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운명(47부)-최현편(3부)
- 감독
- 조경순, 최부길, 김원하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최봉식, 리원복, 오미란, 리익승, 김명호, 황성옥, 현창걸, 김계현, 정춘란, 마성희, 백일옥, 장유성, 김광문, 리동철, 홍란, 손철민, 정운찬, 최은길, 리연철, 김천일, 문일, 곽인국, 김청길, 박경주, 송용보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국어 시간에서 접했을 소설 『오발탄』(이범선, 1959). 1959년 발표된 이 작품은 출간 직후부터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듬해인 1960년에 영화로 제작되어 1961년 봄 개봉되기에 이른다. 영화는 “레이션의 껍데기로 지붕을 이었다”라는 원작의 건조하면서도 날카로운 묘사가 보여주는 해방촌의 모습처럼, 전후 서울의 실상을 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사실적 재현의 힘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며, < 오발탄 >(유현목, 1961)을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치는 원작의 뛰어난 영화화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오발탄>은 당대 서울의 도시 공간을 있는 그대로 포착함으로써, 도시사와 도시계획사 연구에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서울은 국가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서의 도시계획과 고도경제성장의 동력 속에서 매해, 아니 매달 철거와 신축이 반복되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맥락을 감안했을 때, 1960년 하반기에 촬영된 <오발탄>은 6.25 전쟁과 일제강점기의 상흔이 생생히 남아있던 서울의 민낯을 참으로 절묘한 시점에 카메라에 담아낸 셈이다. 덕분에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전쟁 직후 서울의 모습을 마치 타임캡슐을 열어보듯 선명하게 마주할 수 있다. 이제 영화가 포착한 서울의 다양한 면모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철호의 판잣집과 계리사 사무실 영화 초반, 카메라는 주인공 철호( 김진규 )가 산비탈의 판자촌 사이를 걸어 나오는 모습을 비춘 뒤, 곧장 서울 도심의 계리사 사무실을 비추는 시퀀스를 보여준다. 사는 곳은 무너져가는 판잣집이지만, 일터는 시내 한복판의 말끔한 오피스 빌딩이라는 점에서, 당시 서울의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투영된 도시 공간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감독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철호의 계리사 사무실이 위치한 빌딩 입구에는 ‘대한상공회의소’라는 명판이 걸려 있는데, 2025년 현재까지도 상공회의소는 남대문 바로 옆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산비탈의 판잣집을 내려온 철호가 서울의 중심에서 일한다는 설정은, 그가 아침저녁으로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장치라 해석할 수 있다. 판잣집 사이로 내려와(상) 계리사 사무실(대한상공회의소 건물)로 들어서는 철호(하) 한국상업은행 남대문지점 1957년에 준공되어 현재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국상업은행 남대문지점(現 흥국생명빌딩)은 영화에서 상당히 비중 있게 등장하는 건물이다. 카메라가 남대문을 잡으면 반드시 화각에 들어오는 탁월한 입지 덕분에, 1966년작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에서도 남대문 주변 전경을 비출 때면 이 빌딩이 당당히 중앙을 차지한다. 건축가 나상진(1923-1973)이 정성 들여 설계한 오피스 빌딩으로, 지금 보아도 유선형 외관이 인상적이며, <오발탄> 촬영 당시에는 더욱이 초현대적이고 세련된 자본의 상징으로 주목받았을 것이다. 극중에서 철호의 동생 영호( 최무룡 )는 이 빌딩을 올려다보았다가, 후반부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마침내 은행강도를 감행하는데, 이 두 시선의 대비를 통해 감독은 전후 제대군인들의 비극적 처지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현대식 빌딩을 의도적으로 대조한 것으로 보인다. <오발탄> 중 한국상업은행 남대문지점 한국산업은행 남대문지점 터에 현재 자리한 흥국생명빌딩 (사진: 필자 제공) 철호가 내려다본 서울 러닝타임 63분경, 철호는 집에 들어가려다 노모( 노재신 )의 “가자, 가자” 소리를 듣고 발길을 돌려 남산 중턱에서 서울 전경을 내려다본다. 남산 중턱에는 판잣집이 들어서기 이전, 일제강점기부터 부유층을 위한 주택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주택지의 거주자들은 자동차를 타고 다녔고, 철호와 같은 판잣집 주민들은 언덕 한참 아래 한강로의 전차 정류장에서부터 집까지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그렇기에 철호가 내려다보는 서울의 전경은 부의 상징이 아닌 가난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부유한 이들이나 관광객이 전망대에서 경치를 감상하는 것과, 산비탈 빈민이 도심을 ‘마지못해’ 내려다봐야 하는 현실의 차이를 이 시퀀스는 절묘하게 포착해낸 것이다. 철호가 내려다본 서울 전경 영호의 도주 영화 후반, 은행강도를 감행한 영호의 도주 장면은 경찰 무선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종로2가와 청계천4가, 5가, 달리는 노면전차의 궤도, 그리고 종암동으로 이어지는 추격전은 당시 구간별로 진행 중이던 청계천 복개 공사 현장에서의 총격전까지 더해져 강렬한 긴박감을 자아낸다. 1930년대 후반 시작되어 전쟁 이후 1958년에 재개된 청계천 복개 공사는 자재와 예산 부족으로 부분적으로만 진행되었는데, 이는 영호와 같은 도망자가 복개된 지하 공간을 드나들 수 있는 개연성을 자연스럽게 제공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전차를 타고 도망가는 영호의 모습 대신, 카메라가 어지럽게 뻗어나가는 전차 선로를 속도감 있게 포착해 낸 장면이다. 특히 쭉 뻗어나가던 선로에서 갈라져 나가는 분기점을 담아냄으로써, 감독은 영호의 돌이킬 수 없는 일탈을 은유적으로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복개된 청계천의 지하 공간 전차가 빠르게 달리는 와중 포착된 선로의 분기점 철호의 배회 영호는 결국 체포되고 부인은 출산 중 사망한 상황에서, 넋이 나간 철호는 서울 도심을 정처 없이 배회한다. 러닝타임 95분경, 딸에게 사주고 싶었던 신발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가는 철호의 뒤로 반도호텔(1938년 준공, 1976년 철거)과 미도파백화점(現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의 세련된 외관이 드러난다. 당시 이 거리의 랜드마크였던 미도파백화점과 반도호텔 중 반도호텔은 롯데호텔로 재건축되며 그 흔적을 감췄지만, 미도파백화점은 리모델링을 거쳐 롯데백화점 영플라자로 남아있다. 덕분에 지금도 을지로입구역에서는 영화 속 장면과 동일한 구도로 <오발탄>의 의도를 마주할 수 있다. 극중 반도호텔이 등장한 자리의 현재 모습 (사진: 필자 제공) 극중 미도파백화점과 현재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명동본점 (사진: 필자 제공) 유현목 (1925-2009) 감독은 생전 인터뷰에서 영화 속 판잣집을 촬영하기 위해 직접 해방촌을 방문하여 영호네 집과 같은 실제 거처를 물색했다고 밝혔다. 감독은 원작에서 상대적으로 생략된 서울의 도시공간을 섬세하게 담아내면서, <오발탄>은 시간이 흘러도 당시 서울 시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빈민들의 삶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 이는 마치 ‘서울의 도시 공간’이라는 이름 없는 배역이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것과 같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무언의 명배우의 연기를 다시금 주목하고 있다. 김영준 연구원이 들려주는, <오발탄> 속 서울에 관한 더욱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한국영화X공간] 영화 "오발탄". '욕망과 좌절의 거리 서울' 클릭! 김영준(도쿄대학 특임연구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① 평양가부키좌(平壤歌舞伎座), 금천대좌(金千代座) 평양가부키좌는 1910년대 초반 평양 수정(壽町)에 설립된 극장이다. 가부키 공연용 극장으로 규모가 웅장한 건물이었다. 1914년 6월 이곳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된다는 기사가 발견된다. (<演藝界>, 《每日申報》, 1914.6.9) 1923년 가부키좌는 시설이 낙후하다는 이유로 사용중지 명령을 받고 철거되었다. 1924년 평양의 양조회사인 제등주장(齊藤酒場)의 사이토(齊藤久太郞)가 주도하여 가부키좌가 철거된 자리에 새로운 극장을 짓기로 하고 그 이름을 제등주장의 명주인 “금천대”라는 이름을 가져와 금천대좌라 정한다. (<平壤に大劇場新築>, 《朝鮮新聞》, 1924.09.23.) 2년에 가까운 공사 끝에 1926년 6월 완공되었다 .(<近く竣工する平壤の金千代座>, 《朝鮮新聞》, 1926.06.28) 해방 당시까지 남아 있었던 평양을 대표하는 연극극장이었다. ② 평안극장(平安劇場 ) 침동(砧洞)이라 불리던 평양 남문통 2정목에 있던 활동사진관으로 1914년 12월 30일 개관했다. (<광고>, 《매일신보》, 1914.12.27) 1915년 7월 위생강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衛生講話場所>, 《每日申報》, 1915.07.23) 같은 해 10월 30일부터는 조선인 전용 영화관으로 운영되었다. (<평양 상설활동>, 《매일신보》, 1915.11.02) 1919년 2월에는 종래의 5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체하던 것을 3일 간격으로 교체하기로 한 내용이 보도 되었다. 1922년 8월 무렵까지 운영이 확인된다. (<반도 고학생 착발>, 《동아일보》, 1922.08.27) 그 무렵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③ 해락관(偕樂館) 1921년 5월 1일 평양부 수정에 설립된 활동사진관이다. 설립자는 평안남도 평의원과 상업회의소 의원직을 맡고 있던 구보(久保順吉)이다. (<평양 해락관 개관식>, 《동아일보》, 1921.05.10) 평양의 대표적인 활동사진으로 인정받던 해락관은 1937년 12월 총 공사비 30만원의 비용을 들여 신시가인 앵정 8번지로 이전 신축되었다. (<평양 해락관 신축코 낙성>, 《동아일보》, 1937.12.26)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구보(久保兵二郞), 지배인은 오카(岡妻男)이다. 좌석수 902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④ 제일관(第一館), 명성영화극장(明星映畵劇場) 제일관은 평양부 수옥리에 자리한 영화관으로 1923년 3월 4일에 건립되었다. 설립자는 평양상업회의소 부회두인 박경석(朴經錫)이었다. 이 극장은 평안극장이 사라진 이후 설립된 평양의 대표적인 조선인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1941년 무렵에는 박경석의 일가로 보이는 박순옥(朴淳玉)이 관주를 맡았다. 이후 제일관은 이름을 명성영화극장(明星映畵劇場)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순옥(창씨명 木山淳)이었으며, 지배인은 박종식(창씨명 木山宗植)이었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⑤ 평양키네마(平壤キネマ), 사쿠라극장(さくら劇場) 평양키네마는 1924년 평양부 앵정 53번지에 설립된 영화관이다. 설립주체는 주식회사 평양키네마로 평양상업회의소 상무위원을 역임한 오쿠타(奧田延之助)를 대표로 한 자본금 10만원 불입금 2만 5천원의 주식회사였다. 개관 당시 평양키네마에서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였으며 유명 변사 이코마 텐라이(生駒天雷)를 고빙해 오는 등의 활약으로 일약 해락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화관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1928년 3월 5일 극장 내에서 발화한 화재로 극장 일부가 소실되는 사고가 일어나 한동안 극장운영을 쉬기도 했다. 1943년 4월 1일을 기해 ‘미영색채 일소’를 위해 평양키네마라는 명칭을 사쿠라(櫻, さくら)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모리(森鍬市)이며 지배인은 시게마츠(重松安紀)이다. 좌석수는 367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⑥ 욱좌(旭座) 1924년 10월 15일 평양부 욱정 13번지에 지어진 극장으로 약 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설립 당시 조합장은 부협의원인 松尾六郞이었다. 개관 직후부터 경영난에 봉착하였는데 1926년 3월 16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⑦ 대중극장(大衆劇場), 평양동보극장(平壤東寶劇場) 대중극장은 1937년 평양부 앵정 7번지에 설립되었다. 마루야마(丸山花)라는 일본인이 세웠다. 해락관과 이웃하고 있었다. 도호(東寶)영화의 개봉관으로 활용되면서 이름을 평양동보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루야마(丸山ハナ), 지배인은 아사이(淺井正夫)였다. 좌석수는 904석이었다. 해방 이후 이름을 다시 대중극장으로 바꾸었다. ⑧ 평양영화극장(平壤映畫劇場) 평양부 수정 82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평양매일신문, 지배인은 사사키(佐々木惣次郞)이며 669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⑨ 화산좌(花山座) 평안남도 진남포부에 세워졌다. 1916년 5월 매일신보사의 순회 활동사진 상영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즉위례대성의(卽位禮大盛儀)의 활동사진>, 《매일신보》, 1916.05.25) 이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⑩ 항좌(港座), 항극장(港劇場) 항좌는 1919년 10월 평안남도 진남포부 용정정에 설립되었다 .(<남포 항좌 삼년 기념>, 《매일신보》, 1922.10.14) 1937년 중락관이 설립되기 이전까지 진남포의 유일한 상설관이었다. 1938년 9월 무렵까지 항좌라는 이름으로 존속이 확인 된다. 1930년대 말기에 항극장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부치(田淵哲次郞)이며 지배인은 시미즈(淸水健)이었다. 좌석수는 776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⑪ 중락관(衆樂觀) 진남포부 후포정 27번지에 있었다. 1937년 진남포의 실업가 서이근(徐利根)이 세웠다. 철골콘크리트 건물로 된 지상 3층, 지하 1층의 현대식 건물로 총 900여평에 달하는 거대한 영화관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서이근(창씨명 大利根進), 지배인은 핫포(八方勝)이다. 총 886석의 좌석을 갖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순천극장(順川劇場 ) 평안남도 순천읍에 있던 극장이다. 1935년 3월 빈민구제를 위한 자선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린바 있다. (<순천 동정음악 오십여원이 수입>, 《동아일보》, 1935.03.02.) 이를 통해 볼 때 1935년 무렵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장현택(張賢澤)이며 300석의 좌석수를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다음, 평안북도의 극장은 아래와 같다. ⑬ 신극장(新劇場), 신영극장(新映劇場) 신의주의 활동사진관으로 정확히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22년 5월 경성일보 애독자 위안 활동사진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었으며 (<광고>, 《경성일보》, 1922.05.16) 1923년 7월 고국을 방문한 하와이 교포학생들의 환영행사, 1923년 12월 도청이전 축하회 여흥 활동사진 상영행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1920년대 초반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 관객 대상의 대표적인 극장이던 신극장은 1940년대 신영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듯 보인다. 1939년 신의주 지역 국방헌금 납부 내역에 신극장의 이름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939년까지는 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던 것 같다. (<신의주 국방 헌금>, 《매일신보》, 1939.07.14) 1943년 현재 신영극장의 흥행주는 임경범(林京範), 지배인은 마츠바라(松原寬)이었다. 좌석수는 522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상반좌(常磐座) 신의주에 있던 활동사진관으로 정확한 존속기간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2년 7월 경성일보 애독자위안 활동사진회 (<광고>, 《京城日報》, 1922.07.10) 와 1923년 12월 도청이전 축하회 여흥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한 기록이 있다. (<축하회의 여흥>, 《동아일보》, 1923.12.06) 이를 통해 1920년대 초반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6월 정주음악대교육활동사진반의 활동사진상영회와 (<정주악대 내신(來新)>, 《시대일보》, 1925.06.18) 같은 해 8월 열린 수해 관련 활동사진상영회의 기록이 남아 있다. (<七일 신의주에 수해영사 공개>, 《시대일보》, 1925.08.07) ⑮ 신선좌(新鮮座) 1927년 10월 1일 신의주 매지정(梅枝町)에, 일본인 히라바야시(平林正)와 조선인 이태영(李泰永), 고성건(高成建) 등이 1만원을 출자하여 설립했다. 연극과 영화를 두루 공연하던 곳이다. 1933년 12월에는 극단 신무대 공연 중 무대 막에 불이 붙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동아일보 주최 독자위안행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와타나베(渡邊治太郞), 지배인은 다무라(田村直太郞)였다. 좌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세계관(世界館) 신의주부 상반정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3년 12월 도청 이전 축하회 여흥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한 기록이 있다. (<축하회의 여흥>, 《동아일보》, 1923.12.06) 1927년에는 일본인 변사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관주는 이시하라(石原)였다.(<변사 태업, 대우 개선 요구>, 《동아일보》, 1927.02.23) 1930년대 중반 관주 노다(野田白水)가 사망하면서 부인 기미코가 운영했는데, 그녀는 매월 26일 하루치 수입을 빈민구제에 기부하는 등 선행을 통해 큰 칭송을 받았다. (<세계관주 미거(美擧)>, 《동아일보》, 1935.05.06)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카노(中野キミ子), 지배인은 이케하타(池畑晉造)였다. 좌석수는 5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선천극장(宣川劇場) 1932년 12월 평북 선천읍 본정에 사사키운송점을 경영하던 사사키(佐々木光藏) 등 수 명이 세운 극장이다 .(<선천극장 신축 낙성식 거행>, 《매일신보》, 1932.12.14)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다케시마(武島壽吉), 지배인은 카나자와(金澤二鳳)였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⑱ 정상극장(定商劇場) 1923년 무렵 평북 정주읍에 설립된 극장으로 정주수해구제연예와 국민협회순회강연이 이곳에서 이루어진 기록이 있다. 1935년 정주유학생회의 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렸다는 기록 (<정주음악연주>, 《동아일보》, 1935.08.10) 을 마지막으로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⑲ 정주극장(定州劇場) 평북 정주군 정주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5년 1월 31일 구기회 주최 소인극에 관한 기록으로 보아 이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정주 구기(救饑) 연극>, 《동아일보》, 1925.02.04)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케다(池田寅雄)이며 좌석수는 500석이었다. ⑳ 북진극장(北鎭劇場) 평북 운산군 북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우미하라(海原正植)였다. 박노홍은 그를 창씨한 조선인이라 했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㉑ 의주극장(義州劇場) 평북 의주읍 동부동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가네다(金田孝兵)였다. 좌석수는 350석이었다. ㉒ 강계극장(江界劇場) 평북 강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0년 7월 31일 배우 왕평이 이 극장에서 공연 중 뇌일혈로 사망했다. (<˝최후의 무대˝-왕평군 공연 중 급사>, 《매일신보》, 1940.08.02)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니시쿠라(西倉高盛)이며 8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㉓ 만포극장(滿浦劇場) 평북 강계군 만포읍에 있던 극장이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수헌(창씨명 金津守憲)이며 지배인은 마츠다이라(松平哲夫)이다. 좌석수는 620석이었다. * [사진](상단) 근천대좌 낙성 당시 기사 사진(조선신문 1926.07.18) [자료] 《朝鮮新聞》, 1926.07.13. 壯麗を極むる 金千代座落成 勘彌一行を招聘して 十八日より舞臺開き 平壤壽町の中央に一昨年九月より建築工事を進め來つた劇場金千代座は此程愈愈落成を告げ來る十八日に盛大なる落成を擧ぐる事となつた同座は淸酒金千代釀造元の齊藤氏が平壤に娛樂機關としての劇場なきを憂ひ十萬圓の巨費を投じ財界不況の折柄にも拘らず犧牲を見込んで建設に着手したもので建坪二百七坪の煉瓦建ての高壯華麗なる場內の設備整頓せる慥に滿鮮一を以て誇るに足る大劇場である舞臺開きに招聘せられた守田勘彌一行は十七日に乘込み十八,十九の兩日間花花しく開演する事となり久方振に名優を迎ふる事とて非常な人氣を呼んで居るから二千餘名を收容し得る大劇場も大入滿員の盛況を見るであらうと豫想されてゐる(平壤) 寫眞は=新裝なつた平壤の劇場金千代座 [자료] 《朝鮮新聞》, 1926.07.18. 平壤金千代座 落成式に續いて 舞臺開き興行 內外の設備完成し平壤市街に一偉觀を添へた劇場金千代座は愈愈十八日午後二時より落成式を擧ぐる事となり座主齊藤久太郞氏は官民多數に案內狀を發したが招聘された帝劇俳優の守田勘彌一行の柿葺落興行は落成式擧行後引續き開演の筈で非常な人氣を呼んで居る(平壤) [자료] 《朝鮮新聞》, 1924.10.18. 旭座柿葺落し 平壤旭町に建設中の劇場旭座は內外の設備全く完成したので十五日正午平壤官民有志を招待して柿葺落しの式を擧げた神官の修○終りて松尾創立委員長の挨拶長富委員の工事報告に次で宮館府尹來賓を代表して一場の挨拶を述べ夫れより開宴京阪女歌舞伎一座の餘興劇あり盛況を極めた(平壤) [자료] 《동아일보》, 1921.05.10. 평양 해락관(偕樂舘) 개관식 조선에 제이 도회라 칭하는 대도회로서 상당한 오락장소가 무(無)함은 유감(遺憾)이라 하야 평안남도평의원과 상업회의소 의원의 공직을 가진 당지 유력자 구보순길(久保順吉)씨의 경영으로 평양 구시가의 중심 되는 수정(壽町)에 일대 활동사진 상설관을 건설하고 차(此)를 해락관(偕樂館)이라 하엿는데 차는 작년 八월부터 기공하여 대판(大阪)에서 전문기사를 초빙하야 관내외를 최신식으로 건축한바 세멘트와 연와제로 하고 정원 一천명을 수용할 대건물인대 금번 준공되엿슴으로 거 七일 오후 二시부터 시내 각 관공직자와 신문기자 급(及) 유력자를 초대하야 개관피로를 하여 활동사진 시영(試映)을 하엿더라. 그런데 당일 관주 구보(久保)씨의 례사(禮辭)가 잇슨 후 楠野 평양부윤의 축사와 松井 평양상의회두와 長谷川 평남매일사장의 축사가 유(有)하얏다더라. (평양) [자료] 《동아일보》, 1937.07.02. 남포의 영화 전당 중락관(衆樂舘) 낙성, 총공비 二十만원 【진남포】 전조선을 통트러 비겨보아도 제일 첫손가락으로 꼽힐만한 대중영화극장(大衆映畵劇場) 중락관(衆樂館)이 진남포 한복판인 후포리(後浦里)에 그 위관을 나타내고저 지금 공사가 착착 진행되고 잇다. 이 극장인즉 진남포 실업가 서이근(徐利根)씨의 장남 서기선(徐基善)씨가 문화사업(文化事業)을 하랴면 어떤 것이 조을 것인가 하고 다년 연구한 결과 육만 인구를 갖고 잇는 대도시 진남포에 정원 겨우 사백명밖에 못되는 극장 단 하나로서는 부 체면 상으로나 부민의 위안 처소인 오락기관으로 보아 도저히 그저 볼 수 없다고 해서 작년 五월에 인가를 얻어 각 방면으로 조사를 거듭하야 외관이며 내용이 다 가치 정묘하게 설게하여 금년 三월에 비로소 공사에 착수한 이래 그 공사를 착착 진행하는 중이다. 이제 이 중락관의 대개를 소개하면 구조는 철골 콩쿠리-트로 지하실을 합하야 四층 총평수 九百여평 정원 一千五百명의 대건물로 총공사비 二十만원을 요하며 영사기(映寫機)는 R·C·A발성기(發聲機) 중에도 최고급형(最高級型)으로 조선에는 처음 장치되는 것이라 한다. 오는 가을까지 기어코 완성케 하도록 주야 겸행으로 공사를 진행시키고 잇는 중인데 이 극장이 준공되는 날에는 진남포 시가에 일대 위관이 될 것은 물론이오, 영화전당으로 민중을 위하야 큰 행복이 될 것이라고 일반은 크게 기대하고 잇다.
부산에는 1900년 이전부터 극장이 존재했다. 1900년대~1910년대에는 행좌, 송정좌, 변천좌, 부산좌, 동양좌(이후 대흑좌[大黑座]), 질자좌, 욱관, 보래관, 초량좌, 행관, 상생관 등 여러 곳에 극장이 난립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활동사진관을 중심으로 극장이 정리, 재편되었다. 해방 전까지 존속하고 있던 극장을 중심으로 부산지역의 극장과 영화관에 대해서 살펴보자. ① 행좌(幸座), 행관(幸館), 소화관(昭和館) 행좌(幸座)는 부산 남빈정에 있던 극장이다. 1903년 발행된 「부산항시가 및 부근 지도」에 송정좌(松井座)와 더불어 그 위치가 표기되어 부산 지역의 가장 오랜 극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1904년, 부산에서 최초의 활동사진을 상영한 이 극장은 1910년대 들어 활동사진이 큰 인기를 끌면서 활동사진 전용관으로 신축되는데 그 이름을 행관(幸館)이라 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부산의 일본인 실력자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였다. 1915년 12월 개관한 행관은 비슷한 시기 활동사진전용관으로 전환한 보래관이나 상생관에 밀려 고전했다. 하지만 1917년 하야가와연예부가 직영하고 이어 1919년부터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둔 만카츠(萬活)에서 직영하면서 부산 흥행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만카츠 특파원으로 부산으로 건너왔다가 이후 행관을 운영하게 된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는 행관을 중심으로 일본의 중소프로덕션의 영화를 배급하면서 조선흥행계에 큰 주목받았다. 하지만 행관은 개관 15년 만인 1930년 11월 10일, 영화 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다. 큰 피해를 입은 사쿠라바 후지오는 자본금 10만원의 주식회사 사쿠라바상사를 세우고 지상 3층 규모의 최신 영화관인 소화관(昭和館)을 지어 사업을 확장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쿠라바 후지오, 지배인은 사쿠라바 토시오(櫻庭敏雄)이며 1,0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직후 그 이름을 조선극장으로 바꾸었다. ② 부산좌(釜山座) 1907년 7월 15일 부평정에 만들어진 극장이다. 부산의 대표적 실력자인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를 중심으로 일본인 유지들이 만든 부산연극합명회사에서 설립했다. 개관 당시 가장 크고 호화로운 극장으로, 회전무대를 갖춘 최신의 설비를 갖추었으며 다양한 공연은 물론 활동사진도 상영되었다. 1923년 3월 22일 화재로 소실되어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③ 보래관(寶來館) 1914년 무렵 부산부 행정에 개관한 극장이다. 개관 초기에는 라쿠고(落語)와 같은 연희를 공연하는 요세(寄席)로 활용되었으며 흥행일수도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5년 1월 운영자가 고노(小野)에서 호소미(細見)로 바뀌면서 연중무휴의 흥행을 천명했고, 그해 3월 경성의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연예부로부터 텐카츠회사의 필름을 공급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사진관으로 이용되었다. 1916년 12월 27일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신축되었고 오사카에 근거지를 둔 스기모토(杉木)상회가 직영하게 된다. 1924년 무렵에는 오카모토(岡本松造)가 운영자로 이름을 올렸다. 1930년 10월 8일에는 영화상영 도중 필름에 불이 붙어 화재가 일어나기도 했다. 1937년 상생관과 함께 건물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신축을 명령받고 1938년 10월 다시 신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와사키 다케지(岩崎武二), 지배인은 이와사키 모모타로(岩崎桃二郞)이다. 객석수는 총 952석이었다. 해방 후 국제영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④ 변천좌(辨天座), 상생관(相生舘) 변천좌는 1912년 무렵 부산부 본정에 들어선 요세(寄席)이다. 1914년 무렵 좌주는 교야마(京山花丸)였다. 활동사진의 인기가 비등하면서 변천좌는 활동사진관으로 개축을 꾀한다. 1916년 11월 1일 활동사진관 개업을 하면서 이름을 상생관으로 바꾸었다. 개관 초기 닛카츠영화를 상영하던 상생관은 1922년부터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으며 1925년 쇼치쿠와 공동경영을 시작하며 쇼치쿠 만선(滿鮮) 봉절장이 되었다. 이에 맞춰 당시 관주인 아라이(新井幸吉)는 극장 개축을 추진하여 2개월의 공사 끝에 1925년 11월 15일 새롭게 개관하게 된다. 1933년 11월 무렵 상생관의 관주는 미쯔오 미네지로오(滿生峯次郞)이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 역시 미쯔오 미네지로오(滿生峯次郞), 지배인은 미쯔오 타다오(滿生忠雄)이었다. 좌석수는 총 805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사진] 변천좌에서 이름을 바꾼 상생관 ⑤ 국제관(國際館) 부산부 안본정(岸本町)에 위치했던 영화관이다. 1920년 8월 22일 자본금 20만원, 불입금 13만원의 주식회사 국제관에서 설립했다. 대표는 기노시타 모도지로(木下元次郞)이다. 설립 당시 부산지역의 가장 호화로운 극장이었기에 영화상영 외에도 연극장으로 활용되었으며 부산에서 조선영화가 주로 상영되던 곳이다. 1929년 2월 27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고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⑥ 유락관(遊樂館) 부산부 좌천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자본금 15만원, 불입금 37,500원 규모로, 부산흥산주식회사가 1921년 12월 11일 세웠다. 대표는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였다. 1932년 1월 2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지 못했다. ⑦ 태평관(太平館) 부산부 행정 1정목에 있었던 극장으로 1922년 설립되었다. 1923년 부산좌가 소실된 이후 부산의 대표적인 연극전용극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37년 11월 20일 개축되었으나 1943년 11월 19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사진] 부산 태평관 사진 ⑧ 수좌(壽座) 부산부 목도(牧之島, 지금의 영도)에 있던 극장이다. 1924년 목도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극장설립을 추진하여 1924년 3월 6일 덴도(田頭孝一)를 조합장으로 하는 수좌경영조합이 설립했다. 1926년 행관을 경영하던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가 임대하여 제2행관(第二幸館)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1932년 다시 수좌라는 이름으로 복귀 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미가(富賀四郞)이며 객석은 총 341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중앙극장(中央劇場), 대생좌(大生座) 부산부 초량정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1929년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와 가나모리 신기치(金森新吉)가 출원하여 1만 4천3백여원의 공사비를 들여 2층 규모로 만들었다. 같은 해 7월 22일부터 공연을 시작했다. 중앙극장은 당대 유명 사기꾼인 호리가와(堀川辰吉郎)의 사기행각에 말려들어 1934년 경매에 붙여졌으며 상생관 흥행주 미쯔오(滿生峯次郞)가 낙찰 받아 이름을 대생좌(大生座)로 바꾸었다. 이 사건은 원 중앙극장 소유주 가나모리가 소유권 이전 말소 소송에서 승소하며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대생좌라는 이름은 이후에도 계속 사용하였다. 일본인 극장이던 이곳에서는 1939년 5월 극연좌가 공연한 적이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기시타(杉下末次郞)이며 총 498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⑩ 부산극장(釜山劇場) 부산부 서정(西町) 1정목에 있던 극장이다. 1934년 11월 5일 개관했다. 가부키를 공연할 수 있는 대극장으로 건축되었다. 연극전용극장이었지만 가끔씩 영화도 상영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영화관으로 활용되었다. [사진] 부산부 서정 1정목에 위치했던 부산극장 ⑪ 대화극장(大和劇場) 부산부 수정정에 있던 극장이다. 1942년 건립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이조(西條貞利), 지배인은 고야마(小山秀一)이며 객석은 총 55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환서좌(丸西座), 앵관(櫻館) 1910년대 이전부터 마산에 있던 극장으로 각종 연예물과 활동사진이 상연되었다. 1925년 당시 지배인이던 무라카미(村上竹次郞)가 천여원의 비용을 들여 내부와 외부를 수리했다. 1932년 자본금 2만원, 불입금 2만원의 마산연예주식회사가 영화관 신축을 위해 매수하여 1933년 5월 마산 경정 3정목에 앵관이라는 극장을 짓게 된다. 영업은 오오츠카(大塚寅吉)가 맡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미타(住田春三)이며 객석 수는 79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⑬ 도좌(都座), 마산좌(馬山座), 마산극장(馬山劇場) 마산부 도정에 있던 극장이다. 1910년대 설립된 극장으로 보인다. 1918년 활동사진상설관으로 개수되었다. 1922년 무렵까지 영화 상영내역이 확인된다. 이후 마산좌(馬山座)로 개칭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산좌는 1932년 개축하면서 그 이름을 마산극장으로 바꾸었다. 혼다(本田槌五郞)가 건립하였다. 1941년 극장 일부를 수리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혼다(本田槌五郞), 지배인은 혼다(本田宗弘)이었다. 6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⑭ 수좌(壽座), 공락관(共樂館) 수좌는 구마산 지역의 대표적인 극장이다. 1915년 구마산 지역민들이 극장설립을 추진하였으며 1916년 3천원 예산으로 극장을 세우기 위해 주식을 발행하여 조선인 70여명, 일본인 43명으로 주주를 구성하였고 1917년 10월 구마산 지역의 수정에 극장을 설립하고 이름을 수좌라 지었다. 1917년 10월 20일 개관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사용하던 극장이었다. 하지만 1932년 9월 마산경찰서에서는 장내의 협착, 설비의 부패 등을 이유로 휴관을 명령하고 새로운 극장의 신축 출원을 받았다. 그 결과 마산극장 주인인 혼다(本田槌五郞)가 출원한 극장 설립안이 인가 받아 1935년 구마산 석정 64번지에 공락관이라는 영화관이 만들어진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혼다(本田槌五郞), 지배인은 혼다(本田宗弘)이었다. 4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⑮ 봉래좌(蓬萊座) 통영읍 대정정에 있던 극장이다. 1914년 쓰야마(陶山美賀藏)를 중심으로 주식을 발행하여 설립했다. 1931년에는 하시모토(橋本米吉)가 운영하며 영화관으로 활용했다. 1938년 이후 낙후한 상태로 폐쇄되었던 봉래좌는 1939년 신축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하시모토(橋本公博)이며 500석 규모의 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통영좌(統營座) 통영읍 길야정에 있었던 활동사진 상설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27년 다케타(竹田應吉)가 조합장을 맡고 있었으며 1936년 주주간의 분규로 문을 닫았다. 1937년 봉래좌의 운영자 하시모토가 운영을 맡으며 정상화 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무라카미(村上善藏)이며 480석 규모의 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영좌(榮座) 경남 진주의 매립지에 지어진 극장으로 1914년 6월 24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고야나기(小柳藤介) 등 진주의 유지들이었다. 개관 1년 후 경남지역의 유력자인 하자마(迫間房太郞)의 땅에 타구치(谷口秀楠)가 부산 행좌를 이전하여 극장을 새로 짓게 되자 활동을 멈췄다. 1917년 해체되었다. ⑱ 진주좌(晋州座), 진주극장(晋州劇場), 동보영화극장(晋州東寶映畵劇場) 1922년 진주부 영정에 있던 극장이다. 진주좌조합에서 설립했다. 설립 이후 오랫동안 진주의 유일한 흥행장이었다. 1936년 2월 서종숙(徐宗淑)이 인수하여 낙후한 극장을 최신의 영화관으로 개축했다. 1940년 동보영화사의 직영으로 바뀌어 이름도 진주동보영화극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1941년 10월 동보측이 손을 떼면서 서종숙 단독으로 극장을 경영하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서종숙(창씨명 平山宗淑)이며 6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⑲ 삼포관(三浦館) 진주부 금정에 있던 극장이다. 진주의 실업가 미우라(三浦仁八)가 1936년 7월 4일 건립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요시(三吉範夫)이며 객석수는 515석이었다. 해방 후 이름을 동명극장(東明劇場)으로 바꾸었다. ⑳ 진해좌(鎭海座), 묘락좌(妙樂座) 진해좌는 진해읍 국천정(菊川町)에 있던 극장으로 1915년 이전에 설립되었다. 1930년 3월 진해 창고에서 영화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소학생 백여명이 소사한 사건이 발생하자 낙후한 시설의 진해좌는 영업 중지 상태가 되었다. 진해좌의 소유주 데즈카(手塚松一)는 극장을 신축하기로 하고 1만원의 경비로 활동사진관을 건설하게 된다. 새롭게 건설된 활동사진관의 이름은 묘락좌(妙樂座)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데즈카이며 4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이후까지 존속했다. 21. 밀양극장(密陽劇場) 밀양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1928년 11월 16일 가나모리(金森新吉)가 밀양역 앞에 설립했다. 1929년 밀양 성내에 조일극장(朝日劇場)이 설립되면서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22. 조일극장(朝日劇場) 밀양 성내에 건축된 극장이다. 밀양성내동지회에서 세웠으며 1929년 2월 4일 개관했다. 1939년 3월 밀양의 육군기념일 행사가 이곳에서 있었다. 1939년 12월 당시 조일극장의 흥행주 미즈카미(水上至海)가 조일극장 옆에 밀양영화극장을 설립하면서 문을 닫은 듯 보인다. 23. 밀양영화극장(密陽映畫劇場) 밀양 성내에 건축된 영화관이다. 1939년 12월 밀양 조일극장의 흥행주 미즈카미(水上至海)가 세웠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즈카미(水上至海)이며 2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4. 삼천포극장(三千浦劇場) 삼천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9년 사천군 육군기념일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 것으로 보아 1939년 이전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시라가와(白川晃)이며, 275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5. 구포극장(龜浦劇場) 구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필름손실방지와 사고방지를 위해 전국의 영사기를 조사했을 당시 한 대의 영사기로 영사하여 배급정지처분을 받았다. 당시 흥행주는 하라구치(原口淸見)였다. 293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6. 김해극장(金海劇場) 김해읍 대화정에 있던 극장이다. 1929년 김무일(金武日)과 배봉을(裵鳳乙)이 약 8천원의 공사비로 제작하였다. 건평 51평 2층 규모로 9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케시(武伺吉恒)이며 46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옛 창고를 연상하는 낙후된 시설이었다. 27. 거창좌(居昌座) 거창읍에 있었으며 언제, 누가 세웠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전상길(全相吉, 창씨명 酒井相吉)이다. 그는 양조장 등을 거느린 거창지역의 대표적인 실업인이었다. 지배인은 타마야마(玉山榮秀)이며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8. 울산극장(蔚山劇場) 울산읍 성남동에 있던 극장이다. 1920년대 만들어진 낡은 극장이 울산 역전에 있었는데, 당지 유지들인 김재문 외 5인의 발기로 1936년 현대식 건물로 신축이 추진되었다. 군에서는 1만 5천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극장을 공회당의 성격으로 활용하려 했다. 1937년 9월 1일 낙성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시라이(白井叶), 지배인은 니시가와(西川康南)였다. 객석은 7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29. 사천극장(泗川劇塲), 국민좌(國民座) 경상남도 사천읍 내에 있는 극장으로 고바야시(小林齊吉)가 1만원의 예산으로 지었다. 1938년 9월 12일 개관했으며 외관은 2층 양옥 모양이었다. 이곳에서는 1939년 방공영화상영회 등이 열렸다. 1940년대 이름을 국민좌(國民座)로 바꾼 듯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달오(창씨명 金村達五)이며 객석은 300석이었다. * [사진](상단) 부산부 행정에 위치했던 보래관 [자료] 《매일신보》, 1930.03.01. 중앙극장 신축낙성(洛城), 근일 개관할 터 【부산】 작년 오월 일일 고(故) 대지충조(大池忠助)씨와 밀양 금삼신길(金森新吉)씨가 출원한 부산 초량정 중앙극장은 동년 십일월 이십일일 경비 일만 사천삼백삼십사원으로 공사에 착수하여 신축 중이든 바 일전에 준공되었음으로 당국의 검사가 맛치는데로 근간 개관하리라더라. [자료] 《매일신보》, 1937.07.10. 신축 울산극장, 삼십일경 준공 【울산】 신축 중의 울산극장은 삼십일경 준공케 되야 당일 성대한 낙성식이 잇스리라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41.03.23. 방어진(方魚津)극장 전소(全燒) 【부산지사전화】 이십이일 오전 일시경 경남 방어진읍(方魚津邑) 방어진극장으로부터 불이 일어나 목조 극장 한 채를 전소하고 동 이시 반에 진화되었다. 손해는 5만원이고 원인은 전날 밤 객석에서 사용한 화롯불 건사를 잘못하야 화로로부터 이러난 것으로 판명되엇다. [자료] 《동아일보》, 1929.03.22. 김해에 극장, 불원간(不遠間) 준공(竣工) 경남 김해군에는 아즉 극장설비가 무(無)하야 매양 차종(此種)의 집회가 유(有)한 시(時)는 곤란을 만히 당하야 옴으로 이에 향의(向意)한 당지 청부업자 배봉을(裵鳳乙)군은 읍내 서문통에다 극장 신축을 벌서 수월 전부터 착수하야 공사에 착착 진행하얏슴으로 금후 일주간이면 준공하야 도당국의 검사(檢査)를 경(經)한 후 일반 사용에 제공하겟다하며 건평은 오십일평임으로 이층 합하면 약 구백명의 수용을 행(行)할지며 총공비(總工費)는 팔천원을 요(要)하얏다더라. 【김해】 [자료] 《동아일보》, 1935.08.19. 구(舊)마산에 극장 【마산】 문제 중에 잇든 구마산의 극장 신축의 건에 대하야 오래전부터 부민의 관심을 끌어오든 바 요지음 와서 부내 도정(都町) 팔번지 본전퇴오랑(本田槌五郞)씨에게 극장 신축 인가가 낫다고 한다. 장소는 석정(石町) 육십사번지 전(前) 마산구락부(俱樂部) 폐터라는 바 건평 백이십평에 방화식 대용(防火式 代用) 콩크리트 이층 총공비 지료 합하여 일만 오천원이라 하며 내부는 역시 일본식으로 다다미를 깔고 이층에는 긱연실(喫煙室)까지 설치하리라는데 공사는 오는 이십일에 착수하여 십일월 하순경에 준공하리라고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7.09.07. 울산극장 준공 【울산】 약진하는 울산으로 우금 극장 한 개가 없엇음을 한탄한 당지 유지로 극장조합을 조직하야 금춘 이래 구역전(舊驛前)에다 총공비 이만여원으로 공사에 착수 진행중에 잇던 바 드디어 금번 준공되어 지난 1일 신극장 내에서 관민 다수를 초대하야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는 바 신설된 극장은 내외관 설비가 완전하야 『토-키』 발성기게 등도 대도시 일류 극장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하며 외관에 잇어서도 명랑한 맛이 잇는 모던 건물이라고 한다. (사진은 울산극장) [자료] 《동아일보》, 1937.06.30. 의령(宜寧) 공회당 착공 【의령】 경남 의녕에서는 일정한 공중의 집회장소와 또는 극장 등속이 없음을 일반이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고 오든 중 작년 가을부터 임(林) 의녕군수의 주선 하에 유지 이명후, 이태희, 이종덕(李明厚, 李泰羲, 李鍾德) 삼씨의 의연금이 모집되어 공사비 오천원으로 의녕 신시장통에 의령공회당을 건축케 되어 멀지 안흔 시일에 준공이 되리라는데 해 공회당이 준공되면 의녕 발전에 한층 더 이채를 증가하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0.02.05. 밀양성내(城內) 소화(小火) 【밀양】 밀양군 성내 조일극장(密陽郡 城內 朝日劇場) 압 밀양은행 소유 가옥에 잇는 박경모(朴景某)씨의 소실 장씨(張氏)의 부억에서 지난 초이일 오후 열시경에 불이 나서 집 처마위로 타올라가는 것을 그 이웃에서 풍물을 치고 놀든 사십여명이 달려들어 즉시 진화시키엇다는데 그 원인을 듯건대 어린 아이를 시키어 군불을 ᄯᅢ다가 그와 가티 실화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