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선택
- 감독
- 알란 J.파큘라
- 제작년도
- 1982
- 출연
- 메릴 스트립, 케빈 클라인, 피터 맥니콜, 리타 카린, 스테판 D. 뉴먼, 군더 마리아 헬머, 그레타 터큰, 조쉬 모스텔, 마셀 로젠블렛, 로빈 바틀렛, 유진 리핀스키, 조셉 레온, 카타리나 탈바흐, 제니퍼 론, 모셰 로전펠드, 울리 페쓸, 멜러니 피앙커, 네딤 프로힉, 아드리안 캘리카, 피터 웨건브레스, 이비카 페이저, 미켈라 카라식
잔뜩 술을 마시고 아침이 되어 숙취에 시달리다 보면, 웬수같은 술을 두 번 다시 마시나 봐라,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러나 술을 끊는 일은 없었다. 언젠가부터는 그런 상투적인 말도 하지 않는다. 과하게 마시는 것을 피하기만 한다면, 술은 언제나 좋은 친구다. 오랜 친구와 절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술은 평생 가야 하는 친구다. 술과의 적당한 관계를 조절하는 일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 어나더 라운드 >는 과하게 술을 마시는 청년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덴마크에는 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맥주 한 상자를 비우는 대회가 있나 보다. 호수 둘레를 뛰다가 한 병을 마시고, 토하면 한 병이 추가되고 등의 규칙이 있다. 참으로 무모하다. 열차에 탄 청년들이 병나발을 불고, 승객들에게도 술을 권하며 한바탕 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어리석은 난동으로 보일 짓이다. ‘젊음은 무엇인가? 꿈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키르케고르의 말이 나온 후 <어나더 라운드>가 보여주는 청년들의 음주 장면은 유쾌하다. 다음 날, 어제의 난동을 알게 된 학교에서는 이후 학생들의 음주를 금지하지만. 고등학교 교사인 마르틴은 평범하고 지루한 중년을 보내는 남자다. 같은 학교의 교사인 니콜라이, 페테르, 톰뮈도 다르지 않다. 인생의 방향은 이미 결정되었고, 새로운 길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생의 마지막까지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 중 마르틴의 권태가 가장 심각하게 보이기는 한다. 역사 수업에서 했던 말을 또 하고, 진도를 잊어먹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 학생들이 단체로 문제제기를 하면서 심각한 위기에 몰린다. 마르틴의 인생에는 아무 열정이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니콜라이의 생일, 함께 술을 마시던 네 명의 남자는 의기투합한다. 심리학을 가르치는 니콜라이는 새로운 학설을 알려준다. 인간의 혈중 알콜은 늘 부족한 상태이기에, 알콜 농도 0.05%가 되면 보다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것이다. 막다른 길에 몰린 마르틴은 술을 마시고 수업에 들어간다. 그러니 정말로 달라진다. 열정적으로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학생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진다. 가정에서도 적극적이고, 활기차고, 다정해진다. 소원했던 아내와의 관계도 훨씬 좋아진다. 니콜라이, 페테르, 톰뮈도 마르틴의 길을 따른다. 적당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어떤 문제가 있어도 그저 귀찮아서 외면했던 과거와 달라진다. 적극적으로 학생들의 상황에 개입하고,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네 남자의 변화, 활약상은 그야말로 놀랍다. 하지만 영화가,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극이 예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정도는 누구나 예감한다. 모든 이익, 행복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한때 덴마크는 세게에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나라였다. 지금은 러시아나 한국이 더 많이 마신다고 한다. 술에 대해서는, 우리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잘 알고 있다. 워낙 술을 많이 먹는 인간이 많다 보니, 주취 감경이라는 비합리적인 법률까지 존재할 정도다. 술을 마시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으니 벌을 감해준다는 것이다. 강제로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자기가 즐거워 마신 술에 취해 타인에게, 사회에 해악을 끼쳤는데 왜 죄를 용인해주는 것일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술을 마셨고, 그로 인해 타인에게 죄를 지었다면 스스로 갚아야 한다. 술에 지나친 관용이나 애정을 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술의 긍정적인 효과에 도취한 마르틴과 친구들 역시 가혹한 결과를 맞는다. 술은 적당히 먹으면 약이고, 과하면 독이다. 모든 상황이 좋아지자, 더 좋아지기 위해 그들은 술을 더 마신다. 과음을 한 탓에 학교에서 실수를 하고, 더 마시다 기억까지 잃어버린다. 감정을 멋대로 발산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마르틴의 아내는 떠나버리고, 톰뮈는 직장을 잃는다. 당연한 결과다. 욕망의 끝은 언제나 파멸이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모든 상승은 언젠가 속절없이 낙하한다. <어나더 라운드>는 결론을 말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세상의 법칙 같은 것은 없다. 누군가는 평생 혈중 알콜농도 0.05%를 유지하며 흥겹고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인생을 포기할 수도 있다.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 <어나더 라운드>는 네 명의 친구들이 걸어가는 길을 담담하게 따라갈 뿐이다. 1995년, 라스 폰 트리에와 함께 도그마 선언을 주도했던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어나더 라운드>는 순수하다. 지나친 의미 부여가 없고, 치밀하게 상징을 파고들지도 않는다. 관습적으로 인물들을 나열하지도 않는다. 익숙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상을 느슨하게 따라가면서, 결국은 빛나는 성찰의 순간을 던져준다. 희망도, 절망도 함께 껴안는다. 도그마 선언은 희미하게 지워졌지만, 빈터베르그는 여전히 정갈한 눈으로 인생을 바라본다. 마지막 장면, Scarlet Pleasure의 "What A Life"가 흐르면서, 한때 재즈 발레를 배웠다는 마르틴이 춤을 춘다. 그들이 가르친 학생들이 서로 졸업 축하를 하는 흥겨운 거리 풍경 속에서, 한동안 멀리 했던 술을 다시 마시며 춤을 춘다. 마르틴은 춤에 빠져들어 격정적으로 몸을 움직인다. 톰뮈는 죽음을 선택했고, 마르틴은 안정된 생활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마르틴이 더 옳은 선택을 했다거나,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은 때로 가혹하게 벌을 내린다. 아무 죄가 없어도, 아무리 성실하고 선하게 살았어도 감내해야만 한다. 술 때문이 아니라, 운명이 그들을 서로 다른 길로 이끌었다. 술은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어나더 라운드>는 취한다는 것의 매혹을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한다. 동시에 빠져들 수 있는 지옥의 구렁텅이까지. 모든 것이 인생이고, 무엇이 어느 순간 나에게 다가올지는 알 수 없다. 매 순간 생각하고, 매 순간 선택하며 나아갈 수밖에. 그러니 때로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취해야만 한다. <어나더 라운드>의 매순간이 그렇듯이.
2017년은 영화를 보는 게 그렇게까지 즐거운 해는 아니었다. 좋은 영화는 계속 나왔고 내가 놓친 영화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슈퍼히어로와 (김혜리 기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암청색 양복을 입은 조폭들로 구성된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주류 영화들이 만드는 풍경은 지겨웠고 종종 숨이 막혔다. 사실 올해는 좋아하는 영화보다 싫어하는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이 더 크다. 내 리스트는 언제나처럼 조금 랜덤이다. 아마 평론가들은 드니 빌뇌브가 만든 두 편의 SF 영화 중 < 컨택트 Arrival >보다 < 블레이드 러너 > 속편을 더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영화가 SF로서 매우 게을렀다고 생각하고, 다소 할리우드적으로 통속화되었을지 몰라도 <컨택트>의 성취가 더 크다고 본다. 무엇보다 <컨택트>가 더 훌륭한 주인공을 갖고 있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에 질렸다고 했는데,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싫어하는 건 대단치도 않으면서 쓸데없이 부풀어진 슈퍼히어로 유니버스들이다. 마블과 DC 팬들은 제발 전쟁에서 나를 빼 달라. < 로건 >을 뽑은 것은 이 영화가 슈퍼히어로 유니버스에 속해있으면서 그 우주의 일관성이나 논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마구 질주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나는 < 옥자 >를 SF보다는 <내셔널 벨벳>과 같은 ‘소녀와 동물’을 다룬 전통적인 가족영화의 연장선에서 보았고 그 절절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멜로드라마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 로우 >는 지금까지 호러 영화가 여성 감독을 외면해왔던 게 얼마나 역사적으로 끔찍한 낭비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사례 중 하나이다. 다큐멘터리를 두 개 뽑았는데, 이들은 모두 한국에서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보여준다. < 옵티그래프 >가 사적 다큐멘터리의 작은 틀을 통해 그려 보이는 한국 현대사와 < 택시운전사 >와 같은 대작 영화들이 그려내는 지루한 풍경을 비교해보라. < 땐뽀걸즈 >의 생생한 주인공들에 비하면 비슷한 상황을 다룬 한국 학원물의 주인공들은 얼마나 식상한가. 올해 뽑은 두 편의 퀴어 영화인 < 꿈의 제인 >과 < 판타스틱 우먼 >은 모두 트랜스젠더 캐릭터가 주인공이거나 타이틀롤이다. 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 彼らが本気で編むときは >와 < 분장 >도 주목할만한 영화였다. 20여 년 전이라면 식상한 방식으로 다루어졌을 주인공들이 조잡한 퀴어베이팅과 위장한 BL 사이에서 빛나고 있다. (< 메소드 >의 욕을 길게 하고 싶지만 그만두기로 한다.) 리스트에서 남은 건 < 배드 지니어스 >와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이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모두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대중적 장르물이고 놀랄 만큼 정통적인 재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좋은 대중영화가 도전적인 아트하우스 영화보다 드물어지고 있는 이 시기에 두 작품은 보다 많이 감상되고 깊이 연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이 영화의 팬들이 대부분 그렇듯 나는 이 국내 제목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잠재적인 한국 관객들에게 < 칠월과 안생 七月與安生 >이라는 제목이 와 닿지 않을 거라는 걱정 또한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칠월과 안생이라는 두 여자의 14년에 걸친 우정의 이야기다. 둘은 어린 시절부터 단짝친구였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자 둘은 모두 가명이라는 남자를 좋아한다. 갈등이 생긴다. 이 상황은 익숙하기 짝이 없다. 일단 40년대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스럽고, 비슷한 내용을 다룬 국내 연속극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다른 삼각관계 영화와 비교했을 때 가장 튀는 것은 이 관계의 꼭짓점을 이루는 남자 가명의 투명함이다. 달리기가 취미인 멀끔하게 잘생긴 모범생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영화는 이 인물에 대해 끝까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두 주인공이 가명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감정을 깊이 들여다볼 수 없다. 칠월과 안생은 끊임없이 가명의 이름을 언급하지만 가명보다는 가명으로 인해 복잡해지고 까다로워진 자기들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그는 두 주인공의 삶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등장하는 도구적 존재이다. 이렇게 되면 우린 단짝 친구의 남자친구에 대한 안생의 집착이 과연 어떤 종류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둘은 그렇게 오래 알지도 않았고 만난 횟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멀끔하게 잘생긴 모범생이라는 건 좋은 가치지만 그만큼 흔한 가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안생에게 가명의 가장 큰 가치는 단 하나, 단짝 친구 칠월의 남자친구라는 것이다. 안생은 칠월의 모든 욕망을 공유하기를 원한다. 가명은 칠월과 자신을 연결하는 또 다른 다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를 레즈비언 로맨스 영화가 되고 싶었지만 너무 수줍었던 영화라고 생각한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둘의 우정을 연애처럼 그린다.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다. 14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온갖 일들을 겪어도 서로에 대한 둘의 감정은 변하지 않는 상수이며 그들은 아무리 험악한 단계에 접어들어도 이를 당연히 여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지독한 욕은 “이 세상에 너를 사랑하는 건 나밖에 없어!”이다. 요새, 특히 모 시상식장에서 아이유가 자신의 소울메이트 유인나에 대한 감정을 고백한 뒤로 SNS에 자주 등장하는 “A와 B가 친구라면 나는 친구가 없어!”라는 문장은 칠월과 안생의 이야기에도 그럴싸하게 잘 맞는다. 이들의 격정적인 우정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편안한 일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우리의 친구들이 모두 이렇다면 삶은 피곤할 것이다. 하지만 왜 우정이 모두 같은 종류여야 하는가. 우정 역시 사랑이지 않은가? 아니,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정은 처음 겪는 사랑의 형태이고 이후 겪을 모든 사랑의 원형이 아닌가? 여러분의 연애 감정이 언제나 우정보다 위였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언제나 연애 대상이었나? 칠월과 안생의 이야기를 우정으로 위장한 로맨스 영화로 보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분명 이들에겐 서로에 대한 강한 욕망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방향을 보는 사람들이며 이들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로맨스 이야기, 특히 이성애 로맨스와는 다른 길을 간다.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는 삶의 선택, 조금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동아시아 여성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과 그 조건의 돌파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속에서 칠월과 안생은 언제나 상대방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데, 늘 친구가 하나의 선택을 하느라 놓친 삶의 가능성을 커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선택은 늘 교환이 가능하다. 칠월과 안생이라는 이름을 보라. 영화는 충동적이고 변덕스럽고 자유분방한 소녀에게 安生이라는 이름을, 모범생이며 어른이 된 뒤에도 태어난 도시를 거의 떠난 적 없는 소녀에게 七月이라는 이름을 준다. 이는 초반부에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캐릭터의 성격이 생각만큼 당연하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캐릭터 설정은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가, 우리가 이성애 로맨스를 통해 익숙해진 이야기와는 많이 다른 틀에서 전개되는 러브 스토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안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누군가와 하나가 되어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되기 위해 그 누군가가 포기한 길을 일부러 선택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러브 스토리의 틀은 이성애 로맨스와는 맞지 않는다. 이는 같은 욕망을 갖고 같은 삶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만약 안생이 남자였다면 이 이야기는 아귀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독하게 얄미웠을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랑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이성애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제한했고 이 단어가 포함되는 이야기를 편협하게 장르화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랑의 행위와 이야기가 그 장르의 울타리 밖에 버려지거나 울타리 안의 익숙한 몇몇 공식에 맞추어 재해석되게 된다. <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의 가장 큰 가치는 이 울타리를 대놓고 무시하면서도 관객들을 거의 완벽하게 설득할 수 있는 러브 스토리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칠월과 안생이 그렇듯 우리에게 들려줄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애적인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다울 것이다. 그럼 아이유인나는? 남의 사생활이니 우리가 뭐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들도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겠지.
‘에로’영화든, ‘서부’영화든, ‘멜로’영화든, ‘SF’영화든 이 모든 것은 다 ‘영화’ 이다. 단지 영화의 주된 이야기를 형성하는 소스 내지는 장치 혹은 영화의 정체성을 알기 쉽게 판가름하여 관객에게 쉽게 영화의 성향을 판단할 수 있도록 ‘영화’라는 단어 앞에 ‘멜로’, ‘액션’ 등의 수식어를 붙이는 것뿐이다. 다양하게 만들어지는 영화 중에는 삶의 기쁨이나 슬픔에 관한 이야기로 관객들을 감정적으로 가열차게 만들기도 하고 일상에서는 접할 수 없는 상상치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잠시 동안이나마 다른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값어치를 선사해 주기도 한다. 이러한 ‘영화’라는 단어 앞에 설정된 수식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영화의 성향을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지름길 역할을 하기도 하며 많은 영화 가운데서 조금은 빠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잡이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이런 부분에서 ‘독립영화’는 ‘영화’ 앞에 ‘독립’이라는 수식어를 단 채로 사실 상당히 애매할 수 있는 의미로 작용되기도 한다. 사실 영화라는 단어 앞에 ‘독립’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독립영화’는 어떤 특정한 장르라든가 특정한 성향의 영화를 일컫는 통합 수식어가 아닌 ‘이미 구성되어버린 지질 판을 뚫고 나와 어떤 자율 의지를 발동하여 만들어낸 일련의 영화의 군’으로서의 의미로 다른 여타 상업권의 영화에서 장르로써 규정하는 영화의 수식과는 다른 어떤 큰 의미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문구이다. ‘독립영화’라는 말이 요즘은 영화인들만이 아닌 직업상 영화와 관련이 없는 대중들의 대화 안에서도 이미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독립영화’라는 의미는 사실상 어떤 자율적 의지와 정신에 관련된 사항의 개념으로서가 아닌 대부분 멜로영화, 액션영화와 더불어 마치 영화의 한 장르로, 만듦새로 활용되는 경우가 아직은 꽤 많은 듯하다. 아직 많은 분들이 생각하는 독립영화라는 것은 전체 영화 장르 안의 그저 한 장르로 간주되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며 여러 매체에서 들은 대로 독립영화라는 장르(?)는 아주 적은 1억 내외의 예산에 상업적으로 탄탄히(?) 기획되어 나오는 영화와는 다른 가련한 영화로 인지됨으로써 이를 반드시 옹호하고 보호해줘야 한다는 언론화된 가설을 받아들여 버린다. 장르 안에 그것도 애처롭고 불안한 한 장르로써 편입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독립(적인 정신으로 만들어지는)영화’. 사실 이 부분은 비영화인 뿐만이 아닌 영화 시스템 안에서 종사하는 꽤 많은 수의 영화인들의 생각과도 일치된다. 머리에 나 있는 각각의 머리카락과 같이 다양하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생김새와 스타일과도 같이 각각의 매력이 넘쳐나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과정을 겪은 영화들을 그저 단순히 ‘독립영화’라는 문구를 활용해 마치 영화의 여러 장르 중에 하나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사실 그 ‘독립영화’라는 일련의 군 안에 들어가 있는 영화들도 파헤쳐보면 사실상 또다시 엄청나게 다양한 장르로 다시 나뉠 수도 있을 것이다. 뭐... 이런 예는 들다 보면 끝이 없을 수도 있는 자기변명인 것 같아 우선 마무리. 어쨌든 ‘독립영화’라는 것이 어떤 군락지마냥 그저 영화의 한 장르마냥 인식되어져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 속에서 수많은 자율적 영화들이 그룹화되어버린 것에 비애감을 느끼기도 한다. ‘독립’이라는 것은 자율적인 하나의 선택이다. 한국의 교육 제도마냥 비슷한 환경 안에서 서로 엇비슷한 공정을 거쳐 나오는 기본 틀을 벗어나 ‘독립’이라는 자율적인 의지와 그 의지를 바탕으로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안에서 만들어내는 영화를 그저 어떤 장르로, 군락지로, 덩어리로 포지셔닝을 하는 것에 때로는 격렬한 거부감을 느끼며 더불어 독립적인 영화 환경의 구축과정과 제작에 대해 그리고 그에 대한 결과물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이제는 신물이 난다. 태생이 어떠하든 어떤 의지로 만들어졌든 예산이 얼마가 들었든 지원을 받은 영화든 투자를 받은 영화든 낯익은 배우가 나오는 영화든 낯선 배우가 나오는 영화든 모든 영화 하나하나는 고유한 태생과 결과를 내포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영화인 것이다. 이제는 이 부분의 담론이 이론으로서만이 아닌 자연스런 마음과 정신을 바탕으로 인지되고 정리되어졌으면 한다. 독립영화도 상업영화도 바탕이 영화이며 독립영화에 출연한 배우도, 상업영화에 출연한 배우도 모두 영화의 배우이며 영화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영화를 대하는 모두는 그저 ‘영화인’ 인 것이다. 우리는 그렇듯 모두 영화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