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S
- 감독
- 이지연
- 제작년도
- 2019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이 글을 접하는 누구나 한 번쯤은, 일상의 답답함과 울적함을 주체할 수 없어서 기차를 타거나 마실을 나가는 것으로 어떻게든 해 보고자 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그러한 일상에서 비일상으로의 탈출이 본질적인 해답은 되지 못하곤 한다.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간다 해도 완전히 야반도주라도 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머지않아 반드시 본래의 거처로 돌아와야 하며,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일상과 마주해야만 한다. 바로 귀로(歸路)에 서야 하는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 귀로 >(1967)는 바로 이런 현대인의 고뇌를 서울과 인천이라는 두 도시 간의 이동을 통해 명징하게 드러낸 수작이다. 지금까지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 연재에서는 당대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1960~80년대의 여러 한국영화를 돌아보았지만, <귀로>와 같이 주인공의 심경과 처한 상황이 두 도시 간의 반복적인 이동(통근과 통학이라는 ‘일상’이 아닌)을 통해 비유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드물었다. 이미 많은 비평에서 <귀로>를 ‘멜로드라마 최고의 걸작’ 혹은 ‘세월의 흐름을 타지 않는 세련된 구도’ 등으로 호평하고 있는 만큼, 본 연재에서는 본 작품의 또 하나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공간적 배경에 대해 주목해 보고자 한다. 주인공 지연( 문정숙 )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으로, 하반신 마비로 인해 성불구자가 된 남편 최동우( 김진규 )와 14년째 그 어떤 것도 만족되지 않으며 족쇄와 같은 결혼 생활을 인천의 어느 양옥집에서 이어 나가고 있다. 지연에게 있어서 족쇄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남편의 신문 연재소설 원고를 서울 서소문의 신문사에게 전달하러 가는 시간뿐이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이러한 지연의 인천(지연의 집)-경인선 열차 3등 칸-서울역-서소문(신문사 소재지)을 오고 가는 이동 동선을 반복적으로 비춘다. 집을 떠나 인천역에서 경인선 디젤동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서 서소문으로 향했다가, 잠시 남산 중턱에서 시내의 경치를 내려다본 후 다시 서울역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열차에 올라타는 행적의 시퀀스를 되풀이해 목도하다 보면, 마치 지연의 일탈을 몰래 지켜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카메라는 1967년의 서울-인천 간의 이동을 세련되게 잡아낸다. 지연의 궤적을 뒤쫓아가며, 주목할 만한 공간적 배경을 짚어보도록 하자. 경인선 열차 지연은 서울에 원고를 전달하러 오고 갈 때마다 항상 경인선 열차, 3등 칸을 이용한다. 이 시기 경인선은 복선화가 완료되어(1965년), 시간당 1편의 열차가 운행되었으며 차내 모습은 극 중에서도 비치듯이 긴 의자에 손잡이가 달린 사실상 지금의 수도권 전철과 유사한 분위기를 띠었다. 지연은 열차를 타는 본인의 심경을 딱 한 번 대사로 읊는데,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시원스러워서 타고 싶은데 막상 타고 나면 답답해요(36:52경)”가 바로 그것이다. 본인을 옥죄는 가정에서 벗어나 서울행 기차를 타지만, 그곳조차도 완전한 도피가 되지는 못하는 상징으로서 경인선의 디젤동차 열차가 등장한 것이다. 인천역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경인선 디젤동차의 내부 모습 경인선 열차를 타는 이유를 강 기자에게 털어놓는 지연 서울역과 인천역 인천역은 지연에게 있어서 족쇄와 같은 일상을 상징하는 공간일 것이다. 반면에 서울역은 그러한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물리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관문이자, 동시에 그마저도 남편의 원고를 전달해야 한다는 일상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에서 지연에게 경인선 열차와 유사한 공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작중에서 서울역과 그 앞 지하도는 총 네 차례 등장하는데, 처음 두 번은 지연 혼자서, 세 번째는 지연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강 기자( 김정철 )와 함께, 그리고 네 번째는 강 기자 혼자서 지하도의 계단을 오르내린다. 자연스럽게 지하도가 지연의 원치 않았던, 하지만 거스를 수 없었던 일탈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셈이다. 나아가 서울역의 1번 플랫폼 또한, 지하도와 유사하게 지연의 일탈과 포기(혹은 체념)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으로서 비친다. 서울역 1번 플랫폼에 도착한 경인선 열차. 현재 이 플랫폼에서는 천안행 1호선 급행열차가 발착한다. 서울역 지하도를 올라가는 지연의 뒷모습. 일부러 사선 구도를 취함으로써 6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어색함이 전혀 없다. 서소문 건널목과 서소문 고가차도 서울 도심 유일의 기차 건널목인 서소문 건널목을 이렇게까지 중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담아낸 영화는 아마 본 작품이 유일할 것이다. 나아가 당시에 갓 준공되었던 서소문 고가차도(당시엔 ‘서소문 육교’라고도 불렸다)도 함께 등장함으로써 단절(건널목)과 소통(고가차도), 혹은 고즈넉한 인천의 집과는 다른 복잡한 근대도시 서울을 효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서소문 건널목은 작중에서 지하도와 마찬가지로 총 네 차례 등장한다. 처음 두 차례는 서울역과 서소문의 신문사를 오고 가는 지연 혼자서, 세 번째는 지연을 무작정 뒤쫓는 강 기자의 갈팡질팡하는 시선(1:01:01경)으로, 네 번째는 다시 지연 혼자서 건널목 앞에 멈춰 서는 시퀀스에서 서소문 건널목은 등장인물들의 막막한 심정을 대변하듯이, 마치 단절을 의도한 것 마냥 육중한 기관차가 스크린을 가로지른다. 지연을 무작정 뒤쫓는 강 기자의 시선에 서소문 육교와 사방으로 향하는 도로 안내판이 담긴다. 아마도 지연에게 마음을 빼앗겨 갈팡질팡하는 강 기자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인천의 집까지 쫓아온 강 기자 앞에서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직후, 지연은 서소문 건널목 앞에서 육중한 화물열차에 길이 가로막힌다. 참고로, 작중에서 딱 한 번, 지연이 서소문 건널목이 아니라 그 위를 가로지르는 서소문 고가차도를 도보로 건너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나 지금이나 서소문 고가차도는 자동차 전용 도로로서, 보행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서소문 고가차도 보행 장면은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한형모, 1966)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데, <귀로>에서의 해당 씬은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의 그것과 거의 유사한 위치에서 촬영되었다. 물론 맥락과 의도는 두 영화가 완전히 다르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1년 간격으로 똑같은 씬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여러 의미를 고려하게 만든다.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에 등장한 서소문 고가차도 보행 씬 본 작품에서 유일하게 서소문 건널목이 아닌 고가차도를 건너가는 시퀀스. 오른쪽 뒤편으로 중앙일보 사옥, 대한빌딩 등이 관찰된다. <귀로>는 대사량이 그렇게 많은 영화가 아니다. 물론 주인공 지연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처럼 내뱉는 중요한 대사가 삽입되어 있지만, 러닝타임의 상당 시간은 지연의 뒷모습(어떤 비평에서는 문정숙을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라 칭하기도 했다)을 비추며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음악과 공간적 배경만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연출 덕에, 처한 상황이 지연과는 다소 다를지라도 1967년 공개 당시는 물론이요, 거의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귀로>를 보며 지연의 심경에 공감하거나 나아가 감정 이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귀로>를 보고 난 후, 시청 앞과 서소문 일대를 거닐며, 철거 공사 중인 서소문 고가를 올려다보고 그대로 서울역으로 향해서, 경인선 열차에 올라타 인천역에 내려보는 일종의 <귀로> 성지순례 체험을 해 보는 것 또한, 본 작품을 온전히 즐기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그만큼 현대인에게 주는 울림이 큰 작품이니 말이다. 김영준(도쿄대학 특임연구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박홍민 은 지금까지 세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내용은 단순하다. 그는 비극적인 가족 이야기나 멜로드라마를 주로 다룬다. 신작 < 그대 너머에 >도 다르지 않다. 영화 두 편을 찍고 멈춘 상태인 감독 경호가 지연이란 이름의 젊은 여성과 만난다(박홍민의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항상 지연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이름이 인숙이라고 밝힌 뒤 경호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지 묻는다. 놀라 과거를 부정한 경호는 지연의 뒤를 몰래 따라가 인숙과 20년 만에 재회한다. 도입부의 줄거리만 들어도 <그대 너머에>에서 < 물고기 >(2011)와 < 혼자 >(2016)의 세계가 반복되고 있는 건 맞다. 영화 속에서 반복을 즐기는 스타일은 영화와 영화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박홍민은 ‘죽음, 귀신, 령, 꿈, 기억, 인연, 불안, 무의식’의 세계에서 좀체 벗어나지 않는다. <그대 너머에>를 연작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전작들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혼자>처럼 공간의 구성에 신경 쓰는 법이 여전한 가운데, 카메라가 훨씬 매끄러워진 점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경호가 지연을 따라 놀이터에 도착해 벌어지는 장면이 그러하다. 아마도 경호가 숨어서 바라볼 동안, 지연과 인숙이 대화를 나눈다. 얼핏 보기에 인숙의 시점 아래 지연이 놓인 것 같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지연의 시선이 살짝 어긋나 있어서 흡사 그녀가 사시(斜視)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참을 그러다 지연이 자리를 바꾸어 인숙 쪽으로 다가가면, 카메라는 180도로 시선을 돌려 그네에 앉은 두 인물을 포착한다. 문득 인숙이 “나무가 참 앙상하다”라고 말하면 카메라가 그 의도를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려 앙상한 겨울 나무와, 그 곁에서 해에 걸린 또 다른 마른 나무를 마저 붙든다. 그 나무를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 지연이 원래 앉았던 벤치 위로 인숙과 지연이 나란히 앉아 있다. 그들은 언제 맞은편으로 옮긴 것일까. 사소하지만 복잡한 배려가 깊이 밴 이 시퀀스는, 집으로 가는 지연을 인숙의 등 뒤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끝난다. 인숙의 주관적 시선 아래 전개될 것 같던 시퀀스가 인숙의 시선을 가장하는 척하면서 마치는 거다. 이 시퀀스의 카메라 움직임은 사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경호와 지연이 만나는 시퀀스의 그것을 변주한 것이다. 아무리 반복을 즐기는 박홍민이라고 하더라도 왜 그가 굳이 어려운 방식으로 미장셴을 구축하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매끄러우나 의미는 더 모호해지는 이러한 방식에 대한 답을 구하자면 1시간 정도 영화를 더 보아야 한다. <혼자>의 주인공 수민이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는 감독인 것처럼, 경호가 두 편의 영화를 찍은 감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창작자로서 경호는 감독 박홍민과 좀 더 결부된 인물이다. 그는 의식의 물화에 매진하는 박홍민을 닮았다. 그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지하층의 어두운 방에 앉아 그는 세 번째 영화의 바탕이 될 시나리오를 쓴다. 그런데 그가 쓰는 시나리오의 내용은 지연이 전달해준 이야기 그대로다. 그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쓴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노트북에 적혀 있는 이야기가 과연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건지 확실하지 않다. 심지어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그의 노트북은 자동 피아노처럼 그가 할 말과 행동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문자로 연주한다. 경호는 인숙이 쓴 수천 장의 노트에 기록된 인물일까? 사정은 인숙이나 지연도 비슷하다. 지연은 자기가 글 속의 인물인지 애초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인지 스스로 질문한다.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미치도록 써 글로 남기는 인숙은 기억이 흐릿해질 때마다 자신과 경호, 자신과 지연의 관계를 의심한다. 경호, 인숙, 지연의 사정은 기실 박홍민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에게 적용된다. 박홍민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자신이 유령이 아닌지 반복해서 묻는다. 그 질문은 자기 실존을 확인하는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다. 골목에서 지연이 경호에게 하는 말은 ‘유령 선언’이다. “어차피 어딜 가더라도 아저씨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경호는 자기가 실존한다는 증거를 자기 시나리오 안에서 찾으려 한다. 그는 인숙이 지어놓은 의식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를 문자 그대로 시도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지연이 하는 방식을 따라, 그는 자기 머리를 인숙의 머릿속으로 세게 밀어 넣는다. 머리를 쥐어 잡으며 일어난 그는 인숙의 집, 즉 인숙의 의식을 방문하고, 인숙 또한 의식의 입구에 달린 문을 열어 그를 받아들인다. 상황을 다시 정리하면 이러하다. 인숙의 의식 세계라 할 집 안에서 경호와 인숙이 만나 이야기를 나눌 동안, 인숙이 종종 낯선 존재로 인식하는 지연은 문밖을 지키고 섰다. 그런 까닭에 인숙의 집에 걸린 액자에서 지연의 자리는 지워져 있다. 경호와 대화를 나누던 인숙은 어느 순간 기억이 흐릿해지자 기억을 정리해둔 수천, 수만 장의 노트의 바다 위에서 거칠게 몸부림친다. 집 곳곳에 가득 쌓인 노트 곁에서, 지연은 물론 경호와 인숙은 그들의 유령성을 재확인할 따름이다. 그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공간은 쓰라린 고통과 함께 허구의 세계임을 드러낸다. 인물들이 유령성을 확인하는 순간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내 의식을 건드리는 건 어떤 비디오에 녹화된 이미지다. 경호는 인숙의 방에서 오래전에 자신이 찍어둔 비디오 테잎을 발견한다. 경호와 인숙이 비디오를 보면서 대화를 나눈다. 개미 한 마리가 나무 위로 기어가는 중이다. 개미에 관해 이야기했던 기억을 나누다 인숙이 “카메라를 움직여 봐봐, 아래로, 아래로”라고 주문한다. 그러면 카메라가 시선을 땅 쪽으로 이동해 모래 위를 걷는 또 다른 개미를 바라본다. 이건 좀 이상한 상황이다. 보통 비디오를 보다 이동을 요구할 때, 그 이동은 시간의 순서상 앞이나 뒤를 의미한다. 그런데 인숙이 비디오에 찍힌 공간 내에서 아래로 이동할 것을 요구하자, 그게 이상하지 않다는 듯이 카메라는 그 요구를 따른다. 비디오에 찍힌 이미지는 고정되기 마련인데, 인숙의 기억 속 주문에 맞춰 경호가 과거에 찍어놓은 이미지가 자유자재로 새로운 이미지를 추가한다. 고정되었던 이미지 내부에서 인숙의 기억이 요구하는 대로 새 이미지를 꾸미게 되고, 기억을 더듬던 인숙의 손으로 옮겨 간 카메라는 20년 전의 경호의 모습을 되살려낸다. 시간을 당기고 늘여서 그 사이로 무언가를 삽입이라도 하겠다는 투다. 게다가 카메라를 인숙에게 넘겨주는 건 경호의 손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게 기억의 손이란 말인가. 이어 인숙의 기억이 사라질수록 경호의 이미지도 흐릿해진다. 남은 건 이미지뿐인 이 세계에서, 인물의 부유하는 의식 속에서 유일하게 실존하는(혹은 실존을 돕는) 건 카메라다. <혼자>와 비교해 더욱 풍성해진 박홍민의 ‘골목 오디세이’는 ‘98분 44초부터 102분 25초’에서 폭발한다. 이 장면은 <혼자>의 ‘47분 56초부터 56분 28초’ 사이에 전개되는 지옥의 골목 신과 하나의 세트를 구성한다. <혼자>에서 아무리 걸어도 골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민을 카메라가 어김없이 잡아내던 것처럼, <그대 너머에>의 카메라는 골목 사이로 잠긴 인숙을 기어이 끄집어낸다. 박홍민의 세계가 구저분해 보이는 건 주요 공간이 가난한 동네의 골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홍민은 골목과 집의 집합이 꾸며낸 이미지가 중세 도시의 그것이라도 되는 양 다룬다. 골목은 중세의 여명이 깃든 전근대의 공간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카메라는 앞서 인숙과 지연이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 두었다 하나의 이미지 - 골목으로 재현한다. 놀이터에서 인숙은 옆에 앉은 지연이 낯선 인물인 것처럼 예전 기억을 전했다. “꿈이랑 똑같이 딸을 잃어버린 날, 온 동네를 찾아 헤매다가 내가 혹시나 하고 집에 가봤는데 지연이가 울면서 마루에 앉아 있더라고요” 221초에 걸쳐 인숙은 지연의 이름을 부르며 골목 사이를 돌아다닌다. 골목은 공간 전체를 미로처럼 연결하지만, 정작 그것을 잇는 자기 모습은 보이지 않는 이상한 길이다. <혼자>에서 수민이 지연에게 말하기를, 골목은 머릿속, 뇌 안에 있는 주름 같다고 했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고요한 마을의 서쪽 모퉁이 집에서 나온 인숙은 골목 사이를 돌고 돌아 동쪽 아래 어귀로 불쑥 등장한다. 경호의 비디오가 인숙의 기억을 물질로 바꿔놓은 것처럼, 221초의 여정은 인숙이 딸에게 해줬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물화한다. 나는 그 221초의 이미지를 올해의 장면이라 부를 것이다. 90년대 이후 대중영화에서 골목은 주요한 공간의 지위를 잃어버렸다. 미로로서의 골목과 가난한 멜로드라마라는 점에서 나는 배창호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의 도입부를 기억했다. 택시 기사가 된 주석(안성기 분)이 오래전 헤어진 검은 장갑(김보연 분)을 알아보고 뒤를 쫓는다. 그런데 검은 장갑을 뒤따르는 일이 만만하지 않다. 철거민들이 모여 사는 작은 동네에 불과한데,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은 좁으면서 끝이 안 날 것 같은 미로에 다름이 없다. 갖가지 짐을 이고 든 검은 장갑은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카메라는 신비하고 매력적인 물체에 매혹된 듯이 그녀의 뒤를 따른다. 영화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나는 박홍민의 골목 멜로드라마가 <꼬방동네 사람들>의 21세기 버전처럼 보인다. 하층민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요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골목에서 건져낸 멜로드라마. 범죄의 일기였던 전편에 비해 다소 따뜻해지긴 했으나, 박홍민의 멜로드라마는 우울하다. 노스탤지어를 제거했을 때 장르 영화는 얼마나 잔혹해지는가, 그게 박홍민이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무릇 현실은 실존을 넘어선다. 영화를 완성하고 죽은 감독은 다시 유령이 되어 인적이 드문 충무로의 극장 주변을 맴돈다.
< 9월이 지나면 >은 창작의 세계를 다룬 단편 작품이다. 이와이 슈운지의 < 러브레터 > 포스터 앞에서 주인공( 임지연 )이 나카야마 미호의 포즈를 따라 하는 장면이 제법 유명하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다소 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다. 영화에 뭔가 어색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던 것.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시퀀스 하나가 이상했다. 그 장면을 말하기 위해서는 일단 영화의 맨 앞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지연은 건축학도인데,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작업실에서도 자기 자리에만 모기장을 치고 작업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는 선배 한 명의 설계도를 훔친다. 선배는 상을 많이 받았으니까, 이제 후배들을 위해 양보할 때도 됐다는 게 그녀의 논리다. 그 날 밤 작업실에 있었던 건 그녀뿐이었으니 당연히 의심을 받게 되고, 그녀는 더더욱 혼자가 된다. 건축학도에게 자신의 작업실이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 선배, 승조( 조현철 )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지연에게 작업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품게 되는데, 어느 날 승조는 지연의 가방에서 도난당한 설계도를 발견하면서 지연의 비밀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일순간 어색해 지고 지연은 다시 설계도를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놓으려고 결심한다. 자, 이제부터 나오는 장면이 이상하다. 지연은 자신이 훔친 설계도를 원래 주인 자리에 가져다 놓으려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킨다. 꼼짝없이 붙잡혔다 싶을 때 승조가 영웅처럼 등장하고, “나카야마 미호에게 고마워해라” 는 명대사를 날리며 그녀의 모자를 자기가 쓰고는 달아난다. 승조는 자기가 도둑으로 몰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건물 밖으로 내빼는데, 아 이 추격전이 참으로 묘하게 진행된다. 도둑 잡으러 사람들이 달려드는데, 처음에는 2~3명이 쫓다가 점점 추격자들이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30명쯤 되는 사람들이 마치 좀비처럼 승조를 쫓는다. 이 장면을 눈감고 들으면 남녀의 고함소리가 정말 좀비와도 같다. 여기에 당혹감이 있었다. 독립영화로, 많은 엑스트라를 쓸 환경이 못 되는 작은 영화에서 굳이 30명이나 사람을 채워서 추격전을 만들었다는 것. 게다가 장르를 일순간에 바꾸는 위험을 무릅쓴 채. 처음에는 혹시 코미디를 의도하고 찍은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실제로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웃기도 한다. 이 영화를 다시 감상하고 나서야 이 장면이 이렇게 찍혀야 할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장면의 중요 포인트는 승조를 쫓는 무리에 지연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진짜 범인이 가짜 범인을 쫓는 대열에 합류하는 것. 다시 말하면 설계도를 훔친 당사자가, 내가 잘못한 일을 대신 책임져 주는 인물을 쫓게 되는 황당한 상황. 원래 주어진 역할이 아닌 다른 역할을 하는 캐릭터. 다시 장면들로 돌아가 보자. < 러브레터 > 포스터 앞에서 지연이 나카야마 미호의 포즈를 따라하는 장면. 그리고 승조가 그녀를 위해서 그녀의 모자를 대신 쓰고 범인으로 가장하는 장면. 모두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역할을 해보는 장면이다. 뜬금없지만 영화 < 이티 >의 초반, 엘리엇은 초콜릿으로 이티를 집으로 끌어들인다. 이티는 엘리엇을 보고, 엘리엇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해 본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이티는 엘리엇의 마음에, 엘리엇은 이티의 마음에 ‘동기화’ 되기 시작한다. < 9월이 지나면 >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이와 비슷한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추격 시퀀스에 엑스트라가 30명이나 필요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영화는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창작자를 구원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같이’ 뛸 기회를 마련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골방에 틀어박혀 있던 창작자가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그들과 같은 곳에 서있어봐야 한다는 것. 추격전 이후 지연은 용기를 내서 설계도를 훔친 건 자기라고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승조가 묻는다. “왜 그랬어?” 아직 9월이 되진 않았지만, 이미 상쾌하게 깨어난 얼굴로 지연이 대답한다. “9월이 지나면 저를 깨워주세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되니, 이제 ‘나’를 드러내는, 창작의 다음 단계가 열린 것이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어요. 순수한 것은 오래가지 못하나봐요. 9월이 지나면 저를 깨워주세요. Green Day -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