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사람들
- 감독
- 김소희
- 제작년도
- 2011
중앙관은 1921년 10월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에서 영락정 상품진열관 앞에 세운 영화관이다. 중앙관을 세운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朝鮮活動寫眞株式會社)는 1920년 8월 나카무라 히코(中村彦) 외 두 명이 영락정 상품진열관 건너편에 극장을 짓기로 출원하자, 이를 계기로 세키상점(關商店)의 운영주이자 경성상업회의소 상의원 대표인 세키 시게타로(關繁太郞)와 마쓰모토 민스케(松本民介), 이와모토 요시후미(岩本善文), 후지토미 구니다로(藤富國太郞), 나리키요 다케마쓰(成淸竹松), 사노 히고쿠라(佐野彦藏), 미나미 겐베이(南源兵衛) 등 경성의 일본인 실업가들이 중심이 되어 자본금 50만원에 불입금 12만 5천원 규모로 세운 흥행 목적의 주식회사이다. 1921년 4월 설립한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에서는 활동사진관 신축에 나서 1921년 10월 15일 중앙관을 개관했다. 개관 당시 중앙관은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직영관이자 제국키네마(帝國キネマ) 특약관으로 “막대한 자본과 좋은 입지조건, 그리고 비교적 잘나가는 변사와 오케스트라로 경성 키네마계를 지배”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앙관에서 상영한 필름은 제국키네마에서 제작한 일본 영화와 이태리 영화가 중심이었다. 중앙관 신축을 시작으로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는 경성과 인천에 있는 활동사진관을 인수하여 흥행 및 배급을 강화하고 영화촬영소를 세워 영화제작에 나설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풍부한 자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이러한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앙관에 근거지를 둔 영화제작 조직은 극동영화구락부(極東映畵俱樂部)였다. 극동영화구락부는 1922년 9월,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주요 인물들인 나리키요 다케마쓰, 이와모토 요시후미, 이와타 센타로(岩田仙太郞)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나리키요 다케마쓰의 아들인 쇼치쿠 촬영기사 나리키요 에이(成淸榮)가 전속 촬영기사였으며 중앙관에서 연쇄극을 공연했던 오미 후미노스케(五味文之助)가 이끄는 연쇄극단이 전속 배우로 합류하였다. 극동영화구락부에서는 가장 먼저 경성일일신문사(京城日日新聞社)에서 주최한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大阪毎日新聞社)와 만철(滿鐵) 간의 야구경기의 실사 영화를 촬영했고 이어 극영화 <국경>을 제작했다. 극동영화구락부에서 제작한 <국경>은 조만국경 지역을 배경으로 조선인 무장독립운동가들로 상상할 수 있는 마적단을 토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23년 1월 13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조선인 학생들의 야유로 인해 상영이 중단되었고 이후 상영이 재개되지 않았다. 영화 개봉 하루 전, 경성 시내에서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조선인을 자극시킬 만한 내용의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경찰이 금지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극동영화구락부는 제대로 된 활동 없이 문을 닫았다. 1920년대 중앙관은 제국키네마의 영화를 비롯해 마키노키네마, 동아키네마 등의 영화를 상영했다. 개관 당시 중앙관은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직영으로 제국키네마의 영화를 상영했는데 1922년 10월에는 제국키네마가 중앙관을 직영하게 되면서 이름을 제국관(帝國館)으로 바꾸었다. 제국키네마에서는 새로운 경영진을 보내 중앙관을 운영했는데 개관 당시 경영을 맡았던 히라노 후쿠마쓰(平野福松)를 비롯해 나카야마 로게쓰(中山朧月)가 다시 경영자로 들어왔으며 변사진도 새롭게 바꾸었다. 하지만 제국관으로의 전환은 큰 효과를 얻지 못한 채 적자만 누적되자 문을 닫게 된다. 1923년 제국관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이름을 중앙관으로 다시 바꾼 인물이 오모토(大本)와 모리(森) 두 사람이었다. 이들 새로운 경영자들은 제국키네마와 관계를 끊고 오사카로 건너가 쇼치쿠 을부(乙部)영화를 수입하기로 하고 쇼치쿠 특약관으로 전환했으나 경영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관은 경성의 유서 깊은 여관인 파성관(巴城館) 주인이자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의 주주인 마쓰모토 민쓰케가 경영권을 인수한 후 후지모토 쇼죠(藤本省三)를 지배인으로 내세워 경영을 시작했다. 후지모토는 쇼치쿠 영화를 대신하여 마키노키네마의 영화를 상영하였는데 마키노 영화에 대한 호평이 늘어나면서 중앙관의 운영은 점차 안정되었다. 1925년 마쓰모토 민쓰케가 중앙관 운영에서 손을 떼고 마키노키네마와 합병한 도아키네마(東亞) 직영으로 바뀌었으나 마키노 쇼죠가 도아키네마에서 나와 마키노프로덕션을 설립하게 되자 중앙관은 도아키네마 직영에서 마키노프로덕션 직영으로 바뀌게 된다. 자연히 중앙관의 영화도 마키노 계통의 영화를 상영하였다. 이 시기 중앙관은 다른 영화관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불황과 1926년부터 시행된 필름검열 수수료 부담으로 인한 비용 증가 등으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따라 1930년 8월 15일부터는 위층 20전, 아래층 10전의 입장료를 받는 등 프로그램에 따라 입장료를 탄력적으로 운용하면서 경성의 일본인 상설관의 가격 인하를 주도하였고 캐러멜회사와 제휴하여, 입관자들에게 캐러멜을 위층 6개 아래층 4개씩 나눠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중앙관은 1930년 1월 경성의 일본인 극장 중 처음으로 토키영화를 상영하였으며 1930년 4월 25일 데이코쿠키네마의 히트작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가>(何が彼女をさうさせたか)를 시작으로 데이코쿠키네마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조선극장에서도 상영되었는데 5년여 동안 조선으로부터 차단된 제국키네마 영화가 조선에서 상영되는 계기였다. 1931년 11월 중앙관은 오다 유키치(小田勇吉)가 경영을 맡았다. 이 당시 데이코쿠키네마가 신코키네마로 바뀌면서 중앙관 역시 신코키네마의 특약관으로 있었다. 하지만 중앙관 운영권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기자 중앙관 경영자 오다는 1934년 11월 경성흥행협회 회장인 경성극장(京城劇場)의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와 부회장인 조일좌(朝日座)의 오이시 사다시치(大石貞七)를 공동경영자로 끌어 드렸다. 1936년 들어 약초극장과 명치좌, 황금좌 등 신축 영화관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경성의 영화관은 크게 요동치게 된다. 같은 해 9월 중앙관은 신코키네마와 절연하고 다이토영화사의 조선봉절관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되지만 경영 악화로 인해 고전하게 된다. 1940년 10월 17일 중앙관 역시 새롭게 개장 후 개관하게 되면서 이름을 중앙영화극장으로 바꾸고 신코키네마 2번관이 된다. 운영자 역시 바뀌어 조일좌 운영주 오이시 사다시치가 맡았다. 하지만 중앙영화극장은 인근에 위치한 신코영화 봉절관인 경성극장에 비해 입장료가 불과 10전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에 관객들을 유치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경성극장이 영화관으로 전용된 후 경성의 일본인 전용 연극극장이 전무하던 상황이었기에 운영자 오이시는 중앙영화극장을 연극극장으로 전환할 것을 고민하게 된다. 오이시는 가장 먼저 조선악극단에 위탁경영을 제의했으나 교섭에 실패했다. 이어 조선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던 도호와 협의를 시작하여 1940년 12월 중앙영화극장을 신코영화의 2번관에서 도호의 2번관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이름도 동보문화극장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문화극장이라는 이름이 문화영화와 시사영화 전문 상영관이라는 인상을 주었기에 1941년 7월 이름을 동보중앙극장으로 개칭하였다. 영화배급 통제가 실시되면서 홍계 상영관으로 있었던 동보중앙극장은 1944년 9월부터 연극장으로 전환하게 되면서 중앙극장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1945년 5월에는 전창근, 김태진 등이 주축이 된 극단 태양을 전속 극단으로 두었다. [자료] 1960년대 중앙극장(국가기록원) 해방 후 중앙극장은 연극전용관에서 영화관으로 바뀌었으며 흥행업계에서 오랫동안 활약하던 김상진(金尙鎭)이 적산관리인으로 있었다. 1950년대 벽산그룹의 모태가 된 불이무역(不二貿易)의 김인득(金仁得)이 소유하고 있던 중앙극장은 1998년 3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영화관으로 전환하며 이름을 중앙시네마로 바꾸었으나 벽산그룹이 도산하면서 2010년 폐관하였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 [사진](상단) 중앙관 개관 광고(《경성일보》, 1922.10.15) [자료] 매일신보, 1921.03.09. 경성 ( 京城 ) 에 우 ( 又 ) 상설관 ( 常設館 ) / 일홈은 즁앙관이고 자본금은 오십만원 경셩의 연예계ᄂᆞᆫ 종ᄅᆡ로 잘 발뎐이 못되고 도리혀 쇠하 야 가ᄂᆞᆫ 모양이오 졈졈 활동사진을 인하야 시민의 연예와 오락 ᄎᆔ미가 ᄉᆡᆼ기여 오ᄂᆞᆫ 바 현ᄌᆡ는 내디인 편이 활동사진 상설관이 셰시나 잇고 됴션인 전문의 상설관은 다만 둘밧게 업ᄂᆞᆫ데 또 이것ᄲᅮᆫ으로도 시민의 긔ᄃᆡ를 맞츄어 줄 설비와 ᄉᆡ로운 ᄉᆞ진을 속히 뎨공하지 못하ᄂᆞᆫ 것이 유감되여셔 이 결ᄒᆞᆷ을 보츙하고 ᄯᅩ 됴선 만주에 자랑ᄒᆞᆯ만한 완전히 설비한 상설관을 건설하야 보려고 지ᄂᆞᆫ번 ᄅᆡ로 시ᄂᆡ 유지ᄌᆞ들에 의하야 그 계획이 진ᄒᆡᆼ되ᄂᆞᆫ대 이번에 아죠 허가를 엇어셔 됴선활동사진주식회사가 츌현하게 되엿ᄂᆞᆫ대 ᄌᆞ본금은 오십만원이요 쳐소ᄂᆞᆫ 영락뎡 1 뎡목 상품진렬관 압이오 ᄅᆡ월에 챵립 총회를 열고 쇽히 역사를 하야 ᄶᅡ른 긔ᄀᆞᆫ에 쥰공하고 즁앙관 ( 中央館 ) 이라고 일홈을 진다ᄂᆞᆫᄃᆡ ᄆᆡ우 찬셩자가 만타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1.03.08 . 조선활동진보 ( 朝鮮活動進陟 ) 경성 영락정 상품진열관 전 ( 前 ) 에 상설관을 건설하고 활동사진 급 ( 及 ) 차 ( 此 ) 에 부대하ᄂᆞᆫ 영업을 행ᄒᆞᆯ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는 기보와 여 ( 如 ) 히 창립사무가 진척하여 발기인의 부담주를 정한후 찬성주의 할당에도 착수하였ᄂᆞᆫᄃᆡ 하여간 자본금 50 만원으로 총 주수 1 만주에 불과ᄒᆞᆷ으로 주주를 광 ( 廣 ) 히 일반 시민에 모집하고 발기인의 독점의 폐를 피 ( 避 ) 키 위하야 발기인의 특주ᄂᆞᆫ 150 주씩 4 천주로 정하였ᄂᆞᆫ대 발기인 중에 다수히 주를 요구하ᄂᆞᆫ 자가 유하야 점차 주식분배 상 부심 ( 腐心 ) 중인바 여하여간 유리한 활동사진흥업의 영리 회사임으로 찬성인이 속출하야 기히 이배 반의 신입 성적을 거 ( 擧 )하 얏스며 일양일 ( 一兩日 ) 중에 찬성주의 할당을 요 ( 了 )하 고 일천주를 할 ( 割 )하 야 일반에 모 ( 募 )하 기로 ᄒᆞᆯ 터이며 창립사무소를 영락정 경매조합에 치 ( 置 )하 야 창립사무를 급속히 하ᄂᆞᆫ 중이라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1.03.16 . 조활창립총회(鮮活創立總會) 조선 활동사진 회사 래 ( 來 ) 십구일부터 이십삼일 지에 제일회 불입을 료 ( 了 ) 고 래 사월 칠일 창립 총회를 개최 터인대 창립 총회 종료와 공 ( 共 ) 히 직 ( 直 ) 히 상설관 건축에 착수 다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1.10.11. 중앙관 개관 ( 開館 ) 피로 ( 披露 ) 예 ( 豫 ) 히 공사중이든 조선활동사진주식회사 경영에 의한 중앙관 ( 영락정 1 정목 ) 은 수 ( 遂 ) 히 공사 준공 되얏슴으로쎠 10 일 당국 검사를 종료하얏슴으로 13 일 개관피로연을 겸하여 제국활동사진을 시사ᄒᆞᆯ터인대 초대 인원은 관민 유력자 신문기자 주주 전부에 긍 ( 亘 ) 하야 약 1,500 명의게 각각 초대장을 발하얏더라 . [자료] 매일신보, 1924.06.26. 미국영화 상영중지 / 대정관과 중앙관 일본이 미국의 쳑하 형셰 로 고됴되야 최근에 이르러셔 젼국에셔 각죵 물품을 쳑하 동시에 일반 화 ( 華客 ) 의 환심을 사고 부심하 민쳡 상인들은 벌셔브터 간판 ( 看板 ) 의 미국이라 글발을 삭졔하며 혹은 미국품을 팔지안는다 광고를 널리하야 연히 미 긔분이 농후하야 가는 터인바 경셩 활동 진 상셜관 ( 活動寫眞 常設舘 ) 에셔 내디 각 디방에서 미국 「 필림 」 을 쳑하 영향을 바다 관 들도 미국 사진을 죠와하지 안는 경향이 잇슴으로 대졍관 ( 大正舘 ) 에셔 솔션하야 불일간 미국영화 ( 米國映畵 ) 를 즁지하고 시대물 ( 時代物 ) 로써 보츙하고 계획한다하며 한 동업 즁앙관 ( 中央舘 ) 에셔 이에 공명하야 미국 진 대신에 목야 ( 牧野 ) 의 독특한 시대극 ( 時代劇 ) 으로쎠 보츙하고자 게획중이라 대 대졍관에셔 벌셔브터 문압을 장식하야 잇 만국긔에셔 미국긔를 여바렷드라 .
우리나라에서 처음 극장이 만들어진 시기는 18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이 위안과 집회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극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인부좌(仁富座)라 지었다. 1892년 인부좌에서 이루어진 자선연예회 공연이 당시 인천에서 발행된 일본어 신문 《조선신보》에 게재되었다. 자선연예회와 관련한 이 신문기사는 조선에 설립된 극장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랜 기록이다. 인부좌에서 열린 자선연예회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892년 4월 5일 인천과 부산을 오가던 일본상선 이즈모마루(出雲丸)가 전라남도 소안도 인근에서 침몰해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부산에서 공연을 마치고 인천으로 들어와 인부좌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자그라 소이치(ジヤグラー操一)는 이즈모마루 침몰 사건이 일어나자 사상자 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인천에서 조난자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자선연예회를 개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재난이 닥치면 피해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구제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선연예회를 개최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다. 자그라의 생각에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새로 지어진 인부좌에서 자선연예회가 열렸다. 참고로 이 ‘이즈모마루 침몰 의연 자선연예회’를 주최한 자그라 조이치는 본명이 아다치 하치사부로(安達八三郞)[필자 주: 아다치 하치사부로를 ‘安達八三郞’이외에 ‘安達初三郎’로 쓰기도 한다.]이며 “자그라”라는 예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저글링으로 유명한 마술사였다. 자선연예회는 1892년 5월 28일 오후 2시 반 시작되었다. 오후 4시 경에는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극장 안을 메워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3~400명의 관객들이 극장에 입장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인천에 살던 많은 일본인들이 자선연예회에 관객으로 참여했으며 그들 중 몇몇은 스스로 무대에 서기까지 했다. 프로그램 중에는 자그라 조이치의 마술뿐만 아니라 무용, 조루리(淨瑠璃), 수용(手踊) 및 연극 등 다채로운 볼거리들이 흥미를 돋았다. 이 자선연예회가 개최된 인부좌는 인천 일본영사관 뒤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선회 당일 극장 안팎의 모습을 살펴보면, 극장 밖에는 나뭇잎으로 장식한 문을 만들고 그곳에 일본 국기를 비롯하여 자수로 ‘자선회’라 적힌 큰 현판을 걸었으며, 조선신보사로부터 기증받은 ‘자선연회’라고 쓰인 큰 깃발을 세웠다. 입구의 우측에는 자그라 조이치가 디자인하여 만든 목조 ‘자선회비(慈善會碑)’를 두었고, 좌측에는 인부좌의 극장주로부터 기부받은 목조비를 두었는데 여기에는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위혼비’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또한 극장 안 한 쪽을 각국의 국기와 신호기들로 장식했으며, 밤이 되면 극장 밖에 산(山) 자 형태로 높게 홍등을 켰다. 이후 인부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건, 인부좌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는 1890년대부터 조선에서 극장이 만들어져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 극장은 일본 거류민들 문화의 일종이었지만, 빠른 속도로 조선의 관객들에게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이는 1895년 정치국(丁致國)이 인천에 만들었다는 조선인 연극장 협률사(協律舍)[필자 주: 1902년 황실에서 설립한 희대(협률사,協律社)와는 다른 곳이다.]에 관한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인천협률사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일(高逸)이 쓴 『인천석금(仁川昔今)』(경기문화사, 1955)이다. 고일은 정치국이 인천 용동에 창고 같은 벽돌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극장 협률사라고 기록했다. 최성연(崔聖淵) 역시 『개항과 양관 역정』(경기문화사, 1959)에서 인천의 부호 정치국이 운영하던 협률사를 애관(愛館)의 전신으로 추정하면서 청일전쟁 중 지은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기록은 인부좌가 들어선 인천에 조선인 연극장도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쉽게도 신문이나 잡지처럼 시기를 명확히 밝혀주는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아 인천 협률사의 존재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위의 기록들은 19세기말 개항장에 조선인 극장이 들어섰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간접 증거로서 의미가 있다. 청일전쟁 이후 인천에는 인부좌가 사라지고 인천좌라는 다른 이름의 극장이 들어섰다. 인천좌가 들어선 시기는 1897년 이전으로 추정되는데, 『인천부사(仁川府史)』의 기록을 보면 일본인 거류민을 위해 화도(花道)[필자 주: 일본식 극장에 존재하던 무대와 연결된 장소로 주로 배우의 등·퇴장에 이용된다. 주요 배우의 연기가 펼쳐지기도 한다. ]를 갖춘 100석 규모의 극장이 일본영사관 서측인 중정(仲町) 1정목에 자리하고 있었고 이것이 1897년 산수정(山手町) 2정목으로 이전, 후에 인천좌(仁川座)라 불렸다고 한다. 물론 객석의 숫자 등 기재상 세부적인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은 인부좌가 자리를 옮긴 후 이름을 인천좌로 바꿨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인천부사』에 실린 기록을 더 살피면, 인천좌에서는 만자이(漫才), 고단(講談), 가쿄쿠(歌曲) 등 일본 전통 연희물을 상연했으며 인천가부키좌 건립 후에 충남 대전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인부좌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서 극장 설립은 개항장의 일본인 거류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지방의 극장사(劇場史) 연구가 현재 걸음마 단계이기 때문에 부산, 인천 등 개항장에 언제 어떻게 극장이 만들어졌는지 그 전모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몇몇 연구들이 부산, 인천 등 개항장의 일본인 극장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사진2. 인천가부키좌 앞에서 단원들의 모습 (『경성부지권(京城府之卷)』)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인천 빈정(濱町)에 부지 300평, 건평 160평 규모의 2층 건물이 들어서서 이름을 가부키좌(歌舞技座)라 불렀다. 이름처럼 전형적인 가부키 전용극장이었으며 입장정원도 999명이나 되는 대형극장이었다. 이 건물은 재인천일본인상업회의소회두(在仁川日本人商業會議所會頭) 가라이 에이타로(加來榮太郞)가 세웠는데 건축비 1만 4천원, 도구 및 의상비 6천원으로 총 2만원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1915년 당시 인천가부키좌의 주요 프로그램은 신파극이 총 흥행일수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그 밖에 구극 상연, 활동사진 상영, 각종 연예회 등이 열렸다. 사진3. 부산좌의 외관(『부산요람(釜山要覽)』, 부산상업회의소, 1912) 1903년 당시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는 행좌(幸座)와 송정좌(松井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행좌는 일본인 거류 1세대인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가 1903년 이전에 남빈정(南濱町) 끝자락(지금의 중구 광복동)에 세워 운영한 극장이었다. 하자마 후사타로는 1880년 이오이(五百井)상점 부산지점에 부임한 후 무역과 부동산업으로 큰 부를 쌓고, 거류민단 의원을 역임하는 등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상공인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행좌의 주요 프로그램은 일본연극, 일본씨름, 마술, 비파, 조루리 등과 활동사진이었다. 1915년 행좌는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재건축되면서 행관(幸館)으로 이름을 바꿨다. 행좌 부근에 있던 송정좌는, 개항 직후 부산으로 건너온 마쓰이 고지로(松井幸次郞)가 세운 극장이다. 1903년 이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1911년경에 폐관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는 부귀좌(富貴座, 1905~?), 부산좌(釜山座, 1907~1923), 동양좌(東洋座, 1912?~?), 변천좌(辨天座, 1912~1916), 질자좌(蛭子座, 1912~1918), 욱관(旭館, 1912~1916) 등이 세워졌다. 1897년 개항된 목포에는, 1904년 지금의 복만동에 목포좌(木浦座)가 생겨났으나 운영되지는 못했고 1908년 문을 닫았다. 목포좌가 없어진 1908년 상락동에 상반좌(常盤座)가 문을 열었다. 상반좌는 1914년 138평 규모의 2층 건물로 증축되었으며, 1929년 9월 30일 폐관되었다. 1899년 개항된 마산에서는, 마산 최초의 극장 희락좌(喜樂座)가 1906년 늦은 여름 경정(京町)의 고이즈미 시게조(小泉繁藏) 오복점 뒤편에 만들어졌다. 희락좌는 건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07년 2월 1일 실화로 소실되었다. 이 직후인 1907년 늦은 봄, 신마산의 유정(柳町)에 환서좌(丸西座)가 세워졌다. 환서좌는 가부키 극장으로 회전 무대를 갖췄고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경영자는 나카무라 초(中村肇)였다. 가부키, 나니와부시를 비롯한 일본 전통 연희물이 상연됐으며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그 외 원산, 군산 등의 개항장에도 1910년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극장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떤 극장이 있었는지는 현재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의 극장이 일본의 극장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극장의 구조, 흥행방식, 용어 등이 일본식이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 본문은 필자의 『조선영화의 탄생』((주)박이정, 2018) 23~33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사진1(글 상단). 《조선신보》에 실린 인부좌 관련 기사(《朝鮮新報》 1892년 6월 5일자.) [자료] 「자선연예회 - 인천 개항 이래의 구경거리」(《조선신보》 1892년 6월 5일자), 발췌 번역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유족을 위로하는 의연금을 구하기 위해 아다치 하치사부로(安達八三郞=자그라 소이치)가 발기, 오타니 마사나리(大谷正誠) 씨가 위원장, 고리 긴자부로(郡金三郞), 미쿠라 마사히로(三倉正寬), 모토하시 세이지로(本橋淸二郞), 이와다 가에몬(岩田嘉右衛門), 아사오카 도시키치(淺岡利吉), 스이쓰 세이조(水津淸三) 제씨가 위원, 노세 다쓰고로(能勢辰五郞), 니시와키 초타로(西脇長太郞), 사다케 진소(佐竹甚三), 헤이세이 데쓰사부로(平生欽三郞), 무코야마 시게히라(向山茂平), 우에다 호사쿠(上田豊作), 구마모토 에이치로(隈本榮一郞) 제씨가 찬성자가 되고, 기타 여러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다하여 5월 28일 오후 2시 반부터 야마노테(山手)[필자 주: 인천의 일본인 조계지에서 만국공원이 있는 언덕 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인천 송학동으로 불리는 산수정(山手町)과 꼭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지역의 신극장 인부좌에서 ‘이즈모마루 침몰 의연 자선연예회’가 열렸다. 자선회가 열린 것은 인천 개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상류 사회의 사람들이 많이 주선했다고 하는데, 특히 이 자선회는 인천 거류민들과 아주 관계가 깊은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유족을 위로한다는 면에서 개회 수일 전부터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당일 방문한 사람들은 무려 800여 명에 달하며, 회장이 꽉 차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4시경 이후로는 회장을 찾아와 허무하게 출입구에서 거절당해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는데, 3~4백 명은 될 것이다. 회장 문밖에는 상록수로 커다란 녹문을 만들어 국기를 매달고, 또 털실 세공으로 ‘자선회’라고 적은 큰 액자를 걸었으며, 본사가 기증한 ‘자선연예회’라고 크게 쓴 대형 기도 매달아 세웠다. 입구의 우측에는 자그라 소이치가 디자인한 자선회비(慈善會碑, 목조)를, 좌측에는 극장주가 기부한 길이가 1조(一丈)[필자 주: 약 3m이다.]에 가까운 목조비에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위혼비’라고 크게 적어 세웠다. 장내 한 쪽에는 각국의 국기 혹은 신호기로 찬란하게 장식하여 넋을 빼앗았다. 밤이 되면 회장 밖에 山 자 모양으로 높게 홍등을 켜서 특별한 미관을 더했다. 만사에 주의하여 꼼꼼하게 이리저리 장식하고 배치를 완전하게 한 데는 주선한 유지들 모두의 연일의 노고가 담겨있다. 이 자선회의 특색이라면 2층과 아래층 두 곳에 귀부인 따님들이 음식물 매점을 열어서 자선바자회를 모방했다는 것이다. 연예는 오후 3시경부터 시작했는데, 십 수 가지의 연예가 있었다. 이중에서 가장 관람객들의 갈채를 받았던 것을 들자면......
1912년 유일서관에서 출간된 이해조의 신소설 『산천초목』의 표지화는 연흥사 앞 수상한 세 남녀의 그림이다. 연흥사는 1907년 서울 중부 사동(寺洞)에 개관해 주로 전통 연희와 신파극을 많이 공연하던 극장이다. 소설 속에서 희대의 호색한 이시종은 박참령의 첩 강릉집을 유혹하기 위해, 첫 만남 장소로 연흥사를 선택한다. 두 남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소설 전반부에는 이 시기의 극장 풍경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근대 초기 극장 문화를 재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제, 이시종이 강릉집을 유혹하던 연흥사의 시간 속으로 거슬러 가보자. 평소 연흥사를 ‘연애 작업장’으로 애용하던 이시종은 어느 날 경복궁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강릉집을 보았다. 예의 끼가 발동한 그는 뚜쟁이 신마마를 졸라 드디어 강릉집을 연흥사 앞까지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단성사, 장안사, 원각사 구경은 몇 번씩 해봤지만 연흥사는 말만 들었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강릉집. 그날 순진하게 신마마를 따라 극장 구경에 나선다. 강릉집과 신마마에게는 입장을 위해 표를 살 때부터가 이미 극장 구경이다. 두 사람은 매표소에서 특등표를 골라 사는 것도 재미있고, 그렇게 산 특등표와 찬성표 1 를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 것도 재미있다. 이시종은 표 파는 사람 행세를 하며 강릉집 일행에게 특등석이며 화장실의 위치를 자상하게 가르쳐주고, “손바닥을 두어 번 딱딱 쳐 뽀이를 부르더니, 방석을 가져오너라, 화로를 가져오너라, 가비차 2 도 갖다주고 여송연도” 갖다준다. 잠시 후 두 남녀의 눈길이 오가고 강릉집 얼굴은 발개진다. 극장은 이시종과 강릉집 같은 이들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체험하는 곳이다. 물리적으로는 사방이 막힌 폐쇄 공간이지만 가정과 같이 내밀한 사적 공간도 아닌 곳에서, 모르는 남녀가 같은 시간 한 공간에 있다. 부인석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고 해도, 남녀 관객 그리고 공연자와 관객 사이에는 은밀한 눈길과 희롱이 오갈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이 새로운 공적 공간에서 ‘사교’가 이루어지고, 때로는 ‘연애’도 시작되는 것이다. 일찍이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에서 조선 사람들이 넓혀야 할 문명국가의 ‘견문(見聞)’으로 소개되었던 극장은 막상 조선에 세워지자 음부탕자(淫婦蕩子)들의 음란폐풍 공간으로 지탄을 받았다. 황실극장 협률사의 운영 책임을 맡았던 봉상시(奉常寺) 부제조(副提調) 이필화는 스스로 협률사 폐지를 주장하는 상소(1906)를 올렸는데, 그 폐지 사유 중 하나가 협률사 공연이 음란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시켜 미풍양속을 해칠 뿐 아니라 청년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며, 천한 무리의 생계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구 문명국가를 따라 황실극장은 지어놓았으나, 무대에 오르는 공연은 남사당패와 기생 연희, 판소리와 잡가 등 ‘천한 집단의 음탕한 작태’다 보니, 고관대작과 부유한 집 자제들이 음란, 사치, 낭비를 일삼는 일탈 공간에 불과하다는 염려가 그런 상소를 올리게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극장 구경이 ‘원님도 보고 환자도 타는 일’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방탕한 남녀의 대합소’라는 근대 극장을 향한 비난과 우려 속에는 새로운 변화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봉건적 유교주의 사회가 극장으로 대표되는 근대 문물과 만났을 때, 거기서 분출되는 욕망들이 일으킬 불온한 균열과 파장에 대한 불안 말이다. 한편 극장은 그 안팎에서 들려오는 근대의 모든 소란스러운 소리를 모아내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소설 속에서 강릉집 일행에게 뽀이가 방석과 화로를 가져다준 것은 이들이 특등석과 찬성표를 들고 입장했기 때문인데, 이처럼 엄격하게 지켜지는 좌석의 등급 구분에 대해 불만이 적지 않았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구경꾼이 될 수 있었지만, “돈 좀 적게 내는 하등석이라고 앉을 자리도 없는 중, 앞에는 혹시 중등으로 들어갈까 겁이나 철망을 얽는 동아줄로 서까래를 매어놓는다. 별별 구박을 다 하고도 난로 하나 안 피워주니, 우리 돈은 돈이 아니고 무슨 사금파리인 줄 아는지, 정작 돈 주는 사람은 그렇게 냉대를 하고 동전 한 푼 안내고 허입권으로 통행하는 사람은 상등석으로 모시고 불도 따뜻이 피워주니 이런 불평한 데가 어디 있소” 3 라고 어떤 ‘불평객’이 볼멘소리를 투고할 정도였다. 그러자 그 이튿날 신문에는 “연극장에서 하등석에 난로 안 피고 철망으로나 서까래로 앞을 막는 것도 분하지마는, 제일 아니꼽고 괘씸한 것은 상등객에게는 굽실굽실하는 사무원들이 하등객에게는 조금만 하면 눈을 부라리며 호령이 나오니 그래서야 어찌 연극장 하등에 구경 들어가겠어요” 4 라고 ‘동감생’이 맞장구를 쳤다. 기생 구경 가느라 극장 출입이 잦은 한량이 있는가 하면 기생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썩 유쾌하지 않은 부인네도 있고, 신문기자 행세를 하며 매일 무료 관람하는 사람, 연극장을 화투장으로 만드는 노름꾼, 극장에서 사람을 속여 생활하는 사기꾼, 밤마다 극장에서 사느라 시험에 낙제한 학생, 상등석에서 남자들과 어울려 앉은 여염집 규수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자연히 사고도 많고 소동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극장은 그 어느 곳보다도 풍기가 문란하여 엄격한 통제와 규율이 요구되는 공간으로 비춰졌다. ‘부랑한 자의 집회소’가 되어서 ‘부정한 무리’가 옳지 못한 일을 하는 곳이 바로 극장이니 경찰의 단속이 있어야 한다고 당국의 통제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인 만큼 공중위생 문제와 예절 문제도 예민하게 작용했다. 예컨대 초창기 극장 좌석은 대부분 계단식 마루였던 터라 실내로 들어가기 전에는 매표소 옆 작은 방에 들러 신발을 맡기고 신발표를 타야 했다. 서민들 중에는 평소 신을 신지 않는 이가 많았는데, 이들은 우물에서 발을 씻은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1920년대에는 덧신을 10전에 대여해 주기도 했다. 또한 수백 명의 사람이 서로 어깨를 비비며 기운을 통하는 극장은 여름마다 전염병 발병의 온상으로 지목되었다. 극장 지배인을 경찰서로 불러 질서문란, 소란, 위생과 청결, 적정인원 입장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은 1930년대에도 늘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근대의 극장은 경찰의 감시가 있어야 하는 곳이며, 아울러 보여줄 것과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검열을 거쳐야 하는 공간으로 조명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식민 당국은 위생과 질서, 그리고 ‘공공의 안전’을 명분 삼아 단속, 검열, 순시를 통한 감시 체제를 더욱 강고하게 했다. 극장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삐라를 살포하거나 불법연설을 해서 ‘풍속을 괴란하고 공안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당국의 감시 대상이었다. 음부탕자와 불온한 무리는 때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다. 그러나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감시하고 통제해야 할 위험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그들 사이의 간극은 매우 얇은 것이었다. 1) 초대권. 2) 커피. 3) 《매일신보》 1913년 12월 3일자, 3면. 4) 《매일신보》 1913년 12월 4일자, 3면. 상단 그림 . 연흥사 앞의 남녀들. 출처: 이해조, 『산천초목』(유일서관, 1912)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이해조, 『산천초목』(유일서관, 1912), 부분 발췌 둥구재 넘어가는 해가 볼일이 바쁜 듯이 어정어정 내려가다가 만인간(萬人間)을 돌아보며, ‘밤새 평안히들 계시오. 나는 내일 다시 오리다’ 하는 부탁이 들리는 듯하더니, 낙산 한허리로 두렷이 밝은 달이 반갑게 올라온다. 그 달빛이 탑골공원 서편 마당에 반쯤 들랴 말랴 하니까 별안간에 네누나 나누나 나니누 네눈실, 그 나팔 뒤를 따라 장구 소고 징 제금을 함부로 두드려내니, 이는 사동 연흥사에서 날마다 그맘때면 취군하는 소리라. 같은 귀로 같은 소리를 듣기는 일반이언마는 어떤 사람들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살을 잔뜩 찡그리며, “에잉, 저놈의 소리가 또 나노, 세상, 귀가 듣그러워 사람이 살 수가 있나? 기왕 연극을 하려거든 역사적 학문적으로 아무쪼록 풍속을 개량하거나 지식을 발달할 만한 것을 하지 아니하고, 마치 음담패설로 남의 집 부녀와 젊은 자식들을 모두 버리게 하는 와굴을 만드니, 경무청에서는 왜 저런 것을 엄금하지 아니하누?” 어떠한 사람들은 나팔소리에 어깨춤이 나서 저녁밥을 허둥지둥 재촉을 하여 먹으며, “이애, 이동백이 김봉문이는 정말 명창이더라. 난쟁이 요술도 신출귀몰하던걸. 나는 밤낮 보고 밤낮 들어도 싫지 아니한 것은 연흥사 구경이더라. 속담에 ‘원님도 보고 환자도 탄다’는 일체로, 연극도 구경하고 부인석에 갈보 구경도 실컷 하겠더라. 에 참, 갈보도 많이는 모여들어. 아마 장안 갈보가 취군 나팔소리만 들으면 나 모양으로 신이 절로 내리는 것이더라.” 치마 쓴 계집, 인력거 탄 계집, 양복 입은 자, 모자만 쓴 자, 잘생긴 자, 못생긴 자, 떼떼로 작축하여 사동 넓은 길이 뻑뻑하도록 모여 들어오는데, 이문 안 언덕길로 의복을 선명히 입고 방망이 같은 여송연을 새로 피워 뻑뻑 빨고 조끼에서 보석시계를 내어 연해 보며 분주히 사동으로 내려오는 소년 명사는 이시종이라. (중략) 강릉집이 신마마와 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흥사 문앞에를 당도하여 신마마더러, 강 : 형님, 돈은 내가 드릴 것이니 구경표를 내 것까지 형님이 좀 사주시오. 신 : 이런 데 와서 돈도 제 돈을 내고 표도 제 손으로 사야 재미가 있나니, 표 살 돈을 나도 가지고 왔네. 도섭스러운 말 말고 우리 제각기 표를 사가지고 들어가 보세. 강 : 부끄러워 어떻게 표를 사나? …… 그러면 형님부터 사시오. 신 : 이애, 아양부리지 말아라. 부끄럽기는 쥐 밑구멍이 부끄러워? 하며 표 파는 구멍 앞으로 앞서 가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내어 구멍 앞에다 탁 놓으며, “여보, 특등표 한 장 파오.” 신마마가 표를 받아들고 나서니, 강릉집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서 마침 꺼내들었던 돈을 구멍 앞에다 여전히 놓으며, “나도 특등표 한 장만 주오.” 하고 표 주기를 기다리느라고 그 구멍을 들여다본즉, 표 파는 사람이 표 한 장을 쭉 찢어 주더니, “아차, 그것은 이리 도로 주십시오. 중등표올시다.” 강릉집이 표를 받았다가 도로 들이밀고 섰노라니, 표 파는 사람이 이 표 저 표 여러 장을 들고 한참을 뒤적뒤적하며 찾는 모양을 하다가 표 한 장을 들고 문밖으로 나아오더니 강릉집 앞에 와 공순히 서며, “이렇게 오래 서 계시게 하와서 가이 없습니다. 특등표가 다 팔리고 이것 한 장뿐이온데, 이것은 돈을 받고 파는 것이 아니라 무료로 구경하는 찬성표올시다. 돈은 도로 넣으시고 이 표를 가지고 들어가십시오.” 강릉집이 그 대답은 아니하고 신마마를 돌아보며, “형님이나 구경을 하고 오시오. 표가 다 팔리고 없다니까 나는…….” 신: 우리가 조금만 부지런히 올 걸 그리 했지. 아우님 도로 가는데 나 혼자 뒤처져 구경하고 있을 의리가 있나? 아우님 가면 나도 가지. 표 파는 자가 강릉집더러는 대답 없는 말을 또 하기 몰렴하던지 신마마를 보고, “왜 구경을 아니 하시고 가신다고 하십니까? 이 표는 당장 돈을 주시는 것보다, 가지고 구경을 하여주시면 본사에서 얼마쯤 더 감사히 여기는 터이올시다. 아무 관계 말으시고 어서 들어가 구경을 하시지요.” 신: 이왕 저처럼 말씀을 하니 그 표를 받게 그랴. 말이 쉽지, 우리가 날마다 밤마다 오겠나? 벼르고 별러 온 길인데 공행(空行)을 하면 절통하지 않은가? 강릉집이 마지못하여 그 표를 받아들고 신마마의 뒤를 따라 장내로 들어가는데, 표 팔던 자가 앞에서 연해 인도를 하며, “이리로 들어오시오. 이리로 올라오시오. 여기가 특등이오. 변소는 저리 가오.” 하며 손바닥을 두어 번 딱딱 쳐 뽀이를 부르더니, 방석을 가져오너라, 화로를 가져오너라, 가비차도 갖다주고 여송연도 갖다주며, 똑바로 마주 보이는 자리에 가 앉아 정신없이 강릉집 건너다보고 앉아서 헛기침을 연해 하더라. 2. 박진, 『세세년년』(세손, 1991[경화출판사, 1966]), 부분 발췌 1912년인 성싶다. 내가 여덟 살 때니까. 서울 종로 철물교 건너편 사동 큰길을 들어서면 왼손편에 동향편으로 커다란 가설극장인 연흥사(演興社)에서는 임성구의 혁신단이 갖가지 재미나는 신파극을 상연하여 장안의 인기를 끌었다. 임성구는 그 전해에 일인 경영인 남성사 [필자 주: '어성좌'의 오기] 에서 창립공연을 했으나 장소가 일인촌인 관계로 실패했고 다음해에 동관(東關)에 있는 단성사(현 단성사)에서 제2회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이어서 연흥사에서 많은 상연목록을 가지고 계속했다. 해질 무렵이 되면 장안 한복판에서 하늘을 찌르고 퍼지는 징, 꽹과리, 날라리소리는 장안 사람의 궁둥이를 들먹거리게 했다. 나는 그때 중붓골이라는 중사동, 즉 지금의 장사동에 살았으니 그 날라리 소리는 나를 매일같이 연흥사 문밖에 불러다 세웠다. 대인은 10전, 소인은 5전, 출입구 옆 고좌(高座)에 앉은 사람이 나무패를 두드리며 핏대를 올리고 외쳤다. 그 위에 높다란 곳에서는 호적소리가 신이 났다. 사동길 연흥사 앞엔 사람이 산같이 모였다. 나는 맨 앞에 서서 그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몹시 부러워했다. 이런 매일을 보내다가 견딜 수 없어 어머니를 졸랐다. 될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하도 울고 떼쓰고 안달하는 귀여운 아들을 위해서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탈출을 했다. 장옷을 쓰고 소비(小婢)에게 요강을 보에 싸서 들리고 나를 앞세웠다. 아들의 소원을 풀어주려는 갸륵한 용기였다. 대인 하나 소인 둘, 입장권인 나무판대기를 손에 쥔 순간 한숨이 터져 나오면서 이상한 흥분에 가슴이 뛰었다. 장내에 들어서니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아래층에 나무 걸상이 길쭉길쭉하게 놓였다. 우리 일행은 이층으로 갔다. 거기는 삿자리를 깔았다. 비록 비계목으로 엮은 가설이었지만 객석은 아래 위층으로 되었고 무대도 넓었다. 객석은 물론 남녀별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서 부인석으로 갔다. 희미한 전등불이 담배연기로 더욱 침침했다. 그렇건만 나는 천당에나 온 것 같았다. 아래 위층에서 웅성대는 소리, 잃어버린 일행을 찾느라고 이름 부르는 소리, 과자 삽쇼, 담배 삽쇼, 물건 사라는 소리, 대목날 장터 같았다. 면막은 외겹 포장인데 갖가지 광고가 가득 찼다. 전면 이맛전에는 철사를 가로 매놓고 거기에 길게 자른 백지를 주렁주렁 달았는데, 그 종이에는 “일금(一金) ○원야(圓也) ○○씨”라고 쓰여 있었다. 이것은 유지들의 희사금이랄까, 기부금이랄까, 보조금이랄까 어쨌든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투척하는 돈이다. 더구나 재미있는 것은 연극을 구경하다가 어느 장면에서 흥이나 신이 나면 돈을 던진다. 이것은 마치 무당굿 구경을 하다가 신명이 나면 무당 이마에 지전을 붙여주는 것과 같은 것이고, 일본사람들은 가부끼(歌舞技)나 신파 구경을 하다가 배우가 잘했거나 자기 자신이 흥이 났거나 했을 때에 휴지에 돈을 싸서 무대로 던진다. 이런 풍습은 내가 일본에 가서 공부랍시고 할 때에 활동사진관에서도 보았다. 명변사가 활변(活辯)을 했을 때, 그 영화가 끝나고 불 켜진 다음에 보면 스크린 앞에 휴지 뭉치가 수두룩했다. 어느 것이나 적지 않은 돈이다. 그때 연흥사에서도 장안사(낙원동에 있었다)에서도, 단성사에서도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이 좋은 풍경이 없어진 지도 오래다. 고도의 문화족이 된 까닭에 시시한 고풍은 없앤건지는 모르나 돈은 안 던져도 좋으니 연극 구경을 많이 와 주기나 했으면 좋겠다. 문이 메이도록 모여들던 때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