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 아
- 참여 작품
- 청사 (1993)
죽은 아내가 “늘 가고 싶었다”던 일본에 가서 그녀가 생전 보고 싶었던 후지산과 벚꽃을 ‘대신’ 눈에 담은 남편 루디. 도리스 되리의 영화 <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2008)을 보며 그 여정이 사뭇 쓸쓸하지만, 벚꽃(이 영화의 원제가 Cherry Blossoms이기도 하다)이 만개하듯 애틋한 감정으로 충만해 짐을 느낀다. 비록 사랑하는 아내 없이 저 혼자만의 여행이었지만 남자는 그녀의 기억과 함께 평생 최초의 일본여행을 끝마친다. 지상에서의 사랑은 이미 끝났지만, 사랑은 그 크기만큼 고스란히 남겨지는 사랑질량보존의 법칙 아래서. < 베를린의 연인Gluck >(2012)은 도리스 되리가 믿고 있는 그 ‘사랑''''이 과연 얼마나, 어디까지 유효한지, 두 남녀의 사랑을 통해 돌아보는 또 하나의 실험이다. 이번은 좀 극한의 상황에 기반하는데, 여자 이리나(알바 로르와처)는 고국에서 내전으로 부모님을 잃고 집단 강간당한 채 베를린으로 와 불법체류자로 살고 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매춘을 택한 그녀는, 어느 날 거리에서 개와 함께 사는 펑크족 칼리(빈젠즈 키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상처를 가진 여자와, 자신이 상처를 가진지도 미처 몰랐던 남자는 서로를 의지하며 이제는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리나의 주요 고객이었던 남자가 애꿎게도 이리나와 섹스 도중 죽게 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칼리는 이 순간 위기에 처한 이리나를 위해 ‘무엇이든’하는데, 그건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끔찍한 행동을 동반하는 결정이다. 이리나의 변호를 자처한 변호사 노아(매티아스 브랜트)의 아내는 독일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을 듣고 “당신도 그런 상황이라면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줄 수 있겠냐”고 질문한다. 그 질문에 대해서 우리 역시 마찬가지 답변을 요구하게 된다. 사실 이 과정에서 영화의 톤이 다소 불균질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 또 화면으로 제시된 사건의 충격적 비주얼 재현에 비해, 결말이 도출되는 과정이 상당히 쉽고, 더군다나 기대 이상으로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다. 도리스 되리는 <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에서 우리가 보았던 그 먹먹함이 남겨질 틈을 주지 않고, 대신 경쾌한 음악으로 이들의 사랑에 힘을 보태준다. 동화같은 분위기에 일조하는 건 영화의 관찰자로 개입하는 변호사 노아의 탓이 크다. 그는 이리나와 딱 한 번, 운전하는 도중 그녀를 칠 뻔했던 ‘교차로에서의 인연’을 빌미로, 위기에 처한 그녀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나선다. 변호사마다 각자 전공분야가 있다면 노아의 핵심 소송 분야는 특이하게도 “행복을 추구하는 형사소송 변호사”다. 그는 “행복이 우릴 버리는 순간, 즉 인생이 영원히 바뀌는 사고나 재난의 순간엔 내가 전문가다”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까다롭고 돈 안 되고 변호하기 힘든 의뢰인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스타일의 변호사다. 이리나 커플에게도 그는 마치 ‘수호천사’처럼 등장하는데, 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는 실화에 바탕한다. 독일의 형법 전문 변호사 페르난디트 본 쉬락크는 자신이 변호한 사건 중 희귀한 사건을 골라 기록한 「살인자를 어떻게 변호할 수 있을까」를 집필한다. 으레 그럴법한 범인의 얼굴을 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극악무도한 살인에 이르기까지, 숙명의 작용, 그리고 아이러니한 인생의 단면을 표현한 책으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품으로, 도리스 되리는 처음으로 원작을 가지고 각색 작업을 한다. 도리스 되리의 전작들 <남자들> < 파니 핑크 > < 헤어드레서 > < 베를린의 연인 >은 도리스 되리의 작품을 돌아볼 때 데뷔작 <남자들>(1985) 부터 < 파니 핑크 >(1994), < 헤어드레서 >(2010) 등을 거치며 면면히 이어져 온 도리스 되리 특유의 유머러스함을 한껏 배양한 작품이다. 부모의 시체 옆에서 강간을 당했던, 감당하지 못할 비극을 지니고 있는 이리나는, 내전에 관한 뉴스가 나올 때면 다시 그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야 하고, 자신의 생살에 옷핀을 꽂아 피를 내면서 그 고통을 참아야 할 정도로 마음을 다쳤지만, 끝까지 자신의 삶을 놓치지 않는 여자다. 불법체류자로, 매춘부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지만 베를린에서 이리나의 생활은 상당히 활기차다. 그녀는 칼리를 만나고 처음으로 ‘사랑해서’ 섹스를 하는 행복함을 얻게 되고, 싸구려 호텔에서 벗어나 자기가 데코레이션 할 수 있는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그와의 미래를 꿈꾼다. 도리스 되리 감독은 이리나가 집을 인테리어 하는데 저 혼자 들이는 수고를 보여주는데 꽤 긴 장면에 할애하는데, 하트 모양으로 설치한 벽면 라이트, 인조잔디처럼 깔아놓은 초록색 카펫, 장미 모양이 새겨진 발 매트, 싱크서랍에 넣은 아기자기한 식기 등 이리나의 취향을 반영한 것 같은 소품들은 하나같이 밝고 예쁘다.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헤매는 29살 외로운 여성 파니 핑크의 강렬한 색감으로 치장된 집(<파니 핑크>)이나 바람피운 남편과 결별하고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카티가 꾸민 베를린 빈티지 색감이 총동원된 미용실((<헤어드레서>)처럼, 이리나의 공간 역시 자신에게 닥친 힘겨운 운명을 헤쳐 나가려는 여성 이리나의 의지, 칼라 테라피에 가까운 치유의 기능이 더해진다. 캡처하고 싶은 화면들이 가득한 도리스 되리의 영화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들이다. 작업의 동반자였던 카메라맨과 프로듀서를 몇 년 사이에 죽음으로 잃게 된 도리스 되리 감독은 이후 불교에 심취하게 됐고, 작품의 곳곳에 인연과 운명의 기운들이 함께한다.(<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에서 루디가 공원에서 만난 춤추는 소녀 같은 존재가 대표적이다) “오예, 너는 내 처음 오예야”라는 둘만의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이리나에게, 칼리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놓치고 싶지 않은 절박한 존재이자 그녀의 운명이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불행을 도려낼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여서이자, 그녀 역시 칼리를 보호하고 돌봐줄 수 있고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베를린의 연인 >은 신파를 바탕으로 하되, 특유의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은 소소한 드라마다. 도리스 되리의 필모그래피 중 수작의 반열에 오르긴 힘들지만, 감독의 특징적 요소들은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다.
“한국 남자들은 나이 처먹어가지고 아저씨 되면 아무한테나 조언하고 충고하고 그래도 되는 자격증 같은 게 국가에서 발급되나 봐” - 극 중 연주의 대사 < 이층의 악당 >은 아마 한국 영화사상 가장 이상한 엔딩을 가지고 있는 영화 중 한 편일 것이다. 골동품 밀매꾼 창인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수십억을 호가하는 청화 다기는 모녀의 차지가 되었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는데 창인은 다시 모녀의 집에 숨어든다. 그렇다고 여기서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창인은 불면증을 호소하며 모녀의 호화로운 아파트 거실에 힘없이 널브러져 있을 뿐이다.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그렇다고 속편을 예고하는 열린 결말 같지도 않은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은 <이층의 악당>이 장르 영화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장르의 규칙으로 봉합될 수 없는 이물감을 남기는 영화라는 점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는 핵심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마치 봉준호 감독이 < 괴물 >과 < 살인의 추억 >에서 장르의 깃발을 흔들어대며 관객을 불러 모았지만 현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살인의 추억>과 같은 시기에 도착한 장준환 감독의 괴작 < 지구를 지켜라 >가 외계인과 지구에 관한 SF 영화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길들여져 있는 폭력적인 권력에 관한 고발의 영화였던 것처럼, <이층의 악당>은 장르 자체가 일종의 맥거핀이 되는 영화이다. 다만 앞선 세 편의 영화들이 끝까지 장르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픽션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단지 풍자와 은유의 효과를 적절히 이용하는 반면, <이층의 악당>은 수시로 장르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캐릭터들이 장르의 효과를 매 순간 잠식하고 있다. 영화마다 그 영화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가장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면, < 이층의 악당 >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극 중반부 연주가 창인과 술집에서 만나 신세 한탄을 하다가 자신의 이야기에 자꾸만 끼어드는 창인을 향해 날리는 촌철살인의 한 마디이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횡행하는 맨스플레인에 대한 따끔한 충고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대사는 영화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와는 그다지 크게 상관없는, 한국 사회의 어떤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영화 전반부에 걸쳐 있는 이러한 신경질적인 유머는 이 영화에서 단순한 유머 코드 이상의, 손재곤 감독의 세계관을 은연 중에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층의 악당>에서 인물들의 대사, 더 나아가서는 캐릭터의 삶을 드러내는 장치들은 이 영화의 인물들에게 단순히 사건의 전개에 따라 움직이는 각자의 역할 분담 이상의 현실감을 부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관객을 장르의 규칙 아래 몰입시키지 않고 캐릭터의 내면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캐릭터들의 내면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기도 한다. 연주의 헤어날 길 없는 불면증, 연주의 딸 성아의 외모 콤플렉스는 그녀들을 향한 주변인들의, 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끊임없는 조롱과 감시의 시선과 연관되어 있다. 아직은 젊은 나이에 사춘기 딸을 둔 과부가 된 연주의 우울증을 가중시키는 것은 매번 감시의 시선을 보내고 참견을 마다치 않는 이웃집 여인의 존재, 그리고 치료받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그녀에게 은연중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의사이다. 성아 또한 학교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몰카로 찍는 급우들, 그리고 인터넷에 올라온 악성 댓글 때문에 괴로워하며,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외모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들이 드러내는 것은 유독 다른 사람의 허물에 관심을 보이고 이에 집착하며 조롱을 일삼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다. 그렇다면 창인의 존재는 어떠한가. 창인은 한국 사회의 남성들이 갖고 있는 이중성을 그대로 체화한 인물이다. 그는 젠틀하고 로맨틱한 남자를 연기하는 순간에도 연주 말대로 거의 습관적으로 그녀에게 항상 충고하고 지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연주의 불면증이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그렇다며 아침에 동네 한 바퀴를 뛰면 불면증 따위는 싹 없어질 거라고 말하는 창인은, 성아에게도 짐짓 멋진 아저씨 흉내를 낸다(그러나 창인의 그러한 태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듣지 않는 곳에서 그는 그들에 대한 경멸감을 혼잣말로 끊임없이 쏟아낸다. 그가 숨겨진 목적, 즉 청화 다기를 찾아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두 모녀에게 접근한다는 영화의 플롯은 그의 이중성을 설명해주지만, 한편으로 거기에는 은연 중 스스로를 높이고 상대를 낮추는 일반적인 한국 남성들의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묻어있다. 그리고 손재곤 감독은 창인의 끊임없는 실패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그의 허세를 조롱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화 후반부 그가 연주의 집에 있는 골동품 창고에 들어갔다가 갇혀버리는 장면은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필요 이상으로 반복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창인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태도가 숨어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연주는 숨겨진 의도를 지닌 창인을 의도치 않게 끊임없이 괴롭히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위선을 폭로한다. 그리고 로맨틱한 작가 애인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던 창인은 자신의 가면이 벗겨지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감당할 뿐이다. 영화 후반부 그의 수상쩍은 정체를 눈치챈 연주는 그의 나이를 들먹이고, 우리 나이에 로맨스가 가당키나 하냐며 섹스나 하자고 말한다. 연주의 가장 큰 약점처럼 보였던 우울증이 아이러니하게도 창인의 이중성을 꿰뚫어 보는 혜안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 속에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세간의 기준, 그리고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에 지나치게 가혹한 사회의 위선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존재한다. 손재곤의 영화를 보며 혹자는 우디 앨런의 영화를 떠올리기도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 이층의 악당 >에는 모든 인물과 거리를 두는 태도가 있다. 멀찍이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허약하고 어리석은지, 그래서 때로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에 대해 우디 앨런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캐릭터들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 설파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롱의 시선만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연민의 시선 또한 묻어있다. <이층의 악당> 또한 의도적인 거리 두기를 통해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을 조금씩 희화화하지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위선과 불안감을 캐릭터와 공유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우디 앨런의 영화와 맞닿는 어떤 겸허함이 숨어있다. 이제, 다시 한 번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창인은 요즘 잠을 도통 잘 수가 없다며 연주에게 불면증은 다 나았느냐 묻고, 그녀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울먹이며 뇌까린다. “씨, 자기만 괜찮아지고...” 아침 운동이면 불면증 따위는 날려버릴 수 있다며 설교를 늘어놓던 창인은 이제 정확히 연주와 유사한 우울증 환자가 되었고, 그런 창인의 머리를 안쓰럽게 쓰다듬으며 연주는 말한다. “나도 알아요, 그런 기분... 나도 지금은 괜찮지만 언제 또다시 그렇게 될지 몰라요..” 숨겨진 보물을 찾는 코미디 스릴러 장르에는 걸맞지 않은 이 기이한 엔딩은 끊임없이 장르적 속성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환기시키는 캐릭터들을 등장시켰던 이 영화가 향하는 목적지가, 결국 픽션을 통해 얻어지는 인간사에 대한 진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이 아닌,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은, 끝이되 결코 끝일 수 없는 이 이야기의 묘한 결말을 뒷받침해 준다. 허구의 이야기를 다루는 예술이 결국 복잡다단한 현실을 환기하게 만든다는 것, 환상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것은 예술이 갖는 가장 핵심적인 효과이기도 하다. < 이층의 악당 >은 완벽하게 허구의 세계 속으로 몰입할 수 없는 캐릭터들을 통해 이야기 속에 숨겨진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21세기 한국 영화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유의미한 작품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