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사고. 폐쇄회로 TV 짧은 영상
- 제작년도
- 2010
4분할 폐쇄회로 모니터 안에서 지하철 역사(驛舍)들의 이모저모가 보인다. 서울 곳곳의 지하철 플랫폼을 찍은 저화질 흑백 이미지들이 둔탁한 리듬의 편집으로 나열되는 모니터에서는 열차들이 도착한 뒤 통근자들이 타고 내리고 터널 안에서는 다음 열차의 불빛이 빛난다. 서로 다른 지점을 비추는 네 개의 프레임과 한 프레임을 확대한 이미지가 번갈아 배치되다가 체류 외국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트랙으로 내려가고 그의 마지막 순간이 열셋이나 열넷 또는 열다섯 프레임일 수도 있는 착란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리고, video off... 어두운 색깔의 점퍼를 입은 남자의 최후를 기록한 이 CCTV 이미지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창생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태양 아래로 카메라가 틸트 다운하면 스모그에 뒤덮인 서울의 빌딩 숲이 드러난다. 곧이어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건너뛰면서 라디오 채널의 잡다한 목소리들이 겹치고 도시 경관 위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조언이 흘러나온다. “이번 한 달, 올 한 해를 진정 성공하려면 나의 성과를 냉철하게 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겠죠?”, “웃을 일이 있을 때는 소리 내어 즐겁게 웃도록 하십시오. 많이 웃는 사람은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에 걸릴 염려도 없다고 합니다.” 상냥한 충고와 맞물린 이미지들의 전환은 무뚝뚝하고 가차 없다. 교통체증, 지하철역의 승하차객들, 연체동물 형상의 인쇄기, 무표정한 노동자의 얼굴, 펄럭이는 구인광고, 증기를 내뿜는 다리미, 재봉틀과 박카스 따위의 사물과 행위들이 일상과 산업 공간을 흘러 다닌다. 그 즈음 일상적 생활사의 세목들 위로 별안간 건조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끼어들어 최근 한국인의 사망 원인에 대한 통계자료를 읽어 내려간다. 미세먼지와 황색포도상구균 등의 미생물, 암이나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같은 병증에 이어 고의적 자해로 인한 사망이 4위에 올랐노라고, 내레이터는 말한다. 다시 죽음이라는 의제로 돌아와 이 메마른 통계들의 꺼풀을 벗겨내면 그 아래에서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 파산의 기술 >은 프롤로그에 제시되었던 잊히지 않는 죽음의 내막을 탐사하는 비선형 복합 내러티브 다큐멘터리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혼란스러운 지형을 매핑하는 이 영화는 4개 챕터로 구성된 느슨한 플롯을 취하는데, 서로 다른 기원과 출처에서 발췌한 이미지 자료들을 배치하고 이미지들의 좌표와 접촉면을 확장하여 형성된 문맥이 서사의 핵심이 되도록 한다. 형식과 의미 질서의 구속성을 무시하여 일견 두서가 없는 듯 보이는 서사는 디스토피아적인 도시 경관과 경제적 재난, 긴축 위기에 직면한 남녀들의 증언을 통해 1990년대 말부터 한국 사회에서 시작된 파산의 물결이 개인에게 미친 여파를 추적한다. 말과 언어, 이미지, 정보의 충돌을 전개하는 기술 방식은 번영의 뒤에 도사린 위기, 신자유주의 질서 하에서 은폐되는 착취와 고갈, 살인에 대한 총체적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상적인 확신의 목소리 위에 파산의 풍경들을 대비하는 충돌의 미학을 내세우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충돌의 이미지들이 앞을 막아선다. 불명료한 카메라의 표면 위에 철문을 두드리는 소음이 얹힌다. 채무 변제를 종용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잦아들면 전원이 켜지고 카메라는 십자가와 단란한 가족사진들이 벽에 걸린 좁은 집을 스캔한다. 젊은 엄마는 어린 딸에게 더 큰 집으로 이사할 거라는 밝은 미래를 약속하지만 웬일인지 딸은 “무섭다”고 말한다. 순간 암전, 강제집행을 고지하는 목소리를 따라 불이 켜지면 압수품에 붙은 붉은 딱지들이 보이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다. 저들의 꿈은 어떻게 살해당했는가? 말과 목소리, 이미지의 충돌을 모체로 이어지는 다음 시퀀스에서 다종다기한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은 일상 업무와 부채의 증가, 직업의 조건 따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 중 일부는 얼굴을 숨기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 또는 눈두덩이로만 나타난다. ’붉은 입술들‘이 생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신용과 부채에 의존하는 사정에 대해 말하는 동안 세계경제포럼에서는 말쑥한 비즈니스 맨들이 샴페인을 들고 어슬렁거린다. 한때 아파트 건물이 있던 공간은 크레인으로 철거되고 있으며 부서진 콘크리트 슬라브가 심란하게 흩어져 있다. 붉은 입술들의 대화는 그들의 생존 투쟁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 모닝커피, 출근 준비, 통근, 어린이집, 월세, 여가 시간을 즐기는 방법 따위의 생존 루틴들이다. 포크레인의 집게발이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철근 뭉치를 뽑아내면, ‘붉은 입술들’은 카드 돌려막기로 연명해야 하는 채무의 굴레를 한탄하고, 가족들은 집에서 쫓겨난다. IMF 이후 기업의 파산과 구조 조정이 계약 관행의 조정, 실업, 인플레이션, 대출, 개인 파산으로 이어졌던 고통의 지도가 순식간에 그려진다. 동시에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는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운동가들의 감격적인 연설이 흘러나온다. 텔레비전 안에 박제된 이미지를 제외한 주변은 모두 어둡다. <파산의 기술>은 리드미컬하고 아이러니한 몽타주, 감독 자신의 무감동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사회에서 개인을 증발시킬 위기에 처한 파산의 공기를 시적인 게릴라 영상으로 전환한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혁신을 기도한 감독 이강현은 행과 불행,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에 대한 반성적 시각을 가지고 고단한 노동의 조건과 일상, 거대한 대부 경제의 무게 아래 짓눌린 채무자들의 생존 투쟁, 승리의 확신이 무색한 죽음의 기운들을 능숙하게 대조한다. 승리를 공표하고 환호하는 사람들, 누가 이긴 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왔는가? 사태의 본류와 지류가 분별되지 않는 혼돈의 지도 안에서 생활사의 분주함, 부채의 압력, 웅장한 공공프로젝트의 역사, 노동조합주의의 쟁취, 선거의 승리, 오염된 콘크리트 도시에 대한 느낌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함으로써 <파산의 기술>은 진정한 사회적 고통과 불안을 묘사하려 한다. 이 지점에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우리들의 접하는 이미지의 두께를 이야기한다. 이미지의 표층과 심층에 쌓인 시간의 두께는 서울 영등포 어느 뒷골목 벽에 붙은 너저분한 포스터를 찍은 이미지에 대한 독해로 해설된다. 한몫에 보이지 않는 이 이미지 더미 안에는, 국제결혼을 알선하는 포스터와 사금융 대부업체 전단, 초고속 인터넷 회사의 광고, 룸 가라오케를 선전하는 포스터, 그리고 이 모든 이미지의 뒤에 쌓인 시간의 퇴적층들이 공존한다. 내레이터의 말대로, 우리는 오랜 시간을 가지고 이미지들의 안과 밖을 살펴야 한다. 한 맥락에서 이강현은 재현과 재현의 장치를 동시에 또는 번갈아 보여준다. TV 모니터, 비디오 캠 이미지는 현실과 재현의 구분을 강조한다. TV 모니터 안의 이미지와 바깥의 현실 사이에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우리들은 이미지 바깥에 서 있다. 영화에 주석을 달고 정리해야 하는 에필로그는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1987년 시민항쟁을 기념하는 집회로 이동한다. 선언과 주장, 추억, 공염불, 낄낄거림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카메라는 연사가 아닌 군중을 비추고 있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웃음을 흘리는 해사한 군중들 사이에서 투쟁가에 고양된 한 남자는 외롭게 주먹을 치켜올린다. 장면이 전환되고 흐린 하늘 아래 복면을 두른 노동자들의 집회를 시발로 하여 아파트에서 누군가의 유품을 정리하는 여인의 비디오 영상이 흐른다. 화면 위에 찍힌 날짜는 2003년 10월 17일이다. 붉은 이불이 둘둘 감겨 있는 사람은 고공 크레인 농성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프롤로그의 폐쇄회로 영상에서 보았던 남자의 죽음으로 돌아간다. 주검을 향한 통곡과 이어지는 격문, “나의 목숨을 내놓으라 하면 너의 심장을 찔러주겠다.” 승리를 기념하는 사람들의 맞은편에서 죽창을 든 노동자들은 공격을 위한 채비에 나섰다. 우리들은 이미 철거와 퇴거, 쏟아지는 절망, 그리고 지하철에서 생을 마감한 남자를 보았다. 영화의 앞과 뒤에 평행하게 놓인 죽음은 어떻게 서로를 향하는가? 상투적인 인과론의 오류를 넘어 <파산의 기술>은 간단히 정의될 수 없는 사회학적 현상으로 이 죽음들의 지도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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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입시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보도물은 수없이 많다. 그만큼 대입이란 이슈는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 모순과 갈등을 응축한 중요한 사건이라는 얘기다. 수능 시험일은 한국사회의 일상이 잠정적으로 중단 내지 조정되는 시간이다. 군부대도, 경찰서도, 민간기업도, 하물며 항공 운항조차도 입시를 위해 각자 일상의 스케쥴을 조정한다. 원활한 입시 진행을 위해 민관이 동원되는 상황을 국민들은 기꺼이 이해한다. 참으로 이해할 듯하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저 대학 시험일 뿐인데! 힘들어 죽겠다고 모두들 아우성을 치는 데도 나아질 기미 없이 수십 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대입’이라는 사건은 대한민국 모두가 연루된 거대한 사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영화는 대학 입시 하나에 대한민국 전체가 울고불고 요동치는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더더욱 낯설고 기괴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스타일 면에서 압도적이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접하는 것은 교육 관련 다큐들이 진즉에 지적해온 문제점들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거대한 미로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집단적 악몽의 곤혹스러움 자체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범죄 드라마적 서스펜스와 초현실주의적 악몽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 헤어날 수 없는 음모론적 세계의 폐소공포증을 선사한다. 이러한 세계-시스템 속으로 절대 끌려들어 가고 싶지 않지만 자신 역시 예외일 수 없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관객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스멀스멀한 불안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관객들이 체험하는 낯선 감정의 실체다. 시스템 밖으로 탈출하기 위한 소수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부분 순응하고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대한 개미지옥. 영화가 조여오는 묵직함은 관객 역시 그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현실논리만으로 대한민국 ‘입시’라는 관문을 헤쳐 나가기는 버겁기 짝이 없다. 그래서 대입이라는 필생의 통과의례에는 수험생을 둔 가족을 비롯해서 사회 전체가 가담하는 준 종교적 제의가 따라붙는다. 영화는 종파를 초월해 아이들의 입시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범종교계의 기도와 제의 장면들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과 수시로 교차시킨다. 목사와 승려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의 대입 성공을 기원하고, 부모들은 정성을 모아 삼보일배를 하고 눈물로 기도한다. 사실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이질적인 색감과 사운드를 통해 재현된 이 이미지들은 그 익숙함을 잃고 한없이 낯설고 기괴한 풍경으로 변모한다. 영화는 수능 시험일이라는 시간을 D- day, 즉 심판의 날로 설정하고 그 심판의 날에 맞춰 모든 일상을 셋업한 아이들과, 각계각층을 망라한 집단적 기원의 장을 기괴한 색감과 소리로 표현한다. ‘SKY’는 이러한 집단적, 종교적 열망을 상징하는 주술적이고 중의적인 기표이다. 학생도 부모도 모두가 ‘SKY’라는 허상을 향해 기약 없는 줄달음을 칠 때, 그들의 불안함을 어루만지는 것은 다름 아닌 거대 사교육 시장의 스타 강사들이다. 과거 공자나 예수, 부처와 같은 신과 성인의 자리를 차지한 이들 스타 강사들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불안한 고3들을 SKY라는 낙원으로 이끄는 사제 역할을 자처한다. 영화의 중간중간 삽입된 현실과 괴리된 공자의 말씀이 종종 현실의 부조리를 도드라지게 하면서 헛헛한 웃음을 유발할 때, 영화는 이 사교육 시장의 스타 강사들이 대입이라는 통과의례를 주관하는 신흥 교주 내지는 사제가 되었음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영화에 사용된 사운드는 이 영화의 기괴한 낯섦-이화효과(異化效果)를 극대화하는 증폭기 역할을 한다. 필립 글래스고의 음울한 음악이 시종일관 영화 전체에 불안함과 어두운 그림자를 강하게 드리우면서 관객의 무의식에 파고들던 에롤 모리스의 작품 < 가늘고 푸른 선The Thin Blue Line >(1988) 처럼, 이 영화 음악 역시 영화의 분위기, 톤을 주조하면서 전반적인 영화의 인상을 각인시키는 데 핵심적인 기능을 한다. 이 영화의 스태프 상당수는 외국인들로 이루어졌다. 최우영 감독과 함께 공동 연출자로 이름을 올린 벨기에 출신의 스티븐 두트 감독을 비롯한 다수의 외국인 스태프들, 그들의 시선은 한국사회의 풍경을 한층 더 낯설게 보면서 영화의 이질성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영화가 바라본 한국사회의 입시 광풍은 도처에서 질병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지만, 나 역시 저 대열(SKY)에 합류하고 싶다는 우리들의 분열적 욕망으로 인해 해결 불가능한 무한 반복의 폐쇄회로를 맴돌고 있다. 이 영화의 궁극적인 힘은 사회적 질병을 명료한 언어로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대신, 우리 욕망의 맹목성을 무의식의 언어로 파고들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영화의 소재가 충분히 익숙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생경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저 남보다 우월하기 위해 끝없이 달리는 욕망의 맹목성에 대한 자각에도 불구하고, 이 경주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은 우리를 사로잡는 근본적 두려움이자 좌절감이다. 지옥이란 그런 것이다. 이 영화는 ‘대학입시’라는 현상을 통해 우리 사회의 욕망의 지옥을 그려낸다. 그 지옥의 낯설고도 강렬한 인상 때문에 우리는 한동안 영화 앞에 멈추어 그 지옥의 불구덩이를 응시하게 된다.
B급 영화는 장르의 관습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관습을 과하게 증폭시키거나 작동 방식을 변조함으로써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전략이 장르의 와해나 부정으로 향하지는 않는다. 또한 B급이라는 타이틀은 장르가 안착하고 있는 시장의 질서를 전복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다만 A급이 막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들여서 장르에 교란 신호를 일으키면서 해당 장르와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B급은 장르와 시장의 자기 부정이 아니라, 그것들의 자기 긍정을 한층 신선하게 보여준다. <변신 자동차 또봇>은 변신 로봇이라는 애니메이션 장르의 B급 전사이다. 어쩌면 꽤나 예외적인 존재감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이 B급 변신 로봇을 대할 때에는 뭔지 모를 불편함이 있다.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또봇은 장난감 회사가 기획한 상품이다. 그래서 장난감으로서의 또봇을 위해서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다. 혹여 장난감이 애니메이션에 선행한다고 해서 불쾌해한다면 그건 애니메이션의 상황을 잘 모르는 오해에서 초래된 것일 수 있다. 굳이 무한한 파생 상품의 원천으로서의 애니메이션 산업이라는 뻔한 경제 모델을 끌어올 필요는 없다. 애초에 애니메이션은 그 자체로 이득을 내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기획의 출발점이 장난감이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도 없다. 장난감은 그 자체로서 미적 향유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굳이 또봇을 통해서 장난감을 팔기 위해서 애니메이션을 소비해야 하는 상황에 분개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뒤집어 생각하는 게 그나마 기분을 덜 상하게 할 것이다. 장난감을 샀는데, 애니메이션이 더불어 딸려온다는 식으로 말이다. 괜찮지 않은가? 장난감을 애니메이션에 끼워 파는 게 아니라, 장난감을 사면 애니메이션이 덤으로 온다는 것이다. 때론 조삼모사의 발상이 삶의 스트레스를 덜어주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또봇이라는 애니메이션 작품이 주는 당혹스러움의 일정 부분은 제작진 쪽 설명을 통해서 완화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도 목소리. 제작진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의도했다고 한다. 즉 매끈한 어른 성우 대신 어린이의 목소리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만약 이러한 제작 의도가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에서 유명 연예인(의 목소리)을 고용하여 홍보 효과를 노리는, 하지만 그래서 제작비가 상승하게 되는 점을 비판하고, 나아가 기존의 어른 성우가 만들어내는 작위적인 ‘어린이다움-목소리’를 비판한 것이라면, 일견 기특한 발상으로 평가할 수 있을 테다. 애니메이션에서의 사운드는 그것이 목소리이든 음향 효과이든, 애초에 철저히 진공-묵음 상태에서 그 어떠한 외부의 실질적/실재적 지시 대상이 없이 철저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채워넣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제작 방식을 따라 관성적으로 채워진 사운드에 도발적인 문제의식을 지닌다는 것은 꽤나 높이 살만하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의도대로 (B급의) 미적 성취를 이루었는지는 좀처럼 수긍하기 힘들다. 목소리에 대한 실험뿐만 아니라 사운드의 실험까지도 의도하였는지, 또봇은 웬만한 사운드 실험을 추구하는 영화 이상으로 우리의 청각적 관성을 테스트한다. 누군가는 당혹스런 사운드의 문제가 초기의 한정된 제작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입되었고, 이후 성우의 교체가 자칫 시청자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유지된다고 설명해준 적이 있다. 나는 그런 설명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성우 목소리의 변화에 불편함을 느끼는 시청자라면, 매 시즌마다 로봇 캐릭터의 수정 모델이나 전혀 새로운 로봇 캐릭터의 등장 (혹은 런칭)에도 불편해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봇을 바라보는 나를 여전히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또봇이 우리를 에워싸는 방식에 있다. 무려 열 개의 채널 속에서 무한히 반복 상영되는 상황은 우리가 또봇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다채널 장악은 국산 애니메이션 방영 쿼터제 덕에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눈치챘겠지만, 쿼터제는 결코 창작의 다양성이나 작품의 제작 편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국내 자동차 기업의 모델을 반영한 또봇이 무한 증식하면서 되풀이된다. (그리고 또봇의 열풍에 뒤늦게 합류한 다른 자동차 기업은 카봇이라는 것을 내밀고.) 그래, 불편한 것은 어쩌면 또봇이라는 로봇 완구나 애니메이션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자국’이라는 국민경제의 울타리 속에서 별다른 대안적 선택권 없이 일방적으로 제시되는 상품들을 기꺼이 구매해줘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그것이 ‘국민 경제’를 살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대고 순진하게 글로벌한 상품 리스트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말했다가는 돌팔매 맞기 쉽다. 결코 그러한 시장 논리가 정작 소비자의 만족으로 이어지지도 않고, 내수 시장의 성장이나 안정화와도 무관하며, 나아가 자국 노동자의 고용 불안을 해소하거나 노동 환경의 개선을 이끄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수십 년을 지배해온 해괴한 경제 논리의 자기 최면 속에서, 즉 국민 경제의 성장과 발전, 나아가 ‘Made in Korea’라는 기치 아래에서 세계로 진출하는 수출 산업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닥치고 스스로 호갱님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비정상적인 경제 이데올로기를 정상이라고 믿게 만들고야 마는, 소비자를 국가 경제를 위해 헌신하게 만드는 폐쇄회로 속의 기이한 동원체계는 또봇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애초에 변신 자동차라는 것은 그저 애니메이션 텍스트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트랜스포머 > 시리즈가 등장하였을 때, 그 시기는 바로 일본 자동차 산업이 미국 시장을 침공하던 시기였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맞서는 전략 중 하나는, 변신 자동차의 위용 속에 노출되는 자국 자동차 모델을 통해 현재의 시청자를 미래의 구매자로 포섭하는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텍스트를 장난감으로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는 미국과 일본의 장난감 회사 간의 제휴가 필요했다. 기이하게도 또봇은 이러한, 시장의 지배를 둘러싼 치열한 전략과 꼼수 또한 자신의 이야기 속에 담아 둔다. 예컨대 아이들의 입맛을 장악한 떡볶이 체인의 음모와 이에 대한 고발, 그리고 그 고발로부터 세간의 관심을 돌리고자 벌이는 또 다른 사건들 등등. 또봇은 자신의 상품을 떠받치는 어린이 소비자의 취향을 떡볶이라는 반복 코드를 통해서 끌어들임으로써 일상의 친숙함을 성취해낸다. 떡볶이로 상징되는 어린이 세계에서 어른들이란 씨도 안 먹히는 잔소리꾼으로서, (쪼잔한) 과대망상에 휩싸이거나 무기력할 뿐이다. 실제의 현실과 다를 바 없다. 어쩌면 한심하고 답 없는 어른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원하는 또봇을 사주는 일 밖에 없다. 또봇은 아마 새로운 독해와 평가를 통해 훗날 컬트 텍스트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텍스트의 심오함은 애석하게도 1차 타겟인 어린이들에게는 다소 무리일 듯싶다. 아마도 장난감과 애니메이션 텍스트를 분리시켜 즐길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평가일 테다. 다만 작품의 본래 1차 목표인 장난감 판매를 꾸준히 해나가기 위해서라도 텍스트는 충실하고, 상품을 둘러싼 서비스는 원활했으면 좋겠다. 문화 산업이든, 창의 산업이든, 창조 경제이든, 그게 상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