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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 기수(애기별들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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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 기수(애기별들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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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 기수(애기별들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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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loquence of Shadows Pedro Co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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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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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수업료: 12월의 영화 II
< 수업료 >( 최인규 , 방한준 , 1940)는 종소리로 시작하고, 흥겨운 농악을 마지막에 배치한다. 주인공 영달 ( 정찬조 )은 <애마진군가> 노래를 부른다. 종소리 전 오프닝 크레디트 시퀀스에선 오케스트라 연주가 배경음으로 나오고, 아이들이 공을 차며 내는 함성이 종소리에 연이어 들린다. 이러한 “음향경(사운드스케이프 soundscape)”은 규율과 군가와 카니발의 병치와 이접이라는 그로테스크 무드를 조성한다. 마을 농악대의 신명 들린 소리가 이런 음향경의 구성을 끝부분에서 전환시킨다. 교실에서 학생들에 내는 소음까지 더하면 영화는 소란과 함성, 군가를 마지막 농악으로 슬쩍 전환시키는 셈이다. 서사를 끌고 가는 것은 3개월 밀린 수업료다. 내야 할 것을 아직 내지 않았거나 내지 못한 미납 상황. 주인공이 초등학교 4학년이고 아픈 할머니는 지불 능력이 없고 장사하러 마을을 떠난 부모도 기별이 없다. 궁핍한 아동이 처한 이러한 상황은 쉽게 눈물로 얼룩질 수 있다. 소위 “친일국책영화” <수업료>는 그러나 눈물 이상의 것을 영화에 주입한다. 아동 영달은 “고귀”하다. 할머니( 복혜숙 ) 끼니를 챙기느라 자신은 밥을 굶는다. 효심이 지극하다. 애 어른이다. 이 영화에서 고귀한 것은 영달만이 아니다. 주 공간인 수원의 풍경과 장소, 자연이 고귀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영달과 할머니가 살고 있는 누추한 초가집 뒤 우아한 가지를 내린 소나무 두 그루 , 키 큰 나무들로 은성한 언덕, 수려한 그림자, 그리고 내지 일본의 거울 이미지로서의 제국 외지, 반도 학교의 질서, 집단체조 하는 학생들에게 보내는 영달의 경탄의 시선 등이 미장센의 우아한 기조다. 가난과 고귀의 이러한 이중주는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과 조선의 지정학적 이분법인 내지와 외지를 견지시켜 주지만 동시에 위계적 비대칭성에 부딪힌다. 영화에서 혼용되는 국어(당시는 일본어)와 반도어(조선어)는 내선어, 내선일체를 이루는 듯하지만, 일본 내지에서 검열의 문제등으로 <수업료>의 개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종화는 그 이유 중의 하나로 내선일체 구호와는 달리 조선인 소학교는 일본 내지의 학교와 달리 의무교육이 아니라는 점이 이 영화가 제출한 모순이라고 설명한다. 일본인 교사의 배려의 근간에는 내지와 외지의 의무 교육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선교환의 기획 영화로서의 <수업료>는 일본 영화인들을 시나리오, 음악, 배우 등으로 기용 내지 수출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내선교환이 내지 상영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나, 이 영화가 시도하는 것은 외지 조선의 풍속을 담은 지역성의 매핑과 재현이다. 내지를 위해 외지를 조망하고 지역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수업 시간 마을의 빨래터, 거리의 금붕어 장사, 영달의 부자 친구 한옥의 실내 . 무엇보다도 수원의 풍광과 수원에서 평택으로 갈 때의 신작로, 골목길들. 내지를 위한 외지의 동형성과 이국성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고귀함’의 속내다. 영달이 처한 상황은 궁핍하나, 주변, 통과하는 장소, 목적지의 장소들은 아름답고 풍속은 온화하며 사람들은 온정적이다. 영달의 가난은 오히려 이 식민지의 예외적 사례로 제시되며, 일본인 담임선생과 조선인 이웃( 김신재 ) , 친척의 도움으로 이 문제는 해결된다. 내지와 외지, 제국과 식민지의 문제는 영화 초반부 4학년 교실의 제국 일본과 조선의 지도, 조선 전도 등이 보여질 때 강조된다. 영달이 수원에서 평택으로 갔다가 다시 수원으로 돌아오고, 아버지, 어머니( 문예봉 )가 장사 때문에 마을을 떠났다 귀환할 때, 그 이동성이 일본 제국 지도의 외지 조선의 동역학(kinetics)이라면, 이러한 운동이 동시 녹음 영화 <수업료>에서 마을 농악대의 몸짓, 소리에서 폭발하거나 수렴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내/외, 제국/식민지의 비대칭성이 사운드와 이미지의 벡터와 변곡점을 슬쩍 전환해내는 것이다. 아니면 외지, 마을 공동체의 에너지까지도 중일 전쟁, 대동아 전쟁으로 포섭물인가? 원작에 있던 전쟁 이야기가 영화에서 지워지면서, 해석은 전환으로 갈 수 있다. >> 수업료 VOD 보러가기 <<
[초이스]사슴꽃
드러난 물질성 핀 스크린 애니메이션이라는 게 있다. 정확히는 그런 기법이 있었다. 수많은 핀들을 꽂아서 만든 캔버스에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핀을 눌려 일종의 자국을 만들고, 거기에 적당한 조명을 쏘아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기법(인간 손의 흔적을 빛이 그린 그림자로 완성하는 오묘하고도 신비로운 기법)이 있었다. 경외감마저 불러일으켰던 핀 스크린의 마법은 많은 부분이 핀들과 핀들 사이에 켜켜이 쌓인 빛과 그림자들이 만들어낸 대상, 즉 물질의 표면이었다. 이런 걸 ‘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에서 물성이라는 것은 사실 모더니즘 시대를 풍미했던 구태의연한 논의였다. 이미 예술은 개념으로 전환으로 물질성을 넘어서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이 물질적 속성이라는 것이 결국 예술 장르의 구분 짓기라는 점, 또는 예술 표현 수단의 가장 작은 단위(예를 들어 점, 선, 면, 색채 등)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예술의 테제, 또는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가치가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셀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모든 이미지가 대상을 추상화하여 그려진 이미지라는 점에서 대상 자체의 직접적인 물질성을 언급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셀 애니메이션에서의 이미지는 그려진 ‘평면’ 이라는 물질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에 더욱 방점을 두어야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의 경우 제작 방식에 있어서는 이미지를 적층시켜 환영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물질성이 드러나지만, 그것이 서사나 플롯 구성에서 잘 드러나진 않는다는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보자면, 전통적인 실사영화도 마찬가지다. 분명 실사영화도 카메라는 대상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물질성을 획득하고 있지만, 그것이 문학적 서사 내부에 들어오면서 물질성은 증발되고 캐릭터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적어도 애니메이션이든, 실사영화든 극영화의 영역에서는 대상의 물성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밌게도 애니메이션의 제작 기법과 양식에 대한 분류에 ‘오브제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대부분의 발전적 애니메이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인데, 찰흙(클레이), 돌무더기, 심지어는 동물 사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질들이 애니메이션의 오브제로 사용되고 있다. 이때 많은 작품들의 성격이나 테제는 이 오브제의 특성으로부터 기인한다. 예컨대, 오브제로서 클레이는 비정형적이고 플라스마 적 물성, 돌이나 금속은 강인함과 거친 물성, 종이는 평면과 구겨짐과 같은 물성을 이용한다. 때문에 발전적 애니메이션에서의 오브제의 물질성은 작품 내에서 잘 봉합되고, 숨겨지고 감추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작품이 드러내는 속성들은 서사보다는 이미지를, 캐릭터보다는 오브제와 대상의 물질성을, 이음매 없는 유려함보다는 봉합의 흔적을 드러냄을 중요시하게 된다. < 사슴꽃 >도 이러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 사슴꽃 > 이음매 없음과 봉합 김강민 감독의 < 사슴꽃 >은 전작 단편 작품인 < 38-39°C >와 동일한 스톱모션 작품으로, 전작에서 쌓아 올린 이미지의 병렬세계를 더욱 견고하고 농밀하게 작업하였다. 예를 들면, 두 작품은 모두 과거의 한 단편적 기억으로부터 직조되었는데, 전작은 과거 한 지점의 목욕탕에서 아버지와의 기억을 소환하였다면, <사슴꽃>은 한 소년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소위 ‘보양식’의 최초 흡혈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 여기서 대체로 기억을 구축하고, 구술하는 순간에 등장하는 독특한 이미지들의 나열은 각 작품들의 중심이미지라 할 수 있다. 특히 두 작품 모두에서 백미라고 할 수 있는 ? 일종의 마음의 변화, 즉 정동(情動, affect)의 순간과, 이때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의 병렬은 주로 평면과 입체, 빛, 추상적 이미지들이 교차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일군의 성장담, 또는 오이디푸스 과정처럼 보이는 이 두 작품들이 스톱모션(발전적 애니메이션)의 입체 공간에 형이상학적인 평면 이미지들을 교차시켜 그 자체가 주요한 표현 수단으로 된 것이다. 이 두 작품이 실험 영화적인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는 예의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 사슴꽃 >에 등장하는 대상들을 살펴보자. 무엇보다 캐릭터들이 전작의 컷 아웃 방식의 평면이 아닌 입체의 모양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물들이 3D 프린터를 이용해 출력된 것임을 쉽게 알아챈다. 표면들은 정리되지 않고 적층된 플라스틱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각각의 표면의 ‘결’들은 그곳에 떨어진 조명을 표면에 의해 여러 층위로 난반사 한다. 요즘의 3D 프린터들이 첨단(cutting edge)의 느낌을 위해 표면을 매끄럽게 만들려는 노력이 무상하게 말이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두드러진 것은 표면들에 거칠게 드러나는 이음매들의 등장이다. 많은 부품들의 결합으로 구성된 캐릭터들은 각진 표면에 수채화로 그려진 종이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들 각 부분들이 겹합된 부분은 여전히 여백으로 남아있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이나, 디지털 영화에서 각각의 캐릭터들은 실재와 구분이 되지 않게 이음매를 지우고 매끈한 형태로 만들어, 이것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을 추구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만들어진 대상’임을 오히려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봉합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들 봉합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좋은 예술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음매 없이 만들어져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천의무봉은 대상의 본질을 지움으로써 그 자체로 은폐한다. 하지만 이음매를 드러내면 그것이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예컨대, 이음매가 드러난 곰 인형은 천과 솜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아는 것처럼 대상의 이전 상태를 드러낼 수 있다. 영화가 봉합을 하지 않고 이음매를 드러내면 영화가 기인하고 있는 현실 세계가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대상을 카메라 앞에서 드러내면서 대상의 물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것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지닌 강점이다. 이는 대상이 어떤 상태로 그려지는가에 문제이기도 하면서 작품이 무엇을 재현하는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많은 스톱모션/오브제 애니메이션은 생명이 없는 사물의 움직임, 움직이고 있는 죽음(좀비/죽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은 움직임)을 재현하고 있다. 이것 역시 애니메이션의 주요한 특성 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죽은 사물이 등장하는 곳에서 이음매를 드러낸 사물들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여기서 애니메이션 이전의 상태, 즉 사물의 움직임 이전의 움직임인 애니메이터의 존재 또는 애니메이터의 손과 만나는 것이다. 물질의 표면에서 느껴지는 감각들, ‘결’을 느끼는 것은 단순한 시각적 이상의 것이다. 우리가 잘 봉합된 CG의 매끈함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들, 삐뚤삐뚤 그려진 이미지와 지문이 남겨진 클레이, 실재 광원에서 떨어지는 빛, 먼지들의 가라앉은 작은 세트에서 묘한 감각을 느끼는 것은 이음매들이 주는 존재의 함성과 결, 즉 작가의 손과 퍼포먼스 때문일 것이다. * 작품링크 : https://vimeo.com/219692884
[2주의시네마테크]그림자들의 함성, 페드로 코스타 - <반다의 방> <행진하는 청춘>
페드로 코스타 감독은 영화 문법이나 장르 관습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세계를 짓는 방식에는 흐트러짐이 없이 엄격하다. 여느 극영화들처럼 유려한 서사를 펼치지도 않고 많은 다큐영화들처럼 한껏 사건을 고발하지도 않으며, 그 둘의 경계 어디쯤에 선 그의 영화는 거기에 더해 인공조명 없이 어두운 화면과 독백에 가까운 대사들과 함께 정보를 한정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역설적으로 리스본 폰타이냐스 지역 빈민가의 이야기를 매우 치열하고 가깝게 전하고 있으니 보다가 문득 미스터리를 느낄 지경이다. < 반다의 방 >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반다의 방은 상당히 견고하다. 아무도 그 방을 건드리지 못할 것만 같다. 끊임없이 집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도 반다는 마약과 기침과 대화를 멈추지 않으며 그 견고한 방은 마치 중력을 가진 것처럼 우리를 폰타이냐스에 지속되는 삶으로 이끈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반다의 방이 놀랍게도 우리가 어떤 사회적 삶을 대하는 시선을 바꾸도록 요구한다. 반다의 방 이미지는 그 자체로 빈민가의 역사와 조건을 향해 열리지만 그 삶은 동정이나 사회보호대상으로 어쭙잖게 설명되기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반다와 그 이웃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종류의 감상을 향하지도 않고 말이다. 영화는 관습적 독해의 매개를 떼어내고 도달하는 하나하나의 이미지를 다시 관습적 문법에 기대지 않고 이어 붙여 우리로 하여금 도시 빈민과 그 주체 문제에 있어 해석에 앞선 실질과 마주하도록 한다. 기승전결 육하원칙에 의거한 서사나 정보를 전하지 않는 상태로 우리를 꼭 붙들고 놔주지 않는 이미지가, 나의 감정과 관념을 방해하여 삶의 형태 자체로서 리스본 폰타이냐스 빈민가의 이야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행진하는 청춘 >에서는 주인공 벤투라가 여기저기 출몰하면서 삶에 강제된 역사를 그린다. 벤투라는 그의 이웃들, 즉 공공 지원 주택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나 반쯤 무너진 이전 빈민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아들과 딸의 이름으로 소환한다. < 반다의 방 >에서 반다의 방이 가진 중력처럼 이번에는 벤투라가 출몰하며 만드는 자장이 폰타이냐스 빈민가의 궤적을 인지하도록 열린다. 그중 벤투라와 렌토가 반복하는 일종의 세레나데는 점점 더 무수한 바람과 좌절을 기억하는데, 벤투라의 무표정한 얼굴과 읊조림을 통해 그것은 낭만이나 환상이 아니라 너무나 실질적인 소망이어서 아프고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된다. 문제는 실로 도시정책이나 복지를 넘어선다. 고향을 두고 온 이민자나 불안정한 도시 빈민의 삶에 있어 집이란 여기나 저기나 불가능하다. 그들은 그거 물리적인 주거지 차원을 넘어선 의미에서 어떤 본질로서의 집 있는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로딜데의 탈출, 렌토와 벤투라의 편지 낭독, 이주한 새 반다의 방에 함께 머무는 반다의 딸과 벤투라의 모습 등등 매 장면이 매우 정제되어 있는 만큼 영화는 그들이 꿈꾸는 관계(의 집)에 열중한다. 두 영화에서 집은 중심적인 소재인데, 그들이 기거하는 집의 가난은 물질적인 것을 넘어 그들의 삶 전체를 감싸고 있는 어떤 공백이다. 그 공백 전체에 집 없는 자들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다. 반다의 방과 벤투라의 출몰이 어떤 쉬운 해석이나 감상의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불가지론을 향해 있는 것은 아니다. 페드로 코스타 영화는 리스본 폰타이냐스 빈민가의 공백, 그 가난을 관조하거나 대상화하기를 넘어서 영화적 경험이 그 삶에 좀 더 직접적으로 맞닿을 수 있도록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두 영화 모두 마지막 반다의 방 장면에서 정작 반다는 일하러 나가버린다. 거기에는 반다의 여동생과 이웃 또는 딸과 이웃만이 남아 있다. 반다는 없어도 가족과 폰타이냐스가 한 방에 머무는 한 그곳은 여전히 반다의 방이자 빈민공동체의 희로애락을 지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