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의 개
- 감독
- 김경묵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박지환, 지현준, 연리목, 손석배, 심휘, 이주승, 박경태, 이준영, 김동원, 박준석, 이태진, 이도윤, 박성준, 정지만, 윤상원, 나유정, 흐른, 채희준, 윤세나, 트러스트 무용단, 김정현, 김효신, 송명규, 이선영, 주정민, Alejandro Eyzell, Tenzin Tsetan, 어쏙, 리치, 배효준, 김동현, 나지수, 정임수, 박동규, 김민수, 김경묵
청계천 복원사업은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오랫동안 무수한 사연을 쌓아왔던 공간은 세파를 겪으며 모양새를 고쳐오다, 급기야 산업화 열기에 덮여 버렸다. 하층민의 눈물도 판잣집과 함께 밀려났다. 2005년 다시 얼굴을 드러낸 청계천은 이름처럼 맑아, 금세 관광명소로서 도시의 또 다른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디 물줄기와 다른 거대한 인공의 모형이었다. 복잡다단한 서울의 단면으로써 바라보노라면 미묘한 심상이 이는 까닭이다. 김경묵 감독의 두 번째 장편 < 청계천의 개 >가 제작될 즈음은 청계천의 낯선 인공성에 막 적응해 가려는 참이었다. 영화 속 도시는 서울이었지만, 그것은 먼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대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때 새마을운동이라 불렸던 이데올로기를 계승하고 있는 건설의 땅, 마초와 공안이 들끓고 있는 감시의 도시. 영화는 그곳에 머물러 있는 가련한 영혼에 마법처럼 줌인해 들어간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환상성은 압도적인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영화를 내내 지배한다. 인어의 전설을 구슬프게 읊조리는 가운데, 카메라는 일렁이는 물결을 넘어 폭포에 다다랐다, 저 멀리 바라보던 인어를 담는다. 이내 프레임은 고정되고, 액자 밖의 공간으로 나아가 흐느끼는 사람을 만난다. 기괴한 행동을 보이는 그/그녀가 섹슈얼리티에 도취하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틈입한다. 단박에 들어도 폭력적인 소음은 명시적인 협박을 남긴 채 사라진다. “넌 내가 될 수 없어, 영원히.” 되고자 하는 욕망과 가로막는 권력 사이에서 우리는 그/그녀와 함께 꿈결 같은 영화 속으로 깊숙이 미끄러진다. ‘지금도 꿈인지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모르겠다’는 내레이션의 고백이 암시하듯 < 청계천의 개 >의 시공간은 좀체 가늠하기 어려운 초월성을 갖고 있다. 인물이 놓인 공간은 익히 알고 있는 도시이지만, 그것의 리얼리티를 주장하기 어렵다. 때문에 타이틀이 말하고 있는 ‘청계천’은 앞서 언급한 2005년 복개된 청계천과 같지 않다. 어쩌면 무관하다 보는 것이 더 옳겠다. 영화는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의 세계를 분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남자는 인어의 전설을 꿈꾸듯, 또 다른 자신을 욕망한다. 본디 사진 속에 갇혀 있던 원형적 욕망은 방 안에 머물다, 어떤 자극 이후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후부터 영화는 그/그녀가 자아를 찾아가는 혹은 성장하는 수행적 성찰적 로드무비로서 기능한다. 세계에서 그/그녀는 많은 이들을 만나고, 사건을 겪는다. 처음에 그는 장님이었고, 우연히 말하는 개를 만난다. 개를 풀어주는 대가로 눈을 뜨고 호감의 대상을 찾지만, 그때부터 공안의 집요한 표적이 된다. 쫓기는 가운데 다다른 곳은 명품이 즐비한 땅, 자본은 그/그녀를 구분치 않고 소비를 부추긴다. 남자는 그렇게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그녀의 욕망은 곳곳에서 시종일관 위태롭다. 위협의 시선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도망 길은 끝이 없고 아득하며 미로와 같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어지럽게 오가는 < 청계천의 개 >는 파격적인 이미지와 형식적인 실험, 주술적 캐릭터의 등장으로 내러티브를 한없이 해체한다. 하지만 반대로 분명한 서사구조 아래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남자가 된 여자가 괴물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은 남자가 방안에서 벌이는 은밀한 폰섹스와 오버랩 된다. 눈을 뜬 남자는 이 두 가지 정사씬을 끔찍하게 내려다본다. 그의 욕망의 이곳과 저곳은 결국 감시와 통제, 권력이 허용하는 그곳까지였던 것이다. 기묘한 아이러니를 통과하며 남자는 자신이 해방되지 못한 결여된 주체임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작품에 오프닝과 엔딩은 치밀한 대구로서 영화의 비전을 증명하고자 한다. 장님인 채 밀고 갔던 페인트 길은 세계를 통과하고 만신창이가 된 남자 앞에 다시금 나타나 방향을 제시한다. 좁은 길을 묵묵히 통과한 후 물에 이르러, 그/그녀는 함께 청계천의 폭포 앞에 서 있다. 인공의 물은 가짜이지만, 그 또한 세찬 폭포를 일군다. 거대한 모형을 지그시 바라보는 뚜렷한 주체적 시선이야말로, < 청계천의 개 >가 말하고자 하는 장대한 각성의 시작이리라. 영화는 욕망을 금기하는 낙인이 선연한 사회의 심연을 스크린에 투사한 후, 주체에게 초현실적인 체험을 겪게 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일깨운다. 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영화적 도전은 거칠지만 파괴적이다. 감독의 내레이션은 마지막으로 영화 속 충격을 정서적으로 매만진다. 이를 통해 관객은 영화 속에 세계를 액자에 걸어두고, 진짜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나 역시 영화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마치 그가 ‘깨어나 있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를 더 이상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이다.
청계천 복원사업은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오랫동안 무수한 사연을 쌓아왔던 공간은 세파를 겪으며 모양새를 고쳐오다, 급기야 산업화 열기에 덮여 버렸다. 하층민의 눈물도 판잣집과 함께 밀려났다. 2005년 다시 얼굴을 드러낸 청계천은 이름처럼 맑아, 금세 관광명소로서 도시의 또 다른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디 물줄기와 다른 거대한 인공의 모형이었다. 복잡다단한 서울의 단면으로써 바라보노라면 미묘한 심상이 이는 까닭이다. 김경묵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청계천의 개>가 제작될 즈음은 청계천의 낯선 인공성에 막 적응해 가려는 참이었다. 영화 속 도시는 서울이었지만, 그것은 먼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대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때 새마을운동이라 불렸던 이데올로기를 계승하고 있는 건설의 땅, 마초와 공안이 들끓고 있는 감시의 도시. 영화는 그곳에 머물러 있는 가련한 영혼에 마법처럼 줌인해 들어간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환상성은 압도적인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영화를 내내 지배한다. 인어의 전설을 구슬프게 읊조리는 가운데, 카메라는 일렁이는 물결을 넘어 폭포에 다다랐다, 저 멀리 바라보던 인어를 담는다. 이내 프레임은 고정되고, 액자 밖의 공간으로 나아가 흐느끼는 사람을 만난다. 기괴한 행동을 보이는 그/그녀가 섹슈얼리티에 도취하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틈입한다. 단박에 들어도 폭력적인 소음은 명시적인 협박을 남긴 채 사라진다. “넌 내가 될 수 없어, 영원히.” 되고자 하는 욕망과 가로막는 권력 사이에서 우리는 그/그녀와 함께 꿈결 같은 영화 속으로 깊숙이 미끄러진다. ‘지금도 꿈인지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모르겠다’는 내레이션의 고백이 암시하듯 <청계천의 개>의 시공간은 좀체 가늠하기 어려운 초월성을 갖고 있다. 인물이 놓인 공간은 익히 알고 있는 도시이지만, 그것의 리얼리티를 주장하기 어렵다. 때문에 타이틀이 말하고 있는 ‘청계천’은 앞서 언급한 2005년 복개된 청계천과 같지 않다. 어쩌면 무관하다 보는 것이 더 옳겠다. 영화는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의 세계를 분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남자는 인어의 전설을 꿈꾸듯, 또 다른 자신을 욕망한다. 본디 사진 속에 갇혀 있던 원형적 욕망은 방 안에 머물다, 어떤 자극 이후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후부터 영화는 그/그녀가 자아를 찾아가는 혹은 성장하는 수행적 성찰적 로드무비로서 기능한다. 세계에서 그/그녀는 많은 이들을 만나고, 사건을 겪는다. 처음에 그는 장님이었고, 우연히 말하는 개를 만난다. 개를 풀어주는 대가로 눈을 뜨고 호감의 대상을 찾지만, 그때부터 공안의 집요한 표적이 된다. 쫓기는 가운데 다다른 곳은 명품이 즐비한 땅, 자본은 그/그녀를 구분치 않고 소비를 부추긴다. 남자는 그렇게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그녀의 욕망은 곳곳에서 시종일관 위태롭다. 위협의 시선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도망 길은 끝이 없고 아득하며 미로와 같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어지럽게 오가는 <청계천의 개>는 파격적인 이미지와 형식적인 실험, 주술적 캐릭터의 등장으로 내러티브를 한없이 해체한다. 하지만 반대로 분명한 서사구조 아래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남자가 된 여자가 괴물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은 남자가 방안에서 벌이는 은밀한 폰섹스와 오버랩 된다. 눈을 뜬 남자는 이 두 가지 정사씬을 끔찍하게 내려다본다. 그의 욕망의 이곳과 저곳은 결국 감시와 통제, 권력이 허용하는 그곳까지였던 것이다. 기묘한 아이러니를 통과하며 남자는 자신이 해방되지 못한 결여된 주체임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작품에 오프닝과 엔딩은 치밀한 대구로서 영화의 비전을 증명하고자 한다. 장님인 채 밀고 갔던 페인트 길은 세계를 통과하고 만신창이가 된 남자 앞에 다시금 나타나 방향을 제시한다. 좁은 길을 묵묵히 통과한 후 물에 이르러, 그/그녀는 함께 청계천의 폭포 앞에 서 있다. 인공의 물은 가짜이지만, 그 또한 세찬 폭포를 일군다. 거대한 모형을 지그시 바라보는 뚜렷한 주체적 시선이야말로, <청계천의 개>가 말하고자 하는 장대한 각성의 시작이리라. 영화는 욕망을 금기하는 낙인이 선연한 사회의 심연을 스크린에 투사한 후, 주체에게 초현실적인 체험을 겪게 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일깨운다. 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영화적 도전은 거칠지만 파괴적이다. 감독의 내레이션은 마지막으로 영화 속 충격을 정서적으로 매만진다. 이를 통해 관객은 영화 속에 세계를 액자에 걸어두고, 진짜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나 역시 영화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마치 그가 ‘깨어나 있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를 더 이상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이다.
3월 1일 김경묵 감독의 < 줄탁동시 >가 개봉했다. ‘줄탁동시’ 란 제목은 “선종(禪宗)의 공안(公案) 중 하나로,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제목에 걸맞게, 알 속 병아리처럼 어리고 여린, 어미 없는 젊음들이 존재의 불가능이라는 절망을 넘어서는 과정을 치열하고도 아름답게 그린 독립영화가 바로 <줄탁동시>다. < 얼굴없는 것들 >, < 청계천의 개 >에 이어, 탈북청소년과 동성애자라는 남한 사회의 소수자와 타자를 어떻게 재현해야 하는지 감독이 치열하고 깊게 고민한 끝에 내놓은 작품이다. <줄탁동시>는 2011년 세계3대 영화제로 꼽히는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을 비롯하여 밴쿠버, 로테르담, 런던영화제 등에 초대되었고, 국내에서는 서울독립영화제에 처음 공개되어 상영 전회 매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여세를 몰아 3월초 개봉을 준비하던 2월, 의외의 소식이 들렸다. 2월8일,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심의를 신청한 이 작품을 ‘제한상영가’로 분류하여 통고한 것이다. 감독과 배급사는 영등위가 문제 삼았던 장면, 준이 돈을 벌기 위해 공중 화장실에서 구강 성교하는 15초 가량의 장면을 모자이크 처리해 재심을 신청하고, 개봉 준비를 계속했다. 헌데 2월 16일, 매체 보도 일정을 위해 심의 미필 중에도 시사회를 여는 관례에 따라 마련된 기자 시사회도 등급 미필이라는 이유로 취소되어, 개봉은 다시 한 번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 같은 달 20일에야 우여곡절 끝에 수정판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통과되며 영화는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게 되었다. 제 살과도 같은 자신의 작품을 손상시킬 모자이크 처리로, 장면을 수정하기로 한 감독과 배급사의 결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절치부심 끝에 완성하여 영화진흥위원회 개봉지원까지 받은 작품의 배급을 포기할 수도, 주인공 준의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를 뼈저리게 표현하는 장면을 포기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필자는 서울독립영화제 예심과 관객과의 대화 진행 등을 위해 이 작품을 수정 전에 여러 번 보았다.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인조성기로 연출했다는 이 장면에서 문제의 남성 성기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필사적으로 삶을 잇기 위해 몸부림치는 준의 몸짓이 애잔하고 측은하기 그지없는 이 대목에서 선정성과 음란함을 느낀 이들의 풍부하고 예민한 감수성이 놀랍기만 하다. 헌데 수정된 개봉 버전을 본 관객들은, 필자의 감상과는 다르게, 모자이크가 가리고 있는 남성 성기와 준의 입에서 포르노를 연상케 하는 기이한 아우라가 새로이 태어났음을 보았다고 전한다. 금기가 가져온 예술적 효과랄까. 영등위는 제한상영가 결정을 내리며, 이 작품을 “영상의 표현에 있어 선정적 장면이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제한상영관에서만 상영이 가능한 영화”로 보고, “화장실에서 벌이는 오럴섹스 장면에서의 성기 노출 등 선정성을 고려하여 제한상영가”로 결정했다고 부연했다. 제한상영관이 존재하지 않는 현재, 제한상영가로 분류된다는 것은 개봉을 할 수 없다는 말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이러한 실질적인 문제와 별개로, 제한상영가 등급 자체도 법적 존립 근거가 없다. 제한상영가 등급 제도는 이미 지난 2008년 7월 헌법재판에서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형적으로 존치하고 있는 제한상영가 등급은 정치적,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현 정권이 들어선 뒤 영등위는 독립영화 중 실존 정치인에 대한 풍자가 등장하는 <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에 제한상영가 판정을 내린 바 있고, < 줄탁동시 >처럼 동성애를 다룬 < 종로의 기적 > 예고편, 포스터도 반려한 적이 있다. 이명박 정부가 선임한 영등위 위원장, 그 위원장이 지정하는 4, 5기 위원의 면면을 보면 이러한 판정이 나올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보수 단체와 교육 단체 출신 위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반면, 1,2,3기 영등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든 창작자와 영화전문가의 위원 선임율은, 여러 추측을 불러일으킬 법도 하다. 이를테면 이번 사태에서,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신장하고 그 사회적 책임을 보완하는 자율적 기구로서 제 역할을 찾기 보다는, 학생인권조례 등 논쟁에 붙여진 최근 사안들과 관련하여 문화예술영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파하는 영등위의 욕망을 읽은 건, 미욱한 필자의 오해일까? 대한민국 성인들로부터 격리시켜야 할 지경으로 선정적이라고 <줄탁동시>를 판단했던 영등위원들 자신이 심의 업무를 수행하며 노출, 오염된 ‘선정성’은 어떻게 정화해야 할까? 시대착오적인 영등위의 독립영화 ‘검열’에 불만을 갖는데 그치지 않고, 북한에 대한 농담을 즐기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한 예술가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 기준을 블로그에서 비판하다 기소당한 변호사, 유해 매체로 지정되었다는 웹툰 등의 사례가 이번 사태와 궤를 같이하며,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증거한다는 인식은 과대망상일까? 예술 표현의 자유와 동성애를 함께 억압했던 대표적 위정자가 히틀러와 스탈린이었음을 이즈음 계속 상기하는 나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