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계
- 감독
- 강윤성
- 제작년도
- 2025
- 출연
- 변요한, 김강우, 방효린, 임형준, 양세종, 이무생
<그래도, 사랑해.> 중 /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1년간 관객을 찾은 영화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올 한 해 영화가 불러온 고민들을 정리합니다. “흔히 문화의 역할이란 지하철역 구내에 보다 세련된 의미있는 장식물이나 걸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네 삶에서 문화란 그런 작은 디테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다 본질적인 것, 즉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의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문화의 역할입니다.” - 이창동 , “처음 드리는 인사말”, 문화체육관광부 열린장관실, 2003년 3월 14일 영진위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는 1,0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으며, 2004년 이래 최초로 연간 관객 수 1억 명 시대가 붕괴한 해다.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종말 ...... 물론 이건 시장 얘기다. 업계에 발을 담그지 않은 나로서는, 그저 인상적으로 보았던 작품들을 주루룩 고른 다음, 개별 작품들로부터 몇몇 자질을 선별해 자율적으로 테마화한 뒤, 안온하게 정리해도 그만일 것이다. 그렇지만 비행기 타본 기억이 까마득한 토종 한국인이자, 비평가 이전에 관객일 수밖에 없는 나는 OTT가 새롭지 않은 이 시기에도 어두운 극장에서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말하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모양새를 자막 없이 보고 듣는 일상의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다(애국자 아닙니다). 통계를 근거로 한 종합적인 분석과 전망이라면 이미 숱한 기사와 글이 많으니, 엄격한 틀은 내려놓되 몇몇 영화 안팎으로 사적인 근심과 관심을 조금 얹고 싶다. 올해의 한국영화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거나 화가 나는 경우는 있었지만, 아니 많았지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보았던 영화는 김준석 의 < 그래도, 사랑해. > 뿐이다. 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의 향기를 풍기며 사랑스럽고 여유롭게 걷는다. 올해 한국영화들이 내게 신통치 않았던 것은, 대개 상업영화라면 지독할 정도의 장르적 콘셉트가 부여되어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고, 한편으로 독립영화판에서는 형식적 장치에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반대로 소재에 기대어 특정 환경에 놓인 인물의 처지를 강조하며 관객과 스크린 사이에 두툼한 방벽을 세웠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가 아는 선에서 <그래도, 사랑해.>는 2025년의 한국영화들 중 현실과 영화가 자연스레 길항할 수 있으며, 그 사진적 이미지에 기반한 20세기적 시청각 경험의 아름다움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 거의 독보적인 사례다. 게다가 이 영화의 세계는 내가 쓰는 언어와 내가 갈 수 있는 장소와 내가 어쩌면 만날 수 있을 법한 사람들에 의해 전달되기에 친밀함마저 느끼게 된다. 지금 한국영화에 필요한 것은 난장과 자극이 아니라 이런 기복 없는 흐뭇함과 상쾌함이 아닐까? 물론 <이혼숙려캠프>(JTBC)가 인기 좋은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부부가 주인공인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욕지거리와 패악질의 향연이 아니라 우리네 삶 여기저기에 놓인 일상적 규모의 상황과 마음들이다. 관객은 우리를 닮은 영화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미소 지을 권리가 있다. <그래도, 사랑해.>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 돌아보면 올해 세상은 그리 돌아가지 않았던 것 같다. 연초 우리네 봄날의 콘텐츠였던 ChatGPT 지브리풍 이미지 생성에서부터 10월 말 젠슨 황의 깐부치킨 회동에 이르기까지, 2025년을 지배한 키워드가 있다면 어딜 가도 들려오는 AI일 것이다. 영화계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영화제에서는 AI 관련 이벤트와 컨퍼런스가 열렸고, 극장가에도 적극적으로 AI를 활용한 시험작 < 중간계 >가 개봉하기도 했다. 하지만 창작 과정에서의 실제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올해의 한국영화들을 통과하며 AI 프롬프트의 예제본처럼 뻣뻣한 인간형이 여기저기서 출몰했다고 느낀다. 그 대표 주자라고 한다면, 초기에는 대안적 움직임으로 출발했으나 오늘날 상업영화와 함께 또 다른 제도로 딱딱하게 굳어진 독립영화라는 포지션을 기회주의적으로 활용한 연상호의 < 얼굴 >이다(이 영화는 KOBIS 상에서 ‘일반영화’로 분류된다). 2억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는 이 가성비 좋은 저예산 영화 속 유명 배우들의 몸짓과 얼굴에서 유연함과 여유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기실 생성형 AI 이미지에 가까운 그 1차원적 자질은 시장주의에 입각하여 경제적 효율성의 늪에 빠진 동시대 이미지의 사멸적 풍경을 저절로 돌아보게 만든다. < 좀비딸 >, < 야당 >, < 히트맨2 >, < 보스 >, < 승부 > ...... 성급히 땜질하듯 만들어진 올해의 몇몇 한국영화들은 창작자의 존재 유무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야기의 유기적인 흐름은 수시로 중단되고, 유튜브 숏츠 시대에 걸맞은 단발적 자극만이 연쇄적으로 나열되는 작중 내 세계에서 인물은 극단적으로 캐리커처화된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야단스럽게 선보이는 개인기 섹션의 한 토막처럼 위축되며 실재감을 완전히 상실한다. 이쯤 되면 실사는 그저 명목적 알리바이이며, 우리는 우연과 돌발의 가능성을 품은 사진적 이미지가 전면적으로 폐지된 AI 영화라는 미래를 이미 살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올해의 수많은 애니메이션 작품들의 흥행권 진입은 그 무의식에 대한 반영일까? <중간계>, <얼굴>, <좀비딸>, <야당> 중 / 사진: 네이버 영화( 1 , 2 , 3 , 4 ) 그런가 하면 이제는 한국영화의 기성세대권으로 진입한 두 아버지, 봉준호 와 박찬욱 의 인물들은 중심을 잃고 허둥댄다는 느낌이다. < 미키 17 > 속 인물들에게는 슬랩스틱과 삑사리의 미학으로 불리던 봉준호의 미시적이고도 생활밀착적인 신체의 율동과 액션이 온데간데없으며, 메인 빌런은 느긋함을 갖추지 못한 채 무대에 오른 초보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독재자의 전형적 모델을 대문자적으로 모방하며 허우적거릴 뿐이다. 인물의 결심과 행동 전개로 극이 진행되는 < 어쩔수가없다 >는 서로 간섭을 일으키는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이 긴장의 끈을 풀어버리기 일쑤이며, 인물의 내면적 특질은 구체적으로 조성되기보다 외삽적으로 제시된다. 적어도 외연적으로는 리얼리즘을 표방했음에도 인물들의 욕망과 주관은 앙금처럼 애매하게 남겨지고, 다소 과장스럽게 발생하는 코미디와 요란한 촬영과 편집 너머로 연출자의 불안만이 느껴질 뿐이다. 두 편 모두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를 내세우고 있지만, 웃지 못한 내가 감지한 것은 화면 너머에 있는 조급함이었다. 게다가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이들은 개봉 전후로 방송인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하며, 온갖 유튜브 채널과 TV 프로그램에서 프로모션을 진행하지 않았던가. 개봉 이후 좋지 않은 평가로 인해 박찬욱 본인이 직접 자신의 영화를 해설하는 <알려줄 결심>이 제작된 것은 갈 데까지 가 버린 올해의 한국영화계를 요약하는 한 단면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관객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 이들을 ‘거장’으로 호명하는 일 아닐까? 왠지 무한히 재생되어 죽지 않는 복제 인간과 AI에게 대체될 위기에 놓인 인물이 이들 영화의 중심으로 설정된 것은 OTT가 스크린을 대체해가는, AI가 실사를 대체해가는 이 시기에 그저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올해의 한국영화들 중 시선, 거리, 말투 등 대화의 미시적인 결이 생생히 살아있는 이재원 의 < 두 시간 >, 서울의 달동네 풍경과 오래된 골목을 주름진 노인들의 육체와 함께 화면에 담은 < 사람과 고기 >가 사사롭게 다가온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미키 17>, <어쩔수가없다>, <두 시간>, <사람과 고기> 중 사진: MUBI , 네이버 영화 , 전주국제영화제 , 네이버 영화 기술이 발전하고 정서가 침잠함에 따라 신체도 변화해간다. 두 편의 미국 블록버스터를 보면서도 그 무의식적 징후가 스크린에 투영된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 서사적으로 두뇌의 작동을 철저히 둔화시킨 이 영화는 눈과 귀의 즐거움에 올인할 뿐, 가족영화라는 설정임에도 일말의 정서적 울림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숏츠 시대에 걸맞은 무지성 블록버스터가 되었다. 이 영화를 함께 본 친구는 촌철살인으로 비평했다. “이 영화 속 사람들한테는 뼈가 없는 것 같다.” 그의 말마따나 일종의 지점토처럼 인체를 연성화하는 작업을 거쳐 리얼리티를 제거한 화면을 보며 관객은 스크린 속 사태와 전혀 연루되지 않은 채, 시원하게 깔깔댈 수 있다. 영화 속 인체는 연양갱이나 하리보 젤리보다도 말랑한 지방이인데, 이들은 거의 AI ASMR에서 엿볼 수 있는 액체괴물이나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비슷한 것이 되어 신나게 터지고 짓뭉개진다. 이에 반격하듯 아날로그 신체에 불굴의 책임의식을 강박적으로 수혈한 블록버스터 <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은 AI와 맞서는 에단 헌트, 아니 톰 크루즈의 눈물겨운 원 맨 쇼다. 여기서 그는 “세상을 구한다”라는 거창하지만 피상적 맥락 외의 사적인 욕망이나 목적이 제거되어 캐릭터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차력쇼의 단원이 된다.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잠수함 신은 숏츠 시대에 훈시하듯 대사마저 소거한 채 느린 호흡을 가져가는데, 여기에는 에단이 대적해야 할 상대도 없으며, 그에 따른 액션영화의 장르적 쾌감도 불투명하다. 영화는 잠수복을 벗고 알몸으로 헤엄치는 톰 크루즈의 몸짓을 고요한 바다 배경과 조명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팔다리를 태아의 형상처럼 구부려 ‘에단 헌트-톰 크루즈’라는 ‘인물-배우’를 거룩하게 비추지만, 어느 누구와도 합이 맞지 않는 듯한 이 영화 속 톰 크루즈는 마치 모든 것을 짊어지고 인간계를 떠나는 유령처럼 보인다. 시리즈 내내 “리얼한” 액션을 제 몸으로 수행해 온 그의 강박이 올해는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 사진: IMDb , © 2025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중 / 사진: IMDb AI가 도래한 마당에 내가 떠올리는 리얼리즘은 이런 것이다. 그곳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얼마간의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간격이 설정되는 세계이며, 실천적으로는 출퇴근길 과속과 욕설로 버스를 몰고 가는 어떤 중년 기사의 심통 맞은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깊게 팬 주름들 사이로 상상을 끼워보듯, 일상 속 적대와 부재, 거절을 맞대며 이해력과 상상력을 기르는 내면적 과정이 동반되는 장소다. 타자라는 낯섦과 불편함은 리얼리즘의 조건 중 하나였지만, 그것들이 편리함으로 제거되어가는 테크놀로지와 디스플레이의 시대에 리얼리즘은 이제 그 의미를 서서히 재정립해가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올해의 영화들 중 마이크 리의 < 내 말 좀 들어줘(Hard Truths) >가 딸려온다. 이 영화는 소통 불가와 심리적 불안이 일상화된 우리 시대의 수축된 시공을 에두르거나 외면하지 않고 길바닥과 노동자의 리얼리즘으로 정면 대결한다는 점에서 포스트 코로나 영화의 빛나는 사례가 되었다. 정답 없이 문제의 구체적인 양상만을 현미경처럼 충실히 제공하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내려치는 탓에, 마땅히 극장에 몸이 묶여 봐야 할 영화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이 들 정도다. 결말부 사각 프레임을 가득 채운 두 얼굴, 그들을 잇는 숏-역숏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마음이 그렇게 된다. ...... 어쩌면 이건 다 옛날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일상 속 원격 만남과 딥페이크 범죄가 여전하고 이미지의 사실성이 의심받기 일쑤인 작금에, 인간의 얼굴이 신비와 기적을 발생시키는 특권적인 장소라던 벨라 발라즈의 말을 과연 언제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렇다. 지나치게 발전한 미래에서 한때의 리얼리즘은 환상이다. <내 말 좀 들어줘> 중 / 사진: IMDb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 비평의 편지 ’ 필진.
옛 영화는 자주, 영화 자체의 재미라기보다는 그 영화가 지니는 문화사적 맥락의 정보들 때문에 보게 된다. 특히 타 장르와의 교섭이 활발한 작품들, 대중영화로서 당대 유행하고 있던 주류적 흐름에 충실한 작품들은 더 그러하다. 1967년 이규웅 감독의 < 치맛바람 >도 그런 작품이다. 솔직히 말해 이 영화는 수작이 아니다. 사극을 주로 연출해왔던 이규웅 감독이 만든, 정말 몇 편 안 되는 현대물 코미디이다. 그래서인지 코미디 연출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리듬감과 속도감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고, 연기로부터 소품, 카메라 워크에 이르기까지 희극적 과장이 들쭉날쭉하여 균형이 어그러져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당시 드라마와 쇼에 사운을 걸고 있던 상업적 민방 동양방송(TBC)의 인기 텔레비전드라마의 리메이크이고, 1960년대 후반의 수많은 코미디영화들의 흐름 속에 놓여있음을 생각하면, 매우 다양한 문화사적 맥락을 읽어낼 흥미로운 작품임을 깨닫게 된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방송드라마는 영화의 가장 중요한 원작 공급처였다. 일찍이 해방 직후 연속극의 시작점에 놓인 < 똘똘이의 모험 >(1946)이 영화화된 것부터 시작하여, 연속극의 안정적 편성의 시작인 < 청실홍실 >(1956)부터는 인기 연속극은 으레 영화화되는 수순을 밟았고, < 로맨스 빠빠 >, < 박서방 >, < 빨간 마후라 >, < 남과 북 > 등 1960년대의 수작 영화 중 적지 않은 작품이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라디오드라마였다. 1964년 동양방송의 개국과 함께 녹화가 가능해져 텔레비전 연속극이 발전하고 있었고, 따라서 1960년대 중후반부터는 텔레비전드라마의 영화 리메이크가 간간이 나타나는데, 텔레비전드라마의 리메이크영화는 그리 성공적인 작품이 많지 않다. 아무래도 영상물을 또 다른 영상물로 옮기는 이러한 리메이크는, 창작자와 관객 모두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하기 힘들게 했기 때문이리라. 이 작품의 원작인 드라마 < 치맛바람 >은 1967년 동양방송 주말연속극의 또 다른 이름인 ‘유호극장’의 작품이다. 극작가의 이름을 내걸고 같은 시간대에 한 작가가 계속 집필한 사례는 한국방송사에서 전무후무하다. 그 정도로 당시 유호는 매우 인기 있는 작가였고, <치맛바람>은 1965년부터 시작된 유호극장의 한창 시절 작품이다. 유호는 희극에 능한 작가이며, 특히 도시 중간계층에 속하는 평범하고 속물적인 인물들이 벌이는 희극적 사건을 삽화적으로 펼쳐놓는 것을 좋아한다. < 치맛바람 > 역시 그러하다. 가난한 월급쟁이 ‘장’은, 아내, 아버지, 대졸 실업자와 여대생 동생, 중학생 아들까지 먹여 살리느라 취미는커녕 담배마저 끊는다. 견디다 못한 아내 ‘진’이 계를 들어 돈을 벌고자 하는 데에서 사건이 시작된다. 돈 주무르는 수완이 능란한 계주 ‘풍’을 비롯한 계꾼 여자들은 한복 치마를 펄럭이며 몰려다닌다. 집단화된 여자들은 목소리가 커지고 집단행동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도 하는 것에 비해, 오히려 남자들은 이들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쩔쩔 맨다. 바깥으로 나돌며 돈을 만지는 드센 여자들을 비판적으로 다룬 영화는 이미 1950년대부터 흔했다. 이 겉멋 든 여자들은 남자 머리꼭지에 올라선 것처럼 굴지만, 결국 이들에게 몰려드는 남자들과의 관계, 혹은 금전 관계의 실패로 극적 처벌의 결말을 맞게 된다. 이런 보수적 시각은 오래 유지되지만, 1960년대 후반에 놓인 이 작품은 1950년대의 작품들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 치맛바람 일으키는 계군들은, 1950년대의 < 자유부인 >이나 < 여사장 >처럼 미국 여배우처럼 차려입은 멋진 여자들이 아니라, 그냥 한복 입은 중산층 아줌마들이다. 또한 이 여자들에게 ‘껄떡대는’ 남자들 또한 돈 많은 사장님만이 아니라, ‘진’의 시아버지나 룸펜 시동생처럼 장삼이사들을 포함하고 있다. 즉 1950년대에 눈 뜨기 시작한 물욕과 성욕의 적극적 구현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대도시의 보통사람들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한편, 치맛바람이 극적 처벌을 받긴 하지만, 아내가 나서서 계라도 하며 살아나가는 도시 서민의 생활방식 자체가 부정되지는 않는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1960년대에 가정의 경영권은 이미 주부에게 넘어왔고, 주부는 시아버지부터 시동생의 소소한 지출까지 간섭하면서 재태크에 눈을 돌리는 경제적 주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원작인 드라마 동영상이나 대본이 남아있지 않아 영화와의 차이를 정교하게 비교할 수는 없으나, 원작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오리지널 대본과 비교해 보면 영화화 개작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삽화의 수를 줄이고, 성적 농담과 노출, 슬랩스틱코미디 스타일의 과장된 연기를 크게 강화했다. 즉 당시에 인기를 모으고 있던, 서영춘 등 코미디언의 개인기를 중심으로 젠더 선입견에 기대어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영화의 관행을 받아들인 것이다. 가정과 골목길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희극적 상황을 그려내는 데에 치중한 유호 의 텔레비전드라마의 경향이, < 남자 식모 > 같은 영화가 주를 이룬 코미디 영화의 경향으로 흡수되어 조정된 양상인 것이다. 비교적 원작에 가까웠을 오리지널 시나리오에 없는 장면, ‘진’이 사업상 만난 무 사장과 요정에서 춤추는 장면이 삽입되고, 뚝섬유원지에서 수영복 바람으로 춤추는 장면이 반복되며, 특히 뚱뚱한 여자 코미디언 오천평 과 서영춘과의 엎치락뒤치락 장면을 길게 배치하는 등, 내용이 많이 추가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렇게 자극의 수위를 놓여놓았으니, 결말 역시 좀 더 과격하거나 억지스러워질 수밖에 없는데, ‘장’의 계몽적인 일장연설로 계꾼들이 개심하는 결말도 오리지널 시나리오에는 없다. 이규웅 이 낯선 장르 코미디를 만나 이 작품은 다소 어설펐지만, 이후 그가 코믹한 사극인 < 공주 며느리 >, < 꼬마 신랑 > 등을 연출하는 데에 이 작품은 중요한 다리가 되었을 것이다. 젊은 미모의 여배우임에도 불구하고 희극적 캐릭터를 귀엽게 잘 소화해낸 남정임 은, 이후 이규웅의 코믹한 사극의 주인공을 도맡았다. 소심한 남편 ‘장’을 맡은 허장강 의 계산된 정교한 연기, 고령에도 불구하고 뚝섬유원지의 록밴드 앞에서 엉터리 영어로 팝송을 부르며 판을 제압하는 아버지 김희갑 의 놀라운 감각, 남정임 과 1950년대 아프레걸을 도맡았던 이빈화 의 과감한 비키니, 그리고 유호 작품에서 허랑방탕한 삼촌(시동생) 역을 단골로 맡았던 김순철 의 대체 불가능한 시동생 연기 등은 이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볼거리이다.
얼마 전 부천에서 개최된 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안시페스티벌에서 바쁜 스케줄상 보지 못한 < 르 타블로 Le Tableau(The Painting) >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장 프랑수아 라귀니(Jean-Francois Laguionie)감독의 4번째 장편으로 프랑스에선 2011년 11월에 개봉되어 까다로운 평론가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기도 했는데, 일반적인 헐리우드 장편애니메이션과 다른 매우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그림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완성작과 미완성작, 실패작으로 구분된 이 세계는 플라톤식 국가론을 연상시키는 세 개의 계급을 형성하며 대립하고 갈등한다. 부르조아 계급인 귀족과 지식인과 소상인의 중간계층, 하인, 노동자의 하층민이 존재하며 자신들의 창조주인 화가를 찾아 이러한 계급을 만들어 놓은 이유를 찾아 해결을 하려는 모험의 여정을 움직이는 그림의 시각적 흥미와 극적인 이야기로 이끌어가고 있다. 자 그럼 그림 속에 잠시 귀를 기울여보자 “여러분! 화가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제발 부탁이에요. 완성되지 않은 부분이 이렇게나 작은데!” “저 천한 자들을 모두 이 그림 안에 두어야 합니까?” “낙서에 불과한 실패작들.” “혐오스러워. 화가가 저들을 지워버렸어야 했는데.” 이 세계의 기득권을 독점하며 호의호식하려는 귀족 계급은 완성작들로 미완성작과 스케치들을 자신들의 그림세계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천한 것들로 또는 실패한 존재로 취급하며 폭력과 노동을 착취하며 핍박을 일삼는다. 여기에 반기를 든 주인공 라모(Ramo)는 이렇게 외친다. “무슨 근거로 완성작이 더 우월하다는 거죠?” 주인공 라모는 완성작임에도 불구하고 미완성작인 사랑하는 여인 끌레어(Claire)를 도와주려고 미완성작들과 함께 화가를 찾아 그림을 완성시키고자 미답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이렇게 자신들을 구원할 화가를 찾아 작업실에 놓인 그림들을 이리저리 넘나들며 벌어지는 모험은 명화 같은 장면하나, 움직임 하나까지도 놓치기 아쉬운 너무나 아름다운 영상이 되어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화가를 통해 구원 받으려던 미완성작들은 생사를 건 모험과 여행을 통해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고 작업실에 있는 물감들을 가지고 그림으로 되돌아와 화가의 그림이 아닌 자신들만의 색깔과 그림체로 더 뛰어난 완성작으로 태어나게 된다. 기존 지배세력이었던 완성작들 조차도 새로운 차원의 매력적인 창조과정에 합류하며 갈등은 사라지고 해방을 맞이한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여자 주인공 끌레어는 작업실 밖으로 혼자 나와 해변가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찾아내 그림들을 왜 완성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화가는 이야기한다. 이젠 너무 늙어 더 이상 힘든 작업을 할 수 없다고... 우리들은 누군가 이 어려운 현실을 타개할 구원자를 기다리며 창조주인 화가를 원망하는데 일상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애니메이션의 미덕은 아름다운 그림 속에 사는 주인공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모험을 시작하라고 조용히 속삭이고 있는 것이리라. 우리에게 생소한 장 프랑수아 라귀니(Jean-Francois Laguionie) 감독은 세계적인 거장으로 이미 3편의 장편을 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고전이 되어버린 단편 애니메이션 < La Demoiselle et le violoncelliste(The Maid and the Cellist >(1965)로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또한 1979년 칸 영화제에서 단편 < La Traversee de l`Atlantique a la rame(Rowing Across the Atlantic >(1978)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쉬운 것은 한국 관객이 이 훌륭한 작품을 일반극장에선 만나 볼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