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한국 문화
- 감독
- 엘리아스 버튼 홈즈
- 제작년도
- 1900
<지옥화 스틸>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 전후 한국 사람들의 상처를 위로한 것은 역시 영화였다. 전쟁 중에도 영화제작을 멈추지 않았던 영화인들은 폐허나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바로 제작에 착수했다. 영화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물론 영화는 크든 작든 자본의 투자와 회수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산업임이 틀림없고, 분명 개인 창작자로서의 욕망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영화인들에게는 한국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의 열정이 가장 중요한 동기였을 것 같다. 환도한 이승만 정부도 이를 파악하고 1954년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로 한국영화 지원책을 단행한다. 전후 한국영화 부흥의 기폭제가 된 작품은 이규환의 <춘향전>(1955)이다. 1955년 벽두에 국도극장 한 관에서 개봉한 이 작품에 관객들은 2개월간의 장기 흥행으로 보답했다. 영화인들은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확인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영화로 채산을 맞추는 것을 넘어 큰 수익도 올릴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춘향전>의 성공으로 이듬해까지 <심청전>(이규환, 1956)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 등 사극·시대극이 유행했고, 관객들이 싫증을 낼 틈도 없이 멜로드라마 현대극 장르가 열기를 이어갔다. 이를 주도한 것은 한형모인데, 대학교수와 교수 부인의 각기 다른 연애를 다룬 <자유부인>(한형모, 1956)으로 전후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후 여성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역시 멜로드라마였다. 특히 홍성기가 <애인>(1956), <실락원의 별>(1957) 등을 연이어 내놓으며 상업영화 감독으로서는 1인자의 자리를 누렸다. 영화사가 이영일은 특히 <자유부인>에 방점을 찍어 “시대 풍조의 멜로드라마”로, 홍성기의 영화는 “전형적인 애정 멜로드라마”로 정의하지만, 이 시기 어떤 멜로드라마든 전후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심리를 충분히 반영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무명의 영화청년 신상옥의 등장 잘 알려진 것처럼 신상옥의 영화적 스승은 ‘남한’영화의 시원이라 할 최인규다. 한형모가 일제 말기 최인규의 영화에서 도제를 시작했다면, 그는 해방 이후 최인규의 문하에 참가하면서 영화 일을 시작했다. 장르에 충실하고 기술에 뛰어난 한형모가 테크니션으로서 최인규의 적통이라면 신상옥은 이는 물론이고 영화작가로서의 면모까지 확실히 이어받았다. 어쩌면 1950년대에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한 최인규의 영화세계를 완전히 계승한 이가 바로 신상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말기 최인규의 영화에서 미완에 그쳤던 리얼리즘의 화법과 장르적 세계의 결합은 신상옥이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일곱 번째 작품<지옥화>다. 사실 신상옥의 초기 영화들은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흥행에 실패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26세 때 만든 데뷔작 <악야>(1952)는 전쟁 시기 양공주를 그린 작품인데, 그 역시 증언했던 것처럼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염세적인 프랑스영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어 전쟁 중 대표 장르였던 세미 다큐멘터리 <코리아>(1954) 그리고 시대극 <젊은 그들>(1955), <꿈>(1955), <무영탑>(1957)을 연출했다. 영화계의 주류가 아니었던 그의 초기 필모그래피는 확실히 한형모가 보여준 참신함이나 세련됨이 느껴지지 않는다. 훗날의 신상옥다운 과감함이 제대로 발현된 작품은 1958년 만들어진 <지옥화>였다. 현대극·멜로드라마의 유행과 1958년부터의 악극을 원작으로 한 이른바 ‘신파물’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 경향에서 완전히 돌출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악야>에서 다룬 바 있는 양공주를 소재로 전후 한국 사회의 단면을 리얼리즘 화법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강렬한 파토스(pathos)를 드러내는 멜로드라마적 화법이 절묘하게 결합한 작품이었다. 물론 이 영화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다. 기지촌을 통해 드러낸 전후 한국 사회 <지옥화>는 동두천 기지촌을 배경으로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들과 미군 부대의 물건을 훔쳐 암시장에 내다 파는 갱단이 등장하는, 한국영화사 전체를 훑어봐도 매우 흥미로운 소재의 영화다. 영화는 형 영식(김학)을 찾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동식(조해원)이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어지러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의 가방을 훔치는 날치기를 쫓으려던 동식은 불량배들의 시비로 자기 가방마저 잃어버려 망연자실하고, 이를 본 남대문의 지게꾼들은 세상을 한탄한다. 결국 동식은 남대문시장에 장물을 팔러 온 형을 발견하고 동두천으로 따라가게 된다. <지옥화>의 서두는 마치 기록영화인 듯 미군 부대 앞 시장통 풍경, 미군과 양공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영화 곳곳에서 다큐멘터리적 질감이 활용되는데, 단순히 기록영화적 화면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장르영화의 문법과 결합시키는 연출이 무척 흥미롭다. <자유부인>에서 한형모가 영화 속 볼거리로 댄서의 장면을 보여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신상옥 역시 당시 관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미군 부대의 댄스홀 장면을 넉넉히 보여주지만, 영식 일당이 양공주들의 도움으로 미군 부대에 잠입해 물건을 훔치는 장면까지 덧붙이고 있다. 즉 댄서들의 공연 장면을 기록영화를 보는 듯한 숏들로 구성하는 한편, 교차 편집을 통한 장르적 긴장감까지 만들어내는 것이다. 리얼리즘 화법과 결합한 멜로드라마 양식 영화는 영식과 그와 동거하는 양공주 쏘냐(최은희) 그리고 동식과 그를 좋아하게 된 주리(강선희)를 주요 인물로 배치한다. 쏘냐가 동생 동식을 유혹하고 둘이 가까워지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멜로드라마의 세계로 진입한다. <지옥화>의 전단지에 붙은 “물결치는 관능의 파도”라는 문구처럼 사실 이 영화의 애정 묘사는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의 키스신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해진다. 영식과 쏘냐가 침대나 풀밭 또는 강변에서 보여주는(마치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프레드 진네만, 1953)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러브신, 쏘냐가 동식을 유혹하는 장면과 이후 둘의 러브신이 숨가쁘게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학자 벤 싱어(Ben Singer)는 무대 멜로드라마에서 시리얼 퀸(serial queen)의 연속 영화(serial film)로 이어지는 멜로드라마적 특성으로 파토스, 과도한 감정, 도덕적 양극화, 비고전적인 내러티브 구조뿐만 아니라 육체에 위험을 가하는 스펙터클, 스릴, 폭력, 액션의 강조로 정의되는 ‘선정주의’를 거론한 바 있다. <지옥화> 역시 멜로드라마의 이러한 관점에 정확히 일치하는데, 영화는 영식, 동식, 쏘냐의 복잡한 관계로 야기되는 액션 신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전체 러닝타임(86분) 중 후반부 30분 동안 펼쳐지는 기차 액션신은 이 영화의 핵심적인 스펙터클이다. 신상옥 사단이자 훗날 스릴러·액션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떨친 강범구 감독이 달리는 열차 위에 밧줄로 몸을 묶고 촬영했다는 바로 그 장면이다. 영식 일당은 미군 부대의 물자를 실은 열차칸을 탈취하기 위해 떠나고, 쏘냐는 동식과 달아나기 위해 헌병대에 이들을 신고한다. 일당은 탈취에 성공하지만 헌병대가 이들의 차량을 쫓고, 이를 안동식은 형을 구하기 위해 이들을 쫓아가고, 쏘냐마저 영식을 쫓아가는 3중의 추격전이 펼쳐진다. 헌병대와 총격전을 벌이던 영식 일당의 차량이 전복되고 영식은 겨우 살아남아 동식에게 발견되지만, 뒤따라온 쏘냐를 본 그는 그녀를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지금 성수대교 근처의 당시 사근동 늪지대에서 찍었다는 마지막 장면은 단연코 이 영화의 백미다. 쏘냐와 동식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며 사투를 벌이고, 칼로 쏘냐를 찌른 영식 역시 죽은 그녀 옆으로 기어가 운명을 다한다. 진흙으로 가득 찬 늪은 영화의 초입 남대문의 지게꾼이 말한 “어지러운 세상”의 축도였다. 다행히 영화는 동식과 함께 시골로 떠나는 주리의 장면으로 해피엔딩을 맞는다. 쏘냐는 ‘지옥화’로 남았고, 동식과 주리만이 그 지옥을 탈출해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중심에 서다 이후 신상옥은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자매의 화원>(1959), <동심초>(1959) 등 서구영화를 지향한 세련된 멜로드라마를 선보이며 성공 가도를 달린다. <성춘향>이 크게 성공한 1961년, 신필름을 설립한 그는 1960년대 한국영화 전반을 리드하게 된다. 당시 한국영화계를 부르는 별칭 ‘충무로’는 신필름과 그 외 영화사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신필름이라는 영화왕국의 군주였다. 영화제작자로서 양산 체제를 지휘하는 한편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작가로서의 작업도 유지한, 세계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축복받은 존재였다. 1960년대 초반 영화산업의 외양이 급격히 확대되었고, 1962년부터 연간 제작편수가 100편을 넘게 된다. 한국 영화산업은 규모의 경제뿐만 아니라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가 보여주는 예술성으로 깊이가 확보될 때 힘을 받았다. 200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앞둔 1996·1997년 홍상수·김기덕·이창동이 차례로 데뷔한 것처럼, 1960년 김기영이 <하녀>를, 1961년 유현목이 <오발탄>을, 신상옥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한국영화사의 위대한 걸작을 내놓으며 1960년대 르네상스의 폭과 깊이를 두루 만족시키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 전후 한국 사람들의 상처를 위로한 것은 역시 영화였다. 전쟁 중에도 영화제작을 멈추지 않았던 영화인들은 폐허나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바로 제작에 착수했다. 영화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물론 영화는 크든 작든 자본의 투자와 회수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산업임이 틀림없고, 분명 개인 창작자로서의 욕망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영화인들에게는 한국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의 열정이 가장 중요한 동기였을 것 같다. 환도한 이승만 정부도 이를 파악하고 1954년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로 한국영화 지원책을 단행한다. 전후 한국영화 부흥의 기폭제가 된 작품은 이규환의 <춘향전>(1955)이다. 1955년 벽두에 국도극장 한 관에서 개봉한 이 작품에 관객들은 2개월간의 장기 흥행으로 보답했다. 영화인들은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확인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영화로 채산을 맞추는 것을 넘어 큰 수익도 올릴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춘향전>의 성공으로 이듬해까지 <심청전>(이규환, 1956)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 등 사극·시대극이 유행했고, 관객들이 싫증을 낼 틈도 없이 멜로드라마 현대극 장르가 열기를 이어갔다. 이를 주도한 것은 한형모인데, 대학교수와 교수 부인의 각기 다른 연애를 다룬 <자유부인>(한형모, 1956)으로 전후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후 여성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역시 멜로드라마였다. 특히 홍성기가 <애인>(1956), <실락원의 별>(1957) 등을 연이어 내놓으며 상업영화 감독으로서는 1인자의 자리를 누렸다. 영화사가 이영일은 특히 <자유부인>에 방점을 찍어 “시대 풍조의 멜로드라마”로, 홍성기의 영화는 “전형적인 애정 멜로드라마”로 정의하지만, 이 시기 어떤 멜로드라마든 전후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심리를 충분히 반영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무명의 영화청년 신상옥의 등장 잘 알려진 것처럼 신상옥의 영화적 스승은 ‘남한’영화의 시원이라 할 최인규다. 한형모가 일제 말기 최인규의 영화에서 도제를 시작했다면, 그는 해방 이후 최인규의 문하에 참가하면서 영화 일을 시작했다. 장르에 충실하고 기술에 뛰어난 한형모가 테크니션으로서 최인규의 적통이라면 신상옥은 이는 물론이고 영화작가로서의 면모까지 확실히 이어받았다. 어쩌면 1950년대에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한 최인규의 영화세계를 완전히 계승한 이가 바로 신상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말기 최인규의 영화에서 미완에 그쳤던 리얼리즘의 화법과 장르적 세계의 결합은 신상옥이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일곱 번째 작품<지옥화>다. 사실 신상옥의 초기 영화들은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흥행에 실패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26세 때 만든 데뷔작 <악야>(1952)는 전쟁 시기 양공주를 그린 작품인데, 그 역시 증언했던 것처럼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염세적인 프랑스영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어 전쟁 중 대표 장르였던 세미 다큐멘터리 <코리아>(1954) 그리고 시대극 <젊은 그들>(1955), <꿈>(1955), <무영탑>(1957)을 연출했다. 영화계의 주류가 아니었던 그의 초기 필모그래피는 확실히 한형모가 보여준 참신함이나 세련됨이 느껴지지 않는다. 훗날의 신상옥다운 과감함이 제대로 발현된 작품은 1958년 만들어진 <지옥화>였다. 현대극·멜로드라마의 유행과 1958년부터의 악극을 원작으로 한 이른바 ‘신파물’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 경향에서 완전히 돌출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악야>에서 다룬 바 있는 양공주를 소재로 전후 한국 사회의 단면을 리얼리즘 화법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강렬한 파토스(pathos)를 드러내는 멜로드라마적 화법이 절묘하게 결합한 작품이었다. 물론 이 영화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다. 기지촌을 통해 드러낸 전후 한국 사회 <지옥화>는 동두천 기지촌을 배경으로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들과 미군 부대의 물건을 훔쳐 암시장에 내다 파는 갱단이 등장하는, 한국영화사 전체를 훑어봐도 매우 흥미로운 소재의 영화다. 영화는 형 영식(김학)을 찾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동식(조해원)이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어지러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의 가방을 훔치는 날치기를 쫓으려던 동식은 불량배들의 시비로 자기 가방마저 잃어버려 망연자실하고, 이를 본 남대문의 지게꾼들은 세상을 한탄한다. 결국 동식은 남대문시장에 장물을 팔러 온 형을 발견하고 동두천으로 따라가게 된다. <지옥화>의 서두는 마치 기록영화인 듯 미군 부대 앞 시장통 풍경, 미군과 양공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영화 곳곳에서 다큐멘터리적 질감이 활용되는데, 단순히 기록영화적 화면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장르영화의 문법과 결합시키는 연출이 무척 흥미롭다. <자유부인>에서 한형모가 영화 속 볼거리로 댄서의 장면을 보여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신상옥 역시 당시 관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미군 부대의 댄스홀 장면을 넉넉히 보여주지만, 영식 일당이 양공주들의 도움으로 미군 부대에 잠입해 물건을 훔치는 장면까지 덧붙이고 있다. 즉 댄서들의 공연 장면을 기록영화를 보는 듯한 숏들로 구성하는 한편, 교차 편집을 통한 장르적 긴장감까지 만들어내는 것이다. 리얼리즘 화법과 결합한 멜로드라마 양식 영화는 영식과 그와 동거하는 양공주 쏘냐(최은희) 그리고 동식과 그를 좋아하게 된 주리(강선희)를 주요 인물로 배치한다. 쏘냐가 동생 동식을 유혹하고 둘이 가까워지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멜로드라마의 세계로 진입한다. <지옥화>의 전단지에 붙은 “물결치는 관능의 파도”라는 문구처럼 사실 이 영화의 애정 묘사는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의 키스신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해진다. 영식과 쏘냐가 침대나 풀밭 또는 강변에서 보여주는(마치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프레드 진네만, 1953)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러브신, 쏘냐가 동식을 유혹하는 장면과 이후 둘의 러브신이 숨가쁘게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학자 벤 싱어(Ben Singer)는 무대 멜로드라마에서 시리얼 퀸(serial queen)의 연속 영화(serial film)로 이어지는 멜로드라마적 특성으로 파토스, 과도한 감정, 도덕적 양극화, 비고전적인 내러티브 구조뿐만 아니라 육체에 위험을 가하는 스펙터클, 스릴, 폭력, 액션의 강조로 정의되는 ‘선정주의’를 거론한 바 있다. <지옥화> 역시 멜로드라마의 이러한 관점에 정확히 일치하는데, 영화는 영식, 동식, 쏘냐의 복잡한 관계로 야기되는 액션 신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전체 러닝타임(86분) 중 후반부 30분 동안 펼쳐지는 기차 액션신은 이 영화의 핵심적인 스펙터클이다. 신상옥 사단이자 훗날 스릴러·액션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떨친 강범구 감독이 달리는 열차 위에 밧줄로 몸을 묶고 촬영했다는 바로 그 장면이다. 영식 일당은 미군 부대의 물자를 실은 열차칸을 탈취하기 위해 떠나고, 쏘냐는 동식과 달아나기 위해 헌병대에 이들을 신고한다. 일당은 탈취에 성공하지만 헌병대가 이들의 차량을 쫓고, 이를 안동식은 형을 구하기 위해 이들을 쫓아가고, 쏘냐마저 영식을 쫓아가는 3중의 추격전이 펼쳐진다. 헌병대와 총격전을 벌이던 영식 일당의 차량이 전복되고 영식은 겨우 살아남아 동식에게 발견되지만, 뒤따라온 쏘냐를 본 그는 그녀를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지금 성수대교 근처의 당시 사근동 늪지대에서 찍었다는 마지막 장면은 단연코 이 영화의 백미다. 쏘냐와 동식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며 사투를 벌이고, 칼로 쏘냐를 찌른 영식 역시 죽은 그녀 옆으로 기어가 운명을 다한다. 진흙으로 가득 찬 늪은 영화의 초입 남대문의 지게꾼이 말한 “어지러운 세상”의 축도였다. 다행히 영화는 동식과 함께 시골로 떠나는 주리의 장면으로 해피엔딩을 맞는다. 쏘냐는 ‘지옥화’로 남았고, 동식과 주리만이 그 지옥을 탈출해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중심에 서다 이후 신상옥은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자매의 화원>(1959), <동심초>(1959) 등 서구영화를 지향한 세련된 멜로드라마를 선보이며 성공 가도를 달린다. <성춘향>이 크게 성공한 1961년, 신필름을 설립한 그는 1960년대 한국영화 전반을 리드하게 된다. 당시 한국영화계를 부르는 별칭 ‘충무로’는 신필름과 그 외 영화사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신필름이라는 영화왕국의 군주였다. 영화제작자로서 양산 체제를 지휘하는 한편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작가로서의 작업도 유지한, 세계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축복받은 존재였다. 1960년대 초반 영화산업의 외양이 급격히 확대되었고, 1962년부터 연간 제작편수가 100편을 넘게 된다. 한국 영화산업은 규모의 경제뿐만 아니라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가 보여주는 예술성으로 깊이가 확보될 때 힘을 받았다. 200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앞둔 1996·1997년 홍상수·김기덕·이창동이 차례로 데뷔한 것처럼, 1960년 김기영이 <하녀>를, 1961년 유현목이 <오발탄>을, 신상옥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한국영화사의 위대한 걸작을 내놓으며 1960년대 르네상스의 폭과 깊이를 두루 만족시키고 있었다.
정작 해방이 됐으나 영화계는 휴면상태였다. 옛 조선영화사 자리에 영화건설본부라는 문패를 달고 만든 25분 분량의 <해방뉴스>(촬영 김학성, 편집 박기채)가 공개된 게 고작이었다( 중앙신문, 「일요특집, 찬란한 예원(藝苑) 풍경」, 1945.11.11.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라도 우리의 영화가 생산된 것( 최용달 「해방뉴스 평」, 예술통신, 1945.10.25. )이 기꺼울 정도였다.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로이드의 구두방>(해롤드 로이드 주연) 유의 슬랩스틱 코미디나 <소년의 거리>(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와 같은 외국영화가 볼거리였다. 이런 시대에 1946년 최초의 항일 광복영화가 나왔다.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가 그것이다. 이해 3월부터 10월 사이에 거의 두 달 간격으로 나온 기록영화 <안중근 사기(史記)>(이구영), <제주도 풍토기>(이용민)와 아동영화 <똘똘이의 모험>(이규환)에 이은 네 번째 한국영화계의 결실이다. 미군정 치하였다. 불과 1년 전 일본제국 의 특공대 지원을 촉구하는 <사랑과 맹서>(1945)와 같은 어용영화를 만든 최 감독이 광복영화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진 1] 해방 후 최초의 극영화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의 한 장면 묻힐 뻔했던 ‘자유만세’의 단역 <자유만세>에는 한동안 한국영화사에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인물이 등장한다. 폭약을 운반한 죄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끌려가다가 감옥에서 탈출한 지하 조직책 최한승(전창근)에 의해 구출되는 중절모의 사나이, 바로 박동지 역의 김승호가 그 사람이다. 1 보잘 것 없는 이 단역배우가 뒷날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긋는 주역이 되리라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 2] <자유만세>에 출연한 김승호. 영화로는 데뷔작이다 아무튼 김승호는 이듬해 <자유만세>의 주인공 전창근에 의해 16밀리 농촌계몽영화 <해방된 내 고향>(1947)과 밀수의 근절을 촉구하는 경찰청 지원의 <밤의 태양>(1948, 박기채)에 각기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 뒤 10여 년 동안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사이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8월 김승호는 서울에 남아 있는 영화, 연극인들과 함께 명동성당에 갇혔다. 해방 후 월북했던 배우 심영이 인민군 중좌의 계급장을 달고 나타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때 북으로 끌려갈 뻔했다. 하지만 의정부 근교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1.4후퇴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정부가 환도할 무렵 그는 대전에 머물며 자신이 창단한 극단 ‘배협’의 공연을 계속했다. <망향>(1952, 대전시공관), <허무한 사랑>, <그들의 가는 길>(1953, 시공관), <유관순>(1954, 대전극장) 등이 이때의 레퍼토리이다( 도완석, 「대전·충청 연예인실록, 전쟁참화 속에서 ‘배협’ 무대 이어져」 중도일보, 2016.4.30. ). <허무한 사랑>에서는 연출을 담당했다. 그가 다시 영화 활동을 재개한 것은 1955년 김기영의 감독 데뷔작 <양산도>(김기영, 1955)부터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웃을래야 웃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영화’( 허백년, 「양산도가 제기한 문제점」, 조선일보, 1955.11.6. )라는 등의 혹평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런데 1년 뒤 출연한 이병일 감독의 <시집가는 날>(1956)이 작품성과 함께 그가 주연한 맹진사의 연기가 호평을 받으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풍토색이 강한 민속극으로서도 일류의 가치가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유머요 풍자가 이만큼 자연스럽게 표현된 국산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신영화, 풍토색 강한 민속극」, 한국일보, 1957.2.14.) 는 작품평에 이어 “더욱이 맹진사(김승호)의 숙달된 연기는 영화를 결정적으로 살려주었다”( 「신영화, 한국적 아이로니, 시집가는 날」 조선일보, 1957.2.15. )는 과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자 평론가인 이봉래 역시 “연기 면에 있어서는 김승호의 역연이 압권이었다. 자기 역에 대한 해석이 정확하였고 등장인물과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그 호흡이 잘 어울렸다” ( 「희극영화의 가능성, 영화 ‘시집가는 날’에서」, 조선일보, 1967.2.19 )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 3] <시집가는 날>에서 맹진사 역으로 출연한 김승호 조선조 때 맹진사댁과 김판서 댁의 혼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양반사회의 위선과 구습, 결혼제도의 모순을 희극적 아이러니로 빚어낸 <시집가는 날>(오영진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맹진사댁 경사’의 개명)은 결국 제4회 아시아영화제 특별희극상을 받음으로써 국내 작품이 해외에서 거둔 최초의 성과로 기록된다. 김승호는 이런 후광에 힘입어 1957년 한 해 동안 <오해마세요>(권영순)를 비롯한 <봉이 김선달>(한홍열), <아리랑>(김소동), <풍운의 궁전>(정창화) 등 15편, 58년엔 <돈>(김소동), <초설>(김기영),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생명>(이강천), <인생차압>(유현목), <마도의 향불>(신경균) 등 20편에 출연하고, 59년엔 <곰>(조긍하),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전창근), <육체의 길>(조긍하) <불멸의 성좌>(유진식) 등으로 비로소 30편선(34편)을 돌파하여 ‘김승호 시대’를 예고한다. 1960년에는 <피 묻은 대결>(김묵), <로맨스 빠빠>(신상옥), <흙>(권영순), <박서방>(강대진), <저 언덕을 넘어서>(박성복) 등 25편으로 전년도에 비해 10여 편이 줄긴 했으나 61년부터 <주마등>(이만희), <마부>(강대진). <삼등과장>(이봉래). <노다지>(정창화), <어부들>(강대진),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등 32편에 이어 62년 <월급쟁이>(이봉래), <전쟁과 노인>(임권택), <감나무골의 공서방>(김응천), <진시황제와 만리장성>(권영순) 등 다시 34편을 소화하는 저력을 과시한다. [사진 4] <돈>(김소동, 1958)에 출연한 김승호.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벗어나고자 일확천금을 꿈꾸다 사기 당하는 순박한 농민 역을 맡았다 63년에는 <굴비>(김수용), <로맨스그레이>(신상옥), <아버지 결혼하세요>(김용덕), <혈맥>(김수용) 등 23편(총 제작 편수 148편)에 출연했는데, 이 결과는 <가정교사>와 <청춘교실>로 청춘영화 붐을 일으키며 인기 스타로 떠오른 신인 신성일이 이 해에 출연한 21편보다 많은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46세에 이른 중년이었다. 64년에는 <월급봉투>(김수용), <비련의 왕비 달기>(최인현, 약풍), <명동에 밤이 오면>(이형표) 등 33편, 65년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 나봉한), <마포 사는 황부자>(이봉래), <배비장>(신상옥) 등 35편, 66년 <하루살이 인생>(권혁진), <아빠의 청춘>(정승문), <대폭군>(1966, 임원식) 등 26편, 67년 <만선>(김수용), <역마>(김강윤), <돌무지>(정창화) 등 17편, 68년 <장군의 수염>(이성구), <풍운>(권영순), <영원한 모정>(김기덕) 등 9편, 69년 <허공에 진 청춘>(정원), <사화산>(고영남), <마법선>(이창근) 등 2편, 1971년 <족보>(고영남) 1편 등 이렇게 김승호는 23년에 이르는 영화의 삶을 통해 모두 3백14편을 남겼다. 김승호표 서민영화의 형성과 넉살 후시 녹음시대였지만 그는 거의 성우에 의존하지 않았다. 표피적인 몸의 표현만이 아니라 감정이 실린 음성연기까지 갖춘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려 했다. 그의 사극에서는 서민연기와는 다른 카리스마가 있었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 전창근), <요화 배정자>(1966, 이규웅)의 고종황제, <진시황제와 만리장성>(1962, 권영순)의 진시황제는 물론 <대폭군>(1966)의 묘장왕,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 임원식)의 대원군, 그 밖의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1956, 김소동), <평양기생 계월향>(1962, 이태환)의 배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 5] <대폭군>에 출연한 김승호 김승호 연기의 또 다른 면모는 넉살과 딴청으로 비벼낸 해학과 풍자이다. 무남독녀를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려다 오히려 제가 만든 덫에 걸리고 마는 <시집가는 날>(1956)의 맹 진사, 돈 에 눈이 멀어 횡령, 공문서 위조 따위의 불법 행위를 벌이다가 법망에 걸리자 위장 자살극을 벌이는 <인생차압>(1958)의 모리배 이중생, 새 부임지에 와서도 엽색행각을 버리지 못하는 <배비장>(1958)의 제주 목사 등이 이런 유형이다. 특히 <인생차압>은 금전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타산적인 탐욕의 허상을 시니컬하게 표출하여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뭐라 해도 그의 연기 본령은 서민의 애환과 삶을 꿰뚫어 보고 엮어내는 데에 있다. 사채 꾼의 꼬임에 빠져 노름판에 끼어들었다가 재산을 날리는 <돈>(1958)의 농사꾼, 술에 찌들어 살아가는 <곰>(1959)의 무식한 목수, 우직하고 성실하나 가족에게 유독 권위적인 <박서방>(1960)의 연탄아궁이 수리공, 두 남매를 키워 아들을 고등고시에 합격시킨 <마부>(1961)의 홀아비, 밀수배의 농간에 놀아나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감나무골의 공서방>(1962)의 고리대금업자, 복덕방 간판을 내걸었으나 찾는 사람이 없는 <혈맥>(1963)의 복덕방 영감, 리어카를 장만하는 것이 소망인 한강 다리 밑의 <지게꾼>(1963), 아내와 함께 서울에 사는 자식들을 보러 왔다가 수모를 겪고 돌아가는 <굴비>(1963)의 시골 노인, 고된 일을 하며 아들을 성공시킨 <하루살이 인생>(1966)의 하역부, 두 명의 자식을 바다에 잃고도 어부 일을 버리지 못한 <만선>(1967)의 곰치, 옛정을 찾아 시골장터를 찾는 <역마(驛馬)>(1967)의 체 장수 노인 등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 비록 <로맨스 빠빠>(보험회사의 직원)나 <삼등과장>(운수회사 출장소장)의 경우처럼 그럴 듯하게 보인 도시의 샐러리맨도 불황으로 실직하거나 상관의 눈치나 보는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외관상 한복과 양복의 차이가 있을 분 이런 배역들이 김승호표 서민영화를 형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했다. [사진 6]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성실한 가장의 역할로 출연한 <로맨스 빠빠>의 김승호 [사진 7] 시대에 뒤떨어진 마부의 역할로 출연한 김승호, 좌측은 맏아들 역할의 신영균 그의 출연작 중에는 영화사에서 언급되는 대다수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단 한 번의 외도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시골 은행 간부의 인생유전기 <육체의 길>(1959)을 비롯한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박서방>, <로맨스 빠빠>, <마부>, <삼등과장>, <굴비>, <로맨스그레이>, <혈맥> 등 흑백영화와 노련한 형사 역을 맡아 사진작가(신성일)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헤쳐 나간 유일한 색채영화 <장군의 수염>(1968, 이성구)이 그 예이다. 이상의 작품은 바로 김승호 연기의 베스트10에 해당된다. [사진 8] <장군의 수염>에서 노련한 형사 역할로 출연한 김승호, 좌측은 김성옥 듬직한 체구와 선이 굵은 얼굴, 특유의 발성과 연기력으로 서민적 애환을 만들어낸 연기파 김승호는 오손 웰스다운 중후함과 찰리 채플린적 풍자의 양면성을 보여 주었다 (김종원, 「서민적 체취와 정서 녹여낸 늦둥이 국민배우: 김승호의 생애와 연기」 문화관광부 선정 문화인물 ‘김승호 회고전’ 책자) . 그의 영화 활동은 광복의 격동기에 시작되어 1950년대의 도약기를 거쳐 60년대에 피크를 이루며 대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어떤 시련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것을 서민의 삶과 정서로 녹여내려 했다. 당면한 현실을 이해타산으로 넘기려 하기 보다는 운명으로 수용하고 굽힌 자세로 헤쳐 나가려 했다. 때로는 <육체의 길>의 경우처럼 과장된 연기로 리얼리티를 떨어트리기도 했지만 <인생차압>의 이중생이나 <로맨스그레이>의 저명교수처럼 임기응변과 넉살로 극복하려 했다. 그래서 김승호 연기에는 해학적인 요소와 함께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짙게 묻어난다. 1.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삼애사, 1969, 157쪽)에는 전창근 감독의 <해방된 내 고향>(1947)이, 또 다른 그의 저서 『평전 한국영화인 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265쪽) 김승호 편에는 <밤의 태양>으로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고 기술하였다. 그 밖의 연구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