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막눈 뜨려고
- 감독
- 최은영
- 제작년도
- 2009
2001년 | 싸이더스 감독: 박흥식 | 원안: 이은영 황혜영 | 각본: 박흥식 최은영(최반야) 장학교 | 각색: 신현정 김유진 장명숙(장명우) | 제작: 차승재 | 촬영: 조용규 | 미술: 박일현 | 음악: 조성우 CAST 정원주: 전도연 | 김봉수: 설경구 | 홍탁: 서태화 | 태란: 진희경 페데리코 펠리니의 < 나는 기억한다 Amarcord >(1974)를 보면 한 남자가 나무 위에 올라가 외칩니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기억한다>에선 처절한 외침이었지만, 박흥식 감독의 첫 영화 <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는 평범한 남녀의 다소 밋밋하면서도 감성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평범할 수 없는 건, 전도연과 설경구라는, 당시 가장 ‘핫’했던 두 배우의 만남이었기 때문이죠. 2000년 가을에 공개된 현장은 봉수(설경구)와 원주(전도연)이 민방위 훈련으로 텅 빈 거리를 뛰는 장면입니다. 은행원인 봉수는 빨리 직장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 은행 건너편 보습학원 선생님인 원주를 우연히 만난 봉수는, 갑자기 원주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합니다. 촬영은 수원시 정자동의 어느 도로에서 이뤄졌는데요, 촬영을 통해 교통 통제가 이뤄졌습니다. 평소에 안면은 있지만 결정적 모멘트는 없었던 두 사람에게, 어쩌면 갑작스러운 ‘손 잡고 달리기’는 어떤 사건일 수도 있었겠죠. 혹은 제대로 된 연애는 한 번도 못 해본 봉수가, 나름의 스타일로 프러포즈를 한 것일 수도 있고요. 촬영을 위한 교통 통제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두 배우는 100미터 정도 되는 동선을 끊임없이 뛰고 또 뛰어야 했습니다. 대여섯 번은 뛰었던 것 같은데요, 전도연은 굽 있는 신발을 신고도 온 힘을 다해 도로를 질주했습니다. 그리고 건너편에선 박흥식 감독이 사인을 줍니다. “둘에 뛰면 돼. 하나, 둘!” 박흥식 감독과 전도연의 인연은 이 영화에서 시작되어 < 인어공주 >(2004) < 협녀, 칼의 기억 >(2015)로 이어집니다. 영화아카데미 출신이며 박광수 감독의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 허진호 감독의 <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연출부를 거친 박흥식 감독은 이 영화를 위해 100여 명의 결혼 적령기 남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결혼에 관해 한때 굉장히 깊이 생각했었다. 주변에서 연애나 결혼한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사실 한결같이 재미가 없다. 그래도 누구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가지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괜히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게 된다. 그런 감정의 달라짐을 포착하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로맨틱 코미디의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느낌의 디테일’에 대한 영화입니다. 평범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트랙이나 크레인 같은 장비가 동원되었습니다. 지난 번 < 품행제로 >(조근식, 2002) 포스팅 때 언급했던 조용규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았습니다. 이창동 감독에게 시나리오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상황에서, 박흥식 감독을 직접 만난 설경구는 감독에게 느꼈던 좋은 느낌만으로 시나리오도 안 읽고 출연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나이가 서른여섯 살인가 되는 감독이 꼭 미소년 같았죠. 영화가 그대로 나올 것 같았어요.” 그리고 현장에선 최소한의 정보만 듣고 찍었다고 하네요. “그냥 그대로 찍었어요. 시나리오에 없는 설정이라도 웃음이 나오면 웃고, 얼굴이 가려우면 긁어가면서.” 강렬했던 < 해피엔드 >( 정지우 , 1999) 이후 9개월 정도 쉬면서 전도연은 우울증을 겪었다고 하네요. 이때 만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시나리오는 너무나 재미있게 술술 읽혔고, 큰 고민 없이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원주는 실제로 제 모습과 많이 비슷해요. 전 영화 밖에서는 정말 평범하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전도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 했고 힘들진 않았어요.” 그리고 상대역인 설경구에 대해선 “< 박하사탕 >(이창동. 2000) 보면서 솔직히 무섭고 소름이 끼쳤는데, 알고 보니 소박하고 털털하고 배려가 많은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 영화 이후 17년 만에 개봉 예정작인 < 생일 >( 이종언 , 2018)에서 재회하게 됩니다. 취재진과 감독 배우 사이의 간담회는, 도로 한 구석에서 이뤄졌습니다. “액션!” 소리에 뛰기 시작하고 “컷!” 사인에 멈추기를 반복하는 두 배우. 그들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겉으로는 밝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지만 혼자 있을 땐 외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재미있지만 씁쓸하기도 한 영화. 그리고 ‘자연인 설경구’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영화.”(설경구)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람에게도 이중적인 면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 외향적인 면도 있고, 내성적인 면도 있고, 그런 입체적인 면을 지닌 사람들이 만나 만드는 따뜻한 이야기.” 그리고 박흥식 감독은 두 배우에 대한 믿음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캐스팅 할 때 다른 배우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전도연과 설경구는 스타이긴 하지만 배우라는 레테르만 빼면 보통 사람 같은 면이 가장 많은 배우들이다. 이 영화에선 무엇보다 배우들의 힘이 컸다. 난 디테일에만 신경 썼고. 슛 들어가기 전에 두 사람의 자연스런 말투와 행동들을 관찰하면서 캐릭터에 반영해나갔다.”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한국 남자들은 나이 처먹어가지고 아저씨 되면 아무한테나 조언하고 충고하고 그래도 되는 자격증 같은 게 국가에서 발급되나 봐” - 극 중 연주의 대사 < 이층의 악당 >은 아마 한국 영화사상 가장 이상한 엔딩을 가지고 있는 영화 중 한 편일 것이다. 골동품 밀매꾼 창인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수십억을 호가하는 청화 다기는 모녀의 차지가 되었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는데 창인은 다시 모녀의 집에 숨어든다. 그렇다고 여기서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창인은 불면증을 호소하며 모녀의 호화로운 아파트 거실에 힘없이 널브러져 있을 뿐이다.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그렇다고 속편을 예고하는 열린 결말 같지도 않은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은 <이층의 악당>이 장르 영화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장르의 규칙으로 봉합될 수 없는 이물감을 남기는 영화라는 점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는 핵심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마치 봉준호 감독이 < 괴물 >과 < 살인의 추억 >에서 장르의 깃발을 흔들어대며 관객을 불러 모았지만 현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살인의 추억>과 같은 시기에 도착한 장준환 감독의 괴작 < 지구를 지켜라 >가 외계인과 지구에 관한 SF 영화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길들여져 있는 폭력적인 권력에 관한 고발의 영화였던 것처럼, <이층의 악당>은 장르 자체가 일종의 맥거핀이 되는 영화이다. 다만 앞선 세 편의 영화들이 끝까지 장르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픽션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단지 풍자와 은유의 효과를 적절히 이용하는 반면, <이층의 악당>은 수시로 장르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캐릭터들이 장르의 효과를 매 순간 잠식하고 있다. 영화마다 그 영화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가장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면, < 이층의 악당 >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극 중반부 연주가 창인과 술집에서 만나 신세 한탄을 하다가 자신의 이야기에 자꾸만 끼어드는 창인을 향해 날리는 촌철살인의 한 마디이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횡행하는 맨스플레인에 대한 따끔한 충고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대사는 영화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와는 그다지 크게 상관없는, 한국 사회의 어떤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영화 전반부에 걸쳐 있는 이러한 신경질적인 유머는 이 영화에서 단순한 유머 코드 이상의, 손재곤 감독의 세계관을 은연 중에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층의 악당>에서 인물들의 대사, 더 나아가서는 캐릭터의 삶을 드러내는 장치들은 이 영화의 인물들에게 단순히 사건의 전개에 따라 움직이는 각자의 역할 분담 이상의 현실감을 부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관객을 장르의 규칙 아래 몰입시키지 않고 캐릭터의 내면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캐릭터들의 내면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기도 한다. 연주의 헤어날 길 없는 불면증, 연주의 딸 성아의 외모 콤플렉스는 그녀들을 향한 주변인들의, 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끊임없는 조롱과 감시의 시선과 연관되어 있다. 아직은 젊은 나이에 사춘기 딸을 둔 과부가 된 연주의 우울증을 가중시키는 것은 매번 감시의 시선을 보내고 참견을 마다치 않는 이웃집 여인의 존재, 그리고 치료받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그녀에게 은연중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의사이다. 성아 또한 학교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몰카로 찍는 급우들, 그리고 인터넷에 올라온 악성 댓글 때문에 괴로워하며,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외모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들이 드러내는 것은 유독 다른 사람의 허물에 관심을 보이고 이에 집착하며 조롱을 일삼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다. 그렇다면 창인의 존재는 어떠한가. 창인은 한국 사회의 남성들이 갖고 있는 이중성을 그대로 체화한 인물이다. 그는 젠틀하고 로맨틱한 남자를 연기하는 순간에도 연주 말대로 거의 습관적으로 그녀에게 항상 충고하고 지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연주의 불면증이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그렇다며 아침에 동네 한 바퀴를 뛰면 불면증 따위는 싹 없어질 거라고 말하는 창인은, 성아에게도 짐짓 멋진 아저씨 흉내를 낸다(그러나 창인의 그러한 태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듣지 않는 곳에서 그는 그들에 대한 경멸감을 혼잣말로 끊임없이 쏟아낸다. 그가 숨겨진 목적, 즉 청화 다기를 찾아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두 모녀에게 접근한다는 영화의 플롯은 그의 이중성을 설명해주지만, 한편으로 거기에는 은연 중 스스로를 높이고 상대를 낮추는 일반적인 한국 남성들의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묻어있다. 그리고 손재곤 감독은 창인의 끊임없는 실패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그의 허세를 조롱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화 후반부 그가 연주의 집에 있는 골동품 창고에 들어갔다가 갇혀버리는 장면은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필요 이상으로 반복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창인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태도가 숨어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연주는 숨겨진 의도를 지닌 창인을 의도치 않게 끊임없이 괴롭히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위선을 폭로한다. 그리고 로맨틱한 작가 애인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던 창인은 자신의 가면이 벗겨지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감당할 뿐이다. 영화 후반부 그의 수상쩍은 정체를 눈치챈 연주는 그의 나이를 들먹이고, 우리 나이에 로맨스가 가당키나 하냐며 섹스나 하자고 말한다. 연주의 가장 큰 약점처럼 보였던 우울증이 아이러니하게도 창인의 이중성을 꿰뚫어 보는 혜안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 속에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세간의 기준, 그리고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에 지나치게 가혹한 사회의 위선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존재한다. 손재곤의 영화를 보며 혹자는 우디 앨런의 영화를 떠올리기도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 이층의 악당 >에는 모든 인물과 거리를 두는 태도가 있다. 멀찍이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허약하고 어리석은지, 그래서 때로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에 대해 우디 앨런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캐릭터들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 설파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롱의 시선만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연민의 시선 또한 묻어있다. <이층의 악당> 또한 의도적인 거리 두기를 통해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을 조금씩 희화화하지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위선과 불안감을 캐릭터와 공유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우디 앨런의 영화와 맞닿는 어떤 겸허함이 숨어있다. 이제, 다시 한 번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창인은 요즘 잠을 도통 잘 수가 없다며 연주에게 불면증은 다 나았느냐 묻고, 그녀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울먹이며 뇌까린다. “씨, 자기만 괜찮아지고...” 아침 운동이면 불면증 따위는 날려버릴 수 있다며 설교를 늘어놓던 창인은 이제 정확히 연주와 유사한 우울증 환자가 되었고, 그런 창인의 머리를 안쓰럽게 쓰다듬으며 연주는 말한다. “나도 알아요, 그런 기분... 나도 지금은 괜찮지만 언제 또다시 그렇게 될지 몰라요..” 숨겨진 보물을 찾는 코미디 스릴러 장르에는 걸맞지 않은 이 기이한 엔딩은 끊임없이 장르적 속성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환기시키는 캐릭터들을 등장시켰던 이 영화가 향하는 목적지가, 결국 픽션을 통해 얻어지는 인간사에 대한 진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이 아닌,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은, 끝이되 결코 끝일 수 없는 이 이야기의 묘한 결말을 뒷받침해 준다. 허구의 이야기를 다루는 예술이 결국 복잡다단한 현실을 환기하게 만든다는 것, 환상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것은 예술이 갖는 가장 핵심적인 효과이기도 하다. < 이층의 악당 >은 완벽하게 허구의 세계 속으로 몰입할 수 없는 캐릭터들을 통해 이야기 속에 숨겨진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21세기 한국 영화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유의미한 작품으로 남는다.
안철영 감독의 38년 작 < 어화 >는 일본 제국주의가 노골화되던 30년대 말, 정치적인 상황과는 다르게 ‘동양주의’가 문화 전반을 휩쓸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다. 30년대 이후 식민지 문화 정책의 하나로 독려되었던 ‘반도적인 것’ ‘조선성’에 대한 요구는 원시성, 향토성을 통해 드러나는 열등한 외지로서의 식민지 조선의 풍경에 대한 엑조티즘과 그 열등성에 대한 강조로서 등장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조선적인 색채의 강조가 조선 문화계에 농민문학, 향토미술과 같은 이름으로 의외로 빠르게 흡수된 데에는 일본이 자신들의 근대적 동양성에 비해 열등하다고 정의했던 조선성이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 근대 치하에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려는 움직임으로 작용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 어화 >의 줄거리는 기존의 신파극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촌의 가난한 어부의 딸 인순은 고향 친구인 최천석과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빚 대신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는 수전노 장주사의 마수를 벗어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지만, 장주사의 아들 철수의 꼬임에 넘어가 그에게 순결을 잃는다. 그녀의 고향 언니이며 서울에서 버스 차장으로 일하고 있는 옥분의 도움으로 철수의 거처에서 빠져나온 인순은 취직이 여의치 않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기생이 된다. 우연히 기방에서 철수와 마주친 인순은 모멸감에 자살을 기도하지만, 그녀를 찾아온 천석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무산계급 착취와 성폭행, 서울에 상경하여 타락하는 순진한 시골 처녀 등 신파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 어화 >는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에 눈물을 쥐어짜는 신파성에 기대기 보다는 고향, 향토성에 대한 노스탤지어, 하층 여성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선을 기반으로 한 계몽 의지가 드러나는 영화다. 부르주아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다룬 2,30년대 구소련 영화들이 즐겨 다루었던 주제와 형식에 큰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어화>의 구조는 댓구와 대조법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인순과 그녀의 가족, 그리고 옥분의 공간이 비교적 탁 트이고 시골적인 야외 풍경을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반해, 철수와 장주사는 내러티브 상 필요한 장면들을 제외하고는 주로 실내에서 등장한다. 인순이 철수와 함께 서울에 올라온 후 철수가 등장하는 장면은 주로 호텔, 회사, 다방과 같은 인공적이고 세련된 느낌의 도시 공간을 상정하고 있는 반면, 인순이 서울에서 옥분이나 천석과 조우하는 장면은 시골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공원과 같은 곳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시골과 도시, 인순과 철수와 같은 대립항들을 더욱 공고하게 해 주는 형식적 장치들이다. < 어화 >에서 농촌과 도시라는 극명한 이미지의 대비는 영화 전체의 수미상관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마을 축제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쾌지나칭칭나네’라는 민요와 더불어 춤추고 축제를 즐기는 어른들의 모습이 몽타주로 보여진다. 그리고 민요가 계속 연결되면서 장면은 바뀌고 인순과 천석의 롱숏이 등장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첫 장면과 대구를 이루는 장면이 나오는데, ‘쾌지나칭칭나네’라는 민요가 역시 깔리지만 춤추고 즐기는 사람은 어른이 아닌 아이들이다. 이 장면은 마치 음악에 맞춘 듯 좀 더 빠른 템포의 몽타주로 구성된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영화 초반부의 추이와 마찬가지로 천석과 인순의 롱숏으로 연결된다. 영화 첫 장면에서는 긴 머리채에 전통 한복을 입고 있던 인순은 마지막 장면에서 머리를 올리고 짧은 계량한복 차림이다. 이처럼 <어화>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의도적으로 대구로 구성하면서 미묘한 차이를 두어 주제를 전달한다. 아이들의 이미지가 상징하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인순의 변화는 이 영화가 지니고 있는 계몽주의 시선을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다. < 어화 >와 같이 농촌을 소재로 조선성을 드러내는 영화들은 농촌의 현실을 보여주기보다는 인공적인 농촌의 모습을 전시한다는 오명을 씻기 힘들었다. 조선적인 것을 스크린에 담는 순간 이국적 토산품 이상의 가치를 갖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은 식민지의 문화 예술이 처한 운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화>에서 농촌의 원시적 아름다움은 도시의 위협적인 이미지와 대비되는 노스텔지어적 공간을 구성한다. 이는 곧 도시로 대표되는 위협적인 식민지 근대화에 대항하는 계몽에 대한 의지와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어화>는 식민지를 바라보는 엑조티즘의 시선을 담보로 한 로컬리즘을 전략적으로 구현하면서, 그 안에서 식민 근대화에 저항하는 계몽성을 강조하는 이중의 시선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