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리
- 감독
- 도미니크 아벨, 피오나 고든, 브루노 로미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도미니크 아벨, 피오나 고든, 필리페 마르츠, 브루노 로미
벤 휘틀리 감독이 한국에서 ‘유통’된 경로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였다. 첫 소개는 2010년이었고, 그가 3만 달러로 8일 만에 만든 첫 장편 <다운 테라스>(2009)가 한국 관객과 만났다. 범죄 영화와 코미디가 뒤섞인, 영국 인디펜던트 코미디의 수작이었다. 두 번째 소개된 영화가, 바로 오늘 소개할 < 킬 리스트 >(2011)로 2011년 영화제 때 소개되었다. 2013년 17회 때 초청된 < 관광객들 >(2012)은 벤 휘틀리의 영화들 중 그나마 많이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부천 초이스 부문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앨리스 로우)를 수상했고, 이후 부가 시장에선 < 살인을 부르는 관광객 >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2014년엔 <필드 인 잉글랜드>(2013)로 다시 한 번 특유의 블랙 코미디를 선보였다. 호러 마니아가 아니라면 모두 낯선 제목들이겠지만, 벤 휘틀리는 현재 영국에서 가장 각광 받는 장르영화 감독 중 한 명이다. 호러, 스릴러, 범죄 영화, 코미디 등 ‘쎈’ 장르들 사이를 오가고 그 장르들을 결합하고 해체하면서 그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실소를 자아내는 풍경이며 동시에 끔찍한 지옥도이고 출구를 알 수 없는 악몽이다. 특히 < 킬 리스트 >는 장르라는 장치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는 그의 범상치 않은 재주를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다운 테라스> < 킬 리스트 > < 관광객들 > 영화가 시작되면 자막과 함께 음산한 음악이 흐르고, 원과 십자가와 삼각형으로 이뤄진 알 수 없는 의미의 기호가 그려진다. 아무래도 < 블레어 윗치 >(1999) 같은 호러나 < 조디악 >(2007) 같은 연쇄 살인마 스릴러가 이어지지 않을까 싶지만 싶지만… 영화의 첫 신은,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부부싸움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 하나. < 킬 리스트 >를 볼 땐, 이러한 갑작스러운 흐름에 절대 당황해선 안 된다. 이 영화 전체가 그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주인공 제이(닐 매스켈)은 8개월째 실업 상태다. 사설 경호원으로 전쟁 중인 이라크에 있었고, 몇 년 전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스웨덴 여군이었던 아내 셸(미안나 버링)과 전쟁을 벌인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7살 된 아들 샘(해리 심슨)이다. 갤(마이클 스마일리)은 제이와 함께 이라크와 키예프에 있었던 절친이다. 그는 새로 생긴 여자친구 피오나(엠마 프라이어)와 함께 제이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피오나는 인사과에서 해고를 담당하는 직원이다. 조촐한 파티는 주인집 부부의 말다툼에서 제이의 ‘깽판’으로 이어지지만, 이내 그들은 냉정을 되찾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갑자기 ‘블루스 타임’을 갖기도 한다. 이때 피오나는 제이의 집 화장실 유리 뒤에, 영화 도입부 자막에 나온 바로 그 기호를 그려 넣는다. 영화의 리얼했던 톤은 잠시 주술적이고 초현실적인 톤으로 바뀐다. 이후 영화는 제이와 갤이 맡게 된 임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들은 다소 수상한 의뢰인(스트루안 로저)에게 거액의 청부 살인 제안을 받는다. 첫 타깃은 신부(개리스 턴리). 솜씨를 보니 제이와 갤은 과거에도 이런 쪽 일을 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능숙하고 깔끔하다. 표식 두 번째 타깃은 어느 사서(마크 켐프너)다. 제이와 갤은 그 사서가 드나드는 창고를 뒤지다가, 그가 포르노그래피와 끔찍한 스너프 필름을 유통한다는 걸 알게 된다. 제이는 이상한 정의감을 발휘해, 사서를 필요 이상으로 참혹하게 살해하고 창고로 들어가 타깃이 아닌 사람들도 죽인다. 그렇게 1차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제이와 갤은 더 이상 일을 맡지 않으려 하지만 헤어나올 수 없는 덫에 빠진 신세다. 그들에겐 어느 하원의원이 세 번째 타깃으로 주어진다. 하원의원이 살고 있는 거대한 저택이 보이는 숲에 야영을 하며 잠복 중인 제이와 갤. 그런데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지푸라기로 만든 가면을 쓴 그들은 마치 비밀스러운 종교의식을 치르는 듯하다. 제물이 된 소녀는 교수형을 당하는 것처럼 목이 매달린다. 이때 제이는 갑자기 나서서 그들에게 총을 쏘고, 삽시간에 제이와 갤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 와중에 갤은 죽고 제이는 가까스로 살아난다. 아내와 아들 곁으로 돌아온 제이. 하지만 그들은 그곳까지 따라왔고, 제이에게 섬뜩한 의식의 일부가 되기를 권한다. 벤 휘틀리 감독은 < 킬 리스트 >에 여러 장치를 만들어놓았지만 설명해주진 않는다. 만약 < 샤이닝 >(1980)이나 < 에일리언 >(1979)처럼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것’이 좋은 호러의 조건이라면, 그 목록에 <킬 리스트>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킬 리스트>는 수많은 질문을 만들어낸다. 청부 살인의 의뢰인과 갤의 여자친구 피오나가 속해 있는 그 이상한 집단의 정체는 무엇일까? 의뢰인이 죽여 달라고 부탁한 신부와 사서와 하원의원(그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사이의 공통점이나 관련성은 있는 걸까? 제이와 갤은 과연 키예프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의뢰인이 그때의 일을 약점으로 잡는 걸까? 피오나는 왜 제이의 집 유리 뒷면에 그 기호를 그린 걸까? 신부는 왜 죽기 전에 미소 짓고, 사서는 왜 제이에게 고맙다고 하는 걸까? 혹시 그들도 이상한 집단의 일원인 걸까? 의뢰인은 왜 제이의 손에 칼로 상처를 내 피의 맹세를 한 걸까? 제이의 몸에 생긴 피부병은 무슨 징조일까? 왜 의사는 제이에게 “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오지 않았고, 현재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걸까? 의뢰인은 무슨 의미로 제이와 갤이 ‘톱니들’ 같은 존재라고 하는 걸까? 그리고 제이의 살인 욕구는 어떤 이유로 점점 강하게 되살아나는 걸까? 영화 속에 던져진 수많은 단서들과 질문들. < 킬 리스트 >는 관객이 각자의 이론으로 이해해야 하는 영화다. 만약 의뢰인이 자본가를 상징한다면(게다가 피오나는 해고 담당 직원이다) <킬 리스트>는 두 명의 실업자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 죽이는 일에 고용된다는 스토리가 된다. 호러에 중점을 둔다면 제이는 피의 맹세를 함으로써 광기에 감염된 것이고, 그 결과 마지막에 처참한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피오나가 그린 기호는 죽음의 주술과도 같은 것이다. 혹은 제이와 갤이 과거에 이라크와, 특히 키예프에서 핏빛 살육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이 영국 안에서 저지르는 짓들은 부메랑처럼 돌아온 죽음의 향연인 셈이다. 이런 해석들은 모두 틀릴 수도, 혹은 모두 맞을 수도 있다. 결국 관객은 범죄 영화와 오컬트 호러와 스릴러가 뒤엉킨 미로 속에서 낯선 체험을 하게 되며, 영화를 다 본 후에 “나는 혹시 이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건 아닐까”라는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다. 망치 살인 장면에선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향을 감지하게 하지만, 제이와 갤의 관계나 대화에선 영국 하층민들이 등장하는 켄 로치 영화를 떠올리게도 만드는 영화 < 킬 리스트 >. 벤 휘틀리 감독은 마치 닥터 프랑켄슈타인처럼, 접합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나로 붙여내는 기묘한 재능을 보여준다. <킬 리스트>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기에 무서운 영화이며, 장르영화를 보면서 체험할 수 있는 극한의 악몽이기도 하다.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 때는 < 무림토끼 >란 제목으로 소개됐다. 원제는 <토협전기 兎俠傳奇>. 중국이 만든 첫 3D애니메이션이고, 3년 동안 150억 원의 제작비를 들였다. 제작진은 제목을 ‘쿵푸토끼’로 짓고 싶었겠지만, 왠지 자존심이 상해 다른 제목을 떠올렸을 거라 생각했다. 무술을 하는 토끼라는 설정에서 알 수 있듯이, <레전드 오브 래빗>은 < 쿵푸팬더 >를 본 중국인들의 화답이다. 주인공인 ‘투’는 호떡을 잘 만드는 요리사다. 무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적어도 그가 호떡을 만드는 기술은 이미 쿵푸의 경지에 올라있다. 어느 날, 전국의 무림 지존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원숭이 대사부가 한때 제자였던 판다 슬래시에게 배신을 당한다. 간신히 붙은 목숨으로 도망쳐 나온 대사부는 우연히 투를 만나고, 그에게 자신이 가진 신공의 기운을 전해준다. 그리고는 어릴 적 자신의 품을 떠난 딸 피오나를 찾아달라고 말한다. 도심으로 향한 투는 우연히 슬래시의 도장에서 일하게 되고, 피오니란 이름의 쿵푸 고수를 만난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슬래시의 야욕을 막으려 노력하고, 투는 점점 자신 안에 내재된 쿵푸의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중국의 애니메이터들은 < 쿵푸팬더 >에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 <쿵푸팬더>는 아시아 문화마저 완벽에 가깝게 모사하는 할리우드의 흡수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호권, 사권, 학권등 실제 동물들이 재현하는 쿵푸 동작부터 시푸가 포의 식탐을 이용해 훈련을 시키는 시퀀스까지, 중국이 만들었고 전 세계가 즐겼던 쿵푸영화의 잔재미들을 모조리 포함시켰다. 자국의 상징인 동물을 데려다, 역시 자국의 국기인 쿵푸를 소재로 삼은 할리우드에 대한 중국의 미움은 판다를 아예 악역으로 설정한 부분에서 나타난다. < 레전드 오브 래빗 > 속의 판다는 <쿵푸 팬더>의 판다보다 훨씬 큰 덩치에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다. 당연히 게으른 캐릭터가 아닌 그가 귀여워 보일 리도 없다. 심지어 이런 말도 듣는다. “눈에 마스카라만 칠하면 다 쿵푸팬더냐?”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리뷰 룸에서 이 영화를 보다가 마음 한 구석이 짠해졌다. 형형색색의 미감으로 담은 배경과 현란한 액션, 무엇보다 캐릭터에 대한 호감도는 < 쿵푸팬더 >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의 감흥은 <쿵푸팬더>에 미치지 못한다. 분명 <쿵푸팬더>를 먼저 보고 자란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 레전드 오브 래빗 >을 <쿵푸팬더>의 아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중국이 ‘짝퉁의 왕국’이라고 해도 제작진이 그걸 몰랐을까? 할리우드가 쿵푸영화의 관습을 연구해 창조한 결과물을 역수입할 때, 그들의 자존심은 더 상처받을 게 분명하다. <레전드 오브 래빗>은 어쩔 수 없는 딜레마에 관한 애니메이션이다. <쿵푸팬더>의 아류를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쿵푸팬더>를 능가하는 애니메이션으로 자존심을 세워야 하는데, 결국에는 다시 중국이 무협의 지존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 그래서 결국 자신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동물을 저주해야 하는 딜레마라니.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산업을 통틀어서 볼 때도 흔치않은 사례 일 거다.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오리새끼>를 읽었던 당신. 이 동화의 주제를 복기해보자. 그동안 우리는 이 동화의 주제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자’는 것으로 배웠다. 언뜻 보기에는 오리지만, 무척이나 못생긴 오리인 탓에 온갖 멸시를 겪어야 했던 미운오리새끼는 성장하면서 백조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이 동화는 볼품없는 외모 때문에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던 안데르센의 세상에 대한 풍자였다. 지금 와서 보면 소수자를 향한 사회의 배타적인 시선을 비꼬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운오리새끼>는 안데르센의 자기과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화에서 ‘백조’는 모든 새들의 로망이다. 날지 못하는 오리와 달리 마음껏 날 수 있으며, 뒤뚱거리는 오리와 달리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나중에 백조가 될 운명인 미운오리새끼는‘숨겨진 가능성’에 대한 은유다. 미운오리새끼는 백조가 된 후, 자신을 멸시했던 늪오리, 개, 토끼들을 떠나 백조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진다. 안데르센은 자신을 멸시했던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동화 속 그의 판단은 단호하다. 백조가 된 오리새끼는 더 이상 다른 미천한 종족들과 어울릴 필요가 없어. 현실에 빗대자면, <미운오리새끼>는 어릴 적에는 못생겼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예뻐진 초등학교 시절의 짝꿍, 혹은 옛날에는 별 볼일 없었는데, 어느 날 보니 주식재벌이 되버린 그 녀석의 복수극이다. < 미운오리새끼와 랫소의 모험 >은 안데르센의 <미운오리새끼>에 감복한 덴마크의 후예들이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생쥐 랫소는 어느 날 우연히 미운오리새끼를 만난다. 알에서 막 깨어난 미운오리는 랫소를 엄마라 부르고, 그들이 불시착한 농장의 오리들은 미운오리에게 ‘어글리’란 이름을 붙인다. 뜻하지 않게 결성된 이 모자(랫소는 수컷이지만)를 환영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동병상련의 처지에 험난한 모험을 함께 겪던 이들은 점점 서로에게 진짜 부정을 느끼게 된다. 이 애니메이션이 원작에서 가져온 건 이 못생긴 오리새끼가 사실은 백조였다는 것뿐이다. 물론 “세상에서 가장 저질스럽고 비열하고 추잡한 동물”인 쥐와 말 그대로 못생긴 미운오리새끼는 이 작품에서도 어쩔 수 없이 따돌림 당한다. 그러나 원작이 소수자를 향한 배타적 시선을 꼬집으면서도 은근히 ‘다른 자’들을 배척하는 태도를 취한 것과 달리 <미운오리새끼와 랫소의 모험>은 ‘진짜’ 화합을 그려낸다. 심지어 그들의 화합은 정치적으로 해석할 때도 꽤나 전복적인 모습이다. 일단 쥐와 오리가 부자관계를 이룬다는 것부터가 그렇다. 그들 주변의 다른 동물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관계를 ‘그대로’ 내버려둔다. 랫소와 미운오리는 어느 오리농장에 군식구로 살게 되는 데, 이때 마음 착한 한 암컷오리는 수컷생쥐에게 알 듯 모를 듯한 연정을 느낀다. 또 랫소가 평소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던 사촌형제는 알고 보니 성질 사나운 고양이다. 무엇보다 원작처럼 험난한 모험 끝에 백조가 된 미운오리는 자신의 종족을 따라가는 대신, 아버지인 쥐와 이웃인 오리, 닭과 함께 사는 걸 선택한다.‘종속과목강문계’를 넘어서는 동물들의 화합, 덕분에 어느 것도 국경이 될 수 없는 공간. <미운오리새끼와 랫소의 모험>은 안데르센보다도 더 넓고 아름다운 세계를 꿈꾼다. 이 세계의 논리에서는 < 슈렉 >도 다시 그려져야 할 것이다. 명작동화의 세계를 파헤쳐, 그들의 환상을 부셔버린 <슈렉>도 사실상 따지고 보면 명작동화세계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어여쁜 신데렐라가 멋진 왕자님을 만났듯, 잠자는 숲 속의 아름다운 공주가 자신의 입술에 키스한 잘생긴 왕자님을 따라나섰듯, 괴팍한 녹색괴물인 슈렉은 피오나 공주가 아름다운 여인에서 괴물로 변해버린 후에야 그녀와 결혼한다. < 미운오리새끼와 랫소의 모험 >의 세계관이었다면, 못생긴 괴물과 어여쁜 공주의 행복한 결혼식을 꿈꾸었을 것이다. 종족, 국가, 계층, 성별의 차이와 차별로 점철된 세계를 사는 우리에게 한번쯤은 필요한 상상일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