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튼소리
- 감독
- 김수용
- 제작년도
- 1986
- 출연
- 정동환, 이혜숙, 허진, 전혜성, 정미경, 국정환, 최준, 강희, 최삼, 이석환, 박혜숙, 조학자, 주상호, 홍충일, 변달수, 박용팔, 최신영, 이만성, 문성재, 박인순, 이설산, 장철, 채승훈, 최성일, 최불암, 정진, 공옥진
한국영화는 탄생하는 순간부터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미 군정기를 거쳐 이승만 정권에 이르기까지 검열의 역사는 한국영화의 역사와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검열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시작되는 사전검열과, 완성된 영화가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구잡이로 자르며 필름을 훼손했던, 가위손이 횡행한 70년대의 유신과 80년대 전두환 정권시절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검열사건은 김수용 감독의 1986년 작품 < 허튼소리 > 사태다. 감독 스스로 은퇴를 선언할 정도로 파장이 컸다. 하지만 정권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사회성을 표방한 많은 영화들이 가위손의 희생양이 되어 언론을 오르내렸다. 이봉원 감독의 1987년 개봉작 < 내일은 뭐 할거니 > 역시 이즈음 검열로 인해 곤욕을 치른 대표적인 영화 중의 한편이다. 사회를 풍자하는 대사가 몇 군데 잘려나간 이 영화는 몇 달 후에 재심을 통해 원본으로 상영이 가능해졌다고는 하지만, 이미 흥행에 크게 실패한 이후였던 터라 더 이상의 화제를 모으지는 못했다. 더불어 기술적으로도 매끈함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럼에도 <내일은 뭐 할거니>는 당시의 일반적인 영화와 비교해 새로운 면이 눈에 띄는 영화다. 충무로라 불리던 제도권의 많은 영화들이 여전히 순결과 전근대적인 도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성의 육체를 선정적으로 다루는 것이 흥행의 제1조건이라 착각하며 진부한 드라마를 반복하고 있을 때, 지하철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만나게 된 남녀 대학생의 한나절만으로 영화를 완성한다. 이봉원 감독은 과장된 기승전결로 관객의 감정을 억지로 증폭시키는 대신, 단순한 공간의 활용과 남녀 대학생의 일상적인 대사 그리고 회상만으로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나름대로 문제 제기를 하면서, 미니멀리즘적인 시도를 통해 스타일 적으로도 차별화를 꾀하고자 했던 것 같다. < 내일은 뭐 할거니 >는 낡은 청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거리를 이리저리 걷고 있는 다리를 지속적으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청바지와 운동화가 청춘의 상징이라면 이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방황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단지 남자애( 강석현 ), 여자애( 정다희 )로만 등장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 시대를 살고 있던 일반적인 대학생들을 표상하고 있는 셈이다. < 내일은 뭐 할거니 >는 남자애의 방황 원인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가를 찾아가는 영화다. 아버지가 부재한 남자애는 청소년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궁금해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와 아들의 나이가 비슷해졌을 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 시절 어머니는 창녀였고, 4.19에 참여하고 쫓기고 있던 아버지와 하룻밤을 보낸 후 자신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어머니는 “더러운 반쪽은 잊고 고결한 반쪽을 찾으라”고 한다. 그 반쪽은 바로 아버지로 상징되는 4.19에 참여했던 세대. 그러므로 남자애의 방황은 80년대 당시 복권되지 못하고 있던 4.19라는 잃어버린 역사를 환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이 호감을 사랑의 관계로 연결하지 못한 채 엇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신과 전두환 정권에 의해 4.19 민주화 운동이 여전히 훼손당한 채 폭동으로 매도되고 있는 이 땅은 젊은이의 사랑이 꽃피기에는 너무 척박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자애는 여자애에게 다가갈 용기를 내지만 둘은 엇갈리고 만다. 여자애는 그 남자애가 타고 떠나는 전철을 바라보며 “바보”, “멍청이”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내일은 뭐 할 거니?”라고 외치며 영화는 끝난다. 그 외침을 남자애는 듣지 못할 것이다. 남자애가 내일도 여전히 거리를 방황할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꿈꿀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매모호한 결말의 괴로움. < 내일은 뭐 할거니 >는 굵직한 주제의 진중함이 느껴지지만, 관객에게 강한 임팩트를 주는 것에는 실패한 영화다. 어쩌면 이봉원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이 너무 많았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극 중 영화촬영 시퀀스는 감독의 초조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장면이 극의 흐름이나 주제와 어울리지 않게 삽입되어 있는 것은 바로 즉 영화 속 영화의 여배우가 하는 말, “영화를 보시는 분들에게 그 뜻이 잘 전달될 수 있을까”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영화가 제대로 이해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영화 곳곳에 흔적이 남는다. 남자애에게 할당된 무거운 주제가 관객을 지루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여자애는 지나치게 단순하게 활용함으로써 인형 이상이 되지 못했다. 여자애가 남자애의 방황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많이 아쉽다. 만약 여자애가 남자애의 방황을 이해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 과정에 동참하게 되었을 것이고, 감독의 의도는 좀 더 쉽게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더불어 이 영화에 직접적으로 4.19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지독한 검열로 감독들의 창의성을 억압하던 그 시절. 감독들은 문제가 될 만한 장면은 스스로 피해간다는 자조적인 소리를 내뱉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상징적으로 처리한 4.19장면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영화는 그저 할 일 없는 청춘의 하루를 그리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봉원 감독은 너무 생각을 많이 했거나 계산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 내일은 뭐 할거니 >는 가장 대중적인 장르의 하나였던 청춘영화를 경유해 사회의 모순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시도가 좋은 영화다. 또한 그 시절의 그렇고 그런 지난한 영화들 속에서 새로운 스타일을 고민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의 모호함 속에서도 내일은 멋진 일을 하겠다는 남자애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강석현 정다희 감독 이봉원 각본 이현화 촬영 서웅 1987년 90분 칼라 판매원 (주)동양프로덕션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0213
해가 바뀌었다. 동서양이 만들어 놓은 새해의 유예기간도 음력 설이 찾아오며 끝나버렸다. 5년을 견뎌야 할 새 정부도 출범했고, 어느덧 찾아온 봄날은 초여름 수준이 되어버렸다. 바야흐로 2013년의 1/4이 술술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새 출발의 봄기운이 살랑거리는 탓일까. 만나는 사람마다 특정 질문이 많아진다. 모든 창작자가 부담스러워하는 바로 그 질문. “다음 작품은 언제 보여주실 거예요?” 물론, 막역하지 않은 감독에게 건네는 만만한 인사치레였을 것이다. 마치 “잘 지내시죠?” 와 같은 관용적 표현이었으리라.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부담스런 말이 아닐 수 없다. 딱히 차기작 제작에 돌입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면 정말,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차기작 구상이라는 핑계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있기는 하지만, 큰 진전은 없다. 전작의 후유증이 아직 남아 있어 좀 더 쉬어야 한다는 변명이 이젠 부끄러울 때도 됐건만, 여전히 남용하고 있다. 남들 눈에는 딱 봐도 천하태평 한량이겠지 싶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10여 년을 해왔던 다큐멘터리 작업 말고 할 수 있는 것도 딱히 없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흐르고, 인생의 궤도를 바꿔 탈 수 있는 여지도 줄어간다. 무슨 배짱이었을까? 무슨 깡이 있어 이렇게 영화 한답시고 살게 되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는 이유는 뭘까? ‘나는 왜 찍는가’에 대한 상념에 빠져있던 중, (남몰래 흠모했던) 친한 선배가 영화 잘 봤다며 선물로 준 책이 생각났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 스스로 ‘MTV 영상 세대’라며 활자와는 담을 쌓고 지낸 나였지만, 거장인 조지 오웰에게 무언가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책을 읽으며 그 선배를 향한 연정을 되새겨 보고픈 마음도 한몫.) 나는 대체 왜 찍는 걸까? 조지 오웰은 글을 쓰는 동기로 남들과 달라 보이고 싶은 ‘순전한 이기심’과 아름다움을 향한 ‘미학적 열정’을 꼽았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대의명분보다는, 유명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유년 시절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물론 훌륭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이었던 것 같다. 물론 당시 생각했던 다른 삶의 롤모델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었다는 점에서 몹시도 허황한 것이긴 했지만.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이 선지자의 창작 동기는 ‘역사적 충동’이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로서의 충동. 이런 충동 덕분에 조지 오웰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다양한 형식의 글로 남겼을 것이다. 그가 글을 쓰며 역사를 남겼다면, 다큐멘터리스트는 영상을 찍으며 역사를 보존하는 사람들 아닐까. < 종로의 기적 >을 만들며 그 누구도 기록하지 않는 종로 게이들의 역사가 다큐를 통해 남겨지길 바랐다. 2010년의 한국에서 성 소수자가 이렇게 생존했음을 후세에 남기고 싶었다. 어디에나 있는 삶이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역사였으니까. 남성중심주의 속에서 외면당했던 여성의 역사가 여성주의자들을 통해 새롭게 발굴되었듯, 성 소수자의 역사를 성 소수자의 시선으로 다큐멘터리에 담아내고 싶었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여전히 배가 고프다. 한술 밥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었다. 남겨야 할 성 소수자들의 삶은 무수한데, 엄혹한 시대를 가로질렀던 선배 성 소수자들의 인생을 그들이 사라지기 전에 꼼꼼히 기록해둬야 하는데, 인제야 역사적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차기작에 대한 열쇠는 내 첫 작품이 쥐고 있었으니, 에둘러 왔지만 이제라도 정신 차렸으니 다행이지 싶다. 꽃샘추위가 지나가면 카메라를 들고 다시 종로 골목을 어슬렁거려야겠다. 아!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조지 오웰의 마지막 동기는 바로 ‘정치적 목적’이다. 무슨 군말이 더 필요할까. 그저 조지 오웰 작가님의 말씀을 오롯이 인용하는 게 낫지 싶다.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새 정치로 어수선한 봄날이다. 황사가 불어와도 꽃은 필 터이니, 우리 모두 충동 느끼며 정치하게 영화 찍으며 살아 봅시다.
'형이 2006년부터 반지하 자취방에서 살면서 아침마다 석봉토스트 사먹으면서 찍은 영화야.' 2010년 10월, 디시 영화갤러리에 게시물이 하나 올라왔다. 분투에 가까운 5년이라는 제작기간과 2천만원이라는 초저예산에 빛나는 독립영화 < 불청객 >의 개봉을 알리는 이응일 감독의 글이었다. 70분 동안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고 허를 찌르기를 계속하는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허튼소리'이자 `잉여로운 SF`인 <불청객>은, 영화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도 이렇게 주변적이었다. 집안의 온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만년 고시생 진식은 다 찌그러진 반지하 방에서 잉여잉여 열매를 먹고 빈둥거리는 두 명의 백수 강연, 응일과 함께 살고 있다. 돈은 물론이거니와 삶에 대한 계획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는 백수들 틈에서, 진식만은 `아나운서 아내와 전원주택`을 향한 자신의 꿈을 불태운다. 그러던 어느날, 진식의 자취방 앞에 글로벌 택배회사 페덱스에서 배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소포가 도착한다. 별 `개념 없이` 소포를 뜯어본 응일 덕분에 저주의 봉인은 풀리고, 소포상자 안에서 은하연방 론리스타 수명은행 대표 포인트맨이 등장한다. 포인트맨은 그들에게 시간을 내놓으면 영생으로 돌려주겠다는 허튼소리로 협박과 회유를 반복하지만, 그들은 포인트맨에게 시간을 착취당하길 거부한다. 그러나 포인트맨은 저항에 굴하지 않고 그들을 우주로 납치하고, 백수들의 폐기장이 되어버린 우주에서 탈출하기 위한 세 남자의 사투가 시작된다. '이 영화를 디씨인사이드에 바칩니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 불청객 >은 21세기 대한민국 인터넷 문화의 중심이면서도 끊임없이 변방에 머물러 있기를 고집하는 디시갤러리의 하위문화적 정서를 성공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시장에서의 생산성을 중심으로 구성원을 줄 세우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아냥이라는 디시의 어떤 관심사를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상식과 예의를 쓰레기 취급하는 디시의 화법을 기가 막히게 스크린으로 옮겨오고 있기 때문이다. 디시의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인 화법이 때로는 오프라인에서의 계급과 위계를 폐기하고 전복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음을 생각할 때, 이런 내용과 형식의 일치는 일종의 미학적 실천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불청객>은 잉여의 재발견이라는 작품의 주제의식을 잉여로움의 영상화라는 미학적 실천 안에 녹여내고 있는 수작인 셈이다. 그리고 그 잉여로움의 영상은 B급이라는 라벨을 통해 디시 외부의 대중과 나름 성공적으로 접속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유리창 깨지는 장면을 위해 4개월에 걸쳐 독학으로 슈가글래스를 제작했다는 이응일 감독의 근성에 박수를 보내며, 이 영화가 보여주는 대담함을 이어가는 차기작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