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하늘 아래서
- 감독
- 오조희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오한희, 셰린 사이다, 자밧 잘리, 에밀리 하우스, 하트무트 폴레
사진: “ 71 Fragmente einer Chronologie des Zufalls ”, IMDb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종종 같은 꿈을 반복해서 꿀 때가 있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과 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같은’ 꿈이란 것에 몇 가지 패턴이 있다는 걸 발견하는데, 이를테면 다른 장소, 다른 시간 안에서 같은 서사가 진행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서사의 인과가 불분명한 채로 이미지만 반복되어 같은 꿈으로 남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험에서 남겨진 찝찝한 신비로움은 꿈에서 깨고 난 ‘상태’ 그 자체에 대한 공통된 감각이라 입을 모았다. 마치 어마어마한 양의 끈적거리고 미끄덩거리는 무언가가 나를 결박하고 있는 것만 같던 그 찝찝함은 아마 삶에 대한 미스터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꿈 속 이미지의 실체보다는 이미지를 인식한 후의 상태가 보다 더 큰 것을 남겼다. 파편화된 이미지는 여백을 활성화 시키고 그 여백 사이로 이미지를 인식한 자만의 사유가 들어갈 틈이 생긴다. 이때 꿈은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니기도 하다. 미하엘 하네케의 <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 >(1994)은 스무 살 무렵 어느 극장의 기획전에서 본 영화이다. 하네케의 영화는 매섭고 잔인한 구석이 있어 구태여 찾아 보거나 크게 좋아하지 않았더랬다. 하지만 ‘우연의 연대기(Chronologie des Zufalls)’와 ‘71개의 단편(71 Fragmente)’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내 멋대로 어떤 이미지들을 나열하게 만들어 관람을 미루지 않고 극장으로 향하게 한 이유가 됐다. (덧, 관람 후에 이 영화가 폭력의 3부작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았고, 역시 제목만 보고 상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의 영화였지만서도)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은 우연을 연대기 순으로 펼쳐 보임과 동시에 그 우연들의 연대가 일으킨 어떤 비극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진: “ 71 Fragmente einer Chronologie des Zufalls ”, IMDb 영화는 흩어진 71개의 씬(조각)들을 시간(연대기) 순으로, 어떤 비극이 초래되기까지 일상의 면면들을 다소 건조하고 냉랭한 온도로 보여준다. 비극을 점점 앞당기는 파편들 중 막스(루카스 미코)가 올려 보던 고층 빌딩과 차가운 물이 고인 바닥을 연이어 보여주던 두 컷의 서스펜스는 무섭게 남아있다. 그의 마음에 죽음이 어떤 형태로 방아쇠를 당길지 내내 아슬아슬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마음은 라두(가브리엘 코스민 우르데스)라는 소년이 불완전형의 희망을 품고 국경을 건널 때의 모습과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러 차로 향하던 막스의 모습과 대조되어 그들을 부감으로 내려다 보던 우리에게 불완전했던 희망을 비극으로 완성시킬 권한과 이에 대한 냉소적 시각을 함께 부여한다. 이렇게 71개의 씬들이 담고 있는 서로 전혀 무관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뉴스의 한 꼭지, 한 문장의 세그먼트로 그저 둔감하게 마무리된다. 전쟁 속 아비규환의 모습들과 사실 여부를 떠나 미디어의 콘텐츠로 소비될 뿐인 세상의 크고 작은 소식들이 영화 안에서 계속해서 중계되었는데, 지극히 평범했던 일상 또한 나란히 그 안에 편입돼 버리고 만다. 파편화된 서사의 나열을 통한 다각적 프레이밍 형식은 채널의 소유권을 관객에게 이전시키며 영화 속 인물들의 퍼즐을 현실의 스펙터클로 자리잡게 만들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관객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흩어진 퍼즐들 사이의 암흑을 비집고 들어갈 사유의 주체가 결국 관객이라는 지점에서, 이 영화는 막스와 라두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이 영화의 미디어 속 폭력을 응시하는 데에 수동적 소비의 지양을 재촉하며 부디 오늘 먹을 물고기는 제발 스스로 던진 그물로 건져 올리라고 권하는 도덕적 질문보다도, 영화가 취한 형식적 경로가 영화에 대한 큰 인상으로 더 깊게 남아 있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가 모든 면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평범한 일상에 대한 세심한 설계로 외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미시적 접근을 통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내적 시각의 개입을 거시적으로 소유하게끔 설계한 영화라는 점이, 내가 감응하는 영화의 형태를 그리는 데에 있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진: “71 Fragmente einer Chronologie des Zufalls”, IMDb ( 좌 , 우 )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도 여전히 구조적으로나 인과적으로 이미지 사이에 발생하거나 끼어들 수 있는 틈 혹은 여백을 중요하게 여기며 지내고 있다. 조금 더 과격하게는 집착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삶의 무작위성을 내포하고 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또 여백이라는 것을 생성하기 위해 이토록 애를 쓰는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우연한 것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을 때가 잦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연의 연대기로 설명해야만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 환상과 희망이랄 것이 그렇게 거창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작은 것들의 프랙털을 파고드는 취미를 생성시킨 정도였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동양화에서는 빈 공간의 여백을 먹이 지난 자리의 존재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로 다룬다. 그 사이에서 이미지와 여백이 관계하며 획득하는 힘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가 동양화에 매료되어 공부를 했던 이유기도 하다.) 어떤 이유든 간에 기능하며 존재하는 모든 관계들이 여백과 함께 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늘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니기도 한 종류의 감각들을 무작위적으로 쫓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틈에 자리잡았던 사유들이 쌓이고 쌓여 보이는 이미지와 함께 불확정적인 어떤 엔딩으로 향한다. 어떤 엔딩으로 향할 때 이 모든 이미지들의 연대가 기능하도록 실현시킨다는 건 정말이지 멋진 일이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2024) 중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글을 쓸 때 이야기와 함께 인물들이 머리 속에서 춤을 추고 있을 때가 있다. 그들이 추는 춤에 나까지 신이나 음악을 틀어주는데 간혹 음악을 잠깐이라도 잘못 틀어버리면 어느샌가 그들은 사라지고 없다. 올해 초, 지난해 촬영한 두 번째 장편을 편집하고 있었다. 삶의 파편들이 추는 춤에 맞춰 음악을 트는 일이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을 떠올린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 파편들이 기능하며 관계 맺었던 연대가 떠올랐다. 그 경로를 통한 무형의 엔딩은 관객만이 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영화는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닌 것이다. 같은 꿈이 남긴 그 찝찝한 신비로움은 어쩌면 무작위적 삶을 견뎌내는 데 피할 수 없는 감각처럼 느껴진다. 우연의 연대기적 파편 속에서 누군가는 지금 국경을 건너고 있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있으며, 누군가는 총기를 훔치고 있고, 누군가는 고독한 밤을 이기지 못해 딸에게 전화를 걸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찝찝함 속에서도 신비로움을 느끼고 서로를 궁금해하고 서로를 그리워한다. 그러곤 다시 71개 혹은 그보다 많은 하루가 시작되겠지. <이어지는 땅>(2022) 중 조희영(영화감독) l 곤혹스런 사태를 받아들이는 데 특출나 영화를 만들고 있다. <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2024), < 이어지는 땅 >(2022) 등 연출.
개항장에 극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이후, 이에 영향 받은 조선인들도 극장을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은 황제가 사는 공간이라는 상징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 보니 한성의 극장 역시 황실 의례와 관련해 시작되었다. 조선인이 한성에 설립한 최초의 상설극장은 대한제국 황실에서 1902년 세운 희대(戲臺)이다. 희대는 고종황제의 망육순(望六旬) [필자 주: 육순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51세를 가리킴.] 과 어극(御極) 40년을 기념하는 칭경예식(稱慶禮式)을 위해 봉상시(奉常寺) 내에 500석 정도의 규모로 설치되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반영하는 원형의 2층 건물로 계단 형태의 객석과 직사각형 모양의 무대를 갖추고 있었다. 황실희대는 통칭 ‘협률사(協律社)’ 혹은 ‘원각사(圓覺社)’라고 불렸다. 이는 희대를 빌려 연희를 공연하던 회사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칭경예식의 날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1902년 9월 토사병이 유행한다. 칭경예식은 다음 해 4월로 연기되었으나, 다음해 4월에도 영친왕의 천연두 발병 등을 이유로 또 다시 연기된다. 이후 칭경예식은 유야무야 되거나 약식으로 치러진 것으로 보인다. 칭경예식을 위해 많은 예인들이 한성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칭경예식에 소용하는 예인들을 관리하던 삼패도감(三牌都監)의 장봉환(張鳳煥)과 모종의 세력이 합세하여 연희 회사를 세우고 이름을 협률사라 불렀다. 협률사는 칭경예식에 참여하기 위해 한성에 올라온 남녀 예인들의 공연을 희대에 올렸으며 잠시 활동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활발히 전개되던 협률사의 희대 공연은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1904년 3월경 폐지되었다. 이처럼 협률사는 황실 극장인 희대가 만들어지고, 칭경예식을 위해 전국에서 올라온 예인들을 이용하여 돈을 벌어보고자 했던 일군의 사람들이 예인을 관리하던 삼패도감의 장봉환과 함께 수익 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협률사의 등장과 더불어 비슷한 전문 연예단체들이 생겨나면서, 이들 단체에서 극장을 대여하여 흥행을 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동대문활동사진소를 빌려 사용한 광무대의 박승필을 비롯하여, 박춘재, 김재종 등 유명 연예패들과 임성구, 이기세, 윤백남 등 신파극단을 이끌던 인물들이 극단과 더불어 연흥사, 원각사, 개성좌(開城座) 등의 극장을 함께 운영했다. 러일전쟁 이후, 극장을 이용하여 수익도 얻고 선전장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협률사가 복설(復設)된다. 다방면의 노력 끝에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 2월 하순에 복설된 협률사는 김용제(金鎔濟), 최상돈(崔相敦), 고희준(高羲駿)이 조직한 순 사영(私營)의 연예회사였다. 당시 협률사의 운영비는 친일조직인 ‘일진회’(一進會)가 댔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려는 세력이 후원했다. 협률사의 복설은, 러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한 일본이 조선인의 관심을 흥행물에 돌리기 위해 강구한 조치였다. 따라서 협률사를 혁파해야 한다는 의견이 속출했다. 봉상사(奉常司) 부제조 이필화(李苾和)의 상소로 결국 고종은 1906년 4월 협률사를 혁파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일본인 임차인이 오히려 위약금 25만원을 청구하면서 협률사 혁파는 흐지부지된다. 1907년 2월,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에서 협률사가 운영하던 희대를 사용하여 각종 연희를 올리고 활동사진을 상영한다. 이어 1908년 7월 26일, 이완용(李完用)의 비서로 일제의 조선침략에 동참하고 있던 이인직(李人稙)과 박정동(朴晶東) 등이 경시청으로부터 희대를 연극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고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연희를 시작했다. 원각사에는 김창환(金昌煥)을 위시한 창부(唱夫) 40명과 가기(歌妓) 24명, 총 64명의 예인(藝人)들이 있었다. 1911년 10월, 한시적으로 《조선신문》 언문판이 발간된 적이 있었다. 그 기념호에 실린 「연극의 월조(月朝)」라는 글에는 경성고등연예관에서 상영한 <엄비국장(嚴妃國葬)> [필자 주: ‘엄비(嚴妃)’로 알려진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장례를 찍은 실사를 일컬음.] 과 원각사에서 개연한 ‘금강산 환등 대회’가 소개되어 있다. △ 일젼에 엄비국장이라ᄂᆞᆫ 활동광고를 돌이기에 본긔자가 일ᄎᆞ 구경 즉 쳐량 감상도 나고 조션 고속된 졀ᄎᆞ도 젼 야 구경치 못 ᄉᆞᄅᆞᆷ의 안목에 가히 흥감ᄒᆞᆯ 만 즉 연극 즁 활동ᄉᆞ진은 더욱 진젹 거동을 구경ᄒᆞᆯ 만 다고 탄식 얏더니 ... △ 원각 에셔 금강산환등을 갈 가 단 다 기에 슈삼 지긔를 잇글고 완상 즉 금강산 일만이쳔봉이 완연이 안즁에 나렬 지라 ( 중략 ) 일 사십여쳐를 완상 니 △ 본 긔 가 의 금강을 구경 지 우금 삼십이년이라 영숙 산쳔과 긔이 고적이 반가온 마음이 졀로 나고 조션에도 여차 셰게에 랑 만 명산 쳔이 잇슴을 감탄 엿슴으로 연극장 쥬무 를 방문 야 그 환등의 력사를 무르니 리희직 ( 李熙直 ) 김진우 ( 金振宇 ) 량씨 본래 지사인 사진사 신장균 ( 申章均 ) 씨와 동행 야 금년 오월에 금강산 탐험 로 쳔신만고를 불구 고 외산 명승고젹을 촬영 야 환등에 삽입 야 구경치 못 동포의 안공에 구경케 니 삼군의 지긔도 흠탄 거니와 구경 시 동포도 응당 감상이 게시 고 신션 졍신도 환셩 지로다 1 위 기사에서 기자는 <엄비국장>에 대해 ‘진적한 거동을 구경할 만하다’고 언급하는 데 그친 반면, 140여장의 금강산 사진에 대해서는 극장 주무자(主務者)를 만나 환등을 제작, 상연한 내역까지 물어 듣고 감탄 어린 소감을 늘어놓는다. 이는 <엄비국장> 상영보다도 ‘금강산 환등 대회’가 조선의 관객들에게 더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켰음을 의미한다. 실제로도 ‘금강산 환등’은 조선인 관객들의 환영을 받아 원각사에서 장안사로 옮겨 흥행을 이어 갔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관객들은 왜 활동사진보다 환등에 더 흥미를 느꼈을까? 당시 활동사진 설명은 전설(前說)뿐이었다. 다시 말해, 간단한 설명 후에 10분 내외의 활동사진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필름은 대부분 쇼트 몇 개를 일정한 속도로 배열한 것이었고, 그 속도에 맞춰 변사가 설명하는 중설(中說)은 당시로써 구사하기 힘들었다. 반면 환등은 하나의 사진을 변사(설명자)가 자세히 풀어줄 수 있었다. 요컨대 관객들은 활동사진보다 환등의 사진을 보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활동사진을 상영할 때나 환등을 비출 때나 다 변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이 탄생하고 나서야 조선에 변사가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경성고등연예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변사의 연행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황실희대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하는데,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이 변사들에게 활동사진 연설의 방침을 전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이다. 사진 2. 변사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애국부인회 활동사진 기사(《황성신문》 1908년 6월 24일자.) 위 사진의 기사는 경성고등연예관에서부터 변사 연행이 본격화되었다는 일반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조희문 역시 경성고등연예관 설립 이전에도 직업적 변사는 아닐지언정 일시적으로 활동사진 설명에 나선 인물이 있었으며, 단성사, 연흥사, 장안사 등 조선인이 세운 극장이 탄생하던 1907~8년 무렵에는 이미 조선인 변사도 나름의 위치를 차지했음을 여러 명의 변사가 실증한다고 주장한다. 2 나아가 위 기사는 변사의 시조로 불리는 우정식(禹正植)이 원각사에서부터 변사 활동을 시작했다는 심훈(沈熏)의 증언도 뒷받침 해준다. 기사에 언급된 관인구락부는, 상술한바 원각사의 전신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변사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극장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된 것을 계기로 등장했으며, 관인구락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서양 혹은 일본의 선진 문물을 조선의 관객들에게 소개해 주는 강사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문물을 경험해 본 관리 중에 선택된 인물들이 주로 변사로 활동했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기사에 언급된 인물 중 정운복(鄭雲復)은 오사카상업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영국유학과 구미 각국 시찰을 경험했던 인물로, 일제의 조선침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언론 계통의 인물이었다. 김상연(金祥演)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에서 활동한 바 있는 언론 계통의 친일 관료였다. 한석진(韓錫振) 역시 《황성신문》과 그 후신인 《한성신문》에 관여했다. 이처럼 최초의 변사들이라 할 만한 인물들은 서구문물을 경험한 이들로서, 신문물을 조선에 소개하고 근대화를 주장하는 웅변가의 역할을 수행했다 할 수 있다. 1910년을 전후하여 유광관(有光館)이라는 활동사진과 연극장으로 사용되던 원각사는 아쉽게도 얼마가지 못해 영업을 중지했으며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1) 「연극의 월조」 《조선신문》 1911년 10월 1일자. 2) 조희문, 『한국영화의 쟁점 1』, 집문당, 2002, 130쪽 참고. * 본문은 필자의 『조선영화의 탄생』((주)박이정, 2018) 40~42, 209~211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사진 1(글 상단). 황실희대(원각사)의 외관 [자료] "논설: 술객문", 《황성신문》 1903.01.17. ◎歲月 이 荏苒 야 於焉之間 에 陰曆年終 이 又迫 니 歲暮天寒 에 北風其凉 고 梅花淡屋 에 雪月 이 滿庭 이라 有鄕居一客 이 孤枕冷燈 에 耿耿無寐 야 起拂布袍 고 徘徊月庭 이라가 負手緩步 야 行訪一名士之家 러니 適値諸名士 ㅣ 與京鄕友朋 으로 爛漫會飮 이라 客 이 亦參座末 이러니 數盃酒闌 에 滿座酒人 이 詼諧談笑 로 各自論懷 더니 一人曰 吾輩 從今以後 로 無用於世 로다 何事 를 爲業 지 欲看書而懶厭 고 欲聚財而無資 니 除非親舊之尋訪 이면 終日老屋 에 無聊消遣 니 沁沁難耐 일셰 子 有何消日 고 一人曰 吾亦 云云 일셰 近日 某友家 에셔 西廂記 를 借來 얏더니 此亦語錄 을 難解 야 滋味 가 殊沒 일네 一人曰 我 某友某友 로 一分 기쑤시기로 漿羹飯 을 每夜 喫之 지 然 이나 細雨 도 濕衣 라고 그럭저럭 十餘元 을 見失 네 一人曰 吾儕 가 今夕 에 花鬪 나 이볼가 一人曰 且置 고 協律社 귀경이나 가셰 壯觀 일네 眞壯觀 일네 春香 이와 御史出道壯觀 일네 一人 이 顧謂鄕客曰 彼公 은 무엇 려 京來 나 朝飯夕粥 喂牛突 에 進士主 가 上福 이지 一齋郞 一主事 나 宕巾味 를 甞 랴고 旅舘客苦 何如 고 無錢 면 쓸 업 鄕客曰 아모리 無錢 야도 令監 이나 進賜 셔 數生日 만 苦待 오 說麼執事 네가 數生 야 大臣協辦 地境 에 此漢區處 아니 가 一人曰 數 무슨 數 인가 世上貌樣觀之 니 어늬 時節數生 길지 鄕客曰 齋郞借啣 은 何事故 로 아니터지 고 沓沓 여 發狂 이오 一人曰 必也 터지지 면셔 終宵諧謔 다가 聞鷄罷歸 야 爲余道其問答之說 일 余 ㅣ 曰 悲夫 라 彼好地閥 好家數之諸人 이 若在舊日則 淸班華秩 과 監留宰相 이 卽其倘來之職而不幸當此時節 × 야 官雖淸要 나 無一權利 고 如彼冷寞 이 極甚可咄 니 雖一藝一業 과 一文一字 라도 務欲勤苦做工 야 進就學識 然後 可不受他日之欺侮 어 不此之爲 고 閒游懶怠 야 只以骨牌 花套 西廂記 演戲場之類 로 以爲沁沁破寂之資 니 非但此等名士也 라 我韓全國 에 從前 兩班儒士爲名之人 은 擧皆如彼 고 鄕客 은 尙此以依賴求乞於宰相之門 으로 錮筋着髓 야 牢不可破 니 如此細瑣 가 雖若無關係於國勢 나 國勢之萎靡衰頹 에 日漸濱危 며 日漸墜險 은 實因此而然也 니 豈可謂之以細故而不深憂也哉 아 嗟乎咄哉 로다 [자료] "논설: 원각사 관광의 향객정담", 《황성신문》, 1908.10.13. ◎有兩個鄕客 이 來遊京師 라가 一夕 은 月色 이 如晝 야 九街 가 如洗 라 携手同伴 야 料理店 의 盃酒 를 沽飮 고 因 야 圓覺社 의 演劇 을 觀光 고 拾二點鍾 에 歸來旅舘 야 該社情况 을 互相評論 이 如左 더라 甲曰余 가 在鄕 야 新聞 을 閱覽 니 大韓新聞社長李人稙氏 가 我國 의 演劇 이 淫靡不雅 것을 改良 기 爲 야 圓覺社 를 設立 고 人情風化 에 有助 歌舞 로 倡夫 와 妓女 를 敎導 다 얏스니 氏 社會上開明紳士 로 拾餘年海外文明國 에 滯在 야 文明空氣 를 吸収 며 文明學術 을 鍊習 얏고 其歸國也 에 新聞 의 機關 을 掌握 며 小說 의 著術 을 發行 얏스니 國民 을 開導 고 風俗 을 改良 事業 에 對 야 宜乎好個方針 을 研究發明 지라 於是乎演劇 을 改良 主義 로 圓覺社 를 設立 이니 吾儕 가 思惟 기를 該社演劇 에 乙支文德姜邯贊 의 英雄事業 이나 論介桂日香 의 貞烈芳跡等 으로 新演劇 을 發明 야 國民 의 思想 을 鼓發 이 有 리라 얏더니 今 에 該社情况 을 目覩 則猶是舊日風流 에 沈靑歌 、 春香歌等而已 니 何者 로 演劇改良 이라 謂 지 此 로 開明紳士 의 事業 이라 謂 난지 知得 키 難 事 로다 乙曰李人稙氏 의 事業 은 姑舍 고 該社 에 對 야 同情贊成 者 가 誰也 오 면 皆我國上流社會 에 高等官人 이오 昨日今日 에 聯翩觀覽者 誰也 오 면 現政界 에 某某大官 이라 其政治改良 도 圓覺社 의 演劇改良 과 如 지 不知 거니와 目今我韓 에 國步 의 艱棘 과 民生 의 塗炭 이 何如 境遇 에 在 가 若個有志者流 가 國家思想 과 國民義務 로 敎育 을 倡導 다 實業 을 奬勵 다 야 家產 을 傾 고 心力 을 竭 야도 目下經濟 의 困難 으로 一個事業 도 略無起色 니 其舌 이 獘 고 其淚 가 枯 야 晝夜憂嘆 情况 을 凡有人心者 ㅣ 孰小矜惻 이며 加之地方騷擾 가 經年不息 야 一般同胞 의 死亡 이 不絕 고 流離 가 相續 情况 은 骨爲之冷 이오 鼻爲之酸 이거 當局諸公 은 此 를 不聞不知 지 惟是演劇塲 을 愛好 고 顧存 야 無日不額額 니 諸公 의 意向 은 維新 의 功業 을 已建 고 太平 의 福樂 이 無窮 줄노 認 홈인지 果然諸公 으로 여곰 內閣 을 愛 홈이 圓覺社 를 愛 홈과 如 면 演劇改良 보다 政治改良 의 實效 가 有 지어 胡爲乎內閣 을 愛 홈이 圓覺社 愛 만 不如 지 此 도 知得 키 難 事 라 고 長吁浩歎 타가 一大白 을 滿引 고 頹然而臥 야 東方 의 旣白 을 不知 얏다 云 有人 이 其談話顚末 을 報道 其言 이 雖涉於愚戇 이나 其意 가 實出於憂憤故 로 爲之記載如右 하노라
정말 몰랐다. 일 년에 한 번꼴로 쓰는 칼럼에 또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이야기를 쓰게 될 줄은. 지난 칼럼들을 돌아보노라니 새삼스럽기도 하다. 2010년 5월 조희문 전 영진위원장이 주도한 ‘독립영화 관련 기관 위탁 및 지원 사업 파행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한 뒤, 이듬해 영진위 직영관 인디플러스가 문을 열 즈음 쓴 칼럼에서도 “연이어 영진위를 언급하게 될 줄을 몰랐다”고 나는 썼다. 독립영화전용관 위탁사업 주체를 인디스페이스에서 시네마루로 변경한 과정은 물론, 수행평가 결과가 ‘미흡’했던 시네마루 운영에 대한 어떤 평가도 없이, 당시 문화관광체육부 장관이었던 유인촌 씨 말 한마디에, 영진위 직영으로 급작스럽게 프로그래머도 없이 개관한 인디플러스가 불안했던 게 사실이다. 2011년 4월에 쓴 글에서 인디플러스 출범에 우려 섞인 기대를 표했지만, 기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구경꾼 심정이었다. 나는 독립영화를 만드는 이도 배급활동가도 아닌 관객일 뿐이니, 직영관이 정 마음에 안 들면 영화제에서 부지런히 챙겨보면 되려니 여겼다. 기대와는 달리(?) 인디플러스는 제법 잘해 나갔다. 개관 뒤 부임한 허경 프로그래머는, 시네마루를 보이코트했던 독립영화인들 사이에 팽배했던 영진위를 향한 불신을 녹이려 열심히 뛰었고, 스태프들과 함께 정성스레 기획전과 상영회를 꾸렸다. 개관한 지 일 년 남짓 지나자 스태프들이 노력한 결과가 보이기 시작했다. 독립영화 공동 지대였던 서울 강남권에 인디플러스를 중심에 둔 관객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또, 예산 걱정을 덜 해도 되는 운영 안정성 덕에, 비대중적인 문제작들도 극장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2012년 5월에는 민간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도 돌아왔다. 예산 일부를 영진위에서 지원받는 성북문화재단 아리랑 시네센터까지 제 몸에 맞는 옷을 찾듯, 지역 공동체와 관객을 위한 독립영화전용관 역할을 발견하는 실험을 따로 또 같이 해나갔다. 독립영화 특별전 프로그램을 상영하는 한국영상자료원이 개봉작을 주로 거는 세 극장을 보완해 주었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운영위원으로 2011년 6월부터 인디플러스 운영위원회에 참여하며 겪은 첫 시련은 2011년 12월 개봉한 < 잼 다큐 강정 > 인디플러스 상영불허 사건이었다. 영등위 심의를 문제없이 통과하고 영진위 소위원회에서 예술영화로 인정받은 작품을 ‘정책적 고려’ 때문에 직영관 인디플러스에서만 틀 수 없다는 것이, 운영위원회 상영 의결 실행에 제동을 건 영진위의 입장이었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무거운 사례로 안팎의 비난이 거세지자, 영진위는 “인디플러스 상영을 불허한 적은 없고 미루었을 뿐”이라고 말을 바꾸며 뒤늦게 상영불허를 철회했다. 두 번째 고개는 결국 넘을 수 없었다. 인디플러스 2주년이 다가오면서, 모두 계약직이던 스태프들의 고용 문제가 불거졌다. ‘공기관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이라는 새 정부 시책에 걸맞게 전원 무기 계약직 전환을 요구했지만, 부산 이전을 앞두고 있던 영진위는 서울에 잔여 인력을 많이 남길 수 없어 인디플러스를 또다시 민간 위탁할 예정이며 ‘인사, 예산 및 경영평가 등 경영상의 이유’ 때문에라도 인디플러스 스태프들을 더 이상 직접고용할 수 없다 했다. 영진위는 계약 해지를 빌미로 허경 프로그래머를 해고(법률 비전문가인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귀책사유가 없는 노동자의 근로계약 갱신기대권을 인정하지 않고 계약 만료 때 정당한 사유 없이 해고하는 것을 불법으로 보는 판례가 많았다)했고, 나머지 스태프들을 파견직으로 전환하고 2~3개월씩 근로 계약을 기형적으로 연장하며 2013년 극장 운영을 파행으로 몰고 갔다. 이토록 불안한 노동조건을 조성하는 핑곗거리로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적용 외에도, 2013년 하반기 중 ‘독립영화 배급지원센터’ 재설립, 배급지원센터 주체에 인디플러스 사업을 위탁하겠다는 독립영화전용관 사업변경안을 들고 나왔다. 조직 운영과 정원?인사 관리에 관한 사항들을 영진위가 임의로 정할 수 없고, 기획재정부가 정한 경영지침에 따라야 한다지만, 공공기관의 조직 및 인력 운영에 대한 경영지침은 직영 결정 전인 2007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원승환, 「한국영화 블랙박스-2년 전 약속은 공수표였나」, 씨네21 905호). ‘독립영화의 안정적 상영 및 활성화 기여’를 목적으로 조직 및 인력이 허용하지 않지만 (아무도 바라지 않던) 직영에 나섰고, 2년 동안 당면한 고용 문제를 해결할 노력은 전혀 않고 때가 오자 스태프들을 영진위에서 내친 뒤, 부산에 이사하게 되었으니 귀찮은 혹 떼어 내듯 극장 사업도 정리하겠다는 속내로만 비쳤다. “더 이상 직영 의지도 능력도 없는 영진위 독립영화전용관 사업의 들러리가 되”고 싶지 않아 동료 운영위원들과 사퇴의 변을 발표하고 인디플러스 운영위원회를 그만두었다. 극장에서 자주 뵙던 관객들과 스태프들께 죄송스러웠지만, 법적 지위가 보장된 영진위 소위원회가 아니라 자문기구에 불과한 전용관 운영위원회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독립영화 ‘배급지원센터’ 사업명은 ‘유통지원센터’로 바뀌었고, 2013년 7월 4일 영진위는 ‘독립영화유통지원센터 설립 제안 공청회’를 주최했다. 한데, 9월 예정이라던 위탁 전환이 진행되는 기미가 영 없었다. 11월에야 소식을 들으니, 2013년 중 인디플러스 사업 민간 위탁 전환 및 유통지원센터 설립 자체가 취소되었단다. 뿐만 아니라, 2014년 영화발전기금에도 독립영화유통지원센터 예산은 반영되지 않았고, 독립영화전용관 사업 예산도 동결되었다 했다. 9월에 전임 위원들의 임기가 끝난 영화문화다양성소위원회는 11월까지도 신임위원을 임명하지 않고 방치된 상태였다. 독립영화단체, 영화제들이 지원받는 민간단체역량강화지원 사업도 ‘일몰제’ 적용으로 해마다 예산이 줄고 있는 형편이다(이 와중에 부산시가 설립한다는 아시아영화학교 국비 예산 25억 원을 내년도 영화발전기금에 편성하며 기획재정부가 정부예산 예비심사를 완료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갈팡질팡하며 주먹구구식으로 버티는 영진위 사업을 2년쯤 나름대로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독립영화 진흥정책’이 과연 실존하는지 심각히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독립영화유통지원센터 설립 논의에 참여했던 독립영화협의회, 영화공동체, 독립영화전용관 확대를 위한 시민모임, 인디포럼 작가회의, 한국독립영화협회 등 독립영화단체들도 유통지원센터 예산 미반영 등을 우려하며, 지난 11월 20일, 2014년 독립영화정책계획 질의서를 영진위에 발송한 뒤 김의석 위원장을 만났다. 이에 영진위는 2014년 독립영화전용관 인디플러스와 독립영화유통지원센터 사업 계획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인디플러스 프로그램 부분과 시설운영부분(영사, 매표)을 분리하여, 시설운영부분은 지금 인디플러스가 세 들어있는 롯데브로드웨이시네마에 위탁하”겠단다. 이미 프로그래머 해고 뒤 인디플러스 프로그램 부분을 별도 위탁하며 파행 운영 중인데, 멀티플렉스인 롯데브로드웨이시네마에 영사·매표를 찢어서 위탁한다면 극장은 어찌 될까? DCP 디지털 영사로 일원화된 멀티플렉스 상영과 다양한 상영포맷을 지닌 독립영화 상영이 다른 만큼, 독립영화전용관 상영에 매진하는 영사팀은 지금처럼 따로 있어야 마땅하다. 또, 독립영화 관객 커뮤니티를 공들여 성장시킨 인디플러스 운영팀이 멀티플렉스 서비스 매뉴얼로 운영되는 브로드웨이시네마에 흡수된다면, 독립영화 관객을 위해 특화된 서비스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독립영화단체들은 12월 5일 배포한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영화정책 설정 방향에 대한 독립영화인 공개의견서’를 통해, 영진위의 독립영화전용관 분리 위탁 운영안이 올해 계속된 독립영화전용관 운영 파행과 유통지원센터 사업 불발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며, 독립영화인과 관객을 만족시키고 독립영화 문화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는 운영안과 종합적인 해결책을 다시 요구했다. 2013년 한국 영화관객 2억 명을 돌파하게 한 큰 동력이 영진위 직원들의 오랜 헌신과 열정임을 그래도 나는 여전히 믿는다. 내년 시행 예정이라는 독립영화 전문펀드 부문을 제외하면, 영진위 사업예산에서 1할 남짓을 차지할 뿐인 독립영화 진흥사업의 묵은 숙제들을 풀기 위해 부산에서 많은 분들이 고민 중이시리라. + 이 글은 2013년 12월 23일자로 작성되었다. 그 뒤 국회가 최종확정해 통과시킨 2014년 정부예산안에는 독립영화유통지원센터 사업예산이 역시 반영되지 않았고, 영진위 9인위원회는 인디플러스 프로그램/시설 운영 분리위탁안을 승인했다. 분리위탁은 운영 분야 스태프들의 기존 계약이 끝나는 5월 이후 시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