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 감독
- 이규환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박암, 노경희, 양미희, 김칠성, 김정옥, 김정림, 장훈, 복혜숙, 나애심, 이일선, 양일민, 이해룡, 임내일, 백송, 박점동, 김정우, 고성춘, 박정희, 최명길, 윤정란, 백금선, 지계순, 정구열
‘문예영화’ 표방한 <해연>의 여학생 극장 정원제(5월 1일)가 실시되고 입장료 제한(8월 1일)이 폐지된 1948년 11월 21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해연(海燕: 일명 갈매기)>(예술영화사 제작)은 해방 후 <똘똘이의 모험>(1946), <민족의 새벽>(1947), <그들의 행복>(1947)에 이어 이규환 감독이 내놓은 네 번째 작품이다. 문예영화를 표방한 해방 이후 첫 문교부 추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당초 일제 말기에 <처의 윤리>(1941)와 <우러르라 창공>(1943) 두 편을 만든 김영화 감독이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이철혁과 손잡고 만들게 돼있었다. 그런데 과도정부의 초대 공보처 영화과장 제의를 받은 김영화 감독이 연출을 사양하였고, 김영화의 추천에 의해 이규환 감독이 대신 연출을 맡게 되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4) : 황금기」, 『중앙일보』, 1980.02.15) [사진] <해연>(이규환, 1948)에서 조미령(오른쪽) <해연>은 계모의 구박을 피해 언니 정애(남미림)가 일하는 동해안의 소년원을 찾아온 여학생(정숙)이 말썽을 부리는 문제아들을 보고 그곳에 남아 봉사하며 계도한다는 얘기다. 그 여주인공 정숙 역을 20세의 조미령이 맡았다, 서울관현악단의 연주와 남성합창단이 부르는 노래를 배경으로 소년원생들이 여선생과 함께 곡괭이질 하는 마지막 장면이 뜻하듯이, <해연>은 국가건설기의 과업이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 준다. 이 영화의 언니 애인 역으로 등장하여 서울에 올라가도록 만든 박학은 그 뒤 월북한 후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극영화) <내 고향>(1949)에 출연했다. 춘향 역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르다 한동안 영화계와 멀어져 있던 조미령이 다시 은막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7년 만인 19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부터였다. 그 사이 조미령은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의 창단 동인으로 활약했다. 아울러 그녀의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다. 16년의 차이가 나는 <해연>의 프로듀서 이철혁과 결혼한 것이다. 스물두 살 때였다. 그러나 조미령이 처음부터 흔쾌하게 춘향 역으로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이규환 감독의 회고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8): ‘춘향물색’」, 『중앙일보』, 1980.02.19) 에 따르면, 이 역할은 당초 신인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땅한 얼굴을 찾기 위해 그는 유장산 촬영기사와 함께 신촌 이화여대 정문 앞으로 갔다. 몇 시간을 드나드는 학생들을 살펴봤으나 마땅한 후보가 눈에 들어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그 대안으로 키가 작아 제쳐두었던 조미령을 불러내기로 한 것이다. 이 감독은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신바닥을 10센티미터 가량 높이기로 하였다. 다행히 긴 치마가 이를 가려주었다. <춘향전>의 촬영이 시작된 것은 1954년 7월부터였다. 원작에 나오는 남원의 광한루가 아닌 풍광과 촬영 조건이 좋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冷泉洞)에서였다. 그런데 2주일 뒤 장마가 시작되면서 촬영이 중단되고 자금의 압박까지 받아 고리대금을 끌어다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9월 중순이 되어서야 촬영을 마친 <춘향전>은 2시간 15분(필름 길이 1만2천자) 분량의 편집과 명창 임방울, 박초월의 ‘춘향가’가 들어간 녹음과정을 거쳐 이듬해 1월 6일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그 결과 밀려드는 관객들로 하여 세 차례나 상영기한이 연장되며 24일까지 18만 여명을 동원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화제의 영화 춘향전, 한국영화사상 초유의 힛트」, 『한국일보』, 1955.12.06) 극장이 개관된 이래 최대 인파였다. 더욱이 <춘향전>은 이에 앞서 시행된 정부의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1954년)’라는 혜택까지 누려 제작자에게 돈더미를 안겨 주었다.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 촬영현장에서 조미령, 왼쪽은 이규환 감독 일반적으로 춘향이라면 갸름한 얼굴에 날씬한 키를 연상하기 쉬우나 조미령이 꾸며 보인 춘향은 그저 야무진 일편단심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금주의 스타 조미령」, 『한국일보』, 1955.02.0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주인공 이민과 함께 일약 영화계의 정상급 배우로 떠올랐다. 여기에는 아역 출신 셔리 템플이 결혼 후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춘 것과는 달리 소녀시절부터 ‘극장에서 크고 화장대에서 자라난 체험’이 큰 힘이 되었다. 조미령은 뒤이어 <춘향전>의 조감독 유현목이 첫 메가폰을 잡은 <교차로>(1956)를 비롯하여 <단종애사>(전창근, 1956), <여성의 적>(김한일, 1956),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 등 4편에 출연하게 된다. 이 가운데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시집가는 날>의 하녀 입분이 역이었다. 욕심 많은 맹진사(김승호)가 딸과 혼담이 오가는 세도가의 아들(최현)이 절름발이라는 말에 속아 대리 신부로 내세우는 바람에 행운을 잡게 된 여주인공이다. 더욱이 이 풍자극이 국내 최초로 해외영화제(제4회 아시아영화제 특별 희극상)에서 수상하면서 그 후광마저 입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미령의 연기는 무난했으나 신부다운 신선미가 없는 게 결점” (이봉래, 「희극영화의 가능성, 영화 ‘시집가는 날’에서」, 『조선일보』, 1957.02.19) 이라는 평을 듣는 수준이었다. [사진]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의 한 장면 그런데 김기영 감독의 <여성전선>과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이상 1957)에 이르면서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성전선>의 주인공 옥란 역이 현대여성의 타산적인 행위를 잘 표현 (김규대, 「발전의 소지 개척, 영화 ‘여성전선’에서」, 『조선일보』, 1957.03.09) 했다면, <아리랑>의 여동생 영희 역은 ‘시달림을 받는 처녀로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오빠의 친구이자 애인인 윤현구(윤일봉)에게 말하는 대사가 퍽 세련되었다는 평가가 따랐다. [사진] <아리랑>(김소동, 1957) 촬영현장에서 조미령, 왼쪽에서 두 번째는 상대역인 배우 윤일봉,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감독 김소동 이 무렵 그녀의 대중적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월간 대중지 『희망』(1957년 8월호)과 영화잡지 『국제영화』(1958년 8월호)가 독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희망』은 조미령이 주증녀와 양미희를, 『국제영화』는 주증녀와 최은희를 제치고 인기배우 제1위로 집계했다. 남배우 1위는 김동원과 최무룡이었다. 조미령이 다수표를 얻은 데는 왜소한 청순미가 관객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여사장 >(1959)은 < 자유부인 >(1956) < 순애보 >(1957)를 계승하는 한형모 감독의 영화를 관통하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1950 ~ 1960년대 한국 사회를 감싸고 있던 근대적 활기에 대한 동경이 역연히 배어 있는 이 영화는 압축적 도시화 과정에서 노출된 무분별한 서구화에 대한 경계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근대적 ‘가치’와 ‘스타일’에 대한 강렬한 끌림을 형상화하고 있는 이 영화는 서구의 생활방식과 사고, 말을 모방하는 작중 인물들, 근대적 인간형에 대한 묘사, 할리우드 장르 영화에 대한 물신화를 통해 이런 특성을 확인시켜 준다. < 여사장 >의 원작은 1948년 무대에 올라간 연극 「여사장 요안나」이다. 「여사장 요안나」는 서양 문화의 졸속적 영향을 받은 당대 여성에 대한 경고, 여권신장에 대해 한국의 여성들이 갖고 있는 그릇된 추종을 지적하기 위해 창작된 계몽성 짙은 희곡이다. 영화는 ‘신여성’이라는 여성잡지의 사장인 요안나( 조미령 )와 취업 준비생 청년 김용호( 이수련 )의 갈등을 기조에 깔고 있다. 두 사람은 시내 공중전화 부스에서 승강이를 벌이게 되는데, 용호가 신여성사의 신입 기자로 지원하게 되면서 면접에서 재회한다. 용호에게 당한 모멸을 앙갚음하려는 생각에 요안나는 용호를 채용한다. 요안나는 타협을 모르는 완고한 성격의 용호와 자주 부딪히지만, 용호의 지조와 의기에 마음을 빼앗긴다. 종래에는 요안나는 회사를 용호에게 맡기고 전업주부가 되고, 신여성사는 용호가 경영을 시작하자마자 번창해간다. < 여사장 >에는 서구식 모더니티에 대한 거부와 동경이 기이하게 공존한다. 자유연애와 평등주의, 여성주의 등의 서구적 가치를 도덕적 일탈과 정신적 해이로 추궁하던 봉건적 의식이 텍스트를 장악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근대 물질문명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이 싹트고 있었다. 이는 요안나라는 모순적인 인물에 용해되어 있다. 요안나는 근대 이행기의 서울 거리를 활보하는 여인이다. 그녀에 대한 영화의 태도는 분열적이다. 전쟁 이후 등장한 새로운 여성상으로 볼 수 있는 요안나는 소비자본주의와 가치, 신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혼란이 그 몸에 아로새겨진 존재들이다. 의상이나 화장법, 대화방식, 라이프스타일에 있어서 일정한 교양과 격식을 갖춘 그는 사회활동에 적극적이고 지적이며 남성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독립적인 여성으로서의 모던 걸이다. 요안나에 대한 영화의 묘사는 지극히 표피적이다. 거죽만 현대적인 외양을 하고 있을 뿐 속 빈 강정과 같이 묘사되기 때문이다. 부도덕하고, 예의라고는 없으며, 현란한 치장으로 빈곤한 정신을 감추려는 허세의 아이콘으로 형상화된다. 남성들의 수구적 방어기제가 만들어낸 존재로서 여사장은 교양과 품위를 지닌 현대여성이 아니라 이율배반적인 안티 히로인에 가깝다. ‘여존남비’라는 사훈을 가지고 있지만, 종이 공장 사장을 유혹해 종이를 얻으려는 모습이나 숙부에게 사업 자금을 변통하려는 모습에서 이런 특성이 확인된다. 캐릭터 묘사의 표피성은 남성 주인공 용호도 마찬가지다. 두 인물의 갈등을 극대화하기 위함인지, 용호는 무례한 폭군처럼 그려진다. 신참사원으로서의 예의나 기본도 갖추지 못했을뿐더러 요안나와의 애정 관계에 있어서도 자기 확신이 떨어진다. 그의 주관과 결기, 당찬 남성다움은 여성들을 억압할 때만 폭발한다. 이러한 용호를 통해서는 전통적 가치에 충실한 반면 새것에 민감하지 않은 센스 없는 남자, 또는 강직하기는 하나 눈치 없는 남자 또는 강압과 명령으로 일관하는 남성성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자신의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던 현대여성이 전 근대적 남성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체제의 숙명 안으로 묶이게 된다는 결말을 보여주는 < 여사장 >은 계몽의 영화이다. 표면적으로 영화는 당시에 활발하게 개진되던 여성의 사회진출을 부정적인 방향에서 묘사하고,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여성 역할의 퇴보를 강변하는 영화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남녀의 권력관계가 어이없이 역전된다거나(여존남비에서 남존여비로), 남성 불안의 해소를 위해 여성을 지나치게 희화화한 측면, 이를 위해 극적인 일관성을 무너뜨리는 모험까지 불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적인 불균형을 드러내기도 한다. 모더니티에 대한 매혹이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의 측면이 아니라 물신화의 양태를 보인다는 점도 흥미롭다. 양장과 화장품, 영어, 액세서리 등 서양 문물에 매료된 육체에 비해 그들의 정신은 근대 이전에 고착되어 있다. 정신의 미성숙과 달리 물질은 근대를 소망하는 당대의 불구적 괴리를 여과 없이 노출하는 것이다. 모더니티에 대한 양가적 태도, 한편으로 근대의 활기에 매료된 동시에 중심으로부터 그것을 밀어내야 하는 당위로부터 파생하는 ‘의미의 미끄러짐’이 발생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불렸다. 그리고 많은 스타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가 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세 명의 미녀 배우가 혜성같이 등장했다. 그녀들은 트로이카라는 이름으로 한국영화계를 주름 잡았다. 문희 , 윤정희 , 남정임 이 바로 그녀들이다. 그녀들은 주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으로 활약하며 자신들의 존재감을 부각하고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모두가 훌륭한 멜로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는 법. 상대적으로 문희와 윤정희가 남정임보다는 작품의 운이 따르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남정임은 활극이나 코미디 장르의 출연횟수가 상대적으로 두 여배우에 비해서는 많았는데 그 이유는 아마 작품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한국영화가 침체기로 들어선다. 작품의 수준도 많이 떨어지고, 다양성도 부족해진다. 흥행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인지 액션, 활극, 코미디의 비중이 늘어났고, 그런 만큼 여배우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문희 , 윤정희 도 코미디 영화의 출연이 늘어났다. 트로이카 중에서는 남정임 이 60년대 후반부터 구봉서 등 인기코미디언과의 콤비로 흥행 성공작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능수능란한 코미디언들의 그늘에 가려 뚜렷한 이미지를 각인시키지는 못했다. 문희 역시 멜로드라마에서의 청순함을 코미디 영화에서의 발랄함으로 연결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반면 명랑이라는 카테고리로 넓게 펼쳐 놓았을 때, 가장 존재감이 돋보였던 배우는 바로 윤정희다. 김영걸 감독의 1971년 작품 < 괴짜신부 >는 윤정희 의 밝고 명랑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결혼식장으로 가는 첫 시퀀스는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인 신세대 며느리와 시어머니 간의 갈등과 해결 과정 역시 상당히 유쾌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윤정희의 얼굴이다. 멜로드라마에서 차갑고 도도한 성숙미가 돋보였던 얼굴이지만 코미디 영화에서 밝고 명랑한 얼굴로의 변화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가 얼마나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배우인지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괴짜신부>라고 할 수 있다. 노진섭 감독의 1970년 작품 < 별난 새댁 >에서 문희 는 밝고 명랑한 현대여성을 연기한다. 이 작품은 당시의 신세대라 할 여성의 결혼 해프닝과 딸부잣집의 에피소드를 다루는 코미디영화다. 이 영화에서 문희 역시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의 < 명동 가시나 >에서 보여주었던 강인한 여성역이 어색 했듯, <별난새댁>의 도도한 신세대 신부라는 역할 역시 어색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쉽게도 문희의 얼굴은 윤정희 만큼 다양하진 못했다. 그래도 문희는 멜로드라마에서 만큼은 발군이다. < 괴짜신부 >와 < 별난 새댁 >은 공통적으로 산업화와 서구화되면서 급격하게 변하는 가치관에 대해 다루고 있다. <괴짜신부>는 전통사회에서 현대사회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이라 할 고부간의 갈등을 다루고, <별난 새댁>은 전통적인 남녀의 역할을 거부하려는 부부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이런 주제는 당시의 가장 큰 이슈였을 것이다. 이렇듯 두 영화는 코미디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세태풍자를 소재로 끌고 들어오면서 1970년대 당시의 신세대라 할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녀들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파격이다. <괴짜신부>의 백란( 윤정희 )과 <별난 새댁>의 도도해( 문희 )는 전통이라 불리던 질서를 지키기보다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반항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갈등이 발생한다. 모든 영화가 그렇듯 < 괴짜신부 >와 < 별난 새댁 >도 갈등을 해결한다. 하지만 그 해결과정에서도 더 이상의 파격을 동반하지도 않고, 가치관의 갈등에 대해서도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서로 간의 이해로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해결 하도록 노력하자는 <괴짜신부>의 메시지는 전형적이긴 하지만 거부감은 없다. 반면 <별난 새댁>은 딸 부자집의 아버지가 새로운 아들( 김정훈 )을 얻게 되는 과정을 통해 갈등이 해결된다. 딸 삼 형제도 좋지만, 결국은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은근히 전달함으로써 도도해가 가족계획을 위해 잠자리를 거부하며 갈등을 만들었던 상황은 그저 하나의 해프닝으로 만 끝나고 말았다. 김영걸 감독의 < 괴짜신부 >와 노진섭 감독의 < 별난새댁 >은 한국영화사에 남을 만한 작품성을 보여주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불세출의 트로이카 문희 , 윤정희 의 다양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 영화들은 제 몫은 한 셈이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는 <괴짜신부>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좀 더 자연스러운 윤정희의 연기와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 괴짜신부 > 윤정희 김경수 감독 김영걸 각본 이일목 촬영 이석기 1971년 87분 칼라 판매원 (주)동양프로덕션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0172 < 별난 새댁 > 신성일 문희 허장강 감독 노진섭 각본 한기전 촬영 권재홍 1970년 100분 칼라 판매원 한양비디오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1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