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조 로보트 피닉스 킹
- 감독
- 정수용
- 제작년도
- 1981
- 출연
- 한국교육방송국성우일동
* 본 영화글은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영화+글’ 시리즈 3: 영화 비평 쓰기> 과제 선정작입니다. < 피닉스 >는 한 쌍의 커다란 눈에서 출발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넬리(니나 호스)는 다친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 돌아온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커다랗고 퀭한 눈뿐이다. 차를 타고 베를린에 돌아갈 때나 얼굴에 성형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을 때 넬리의 눈은 끊임없이 두리번거린다. 그 눈은 바라볼 곳을 찾지 못해서 섬뜩한 느낌을 준다. 넬리는 곧 바라볼 대상을 찾아낸다. ‘피닉스’ 클럽에서 일하는 남편 조니(로날드 제르펠드)를 찾아낸 후로 그녀의 시선은 조니만을 향한다. 한 군인이 그녀에게 담배를 권하고 몸을 만질 때에도 넬리는 아랑곳없이 조니만 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만을 바라보고 다른 모든 것은 삭제하는 눈. 넬리의 눈은 그녀의 사랑이 맹목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사랑은 끈질기지만 그것을 떠받치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친구 레네(니나 쿤젠도르프)와 여관 주인의 말은 조니가 넬리를 배신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넬리는 믿지 않는다.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무엇을 보고 있는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넬리의 눈은 죽은 자의 눈이다. 조니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름을 물어보았을 때 넬리는 ‘에스더’라고 답한다. ‘에스더’는 전쟁 전에 넬리와 찍은 사진이 남아 있는 유대인 친구로 레네가 뒤적이는 사망자 목록에 올라 있다. 넬리는 스스로 죽은 자의 이름을 붙이고 망자의 시간을 산다. 조니 또한 이상한 시간대에서 살고 있다. 넬리는 예전처럼 남편을 조니라고 부르고 싶어 하지만 그는 그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한다. 그의 이름이 조니였던 과거는 그의 발목을 잡고 현재를 살지 못하게 만든다. ‘요하네스’라는 딱딱한 이름 아래 자신을 닫아건 조니는 그의 집에 있는 잠긴 서랍을 닮았다. 그 서랍은 넬리에 관한 물건들을 담고 있는데 조니가 허락할 때만 열린다. 넬리가 서랍을 열려고 하자 조니는 화를 낸다. 한밤중에 넬리를 깨우더니 서랍에는 돈이 없다며 그녀를 도둑으로 몰아세운다. 넬리가 빨간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염색한 채 자신이 넬리임을 증명하려 드는 장면에서도 조니는 수상하게 행동한다. 그는 잠깐 과거를 본 듯 넋을 잃지만 곧 넬리에게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핀잔을 준다. 과거에 대한 조니의 거부는 넬리의 사랑만큼 끈질기고 수상하다. 넬리가 조니에게 수용소에서 겪은 일, 수감자들이 “기둥에 둘러섰던 방식”을 단 한 번 말하는 장면이 있다. 넬리는 읽은 이야기라고 얼버무리지만 조니의 얼굴은 대번에 일그러지고 그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한다. 그는 수용소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싫다. 그 이야기는 그가 대면하지 못하는, 부인을 죽음으로 보낸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넬리는 조니가 직감적으로 맡을 수 있는 죽음의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조니는 넬리가 살아돌아온 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녀는 그에게 과거를 상기시킨다. 그때마다 조니는 열심히 도망간다. 조니와 넬리는 각자의 이상한 시간대에 자리잡고 연극을 시작한다. 그들이 함께했던 시간은 한 조각씩 되돌아온다. 넬리가 좋아했던 여배우, 함께하던 산책, 자주 찾던 공원의 둥근 벤치. 과거의 조각들은 그러나 믿을 만한 하나의 그림으로 모이지 못한다. 과거를 보여주지 못하고 넬리의 사랑을 신빙성 있게 만들지 못하며 무엇보다 현재를 구성하는 데 실패한다. 조니와 넬리의 연극이 어딘지 의심스러운 이유는 그들 사이에 깊은 골이 패여있기 때문이다. 그 골은 시대가 남긴 균열이고 두 개인 사이의 시차이다. 둘이 함께했던 시간과 현재 사이에 넬리 혼자 수용소에 간 시간이 있다. 심연과도 같이 무시무시한 입을 벌리고 그 시간은 둘 사이에 누워있다. 조니를 보지 않으면 넬리는 수용소에서 지낸 시간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넬리와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예를 들어 레네는 넬리에게 짧은 편지를 남기고 자살한다. 죽은 자 ‘에스더’로 살기를 포기한다면 넬리는 그 상처를 오롯이 안고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넬리의 눈은 그래서 조니를 찾아내기 전에 세상을 불안하게 떠돌았던 것이다. 영화는 그런 넬리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넬리와 레네가 차를 타고 베를린에 돌아오는 첫 장면에서 이미 드러난다. 카메라는 넬리의 다친 얼굴 대신 그녀를 바라보는 군인의 얼굴을 비춘다. 그의 놀란 표정에서 우리는 넬리가 심하게 상처입었다는 것을 수 있다. 영화는 우리에게 상처를 직접 보여주지 않듯이 넬리에게 얼른 상처를 마주하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과거를 똑바로 보고 현재를 살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넬리를 거짓 안에 잠시 머물게 한다. 조니가 쓴 연극 안에 살게 두는 것이다. 연극을 할수록 넬리와 조니 사이에 파인 골은 더 깊게 벌어진다. ‘살아 돌아오겠다’는 넬리의 편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둘 사이는 눈에 띄게 어색해진다. 넬리가 “누군가는 (수용소에 대해) 물어볼 것”이라고 말할 때 그 ‘누군가’는 조니일 것이다. 넬리는 그가 수용소에 대해 물어보기를 바란다. 조니에게 실망할수록 넬리는 과거와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다. 여관 주인과의 대화에서 조니가 그녀를 밀고했다는 가능성이 등장한 후 넬리는 나치에게 붙잡혔던 배로 간다. 그녀는 마치 뱀이 들어있는 상자를 여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그 문과 함께 냉혹한 과거가 끼익 하고 열린다. 넬리는 힘겹게 과거와 마주보고 있다. 넬리와 조니 사이에 벌어진 시간의 골이 처음 터져 나오는 것은 조니가 넬리의 팔에 새겨진 수감자 번호를 건드리려 할 때다. 넬리는 조니에게 처음으로 저항한다. 그녀는 죽음의 시간으로서의 과거를 온몸으로 겪었다. 넬리를 후벼판 과거는 흉터가 되고 그녀의 살이 되었다. 수감자 번호를 건드리는 것은 과거를 지우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일이다. 넬리의 살아있는 살과 육체, 즉 생生을 부정하는 일이다. 조니의 구상과 달리, 생은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죽음을 부정하면서 돌아오지 않는다. 붉은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은 채 춤추듯이 살아돌아오지 않는다. 생은 넬리에게 기차 소리로 온다. 연극 속에서 기차역은 넬리가 생존자로 귀환하는 세레모니의 배경이다. 기차가 달려올 때 넬리는 깨어난다. 죽은 레네의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 기차 소리는 처음 들린다. 넬리가 알 수 없는 표정을 띈 창백한 얼굴을 들었을 때 거대한 검은 기차가 연기를 뿜으며 지나간다. 그녀가 이혼 서류를 읽는 장면에서도 기차 소리가 등장한다. 조니가 ‘이혼을 통보한다’는 문장이 기차처럼 숨막히게 달려오고 초시계 소리가 더해진다. 넬리가 새로운 날을 맞을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넬리는 홀로 두 번 기차를 맞이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 넬리는 노래해야 한다. 그녀는 전쟁 전에 가수였지만 선뜻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조니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면 자신이 그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손쉽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러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가 노래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넬리와 레네가 함께 밥을 먹는 장면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듣는 ‘Speak Low’는 영어로 된 노래이다. 레네는 독일 노래는 듣지도 부르지도 못하겠다고 말한다. 독일어로 말하면서 노래는 안 된다니. ‘노래’는 말과 다르다. 노래는 고통과 복수심을 잊게 하므로 레네는 그것을 경계한다. 한편 노래는 상처받은 자가 진실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다. 노래를 불러 달라는 레네의 부탁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때 넬리는 아직 준비가 덜 된 것이다. 다시 태어날 준비가 되었을 때 넬리는 비로소 노래한다. 노래는 섬광처럼 와서 넬리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온 존재를 꿰뚫고 흔들어놓는다. 그것은 파열음이다. 한 여성의 인생에 돌아킬 수 없는 금이 그어지는 소리. 시대의 야만에 균열이 가는 소리. 노래는 폭탄보다 강력하고 수용소의 숫자보다 선명하면서 동시에 아름답다. 그것을 듣고 조니는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하니 앉아있다. 넬리는 더이상 그의 반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연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조니를 한 번 슥 쳐다보고 넬리는 나가 버린다. 가버린 넬리와 앉아 있는 조니. 일그러진 세계를 부수고 나간 자와 그러지 못한 자.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현재로 걸어나가는 자의 소리이다.
영원히 잊고 싶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참혹한 순간들이 있다.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한 사진으로 박재되는 그 순간들은 불현 듯 지금의 일상을 덮쳐오기도 한다. 묻어두었던 과거가 밀려오는 그 감각. 현재의 삶을 꺾어버리고 무력하게 만드는 그것에게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이 있긴 할까. 조(호아킨 피닉스)가 생각해낸 방법은 자신의 죽음이다. 사람들의 의뢰를 받아 납치, 감금 등의 사건을 처리하는 해결사인 그는 생생히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사건을 해결하고 일상을 보내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순간들은 조의 생각을 갉아먹는다. 소리치는 아빠와 식탁 밑에 숨은 엄마, 그런 엄마의 손짓, 아빠의 발, 그가 쥔 해머. 혹은 파병 시절 구하지 못했던 피해자 여성들, 그들이 갇혔던 컨테이너의 손잡이, 손잡이를 열자 보였던 시체 더미. 손전등 아래 보이는 시체의 얼굴. 눈. 입. 벌어진 입. 조는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다가도, 길을 걷다 행인의 얼굴을 마주하다가도, 편집되어 떠오르는 과거의 순간에 괴로워한다. 삶이 계속되는 한 영원할 것 같은 그 괴로움. 조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죽음을 꿈꾼다. 마치 여기에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사라지는 죽음을. 이렇듯 사라지고 싶은 조의 심리와 그런 그를 트라우마에 가두는 조의 현실은 그가 길을 걷는 장면들을 통해 드러난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길을 걷는 조를 스크린에 배치한다. 한 구석과 정중앙.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조는 원래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그때마다 영화는 그가 떠나기 직전 혹은 직후의 공간을 바라본다. 이 때문에 조는 8차선 도로 너머에서 언뜻 보이거나, 벌판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조금 스친다. 죽음으로서 현실에서 사라지고 싶은 조의 심리는 스크린에서 정말로 사라지는 듯한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조가 손쉽게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를 끈질기게 프레임의 정중앙에 배치하는데, 이로 인해 길을 걷는 조는 한참을 걸어도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갇혀있는 듯 보인다. 예컨대 영화 초반부, 현관문이 아닌 골목길로 난 쪽문을 통해 집을 나서는 조의 모습에서 이러한 구도가 여실히 나타난다. 카메라는 건너편 도로에서 그를 마주 봄으로써, 골목길을 한참 걸어 나오고 있는 조가 프레임 상에서는 여전히 한 자리에 머물도록 만든다. 결국 조는 가정폭력의 기억이 서린 집의 그늘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로 비춰진다. 이러한 서사의 시각적 구현에서 전작 <케빈의 대하여>(2011)와 <가스맨>(1998)을 통해 은유적 이미지를 정적이면서도 정확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평가받은 린 램지 감독의 시선이 느껴진다. 한편, 괴로운 과거에 갇힌 조는 괴로운 현실에 놓인 니나(예카테리나 삼소노프)를 만난다. 시의원의 딸인 니나는 권력 세력이 연루된 성폭력 조직에 납치되어 끔찍한 성폭행 범죄에 노출되고, 조는 시의원으로부터 니나를 구해달라는 의뢰를 받아 범죄 현장에서 그녀를 구출한다. 그리고 잠시 뒤, 니나를 조수석에 태워 돌아가던 차 안. 조는 문득 니나를 바라본다. 그녀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숫자를 거꾸로 카운트다운하고 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조와 오프닝 시퀀스에서의 조가 그러했듯이. 이렇듯 카운트다운을 하는 니나의 행동은 니나가 조와 닮아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지점은 카운트다운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이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의 첫 번째 카운트다운이 등장하는 영화의 첫 장면은 어두운 화면에서 나지막히 카운트다운을 하는 조의 목소리 직후 비닐을 뒤집어 쓴 채 질식사하기 직전인 그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 때문에 조의 카운트다운 끝에는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남긴다. 반면 니나는 자살시도는커녕 일말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얼굴로 카운트다운을 하며 영화에 등장한다. 그 숫자의 끝에 니나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쉽게 유추할 수 없다. 무엇을 위해 카운트다운 하는 것인지 그녀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니나는 또 다시 권력자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니나를 잃은 이후 조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주변인들의 죽음이다. 조는 분주하게 움직여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알 만한 이들을 찾아가지만,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현장에 뒤늦게 도착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그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다. 영화의 초반부부터, 조가 자살시도를 할 때마다 그를 찾고 부르며 죽음을 중단시키던 어머니는 손 쓸 새도 없이 권력세력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제 그에게는 죽음을 저지할 어머니의 부름조차 남지 않게 된 것이다. 결국 조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래도록 꿈꾸던 죽음을 택한다. 그의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삶 또한 끝날 것이다. 40, 39, 38, 저 멀리 엄마의 시체가 수장되는 것이 보인다. 37, 36, 주머니에 한 가득 돌을 넣은 조 또한 곧 저 깊은 강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33, 32. 기다리던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 조는 문득 카운트다운을 하던 니나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때 조는 왜 니나의 카운트다운을 떠올렸을까. 29, 28, 환각처럼, 니나가 물속에 가라앉는 것이 보인다. 니나의 카운트다운은 죽음을 향했던 것일까, 혹은 삶을 향했던 것일까. 20, 19. 조는 결국 주머니의 돌을 빼내고 수면으로, 햇빛으로 올라간다. 환상처럼 보이던 니나 또한 그를 따라 세상으로 나간다. 그렇게 조는 오랫동안 꿈꾸던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향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길을 나서며, 니나를 구하는 것을 선택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니나는 조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았다. 자신에게 향할 수 있었던 칼을 다른 누군가에게 겨누어 괴로움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낸 것이다. 심지어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조를 향해 무던하게 “이제 괜찮아요.”라는 말도 건넨다. 이는 조가 니나를 구해내는 동명의 원작소설과 다른 결말이다. 이에 대해 린 램지 감독은 여자 아이 캐릭터를 수동적으로 그려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며, 서사 내에서의 역할이 많아진 만큼 캐릭터의 이름 또한 원작과 다른 니나로 바꿨다고 밝힌 바 있다.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게 만들었다는 그 설명처럼, 니나는 죽음을 향하지 않은 카운트다운을 한 듯하다. 그리고 그 카운트다운은 이제 조와 함께한다. 두 사람은 괴로움뿐인 현실의 끝에서 그렇게 만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혼자서 살아내야만 했던 두 사람은 이제 어떤 현실을 살아가게 될까. 앞으로 살아갈 현실은 과연 지금까지의 삶보다 더 나은 것일까.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이 향하는 카운트다운의 끝에는 무엇이 놓여 있을까. 두 사람은 그 답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 이 순간 죽음을 택하지 않고 길을 나설 것이라는 점이다. 니나와 마주앉은 레스토랑의 한 구석. 니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조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완벽한 죽음을 생각한다. 발랄한 음악이 흐르는 이곳에서 당장 죽음을 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 죽음을 택했다고 느낀다. 하지만 죽음은 벌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돌아온 니나는 조를 조용히 깨우며 말한다. 나가요, 아름다운 날이에요. 아름다운 날이구나. 니나의 말을 따라 읊조리던 조는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까. 영화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와 니나가 사라진 이후에 남겨진 빈자리를 포착한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그들은 이곳에 있었던 흔적을 남겼다. 흔적 없이 그림자처럼 사라지던 두 사람은 이제 함께 길을 나설 것이다. 부디 그 삶에서는 흔적을 남기며 살아도 괜찮을 만큼 괴롭지 않기를, 그들이 있었던 빈 테이블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기원한다. 그들은 그곳에 있었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나는 두가지 특별한 사적 감흥을 느낀다. 하나는 화면이 젖어 있다는 것이다. 비가 오거나 안개에 잠겨 있지 않아도 그레이의 화면은 멜랑콜리아의 습기라고 할만한 기묘한 물질감이 감싸고 있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점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다른 하나는 친구 혹은 연인과의 투 숏에서도 심지어 가족의 회합 장면에서도 그레이의 인물은 절대적 고립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감정은 표현되는 게 아니라, 보는 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신체에 스며들고 번져가며 전염되는 것 같다. 그레이의 최고작으로 여겨지는 < 투 러버스 >(2008)보다 이 점을 잘 느끼게 하는 영화는 없다. 주인공 레너드(호아킨 피닉스)는 그가 사랑하는,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여인 미셸(기네스 펠트로)과 있을 때에도, 그를 사랑하는 가족과 있을 때에도 철저히 고립된 존재이며 외로움의 심연에 가라앉은 인물로 감지된다. 가장 뛰어난 장면은 마지막 시퀀스에 있다. 미셸이 떠난 뒤 레너드는 다시 자살을 시도하려다 포기하고 가족과 그를 아끼는 따뜻한 여인 산드라(비네사 쇼)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셸에게 주려던 반지를 그녀에게 끼워준다. “우는 거예요?”(산드라), “행복해서 그래요.”(레너드). 가족들, 유태인 친척들이 작은 파티를 벌이고 있는 따뜻한 집에서 두 남녀는 키스하고 포옹한다. 놀라운 점은 외관상 가장 포근하고 평온한, 그리고 남녀의 결합으로 마무리된 이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레너드의 속수무책의 고립을 사무치게 체감한다. 그레이의 영화에서 우울과 외로움은 이야기의 주제이기 이전에, 매 숏에 담긴 물질적 표정 혹은 운명적 공기와 같은 것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 느낌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고, 적시할 수 있는 한 숏 내부의 특정 요소들의 효과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 및 앵글, 인물의 표정과 동작과 말, 음악과 사운드, 숏의 길이와 편집의 리듬 등이 이야기와 결합된 복합적 효과일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남다른 점은 그가 두드러진 스타일을 구사하지 않을 뿐더러, 특정한 사건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연출의 영역에 속한 갖가지 요소들의 유기적 조합을 통해 유례를 찾기 힘든 높은 밀도와 강한 전염성을 지닌 감정의 강도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레이의 영화를 말할 때야말로 감정 대신 정동(情動)이란 단어를 쓰고 싶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레이는 동세대의 어떤 감독보다 고전적인 작가라 할 수 있으며, 그가 영화적 스승으로 거론하는 인물에 속하진 않지만, 니콜라스 레이의 진정한 후예라고 나는 생각한다. < 애드 아스트라 >(2019)는 공간이 우주로 확대되어도 화면에는 농축된 감정의 밀도가 압도하는 매우 제임스 그레이적인 영화이다. 어쩌면 우주의 텅빈 그리고 무한대의 시공간이야말로 그레이의 인물이 벗어날 수 없는 고립과 외로움의 물질적 거처로 가장 적합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것이 그레이가 SF로 눈길을 돌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애드 아스트라>의 우주는 모험의 사건과 미래의 변화에 열린 확장적 공간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절대적 고립을 재확인하는 내성적이고 수축적인 공간이다. 우주비행사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는 지적 생명체를 찾아 해왕성으로 떠난 뒤 16년째 소식이 끊긴 아버지이며 우주탐험의 전설 클리포드 맥브라이드(토미 리 존스)를 찾아 떠난다. 스토리라인은 머나먼 정글에서 광기의 왕국을 건설한 미친 유사 아버지를 수색하는 병사의 이야기 < 지옥의 묵시록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9)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모티브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다 그를 찾아나서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서 빌려왔다. 텔레마코스는 누구인가. 이타카의 왕이자 전쟁영웅 오디세우스가 전쟁 원정으로 왕국을 20년간 비운 동안, 난봉꾼 왕자와 귀족들이 그의 재산과 왕위를 빼앗기 위해 어머니를 희롱하고 결혼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귀환으로 자신의 땅에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리다, 아버지의 행적을 쫓아 목숨을 건 여행에 나선 아들. 그런데 제임스 그레이는 이 인물의 어떤 점에 영감을 얻었을까. 결말을 떠올리면 <애드 아스트라>는 오이디푸스의 살부(殺父) 의식에 가까운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살부와 근친상간은 법의 위반과 욕망의 실현이라는 차원에 놓여 있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는 사실상 법의 충실한 집행자다. 그의 목숨과 여러 사람의 생명이 걸린 그의 해왕성 행은 아버지의 우주선 이상으로부터 비롯된 지구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그리고 상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고 로이가 상부의 명령이나 미션의 대의에 완전히 동일화하는 건 아니다. 로이는 아버지의 우주선 리마의 파괴 임무를 맡은 우주선 세피우스에 무단으로 탑승하고, 그를 제압하려는 세피우스 승무원들을 미필적 고의로 모두 죽인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이 흔히 그렇듯 우리는 로이의 욕망을 정확히 알기 힘들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맥박수가 80을 넘지 않는 냉담한 사람이다. 그의 행동으로 추론하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다. 평생 복종해온 명령, 특히 이번엔 부당하기는 커녕 지구의 안녕이 걸려있는 중대한 명령을 거부한 것도 세피우스의 제거 작전이 성공하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것을 그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 항상 두려웠다.”고 독백한다. 마침내 조우한 아버지도 “난 아내에게도 너에게도 관심이 없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매정하게 말한다. 다시 물어보자. 로이는 왜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만나려 하는가. 이 질문은 이 영화를 본 관객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적어도 대사를 통해서는 이 질문에 정확히 답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레이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모르는 것처럼 말한다. 그레이는 그 무지를 존중한다. 아버지 클리포드는 말한다. “나는 지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우리는 과학이 부인하는 지적 생명체를 찾아내야 돼. 이건 신의 소리야. 난 이 여정을 멈출 수 없어.” 그의 친구인 동료 우주비행사 프루이트 대령(도널드 서덜랜드)은 로이에게 말한다. “오랜 우주 비행으로 내가 깨달은 바는, 탐험 비행이 때론 탈출 수단이 될 수도 있다네.” 지적 생명체에 대한 종교적 믿음, 지구에 대한 혐오, 탈출의 은밀한 욕망. 우리는 어느 말을 믿어야 할까. 내 생각에 가장 신뢰할만한 말은 영화의 결말부에 있는 로이의 독백이다. “아버지는 없는 것만 찾았고 눈 앞에 있는 소중한 건 보지 못했다”.” 그러느라 동료를 죽이고 지구를 위험에 빠트린 미친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로이 자신은 어떠한가. 그 역시 우주 비행에 미쳐서 아내를 떠나보낸 남자 아닌가. 로이와 클리포드는 아들과 아버지이기 이전에 완전히 동질적인 인간이며, 둘은 말하자면 쌍생아다. 로이의 혹독한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그리운 아버지를 만나려는 가족애의 여정이 아니며 아버지의 율법을 살해해 자신의 욕망의 법을 세우려는 아들의 모험도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기자신을 대면하려는 여정이다. 지구 혹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을 혐오하고 피안을 향해 탈출하려는 자신의 욕망, 그 욕망의 잔혹함과의 대면이다. 그 대면을 위해 로이 역시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아버지와 대면하고서야 로이가 아버지와 똑 같은 과정을 거쳐 그 대면에 성공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지적 생명체나 인류의 진보 같은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의 정확한 동형의 여정이다. 이제 선택은 두가지다. 집으로 돌아오느냐, 아니면 더 멀리 떠나느냐. 아버지 클리포드는 후자를, 아들 로이는 전자를 택한다. 로이에게 아버지는 주인 기표도 율법의 표상도 아니다. 요컨대, 로이는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안티오이디푸스도 아니다. 호메로스의 텔레마코스는 하염없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가 기다리는 건 아버지이자 왕인 오디세우스이지만, 그것은 권력의 복원이나 주인의 귀환에의 기대가 아니다. 이탈리아 심리학자 마시모 레칼라티의 말을 빌리면,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에 대해 오이디푸스의 절연과 달리 상속의 관계를 맺는다.(<버려진 아들의 심리학>, 윤병언 옮김, 책세상) 하지만 상속은 과거의 권력이나 재화, 혹은 영광스런 기억의 선사가 아니다. 레칼라티의 논지를 요약하면 정당한 상속은 아버지의 증언을 참조함으로써 이뤄지는 말의 계율과 욕망의 재설정이다. 그렇다면 상속은 완료가 불가능한, 반복되는 실패를 경유할 수밖는 끝없는 여정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속자는 고아다.” 또한 그러므로 상속이란 “아버지의 구조적 부재라는 열린 틈새를 메우는 일이 아니라, 항상 그것을 통과하는 일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텔레마코스의 이야기에서 상속의 약속 없는 상속자의 여정이라는 모티브를 본 것 같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찾아 세상을 헤맸지만 오디세우스를 만난 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고향에서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는 여정의 끝에 아버지를 만났지만 그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 불멸에의 꿈을 포기하고 돌아온 오디세우스와 달리, 자신의 욕망을 조금도 조정할 줄 모르는 눈먼 광인일 뿐이다. 텔레마코스는 이제 상속의 과정을 본격화할 것이다. 하지만 로이가 이른 곳은 아버지의 삶, 그 복제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모두 눈 먼 광인의 소동으로 드러나는 황량한 공허이다. 그는 홀로 지구에 돌아온다. “삶에 의욕을 느껴요. 내 주변 상황에도 주의를 더 기울이게 됐죠. 이젠 소중한 것에만 집중하며 살 겁니다.” 이어지는 결말의 언어들은 계몽적이고 달콤하나 <애드 아스트라>의 우주를 가득 채운 우울증의 공기는 무관하다. 우리는 이 평온한 결말의 언어와 비슷한 것을 그레이의 전작에서도 만났다. < 위 오운 더 나잇 >(2007)에서도 만났다. 경찰학교 졸업식장에 앉은 경찰 형제(마크 왈버그, 호아킨 피닉스)가 나누는 마지막 대화. “사랑한다, 동생아.” “나도 사랑해, 형”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투 러버스>의 마지막 대화. “우는 거예요?“ ”행복해서 그래요.“ 이 장면들이 뼈저린 것은, 인물들 특히 호아킨 피닉스가 분한 남자에게 이 말이, 이 말의 실현불가성에 대한 필사적인 부인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이 거짓말이 역설적으로 그의 가장 절박한 진실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가족(때로 유태인 공동체)은 주인공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내면적 강박처럼 등장한다. 이 점에서 그레이의 서사는 주인공이 이 강박을 정당한 상속으로 전환하려는 모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결말에서 만나는 것은 결말의 언어가 숨기고 있는, 하지만 관객 누구라도 느끼는 있는 상속의 실패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 역시 임무수행에는 성공했지만 상속에 실패한, 하지만 그 실패를 필사적으로 부인하려는 텔레마코스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은 여전히 출구 없는 멜랑콜리아의 안개 속을 떠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