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역습
- 감독
- 어빈 캐슈너
- 제작년도
- 1980
- 출연
- 해리슨 포드, 마크 해밀, 캐리 피셔, 프랑크 오즈, 알렉 기네스, 제임스 얼 존스, 빌리 디 윌리암스
사진: 필자 제공 회생(回生) < 회생 >(2026)은 제목 그대로 회생(回生)에 관한 영화다. 거의 죽어가다가 다시 살아가고자 하는 그 지난한 과정이 얼핏 담겼다. 곡절을 겪는 메마른 인물들이 언젠가 흠씬 웃기도 하고 때로는 비난이 칭찬으로 바뀌기도 하며 무겁던 세속도 일순간 탈속으로 변하기도 한다. 언뜻 회생이란 것이 타자의 구원이라거나 은총을 매개하여 전제하는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변화란 다만 자신의 고통만을 전제한다. 구제를 자처하거나 이에 도통하려는 타자의 개입은 별개의 문제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주체는 나 자신 말고는 없다. 살아내는 것도 스스로 살아내는 것이고 스스로를 사지로 내모는 것도 나 자신이다. 그간 마셔보지 못했던 환희의 숨이 내 몸에 스며드는 순간에 선행되는 것은 다름 아닌 숨 끊길 듯 숱하게 비애를 몰아쉬었던 자신의 고통이다. 날마다 심폐소생을 받아야 할 만큼 저마다 꽉 막힌 삶을 살아가고 있으나 겨우 숨 붙들고 그런대로 곧잘 살아가는 이유, 변화의 가능성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 있다. 고통은 변한다. 그리고 변화는 그 대가를 안다. 평상심을 얻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변화는 격정에 쫓기던 시절을 기억한다. 자칫 욕심내거나 성내게 되면 감당 못 할 채무를 떠안는다는 걸 기억한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비범한 나날을 좇으려는 어리석음으로 회생 불가의 지경에 이른다는 걸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변화는 괴로움에 급급하여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삶의 구체적인 면면에, 평안에 이르기 위한 원리금을 꾸준히 상환하고자 한다. 고통과 격정으로부터 다시 빚 독촉을 받지 않기 위하여 변화는, 주고받음이 정확한 우리 삶에 실재하는 대차(貸借) 관계, 곧 업(業)에 따라 간신히 처신한다. 이러한 변제 행위는 기도가 된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이문재의 시 「오래된 기도」 중 회생한 자가 있다면, 거의 죽어가던 끝에 원인 모를 힘이 생겨 갑자기 살아낸 것이 아닐 것이다. 위와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에 자신을 일일이 맡겨보려는 무의식과 더불어 일상을 껴안게 된 몸이 저절로 평안을 찾아갔을 터이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기만 해도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걸 한 번 믿어보려 했기에 엉겁결에 회생이란 변화를 맞이한 것이 아닐까. 업(業) <회생>의 영어 제목은 카르마(Karma)다. 그래서 이 작품은 ‘행위’에 관한 영화다. 카르마란 불변의 법칙도 운명도 아니다. 나의 사소한 몸짓과 말씨, 스치는 한 생각으로도 빚어내는 행위들이 언젠가 자기 삶에 크고 작은 굴곡을 남긴다는 오래된 상식에 가깝다. 당장 갚지 못할 금전 채무이든, 오래도록 쌓인 마음의 빚이든 이러한 상식선에서 정확하게 나타나고 또한 사라진다. 문제는 무지(無知)다. 고통의 근원이다. 과도한 빚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파산에 이르기 전까지는 스스로 어떤 행위를 짓고 살아가는지 좀처럼 모르는 것이다.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고 있으면서도 이를 모른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끝내 죽는다. 자신의 서슴없는 행위들이 자의에 의한 죽음에 일조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반면 알게 되면, 즉시 멈춘다. 빚에 대한 오해가 깊다. 빚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이는 아군을 향한 오인 사격과 같다. 빚은 다만 출현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너무나 모르고 살았기에 이를 넌지시 일러주고자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고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고 걷기만 해도 남 부럽지 않은 충만에 이를 수 있다는 삶의 신비를 부디 모르고 살지 말라며 삶으로부터 부득이 요청되는 것이다. 빚은 마치 제 할 일을 다한다는 듯 무지와 인위에 허덕이는 이들을 저마다 찾아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국, 빚은 단지 삶의 불화와 갈등이 몸 밖으로 드러난 통증에 지나지 않는다. 과도한 빚을 진 자가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제야 그는 그동안 곪아 있던 속살을 마주한다. 돌연 조급해진 그에게 상처는 안중에도 없다. 애꿎게 자신과 타인을 꾸짖는다. 죄책감은 속살 깊이 파고들어 상처를 더욱 곪게 한다. 그러나 별안간 본모습을 드러낸 빚을 맞이할 수 있다면 기어이 치유의 겨를이 생겨난다. 오랫동안 차마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던 그 환부를 보살필,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때 빚은 짐이 아니다. 새살이 움트는 자리가 된다. 회생은 빚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둠은 다만 빛의 부재이다. 따로 어둠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무지는 앎이 비추는 곳에서만 걷히고 빚 또한 회복을 상실한 삶이 드러낸 양태에 불과하다. 불교식 표현을 빌리자면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곧 괴로움과 깨달음은 애초에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깊은 번뇌야말로 삶을 크게 돌이키는 인연이다. 회생이란 삶을 다시 배워가며 보듬어보는 일이다. 회생(懷生) 빚 몇천 몇억 탕감받기 위해 그저 회생절차를 이용하고자 법무사사무소에 구비서류만 툭 내던져놓고 가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살면서 이런 곳에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끝내 통곡을 두고 가시거나 지나온 삶의 회한에 이제는 말조차 잃은 듯 허공만 바라보다 가시는 분들이 있다. 이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말이 과연 무얼까 고민이 짙었다. 어쩔 줄을 몰랐다. 차분히 말 듣는 것과 맡은 일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말이 있으려나 싶었다. 그런데 마주한 자의 비감을 견디질 못하고 몇 마디라도 건네야 할 것 같으면 사무원으로 일하는 나 역시 법무사인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라 말하곤 했다. 처음 보는 제 앞에서 어렵게 눈물을 보이셨지만 그래도 빚을 갚으며 살아내려는 당신의 모습이 되레 제게는 큰 위로가 된다며. 더는 말을 아끼고 속으로 되뇐다.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당신의 사망진단서와 폐쇄 가족관계등록부 몇 장으로 가족들이 대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당신 스스로 온 것이니까. 그래서 <회생>을 처음 기획하면서 언젠가 완성이 되면 고개 푹 숙이고 있는 분들에게 그저 군말 없이 이런 영화도 있으니 시간 되실 때 한번 보시라 말씀드리고 싶었다. 이 영화가 회생(懷生), 모든 살아 있는 무리, 곧 중생을 위한 영화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서원이었다는 것을 날마다 절감한다. 예컨대 1999년경 사망한 어머님 생전의 1989년 발생한 은행 채무를 2026년이 되어서도 상속받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채무가 발생한 1989년 이후 30여 년 동안 총 네 차례나 양도된 채권을 최근까지 보유한 대부회사가 2026년 들어 시효연장의 소를 제기했다는 사실을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 사람에게 이 <회생>이라는 영화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인간 영혼의 불안을 잠재울 그 어떤 예술과 종교도 그 채무를 대신 없애주지는 못한다. 대물림을 막기 위해서는 시효연장 소장을 송달받은 날부터 14일 안에 추후보완항소를 제기해야 하고, 상속채무의 존재를 알게 된 날부터 3개월 안에 특별상속한정승인심판을 청구해야 한다. 결국 현실의 채무를 해결하는 것은 법률이다. 그렇다고 예술이 무력한 건 아닐 것이다. 영화 < 죽은 시인의 사회 >(피터 위어, 1989)에서 키팅 교수는 “법률과 의술, 사업과 기술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고귀한 일이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과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라 말하지 않던가. 영화는 상속채무의 대물림을 막아낼 수는 없겠지만, 빚을 짊어진 한 인간을 이해하게 한다. 내면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삶의 목적이다. 금전 채무를 당장 탕감받는다고 해서 삶의 근원적인 병폐가 곧바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회생과 파산사건에는 법률대리인을 둘 수 있을지언정, 법적 절차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알 길 없는 내면의 문제만큼은 그 어떤 대리인도 선임할 수 없고 그 어떤 절대자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다. 삶이 요구하는 것은, 그저 자기 마음을 스스로 제때 돌보는 일이다. 마음이 문드러졌다면 그 또한 몸처럼 치유의 대상이 되며, 그 치유에도 적절한 시기와 나름의 절차가 있다. 오랫동안 몸집을 키운 상속채무를 떠안지 않기 위해서는 추후보완항소와 특별상속한정승인심판 청구를 정해진 기간 안에 해야 하듯, 마음이라는 세계에도 놓쳐서는 안 되는 시기가 있다. 적기를 놓쳐버리면 누군가는 끝내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그때 그 마음은 이미 오래도록 무거운 짐에 짓눌려온 육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랜 세월 사무원으로 일하며 시를 써온 김기택 시인은 마음을 두고 이렇게 썼다. 마음이란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육체이다. 살처럼 꼬집거나 때리면 아프고 상처가 난다. 닭살도 돋고 주름살도 생기고 때도 낀다. 마음이란 육체이므로 음식과 물을 주지 않으면 굶어 죽는 것은 당연하다. 햇빛과 공기가 닿지 않으면 말라가는 것은 당연하다. 늙는 것도 병이 나는 것도 당연하다. 여느 육체와 마찬가지로 잘생긴 것과 못생긴 것이 있고 큰 것과 작은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있다. 그러나 마음이란 성감대보다 민감하고 오감보다 예민한, 섬세한 그만큼 망가지기 쉬운, 육체이다. - 김기택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 중 법무사사무소에는 상처 입은 마음이 찾아온다. 목을 매기 직전에 가까스로 어머니의 몸을 들어 올린 아들의 마음, 실종신고 끝에 차 안에 홀로 있던 아들을 겨우 찾아낸 아버지의 마음, 이자율 1000%가 넘는 불법 사채에 휘말린 자식 좀 도와달라며 울며 발만 구르는 어머니의 마음이 밀려온다. 그러한 마음에는 아직 새살이 돋을 겨를이 없다. 깊이 패인 상처는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 흉터가 되기 전까지 붕대로 감겨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큐멘터리가 함부로 담아서는 안 될 한 가지가 있다면,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다. 흉터가 되었거나, 적어도 회복의 기미가 보여야 지나온 흔적을 다른 이에게 어렵사리 꺼내 보일 수 있다. 다큐멘터리는 상처를 내맡긴 대상과 믿음을 나누는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그렇기에 이 예술이 되려 상처를 헤집게 된다면, 법과 종교의 오래된 폐단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다만 작품의 소재로, 사건의 구실로, 끝내는 구원의 대상으로까지 여기게 된다면 정작 돌보아야 할 저마다의 마음을 놓쳐버릴지 모른다. (그 믿음은 촬영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함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스태프와 감독 자신까지 이어진다. 2023 DMZ Docs 피치에서 만난 <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의 김영조 감독은 다큐멘터리는 세 가지 신뢰 위에 선다고 말해주었다. 감독과 스태프 사이의 신뢰, 감독과 대상 사이의 신뢰, 그리고 감독 자신에 대한 신뢰.) 다시 회생(回生) 법무사 아버지를 더 미워하다가는 내 마음에 더 큰 병이 날 것만 같았다. 그가 세상 떠난 뒤에 미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 싶었다. 그래서 그가 숨이 붙어 있는 한 함께 채무를 갚아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내고서부터 이상한 일들이 이어졌다. 정말 하늘이 감응한 것인지 사무실 수입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매달 고정된 변제금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형편이 갖추어졌다. 밥 굶지 않고 잠잘 곳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생계는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매달 둘이서 힘겹게 번 돈이 변제금으로 모두 나갈 때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기분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 허탈한 리듬에 몸과 마음이 곧바로 적응한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번 달 변제금은 겨우 마련했는데 다음 달은 어떻게 하지 또 어떻게 버티나’ 하는 걱정이 컸다. 그러나 매달 새로운 의뢰인들이 이곳을 찾아왔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또 한 달이 지났다. 6개월, 24개월, 48개월이 흘렀다. 언제부터 빚을 갚기 시작했는지 또 얼마의 빚이 남았는지 세어 본들, 돈이 뚝 떨어지고 빚이 갚아지나 싶었다. 도대체 몇 건의 회생 파산과 채무 관련 사건을 다룬 것인지조차 모를 지경에 이르렀고 그렇게 아홉 해가 흘렀다. 빚을 갚아나가는 삶의 운율이 이제는 아예 몸에 배어 버렸다. 혹여나 한꺼번에 남은 빚을 모두 청산할 기회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또 다른 업이 되어 되돌아올까 두렵다. 업무를 두고 법무사님과 의견이 엇갈려 서로 화를 내고 감정이 상할 때면 문득 언젠가 찾아올 그리움에 대해 떠올려보려 한다. 그러면 화가 좀 가라앉는 것 같다. 아, 이 순간도 언젠가 얼마나 그리워질까. 그렇게 여기면 좀 진정이 된다. 제발 청소 좀 하라며 핀잔을 늘상 주어도 기어코 구정물 묻은 신발로 사무실 바닥을 누비고 다니는 그 발자국이 얼마나 그리워질까. 방금 전까지 다시는 말 안 걸 것처럼 다투다가도 ‘어제 쓴 서면 꽤 잘 썼더라’라는 한마디에 토라진 마음 풀리는 일은 또 얼마나 그리워질까. 서로 뭔가를 끼적여 각자의 자리 벽에 붙여놓고는 훈훈한 날이면 ‘이건 어디서 주워온 글이냐’며 서로 품평하는 시간도. 각자 퇴근한 뒤에 서로 미안하다며 자기 전 짧게 문자를 주고받는 일은 언젠가 또 얼마나 그리워지려나.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의 시 「묵화」 어떠한 종속이 현실을 외면하는 체념이 된다면 그보다 지독한 구속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종속이 현실을 긍정하는 수용이 된다면 외려 그 안에서 자유를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 나는 믿고 싶다.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마음을 품고 지내다 보니 그제야 나는 어머니에게 마음의 깊은 빚을 지고 살아왔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빚을 줄여나가도 끝없이 다채로운 빚이 찾아오는 이곳에서야 그녀와의 인연이 지닌 무게를 헤아릴 수 있었다. 그녀가 왜 비구니가 되었는지, 정확히는 왜 다시 비구니가 되었는지는 어린 내가 알 리 없었다. 자식을 둔 비구니라는 사실은, 어린아이가 알아가는 세상과는 도무지 들어맞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존재를 숨기기에 바빴고 가까운 이들이 이를 알게 될까 늘 무서워했다. 학창 시절은 물론 성인이 된 뒤에도 나는 늘 그랬다. 군대 신병교육대 수료식 날에도 보살님들과 함께 나를 보러 온 그녀에게 그냥 차 안에 계시라 했다. 그녀는 가만히 차 안에서 날 기다렸다. 군 제대 하고 2주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금 네 아버지 곁에 누군가 좀 있어야 할 것 같다며 주변에 그를 도울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제대한 뒤에야 이 이야기를 내게 꺼낸 것은 그녀 나름의 배려였던 것 같은데, 당시 나는 세상 다 무너진 것처럼 꽤 충격을 받았다. 내 첫 반응은 그랬다. 어쩌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몇 있다. 사법고시를 공부하러 고시원에 간 그가 부처님 오신 날이면 절에 와 연등을 달고, 눈 많이 오면 눈 쓸러 오거나 절의 작은 하꼬방에 기숙하러 왔다가 넷마블 알까기를 하던 모습. 다시 무거운 가방을 들고 고시원으로 향하는 뒷모습. 그런 희미한 기억 품고서 법무사를 한다는 그의 사무실로 갔다. 꼬질꼬질한 모습이 그대로였다. 이 사무소에서 수많은 이들의 기구한 사연과 삶의 몸짓을 듣고 본 뒤에야 나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녀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남긴 사찰 빚을 대신 갚고자 다시 승복을 입고서 아무도 갚지 않으려는 빚을 스무 해 넘도록 묵묵히 갚아왔다는 사실이 비로소 가슴에 사무쳤다. 새벽녘 도량석을 마치고 향냄새 풍기며 어린 내가 자는 곁으로 와 다시 잠들던 그녀가 지금의 나처럼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는 걸 그토록 몰랐다.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원망은 지금도 나를 부끄럽게 하고 아직도 나를 짓누른다. 비구니 스님은 어린 내게 라면을 종종 끓여주었다. 라면 냄비 안에 떠 있는 긴 머리카락을 발견하고는 나는 스님에게 투덜거렸다. 왜 머리카락이 여기 있느냐며, 머리카락이 들어간 음식은 먹기 싫다고. 나는 머리카락을 끄집어내고 다시 라면을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스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스님은 제 머리카락 하나에 씩씩대며 다른 이를 탓하는 어린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아버지의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그의 빚을 굳이 드러내고자 했던 내 욕망은, 그간 어머니의 존재를 숨기느라 그녀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고자 했던 부채감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그 청산 과정에서 시심(詩心)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사무소 출퇴근길마다 많은 시인들의 시를 외웠다. 언젠가 그들처럼 살아보겠노라 다짐했으나 내게는 시 쓰는 재주가 없다는 걸 일찍이 알았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고마운 시를 내어준 시인들에게도 참 많은 빚을 졌다. 그러다 운 좋게도 다큐멘터리와 연이 닿았다. 이 인연은 또 언젠가 얼마나 큰 빚으로 남게 될는지. 부모에 대한 영화를 만들며 안도현 시인의 시론 [1] 을 여러 번 읽었다. 시는 부모와 절대자에게 마음을 바치는 양식이 절대 아니라고 한다. 부처를 우러르면 불경을 읽고 절을 하면 되는 것이고 부모를 공경하면 지극히 효도를 다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부처와 예수와 부모를 시에다 쓰고 싶어 못 견디겠으면 부처의 말씀을 관념의 테두리 안에 가둬버리고 실천할 줄 모르는 자들에 대해 쓰고 또 부모의 비겁함과 치부와 죄를 찾아 쓰라 한다. 무엇을 위해서도 누구를 위해서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나는 역시나 시 쓰기에 실패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먼저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시든 시적인 것이든 그 이후의 일이다. 이 영화의 한글 제목 ‘회생’이 법무사(아버지)라는 외피를, 영어 제목 ‘KARMA’가 비구니(어머니)라는 내피를 나란히 품기를 바랐다. 어린 시절의 내게 이 둘은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세계였다. 다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승과 속이 본래 둘이 아님을 믿고 싶었다. 서로를 배척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세계를 한 스크린에 놓아두고자 그 사이에서 나는 좀 앓았다. 비구니 스님이 울린 범종 소리로 끝맺는 <회생>의 마지막 장면은 앞서 언급한 이문재 시인의 시 「농담」 [2] 의 마지막 연에 빚을 졌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 [1] 안도현,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한겨레출판, 2023. 3. 17. [2] 이문재, 『제국호텔』, 문학동네, 2012. 12. 17. 김면우(영화감독) l < 회생 >(2026) 연출.
<도라지 불고기> 중 타인의 삶이 모이고 흩어지는 한 순간을 카메라로 붙잡기로 결심한 또 다른 순간에 대해, 프레임 밖에서 감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기획 배경 <도라지>의 주인공인 XX형과 나는 대학 동기다. 우리는 시각디자인과 축구 소모임에서 함께 뛰었다. 어느 날 형은 자기가 초·중·고교를 조선학교에서 보냈으며, 그곳은 일본에서 교포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 사실에 특별한 호기심이 생기지 않아 더 묻지 않았다. 2학년을 마친 뒤 나는 군대에 갔고, 형은 휴학 없이 졸업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 포수 >(2022)로 처음 영상 매체를 다루기 시작했을 무렵, 내겐 다큐멘터리를 많이 찾아봐야만 할 것 같은 긴장감이 생겼다. 그러다 조선학교를 다룬 영화를 접하게 되었고, 이어서 비슷한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영화들이 내는 목소리에 대체로 동의할 수 있었다. (동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영화임에도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차별 속에서도 조국과 정체성을 잊지 않고 투쟁하는 영웅’으로 그려져 있었다. 영화는 그들을 ‘우리 민족’이라 강조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상을 지우는 방식으로 그들을 철저히 ‘그들’로 격리하는 것 같았다. 이 영화들의 시선은 그들이 일본에서 핍박을 받더라도 조국을 잊지 않고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잊고 살아왔기 때문에 ‘늦게나마 돌봐야 할 불쌍한 사람들’이거나, ‘아픈 우리 역사의 교보재’였다. 선과 악, 피해와 가해의 구도가 분명하게 설정된 구조를 보며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라는 소재가 어떤 정치적 필요에 의해 선택된 대상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XX형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지만, 좀처럼 겹치지 않았다. 불온한 이미지 다큐멘터리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대체로 이렇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조선인을 향한 배제는 오늘날 조선학교를 향한 행정적 차별로 이어지고 있다. 고교무상화 제외는 제국주의의 잔재이며 우리 민족을 향한 차별이다. 이에 맞서 학교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조선학교 진학을 선택하고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더 훌륭하다거나, 일본인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지탄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는 수만 가지의 삶을 윤리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 어쩌면 스스로를 규정하려는 개인에게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은 이제 안식처가 아닌 억압의 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학교와 총련의 영향력이 점점 옅어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일 것이다. ‘북한’이라는 짐을 굳이 짊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조선학교가 북한을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등 인권의 가치에서 벗어나는 교육 내용을 유지하는 한, 일본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교육은 정치를 떠나 보편적인 인권의 영역이며, 아이들의 학습권이 정치적 논리에 의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인권’의 문제가 양쪽 모두에 공존한다. 이렇게 학생 수 감소나 고교무상화 배제의 이유를 일본인의 차별로만 단순화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영화는 이 복잡함을 가린다. <도라지 불고기> 중 밝히자면 나 역시 조선학교가 고교무상화에서 늘 제외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곳은 다양한 정체성의 가능성을 유지하게 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 논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면 먼저 가려져 있던 것들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슬픈 얼굴들을 앞세워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을 가리는 수법에 더 이상 진보가 있을까. 감출수록 더 미심쩍게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가려졌던 것들을 드러낸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하고 싶었다. 북한과의 연관성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남한과 일본 사회를 벌벌 떨게 할 만큼 실체적인 위협인지 되묻고 싶었다. 그래서 ‘불온한 이미지’를 원했다. 너무 당연한 모습이지만 조선학교와 재일조선인을 다루는 영화에서는 금기처럼 여겨질 법한 것들. 그러나 너무 당연한 모습들. 촬영 과정 XX형에게 종종 나고야로 놀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나고야에 갈 바에야 도쿄에 가겠다며 진심을 담아 거절해 왔다. 그런데 막상 ‘찍을 거리’가 생기니 촬영 장비를 꾸려서 쫄래쫄래 나고야에 갈 계획을 세우는 내 모습이 꽤 머쓱했다. 브이로그 형식을 택한 현실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오랜만에 보는 형은 물론, 처음 만나는 사람들까지 대뜸 카메라에 담아야 했다. 그러니 비교적 작은 카메라가 서로에게 덜 민망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작업에서 나는 사명감 넘치는 다큐멘터리스트가 아니라 재치 있는 브이로거여야 했다. 앞서 언급했듯, 실재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지우고 그들을 하나의 범주로만 불러내는 방식에 대해 나름의 대답을 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별다른 사건 없는 일상을 담기로 했다. <도라지 불고기> 중 / 편집된 장면 중 다행히 형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무사히 나를 소개해 주었고, 다들 내 카메라를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나 역시 촬영을 위해 웃기고 귀여운 동생처럼 보이려 부단히 노력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의 부모님에게는 늘 호감을 샀다는 경험에서 나온 자신감도 있었다. 서울과 나고야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많이 가까워졌다. 물론 내겐 꿍꿍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는 된 것 같았다. 덕분에 <불고기>를 촬영할 때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본격적인’ 카메라를 들이밀 수 있었다. 나고야를 방문할 때마다 약과와 참기름, 고춧가루, 안동소주, 도라지즙, 쫀드기 같은 것들을 챙겨갔다. 누나들과 형들의 어머니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정도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됐다. 비록 나의 불순한 의도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어느새 그들은 내게 소중한 친구들이 되었다. 그래도 이제는 나고야보다 도쿄에 가고 싶다. (상) 편집된 장면 중 (하) <도라지 불고기> 중 / 서울에 놀러온, 나고야에서 만난 친구들 (사진: 양지훈) 지워낸 얼굴 얼굴을 블러 처리한 선택은 예상보다 많은 말을 낳았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이를 두고 “존재를 부정당한 저들의 실체가 없는 아이덴티티의 시각화”라고 리뷰했지만, 그렇게 정의하면 내 의도와는 반대가 된다. 아마도 그 문장은 내 작업을 보호하기 위해 덧붙여진 수사였을 것이다. 보편의 윤리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익숙한 방식으로 묘사하는 편이 모두에게 안전했을 테니까. 블러 처리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나는 누군가 나를 카메라로 찍는 일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특정한 범주로서 누군가의 카메라 앞에 서야 한다면, 아마 더 힘들 것 같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을 내가 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근원적인 미안함이 있다. 그래서 가렸다. < 도라지 불고기 >(2025)에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자연스럽고 정당한 선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카메라에 기록되어 특정 범주 안에 위치 지어질 가능성을 생각했을 때, 그게 꼭 의미 있거나 유익한 방식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늘 미안함은 욕망에게 지곤 한다. 그들의 삶에 기대지만, 얼굴까지 팔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맨얼굴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었다.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에 대상이라는 매개가 있고,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의 ‘날 것의 얼굴’은 관객에게 가장 좋은 구경거리다. 우리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마주 볼 수 없다. 일방적으로 응시할 뿐, 타인에게 얼굴을 내어주지는 않는다. 가려진 얼굴을 보며 관객들이 이 불균형한 관계를 자각하기를 바랐다. 이미지(를 보는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얼굴을 탐닉하고 점유해 왔다. 그것을 윤리라고 믿는 방식으로. 편집된 장면 중 드러낸 주체성 얼굴을 블러 처리한 선택 때문에 많은 비판을 전해 들었다. 비판은 대체로 한 곳으로 향한다. “감독이 대상의 개별성과 주체성을 소거했다”라는 의견이다. ‘개별성’을 소거했다는 지적은 겸허히 받아들인다. 얼굴은 그 사람을 증명하는 상징이다. 그 얼굴들을 모두 같게 만듦으로써, ‘재일조선인’이라는 집단화된 이미지를 내가 가장 적극적으로 생산한 모양새가 되었다. 작업의 가장 핵심적인 형식이 정작 작업이 문제 삼으려 했던 것을 스스로 앞장서 재현하고 말았다. 내가 극복하지 못한 부분이다. 하지만 ‘주체성’의 문제에서는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창작자가 누군가에게 주체성을 주거나 뺏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도라지 불고기> 밖에서 그들은 각자 자기 삶의 주인이다. 하지만 작업(영화)의 주체는 작가(감독)이다. 프레임 안에 가둔 대상의 주체성을 드러내 보겠다는 고민은, 어쩌면 감독이 자기 윤리를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감독이 전권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대상의 주체성을 논하는 일은 그 자체로 시혜적이다. 감독이 ‘드러낸’ ‘주체성’이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며, 편집자의 손끝에서 빚어진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창작자가 제작 과정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태도는 자신의 욕망을 가장 앞에 두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욕망을 명분 뒤에 숨길수록, 영화를 향한 비평은 도덕의 문제로 치환되고 만다. 작품이 아닌 ‘의제’를 방패 삼아, 비판하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나쁜 위치에 세워버리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창작자는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숨어든다. 누군가를 위해 카메라를 든다는 사람의 말은 아직까지 믿지 못하겠다. 그 말은 카메라의 작동 원리를 타인에게 전가하며, 자신을 선한 주체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타인의 삶을 연료 삼아 예술가로 살아가려는 창작자의 야심과, 타인을 안전하게 관음하려는 관객의 시선이 만나는 지독히 탐욕적인 장소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 비대칭적이고 폭력적인 구조를 ‘대상의 주체성’이나 ‘재현의 당위’라는 말로 포장하는 순간, 예술은 비겁해진다. 감독이 ‘구원자’의 탈을 쓸 때 대상은 ‘수혜자’로 전락하지만, 감독이 ‘욕망하는 창작자’로 설 때 대상은 비로소 그 욕망과 거래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당사자가 된다. 물론 당장 이 기울어진 무게추를 평평하게 맞추지는 못하겠지만, 어쩌면 대상의 주체성이 생겨날 수 있는 희미한 가능성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불고기> 촬영 현장 (사진: XX형) 양지훈(시각예술가) l 다큐멘터리 제작에 수반되는 본질적인 폭력에 주목하며 다큐멘터리 이미지를 만든다. <포수>(2022), < 테이큰 >(2023), <도라지 불고기>(2025)를 만들었다.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나를 웃음거리 정도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1]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정말 필요한 건 진짜로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거예요. 스타든, 노동자든, 흑인이든,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부디 저를 웃음거리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이런 제 신념과 함께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해 주세요.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3. * 마릴린 먼로가 사망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이 마지막 부탁은 무시됐다. 죽음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발언권을 몰수하는 사건이다.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의 생애를 함부로 규정짓는 것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 1926년에 태어나 1962년에 사망한 한 미국인, 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e Mortenson)과 같이 혼란스러운 생을 살았던 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녀는 타고난 스타였다. 그녀는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녀는 일생 내내 유·무형의 성적 폭력에 시달렸고 순탄치 않은 개인사를 겪었다. 그리고 그녀의 언행은 자주 모순적이고 불안정했다. 이 마지막 인상은,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연막에 그녀의 본 모습이 가려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상 ‘배우’로서의 자신을 강조했지만 일반적인 연기론과는 다르거나 불분명했다.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는 배역 위주로 맡기는 소속 영화사에는 항의하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에는 행복해 했다. 오히려 유명인사나 거물과 적잖은 염문을 뿌렸으니,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거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했다는 세간의 평을 듣기에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녀를 배우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노마 진 모텐슨’이라는 한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오해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배우라는 탈출구를 통해 자신을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관객들을 갈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외적 아름다움을 포함한 자신의 ‘전체’를 보고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밤에는 샤넬 No. 5를 입고 자요’라는 발언이 의도적으로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을지, 아니면 정말 본인 말대로 피부가 민감해서 옷을 걸치지 않고 잔다는 의미였을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영화산업과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적인 이미지가 무려 60년 이상 재생산되고 있다. 이걸 걷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본인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신혼여행 중 도피한 여배우 6.25전쟁이 끝나고 고작 반 년이 지난 1954년 2월 16일, 서울 여의도공항에 C-54 수송기가 도착하고 마릴린 먼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위문협회(USO, United Service Organizations)가 해외 파병 미군을 대상으로 한 캠프 쇼(Camp Show)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이때의 기획은 다소 즉흥적이고 특별했다. 당시 마릴린 먼로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Joseph Paul DiMaggio)와 결혼하고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신혼여행 중이었다. 이 결혼생활은 해가 가기 전에 고통스러운 파경 으로 치달을 것이었고, 신혼여행 중에도 이미 그 전조가 보였다. 조 디마지오는 신혼여행 중에도 일본 야구팀과의 공식 일정을 진행했고, 마릴린 먼로는 한국의 최전선에 근무하고 있는 미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기로 결정한다. 신혼여행 출발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거나 비행기 안에서 제의를 받았다거나 일본에서 전격적으로 결정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2] 다만, 한국에서의 모든 공연에서 그녀는 보라색 칵테일 드레스 한 벌을 입고 무대에 섰는데, ‘원래 파티장에서 입으려고 가져온 것이고 이것이 무대에서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최종 결정 자체는 긴급하게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1954년 2월 1일, 도쿄 제국호텔 기자회견장에서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부부 출처: 111-SC-452331, National Archives 마릴린 먼로는 2월 16일 여의도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19일까지 3박 4일동안 미군 기지 십여 군데를 순회하며 부대 내 야외 가설무대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2관에서 수집한 기록영상 중에는 미군 촬영병들이 이때의 마릴린 먼로의 모습을 기록한 푸티지가 3점 있다. 이 영상들은 현재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3] 을 통해 공개되고 있는데, 모두 흑백으로 촬영됐고, 특별한 경우 외에는 음향을 함께 녹음하지 않는 군 기록영상의 특성상 군인들의 환호성과 마릴린 먼로의 음성이 담겨 있지는 않다. 원 소장처에서는 모두 “MARILYN MONROE SHOWS, K-2 AND K-16, KOREA”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를 자료원 컬렉션에서는 <1954년 2월, 마릴린 먼로 내한 - 미군부대 순회공연> (A), (B), (C) [4] 로 구분했다. (이하, <영상 A>, <영상 B>, <영상 C>로 지칭하겠다.) 이 부부의 결혼은 ‘세기의 결혼’으로 일컬을 만했다. 결혼과 신혼여행도 평범하지는 않아서 화제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의외로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의 신문보도에서도 이 순회공연의 전 일정이 빠짐없이 명시된 기사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마릴린 먼로 헌정 사이트나 각종 블로그의 내용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출처도 분명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슬레이트 정보와 부대마크가 포함된 기록영상들은 귀중한 근거가 된다. 다만, 이 영상들에는 당시의 몇몇 일정이 빠져 있고 시간 순서대로 묶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리가 필요하다. 이 영상들과 당대 신문기사를 종합해 마릴린 먼로의 일자별 방문지 순서를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 2월 16일(화) : 여의도 K-16 비행장 도착, 미 제1해병사단 제1보병연대(첫 공연) [5] , 미 제7보병사단 ◦ 2월 17일(수) : 미 제3보병사단, 제40보병사단 제160보병연대, 제24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6] ◦ 2월 18일(목) : 미 제2보병사단, 제45보병사단 [7] ◦ 2월 19일(금) : 대구 K-2 공군기지(마지막 공연) 이렇게 확인된 일정만 봐도 4일 동안 총 9군데의 미군 부대를 방문했다. 기억에 의존한 일부 블로그 글, 예를 들어 마지막 날 대구 전에 춘천 공연이 있었다든지 하는 것들을 신뢰한다면, 18일과 19일에 각각 최소 2~3군데의 일정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촬영된 부대들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18일까지는 군사분계선을 따라 최전선 부대들을 방문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기사들은 공연이 있었던 장소를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서부 전방’(‘Western Front, Korea’), ‘중부 전방’(‘Central Front, Korea’), 그리고 마지막 날인 19일 제45보병사단 기사에서 ‘동부 전방’(‘Eastern Front, Korea’)으로 보도하고 있다. 따라서 마릴린 먼로와 공연팀들은 서울을 기점으로 경기 북부와 강원도의 전방 부대들을 동쪽으로 순회한 후 마지막 날 대구를 비롯한 후방 주요기지를 방문한 뒤 일본으로 귀환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적게는 6,000여 명에서 많게는 13,000여 명의 군인들이 몰려들었다. 17일까지 이틀 동안 집계된 관객수를 6만명 으로 보도한 기사가 있고, 대략 19일까지 총 관객수를 10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하는 견해가 일반적인 듯 하다. 영상들은 주로 마릴린 먼로에 초점을 두고 촬영됐지만 다른 전반적인 정보도 함께 담고 있다. 마릴린 먼로는 서울에 도착할 때와 대구 비행장으로 갈 때만 수송기를 탔고, 부대에서 부대로 이동할 때는 군용 헬리콥터를 탔다. 이 위문공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밴드 ‘Anything Goes’ 일원들, 남편 조 디마지오의 동료 야구인의 아내 진 오둘(Jean O’ Doul), 그 외에 매니저 역할을 한 장교로 추정되는 인물이 늘 마릴린 먼로와 함께 이동했다. 따라서 이 인원들과 악기까지 감안하면 헬리콥터도 최소 3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대마다 사단장급이 나와서 일행을 영접했고 도착 장소에서 한동안 포토타임을 가졌다. 공연은 보통 밴드원들이 노래, 연주, 만담 등으로 분위기를 띄운 후 마릴린 먼로가 등장해 노래를 몇 곡 부르고 군인들과 포토타임을 가지는 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다. 마릴린을 데려와라! - 신경쇠약 직전의 군인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 마릴린 먼로는 1953년 한 해 동안 출연한 영화 세 편이 모두 흥행하면서 떠오르는 스타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배우 데뷔 이전에 누드모델로 활동했고, 당시 군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핀업걸(Pin-up Girl) [8] 중 하나였다. 대중문화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한국의 미군들에게 마릴린 먼로는 영화배우라기보다는 핀업걸로 익숙했고, 사진에서 보던 모델이 현실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9] (왼쪽) 미 제1해병항공단 비행대대 “Devil Cats”, 퀀셋 안 벽에 가득 ‘핀업’된 여성 모델과 배우 사진들 출처: 127-GR-223-A345138 , Box 32, Folder 223, National Archives. (오른쪽) 1953년 2월 14일, 미 제9군단 항공관측부대 간이비행장 관제소에서 통신 중인 병사. 창에 ‘핀업’된 여성 사진. 출처: 111-LC-31969, National Archives / 열람: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중 <AERIAL PHOTO MISSION, IX CORPS, KOREA (2)> 2분 40초 지점 하지만 여의도공항에 마중 나온 군인들의 뜨거운 열기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이때의 미군 병사들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먼 다른 나라에 와서 3년간 전장을 경험했다. 특히 전방 부대들은 정전 후 7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귀환하지 못하고 군사분계선 이남의 방비태세를 정비하거나 잔존하는 전쟁 재발의 위협에 대응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생존의 불안감과 오랫동안 누적된 피로감, 고국의 민간 사회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이들의 전반적인 정서였을 것이다. [10]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USO가 발족하고 캠프 쇼를 기획했던 것도 바로 파병 군인들의 이런 정서를 달래 사기를 진작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6.25전쟁 중에도 캠프 쇼가 수차례 열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더라도 마릴린 먼로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한국 땅을 밟은 다른 ‘레전드’급 연예인들 이상이었는데, 그만큼 이때의 미군들이 지쳐 있었고 절실히 귀환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왼쪽)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공연 후 자신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스터에 사인을 해 주는 모습 (<영상 C>, 3분 58초 지점) (오른쪽)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즐거워하는 제2보병사단 군인들 (<영상 C>, 21초 지점) 한 군인은 너무 당황해서 카메라 렌즈 뚜껑 벗기는 것을 잊었다. 먼로가 뚜껑을 열어주며 말했다. “자기야, 그거 벗기는거 잊었어.” 한국 전역 군부대 PX에서는 필름이 모두 매진되었고 제7보병사단 공연에서는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 한 기자가 "공산군들은 제7보병사단이 야간 기동 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 불빛에 하늘이 계속 환했다." [11]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 무대 조명을 세팅하는 모습(왼쪽, <영상 A> 3분 44초 지점)과 공연 중 플래시가 터진 순간(오른쪽, <영상 A> 4분 29초 지점) 영상에서 비춰진 마릴린 먼로는 여신처럼 군림하는 스타가 아니라 군인들과 팔짱을 끼고 대화를 나누는 ‘친구’였다. 마중 나와 기념사진을 찍은 장교보다는 사병들이 카메라에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내어 주었다. 그녀는 영하의 날씨에도 얇은 어깨끈만 있는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 헌신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비나 진눈깨비가 온다고 하여 공연을 취소하거나 연기하지 않고 예정대로 진행했다. 제40보병사단에서는 비와 추위로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나와 공연을 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39도의 고열로 앓아누운 것은 이때 무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12] 지친 병사들은 이토록 친밀하고 친절한 모습으로부터 아마도 위로 또는 이해받고 있다는 감정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 마릴린 먼로가 군용항공점퍼를 입고 헬리콥터나 전차, 지프 등에 올라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은 병사들에게 긴 긴장상태가 끝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줬으리라 생각한다. [13] 한국에서 군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하러 갔을 때, 그녀는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1만 3천 명의 미군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진심으로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군인들이 끊임없이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어깨끈 없는 드레스 [14] 와 샌들을 신고 무대에 섰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라고 회상했습니다.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0. 병사들은 이렇게 억눌렸던 욕구가 해소되고 위로 받는 감정을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호응으로 표출했던 것 같다. 영상에 누락됐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 중에는 무대로 달려들려는 군인들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공연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이 있었다. [15] 이어 가장 격렬했다고 알려진 2월 18일 제45보병사단 공연에서는, 약 6,000명의 군인들이 마릴린 먼로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해 앞 순서 공연자들에게 ‘마릴린을 데려와라!(Bring on Marilyn!)’라며 야유를 하고 돌을 던졌다. 결국 마릴린 먼로가 예정보다 일찍 등장하자 이들이 일제히 무대로 달려드는 통에 한 군인이 부상을 당해 구급차에 실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16] 이런 해프닝들도 있었지만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은 한결같이 회고록이나 구술을 통해 이때를 좋은 추억으로 회고하며 특히 마릴린 먼로에 대해서는 ‘최고로 멋진 여성이었다’, ‘여배우지만 겸손해서 놀랐다’ 등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영상에 드러나는 이때의 마릴린 먼로는 ‘추억보정’이라고 하기엔 유별나게 헌신적이었다. 한마디로 스타성과 진정성이 함께 폭발한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야외 무대 ‘Grenadier Palace’ 공연 : 진눈깨비에 가까운 비가 내리자 마이크를 손으로 닦아주는 관계자(위, <영상 A> 7분 7초 시점). 결국 잠시 퇴장했다가 다시 나오는 마릴린 먼로(아래, <영상 A> 7분 21초 시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장에 가득 찬 군인들(<영상 B> 1분 24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25보병사단 공연 장면. 추위에 입김이 나오는 모습 (<영상 C>, 5분 48초 지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패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하며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마릴린 먼로 (<영상 B> 50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6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첫 공연장으로 향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옮겨탄 모습. 이 순간에도 다리를 내밀고 포즈를 잡는 모습 (<영상 B> 5분 19초 지점) 마릴린 먼로의 다시 없을 순간 이번에는 마릴린 먼로의 입장에서 바라보자. 이 순간 마릴린 먼로가 미국의 배우이자 엔터테이너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한 군인들을 위해 본분을 다 한 것이었다면 ‘프로’로서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그녀의 때로는 지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인 발언들, 그녀에 관한 여러 전기들을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이런 시각은 어떨까? 그녀의 모든 발언은 늘 오해를 살 만 했다. 진심이 립 서비스로 받아들여지거나 화제성을 노린 발언으로 곡해되기 딱 좋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여의도공항에 도착해서 수백명의 군인들을 보고 한 유명한 발언,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남편도 왔으면 좋았으련만.”은 자신의 관능적인 이미지를 활용한 의도적 발언으로 보이기 쉽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제 커리어의 정점이에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제가 영화 스타라고 느꼈어요.”라고 말한 것도 스타의 의례적인 발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공적인 발언에 소심하게 내면의 결핍을 드러내곤 하던 그녀의 성향에 주목한다면 모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가 지인들에게 한, 좀 더 내밀한 발언을 들어보자. “스타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미국으로 귀환한 후 자신의 무용 선생인 로테 고슬라르(Lotte Goslar)에게 말했다. “정말 진심으로, 한국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 많은 젊은 친구들이 웃으며 나를 보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내가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17] “7만여 명의 군인들이 내 앞에서 목이 터져라 환호하는데...” 먼로는 각본가이자 감독인 벤 헤크트(Ben Hecht)에게 말했다. “...그저 행복뿐이었어요. 집에 온 느낌처럼 .”(“I only felt happy. I felt at home.) [18]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에서 군인들과 즐거운 한 때. 다친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신혼여행 출발 때부터 남편의 폭행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19] (<영상 B>, 31초 지점) 이렇듯 가장 뜨거운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여배우이면서도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던 28살의 젊은 마릴린 먼로에게는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앞날이 겹쳐 보인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군인들이 보인 맹목적이면서 순수해 보일 정도의 격렬한 애정표현은 역설적으로 마릴린 먼로의 결핍된 정서를 보듬어 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기록영상에서는 성욕이든, 갈증이든, 관심이든 뭐든,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과 결핍상태에 놓여 있던 같은 처지의 군인들과 여배우가 이 짧은 며칠동안 서로를 위로했다고 느껴진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은 영상 중 한 슬레이트에서 ‘Marilyn Monroe + ME’라는 문구를 보고 촬영자가 벅차는 마음으로 ‘마릴린 먼로와 나(ME)’라고 적었을 것이라고 넘겨 짚었다. 지금이야 그럴 리 없다, 이것이 군 오락(Military Entertainment)과 같은 다른 용어의 약어일 것이다, 등으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 정도로 영상 속에서 군인들과 여배우의 소위 ‘케미’는 끈끈해 보인다. (왼쪽)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의 탈의실 또는 대기실 입구에서. ‘마릴린, 총검사단의 연인(SWEETHEART of the BAYONET DIVISION).’ (<영상 A>, 3분 27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슬레이트, ‘Marilyn + ME’ (<영상 A>, 16초 지점)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무대에서. (왼쪽: <영상 A> 1분 25초 지점. 오른쪽: <영상 A> 1분 15초 지점)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무대 ‘Bulldozer Bowl’에서. (각각 <영상 C> 4분 1초, 3분 41초 지점) 그리고 여배우들의 인생선이 교차한 순간 마릴린 먼로의 이 역사적인 내한공연은 한국어 콘텐츠에서 보통 다음의 두 가지 꼭지로 소비된다. ‘세상에, 마릴린 먼로가 한국에 왔었다고?’ 아니면 ‘마릴린 먼로가 최은희 와 만났던 것 알아?’. 사실 두 나라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여배우들의 만남에 대해서는 어떤 맥락도 찾기 어렵다. 심지어 국내 신문에서도 딱히 보도된 기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만남은 일정 마지막 날인 19일, 대구 동촌비행장(K-2 공군기지)에서 이뤄졌다. 이 순간은 <영상 A>에 기록돼 있는데, 이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 영상은 슬레이트 외에는 매우 어둡게 찍혀서 처음에는 인물이 잘 식별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아무리 조명 부족 등의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실제로 새벽이나 늦은 저녁 등 어두운 시간대에 찍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럴 때 시간대를 반영하면서도 내용이 잘 식별되고 현실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색상을 보정하는 것이 바로 기록영상 색보정의 핵심이다. 색보정 후에 비로소 마릴린 먼로 양 옆에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영화배우 최은희, 연극배우 백성희 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잘못 퍼져 있는 대표적인 정보 중 하나를 확실히 검증할 수 있게 됐다. 이 대구 장면은 이따금 잘못 안내되는 것처럼 최은희 등이 마릴린 먼로의 ‘입국’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 나온 장면이 아니라,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대구에 도착한 마릴린 먼로를 맞이하러 온, 크게 보면 수일 동안의 공연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환송의 의미로 나온 장면이다. 심지어는 이 장면의 장소를 여의도공항으로 오인하는 내용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아마도 마릴린 먼로가 군 수송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어서 이 모든 오해가 시작됐을 듯 하다. 하지만 여러 소스를 교차 검증하고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사실이 명확해진다. 1954년 2월 19일, 대구 K-2 공군기지에서. 슬레이트(<영상 A> 4분 35초 지점) 및 세 배우가 함께 한 모습(<영상 A> 5분 18초 지점) 영상에서 마릴린 먼로는 군용기에서 내려와 카메라를 든 수많은 헌병에 둘러싸여 환대를 받는다. 그러고는 환영 인파에 포함돼 있던 두 배우를 만나 함께 팔짱을 끼고 촬영 시간을 가진다. 이때 관계자로 보이는 한국인 중년 남성이 둘 보이는데, 이중 하나가 마릴린 먼로에게 무어라 말하자 ‘Thank you’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보인다. 아마도 한국의 두 배우가 마중 나왔다는 설명을 들었을 듯하다. 이 남성들의 존재로 인해 이 만남이 배우들의 의사보다는 어떤 이유로 기획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정 내내 처음 보는 군인들과 놀랍도록 친밀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도 이 순간에는 딱히 긴 대화를 나누지 않고 데면데면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짧은 장면 이후는 그녀가 주변의 전투기 날개에 올라 원래 그렇듯이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 촬영에 응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시기의 백성희 배우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정보를 찾을 수 없지만, 최은희 배우는 이때 자신의 여섯 번째 출연작인 신상옥 감독의 < 코리아 >(1954) 촬영이 끝났거나 막바지 단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리아>는 신상옥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서, 한국의 각 명승지와 관련된 고사를 극화하여 엮은 문화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은 이 영화를 1952년부터 제작에 착수해 1954년 5월 1월에 개봉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1954년에 최은희와 결혼한다. 해방 공간에서 신예 영화인으로 주목받던 최은희는 전쟁기를 거치며 여러 가지 사건으로 배우로서의 경력과 개인사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코리아>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에게 앞으로 펼쳐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같은 인생 역정의 출발점이었다. 마릴린 먼로와의 뜬금없는 만남에 대해 구체적인 맥락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인생 역정에서 꽤나 비슷한 시기에 조우했다는 생각은 든다. *** [1]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인터뷰 중 발언이다. 원어로는 “ Please don’t make me a joke. ”로서,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선정적 이미지나 가십거리로 자신을 단순화하고 규정해 온 언론과 대중에 대한 마지막 호소로 읽힌다. [2] Liesl Bradner (2026. 2. 18), When Marilyn Monroe Interrupted Her Honeymoon to Go to Korea , HistoryNet Retrieved from https://www.historynet.com/when-marilyn-monroe-interrupted-her-honeymoon-to-go-to-korea/ [3] 컬렉션 사이트의 검색 필터 중 ‘미군위문협회(USO)’를 선택하면 이 영상들이 조회된다. [4] 원 소장처의 local ID로 구분하면, (A)는 111-LC-35128, (B)는 111-LC-35129, (C)는 111-LC-35130이다. [5] 제1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와 스틸사진들이 존재한다. [6] 제24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24, 25보병사단의 방문 순서는 알 수 없다. [7] 제45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8] 핀업걸(Pin-up girl)은 매력적인 여성을 촬영한 사진이나 여성을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 또는 이를 활용한 잡지나 달력 등을 말하며, 주로 벽에 핀으로 고정하고 감상하던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제2차 세계대전기부터 군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이후에도 남성 중심의 작업장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마릴린 먼로는 미군 기관지 Stars & Stripes 에서 선정한 ‘1951년 미스 치즈케이크’(치즈케이크는 핀업걸의 은어임)였다. [9] 남성 중심의 군대에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문화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아키비스트가 실존하는 과거의 기록과 현상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윤색할 수는 없다. 이 글은 ‘바람직함’에 대한 논고가 아니라 시대적 맥락 속에서 미군과 마릴린 먼로가 어떤 결핍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서로를 어떻게 바라봤는가에 대해 주목한 것임을 밝힌다. [10] 미 육군의 TV시리즈 The Big PIcture 중 < USO - Where ever We Go >는 USO의 탄생 배경과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군인이 자신이 속했던 민간사회(old civilian)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 사기를 위해 중요한 것임을 미군 당국도 알고 있습니다”, “USO는 고향의 사람들이 당신을 잊지 않았으며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군인과 민간의 삶을 연결지어 주는 곳입니다.” [11] Liesl Bradner, 앞의 글 [12]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23 1954. [13] 필자 개인의 인상이 포함됐으며 어쩌면 ‘군인과 꽃’ 클리셰를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한 안이한 해석일 수도 있다. [14] 정확히 말하면 끈 없는 드레스(strapless dress)는 아니다. 얇은 끈의 드레스를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5]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17 1954. [16] The Key West citizen . (Key West, FL), Feb. 18 1954. [17] Liesl Bradner, 앞의 글 [18] Liesl Bradner, 앞의 글 [19] Spoto, Donald. 2001. Marilyn Monroe: The Biography . New York: Cooper Square Press. Originally published New York: Harper Collins, 1993. p.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