서사적 맥락)을 계산하지 않고 그 순간을 즐기고 몰입하기, 타자가 들어올 여지를 주면서도 자기만의 이미지를 소유하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 없는 시간을 만들기. 그것들은 설명이 필요 없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재생해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내게 <미련>의 노래 소리는 전축에 켜진 작은 초록색 전구불빛과 전기 연장선 스위치의 주홍색 불빛으로 각인되어 있다. 나도 그 장면을 보지만, 그 불빛들도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여름밤의 공기를 전한다. 옥주가 자기 공간을 고집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고모와 동주에게 공유했던 것처럼 그리고 할아버지의 노래를 같이 들으면서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던 것처럼, <남매의 여름밤>은 여름의 개방성과 투명성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소유적이면서도 공유적인 체험을 사색하게 한다. 낯선 거리를 두고 타인을 존중하면서도 그의 내밀하고 사적인 시공간을 경험하게 해주는 영화 그리고 영화관이 새삼 그리워진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개항장에 극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이후, 이에 영향 받은 조선인들도 극장을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은 황제가 사는 공간이라는 상징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 보니 한성의 극장 역시 황실 의례와 관련해 시작되었다. 조선인이 한성에 설립한 최초의 상설극장은 대한제국 황실에서 1902년 세운 희대(戲臺)이다. 희대는 고종황제의 망육순(望六旬) [필자 주: 육순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51세를 가리킴.] 과 어극(御極) 40년을 기념하는 칭경예식(稱慶禮式)을 위해 봉상시(奉常寺) 내에 500석 정도의 규모로 설치되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반영하는 원형의 2층 건물로 계단 형태의 객석과 직사각형 모양의 무대를 갖추고 있었다. 황실희대는 통칭 ‘협률사(協律社)’ 혹은 ‘원각사(圓覺社)’라고 불렸다. 이는 희대를 빌려 연희를 공연하던 회사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칭경예식의 날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1902년 9월 토사병이 유행한다. 칭경예식은 다음 해 4월로 연기되었으나, 다음해 4월에도 영친왕의 천연두 발병 등을 이유로 또 다시 연기된다. 이후 칭경예식은 유야무야 되거나 약식으로 치러진 것으로 보인다. 칭경예식을 위해 많은 예인들이 한성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칭경예식에 소용하는 예인들을 관리하던 삼패도감(三牌都監)의 장봉환(張鳳煥)과 모종의 세력이 합세하여 연희 회사를 세우고 이름을 협률사라 불렀다. 협률사는 칭경예식에 참여하기 위해 한성에 올라온 남녀 예인들의 공연을 희대에 올렸으며 잠시 활동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활발히 전개되던 협률사의 희대 공연은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1904년 3월경 폐지되었다. 이처럼 협률사는 황실 극장인 희대가 만들어지고, 칭경예식을 위해 전국에서 올라온 예인들을 이용하여 돈을 벌어보고자 했던 일군의 사람들이 예인을 관리하던 삼패도감의 장봉환과 함께 수익 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협률사의 등장과 더불어 비슷한 전문 연예단체들이 생겨나면서, 이들 단체에서 극장을 대여하여 흥행을 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동대문활동사진소를 빌려 사용한 광무대의 박승필을 비롯하여, 박춘재, 김재종 등 유명 연예패들과 임성구, 이기세, 윤백남 등 신파극단을 이끌던 인물들이 극단과 더불어 연흥사, 원각사, 개성좌(開城座) 등의 극장을 함께 운영했다. 러일전쟁 이후, 극장을 이용하여 수익도 얻고 선전장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협률사가 복설(復設)된다. 다방면의 노력 끝에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 2월 하순에 복설된 협률사는 김용제(金鎔濟), 최상돈(崔相敦), 고희준(高羲駿)이 조직한 순 사영(私營)의 연예회사였다. 당시 협률사의 운영비는 친일조직인 ‘일진회’(一進會)가 댔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려는 세력이 후원했다. 협률사의 복설은, 러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한 일본이 조선인의 관심을 흥행물에 돌리기 위해 강구한 조치였다. 따라서 협률사를 혁파해야 한다는 의견이 속출했다. 봉상사(奉常司) 부제조 이필화(李苾和)의 상소로 결국 고종은 1906년 4월 협률사를 혁파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일본인 임차인이 오히려 위약금 25만원을 청구하면서 협률사 혁파는 흐지부지된다. 1907년 2월,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에서 협률사가 운영하던 희대를 사용하여 각종 연희를 올리고 활동사진을 상영한다. 이어 1908년 7월 26일, 이완용(李完用)의 비서로 일제의 조선침략에 동참하고 있던 이인직(李人稙)과 박정동(朴晶東) 등이 경시청으로부터 희대를 연극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고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연희를 시작했다. 원각사에는 김창환(金昌煥)을 위시한 창부(唱夫) 40명과 가기(歌妓) 24명, 총 64명의 예인(藝人)들이 있었다. 1911년 10월, 한시적으로 《조선신문》 언문판이 발간된 적이 있었다. 그 기념호에 실린 「연극의 월조(月朝)」라는 글에는 경성고등연예관에서 상영한 <엄비국장(嚴妃國葬)> [필자 주: ‘엄비(嚴妃)’로 알려진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장례를 찍은 실사를 일컬음.] 과 원각사에서 개연한 ‘금강산 환등 대회’가 소개되어 있다. △ 일젼에 엄비국장이라ᄂᆞᆫ 활동광고를 돌이기에 본긔자가 일ᄎᆞ 구경 즉 쳐량 감상도 나고 조션 고속된 졀ᄎᆞ도 젼 야 구경치 못 ᄉᆞᄅᆞᆷ의 안목에 가히 흥감ᄒᆞᆯ 만 즉 연극 즁 활동ᄉᆞ진은 더욱 진젹 거동을 구경ᄒᆞᆯ 만 다고 탄식 얏더니 ... △ 원각 에셔 금강산환등을 갈 가 단 다 기에 슈삼 지긔를 잇글고 완상 즉 금강산 일만이쳔봉이 완연이 안즁에 나렬 지라 ( 중략 ) 일 사십여쳐를 완상 니 △ 본 긔 가 의 금강을 구경 지 우금 삼십이년이라 영숙 산쳔과 긔이 고적이 반가온 마음이 졀로 나고 조션에도 여차 셰게에 랑 만 명산 쳔이 잇슴을 감탄 엿슴으로 연극장 쥬무 를 방문 야 그 환등의 력사를 무르니 리희직 ( 李熙直 ) 김진우 ( 金振宇 ) 량씨 본래 지사인 사진사 신장균 ( 申章均 ) 씨와 동행 야 금년 오월에 금강산 탐험 로 쳔신만고를 불구 고 외산 명승고젹을 촬영 야 환등에 삽입 야 구경치 못 동포의 안공에 구경케 니 삼군의 지긔도 흠탄 거니와 구경 시 동포도 응당 감상이 게시 고 신션 졍신도 환셩 지로다 1 위 기사에서 기자는 <엄비국장>에 대해 ‘진적한 거동을 구경할 만하다’고 언급하는 데 그친 반면, 140여장의 금강산 사진에 대해서는 극장 주무자(主務者)를 만나 환등을 제작, 상연한 내역까지 물어 듣고 감탄 어린 소감을 늘어놓는다. 이는 <엄비국장> 상영보다도 ‘금강산 환등 대회’가 조선의 관객들에게 더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켰음을 의미한다. 실제로도 ‘금강산 환등’은 조선인 관객들의 환영을 받아 원각사에서 장안사로 옮겨 흥행을 이어 갔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관객들은 왜 활동사진보다 환등에 더 흥미를 느꼈을까? 당시 활동사진 설명은 전설(前說)뿐이었다. 다시 말해, 간단한 설명 후에 10분 내외의 활동사진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필름은 대부분 쇼트 몇 개를 일정한 속도로 배열한 것이었고, 그 속도에 맞춰 변사가 설명하는 중설(中說)은 당시로써 구사하기 힘들었다. 반면 환등은 하나의 사진을 변사(설명자)가 자세히 풀어줄 수 있었다. 요컨대 관객들은 활동사진보다 환등의 사진을 보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활동사진을 상영할 때나 환등을 비출 때나 다 변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이 탄생하고 나서야 조선에 변사가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경성고등연예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변사의 연행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황실희대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하는데,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이 변사들에게 활동사진 연설의 방침을 전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이다. 사진 2. 변사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애국부인회 활동사진 기사(《황성신문》 1908년 6월 24일자.) 위 사진의 기사는 경성고등연예관에서부터 변사 연행이 본격화되었다는 일반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조희문 역시 경성고등연예관 설립 이전에도 직업적 변사는 아닐지언정 일시적으로 활동사진 설명에 나선 인물이 있었으며, 단성사, 연흥사, 장안사 등 조선인이 세운 극장이 탄생하던 1907~8년 무렵에는 이미 조선인 변사도 나름의 위치를 차지했음을 여러 명의 변사가 실증한다고 주장한다. 2 나아가 위 기사는 변사의 시조로 불리는 우정식(禹正植)이 원각사에서부터 변사 활동을 시작했다는 심훈(沈熏)의 증언도 뒷받침 해준다. 기사에 언급된 관인구락부는, 상술한바 원각사의 전신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변사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극장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된 것을 계기로 등장했으며, 관인구락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서양 혹은 일본의 선진 문물을 조선의 관객들에게 소개해 주는 강사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문물을 경험해 본 관리 중에 선택된 인물들이 주로 변사로 활동했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기사에 언급된 인물 중 정운복(鄭雲復)은 오사카상업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영국유학과 구미 각국 시찰을 경험했던 인물로, 일제의 조선침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언론 계통의 인물이었다. 김상연(金祥演)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에서 활동한 바 있는 언론 계통의 친일 관료였다. 한석진(韓錫振) 역시 《황성신문》과 그 후신인 《한성신문》에 관여했다. 이처럼 최초의 변사들이라 할 만한 인물들은 서구문물을 경험한 이들로서, 신문물을 조선에 소개하고 근대화를 주장하는 웅변가의 역할을 수행했다 할 수 있다. 1910년을 전후하여 유광관(有光館)이라는 활동사진과 연극장으로 사용되던 원각사는 아쉽게도 얼마가지 못해 영업을 중지했으며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1) 「연극의 월조」 《조선신문》 1911년 10월 1일자. 2) 조희문, 『한국영화의 쟁점 1』, 집문당, 2002, 130쪽 참고. * 본문은 필자의 『조선영화의 탄생』((주)박이정, 2018) 40~42, 209~211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사진 1(글 상단). 황실희대(원각사)의 외관 [자료] "논설: 술객문", 《황성신문》 1903.01.17. ◎歲月 이 荏苒 야 於焉之間 에 陰曆年終 이 又迫 니 歲暮天寒 에 北風其凉 고 梅花淡屋 에 雪月 이 滿庭 이라 有鄕居一客 이 孤枕冷燈 에 耿耿無寐 야 起拂布袍 고 徘徊月庭 이라가 負手緩步 야 行訪一名士之家 러니 適値諸名士 ㅣ 與京鄕友朋 으로 爛漫會飮 이라 客 이 亦參座末 이러니 數盃酒闌 에 滿座酒人 이 詼諧談笑 로 各自論懷 더니 一人曰 吾輩 從今以後 로 無用於世 로다 何事 를 爲業 지 欲看書而懶厭 고 欲聚財而無資 니 除非親舊之尋訪 이면 終日老屋 에 無聊消遣 니 沁沁難耐 일셰 子 有何消日 고 一人曰 吾亦 云云 일셰 近日 某友家 에셔 西廂記 를 借來 얏더니 此亦語錄 을 難解 야 滋味 가 殊沒 일네 一人曰 我 某友某友 로 一分 기쑤시기로 漿羹飯 을 每夜 喫之 지 然 이나 細雨 도 濕衣 라고 그럭저럭 十餘元 을 見失 네 一人曰 吾儕 가 今夕 에 花鬪 나 이볼가 一人曰 且置 고 協律社 귀경이나 가셰 壯觀 일네 眞壯觀 일네 春香 이와 御史出道壯觀 일네 一人 이 顧謂鄕客曰 彼公 은 무엇 려 京來 나 朝飯夕粥 喂牛突 에 進士主 가 上福 이지 一齋郞 一主事 나 宕巾味 를 甞 랴고 旅舘客苦 何如 고 無錢 면 쓸 업 鄕客曰 아모리 無錢 야도 令監 이나 進賜 셔 數生日 만 苦待 오 說麼執事 네가 數生 야 大臣協辦 地境 에 此漢區處 아니 가 一人曰 數 무슨 數 인가 世上貌樣觀之 니 어늬 時節數生 길지 鄕客曰 齋郞借啣 은 何事故 로 아니터지 고 沓沓 여 發狂 이오 一人曰 必也 터지지 면셔 終宵諧謔 다가 聞鷄罷歸 야 爲余道其問答之說 일 余 ㅣ 曰 悲夫 라 彼好地閥 好家數之諸人 이 若在舊日則 淸班華秩 과 監留宰相 이 卽其倘來之職而不幸當此時節 × 야 官雖淸要 나 無一權利 고 如彼冷寞 이 極甚可咄 니 雖一藝一業 과 一文一字 라도 務欲勤苦做工 야 進就學識 然後 可不受他日之欺侮 어 不此之爲 고 閒游懶怠 야 只以骨牌 花套 西廂記 演戲場之類 로 以爲沁沁破寂之資 니 非但此等名士也 라 我韓全國 에 從前 兩班儒士爲名之人 은 擧皆如彼 고 鄕客 은 尙此以依賴求乞於宰相之門 으로 錮筋着髓 야 牢不可破 니 如此細瑣 가 雖若無關係於國勢 나 國勢之萎靡衰頹 에 日漸濱危 며 日漸墜險 은 實因此而然也 니 豈可謂之以細故而不深憂也哉 아 嗟乎咄哉 로다 [자료] "논설: 원각사 관광의 향객정담", 《황성신문》, 1908.10.13. ◎有兩個鄕客 이 來遊京師 라가 一夕 은 月色 이 如晝 야 九街 가 如洗 라 携手同伴 야 料理店 의 盃酒 를 沽飮 고 因 야 圓覺社 의 演劇 을 觀光 고 拾二點鍾 에 歸來旅舘 야 該社情况 을 互相評論 이 如左 더라 甲曰余 가 在鄕 야 新聞 을 閱覽 니 大韓新聞社長李人稙氏 가 我國 의 演劇 이 淫靡不雅 것을 改良 기 爲 야 圓覺社 를 設立 고 人情風化 에 有助 歌舞 로 倡夫 와 妓女 를 敎導 다 얏스니 氏 社會上開明紳士 로 拾餘年海外文明國 에 滯在 야 文明空氣 를 吸収 며 文明學術 을 鍊習 얏고 其歸國也 에 新聞 의 機關 을 掌握 며 小說 의 著術 을 發行 얏스니 國民 을 開導 고 風俗 을 改良 事業 에 對 야 宜乎好個方針 을 研究發明 지라 於是乎演劇 을 改良 主義 로 圓覺社 를 設立 이니 吾儕 가 思惟 기를 該社演劇 에 乙支文德姜邯贊 의 英雄事業 이나 論介桂日香 의 貞烈芳跡等 으로 新演劇 을 發明 야 國民 의 思想 을 鼓發 이 有 리라 얏더니 今 에 該社情况 을 目覩 則猶是舊日風流 에 沈靑歌 、 春香歌等而已 니 何者 로 演劇改良 이라 謂 지 此 로 開明紳士 의 事業 이라 謂 난지 知得 키 難 事 로다 乙曰李人稙氏 의 事業 은 姑舍 고 該社 에 對 야 同情贊成 者 가 誰也 오 면 皆我國上流社會 에 高等官人 이오 昨日今日 에 聯翩觀覽者 誰也 오 면 現政界 에 某某大官 이라 其政治改良 도 圓覺社 의 演劇改良 과 如 지 不知 거니와 目今我韓 에 國步 의 艱棘 과 民生 의 塗炭 이 何如 境遇 에 在 가 若個有志者流 가 國家思想 과 國民義務 로 敎育 을 倡導 다 實業 을 奬勵 다 야 家產 을 傾 고 心力 을 竭 야도 目下經濟 의 困難 으로 一個事業 도 略無起色 니 其舌 이 獘 고 其淚 가 枯 야 晝夜憂嘆 情况 을 凡有人心者 ㅣ 孰小矜惻 이며 加之地方騷擾 가 經年不息 야 一般同胞 의 死亡 이 不絕 고 流離 가 相續 情况 은 骨爲之冷 이오 鼻爲之酸 이거 當局諸公 은 此 를 不聞不知 지 惟是演劇塲 을 愛好 고 顧存 야 無日不額額 니 諸公 의 意向 은 維新 의 功業 을 已建 고 太平 의 福樂 이 無窮 줄노 認 홈인지 果然諸公 으로 여곰 內閣 을 愛 홈이 圓覺社 를 愛 홈과 如 면 演劇改良 보다 政治改良 의 實效 가 有 지어 胡爲乎內閣 을 愛 홈이 圓覺社 愛 만 不如 지 此 도 知得 키 難 事 라 고 長吁浩歎 타가 一大白 을 滿引 고 頹然而臥 야 東方 의 旣白 을 不知 얏다 云 有人 이 其談話顚末 을 報道 其言 이 雖涉於愚戇 이나 其意 가 實出於憂憤故 로 爲之記載如右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