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타리의 미소
- 감독
- 이형표
- 제작년도
- 1965
- 출연
- 김희갑, 신성일, 태현실, 황정순, 강문, 한은진, 주선태, 박옥초, 장혁, 박기수, 추석양, 김칠성, 이상사, 송상균, 한선, 박복남, 양훈, 강계식, 안성기, 박종훈, 장훈, 최재호, 목시찬, 이성일, 이예성
<플란다스의 개>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질문. 영화평론가와 아닌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때는 비평의 태도로 영화글을 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비평’의 의미를 정의해보려고 했고, 내 안에서만 작동하는 매우 보수적인 기준을 세워보려 했던 시절도 있었다. (《씨네21》이나 《부산일보》 등 매체에서 평론상을 받고 등단한 사람? 적어도 영화 관련 전공 대학원 석사 이상 학위를 소지한 자?) 요즘은 그냥 본인을 영화평론가라고 지칭하느냐 마느냐, 에 달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보기엔 쓰는 글에 차이가 없는데 누군가는 “어이쿠, 제가 감히? 어떻게? 영화평론가인가요? 그냥 리뷰어, 리뷰어!”라고 손사래를 치고 누군가는 영화평론가라고 본인을 수식하며 강연을 다닌다. (이것을 자신감의 차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그런데 영화평론가는 ‘영화력’의 등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 아니었나. 이를테면 내가 이른바 언론고시를 준비했었고 ‘취재’를 직업적 정체성으로 생각하며 12년 동안 일했던 사람인지라 스스로를 ‘기자’라고 먼저 정의하는 것처럼. 어찌 됐든 자아 성찰 끝에 스스로를 ‘영화평론가’라고 지칭할 근거를 찾고 주변에서도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는 사람들, 이라고 얼렁뚱땅 정의를 내린 후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한국에서 ‘영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은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비평가의 정체성이나 비평의 의미를 논하는 글이 아닌,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취미로 영화평론을 한다면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 브런치에 글을 올리거나 뉴스레터를 발행해도 되겠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매체를 확보하는 것이 권장된다. 영화 잡지가 여럿 존재했던 전성기(너무 아득해서 역사책에 나오는 얘기 같다)를 지나 지금은 비평을 실을 수 있는 매체가 얼마나 있는가? 그러니까 이 시장이 충분한 독자층을 갖고 있나? 구독 매출만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기성 지면 매체는 결국 광고 없이 생존할 수 없다. 영화 관련 지면에 가장 많이 들어올 법한 광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영화다. 광고 집행을 결정하는 광고주 그리고 그들이 파는 영화를 비평하는 글이 실리는 매체의 협력 때로는 신경전은 그 역사가 참 유구해서 새삼스럽게 언급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그 와중에 영화 시장은 어려워지고 마케팅 트렌드가 급변했으며 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다. 멋진 독립 잡지들을 기획하고 발행하는 업계 동료들은 매체의 딜레마와 극장 산업 하락세, 비평의 위기 속에서 나름의 전략을 갖고 비평이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창구를 확장해 가고 있다. 늘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다. 영화평론가를 꿈꾸는 어느 20대 학생에게 “글만 쓰면서 먹고 살 수 없다”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더니 “관객과의 대화(GV)를 다수 진행하며 커리어를 키우고 싶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냉정하게 계산해 보겠다. 영화글과 GV 모더레이터 활동을 병행하는 것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매달 원고지 200자 기준 70~100매의 원고를 쓸 수 있는 (원고료를 후려치지 않고 입금이 밀리지도 않는) 안정적인 지면이 마련되어 있고 매달 5~10개의 GV를 진행해야 한다. 그러면 최저 임금 수준의 돈을 벌 수 있다.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매체든 GV든 이미 탄탄한 네트워크를 만든 선배들과 한정된 자리를 갖고 경쟁해야 하는 것도 명심할 것. 이 와중에 진행비를 안 받거나 최소한만 받고 하겠다는 더 유명한 사람이 나타나면 나라도 그 사람에게 맡길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자기 PR’의 기회로 삼아 방송 출연 기회까지 가닿는다면 돈벌이 면에서 나아질 수 있다. 당연한 소리지만 방송 출연료가 원고료나 모더레이터 진행비보다 들이는 시간 대비 수입이 높다. 방송 경험을 인정받아 안정적인 방송인으로 활동할 수 있다면 ‘영화평론가’여도 나름 괜찮은 수입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고정 방송 스케줄이 존재하는 영화평론가나 기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 떠올려보길 바란다. 요즘 영화 자체가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GV 문화가 사라진다면? 지금이야 존재하지만 딱히 대체할 마케팅 방식을 찾지 못해 지속되는 것일 뿐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안다. 나는 모더레이터 일을 병행하는 사람 중에 “언젠가 이 시장이 사라질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방송 출연 스케줄이 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말한다. 그밖에 대표적인 부업으로는 대학이나 교육기관 강연, 영화제 심사 등등이 있다. 그렇게 믿을 구석 없는 프리랜서는 알아서 경력 쌓고 인맥 만들고 일거리를 따와야 한다.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배들은 비평 기고, 모더레이터, 교육기관 강연, 영화제 심사가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멋지게 개척했다. 역시 저 정도 기획력과 추진력이 있어야 오래오래 살아남는 걸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아, 한 가지 확실한 길이 생각났다. 바로 영화과 교수가 되는 것이다. 본업은 교수, 부업은 평론가라니, 할 수만 있다면 갖고 싶은 부러운 삶이다. 그러려면 석박사 학위부터 필요하겠지? 물론 쉽지 않다. 십 년 전쯤 “다 때려치우고 뉴욕의 모 영화 학교나 갈까?” 하고 정보를 알아볼 때 억대 학비와 생활비가 들어간다는 그 학교에 이미 다니고 있는 학생이 “여기 한국인이 되게 많고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그럼 우리끼리만 해도 경쟁률이…. 저요? 요즘 《씨네21》 영화평론상 준비하고 있어요”라고 말해서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석박사 학위, 그리고 꽤 많은 돈이 깨지는 유학 경력만으로 보장되는 것은 없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잘 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 플란다스의 개 >(2000)였다. 예술가보다는 인문대 시간 강사가 영화기자 및 평론가의 상황과 비슷해서라기보다는, 극중 캐릭터들이 처한 곤궁과 선택이 닮아서였다. 윤주( 이성재 )는 “여성들이 원하는 배우자의 직업 순위 48위 광부, 49위 농부”보다 순위가 낮은 “50위 인문계 대학원생”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인문대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지만 교수 임용이 되지 못해 경제적으로 아내에게 의지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내 개 짖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린 그는 결국 강아지들을 납치해 감금 혹은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 시작하는데, 정작 임신한 아내가 반려견을 집에 데려온다. 아내가 애지중지하는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가 실수로 잃어버린 후 윤주의 입장도 달라진다. 아파트 경비실 경리 현남( 배두나 )과 함께 강아지를 찾아 헤매던 그는 마지막 남은 양심을 걸고 자신이 독거 할머니의 강아지를 죽인 범인이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만취한 현남은 알아채지 못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한국의 일상적 공간에서 장르성과 정치 역학을 포착한 뒤 치밀하게 때로는 분방하게 교차해 온 봉준호 감독의 인장을 일찌감치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복도식 아파트, 지하실, 경비 사무실은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의 가능성을 시험할 수 있는 무대이자 한국 소시민 사회의 축소판이다. 현남은 사회 정의 실현으로, 윤주는 명예와 물질적 보상으로 일종의 신분 상승을 노리지만 완벽히 실현되지 못한다. 공교롭게도 현남에게는 명예와 물질적 보상이 부족했고, 윤주는 윤리를 저버린 타락한 소시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남의 행위는 대가가 허무했고(할머니가 남긴 건 무말랭이가 전부다) 그의 영웅적 행위는 널리 알려지지 못한다(그는 인터뷰에 응하지만 TV 뉴스는 그의 존재를 지운다). 강아지를 구한 자신의 인터뷰를 편집한 TV 뉴스에 실망한 현남은 아파트 경비실 경리직에서도 근무 태만으로 해고되고 친구와 함께 산으로 도피한다. 윤주는 아내가 퇴직금으로 마련한 천오백만 원을 뇌물로 바치면서 교수 임용에는 성공하지만, 마지막 양심 고백이 가닿지 못해 윤리의 최저선을 방어할 기회를 무산시킨다. 현남과 윤주 새로운 영화 담론을 제시해 사유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비평의 욕망에는, 이런 행위가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을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시킬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가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비평의 자리가 좁아지면서 나의 행위가 누구에게 전해지고 있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직업적 자아실현과 ‘먹고사니즘’이 충돌할 때 우리는 때로는 타협한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A지만, 꾸준히 A를 할 수 있는 미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B와 C까지 하는 것이라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생계 압박이 낳은 조바심이 내가 설정한 하한선을 위협할 때, 아니 그 하한선을 어디까지 더 내려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찾아온다. 영화기자와 영화평론가의 현실적 고민은 대체로 윤주와 현남 사이를 오간다. 그래도 윤주의 선택이 현실에 가깝다고 자조하기보다는 현남의 소우주에서 싹튼 정의감이 소소하게라도 이어졌으면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런 성향의 인간이라 아직 좋은 글과 좋은 영화가 주는 성취감을 믿고 악착같이 붙잡고 있다. 임수연(영화기자) l 어렸을 때는 물리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 영화기자가 되어 있었다. 《씨네21》에서 영화를 포함한 미디어 업계 전반을 취재하며 다양한 심층 리포트를 써왔다.
올해도 열 편을 뽑았는데, 한국 영화가 다섯 편, 외국 영화가 다섯 편이다. 아홉 편이 극영화이고 한 편은 다큐멘터리다. SF는 세 편,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작품이 세 편 또는 네 편이다. (< 수라 >의 주인공을 누구로 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단 다큐멘터리인 <수라>를 뽑았다. 좋은 영화이기도 했지만 의무감을 느낀다. 올해 나온 영화 중 더 이상 우리가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켜 생각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는 걸 <수라>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있을까. < 당나귀 EO >와 < 다섯번째 흉추 >는 모두 비인간 주인공이 인간사회를 떠돌며 겪는 여정을 그린다. <당나귀 EO>가 < 당나귀 발타자르 >의 보다 발랄하고 화려한 버전이라면 (그렇다고 결말의 가차없음과 서글픔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다섯번째 흉추>는 매트리스에 붙어 살면서 인간의 감정과 기억을 뽑아 먹으며 결국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 변신해가는 곰팡이가 주인공이다. 두 작품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좋은데, 나로서는 <다섯번째 흉추>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장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단 가장 많이 본 영화이기 때문일까. OTT에 들어온 뒤로 거의 배경음악처럼 틀어놓은 영화이다. < 아니말리아 >도 여정에 대한 이야기다. 아무리 생각해도 외계 종족의 접촉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세상에서 임산부 주인공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정 중 인간이 당연시하는 모든 것들의 우선순위가 파괴되는데, 정말 내 취향의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 A.I. 소녀 >는 아슬아슬하지만 단단하기 짝이 없는 하드 SF다. 인터넷에서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들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A.I.가 서서히 인격을 갖고 성장해간다. 이 장르 특유의 판타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의 압도적인 치밀함과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아름다움은 결코 가볍지 않다. < 플라워 킬링 문 >은 스콜세지의 첫 서부극이다. 아마도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미국 영화사에 대해 빠삭한 이 노장이 이 장르에 대한 존경과 원죄의식이 빽빽하게 차 있는 이 네 시간에 가까운 영화를 보며 압도되지 않기는 힘들다. 단지 미국 선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거칠 수밖에 없는 당사자성에 대한 논의를 피해가기는 어렵다. < 지옥만세 >는 올해 내가 본 한국영화 중 가장 신나는 모험담이다. 그리고 이 모험담의 재료는 내가 질색하는 것들, 그러니까 학교 폭력, 집단 따돌림 그리고 종교와 같은 재료를 갖고 만들어졌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발랄한 결과물이 나왔다니, 볼 때마다 신기하기 그지 없다. < 너와 나 >는 올해 한국 영화 중 최고의 로맨스다. 화사한 청춘 코미디이기도 하지만 가장 비극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기만적일 정도로 소박하고 단순한 재료들로 만들어졌지만, 이 영화처럼 교묘하게 관객들의 마음을 후벼파는 작품도 많지 않다. 나머지 두 편은 창작자에 대한 영화다. < 어파이어 >와 < 비밀의 언덕 >. 두 편 모두 창작자라는 인간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이기적이고 치사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둘 다 재미있는데, 비교해 보면 <어파이어> 쪽이 훨씬 편안하고 즐겁게 볼 수 있다. 아무래도 독일인 백인 남자 작가에게는 충분한 거리두기가 가능하니까. 하지만 <비밀의 언덕>을 볼 때는 그게 좀 어렵다. 이지은의 <비밀의 언덕>은 내가 올해 본 한국 영화 중 두 번째로 힘들게 본 작품이다. 첫번째는 < 서울의 봄 >이고 이 영화를 보면서 왜 괴로워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다. 다행히도 <서울의 봄>의 고통스러움과는 달리 <비밀의 언덕>의 고통스러움은 재감상 때는 많이 사라지는 종류다. 초등학교 5학년생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다. 하지만 주인공 명은은 결코 안전한 아이가 아니다. 일단 이 아이를 따라가기 시작한 관객들은 러닝타임이 10분을 넘기기도 전에 ’큰일났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 수 없다. 시작부터 경고음이 들린다. 명은은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다. 거짓말쟁이에도 종류가 있고 등급이 있는데, 명은은 그 중 가장 까다로운 부류이다. 일단 이 아이는 영화 시작부터 부모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시장에서 일하는 부모가 부끄러워 가상의 중산층 부모를 창조해낸 것이다. 그냥 거짓말만 하는 게 아니라 스파이처럼 가짜 가족 앨범까지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명은이 다니는 1996년 수도권 소도시 초등학교라는 시공간에서 부모의 계급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도 아니다. 단지 명은에겐 가족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 이 아이에겐 현실이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현실을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 대부분 관객들은 명은과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심각한 서스펜스를 경험하게 된다.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작은 동네에서 거짓말은 쉽게 숨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명은은 여러 면에서 우등생이다. 그건 기준을 세워놓으면 최선을 다하는 아이의 성격과도 연결되어 있다. 아이는 여러 모로 좋은 반장이다.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추진력 있고 부지런하며 무엇보다 리더 자질이다. 아이는 좋은 작가이기도 하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열심히 준비를 하고 열심히 글을 쓴다. 통일에 대한 글을 쓰라는 과제가 주어지면 명은은 혼자 판문점까지 가서 직접 견학을 한다. 후반에 가면 아이가 표절을 한 것이 아니냐고 몇 초 동안 의심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짓말을 했다면 모를까, 표절은 명은이 절대로 하지 않을 일 중 하나다. 단지 아이에겐 상한선이 있다. 아주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 불안불안 위태롭게 유지되던 명은의 우주는 학교에 혜진과 하얀이라는 학생들이 전학오면서 흔들린다. 교장선생님은 이 아이들에게 될 수 있는 한 평범한 배경을 주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아이들은 그 주어진 허구를 가볍게 하나씩 깨트린다. 평범한 집안의 이란성쌍둥이로 소개되었지만, 아이들의 엄마는 유흥업소 사장이고 하얀은 업소 직원의 딸이다. 명은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숨겼을 사실인데, 혜진과 하얀은 이를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기네 삶을 소재로 글짓기를 하는데, 이들이 별 노력없이 쓴 글은 명은이 판문점까지 가서 취재한 글을 가볍게 넘어선다. 명은의 질투심은 하늘을 찌른다. 자연스럽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 대한 오래된 전설이 떠오른다. 전설이라고 한 건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다룬 < 아마데우스 >는 옛 헛소문에 기반을 둔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천재와 범재로 딱딱 맞아 떨어지는 단순한 세계의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명은과 혜진 & 하얀의 관계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명은이 은근슬쩍 혜진을 사보타지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세 아이는 곧 친구가 된다. 무엇보다 명은은 두 아이의 작가로서의 능력과 인간적 매력을 알아보는 소수이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이야기가 아니냐고? 아니라니까 그러네. 여기서부터 영화는 명은의 작가로서의 성장을 보여준다. 아이가 엄청나게 정신적으로 성장했다는 게 아니다. 단지 아이의 세계관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추구해왔던 전략과 목표 상당수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좋은 글에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대범함과 솔직함도 필요하다. 그리고 영화가 배경인 1990년대 중반은 정말로 이런 글이 먹힐 수 있는 시기이다.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명은은 혜진 & 하얀 콤비와 같은 수준의 글을 쓸 수 있다. 이미 작가로서 꾸준한 훈련을 해왔던 것이다. 단지 전략만 수정하면 된다. <비밀의 언덕>에는 천재와 범재를 구분하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없으며, 평범한 작가의 노력도 인정을 받는다. 아니, 명은도 평범한 작가는 아니다. 학교 글짓기를 위해 판문점까지 가는 부지런함,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글을 쓰는 집요함도 재능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가장 정직하면서도 특별한 지점은 명은의 정신적 성숙이 좋은 작가가 된 이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보통 창작자에 대한 이야기는 반대의 순서를 따르기 마련이지만 영화는 그런 판타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훌륭한 예술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은 기본적으로 기술이며 아무리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만든 창작자라도 여전히 그냥 개*#₩일 수 있다. 아니, 그 개*#₩는 사람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개*#₩이기 때문에 더 위험한 개*#₩다. 하지만 명은은 성장한다. 갑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경멸했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랬다면 좋은 작가도 못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쓴 글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 자신의 기술적/예술적 성취가 늘 우선순위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주변의 결점있는 우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명은은 작가가 되었을까. 명은을 연기한 주연배우 문승아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려고 한 것부터가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혜진을 따라하고 싶어서였기 때문에. 이 단계를 거쳐 성장했으니 더 이상 글을 쓸 이유가 있을까? 멋진 캐릭터 해석인데, 나는 다른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타고난 글쟁이인 혜진과 하얀은 자신의 삶에서 밑천이 떨어지면 그냥 글을 멈출 수도 있다. 하지만 명은과 같은 작가는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 컬쳐캡미디어 감독: 김호준 | 각본: 유순일 | 각색: 조중훈 김요석 | 제작: 최순식 | 촬영: 서정민 | 미술: 윤도환 | 음악: 히드라 CAST 박상민: 김래원 | 서보은: 문근영 | 보은 조부: 김인문 | 상민 부: 한진희 | 상민 모: 김혜옥 | 보은 부: 송기윤 | 보은 모: 선우은숙 | 혜원: 신세경 | 동구: 류덕환 2004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은 무엇이었을까요? < 실미도 >( 강우석 , 2003)에 이은 두 번째 ‘천만 영화’ < 태극기 휘날리며 >( 강제규 , 2004)였습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1위였죠. 당시 충무로가 만들 수 있는, 아니 당시 충무로의 수준을 뛰어넘는 대단한 작품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2위는 어떤 영화였을까요? 놀랍게도 < 어린 신부 >였습니다. 비수기인 4월 초에 개봉한 이 영화는 전국 관객 315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권상우 를 스타덤에 올린 < 말죽거리 잔혹사 >( 유하 , 2004), 정우성 손예진 의 < 내 머리 속의 지우개 >( 이재한 , 2004),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 < 범죄의 재구성 >(2004), 류승완 감독의 액션 판타지 < 아라한 장풍 대작전 >(2004), 원빈 신하균 의 < 우리 형 >( 안권태 , 2004), 강동원 조한선 의 < 늑대의 유혹 >( 김태균 , 2004)... 이 모든 영화들을 <어린 신부>가 제쳤고, 당시 대한민국은 ‘국민 여동생’ 문근영 신드롬으로 들끓었습니다. <어린 신부>는 24살 대학생 상민과 16살 여고생 보은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보은의 할아버지는 꾀병을 부려, 죽기 전에 보은이 상민과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하죠. 그렇게 ‘어린 신부’는 탄생합니다. 촬영 공개는 바로 그 결혼식 신이었습니다. 촬영이 공개된 날은 2003년 12월 17일이었습니다. 청담동에 있는 어느 결혼식장이었는데요, 날씨가 엄청 추웠습니다. 배우들은 촬영이 없을 땐 추위를 막기 위해 두꺼운 옷을 입어야 했죠. \ 현장에서 짬이 날 때 전화 통화를 하는 문근영의 모습입니다. 당시 문근영은 실제로 극중 나이와 같은 16세였고, <어린 신부>의 리얼리티는 배우와 캐릭터의 연령대 일치에서 생겨난 셈입니다. 김래원도 캐릭터와 같은 연령대였고요. 문근영이 주로 부각되었지만, <어린 신부>가 성공할 수 있었던 토대엔 분명 김래원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있습니다. 당시 TV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로 승승장구 하던 김래원은 <어린 신부>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남자 주인공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게 되죠. 신부 입장을 기다리는 문근영의 모습입니다. 영화 속에서 하객들이 “예쁘다, 정말 예쁘다”라며 감탄하던 그 장면이죠. 당시 문근영은 TV에서 영화로 옮겨 오면서 < 장화, 홍련 >( 김지운 , 2003)으로 영화배우로서 자리를 굳히던 시절이죠. 그리고 <어린 신부>가 이어집니다. 사실 <장화, 홍련>의 수연과 <어린 신부>의 보은은, 극과 극의 감정을 필요로 하는 캐릭터죠. 1년 사이에 그 극단을 오가는 건 10대 중반의 배우에겐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문근영은…… 그 어려운 걸 해냅니다. 이 영화의 모든 사건은 바로 보은의 할아버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인문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특유의 구수하면서도 정다운 연기가 이 영화에서도 관객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죠. 이 영화에서 양가 부모 캐릭터는, 주로 TV에서 활동하시는 중견 연기자들이 맡았습니다. 상민의 아버지는 한진희 씨, 어머니는 김혜옥 씨가 맡았습니다. 곧 있으면 신혼 여행을 떠날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충고를 하지만, 아들은 듣는 둥 마는 둥이네요. 보은의 엄마 역은 선우은숙 씨가 맡았습니다. 아직 어린 딸이 안쓰럽기만 한 표정입니다. 대신 상민의 엄마는 며느리가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어린 신부>는 김호준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일본에서 영화를 전공한 김 감독은 1990년대 초부터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했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 축제 >(1996), 이정국 감독의 < 편지 >(1997) 등을 거쳐 10여 년의 도제 시스템 끝에 자신의 첫 영화를 만들게 되었죠. 한편 카메라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서정민 촬영감독이 잡았습니다. 지난 번 < 몽정기 >( 정초신 , 20002) 포스팅 에서 자세히 설명 드렸던, 바로 그 분입니다. 촬영 당시 70세셨고, 2015년에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영화 속에서 결혼식은 보은의 수학여행 날에 치러집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보은의 결혼 사실을 모르죠. 단, ‘베프’인 혜원은 예외였는데요, 당시 14세였던 신세경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문근영보다 어린 유일한 배우? 당시 두 사람은 같은 소속사(나무 액터스)였는데요, 지금도 그곳에 함께 있네요. 상민의 선배인 지수 역은 김보경 이 맡았습니다. < 친구 >( 곽경택 , 2001)의 진숙 역으로 떠오른 그녀는 이 영화에 특별 출연을 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양가 부모가 딸과 아들을, 며느리와 사위를, 배웅합니다. 보은 아빠 역은 탤런트 송기윤 씨가 맡았습니다. 선우은숙 씨 옆에 보은의 동생 동구 역을 맡은 류덕환이 보이네요. 실제로는 문근영보다 한 살 많은 오빠지만 영화에선 동생으로 등장했습니다. 아담한 웨딩 카. 그리고 그 안의 신혼 부부입니다. 실제 촬영 때는 아니고 차 안에서 대기하는 모습입니다. 결혼식 신에 대해, 김래원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거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신”이라고 말합니다. 한편 문근영은 “어떤 마음으로 연기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편하게 촬영한 신”이라고 말합니다. 호기심 많은 성격인 보은이 ‘결혼 그 자체’만 생각하고 있다는 설정이었다고 하네요.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