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는 그쳤나요
- 감독
- 장진
- 제작년도
- 2004
- 출연
- 김관우, 박은빈, 공호석, 류승룡, 한승희, 이풍운, 정혜영, 김대령, 민현정, 김수빈
올해는 유독 배우들의 육체가 활동하거나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이 그 영화를 지정한다는 느낌을 받은 영화들이 많았다. 배우의 몸이 빚어내는 고요하거나 육중한 리듬, 마찰하거나 돌파하는 신체가 지녔던 파열음의 강도, 장르와 무관하게 육신의 움직임에서 비롯된 우스꽝스럽거나 숭고한 제스처가 우리를 압도하는 장면을 통해 영화들이 지금 무엇에 집중하고 있으며 결국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를 찾게 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가령 호아킨 피닉스의 둔탁한 어깨가 거친 호흡을 따라 오르내린다. 폭력으로 점철된 유년 시절과 떨쳐버릴 수 없는 전장의 기억, 죽음의 공포는 온몸에 난 흉터에 새겨졌고, 욱신거리는 어깨를 감싸고 앉아 있는 그의 등은 고통을 즉자적으로 지시한다. < 너는 여기에 없었다 >(2017)는 트라우마를 짊어진 피닉스의 육체가 매번 스크린이라는 면에 부딪히면서 우리를 향해 밀고 나오는 과정으로 보인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사뿐한 발걸음과 우아한 손짓은 공기보다 가벼워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유령처럼 집안을 부유한다. 그가 걷거나 앉는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동작에 이어 병상에 누워 허공을 바라보다가 급기야 여인의 무르팍에 엎드리는 무력함으로의 이행은 한 사람의 삶이 사랑과 집착, 광기와 허무로 인해 허물어지는 순간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 팬텀 스레드 >(2017)는 맹렬하게 달리는 자동차의 가속도로 인해 흔들리고 팽창하는 가시적인 세계와 스크린에서 서서히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는 쇠약한 몸짓의 대비를 통해 지독한 사랑의 파멸을 목도한다. 노래는 기막히게 잘 부르지만 잔악하고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카우보이는 영혼이 되어서도 노래를 부르며 하늘로 올라가 프레임 안을 떠나지 못하고, 사지가 절단되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청년의 신체는 아름다운 낭독 솜씨에도 불구하고 닭보다 못한 효율성 때문에 폐기처분된다. 온갖 풍파를 겪은 노인은 처진 뱃살과 늘어진 근육을 동원해서 끈덕지게 금광을 파헤친다. 땅을 파는 행위만으로 고단한 운명을 넘어서는 불멸의 순간이 제시되고, 유령마차의 탑승객과 같은 인물들이 안개 자욱한 집으로 들어서면 그들의 육체 또한 폐쇄된다. < 카우보이의 노래 >는 노래를 하고 사막을 횡단하고 이야기를 들을 사람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서부라는 장소보다 그곳에 머무는 다양한 신체들이 몰두하는 행동으로 인해 몹시 분주하고 재미나면서도 적막하고, 쓸쓸하면서도 장엄하다. 당당한 걸음으로 활보하는 톰 행크스와 머뭇거리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메릴 스트립의 보폭이 같아지던 순간은 < 더 포스트 >(2017)에서 거대한 인쇄소로 들어오는 빛, 신문이 생산되는 과정, 정렬된 활자판과 문장으로 조합하는 행위, 그것을 가능케 하는 숙련공들의 빈틈없는 노동과 마주하는 장면이다. < 풀잎들 >(2017)에서 카페를 들어서고 나가는 배우들의 걸음걸이와 느긋한 정도, 골목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 쪼그리고 앉아 대야에 심긴 잎사귀를 바라보는 각자 다른 웅크림의 정도와 몸의 기울기는 끊임없이 말을 이어가고 엿듣고 기록하고 상상하는 공간에 지금, 이곳의 애처롭고도 스산한 삶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다큐멘터리의 카메라 앞에 선 육신은 시간의 흐름 안에 놓인 존재임을 매번 일깨워준다. 사라졌거나 곧 사라질 공간을 기억하는 행위는 타인의 말을 듣고 카메라에 담아내는 끈기와 인내, 마을과 사람들의 얼굴을 찾아다니면서 함께 걷는 발걸음, 혼령을 달래기 위해 헤매는 몸짓들이 된다. 왕빙의 < 사령혼 >(2018)에서 감동적인 순간은 3부에 등장한다. 노인들이 앉아서 지난 삶을 증언하는 데 대부분을 할애한 이 영화에서 한 노인이 자리를 벗어나 집 안을 돌아다닐 때 꼿꼿한 노인들의 자세와 말이 흐트러지게 된다. 놀라울 정도의 기억력이나 죽음 직전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의 시간과 무관한 것처럼, 어쩔 줄 모르는 노인의 서성거림으로 인해 <사령혼>은 진혼에 멈추지 않게 된다. 원한조차 비켜 나갈 것처럼 음산하고 무시무시한 땅, 수습되지 못한 채 뒹굴고 있는 인골보다 서슬 퍼런 것은 증언자가 누구이건 동일한 경험과 기억으로 육화된 증언의 내용이다. 흐트러짐 없이 카메라를 향해 앉아 있던 그들이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엔 어김없이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변해있거나 사망했다는 자막이 등장할 때, 우리는 그들의 청청하던 눈빛과 품위를 잃지 않은 자세를 떠올리게 된다. 이 모든 영화들이 각별하지만, < 녹차의 중력 >(2018)과 < 백두 번째 구름 >(2018)에서 발견한 임권택 의 손과 <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2017)에 등장하는 바르다의 발은 낯설기 때문에 끈질기게 떠오르는 신체기관이 되어버렸다. 백 두 편의 영화를 만든 임권택의 손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과 바르다의 손은 그녀의 영화에 종종 등장했지만, 발이 스크린을 채운 것은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한 그녀의 발 사진과 어떻게 놓아도 불편해 보이는 임권택의 깍지 낀 손을 보면서 노년의 예술가가 창조한 세계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넘어서는 감동을 느낀 것이다. 영화에 입문하게 된 전설적인 계기나 오랜 시간 영화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겪었던 체험의 위대함, 명민하고 섬세하거나 과격할 만큼 고집스레 지켜온 연출의 태도와 그들의 손과 발의 활동을 연관 지어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더욱이 바르다는 여전히 카메라를 지닌 채 활동하고, 임권택은 소강상태에 빠진 시간을 견디는 중이라는 사실도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녹차의 중력>은 영화감독 임권택에서 출발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임권택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시간을 버텨 내는가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달빛 길어올리기 >(2011)를 마치고 < 화장 >(2015)의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약 4년 남짓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학교에서 강의하고,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김동호 의 < 주리 >(2012) 촬영현장을 찾는 것으로 집약된다. 임권택에게 작용되는 강제성이 이 시간의 핵심이고, <녹차의 중력>은 생산하지 못하는 무위의 시간은 그저 버틸 도리밖에 없음을 체득한 임권택의 제스처와 손, 얼굴을 떠나지 않는다.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시간을 견뎌내는 임권택과 그의 곁에서 그의 모든 것을 찍겠다는 정성일 모두가 무력함이나 조바심을 잊는 사람들처럼 무심하게 제자리를 지킨다. 기차 창에 기댄 임권택의 오랜 잠보다 기차 대합실에서 커피를 만지작거리는 손이나 세례를 받을 때 어정쩡하게 깍지를 낀 손에서 현재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도래하지 않은 영화의 행위를 상상하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그는 잠에서 이미 영화를 만드는 행위에 닿아 있을지 모르고,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장의 모습을 그의 손을 통해 불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의 활동은 몇 신에서 두드러지는데, 첫 번째가 녹차를 대접하기 위한 행동이고 둘째가 세례를 받는 장면이다. <녹차의 중력>은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에서 시작한다. 노래 ‘봉선화’가 흘러나오는 프롤로그에 이어 등장하는 것은 녹차를 대접하는 임권택의 모습이다. 그의 손은 어김없이 떨리고 있고, 그 때문에 달그락거리는 다기의 소리는 녹차를 덜어내거나 물 따르는 소리, 주전자를 탁자에 놓는 소리보다 강렬하게 들린다. 그 공간은 소리의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떨리는 손으로 인한 소리들과 고요함의 이어짐이 곧 말수가 적고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임권택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자, 이 영화가 처음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임권택이란 사람의 시간이다. 특히 세례식은 고단할 정도로 반복되는 제식 행위(앉고 일어서고, 같은 구절을 반복적으로 낭송하고, 줄지어 서고, 감사를 표하고, 인사한다.)에 피곤함을 느꼈을 법한 임권택의 무심한 표정보다 가지런히 손을 모으지 못한 그의 구부정한 손가락 마디가 먼저 눈에 띈다. 또 그보다 연배가 낮은 대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행위나 영성체를 받기 위해 길게 줄지어 서서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잠재우고 있는 그의 우물쭈물한 자세가 그의 시간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아내가 권유했을 것 같은 예식은 모종의 강제성을 띠고 있지만, 그는 불편하고 어색한 감정을 애써 숨기는 것 같다. 예식 내내 손가락을 풀면 큰일 나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깍지를 끼고 있던 그의 손에 비해 세례를 받은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뒷짐을 진 그의 손이 오히려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정성일 은 두 손이 행하는 동작을 보여줌으로써 평소 같으면 집과 영화 촬영장 외의 장소를 찾을 일 없는 그의 예외적인 순간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마지막으로 <주리> 현장을 찾은 임권택의 모습이다. 이 현장에는 감독이 넘쳐나도록 많고 카메라도 많다. 연기하는 배우나 조감독도 감독들이고, 김형구의 카메라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카메라, 정성일의 카메라까지 현장을 기록하는 중이다. 하지만 임권택의 카메라와 그의 배우들과 그의 영화는 여기에 없다. 분주하고 복잡한 현장에서 연기를 한 후, 모니터를 보고 있는 김동호의 뒤편으로 임권택이 앉아 있다. 그는 상념에 잠겨 있거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거기 앉아 영화를 찍고 있는 다른 감독의 현장을 견디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의 눈에 맺혀 있는 보이지 않는 영화를 가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임권택만 혼자 동떨어진 존재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그의 손마저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프레임 바깥에 있을 손을 상상하는 우리가 더 숙연하고 비통한 기분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에게 바르다의 손은 익숙하다. < 낭트의 자코 >(1991)에서 자크 드미의 등을 따라 움직이거나 <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2000)에서 감자를 줍고 거대한 그림의 끝을 잡고 있거나 카메라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봤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이 직접 등장하지 않더라도 야위고 검버섯으로 덮인 드미의 손을 쓸어내리거나 옅어져 가는 눈동자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무성한 수풀과 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카메라의 움직임에서 그녀의 손길을 가늠할 수 있다. <아녜스의 해변>(2008)에서 바닷가를 걷거나 뒷걸음으로 퐁데자르를 지나가는 것뿐 아니라 <다게레오 타입>(1976), <벽, 벽들>(1981) 등을 통해 자신이 살던 거리부터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이르는 장소를 무수히 걸었던 그녀의 행위를 떠올릴 수 있다. 그녀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로부터 쿠바, 이란, 미국을 오가는 동안 카메라에 담긴 풍경과 사람들의 얼굴과 행동들을 기록했고, 이 영화들은 타인을 만나기 위해 어디든 이동하는 그녀의 생생한 표정과 경쾌한 걸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도 이와 유사한 궤적을 보이지만, 몇 가지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녀가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진 것과 멈추어 서거나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녀가 걷는 행동이 조금씩 줄어든 만큼 차를 타고 이동하는 거리는 늘어가고, 동행자도 생겨났다. 사진작가 JR과 포토트럭을 타고 마을을 방문하고 주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거대한 사진으로 집의 외벽을 덮는 과정을 지켜본다. 또 JR은 바르다의 소원을 들어주기도 한다. 휠체어를 타고 루브르 미술관을 활보하면서 그녀가 사랑하는 그림들을 보고 스위스에 살고 있는 고다르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한다. 활기와 웃음과 사소하고도 재미있는 수다로 가득 찬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처음엔 낯설다가 둘의 대화에 익숙해질 무렵, 바르다가 점점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문득 떠오른다. 그녀는 여전히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고, 카메라를 통해 누군가를 기억하거나 자신의 삶을 믿고 있는 타인들의 표정을 지켜본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더욱더 느려질 것이고, 계단을 다 오르지 못하고 멈춰 서게 될 것이다. JR은 그녀의 발과 강제로 확장된 눈의 사진을 기차에 붙임으로써 그녀의 온 생애에 깃든 행동을 기념하는 것 같다. 동공이 확장된 눈과 동그란 발가락은 자유롭고 거침없이 행했던 걸음과 봄과 들음을 위한 멈춤의 순간에 새겨진 오랜 시간의 흔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수술을 위해 찍은 눈은 바르다가 볼 수 없는 순간이고, 그녀의 맨발도 스스로 찍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모습이기 때문에 JR의 적극적인 행위가 개입되어야 한다. 게다가 거대한 크기로 인해 거대한 형상은 움직이는 기념비가 된다. 즉 JR이 바르다와 함께 하는 순간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는 방식이자, 선로를 따라 프랑스 곳곳을 활보할 발과 마주칠 사람들에게나, 영화를 통해 기차와 더불어 이동하는 바르다를 마주할 우리들에게도 각인될 표지가 될 것이다.
이명세 의 < M >을 보는 도중에 묘한 데자뷔가 왔다. 2007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어떤 면에서 1993년작 < 첫사랑 >의 영화적 환기이거나, 20년을 간극으로 둔 리바이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둘 다 첫사랑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거니와, 둘 다 이명세 감독의 가장 개인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르게 단언하건대 <첫사랑>은 이명세의 가장 빛나는 걸작 중 하나다. 1993년 당시 이명세 는 충무로 상업영화계의 새로운 신동이었다. 데뷔작 < 개그맨 >은 그가 배창호의 (보다 뛰어난) 수제자라는 증거였다.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1990)는 새로운 한국영화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예언 같았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아니었다면 김의석 의 < 결혼 이야기 >(1992)를 비롯한 로맨틱 코미디의 물결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성공을 스스로 비웃기라도 하듯 이명세는 당대의 관객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을 < 첫사랑 >을 만들었다. 최종 관객은 겨우 5천 명이었다. < 첫사랑 >은 대학에 들어간 열아홉 살 소녀( 김혜수 )가 연극반 연출자( 송영창 )를 짝사랑하고, 몇 번의 데이트와 첫 키스를 한다는, 별것 없는 이야기다. 아니, 여기에는 사실 이야기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이명세 는 첫사랑의 기억과 감정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그려 내는 데만 집중한다. 이명세는 송영창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바람에 실려 창밖으로 흘러나가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선풍기와 부채를 총동원했고, 60 테이크 이상을 찍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한낮에 반짝거리는 지붕을 표현하기 위해 기와를 모두 식용유로 칠했고, 목련을 모조리 따서 세트에 달았다. 그런 이명세의 방식은 서사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던 당시의 한국 영화계에서는 가히 도착적인 방식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이명세 는 < 첫사랑 >이 ‘첫사랑’이 아니라 첫사랑의 ‘기억’에 대한 영화라는 걸 분명하게 한다. 첫사랑은, 그것이 누구의 첫사랑이든 관계없이, 한 인간의 인생에서 가장 짜릿하면서도 슬픈 기억이다. 그것은 중년이 된 어느 날 신발 끈을 묶다가, 혹은 평소처럼 버스를 타고 광화문을 지나가다, 불현듯 찾아와서 심장을 두들긴다. 이명세는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첫사랑의 순간들을 마치 세밀화를 그리듯이 재현하고,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첫사랑에 빠졌던 순간의 풍광과 기억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나는 김혜수 가 자전거를 타고 벚꽃이 날리는 거리를 내달리다가 송영창 의 창가로 부유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순간 여전히 뭔가 끓어오르는 감흥을 느낀다. 그것은 스타일과 이야기가 완벽하게 합일된, 혹은 오로지 스타일로서 온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마술 같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 첫사랑 >은 이명세 가 ‘스타일리스트’라는 이름을 얻게 된 첫 번째 영화였고, 이명세는 같은 접근법으로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를 만들며 상업적인 감각과 자신의 스타일을 버무리는 데 (처음으로) 성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자아내는 마법 같은 순간은 < 형사 >와 < M >에서 다시 재현되지 않았다. 이명세의 영화에 대한 접근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개인적으로 우겨보자면, 나는 이명세 영화의 즐거움이 CG의 발전과 함께 사그라졌다고 믿는다. 여기서 내놓고 싶은 또 다른 이름은 팀 버튼이다. 팀 버튼의 몰락은 사실상 CG 발전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의 영화는 수공예로 정성스럽게 창조한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지장 속에 있었다. < 비틀 주스 >나 < 배트맨 > 시리즈, < 가위손 >과 그 이후의 영화들을 한번 비교해 보시라. 그가 자신의 수공예적 상상력을 번들거리는 CG로 재창조하는 순간 물리적인 아름다움은 처절하게 거세된다. 이명세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의 초기작들이 주는 감흥은 ‘손맛의 상상력’이라고 믿는다. 혹은 ‘손맛의 공간감’이라고 믿는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창조한 <지독한 사랑>의 세트를 한번 생각해 보라. 그 꿈처럼 가짜 같은 바닷가의 집은 CG로 재창조하는 순간 꿈이 아니라 그냥 가짜가 될 것이다. 손맛을 흉내 낸 CG 이미지가 그걸 대체하는 순간, 이명세의 스타일은 묘하게 숨이 죽어 버리는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명세 의 최고작을 꼽으며 < 첫사랑 >, < 지독한 사랑 >,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 사이에서 망설일 테지만, 손맛의 스타일리스트로서 이명세의 가장 순수한 절정이 <첫사랑>이었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한마디 붙이자면, 이명세 감독의 초기작들은 < 개그맨 >을 제외하면 DVD로 좀처럼 발매되지 않고 있다. 이건 거의 문화재 관리 직무 유기에 가까운 일이다.
이만희 감독의 < 물레방아 >는 1966년 문예영화의 붐 속에서 제작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당시 “본능에 사는 여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원색을 표출”(한국일보, 1966.11.8)하는 “향토색 짙은 애욕의 비극”(조선일보, 1966.11.10)으로 “격조 높은 문예영화”(경향신문, 1966.11.12.)라는 호평을 받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 라쇼몽 >을 연상시키는 카메라워크가 지적받기도 하고, 금분( 고은아 )이 신치규를 받아들이는 데 설명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관객 동원에도 성공하고 해외영화제에도 출품되며 1960년대 예술영화를 대변하는 ‘문예영화’ 중 하나로 남는다. 후대에 이 영화가 재발견되는 것은 2000년대에 불완전판으로 공개되면서부터이다. 영화평론가들에 의해, “ 이만희 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정성일), “한국영화사상 가장 신비로운 영화”(허문영), “이만희 영화의 또 다른 경지”(김영진)라는 극찬을 받으면서 이 영화는 이만희의 장르 영화와 문예영화의 범주를 넘어서는 독특한 영화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그러나 현재 음성이 부분적으로 유실된 상태인 데다 마지막 부분이 개봉 당시와는 다른 형태로 남아 있어서, 이 영화는 이만희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본격적인 비평에서 조심스러운 면이 있으며 그에 따라 한국영화사 안에서의 위상도 안정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걸작이라는 소문에 비해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도 그러한 데에서 기인한다 하겠다. 그러나 불완전판만으로도 < 물레방아 >는 충분히 독보적이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연유한다. 첫째, 밑도 끝도 없는 인간의 욕망을 한국영화사상 가장 절실하게 설득해낸다는 점이고, 둘째, 그 속에서 아웃사이더의 비애를 처절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 물레방아 >에 대해서는 원작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차용하지 않은 영화라는 말이 있으나 그것은 표면적인 서사 차원의 문제이고 실제로는 오히려 원작의 본의에 가장 충실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원작은 이방원과 ‘그의 처’ 혹은 ‘계집’으로 지칭되는 여인의 지독한 사랑을 다룬다. 그 사랑은 여인이 지닌 본연의 고혹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원작에서 “새침한 얼굴이 파르족족하고 길다란 눈썹과 검푸른 두 눈 가장자리에 예쁜 입, 뽀로통한 뺨이며 콧날이 오똑한 데다가 후리후리한 키에 떡 벌어진 엉덩이가 아무리 보아도 무섭게 이지적(理智的)인 동시에 또는 창부형(娼婦型)으로 생긴 것이다.”라고 형용되는데, 그 치명성으로 인해 도발되는 남성들의 정욕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물레방아’로 상징되는 자기 집중적인 정념의 세계를 샤머니즘적 홀림으로 번역한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바닷가의 여름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사람을 죽였다고 하듯이, 방원(신영균)은 햇살이 부서지는 여름날 제의에서 만난 여인에게 매혹되어 신들린 것과 같은 상태에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여기에서 그러한 방원의 행동을 관객이 설득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애초부터 이성이나 의지를 지니지 않은 듯한 무구한 요부의 이미지와 그것에 홀린 우직한 남자의 불가항력적 행보이다. 왜 병자한테 시집을 갔느냐는 질문에 “왜는요? 보내니까 갔죠.”라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거나, 내연의 대가로 받은 고무신에 대해 묻는 남편에게 “주인이 사줬어.”라고 무심하게 말하고, 자기로 인해 신치규( 최남현 )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는 방원을 보면서 “왜 자꾸 때려요?”라고 천진하게 되묻는 여자( 고은아 )의 모습은 그 자체로서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을 보여준다. 그러한 매력이 중심에 있는 이상 방원의 비이성적인 행동은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비이성적 행동을 이끄는 방원의 신들린 욕망은 버선, 발, 속옷 등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페티시즘적 카메라워크와 빛과 어둠의 현란한 대비를 통해 형상화된다. 게다가 영화의 결말을 보다 처절한 파국으로 밀고 가는 인자는 주인공이 떠돌이라는 점이다. 원작에서 남자 인물은 ‘이방원’으로, 여자 인물은 이름 없는 계집으로 제시되는 것과 달리, 영화에서는 오히려 방원이 자신의 성씨를 모르는 인물이 되고 여자는 ‘금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는 방원과 금분의 사회적 위상을 상징한다. 원작에서 계집은 방원과 바람이 나서 함께 다른 마을로 도망친 인물이지만, 영화에서는 금분이 있는 마을에 떠돌이 방원이 찾아들게 된다. 금분은 마을에서 가장 어여쁜 여인으로 마을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청상과부이다. 떠돌이가 금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한 일이며 그 무리한 일에 매달릴수록 방원이 감내해야하는 박해는 강화되어간다. 방원의 우직한 사랑에 대한 마을 남성들의 야유는 질투에 찬 분노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그것이 외화 되었을 때 방외인에 대한 집단적 폭력의 양상을 띠게 된다. 방원이 분이를 죽인 뒤에 마을 사람들이 분이의 시신만을 수습해가는 마지막 장면은 감히 탐할 수 없는 것을 탐한 방외인의 결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물레방아 >는 사회 문제를 정면을 다루지 못한 채 문예영화라는 이름 아래 자연과 유비된 인간의 본능에 탐닉하거나 에로티시즘으로 에둘러야 했던 시대에 오히려 원초적 욕망과 정면 승부한 영화이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욕망의 분배 면에서 제 몫이 없었던 방외인의 비애를 절실하게 드러내는 아이러니를 성취한다. 존재의 무상(無常) 내지 인간의 구경(究竟)이라는 보수적인 세계로 귀의하지 않으면서 저돌적인 욕망과 그 부조리한 결과에 대해 논리를 넘어서는 개연성을 이만큼 부여한 영화는 한국영화사상 없었다. 이는 이만희 감독의 천부적인 영상 감각과 그 감각에 내장되어 있는 진정성의 기율에서 비롯된 놀라운 성취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