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합체
- 감독
- 정예린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전재영
1. 시네마테크 파사주 여정의 시작: 영화관의 문 시네마테크 여행기 프로젝트의 제목을 ‘시네마테크로 가는 통로(길목)’라는 의미를 담아 ‘시네마테크 파사주(Cinematheque Passage)’로 결정했던 날이었다. 나는 그 늦은 새벽 시간에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은 베를린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지구(Prenzlauer Berg), 카스탄니엔알레 77번가(Kastanienallee 77, Berlin)에 위치한 32석 규모의 단관극장, ‘희망의 빛 영화관(Lichtblick Kino)’의 정면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베를린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지구 카스탄니엔알레 77번가에 위치한 32석 규모의 단관극장 ‘희망의 빛 영화관(Lichtblick Kino).’ (사진: LICHTBLICK KINO ) 나는 분명 이 영화관의 출입문에 매료가 되었던 것 같다. 영화관을 세상과 연결하는 문은 영화를 보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지만,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 문은 접촉할 수 없는 사물이 되었다. 대부분의 복합상영관, 영화를 소비문화로 바꾼 이곳에는 문이 없기도 하다. 보통 쇼핑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드넓게 매표소와 팝콘과 음료 판매대가 보인다. 영화관 입장 시간이 되면 입구는 이미 열려 있다. 건물 입구부터 영화관에 들어갈 때까지 모든 문은 자동으로 열리기도 한다. 수많은 유동 인구를 위해 모든 통로는 최대한 개방되고, 자동으로 여닫힌다. 하지만 ‘희망의 빛 영화관’의 문은 영화만을 위한 통로를 지키듯이, 영화관에서 영화 보기를 고수하는 파수꾼과도 같이 서 있다. 문 옆 창문에는 아마도 현재 상영 중인 듯 보이는 장-뤽 고다르의 < 네 멋대로 해라 >(1960), 제베타 스틸이 부른 ‘Calling You’가 떠오르는 퍼시 아들론의 < 바그다드 카페 >(1987),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 지옥의 묵시록 > (1979) 포스터가 붙어 있다. 다음 사진에서는 좁은 직사각형 모양의 극장 내부가 보였다. 한 열에 2~4석 정도밖에 없는 좁고 길쭉한 아주 작은 영화관이다. 내부는 흰색 벽에 몬드리안풍의 단색의 장식이 군데군데 걸려 있다. 이 화려하지 않은 영화관 내부는 어딘지 모르게 창백한 배우의 얼굴과 같이 보였지만, 어떤 소박한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 그건 내 시선을 빼앗긴 스크린 앞에 놓인 참나무색 피아노 때문이었다. 음악 공연이 열리기도 하고, 때로는 무성영화 반주용으로 사용되리라 생각했다. 2. 시네마의 유토피아 파리 드골 공항에서 파리 13구에 있는 오스떼를리츠(Gare d’Austerlitz)역으로 이동해 첫 번째 시네마테크 파사주 목적지이자, NECS(European Network for Cinema and Media Studies, 유럽 영화미디어학 네트워크) 학회가 열리는 몽펠리에로 가는 야간열차를 탔다. 출발이 지연되어 열차는 11시 가까이 되어 출발했다. 열차 출발과 동시에 거의 잠이 들었다. 시차로 인해 잠에서 깼을 때 새벽 4시가 조금 지났다. 생각보다 깊은 잠을 잤다. 열차 침대가 생각보다 편안하다는 생각에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새벽을 달리는 기차, 창밖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잠시 어느 역에 정차했다. 내리는 이는 없을 것 같은 그런 기차역. 아마 기차도 잠들 시간이었나 보다. 다시 잠들 수도 있는, 잠의 통로에서 난 이 여정에 대해 생각했다. 시네마테크 파사주는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등 이 영화관 기행문을 구상하면서, 찾았던 정보들을 떠올렸다. 이미지를 역사 개입의 도구로 사용하는 존 아캄프라(John Akomfrah)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남긴 말을 영화관의 설립 취지에 넣은 시애틀 컬럼비아 시티(Columbia City, Seattle)에 있는 예술영화 전용관 ‘비콘 시네마(the Beacon Cinema)’를 알게 되었을 때 다른 무엇인가 새로운 생각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에 들어선 느낌을 받았다. 특히 영상 아카이브와 같은 곳은 야누스 얼굴의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난 한 곳에 있으면서 다르게 존재할 수가 있지.’ 여러분들이 요청하는 좀 더 다른, 아카이브에는 없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는, 그것은 몽타주 철학이어야 합니다. 몽타주는 재개입의 가능성과 새롭게 재설정된 목적을 가지고, 즉 다른 야망을 지니고 이미지로 되돌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1] 그렇다. 영화관은 이미지의 낙원이어야 한다. 처음 나의 계획은 각 국가의 대표적 시네마테크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히트블릭크 키노와 비콘 시네마(모두 빛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처럼 도시 곳곳에 흩어져서 자생하는 보통 아트하우스 시네마라 불리는, 예술영화 전용관에 관해 알게 되면서(이렇게 무작정 표를 끊고 의자에 앉아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화를 보고 싶은 영화관은 찾을수록 나왔다), 나는 시네마테크의 범위를 국립 영화 아카이브에서 유럽 전역의 예술영화관으로 넓혀야 한다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시네마(cinéma)와 도서관(bibliothèque)의 합성어인 시네마테크는 영화와 영화 관련 자료를 수집, 보존, 상영하는 장소다. 나는 이 ‘시네마테크’에 영화를 보러 가는 곳의 의미를 더 확대하고 강조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찾지 않는 서점이 문을 닫듯이 영화관도 그럴 운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가야 보존과 수집도 의미가 있고, 그 반대로 계속해서 상영되기 위해서 수집하고, 보관하고, 보존하는 등의 수고롭고, 때로는 시간을 다투는 영화적 실천을 누군가는 하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시네마테크에 수집될 영화들이 이 수많은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시네마테크에 보관된 영화들은 이 영화관들에서 빛의 이미지가 되어 새로운 관객을 만난다. 스위스 바젤에 위치한 예술영화 전용관 키노 쿨트(Kult Kino)로 가는 길에 놓인, ‘THEATERPASSAGE’라는 이름의 굴다리. AI를 이용해 ‘CINEMATHEQUE PASSAGE’로 수정. ‘시네마테크 파사주’ 프로젝트를 떠올렸던 시점에 내게 많은 예술영화관 정보의 원천이 되었던 곳은 유럽의 예술영화 전용관 협의체인 유로파 시네마(Europa Cinemas)에서 구축한 ‘유로파 시네마 지도’였다. 이 온라인 지도 에는 소속 예술영화관들의 좌표가 붉은색 점으로 표시되어 있다. 나는 지구본 형태의 유럽 대륙 지도에 붉은 점으로 환원된 예술영화관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서, 한 나라의 영화문화를 상징하는 거대한 시네마테크 집합체를 구상했다. 프랑스에는 총 107개 지역에, 208개의 예술영화관이 곳곳에 퍼져있다. 총 스크린은 440개이다. 아마 유로파 시네마에 속하지 않은 예술영화관을 포함하면 그 이상의 거대한 시네마테크를 떠올려야 할 것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시네마테크에서 보기 어려운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는 지금의 영화들을 만날 수가 있다. 이탈리아에는 208개의 영화관이 있고, 스크린 수는 254개이며, 총 116개 지역에 고르게 흩어져 있다. 이들 예술영화 전용관은 모두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대체로 그해의 대표적 예술영화, 독립영화를 상영하지만, 각 영화만의 고유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이 정체성은 영화관 이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특히 프랑스에는 영화 종주국답게 감독의 이름을 딴 영화관이 많다. 여러분이 떠올릴 수 있는 감독은 대체로 있다. ‘시네마 장 비고’, ‘자크 타티 시네마’, ‘시네 막스 린더’, ‘마르셀 파뇰 시네마’. 시네마테크의 창립자 앙리 랑글루아의 이름을 딴 극장도 물론 있다(‘시네 앙리 랑글루아즈’). 배우의 이름을 딴 ‘장-폴 벨몽도 시네마’, 그리고 아마 이즈음에 여러분들이 기대할 장-뤽 고다르의 이름을 딴 영화관은 프랑스가 아닌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어 아쉽지만, 누벨바그를 함께 이끌었던 프랑수아 트뤼포의 이름을 딴 영화관(Cinéma François Truffaut)과 그의 영화 제목을 딴 ‘400번의 구타 영화관’이 있다. 이탈리아에는 당연하게도 문학가의 이름을 딴 ‘시네마 단테’가 있다. 특히 문학 또는 예술 사조를 딴 영화관들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작은 도시 카스텔 볼로네제에 있는 ‘시네마 모데르노(Cinema Moderno)’와, 페루지아에 있는 ‘포스트모데르니시모 시네마(PostModernissimo Cinema)’다. 아마도 포스트모데르니시모 시네마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은 곳, 가장 출입구가 아름다운 곳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 페루지아에 있는 '포스트모데르니시모 시네마'로 들어가는 문. (사진: POSTMODERNISSIMO ) 유럽 전역에는 총 779개 지역에 1,246개의 예술영화 전용관이 있다. 총 스크린은 2,921개다. 이렇게 전 세계 곳곳에 자리 잡은 예술영화관을 모아 거대한 시네마테크 집합체를 이룬다면 그것은 아마 오직 ‘세계의 영화관’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영화(시네마)의 유토피아이지 않을까? 어쩌면 시네마테크와 예술영화 전용관은 하나의 건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보관된 필름과 자료들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딘가에서는 오래된 영화가 다시 상영되고, 누군가는 작은 극장의 문을 열고, 다른 누군가는 어둠 속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본다. 이 모든 장소와 시간과 영화가 연결될 때,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시네마테크라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곳으로 가는 통로를 걷고 이어서, 지도책을 만들고 싶었다. 시네마테크 파사주. 영화관을 찾아가는 길. 영화관의 문으로 이어지는 통로. 3. 6월 20일 밤의 기억: 시네마 유토피아 나는 오늘, 시네마 유토피아(Cinema Utopia) 체인 중 하나인 몽펠리에 시네마 유토피아 (Cinema Utopia Montpellier) 문 앞에 서 있다. 문은 닫혀있다. 몽펠리에를 떠나기 전날 밤, 난 시네마 유토피아로 갔다. 마지막 상영작 중 하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숙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정류소에서 몽펠리에 폴 발레리 대학(Université Paul-Valéry Montpellier)으로 가는 5번 트램을 탔다. 지난 18일부터 오늘 20일 오후까지 내가 참석했던 NECS 학회가 이 대학에서 열렸다. 몽펠리에 도착 후 학회 일정과 예기치 못한 일들로 인해 저녁 시간에 이곳에 가는 것을 연일 놓쳤기에, 오늘 밤이 마지막 기회였다. 시네마 유토피아는 학회장에 가는 길에 항상 지나쳤던 곳이기에 익숙한 발걸음으로, 이미 마지막 영화가 시작했기에 조급한 마음으로 1층 높이의 계단을 올라, 마호가니색의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미 가와세 나오미(Kawase Naomi) 감독의 <야큐시마의 환상>은 시작한지 40분이 지났고, 히치콕이 아닌 캉탱 뒤피외(Quentin Dupieux) 감독의 공상과학 미스터리 코미디 애니메이션 <현기증(Le Vertige)>은 곧 있으면 끌날 시간이었다. 내가 희망을 품고 뛰어온 영화인 마르코 응웬(Marco Nguyen)과 니콜 아타네(Nicolas Athané) 감독의 애니메이션 <짐 퀸(Jim Queen)>은 시작한 지 10분이 지났다. 회색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매표소 직원이 먼저 눈짓과 손짓과 말로 들어갈 수 없다고 알려 주었다. 마치 오늘의 막차를 놓친 마음으로 난 포스터가 걸린 벽에 놓인 붉은색 벨벳 의자에 앉았다. 의자 옆으로 영화관 1, 2관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길게 이어졌다. 물론 영화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차단기 앞으로 지나가는 열차의 속도 사이로 새어 나오는, 건너편 내가 가야 할 곳의 풍경의 빛줄기처럼, 영화관의 닫힌 문 틈새로 이미지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돌아서 떠나야지만 사라지는 빛의 소리였다. 시네마 유토피아는 일종의 예술영화 전용관 체인으로, 프랑스 남부 및 북부 지역의 주요 도시에 흩어져 공동의 영화 프로그램으로 연결되어 있다. 몽펠리에에서 동쪽으로 기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아비뇽(Avignon)’에, 서쪽으로 3시간 거리에는 ‘툴루즈(Toulouse)’에, 그리고 거기서 북서부 방향으로 더 2시간 30분을 기차로 가면 도착하는 ‘보르도(Bordeaux)’에 시네마 유토피아가 있다. 북쪽 지역에는 트루와(Troyes)에서 멀지 않은 마을인 ‘퐁생트마리(Pont-Saint-Marie)’와 파리 북서부 발도와즈 주 생투앙라우몬(Saint-Ouen l’Aumône)에 다른 2곳의 시네마 유토피아가 있다. 시네마 유토피아는 모두 유럽 예술영화관 협의체인 유로파 시네마 회원관이다. 특히 시네마 유토피아의 독특함은 자체 프로그램에도 있지만, 이 영화관이 추구하는 영화를 알리기 위해 사용한 광고 문구에서 드러난다. “Cinéma garanti sans 3D.” 직역하자면, “3D가 없는 영화임을 보장합니다.” 다소 프랑스식 또는 시네마 유토피아식의 유머로 이해하자면, ‘겉모습만 화려하거나 속임수 같은 효과가 가미된 영화가 아님을 보장한다’는 의미이다. 일종의 식품이나 농산물에 유전자 조작이 아님을 알리는 ‘GMO-Free’ 표시와 같은 것이다. 오로지 조작되지 않은 현실의 기록으로서의 영화를 추구하는 이 영화관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구이다. 시네마 유토피아를 수호하는 존재는 그래서 천사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예술영화 전용관 체인 ‘시네마 유토피아’의 로고. (사진: Utopia Montpellier ) 나에게 영화관에 들어갈 수 없다는 수신호를 알린 점원이 물과 음료는 원하는 금액을 내고 자유롭게 마실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지갑에 있던 1유로를 음료 테이블에 놓인 돼지 저금통에 넣고 시원한 물을 한 컵 따랐다. 매표소와 관객 대기 장소는 마치 가정집 응접실처럼 아담했고, 이 공간의 주인인 것처럼 고풍스러운 의자와 커다란 괘종시계가 우아하게 놓여있었다. 매표소 옆 계단을 통해 3관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있지 않아 <현기증>이 끝나고, 관객들이 나왔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살짝 영화관 내부로 들어갔다. 마치 예배당과 같이 고요한 침묵이 흐르는 분위의 영화관이었다. 스크린 오른쪽에 걸린 회화 때문에 더 그러한 인상을 받은 듯하다. 회화 속에는 촛불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는 여인의 고요하고 평온한 몸짓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성경책이 놓여있을 법한 나무로 만들어진 스탠드 위에, 이달 몽펠리에 시네마 유토피아 영화 프로그램 책자가 놓여있다.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을 찾아 떠난, 아니면 영화의 본질을 찾아 떠난 순례자를 위한 안내서라도 되는 듯이 그렇게 놓여있다. 에필로그: 밤이 오면, 우리는 시네마테크에 간다. 세실리아: “오늘 밤에 새 영화를 개봉한대” - < 카이로의 붉은 장미 >(우디 앨런, 1985) © Orion Pictures Corporation 여러분은 어떤 날에 시네마테크에 가시나요? ‘시네마테크 파사주, Episode 2&3’부터 뤼미에르 영화박물관, 판테온 시네마, 로잔 시네마테크, 그리고 룩셈부르크 시네마테크 방문기가 펼쳐집니다. *** [1] Haley Weiss, “ John Akomfrah and the Image as Intervention ,” Interview Magazine , June 27, 2016. (접속일: 2026. 8. 2) 정찬철(영화미디어학 연구자) l 국립부경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영화와 미디어에 관한 논문과 글을 쓴다.
<BECK: Mongolian Chop Squad> 중 (사진: " BECK: MONGOLIAN CHOP SQUAD ", MUBI)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컷의 크기는 순수한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 『H2』, 『러프』 등을 그린 청춘 스포츠 만화의 거장, 아다치 미츠루의 『미유키』엔 위와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한 소녀에 대한 소년의 애정을 편집자적 논평으로 일체화해 드러낸 귀여운 사례다. 이 발화는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고 미학적 실행으로 옮겨진다. 아다치 미츠루가 소녀를 그린 만화의 컷은 단행본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정도로 정말 커다랗다. 다만, 이 진담 섞인 농담처럼 만화의 컷은 진정 마음의 크기로 고스란히 치환될 수 있을까. 만화는 지면의 물리적인 크기 조정을 통해 독자적 의미 작용을 생성하는 매체일까.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만화(일본식 만화인 ‘漫画’에 한정)의 컷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원리를 따르는지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만화와 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란 매체 사이의 차이, 그리고 ‘실사’를 기반으로 한 영화의 감각이 무엇을 낳았고 낳을 수 없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장난스러운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치자면 우선 말의 역이 성립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만화 속 감정의 크기가 컷의 크기에 따라서만 조율되진 않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 숏을 떠올리게 하는 아다치 미츠루의 공백 컷이 대표적인 만화적 감정의 형성 방식이다. 서사의 고조가 일어나야 할 플롯의 이음매에 잠자리나 하늘, 물과 같은 자연물을 집어넣어 감정과 정취 사이의 낙차를 일으키는 그것. 투수가 던진 야구공이 포수의 글러브 혹은 타자의 배트에 닿기 전, 그 찰나의 순간을 유예하려 들어선 무관한 이미지의 연속과 충돌들. 이처럼 아다치 미츠루는 칸의 크기뿐 아니라 청춘 스포츠 만화의 장르적 내러티브에서 탈락한 오브제의 개입과 몽타주로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여는 작가다. 아다치의 몽타주는 곧바로 영화의 용어로도 (거슬러 올라가) 통역된다. 오쓰카 에이지의 말에 따라 모더니즘 시대의 일본 만화가들은 에이젠슈타인과 쿨레쇼프의 몽타주 등 소련 아방가르드 영화 이론과 렌즈 기반의 카메라 문법을 흡수하여 만화의 컷에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영화의 컷과 구분하기 위해 만화의 컷을 ‘칸’이라 씀) 망가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는 이로부터 영화 기호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더불어 말년의 데즈카 오사무 등은 ‘필름 만화’를 통해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더욱더 긴밀하게 고찰했다. 필름 만화란 필름의 한 프레임에 담긴 움직임 하나하나를 만화의 칸 하나하나에 그대로 대입하여 그린 방식이다. 영화의 1초 24프레임 상영 이전 단계에서부터 컷과 칸의 의미를 사유하고, 이로써 필름 운동의 근원적 사진 이미지를 고찰하며,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연결한다. 근래의 만화가들도 이 유산을 지키는 중이다. 대표적으로 『체인소 맨』의 후지모토 타츠키는 인물의 움직임을 앵글이나 칸 사이즈의 변화 없이 다수의 컷으로 나누어 그리는 필름 만화의 작법을 즐겨 쓰는 이다. 그러니 칸의 연속과 충돌이든, 몽타주이든, 기호적 이미지의 작용이든 만화와 영화의 칸-컷은 대개 분리 불가한 의미론 속에서 순환하는 편이다. 만화와 영화의 경계는 이래저래 더욱 희박해진다. 『H2』 중 (사진: “ Mitsuru Adachi ”, Character Design References) © Character Design References / Original artist Mitsuru Adachi ‘천상의 목소리’란 <BECK>의 제약 만화와 영화의 친족관계를 하나씩 밝히다 보니 만화가 영화처럼 보이고, 영화가 만화처럼 읽힐 지경이라 어지럽다. 그럼에도 두 매체를 감상할 때 느껴지는 감정의 차이는 명확하고, 이 차이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선 또 다른 만화가의 말을 빌릴 필요가 있겠다. 재즈 만화 『블루 자이언트』의 작가 이시즈카 신이치가 처음 편집자에게 『블루 자이언트』의 기획을 전했을 때다. 편집자는 “자네, 종이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단 거 알지···?”라며 물음표를 던진다. 이에 작가는 “그렇긴 하죠. 그래도 뭐 책을 두드리면 소리가 나기도 하니까···.”라고 능청스럽게 답한다. 요컨대 만화와 영화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면 역시 소리이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사운드가 기재될 수 없는 만화, 그 대척에 있는 영상 매체의 틈이 사운드의 유무에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발상이겠다.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에서 소거될 수밖에 없는 영화의 속성이 있다면 그것 역시 투수의 150km/h 짜리 직구가 날아가는 소리, 필로 숏 속 잠자리의 울음소리에 있을 것이란 뜻이다. 만화 『BECK』 시리즈(한국어판) 표지 (사진: “ BECK 10 ”, “ BECK 30 ”, 교보문고) 이러한 논지에서 만화와 영화의 관계 일변을 가장 적절히 포착할 수 있는 예시는 해롤드 사쿠이시 작가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연재한 소년 밴드 만화 『BECK』이다. 『BECK』이 걸작의 자리에 오른 큰 이유는 만화가 밴드 공연을 그린다는 본원적 모순에서부터 나온다. 밴드의 라이브 무대를 라이브의 순간으로 작동시킬 수 없다는 만화 매체의 커다란 제약이 있는 것이다. 이 한계에서 『BECK』이 택한 전략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주인공이자 밴드 BECK의 멤버인 유키오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천상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는 설정이다. 기타를 잡은 지 2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유키오가 단숨에 밴드 신의 스타가 되는 근거로 (아마 오아시스의 보컬 리암 갤러거를 모티프로 한) 그의 목소리가 제시된다. 즉 만화 『BECK』은 음악 없는 음악 만화라는 제약에 ‘목소리 없는 천상의 목소리’라는 이중의 제약을 가한다. 마치 『헌터x헌터』에 등장하는 제약과 서약의 원리(무언가를 제한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힘을 얻는단 설정)와도 같다. 유키오의 목소리를 만화로 그리지 못할 바엔 그것을 더욱 추상적인 경지로 이끌어, 독자에게 최대한 커다란 상상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BECK』에겐 커다란 어려움이 찾아왔다. 바로 인기 만화의 상업적 운명으로 인해 작품의 영화화가 이뤄진 것이다. 보통이라면 기뻐할 일이지만,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어떻게 실사화할지란 큰 문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영화 < BECK >(츠츠미 유키히코, 2010)은 아주 파격적인 작법을 택한다.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실사화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인지, 아예 유키오가 노래하는 목소리를 작중에서 소거해 버린 것이다. 유키오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순간마다 영화는 보컬의 마이크를 끈 듯 유키오의 목소리를 묵음 처리한다. 2010년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관객과 평자들은 이 선택을 비난했다. 음악 없는 음악 만화야 매체의 본질적 제약이라 친다 해도, 음악 있는 음악 영화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그렇다면 영화 <BECK>은 영화적이지 않은 것일까. 라이브 무대에 실사의 ‘소리’를 덧대지 않았기 때문에? 글쎄, 외려 영화 <BECK>이 택한 소리의 공백은 원작 만화의 설정을 이어가며, 소리의 효과를 이미지의 기호로 펼치는 영화적 역량을 보여준 사례다. 영화 <BECK>의 방식은 근원적으로 데즈카 오사무의 영화 기호론과 같은 일본 만화 고유의 작법을 세심히 이식한 쪽에 가깝다. 영화에서 유키오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화면은 일련의 몽타주를 늘어놓는다. 둥둥 떠다니는 구름, 슬로 모션으로 만화적 놀람의 표정을 기호로 발산하는 관객의 표정 등이 교차한다. ‘천상의 목소리에 놀란다’라는 사실을 가시적 문법이 아닌 기호의 원리에 빌려 구현하고, 소리의 공백을 메운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가 강속구의 시간을 잠자리 등의 자연물과 인물들의 표정에 가뒀다면, 영화 <BECK>은 유키오의 목소리를 구름 등의 자연물과 청중들의 표정에 구속했다. 시간의 리듬을 능동적으로 조작하는 만화의 영화적 작법이 한 바퀴 돌아 영화에 쓰인 것과도 같다. 돌고 돌아 만화와 영화는 또 비슷해지는 것일까. <BECK> 중 여기-있을 것의 애니메이션 여기에서 홀로 다른 선택을 하여 사고를 확장한 『BECK』의 산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코바야시 오사무 감독이 2004년에 만든 『BECK』의 애니메이션 <BECK: Mongolian Chop Squad>다. <BECK: Mongolian Chop Squad>는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란 문제를 정공법으로 받아 쳤다. “HUSKING BEE”라는 실존 밴드의 보컬리스트 히라바야시 카즈야의 목소리를 유키오의 가창 성우로 기용한 것이다. 유키오의 보컬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진 TVA 12화의 <Moon on the water> 라이브부터 BECK이 일본 최고의 화제 밴드로 일약 올라서는 그레이트풀 사운드 페스티벌 무대에서 유키오의 목소리를 묵음 아닌 실제의 소리(가창)로 드러낸다. 히라바야시 카즈야의 목소리가 ‘정말 천상의 목소리냐?’를 따지는 일은 무용하다. 여기서 재론하려는 바는 결국 매체 간의 차이다. 만화와 영화 <BECK>은 유키오의 목소리를 소거하고도 작동할 수 있었지만, 왜 애니메이션은 실사의 목소리를 택해야 했던 것일까. 단서는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영상’이라는 하나의 영역에 두지 않는 일에서부터 발견될 것이다. 앞서 반복했듯이 만화와 영화의 유사성을 짚고, 그 바깥에서 애니메이션만이 독자적으로 지니는 돌출성을 찾음이 마땅하다. 롤랑 바르트는 영화의 허구성을 ‘여기-있음’으로, 사진 매체의 경험을 ‘여기-있었음’으로 설명했다. 영화는 어느 이야기든 현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는 공백의 범주에 있고, 사진은 놀라울 만큼 이전의 시간을 비논리적이고 마술적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에서다. 영화와 만화 <BECK>이 유키오의 목소리를 현실화하지 않고 소리의 불능이란 제약에 묶어뒀던 것을 이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오쓰카 에이지의 말처럼 만화의 원류가 영화적 뿌리에 깃들어 있다면 만화는 시간의 일상적 흐름을 거부하는 사진의 역량, 이와 동시에 칸과 컷의 공백(혹은 몽타주)을 활용해 감정의 찰나를 유예하는 영화의 힘을 함께 작동시킨다. 영화 <BECK>은 그러한 만화의 메커니즘을 영화에 거꾸로 옮겨와 실현한 경우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은 어떠한 지대에 존재하는 매체일까. 이에 대해 필자는 < 신세기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야키, 1995)과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야키, 츠루마키 카즈야, 1997)의 현대성에 대한 글에서 애니메이션을 ‘여기-있을 것’을 바라는 매체라고 설명한 적 있다. [1] 영화적 이미지는 현실-스크린-관객 사이에서 도래하는 결과물이고, 만화는 그러한 영화적 망상에서 기반한 칸의 펼침이다. 반대로 애니메이션의 망상은 공급자가 일방적으로 구현해야 할 ‘의도’의 집합체다.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없는 시공간을 인공적으로 창조해야 한다. 곤 사토시의 말처럼 애니메이션의 “모든 장면엔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연은 없다.” 애니메이션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창작자(들)의 순수한 망상이다. 현실에 ‘없던 것’이자 ‘없는 것’의 표현이다. 말하자면 유키오의 ‘천상의 목소리’란 현실에 기반한 영화와 만화에서 발생할 수 없는 이데아적 사건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이 무한의 상상을 ‘의도적으로’ 실현해야만 자신의 미학을 지킬 수 있는 매체다. 요컨대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로 분화한 <BECK>의 선택, 구체적으로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표현한 방식들은 각각의 매체성을 즐거이 논할 수 있는 사례다. 밴드물의 정전이라 불리는 세간의 평가에 합일될 정도로 각 매체의 존재론을 증명하는 문제작이자 걸작이다. 아, 그러면 이쯤에서 “컷의 크기는 순수한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라는 아다치 미츠루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되새길 수 있겠다. 아마 의도의 측면에선 참이나 결과적으론 거짓일 듯하다. 영화적 논리에 기댄 칸의 크기는 결국 이미지와 시간의 공백으로서 독자(관객)의 능동성에 복무할 수밖에 없으며, 현대의 만화는 결국 태초의 영화적 속성과 떼놓을 수 없이 다수의 실사 영화적 기법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애니메이션만의 ‘의도적 세계’는 만화-영화의 유착관계에서 벗어나 ‘순수한 마음’이란 추상을 자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 그리하여 <BECK: Mongolian Chop Squad> 유키오의 목소리를 능동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었고, 이 속의 유키오는 <Moon on the water>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만화, 애니메이션, 실사 <BECK> (사진: “ BECK 22 ”, 교보문고 / “ Beck: Mongolian Chop Squad ”, IMDb) *** [1] “ [기획] 안녕? 에반게리온, 21세기 오타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시대를 탐하다 ”, 《씨네21》 1440호, 2024. 1. 18. 이우빈(영화기자) l 《 씨네21 》 기자. 친구가 없어 영화나 보러 다니고 집에선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본 1997년생.
지난 회에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을 쓰고 나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 아메리칸 스나이퍼 >를 보았다. 한동안 두 영화가 뒤섞이며 머릿속을 맴돌았다. 두 편 모두 걸작이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영화는 외적인 공통점이 많다. 특별한 능력을 갖춘 전문가-군인이 주인공이며, 승리한 전투를 그리면서도 서사는 모종의 패배를 다룬 희귀한 주류 전쟁영화라는 점, 보수파 감독이 만든 애국적 영화로 받아들어 졌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더 깊은 수준의 친연성도 있다. 7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는 공히 영화의 체험이라는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주류영화 중에서 언어화된 서사와 체험된 서사가 이렇게 다른 사례도 드물 것이다. 한 편의 영화는 고유한 감각경험의 집합체다. 그 집합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더 많은 것을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두 영화는 그렇게 하도록 고무한다. 그런 영화가 좋은 영화일 것이다. 그 고무에 힘입어 두 영화에 대해 몇 가지를 생각해보고 싶다. 1. 영화는 설득하면서 유혹한다. 설득의 도구는 주로 서사다. 캐릭터, 구성, 이야기의 힘이 서사라는 도구를 구성한다. 유혹의 도구는 한정되지 않는다. 배우의 얼굴, 그의 음성과 몸짓, 풍경, 신체의 손상과 물체의 파괴, 특정 피사체, 소리와 음악, 테크놀로지, 혹은 스크린이나 영사의 물리적 과정 자체... 스크린에 등장하거나 그것을 둘러싼 시청각적 요소들이 유혹의 도구가 된다. 때로는 창작자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도 종종 유혹의 도구가 된다. 한 편의 영화는 유혹의 복합체, 갖가지 페티시의 집합체다.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에서 가장 강력한 유혹은 초계정과 어뢰다. 두 사내는 2차대전에 참전한 초계어뢰정 함장이며 그들에게 전쟁의 대의는 1차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무공훈장에도 동료들의 수훈에도 무관심하다. 소형 초계정에 탑재된 어뢰라는 작은 물체로 적의 대형 구축함을 파괴하는 것이 그들의 진정한 쾌락이다. 그들은 애국적 전사이기 이전에 어뢰의 물신숭배자다. 어뢰라는 주물(呪物)의 물신적 쾌락은 관객에게 전이된다. 전이의 기술은 간단하다. 극중 인물은 어뢰의 운동을 볼 수 없지만 카메라는 본다. 카메라의 특별한 능력 덕에 물거품을 일으키며 구축함을 향해 맹렬하게 유영하는 어뢰의 관능적인 움직임을 객석에 앉은 우리는 고스란히 볼 수 있다.(#1) 어뢰가 발사되는 순간 그 운동을 보는 우리에게 모든 것은 잊혀진다. 오직 그 주물이 목표물에 정확히 도달해 대상을 산산조각내는 것이 이 운동의 유일하고 정당한 목적이 된다. #1 < 아메리칸 스나이퍼 >에서 가장 강력한 유혹은 총과 총알이다. 주인공 크리스 카일은 이라크 전쟁에 자원 참전한 전설의 저격병이며, 그에게 총과 총알은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의 초계정과 어뢰에 상응하는 주물이다. 총알은 어뢰와 달리 그 운동을 사실주의적 카메라조차 볼 수 없다. 쾌락의 완성은 총알의 운동을 21세기의 디지털 기술로 조작한 마지막 저격 장면에서 이뤄진다. 스크린에는 총알의 운동이 초저속 화면으로 전시되며(#2), 그 주물은 2km를 날아가 전설의 이라크 저격수 무스타파를 쓰러뜨린다. #2 모든 영화에는 잠재적 주물들이 전시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주물의 유혹은 은폐된다. 하지만 두 영화는 페티시즘 자체를 소재화한다.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의 페티시즘은 하워드 혹스적 전문가주의와 결합되어 있다. 여기엔 의무와 분노에 사로잡힌 포드의 전형적 영웅이 없다.(이 영화와 <에어 메일>(1932) < 윙스 오브 이글 >(1957) 등은 혹스의 전문가주의를 공유한다.) 이들 전문가에게는 자신의 도구와 그 도구의 능력이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의 제일 슬픈 장면은 두 주인공이 상부의 명령으로 자신들의 마지막 초계정을 육군에게 넘겨줄 때이다. 그들은 자기 육체의 일부와도 같은 초계정이 육상 운송수단에 의해 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응시한다.(#3) 가공할 능력의 어뢰를 뱉어내며 바다 위를 뱀처럼 유영하던 더없이 민첩한 육체가 이제 트럭에 실린 고철 덩어리의 형상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은 전쟁영화이지만, 자신의 도구를 빼앗긴 전문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3 2. < 아메리칸 스나이퍼 >의 물신성은 복잡하고 모호하다. 여기엔 약간 긴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이 영화의 물신성에는 전문가주의 이전에 주인공의 사적인 역사가 작용한다. 이라크 전장의 첫 시퀀스 다음에 어린 시절의 플래시백 장면이 이어진다. 크리스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린 사슴을 쏘게 한 뒤 “넌 사냥꾼의 소질이 있다”고 칭찬한다. 그리고 무서운 표정으로 “총은 절대 내려놔선 안 된다”고 다그친다. 총에 새겨진 역사는 가족이 모인 식탁에서 아버지에 의해 간접적으로 말해진다.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양과 양치기 개와 늑대. 세상에 악마가 없다고 믿고 싶어하는 족속이 양이다. 폭력으로 약자를 먹이 삼는 족속이 늑대다. 공격의 재능으로 무리를 보호하는 귀한 족속이 양치기 개다... 우리 집에선 양 따위는 키우지 않는다. 늑대는 내 손에 끝장난다. 누가 네 형제에게 싸움을 걸어오면 그 자식 끝장내버려라.” 여기서 서부의 정복과 연관된 미국 자경주의 역사와 서부극 전통을 떠올릴 수 있지만, 굳이 텍스트 밖의 지식에 기댈 필요는 없다. 아버지의 말에는 양에 대한 경멸, 늑대에 대한 증오, 그리고 양치기의 폭력적 능력에 대한 무제한의 믿음이 뒤섞여 있다. 식탁 장면 직전에 가족들이 교회에 앉아 목사의 설교를 듣는 장면이 짧게 나온다. 목사는 말한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스런 계획을 모릅니다... 하늘에 이르는 날에 우리는 주님의 뜻을 보고 이해할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 장면 다음에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씀 장면 사이에 놓쳐선 안 될 인서트 숏이 있다. 책상 위 성경의 줌인 숏(#4)이다. 교회 장면에서 성경을 만지작거리던 크리스는 이후 다시는 성경을 펼쳐보지 않는다. 후에 “네가 성경 읽는 걸 본 적이 없는데”라고 전장의 동료는 말한다. #4 인간의 불가피한 무지를 강조하는 목사의 설교, 펼쳐지지 않는 성경, 아버지의 신경증적이고 단순한 양치기론이 크리스의 전문가주의를 구성한다. 그러나 아직 그는 전문가가 아니다. 다음 장면에서 크리스는 청년으로 등장하고 전 장면의 아버지의 말씀이 내레이션처럼 이어진다. “넌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너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 장면은 기묘하다. 크리스의 건장한 신체와 얼굴을 줌인하는 카메라워크는 영웅 등장의 관습적인 기법이며 아버지의 내레이션은 그의 영웅성을 보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이은 장면들에서 그의 모습은 로데오경기를 쫓아다니는 한심한 반백수일 따름이다. 외도 현장을 들켜 쫓겨나는 그의 여자 친구는 소리친다. “당신이 카우보이인줄 아나본데 천만에. 하찮은 농장지기 주제에!”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이 테러리스트에 의해 공격당했다는 뉴스가 그를 잊었던 전문가 세상으로 이끈다. 그는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다시 총을 쥔다.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의 사내들에게 초계정과 어뢰는 이 영화의 서사 이전에 이미 주어진 주물이지만, < 아메리칸 스나이퍼 >의 크리스에게 총은 서사 초반의 어떤 과정을 통해 되찾아지는 대상이다. 크리스의 총 재획득이라는 선택에 시간적으로 앞선 주요 사건 혹은 상황은 네 가지다. ①“총은 절대 내려놔선 안 된다” “넌 너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아버지의 오래된 말씀, ②펼쳐지지 않은 성경, ③여자 친구의 모욕, ④케냐와 탄자니아의 미 대사관 테러. 하지만 이 사건들과 총 재획득의 인과관계는 모호하다. 총 재획득 직전에 발생한 ④의 테러를 유일하거나 가장 강력한 원인의 자리에 놓으면 총 재획득은 단선적인 애국주의적 선택이 된다. 이 해석은 편리하고 일반적이다.(이 영화가 미국에서 이스트우드 연출작으로는 최고의 흥행성적을 올린 사실, 미국과 한국의 일부 평자들이 이 영화를 이스트우드의 극우적 성향을 드러낸 영화로 간주한 사실, 그리고 크리스의 장례식장에서 각본가 제이슨 홀에게 “허튼 이야기 쓰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던 크리스의 전우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만족했다는 사실은 이 해석의 보편성을 방증한다.) 이 해석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스트우드는 그렇게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르게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①을 초자아의 무자비한 명령으로, ②를 무지와 비성찰의 은유로 ③을 총=남근 재획득을 욕망하는 계기로 간주해 전혀 다른 계열의 해석을 제시할 수도 있으며 그 해석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말 사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들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표정과 공기다. 미 대사관 테러라는 사건 이전까지 크리스의 얼굴에는 불안과 공허가 새겨져 있고, 화면에는 스산한 냉기와 기묘한 침묵이 흐른다. 불안과 공허의 표정, 냉기와 침묵의 공기. 이들은 사건과 무관하게 혹은 사건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으며, 이후 사건의 진행 과정에 수시로 틈입한다. 서사를 안갯속에 가두거나 마치 그 위에서 세워진 모래성처럼 보이게 하는, 그래서 인물들의 어떤 강렬한 결단과 선택도 한순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듯한 알 수 없는 불안과 침묵의 공기라는 초텍스트적 환경 혹은 기후가 < 아메리칸 스나이퍼 >를 주재한다. 그러니 크리스의 마지막 전투에서 아군과 적군의 경계를 지우며 세상을 삼킬 듯 불어오는 모래바람(#5)보다 그 주재자의 더 적절한 현신을 상상하기 힘들다. #5 총은 안갯속에 있고 모래바람 속에 있다. 총알은 안개를 뚫고 모래바람을 가르며 목표물을 향해 돌진한다. 총과 총알의 물신성은 그 특별한 운동능력에 기반할 것이다. 그런데 총알의 궁극적 목적지는 과연 적인가, 나인가. 2km를 순식간에 날아 가장 강력한 적의 몸을 꿰뚫었던 그 총알이 어째서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위로 결국 크리스의 몸에 도달하는가.(집에 돌아와 ‘평화롭게’ 살던 크리스는 자신이 돕던 정신이상자 상이군인의 총에 살해당한다. 그 살해 장면은 생략되어 있다.) 카메라 조작으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적을 관통한 총알의 운동 장면, 그리고 총알이 크리스의 몸을 뚫었을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장면. 그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안개와 모래바람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대답 될 수 없는 이 질문은 총이라는 주물의 이중성에 이르게 한다. 우리가 그 안개와 모래바람을 알 수 없는 한, 총은 언제 자리바꿈할지 모르는 공격의 무기/자해의 도구다. 이것이 < 아메리칸 스나이퍼 >에서 총이라는 주물이 지닌 불안정과 모호성의 정체다. 3.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의 기묘한 점은 국운과 생사가 걸린 전투가 이어지지만 그것이 사건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사건의 사건성을 압류하는 공기가 흐른다. 한 사건의 사건성은 다음 사건을 이끌어내는 물리적 정서적 강도이며, 대개 그 힘에 상응하는 정념적 주체의 감정 반응을 동반한다. <데이 워 익스펜더블>에는 양자 모두 왜소하거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의와 의무의 육중함도, 승리의 환희도, 죽음의 공포도 일상의 한 국면처럼 무심히 흘러가며 인물들은 격정 없이 소멸해간다. 이것이 지난 회에 말한 무언가 자꾸 사라져 간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 느낌은 한두 가지 장치의 효과는 아니다. 먼저 인물들의 전문가적 냉소주의라는 태도가 있다. 소형 초계정으로 일본 구축함을 침몰시키고 귀환한 영웅들의 표정은 하루 일과를 무사히 끝낸 직공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들을 맞는 전우들의 태도는 동네 요리대회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이웃을 맞는 주민의 태도보다 시큰둥하다. 이야기에 포함된 비관주의도 있다. 초반에 이미 사령관은 두 영웅에게 자신들이 완전히 소모될 때까지 소모 시간을 연장하는 역할만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인물들이 소실점으로 이동하는 구도의 심도 화면들, 어둠의 지속과 힘을 암시하는 표현주의적 조명 등도 함께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엔 사건들 사이에 침묵의 숏이라고 부르고 싶은 공백의 장면들이 있다. 영화는 때로 침묵한다. 유성 영화가 발명한 것은 발성이지만 발견한 것은 침묵이다. 무성영화에서 침묵은 조건이었지만 유성영화에서 침묵은 표현이다. 어떤 침묵의 표현은 모든 소리의 표현을 압도한다. 지난 회에 언급한, 남녀가 묵묵히 앉아있는 숏(#6)처럼, 사건들 사이에 등장해 사건을 잊은 채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장면들. 사건들의 힘은 이 장면들에 이르면 증발해버린다.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맥아더의 언어들, 그리고 영웅들의 용맹한 전투 서사는 남녀의 침묵 장면 앞에서 무력해진다.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이 체험되어야 할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런 숏과 장면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6 < 아메리칸 스나이퍼 >에서도 사건은 사건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 카일은 이라크에 네 번 파병되지만 네 번의 전투는 진전이 아니라 반복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사건은 조금씩 진전되지만 사건의 힘에 상응하는 정념적 주체의 감정 반응이 즉각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는 반응의 감정 기제가 없는 사람, 내면이 텅 빈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 허트 로커 >에서처럼 전문가-기계가 정념적 주체를 대체한 건 아니다. 여기엔 모종의 반응 활동이 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사건과 감정 반응 사이에는 그 메커니즘이 극히 복잡하고 불투명한 신경증적 회로가 작동하는 것 같다. 이 회로의 작동에 침묵의 표현이 동원된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있다. 딸이 태어난 직후 크리스는 들뜬 표정으로 병원 신생아실 앞에 서 있다. 신생아실 유리 벽 너머로 갓 태어난 딸이 보인다. 그런데 딸이 울고 있다. 간호사들은 아무도 크리스의 딸을 보지 않는다. 크리스는 거의 미칠듯한 얼굴로 자신의 딸을 보아달라고 소리친다.(#7) 하지만 유리 벽 안의 간호사들은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공포영화의 효과음과도 같은 날카로운 현악 사운드가 기습적으로 흘러나오지만, 이 장면은 이후의 어떤 사건과도 연관되지 않는 괴이한 삽화다. #7 손쉬운 해석은 이 장면을, 어린 크리스가 사슴을 쏘아죽인 초반 플래시백의 첫 장면, 그리고 그가 대전차 수류탄을 든 아이를 저격한 첫 파병 장면에 대한 지체된 반응으로 보는 것이다. 사건은 벌어지고 즉각적 반응은 침묵한다(크리스는 저격에 성공하고 나서도 승리의 웃음이 없다). 하지만 사건의 힘은 인물의 내부에 잠입해 예측할 수 없는 지점에서 모종의 증상(고혈압, 신경증, 불안, 대인기피)으로 출몰한다. 그런데 여기까진 많은 이상심리의 병사들을 그린 많은 반전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은 크리스는 그럼에도 ‘정상’이었다는 것이며, 퇴역 군인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 살인자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며 관객인 우리는 그 살인에 대해서 완전한 무지의 상태에 놓인다. < 아메리칸 스나이퍼 >의 비극은 터무니없는 비극이며, 난센스 유머와도 같은 비극이다. 정리해보자. 크리스는 자신의 정상성을 완강하게 주장한다. 그런데 비정상적인 퇴역 군인이 그를 죽였다. 비정상인이 정상인을 죽인 것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둘은 모두 퇴역 군인이다. 우리는 크리스의 정상성으로 가정된 상태가 살인자의 비정상성으로 추정된 상태와 멀지 않다고 짐작할 수 있다. 둘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 둘은 동지인가 적인가. 영화는 침묵한다. 둘 사이에 모래바람이 불어 식별할 수 없다. 어떤 터무니없는 것이 작동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공동체의 완전한 내파가 있다. < 데이 워 익스펜더블 >의 영웅들은 부하를 사지에 버렸지만 유대감마저 파괴된 건 아니다. 거기엔 공동체의 기억과 기대가 여전히 남아있다. < 아메리칸 스나이퍼 >에는 어떤 종류의 유대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전쟁의 효과인가. 그렇지 않다. 첫 플래시백의 가족들을 떠올려보라. 거기엔 강퍅한 명령 외엔 어떤 유대도 존재하지 않으며 아버지는 이미 강박증자다. 이라크에서 아이가 죽기 오래전에 이미 사슴이 죽어있다. 신생아실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크리스는 지금 유리 벽 밖에서 소리치고 있다. 그런데 간호사들은 듣지 못한다. 그는 딸을 보살피라고 유리 벽 안의 간호사에게 요구하고 있지만, 간호사들에게 그의 말은 들리지 않으며 아이들의 울음이 예사인 신생아실에서 그 요구는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크리스의 말을 듣기 전에 가위눌림의 형식을 뒤집어놓은 그 구도를 봐야 한다. 지금 유리벽 안에 갇혀 있는 건 크리스다. 그는 구조의 비명을 외치고 있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크리스는 자신의 외침이 유리벽 너머의 딸아이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구조되어야 할 자는 소리 지르고 싶지만 온몸을 뒤틀어도 소리를 낼 수 없는 그 자신이다. 그는 침묵 당한 자다. 그 침묵 아래 가위눌린 목소리를 누구도 듣지 못하며, 더 불행하게는 자신도 알지 못한다. 빤히 보이지만 듣지 못하는 유리 벽, 아와 타의 경계를 지우고 불어오는 모래바람, 그리고 그 연원을 알 수 없는 침묵이 서사의 소리를 압도한다. < 아메리칸 스나이퍼 >는 사건을 읽기 전에 질식과 가위눌림을 체험하고 침묵을 들어야 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