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룰
- 감독
- 게리 마샬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제인 폰다, 린제이 로한, 펠리시티 허프만, 더모트 멀로니, 캐리 엘위스
문화영화는 특정한 사상의 전파와 일반 대중의 계몽 혹은 지식의 전파를 증진할 목적으로 제작되는 각종 형태의 영화를 일컫는 용어이다. 보통은 관에서 주도하여 제작한 홍보영화와 계몽영화 등이 이러한 범주 안에 들어가는데 이러한 영화의 상영은 관에서 조직한 활동사진반의 순회영사 등을 통해 무료로 상영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문화영화를 통한 시국선전활동이 이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1939년 제정된 일본영화법 15조에서는 문화영화에 관한 규정을 두어 그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도 문화영화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조선문화영화사, 조선문화영화협회와 같은 영화제작회사가 설립되었고 조선영화사와 고려영화협회 같은 기존 극영화제작사에도 문화영화부가 설치되는 등 기존의 영화회사도 문화영화 제작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문화영화를 위주로 상영하는 영화관의 설립 역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문화영화 전용관의 설립은 기존에 영화관 출입이 어려웠던 학생 관객들을 수용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일본정부가 든 문화영화관 설립의 주된 이유는 정부에서 지정하는 문화영화 혹은 각 지방 장관이 문화영화로서 추천하는 영화를 학생들에게 공개하여 널리 구경시켜 지적인 면을 함양케 하는 동시에 정서 교육으로 많은 도움이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문화영화에 관한 관심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서도 문화영화 관람 기회를 늘리기 위해 문화영화관 설립이 가시화 된다. 조선에서 문화영화관은 백화점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설립이 추진되었다. 일반 영화관처럼 대극장이 아니어도 괜찮을 뿐더러 많은 관객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지리적 장점도 고려되었다. 당시 백화점 업계에서는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지속적인 불황을 타개하려 백화점 내에 극장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국의 문화영화관 설립 움직임과 맞아 떨어지면서 백화점 안에 영화관 설립이 추진된다. 1939년 서울의 백화점들은 상품선전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영업방식을 강구했다. 전통적으로 일본인 백화점으로 알려진 미쓰코시(三越), 미나카이(三中井), 조지아(丁字屋) 등 남촌의 세 백화점은 연합하여 미나카이 백화점 뒤편 소화통에 영화관을 지어 일정 상품을 구매한 사람들에게 무료입장권을 제공해주는 계획을 세운다. 문화영화관 설립을 추진 중이던 조선총독부는 백화점 업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백화점에 영화관을 설치하는 것을 허가해 준다. 총독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백화점에 영화관을 설립, 많은 이들이 시국선전용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선전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1939년 12월 23일, 미나카이 백화점 뒤편 소화통에 경일문화영화극장이 준공되어 개장식을 거행하였다. 경성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이 영화관은 200석의 좌석을 가졌으며 어른 20전, 군인과 소학생은 10전씩 요금을 받았으며 매일 오전 10시 개관하여 <경일세계 뉴-스>와 <요미우리신문 뉴-스>와 같은 뉴스영화, 문화영화, 만화영화를 상영했다. 이 영화관에서 문화영화를 감상한 임화(林和)는 극장의 규모가 좁아서 기분이 아담하고 저렴한 가격, 상대적으로 짧은 상영시간(1시간 반), 아이들과 어른들 누구나 볼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의 프로그램과 같은 장점들을 나열한 후 북촌에도 조선어신문사가 운영하는 이런 문화영화관이 생기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문화영화가 극영화 중심의 재래영화의 신생면의 하나라면 문화영화극장은 영화흥행 및 감상에 새로운 경지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임화, ““뉴-스”와 만화 경일문화영화극장“, 《매일신보》, 1940.2.9.) 라며 문화영화관의 장점을 강조하였다. 남촌의 백화점이 적극적인 영업정책을 세우자 북촌에 자리한 화신백화점도 백화점 6층의 다목적 홀을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영화관으로 개조하여 영업활동에 이용하기로 한다. 1940년 5월 28일 화신백화점 6층에 개관한 화신영화관은 경일문화영화관과 마찬가지로 뉴스영화, 문화영화, 만화영화를 비롯해 각종 선전영화들을 상영하게 된다. 1940년 11월 1일부터는 문화영화가 모든 극장에서 강제상영 된다. 아울러 조선 내에서 문화영화 제작도 활발해진다. 이에 따라 지방에서도 문화영화관의 설립이 추진되는데 1941년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상인천역 앞의 400여 평에 현대식 건축물로 문화영화와 뉴스영화를 상영할 극장을 세웠다. 경일영화문화관과 화신영화관 같은 문화영화 전용관이 들어서면서 백화점 업자들은 극장을 운영하는 것에 더해 독점적 영화제작이나 영화배급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특히 일제가 중일전쟁 장기화를 이유로 영화산업의 신체제를 천명하고 독점화로 산업재편을 꾀하자 백화점업자들은 이 독점기업에 참여하게 된다. 1942년 경성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다나카 시계점을 운영하던 다나카 사부로(田中三郞)를 중심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발족했다. 이 당시 조지야백화점의 고바야시 겐로쿠(小林源六)와 화신백화점의 박흥식(朴興植) 등이 발기인 겸 주주로 참여하였다. 또한 문화영화관을 운영하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각각 독점적 영화배급사인 조선영화배급사가 설립될 당시에 자본금 총 15만원 중 각각 2만5천 원씩을 투자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전쟁선전활동의 주요한 장소로 큰 역할을 담당했던 문화영화관들은 해방 이후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이중 화신영화관은 일반상영관으로 전용되었으며 경일문화영화극장은 폐관 되었다. * [사진](상단) 미나카이백화점 뒷편 경일문화영화관 [ 자료 ] 《 매일신보 》 , 1939.12.24. 경일 ( 京日 ) 문화영화극장 준공되어 성대히 개관 본정 ( 本町 ) 삼중정 ( 三中井 ) 백화점 뒤에 짓기 시작하든 경일문화영화극장 ( 京日文化映畵劇場 ) 은 저간에 준공되어서 23 일 개장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 이 영화극장은 반도의 새로운 문화를 소개하는 전당으로서 각 방면에서 오래전부터 긔대하던터이라 개장하는 날 각 방면 인사가 만히 와 관람하얏는데 좌석은 200 명을 수용할 수 잇고 입장료금은 어른 이십전 , 군인과 소학생은 십전씩이며 매일 오전 열시부터 개관하는데 경일세계 『 뉴 - 스 』 와 독매 ( 讀賣 ) 신문 『 뉴 - 스 』 문화영화와 밋 만화 등을 상연한다고 한다 . ( 사진은 경일문화영화극장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3.07.23. 예술가들도 총동원 , 호화롭게 전개될 징병축하행사 오는 팔월 일일부터 일주일간에 걸쳐 전개될 징병제 실시 감사의 기ᄲᅳᆷ은 전 동아에 펼쳐질 것으로 이 경축행사의 감격은 바야흐로 반도에 물 ᄭᅳᆯ듯 이러나고 잇는데 경성에서는 조선연맹 , 경기도연맹 , 경성부 등 삼연맹의 주최로 문화행사를 거행하기로 되엇다 . ▼ 팔월 삼일 오후 일곱시부터는 경성운동장 육상경기장에서 조선영화배급회사 , 조선음악협회 , 조선축음기제조협회 찬조로 음악과 영화의 밤을 개최할 터인데 제일부 음악데는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연주와 이인범 ( 李仁範 ) 씨의 국민가요 독창 , 현제명씨의 군가독창 등이 잇고 영화부에는 조선시보 , 일본 『 뉴 - 스 』 , 무적전차 ( 無敵戰車 ) 공의 신병 ( 神兵 ) 의 상영이 잇슬 터이다 . ▼ 그 이튿날 사일 오후 일곱시부터는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연극협회 , 조선문인보국회 , 조선영화제작회사 , 조선축음기제작협회 협찬으로 연극과 낭독의 밤을 열 터이다 . 영화극으로 조선해협 ( 朝鮮海峽 ) 의 상연이 잇슬 터인데 이 극에는 조영배우 일동이 출연하고 연극으로는 제일악극대 ( 第一樂劇隊 ) 의 『 격멸하고야 만다 』 일장의 상연이 잇게 되엿는데 참관 희망자는 이십육일ᄭᅡ지 왕복엽서로 조선연맹문화과에 신청하여 주기 바란다 . ▼ 그리고 미술과 문학전람회는 팔월 일일부터 칠일간 삼월 ( 三越 ) 백화점 조선 미술협회 조선문인협회 협찬으로 문인보국회 동인의 작품을 미술가들이 붓을 든 작품전시와 육해군에 관한 회화와 만화의 전람회를 개최할 터이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1.11.02. 고려영화 신작 풍년가 스틸전 ( 展 ) 정자옥 ( 丁字屋 ) 서 개최중 고려영화 신작 방한준 『 씨나리오 』 , 연출 金井成一 카메라 , 『 풍년가 』 는 저간 경성서 제작종료 하야 십월 중순경 방한준씨가 원판을 동경으로 가저가 전부 완료하야 래 ( 來 ) 오일 『 프린트 』 와 함께 귀성하기로 되엿는데 , 이에 압서 고영 ( 高映 ) 선전부에서는 지난 삼십일일부터 삼일간 확대 『 캐비네 』 백여점을 정자옥 사층 홀에 진열하고 『 풍년가 』 스틸전람회를 개최중이다 . 동 『 스틸 』 전람회는 연일 성황을 이루고 잇는데 오전 중에는 출연배우 김신재 , 최운봉 , 전택이 제씨가 『 푸로마이트 』 에 싸인을 해주기로 되어 잇는데 방금 신곡감사제 ( 新穀感謝祭 ) 로 풍년제를 각 기관에서 거행 중인 이ᄯᅢ 영화 『 풍년가 』 는 큰 의의를 가진 작품으로서 그 봉절이 자못 기대되어 잇다 . ( 사진은 스틸 전람회장 ) [ 자료 ] 《동아일보》 , 1940.05.28. 화신 ( 和信 ) 영화관 입팔일 ( 廿八日 ) 부터 개관 , 화신백화점 ( 和信百貨店 ) 에서는 뉴 - 스 영화관을 계획 중이엇는데 요즈음 준비가 되어 이십팔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엇는데 상영영화는 내외 뉴 - 스 급 문화영화 등으로 장안 종로 일대에 영화오락기관의 한 거름을 앞서 뉴 - 스영화를 일반 부민에게 제공하기로 되엇다 .
명치좌는 1936년 10월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가 명치정에 세운 최신식 영화관으로 해방 후 시공관으로 사용되었다. 명치좌가 자리한 곳은 조선철도호텔(현 조선호텔)에서 조지아백화점(롯데영플라자)을 지나 명동성당과 중앙관(중앙극장)으로 이어지는 명동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길 한 가운데 있었다. 명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간 곳인데 그 초입에는 1909년 설립된 낭화관이라는 작은 극장이, 명치좌에서 명동성당 방향으로는 1922년에 들어선 활동사진전용관 중앙관이 있었고, 명치좌에서 본정 방향으로는 1915년 설립된 닛카츠 영화의 개봉관인 희락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명치좌를 세운 인물은 명치정 마루빌딩(丸ビル)의 경영자 이시바시 료스케였다. 원적이 나가사키현(長崎縣)인 그는 일찍이 조선으로 건너와 카페와 마루빌딩을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1935년 5월 마루빌딩의 한 모퉁이 부지 100평을 14만 5천원에 매수한 후 이곳에 영화관 설립을 추진한다. 그는 우선 쇼치쿠 영화의 경성 흥행권을 획득하기로 하고 만주 관동군의 실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동생 이시바시 이치로(石橋一郞)를 통해 도쿄영화계에 접근했다. 동생 이시바시 이치로는 고바야시 도쿠지로(小林德次郞)를 통해 쇼치쿠의 중역들과 쇼치쿠 흥행권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였고, 쇼치쿠의 기도 시로우(城戶四郞) 소장, 시노야마(篠山) 차장, 이노우에(井上) 오사카지점장, 시라이 신타로(白井信太郞) 상담역 등을 움직여 이시바시 료스케가 쇼치쿠 흥행권을 얻을 수 있게 힘썼다. 기존 쇼치쿠 흥행권을 가지고 있던 송죽좌의 도쿠나가 구마이치로는 쇼치쿠 측에 부율 조정을 제의한 상태에서 미쓰코시 뒤편에 극장 신축을 추진하고 있었다. 부율 조정을 요구한 도쿠나가의 행동에 불쾌함을 가지고 있던 쇼치쿠의 중역들은 미쓰코시 뒤편 보다는 명치정 한가운데 극장을 설립하는 편이 경쟁회사인 닛카츠의 영화를 상영하는 희락관을 견제하기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이시바시 료스케와 계약을 체결하기로 한다. 결국 1935년 7월 13일 도쿠나가가 쇼치쿠 상영권을 포기하자, 이시바시 료스케는 7월 23일 도쿄로 건너가 28일 쇼치쿠 영화에 대한 선만봉절 계약을 체결했다. 이시바시는 아직 극장을 설립하기 전이라 극장이 설립되기 전까지 쇼치쿠영화를 낭화관에서 상영하기로 한다. 이로써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낭화관이 1935년 9월부터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이시바시는 극장을 신축하기 위해 용산 개성좌의 흥행권을 인수받아 설립허가를 신청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성좌가 자리했던 용산 지역이 아닌 본정서 관내에 영화관 설립을 신청하였기에 허가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정서에서는 경성의 영화관을 쇄신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 명치좌의 신축을 허가해 주었다. 명치좌는 대지 505평에 건평 856평, 총공사비 536,000원을 들여 지은 지하 2층, 지상 4층의 철근콘크리트 영화극장이었다. 다마타(玉田)건축사무소의 설계와 미키(三木)합명회사의 청부로 1935년 11월 공사에 착수, 1936년 10월에 낙성을 보게 된다. [자료] 명치좌 개관 광고(《경성일보》, 1936.10.07) 1936년 10월 7일 개관한 명치좌의 개관 프로그램은 쇼치쿠 오후나(大船)촬영소에서 제작한 다나카 키누요(田中絹代) 주연의 <여성 대 남성>(女性 對 男性)과 쇼치쿠 교토촬영소에서 제작한 하야시 죠지로(林長二郞) 주연의 <춤추는 명군>(踊る明君)이었다. 개관 이후 명치좌는 경성의 조선인, 일본인 관객 모두를 휩쓸었다. 1940년 신년 3일간 관객 집계를 보면 명치좌가 1만 6천여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2위인 희락관의 9천 8백명과는 큰 차이로 관객수를 압도했다. 명치좌가 약진하면서 조선의 영화흥행계를 주도하게 된 이시바시 료스케는 전통적으로 서양영화를 즐겨 보는 조선인 관객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 일환으로 1939년에는 박정현이 운영하던 단성사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명치좌 체인 안에 넣었다. 1907년 개관 이후 조선인의 손으로만 운영되었던 단성사가 이시바시 료스케에 의해 운영되는 것은 조선 흥행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이시바시 료스케에 의해 인수된 단성사는 명치좌의 2번관으로 전락하여 이름도 대륙극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기억해야할 부분은 명치좌와 같은 대형 토키영화관이 들어서고 남촌의 대형 영화관에 조선인 관객들이 몰리면서, 지역과 언어에 의해 구분되던 종래의 극장문화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시바시 료스케가 단성사를 인수 한 후 명치좌는 단성사가 이름을 바꾼 대륙극장과 더불어 조선영화를 다수 개봉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명치좌를 통해 개봉된 주요 조선영화만도 1939년 <애련송>, <국경>, <새출발>, 1940년 <수업료>, 1941년 <반도의 봄>, <그대와 나> 등이 있었다. [자료] 명치좌에서 개봉된 최인규 연출의 <국경>(《매일신보》, 1939.05.19) 개관 이후 조선의 영화흥행계를 좌우했던 명치좌는 8·15해방 후 적산극장으로 미군정의 관리를 받게 된다. 조선에서 가장 가치 있는 영화관이다 보니 이를 불하받아 운영하려고 손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중 미군정의 인맥을 가진 김동성이 적산 관리인이 되어 국제극장이란 이름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이 영화관이 조선영화흥행계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보니 문화예술계에서는 이 극장을 공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다. 과거 서울시민들의 각종 행사와 공연이 펼쳐지던 부민관을 해방 후 미군이 사용하면서, 시민회관이 없었던 서울시는 국제극장을 인수하여 시공관(市公館)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시민회관으로 사용하게 된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쟁터가 된 서울을 대신해 부산이 임시 수도였다. 1954년 서울로 환도하면서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소실된 국가기관을 대신할 건물을 물색할 때 국립극장으로 활용되던 과거 부민관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게 되자 국립극장은 시공관을 활용하도록 했다. 국립극장이 시공관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민회관이라는 본래의 기능과 옮겨온 국립극장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 문제는 새롭게 시민회관을 신축하고 과거 시공관을 오롯이 국립극장으로만 이용하기로 정리하면서 해결된다. 이를 위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우남회관이라는 이름의 시민회관을 짓기 시작하였고 이 건물은 4.19이후 완공되었는데 우남회관이란 이름 대신 시민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게 된다. 시공관이 시민회관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이전까지 시공관 건물은 명동예술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국립극장으로 활용된다. 명동예술회관은 본래 영화관 건물이라 연극 공연에는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다. 1961년 연극공연에 걸맞게 대대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진 후 명동예술회관은 1962년 3월 21일부터 본격적으로 국립극장의 역할을 맡게 된다. 명칭도 명동국립극장으로 불리게 된다. 1973년 10월 17일 남산 국립극장이 개관되면서 10여 년간 국립극장으로 역할해온 명동예술회관은 대한투자금융(현 대한종합금융)에 매각되어 금융업체 건물로 사용된다. 이후 이 건물은 경매에 붙여져 낙찰가에 따라서는 헐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다행이 문화관광부가 2002년 명동 국립극장을 복원하기로 결정, 2004년 400억원에 건물과 땅을 사들여 건물을 공연장에 맞게 다시 수리하여 2009년 ‘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하게 된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명동국립극장 당시의 모습(국가기록원) [ 자료 ] 《 매일신보 》 , 1939.08.20. 명치정 환락가에 대화 ( 大火 ), 작야 ( 昨夜 ), 전반소 ( 全半燒 ) 십사호 ( 十四戶 ), 손해 삼만원 십구 일 오후 십 시 십 분쯤 부내 명치정 ( 明治町 ) 이정목 오십사번지 전중심길 ( 田中甚吉 ) 의 목제 이층집에서 불이 나서 불길은 삽시간에 그 집을 다 태우고 옆집으로 올마부터 강본 ( 岡本 ), 지전 ( 池田 ), 최 ( 崔 ) 의 집과 편산 ( 片山 ) 려관 석광 ( 石光 ) 『 아파 - 트 』 추강어망 ( 秋岡魚網 ) 점의 창고 , 명치좌 『 ᄲᅩ - 이 』 방 등 팔호를 전소시키고 불길은 다시 그칠 줄을 모르고 좌등 ( 佐藤 ) 빙수점 , 추강어망점 , 북곡 ( 北谷 ) 양산점 , 연희 ( 延禧 ) 식당 등 육호를 반소시킨 후에 소방대와 부근 가정방화조합원들의 필사적인 활동에 의하여 열시 사십분쯤 진화하엿다 . 손해는 약 삼만원 가량이라고 하는데 불탄 집들은 통틀어서 집주인인 명치좌에서 일만 오천원의 보험에 들엇고 가장 집물은 제각기 보험에 든 사람도 안든 사람도 잇슴으로 자세치 안타 . 화재원인은 목하 본정서에서 조사 중인데 불난 곳이 환락가 ( 歡樂街 ) 의 중심지엿음으로 부근 일대는 갈팡질팡하는 사람과 구경꾼으로 일대 혼잡을 이루웟다 . 그런데 불난 바로 엽힌 명치좌에서는 마침 영화가 끝나기 바로 전이었는데 손님들은 불난 것을 몰낫기 ᄯᅢ문에 다행히 큰일은 업섯스나 불을 ᄭᅳ든 경성소방조 소방원 관춘웅 ( 關春雄 )( 三二 ) 은 전치 ○ 주일가량의 타박상을 입엇다 . [ 자료 ] 《 동아일보 》 , 1940.02.09. 구경열 ( 熱 ) 은 40 도 이상 , 정원초과와 위생 , 풍기 상 나뻐 , 입장요금까지 통제 요사히 본정서 ( 本町署 ) 관내에 잇는 영화극장으로 명치좌 ( 明治座 ) 를 비롯하여 기타 극장에서는 일반의 관극열 ( 觀劇熱 ) 이 고조됨을 기화로 하여 부당한 고급 요금을 증수함은 물론 정원 ( 定員 ) 이상의 사람을 입장시켜 소위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초만원을 일우어 관극 목적을 다 할 수 없음은 물논 위생 상 또는 풍기 상 조치 못한 점이 만허 경기도 경찰부 보안게에서는 그대로 방임할 수 없다 하여 미구에 입장요금의 통제는 물논 정원 이상의 입장을 엄금할 방침이라 한다 . 특히 요사히 비와 눈이 오지 안허 각지에서 화재가 발생하야 총후 물자 확보정책에 반하는 사실이 속출하는 현상에 비추어 보아 무리한 관객 수용과 입장자 초과가 화재발생의 위험성도 잇는 만큼 방화의 필요와 기타 재해 , 풍기 , 위생 각 점을 생각해서 단호한 방침을 세우기로 확정하엿다 한다 . 본정서 좌등 보안주임 담 ( 本町署 佐藤 保安主任 談 )= 극장에서 입장요금을 올리는 것은 이제부터 절대로 허가하지 안흘 방침이다 . 영화렬이 팽창한 것을 기화로 해서 입장료를 함부로 올리는 것은 업자들로서 반성해야 될 점이다 . 정원 이상의 입장에 대하여서도 풍기 , 재해방지 등 필요에서 도경찰부의 지시가 잇는대로 단호히 통제할 방침이다 . 운운 [ 자료 ] 《 매일신보 》 1941.07.25. 명치좌 기구 확충 , 송죽 ·SY 계 제휴강화 시국 하 영화의 사명이 점차 중대하여서 기 ( 其 ) 사회적 발전에 박차를 가하여 오고 있는 이ᄯᅢ 시내 명치좌에서는 이에 상반 ( 相伴 ) 한 기구 확충과 내용 강화를 꾀하여 종래는 단지 송죽의 봉절관인 관계엿든 것을 다시 확대하야 긴밀한 제휴 강화의 계약을 맷고 금후는 종전의 배가한 비약을 ᄭᅬ하리라고 한다 . 이리하여 금후 명치좌에서는 전 ( 全 ) 송죽계의 『 애트랙슌 』 은 물론 S·Y 계의 양화 상영도 일층 확장하기로 되어 그 약진은 자못 주목된다 . 松竹○ 의 책임자는 神戶 松竹座 지배인 大矢 ○ 信 씨로 결정되어 근간 부임하기로 되었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1.10.15. 『 반도의 봄 』 내월 ( 來月 ) 명치좌 봉절 명보영화의 이색편 . 신인 이병일 감독 작품 『 반도의 봄 』 은 그간 봉절권 획득의 문제로 봉절관이 결정되지 못하고 잇든바 송죽과 타협되여 내월 중순경 경성 명치좌에서 상영키로 되엇는데 송죽계로 전국 봉절하게 되리라고 한다 .( 사진은 그 한 장면 )
올해 초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의 ‘외국어 영화상’ 부문은 3파전이었다. 먼저 웃은 영화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가져간 러시아 영화 < 리바이어던 >이었다. 그리고 오스카의 승자는 폴란드에서 온 < 이다 >였다. 그렇다면 두 영화와 경합을 벌였지만 ‘강력한 후보’로 만족해야 했던 나머지 한 편은 어떤 영화였을까? 바로 < 텐저린즈: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이하 <텐저린즈>)다. 에스토니아의 자쟈 우루샤제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1992년 조지아(그루지야) 지역의 내전을 배경으로, 전쟁의 본질을 묻는다. 그렇다고 철학적이거나 심각한 질문은 아니다. <텐저린즈>는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에피소드에 가까울 만큼 간단한 구조다. 여기서 감독은 그 단순성 속에, 마치 실화 같은 사실성을 부여한다. 전쟁 초기의 분쟁 지역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 바로 <텐저린즈>다. 먼저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두어야 할 몇 가지 역사적 사실과 지리학적 상식들. 이 영화는 1992년에 조지아에서 발생한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할 즈음, 수많은 민족 국가들이 생겨났다. 흑해 연안의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위치한 조지아도 그러한 나라들 중 하나다. 하지만 조지아 내부에도 민족 문제가 있었으니, 지도에 녹색으로 표기된 압하스, 보라색의 남오세티야, 그리고 왼쪽 구석의 아자리아가 조지아로부터 분리되길 원했던 것(이 지역들은 현재 사실상의 독립 국가인 자치 공화국인 상황이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압하스 전쟁(1992~93)이며, 이때 러시아는 압하스와 연합하여 조지아와 대결했다. 조지아 지역 지도.(출처: 위키피디아) 한편 압하스 지역엔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거주지가 있다. 에스토니아는 러시아와 핀란드 사이에 있는, 발트해 연안의 작은 국가. 20세기 들어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하였으나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에 드디어 독립한 국가다. 19세기에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에스토니아 사람들 중 일부가 코카서스 산맥 근처로 이주한 적이 있었는데(2,500킬로미터 이상 가야 하는 먼 길이다), 조지아의 압하스 지역도 그런 지역 중 하나. < 텐저린즈 >의 주인공 이보(렘비트 울프삭)도 에스토니아계로, 압하스에서 목수 일을 하며 살아간다. 이때 조지아 정부의 명령이 떨어진다. 전쟁이 일어나니,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것. 마을은 순식간에 텅 비고, 이보와 마르구스(엘모 뉘가넨)만 남는다. 마르구스는 텐저린(‘작은 오렌지’인데 ‘귤’로 이해하면 될 듯. 영화에선 ‘만다린’이라고 부른다) 농장 주인. 수확을 앞둔 농장을 도저히 떠날 수 없었고, 목수인 이보는 탠저린을 담을 나무 상자를 만든다. 영화는 두 명의 군인이 이보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아메드(조르지 나카시제)와 이브라힘(카카 아레바제). 다소 무례한 그들은, 이보가 건네는 빵을 들고 사라진다. 잠시 후, 마르구스의 농장 근처에서 총격전이 일어난다. 압하스 군과 조지아 군의 충돌이 있었던 것. 이보는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군인들 중에서, 방금 자신에게서 빵을 얻어 갔던 아메드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치료해준다. 그리고 죽은 병사들을 매장하려던 중, 한 사람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니코(미샤 메스키)라는 군인이었고, 머리에 파편이 박히긴 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이보는 니코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이때부터 < 텐저린즈 >는 < 웰컴 투 동막골 >( 박광현 , 2005)을 연상시킨다. 아메드는 압하스 군, 니코는 조지아 군이었던 것. 큰 덩치만큼이나 거친 아메드는 상처가 아물어 거동할 수 있으면 니코를 죽이겠다고 공언하고, 다소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강단 있는 니코도 만만치 않게 맞받아친다. 식탁을 가운데 놓고 유치한 설전을 벌이는 두 명의 환자 혹은 군인. 이보는 그들의 적개심을 경계하며, “내 집에선 아무도 죽일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 텐저린즈 >는 전쟁터를 배경으로, 적과 아군을 넘어 다 같은 ‘인간’이며 생명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걸 역설하는, 휴머니즘 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들의 사연을 듣다 보면 전쟁이라는 거대한 부조리극이 다가온다. 압하스 군에 속해 있긴 하지만, 아메드는 체첸 출신의 용병이다. 그는 단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고, 조지아 사람들과는 그 어떤 원한이나 관계도 없다. 니코는 연극배우였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군인이 된 사람이다. 게다가 그들을 거둬들이는 이보는 압하스도, 조지아도 아닌 에스토니아 사람이다. 그의 이웃인 마르구스는 전쟁과 상관없이 “저 아름다운 탠저린들”을 버려두고 떠나는 것이 너무나 아까워서 에스토니아로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이다. 사실 그들은 모두 그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서로 죽이려 하고, 이보와 마르구스는 그들을 살리려 한다. 만약 여기서 멈추었다면 < 텐저린즈 >는 전쟁의 허망함 혹은 부질없음 정도를 설파하는 반전 영화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자쟈 우루샤제 감독은 전쟁이 비극이면서 동시에 ‘관계’라고 생각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은 전쟁 때문에 ‘적’이라는 악연을 맺게 되지만, 그들은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만나면서, 놀랍게도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보의 집에 들이닥친 압하스 군은 아메드를 조지아 군으로 오해한다. 아메드는 자신이 체첸 출신의 용병임을 증명하려 하지만, 압하스 군 장교는 아메드를 죽이려 한다. 이때 침대 밑의 총을 꺼내 든 니코는 아메드를 살리기 위해 압하스 군을 공격하고, 아메드도 니코의 엄호 아래 (자신의 아군인!) 압하스 군을 공격한다. 오로지 ‘적과 아군’으로 나뉘는 전쟁터의 이분법적 논리가 무너지는 이 장면은, <텐저린즈>가 도달하려 했던 순간이다. 영화는 비극이다. 전쟁 통에 팔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텐저린을 모두 수확하고 싶어했던 농부 마르구스는 압하스 군의 총에 맞아 죽는다. 니코도 총격전 중에 목숨을 잃는다. 살아남은 이보와 아메드. 이보는 나무 상자를 만들던 일터에서 두 사람의 관을 만들고, 아메드와 함께 땅에 묻는다. 니코를 묻는 곳은 이보의 아들이 묻힌 무덤 곁. 그의 아들은 자신들의 땅을 지키겠다고 압하스 군에 자원 입대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전쟁은 누구의 전쟁도 아니”라는 이보의 만류도 소용 없었던 것. 그는 헛된 죽음을 한 아들 곁에, 역시 헛된 죽음을 한 조지아 군의 병사 니코를 묻는다. < 텐저린즈 >가 특히 울림을 주는 건, 한국 (IPTV) 개봉시 부제였던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에 요약되듯, 전쟁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 때문이다. 특히 분단 체제를 사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교훈을 준다. 남과 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늘어가는 전쟁의 소문 속에서 공포를 느껴야 하는 우리들. 하지만 그 전쟁은, 전쟁터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의 것도 아니며 그들이 일으킨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린 서로를 미워해야 하고, 잘 알지 못하는 그들을 비난해야 한다. 전쟁보다 더 두려운 건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맹목적인 증오이며, <텐저린즈>는 전쟁이라는 적대 관계에 의해 유린되는 인간 관계와 무의미하게 파괴되는 생명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