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
- 감독
- 김동원
- 제작년도
- 2001
코로나가 가장 심각하던 시기, 팬데믹으로 인해 국가 간의 교류는 거의 단절되고, 국민들은 일부 격리되며 대부분의 문화 활동은 중지되었다. 많은 영화들은 부쩍 한산해진 극장가를 보며 개봉을 미루던가, OTT로 방향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사람, 크리스토퍼 놀란 만큼은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 그의 신작 < 테넷 >은 이 시기 유일하게 극장에서만 공개된 텐트폴 영화였다. 놀란과 파트너십을 이어오던 워너는 가장 OTT 공개(및 동시 개봉)에 앞장서던 배급사였고, 그래서 놀란의 결정에 난감했던 게 사실이다. 몇 번의 연기를 거쳐(다른 작품들이 창고 영화가 되거나 TV 영화가 되어가는 속에서도) <테넷>은 코로나 속 극장에서 고군분투 블록버스터로 위용을 보였지만 장렬히 산화하고 만다. 할리우드 메이저에 진입했던 < 인썸니아 >부터 오랜 협력 관계를 유지해온 놀란과 워너의 관계에 금이 간 건 바로 이때였다. 놀란은 워너의 소극적인 홍보를 아쉬워했고, 워너는 놀란의 비협조적인 선택에 섭섭해 했다. 결국 놀란은 워너를 떠나 차기작을 유니버셜과 하기로 결정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새 프로젝트는 이전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실제 인물을 다룬 전기물이었다. 전 세계에 핵이란 새로운 빛을, 그리고 동시에 두려운 공포를 안겨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원작 제목이다)'이자 천하의 둘도 없던 천재, 바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다룬 영화 < 오펜하이머 >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놀란과 유니버셜의 첫 협업물인 <오펜하이머>는 바로 놀란의 전 파트너였던 워너의 최고 기대작인 그레타 거윅의 < 바비 >와 맞붙게 되었고, <바비>가 <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 >를 넘어 워너의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는 바람에 <오펜하이머>는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한번도 1위를 기록하지 못한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역대급 흥행을 찍은 경쟁작의 방해와 3시간이란 상영시간의 압박, 누드와 욕설로 인한 R등급 등 숱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는 < 조커 >의 뒤를 이어 R등급 영화사상 두 번째로 흥행한 작품이 되었고, < 보헤미안 랩소디 >가 가지고 있던 전기물 최고 흥행작 타이틀도 빼앗았으며, < 인셉션 >을 넘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리지널 작품으론 최고 흥행작에 올랐다. 루드비히 고란손 안타깝게도 필생의 소망(!)이던 < 듄 > 작업 위해 자리를 비운 한스 짐머가 이번에도 그 속편을 위해 바쁜 관계로, 놀란은 전작 <테넷>을 함께 했던 루드비히 고란손을 다시 한 번 음악적 파트너로 맞이한다. 스웨덴 출신의 고란손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80년대생 영화음악가들 중 하나로,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베토벤의 이름을 딴(그의 아버지는 블루스 기타의 신 알버트 킹의 이름을 붙이고 싶어 했다!) 그의 음악적 소양은 기타 교사였던 아버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스톡홀름 왕립 음악학교를 졸업한 고란손은 미국 USC에서 영화음악을 전공했고, 같은 대학의 영화과에 다니던 라이언 쿠글러와 의기투합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 고란손은 영화음악가 테오도르 샤피로 밑에서 견습 생활을 이어가며 시트콤 <커뮤니티>로 자신의 첫 음악 크레딧을 얻는데, 여기서 차일디쉬 감비노로 활동하는 배우 도널드 글로버와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이 둘과의 만남은 고란손에게 < 블랙 팬서 >의 오스카와 “This Is America”의 그래미라는 영예를 안겨다주었다. 영화음악과 힙합이란 전혀 다른 분야에서 동시에 성공을 거두며 화려한 커리어를 맞이한 고란손의 다음 스텝은 바로 놀란과의 계속된 협업이었다. 루드비히 고란손은 익숙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데 탁월한 식견과 해석력을 보여 왔다. 그래서 빌 콘티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록키 발보아의 세계에서 힙합 리듬으로 새로운 적자 크리드에게 시선을 돌리는데 성공했고, 마블의 고전적이고 영웅적인 심포니가 득세하는 전장에서도 리얼한 아프리칸 사운드를 효과적으로 이식했으며, 마에스트로 존 윌리엄스가 굳건히 세워놓은 갤럭시 사가에서 향토적이고 이국적인 베이스 리코더를 내세운 색다른 만달로리안 사운드로 새로운 여정의 진군가를 완성해냈다. 랜디 뉴먼이나 마이클 지아치노가 꽉 잡고 있던 픽사 애니메이션에서도 흥분하면 래서 판다가 되는 틴에이저의 고충을 끌어안은 그의 음악은 반짝반짝 빛났다. 엔트로피와 양자역학이 판을 치는 놀란과의 첫 만남에선 데이빗 줄리앙과 한스 짐머가 구축해놓은 미니멀한 사운드에서 더 나아가 쉽게 시도하지 않는 실험적인 백마스킹을 통해 앞뒤가 똑같은 회문 구조의 인버전 스코어를 현실에 구현해냈다. 고란손은 감독들이 요구한 사항을 받아들이되 기존의 존재하던 스타일을 반복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낸다. 이게 수많은 영화음악가들이 데뷔하고 활동하는 할리우드에서 빠른 시간 안에 그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다. <인셉션>에서의 에디트 피아프, < 인터스텔라 >에서의 파이프오르간, < 덩케르크 >에서의 시계초침과 엘가, 그리고 <테넷>에서의 인버전된 백마스킹이 핵심적인 사운드 키워드로 자리했던 놀란의 영화음악답게 이번 <오펜하이머>에서 놀란이 영화음악가에게 내민 카드는 바로 바이올린이었다. 오펜하이머가 여러 층위를 가진 복잡한 내면의 천재였고, 일반 전기물처럼 쭉 한사람의 일생을 따라가기보단 원자력협회의 오펜하이머 청문회와 스트로스 제독의 인사청문회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일대기까지 세 가지 시간 선을 엮어낸 다층적인 구조라 레이어 쌓기 가장 좋은 악기인 바이올린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고란손 역시 아름답고 환상적인 선율의 비브라토를 연주하다가도 바로 브릿지로 격한 소리를 만들거나 빠르고 예민한 트릴이나 미끄러지는 글리산도로 신경질적이고 공포적인 효과로 돌변할 수 있는 바이올린이야말로 오펜하이머가 핵무기를 만들면서 가졌던 이중적인 측면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악기로 받아들였다. 아내 세레나 맥키니가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한 고란손은 놀란이 던진 이 아이디어를 맘에 들어 했고, 1인칭으로 묘사된 시나리오 속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바이올린으로 극대화 시킬 방법들을 다양하게 찾았다. 압도적인 건 바로 오펜하이머가 가진 고뇌와 무게감, 일반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천재성과 감정의 기복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한 큐 안에서 스트링 세션이 변화무쌍하게 4마디마다 템포가 변화해 최대 21번의 빠르기가 가중되는 'Can You Hear The Music'이나 'Destroyer Of Worlds'같은 트랙이다. 처음 시작보다 무려 3배나 빨라지는 연주는 한 테이크 안에 라이브가 불가능하다 생각해 후반 믹싱적 테크닉을 시도하려했으나 아내의 격려와 시도로 실제 연주를 사흘에 걸쳐 이뤄냈으며, 이는 남들과는 전혀 다른 속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오펜하이머의 시선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이제는 시작돼 멈출 수 없는 핵 개발의 체인 리액션을 표출한 방식이기도 했다. 더욱이 영화상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트리니티 실험에 흘러나오는 8분에 이르는 대곡 'Trinity'는 폭발에 이르기까지 정신없이 고조되며 심장을 마구 옥죄여오는 킬링 트랙인데, 버나드 허먼이 울고 갈 정도로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날카로운 현의 비명들 아래 깔리는 웅장한 관악기와 어두운 일렉트릭의 조화는 폭발 순간 침묵에 휩싸이며 먹먹함을 선사한다. 버튼을 누르면 결코 이전으론 되돌아갈 수 없는 결과를 낳는 핵의 운명처럼, 이 모든 소리의 파편들이 쌓여 거대한 침묵을 완성한 건지 모른다. 여기에 가이거 계수기를 비롯한 다양한 펄스파의 소리들과 군중의 발소리를 채집한 효과들이 어우러지는 아방가르드한 공명감은 핵개발 이후의 바뀐, 그리고 멈출 수 없는 세상의 연쇄적인 반응을 담아내는 듯 불길하고 무섭게 다가온다. 간혹 섬세한 하프와 간헐적인 피아노가 덧입혀지며 아내 키티와 동료 과학자들 간의 신뢰를 구축하기도 하지만, 독일과 소련과의 원폭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며(또 작중 후반 증인들의 증언이 거듭됨에 따라 불리해지며) 그 초조한 긴장감을 담아내는 규칙적인 초침소리와 금속성의 엠비언트, 현악 오스티나토의 질주감은 별다른 화려한 비주얼 없이도 청각적으로 스크린을 압도해버린다. 기억에 남는 명징한 테마들은 없지만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며 켜켜이 쌓이는 현악의 구조와 강도는 점점 완성되어가는 원폭을 보듯, 증언이 쌓이며 점점 인물들을 구체화 시키는 청문회를 보듯 단단하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런 강렬함에도 고란손은 스코어에 드럼이나 팀파니 같은 전통적인 타악기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활로 현을 때리거나 샘플링된 소리들로 효과를 주었을 뿐이다. 버나드 허먼의 신경질적이고 풍부한 스트링에 나인 인치 네일의 공감각적인 일렉트릭 사운드를 포용한 채 필립 글래스나 막스 리히터의 미니멀리즘과 요한 요한손의 드론 음악을 결합시켜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의 현대음악처럼 풀어낸 루드비히 고란손의 추상적이고 과할 정도로 시끄러운 사운드 임팩트는 핵이란 거대 담론이 가진 여러 방향성과 폭발력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복잡한 층위의 감정 스펙트럼을 방사형으로 내뿜어낸 비장의 OST다. Track List 1. Fission 2. Can You Hear the Music 3. A Lowly Shoe Salesman 4. Quantum Mechanics 5. Gravity Swallows Light 6. Meeting Kitty 7. Groves 8. Manhattan Project 9. American Prometheus 10. Atmospheric Ignition 11. Los Alamos 12. Fusion 13. Colonel Pash 14. Theorists 15. Ground Zero 16. Trinity 17. What We Have Done 18. Power Stays in the Shadows 19. The Trial 20. Dr. Hill 21. Kitty Comes to Testify 22. Something More Important 23. Destroyer of Worlds 24. Oppenheimer
조선극장은 1922년 11월 6일 개관하여 1936년 6월 11일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인사동 입구에 위치했던 영화관이다. 조선극장의 설립자는 명월관 지배인 황원균(黃源均)이다. 그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11월, 독립운동 진영에 합류하기 위해 상해로 떠나려던 의친왕(義親王)의 행적을 일제경찰에 밀고하여 의친왕의 상해 망명을 좌절시킨 장본인이었다. 이 사건으로 경찰부장으로 승진한 치바 료(千葉了)는 의친왕의 행적을 제보하여 대동단(大同團) 단원들을 체포하는데 도움을 준 황원균에게 평소 바라던 극장 신설 허가를 내주었다. 뿐만 아니라 요코하마에 근거지를 둔 동양생명보험의 경성지사장 야자와 긴지로(矢澤近次郞)를 통해 극장 설립 자금까지 융통할 수 있게 도왔다. 황원균의 조선극장 설립 허가는 강점 이후 조선인에게 주어진 첫 번째 경우로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얻어낸 그 자체로 대단한 특혜였다. 황원균은 과거 연흥사가 있던 자리에 공사비 5만여원, 총비용 14만원으로 지상 3층 건물을 짓고 이름을 조선극장이라 정했다. 이렇게 완공된 조선극장은 총 8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객석 내부에는 박스석을 설치하고 엘리베이터를 설비했으며 옥상에는 레스토랑까지 갖추었다. 1922년 11월 6일 개관된 조선극장에서는 개관공연으로 윤백남이 연출한 만파회의 <장발장>과 경성 다섯 권번 기생들의 공연, 명창 이동백의 독창, 그리고 몇 편의 서양영화가 상영되었다. 개관식이 있은 후 황원균은 쇼치쿠영화사, 다이카츠(大活, 大正活映)영화사와 특약을 맺어 프로그램을 충실히 하는데 애썼으며 서양영화 수입사를 운영하던 알렌상회에게 잠시 극장운영을 위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채권자인 요코하마 동양생명보험의 야자와는 개관 3개월 후부터 원금 상환을 독촉했고 원금을 상환할 수 없었던 황원균은 야자와에게 조선극장을 빼앗기게 된다. 야자와는 조선극장을 부동산회사인 도쿄건물회사에 매각한다. [자료] 조선극장 개관피로 광고(《동아일보》, 1922.11.7.) 도쿄건물회사가 소유하게 된 조선극장을 운영한 주체는 한때 황금관과 유락관을 경영한 바 있고 1923년 <춘향전>을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둔 하야가와 마쓰타로(早川增太郞)의 동아문화협회(東亞文化協會)였다. 동아문화협회에서는 1924년 7월 13일 내부공사를 마치고 조선극장을 활동사진관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하야가와는 그 사이 <비련의 곡>, <흥부놀부> 등을 제작하여 조선극장에서 상영하였다.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인수한 하야가와는 1925년 9월 예전 자신이 운영했던 황금관의 운영권까지 획득하여 조선 내 두 군데의 영화관을 운영하는 수완을 보였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불어 닥친 극심한 불황과 1926년 실시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에 의거하여 부과된 검열수수료로 인한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 건강까지 악화되자 하야가와는 결국 조선에서의 생활을 접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8년 7월 30일 교토에서 사망했다. 1926년 9월부터 하야가와를 대신해 조선극장을 운영한 이는 변사 김조성(金肇盛)이었다. 그는 하야가와가 세운 동아문화협회에서 활동하면서 동아문화협회에서 제작한 영화 <춘향전>의 이도령으로 출연했던 인물로 조선극장 경영에서 물러난 하야가와를 대신해 조선극장을 맡았다. 그는 공격적인 영업으로 업계에 파장을 일으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금 유용을 이유로 운영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1926년 12월에는 차영호(車泳鎬)가 조선극장의 새로운 운영자가 되었다. 상설관 운영 경험이 없던 그는 1927년 2월 나운규의 <풍운아>를 상영하면서 김조성을 주임변사로 다시 불러왔으며 1927년 6월에는 현철(玄哲)과 김영식(金榮植)을 공동경영자로 끌어들였다. 현철을 중심으로 잡지발간, 배우양성, 영화제작을 도모했지만 공동운영자들의 경영 미숙과 운영자와 관원들 사이의 갈등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 없이 문을 닫게 된다. 1927년 9월부터 조선극장은 주임변사 김조성이 이태진을 공동 경영자로 끌어들여 운영되었다. 단성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안정적인 운영을 이어오던 조선극장은 1928년 12월 주임변사이자 공동경영자인 김조성이 필름 임대업자인 임수호에게 210원에 필름을 임대해 놓고 이태진에게 370원의 돈을 이중으로 받아 160원을 착복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다시 복잡한 상황으로 빠지게 된다. 결국 조선극장은 문을 닫았고 이태진은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안봉호에게 인계하였다. 안봉호는 1929년 8월 신용희를 지배인으로 두고 극장운영을 시작했는데 신용희는 기존의 영화 상영만 이루어지던 영화관에 재즈밴드단과 여성무용단을 조직하고 영화상영 사이에 레뷰 공연을 넣어 다른 영화관이 갖지 못한 경쟁력을 갖추려 노력했다. 하지만 조선극장에서 제작하던 영화 <젊은이의 노래>에 대해 악단장 윤창순이 저작권을 위배했다며 항의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조선극장 측에서는 악단을 해산하고 레코드로 반주를 하게 된다. [자료] 화재를 당한 조선극장(《동아일보》, 1936.06.12.) 신용희가 지배인으로 영업을 책임진 이후 조선극장은 점차 안정을 찾아 갔다. 이에 따라 1931년 7월 조선극장을 중심으로 자본금 8만원의 조선흥행주식회사가 설립된다. 사장은 정완규, 전무취체역 전현국, 상무취체역 신용희, 정은규, 취체역 정현성, 김찬영, 감사역으로는 정현용이 선임되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최신의 토키설비를 구비하고 고급의 토키영화를 상영하여, 조선극장은 일명 토키영화의 전당이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조선흥행주식회사 간부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급기야 1932년 10월 조선흥행주식회사가 극장 지배인 신용희를 해고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자 건물주인 도쿄건물회사에서는 신용희와 계약한 흥행권만을 인정한다며 극장사용을 중지해 버렸고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조선극장에 설치한 토키 설비를 뜯어 단성사로 옮겨 영화상영을 계속하였다. 1932년 12월부터 기신양행의 김찬영과 손잡은 신용희가 조선극장을 운영하게 된다. 운영자 김찬영, 지배인 신용희 체제에서 조선극장은 김찬영이 소유한 영화배급회사 기신양행을 통해 안정적으로 필름을 공급받았다. 하지만 비싼 토키필름 가격에 비해 줄어든 관객으로 인해 극장 경영은 어려움이 많았다. 이때 신용희는 서울무대라는 극단을 조직하여 프로그램의 일부를 연극으로 채울 생각을 하였다. 1933년 조선극장의 추석 프로그램에서 공연된 서울무대의 <등대>에서 배우가 대본에 없는 대사를 했다는 이유로 공연이 정지되었고 관객들이 항의하는 일명 조선극장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의 배경은 임석경관의 횡포에 변사 성동호가 상부에 투서함으로써 발생한 것이었다. 결국 변사 성동호가 구속되면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김찬영과 신용희 체제의 조선극장은 결국 1934년 12월 김찬영이 영화업에 손을 떼면서 끝나고 만다. 1934년 12월, 종로 5가에 위치한 제일극장 소유자 미나토 큐기치(港谷久吉)가 조선극장의 소유권과 흥행권 일체를 약 10만원의 자금을 들여 인수하게 된다. 새로운 경영자의 등장으로 기존 조선극장 관원들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것을 염려하자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이들의 고용을 유지하라고 권고하여 대부분의 관원들이 그대로 극장운영을 이어갔다. 하지만 미나토 큐기치가 운영하던 조선극장은 1936년 6월 11일 방화로 전소되어 이후 복구되지 못했다. 조선극장은 잦은 운영자 교체로 인해 경영이 불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운영하던 이들 대부분이 서양영화의 배급사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서양영화의 전당”이라 불릴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조선인극장과 일본인극장을 통틀어 조선극장은 단성사와 더불어 서울에서 서양영화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로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극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토월회의 공연이 개최되면서 한국연극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장소로 기록되고 있다. 참고문헌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중앙일보》, 《중외일보》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 72호, 2010. * [사진](상단) 조선극장 낙성 광고(《매일신보》, 1922.11.03) [자료] 《 매일신보 》 , 1922.11.7. 조선극장의 개관식 , 작일 오후 ᄒᆞᆫ시부터 셩대하게 거ᄒᆡᆼᄒᆡᆺ다 이번에 셔로 건츅한 부내 인사동 됴션극장 ( 朝鮮劇場 ) 은 예뎡한 바와 갓치 작 륙일 오후 한시부터 동 극쟝에서 ᄀᆡ관식을 거ᄒᆡᆼ하엿ᄂᆞᆫ바 인사동 드러가ᄂᆞᆫ 어구로브터 극장ᄭᆞ지ᄂᆞᆫ 만국긔와 오ᄉᆡᆨ긔며 뎐등으로 챤란하게 장식하엿고 극장 안에는 칠ᄇᆡᆨ여명의 ᄅᆡ빈이 상하층에 가득하였더라 . 관쥬 황원균 ( 黃元均 ) 씨의 ᄀᆡ관식사와 여러 변사와 극가의 예슐과 극장에 대한 말이 잇셧고 그 후에ᄂᆞᆫ 경셩 오번권 기ᄉᆡᆼ의 가무와 밋 셔양츔이며 현대 일류 명창 리동ᄇᆡᆨ ( 李東伯 ) 의 독창과 현대극계의 권위인 만파회 ( 萬波會 ) 의 신극 츌연이 잇엇고 계속하야 활동사진을 영사하야 ᄅᆡ빈의 이목을 즐겁게 하고 동 오후 네시에 폐회하얏ᄂᆞᆫ대 ᄅᆡ빈에게는 기념품까지 쥬엇는바 극쟝에 장관스러운 설비와 챤란한 쟝치ᄂᆞᆫ 조션에 쳐음이라 하겟다더라 . [자료] 《 매일신보 》 , 1922.11.7. 신축낙성 ( 新築洛城 ) 當 本月 六日 개장 ( 開場 ) … 프로그람 … ◎ 경성 오권번 ( 五券番 ) 의 가무 음곡 ( 音曲 ) 급 ( 及 ) 서양댄스 ◎ 일류 명우 ( 名優 ) 이동백 ( 李東伯 ) 군의 독창 ◎ 현대극계의 권위 만파회 ( 萬波會 ) 의 출연 ◎ 태서 ( 泰西 ) 저명한 고급 활동사진 이상 반도 유수 ( 半島 有數 ) 의 대극장 조선극장의 개장 경성부 인사동 전화 本局 三六二 ○番 [자료] 《 중외일보 》 , 1926.12.19. 영화 · 연예 《 나는 영웅이다 》 ( 全七卷 ) 조선극장 (18 日 봉절 ) ◇ 원명 …… ᄲᅥᆼ커 - 대왕 ◇ 원작 …… 레온 윌손 씨 ◇ 감독 …… 하리 ᄲᅩ - 몬 씨 --- 캬스트 --- ◇ ᄲᅥᆼ커삔 …… 마트 무어 씨 ◇ ᄲᅳ리드 …… 죠지 니콜스 씨 ◇ 카사노바 부인 …… 노라 세실 양 ◇ ᄲᅡ사쟐 대선생 …… 푸랑크 레이 씨 --- 이하 략 ( 畧 ) --- 사람 좋은 《 ᄲᅥᆼ커삔 》 은 그의 동무들이 그를 가리켜 《 나폴레옹 》 의 재생이니 혹은 녯날 《 애급 》 나라의 임금의 후신이니 하야 가면서 놀리는 것도 모르고 그것이 정말인줄만 알고 가진 공상을 다하고 있었다 . × 그리하여 한번만 그 공상하는 병이 시작되기만 하면 그는 중대한 재긔 회사의 일도 돌아보지 않고 천금을 아끼지 않고서 《 미 - 라 》 를 사오고 ᄯᅩ 그 외에 무엇 무엇 쓸대업는 것을 구해다 노코서 공상을 하기에 가진 진기한 사건은 다음에서 다음으로 생긴다 . 그는 확실히 자긔가 영웅인 것이나 가티 생각하는 것이었다 . × 그러나 결국 그는 자긔 애인인 사장의 딸과 야구선수들의 도움에 의하여 간신이 본정신을 차리고 공상에서 ᄭᅢ어서 견실한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하는 것이 이 재미있고 우스운 사진의 이야기입니다 . ( 사진은 《 나는 영웅 》 의 한 장면 ) ◇ 조선극장 개관 일시 경영 곤란으로 폐관하였든 시내 인사동 조선극장은 다시 유지들의 활동으로 《 조선키네마회사 》 제공 《 풍운아 》 ( 風雲兒 )( 全 7 卷 ) 과 《 나는 영웅이다 》 ( 全 7 卷 ) 기타 희극 등 재미잇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십팔일 밤부터 개관하게 되엇는데 료금 등은 종전과 같다더라 . [자료] 《 매일신보 》 , 1927.7.26. 조극개관기 ( 朝劇開館期 ) 아즉도 멀어 부내 인사동 ( 仁寺洞 ) 죠션극장 ( 朝鮮劇場 ) 은 지난 륙월 삼십일에 돌연히 폐관한 후 수십여명 관원ᄭᅡ지 젼부 해산을 식히고 경영자의 한사람인 현텰 ( 玄哲 ) 씨는 내지로 건너갓는대 그동안 관원들은 경영자 측에 대하야 휴관하여 잇는 동안에는 극장을 관원에게 빌려쥬워 관원의 손으로 당분간 영업을 계속하야써 관원의 생활을 보샹케 하여 달라하야 양방의 타협이 진행즁이더니 그것도 결국 파열되야 관원 일동의 ᄇᆡᆨ여명 식구는 목하 생활 곤난을 당하고 잇는 즁인바 동 극쟝은 ᄅᆡ월 십삼일경에나 이르러 젼 경영자의 경영 하에 개관될 모양이라더라 .
이번 충무로뮤지컬영화제 프리페스티벌(ChungmCHIMFF 2015)의 폐막작은 영화가 아니라 시나리오 리딩 공연이었던 ‘< 만추 >를 읽다’였다. 혹시 보셨는지? 나는 영상자료원에서 했던 공연을 먼저 보았다. <만추>는 네 번이나 리메이크되었지만 이만희 의 원본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우리가 이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녹음대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런 공연뿐이다. < 만추 >를 읽다, 공연 현장 이 칼럼에서 내가 맡은 역할도 필름이 사라진 영화를 재구성하는 일이니, ‘< 만추 >를 읽다’의 작업은 내 작업과 여러모로 겹치는 구석이 있다. 그렇다면 내 식으로 시나리오 리딩 공연의 작품을 선정해보면 어떨까? 몇몇 ‘거장’의 작품들을 놓고 고민한 끝에 김기영 의 64년 작 < 아스팔트 >를 골랐다. < 하녀 >와 같은 걸작을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결점이 많은 작품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런 낭송에 어울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기영의 그 독특한 대사 톤을 따라 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후반부의 몇몇 액션은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대사의 비중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제목의 의미는 뭐냐고? 도입부의 내레이션을 보라. 여기에 누가 어떻게 살고 있나 그건 아무도 모른다. 검은 거미줄과 같은 아스팔트 길위로 서로 노리고, 서로 겨누고, 아는것은 단 한사람 자기뿐일거다. 김진규 가 연기하는 김 형사가 석원근이라는 강도를 체포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시작부터 이런 대사들이 속사포처럼 튀어나온다. 노파: 석원근의 어머닙니다. 형사 머리 깐 죄는 얼마나 더 받아야죠? 김형사: 공짭니다. 허나, 그 버릇 어머니가 가르쳐 주셨읍니까? 노파: 모두가 내 죄지요. 그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론 짐승보다 다 가난해서 그애에게 맛있는 음식도 못 먹이고 깨끗한 옷도 못 입혀 애미 구실을 못했어요. 그래, 나쁜짓을 해도 염치가 없는것 같아 채찍을 못들었어요. 김형사: 언젠가 절도로 잡힌 젊은 사람의 어머니가 찾아와서 살려달라기에 놔줬더니, 얼마 못가 살인을 저질렀읍니다. 말하자면, 내가 살인을 한 셈이죠. 그날부터 난 용서없이 죄인을 형무소로 보냅니다. 그리 사실적이라고 할 수 없는 대화지만 압축률과 속도가 엄청나다. 대화가 두 번씩 오갔을 뿐인데 벌써 김 형사가 어떤 인물인지 보인다. 김 형사( 김진규 ) 하여간 그는 20년 경력의 민완 형사이다. 범죄자를 잡은 상으로 받은 ‘양옥집’에서 아내, 애 둘과 함께 사는데 (잠깐, < 하녀 >와 공간과 설정이 은근히 비슷하지 않나?) 미국에서 과학수사를 공부하고 왔다는 인텔리 후배들에게 벌써 치이고 있다. 위의 대사가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체포되었던 석원근이 병원을 탈출해, 그 엘리트 후배 신 형사와 다시 잡으러 가야 한다. 석원근의 집으로 간 두 형사는 그의 누이동생인 현숙을 만나는데 김기영은 이 캐릭터에게 오좀싸개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신 형사가 현숙에게 수작거는 대사를 들어보라. 신형사: 아가씨, 별명이 오좀싸기라면서요? 현숙: 처녀 쌍통 깨는군요! 신형사: 절도를 저즐렀다면서? 현숙: 향수가 탐이 났어요. 신형사: 아--. 애인 때문에? 현숙: 몸에서 냄새가 나서요. 이동리엔 목욕탕두 없거든요. 신형사: 으-- 오좀 냄새 때문이군! 분명 신 형사는 현숙에게 호감이 있는데 이런 여자에게 한다는 소리가 “아-- 휴, 오좀냄새 나는구나! 하하하...”라니 참 김기영 스럽게 원초적이라고 할 수밖에. 척 봐도 석원근은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영화가 그의 가족에 집중하는 것은 김기영이 이 영화를 만들면서 그가 젊은 시절에 보았던 암흑가 배경의 30년대 프랑스 멜로드라마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상업적 타협을 할 수밖에 없어 중간엔 <케이프 피어> 비슷하게 변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에는 범죄자와 형사 가족의 일상 묘사가 기대보다 훨씬 많은 편이다. 신 형사와 현숙은 데이트를 하고 김 형사의 가족 묘사도 상당히 길게 볼 수 있다. 그러는 동안 탈출한 석원근이 현숙의 밀고로 잡히고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석원근은 형무소에서 최태원이라는 미치광이를 만났다. 그는 체포 과정 중 일어난 총격전으로 아내를 잃었는데 그는 곧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다. 그가 과연 자기 아내를 죽이고 그 사건의 상금으로 ‘양옥집’을 산 형사를 용서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는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화가 아니랄까 봐, 이 영화에서도 부동산 재산은 엄청 큰 무게를 가진다. 김형사: 양옥집이 원수다. 내가 상금을 받았다는 영수증처럼 자리잡고 있는 거다. 그때 나는 지휘자였고 내가 상금을 타고 내가 계급이 올라간것이 최태원 뿐만 아니라 세상이 내가 그의 처를 죽인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출옥한 최태원의 복수 목표가 그가 아닌 그의 아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셰익스피어스러운 독백이 하나 더 이어진다. 시나리오 리딩 공연이 현실화된다면 이 대사도 한번 듣고 싶다. 김형사: 어쩌면 좋으냐! 어제까지 무서운 것이 없든 형사가 여편네를 죽인다는 바람에 고양이 머리처럼 아물아물하게 생각되고 열병을 앓고난것 처럼 내 팔의 힘을 뺏어갔다. 최태원이는 내 처를 죽이러 온다. 도망 보낼까? 안돼? 내 처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줄 순 없다. 김기영 은 김 형사 역의 김진규 이미지가 지나치게 우유부단해서 미스캐스팅이었다고 불평했던 모양인데, 이런 독백들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고도 그렇게 생각한 건 좀 너무했던 거 같다. 이 영화의 김 형사는 더티 해리보다 햄릿에 더 가깝다. 그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결국 김 형사는 사표를 제출하고 경찰은 그를 미끼로 최태원을 잡기로 결정한다. 사방에 경찰이 깔리고 마침내 최태원은 그에게 협박 전화를 건다. 그와 아내가 ‘양옥집’ 테라스에 앉아 그의 표적이 되지 않는다면 살인이 일어날 것이다. 정말 총격이 일어나지만 셜록 홈스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던 게 분명한 트릭으로 김 형사의 부인은 목숨을 건진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부인은 가출하고... 그렇다. 또 독백이다. 김형사: 처는 갔다. 처가 없는 생활, 그건 죽엄의 생활이었고나! 오늘 절실히 느꼈다. 세상에 의지했던 것이 싫거나 좋거나 내 처였다는걸 이제 생각하니 내 처에게 너무 무관심했고 너무 고생시켰어.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나의 처는 날 원망할지도 모른다. 이 뒤에 벌어지는 최태원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그렇게 재미있거나 설득력 있지는 않다. 하지만 시나리오 리딩에서 굳이 이 부분에 집중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김 형사의 가족 묘사(“난 이제 더 못먹겠어. 배가 부르니 대통령두 부럽지 않어!” 같은 대사를 하는 형사 아들 연기는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나 석원근 가족의 묘사는 건질 게 많을 것이며 여러 의미로 빵빵 터질 대사들도 많다. 그리고 김 형사 역의 배우에겐 앞으로 정복해야 할 수많은 독백들이 남아있다. 그의 마지막 대사도 독백이다. “내버려 두자, 울어본 사람이...” 하지만 이것까지 다 읽어줄 필요는 없겠지. 시나리오의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