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촬영 - 홍동혁
- 제작년도
- 2004
정인엽 감독이 있었다. 그는 80년대 대표적인 흥행감독중의 한명으로 통했다. 또한 에로티시즘 영화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바로 우리 모두의 뇌리에 가장 야한 영화로 두고두고 기억되고 있는 < 애마부인 >을 탄생시킨 바로 그 감독이다. 그렇다고 추운 겨울 애마부인을 감상하며 몸을 뜨겁게 덥힐 생각은 마시라. 그녀는 愛馬부인이 아닌 愛麻부인이기 때문이다. 더 추워질 뿐이다. 어쨌거나 정인엽 감독은 80년대 내내 애마와 함께 건재했다. 그리고 90년대가 시작되면서 X세대라 불렸던 관객들의 새로운 감각을 따라잡지 못하고 한국영화계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정인엽 감독은 1965년 감독으로 데뷔했다. 작품성 있는 영화보다는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 할 수 있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다. 불세출의 트로이카였던 문희 , 윤정희 , 남정임 의 공연을 처음으로 성사시켜 화제를 뿌린 < 결혼교실 >을 만든 사람이 바로 그다. 하이틴 영화가 인기를 얻자 발빠르게 <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 >를 만든다. 호스티스 영화가 붐을 이루자 < 꽃순이를 아시나요 >를 만든다. 이렇듯 그때그때의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영화를 만드는 정인엽 감독이 70년대 당시의 청년문화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1974년에 발표한 < 명동에서 첫사랑을 >과 < 아무도 없었던 여름 >은 바로 당대 젊은이들의 풍속도와 감각을 수용한 영화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아무도 없었던 여름>은 감각적인 화면을 만들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다소 퇴행적인 주제가 영화의 장점을 가리고 있어 아쉬운 작품이기도 하다. 부잣집 딸 유미(고은님)는 돈만 밝히는 아버지를 거부하며 반항적으로 살고 있다. 다방DJ인 동석( 정인하 )은 유미의 돈을 노리고 그녀와 동거하고 있다. 문득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 유미는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린다. 그녀를 찾아 나선 동석은 인천 송도 바닷가로 가는 버스에서 스케치 여행을 가는 미대생 진숙( 나하영 )을 만난다. 바닷가에서 진숙은 동석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는 동안 유미는 원양어선을 타는 건장한 뱃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동석을 찾아온 유미. 동석은 아무 말 없이 유미와 함께 떠난다. 진숙은 하룻밤 사랑의 상처만 안고 백사장에 홀로 남는다. < 아무도 없었던 여름 >의 주인공들은 지나치리만큼 자신들의 감정에 충실하고 행동은 충동적이다. 그들에게선 한국영화 특유의 신파라고 할 감정의 과잉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쳇말로 쿨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인엽 감독은 자신이 만든 주인공에게 애정이 없다. 아마 그것은 그가 바라보는 당시의 젊은이들의 모습과 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보니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공허하고 속이 비어있다. 즉 미성숙한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의 불균질적인 면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홍동혁 기사의 촬영은 유려한 화면을 만든다. 정인엽 감독은 영상을 통해 순결이라는 강박관념에 얽매여 있지 않고 섹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젊고 매력적인 인물을 창조한다. 사운드의 사용에도 모험을 해본다. 더불어 상당한 수위의 노출을 과감하게 감행한다. 이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져 꽤 감각적인 영상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영화의 주제와 감독의 세계관이 영화의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젊은이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상정하고 있다 보니 청춘영화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방황과 고민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다. 대신 아버지로 상징되는 기성세대의 노고를 인정하라는 강요만 지나치게 난무한다. 고민하는 유미에게 난데없이 나타나 한바탕 축제를 벌이는 뱃사람들의 모습은 원양어선을 타고 돈 벌러 나갔던 노동하는 아버지들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신동헌 화백의 그림으로 유명했던 옛날 소주광고를 떠올리게 만드는 장면들은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는 중요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몰입을 방해한다. 아무래도 그 장면이 아버지 세대가 지독한 노동으로 일궈놓은 풍요에 기생하는 젊음이라는 잔소리를 하고 있는 장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유미는 뱃사람들과의 만남 이후 완강하게 거부하던 아버지를 갑자기 인정해 버린다. 그리고 동석과 함께 떠나버린다. 왜 진숙만 바닷가에 홀로 남아야 하는가? 감독이 너무 차갑게 진숙을 내다버리기 때문에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는 결말부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유미는 아버지를 인정함으로서 아버지의 질서를 내면화하기로 한다. 그리고 유미의 다음 임무는 그 질서를 이어받을 남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바로 순응하며 노동하는 남자. 그러므로 동석이 진숙이 아닌 유미를 택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된다. 또한 그것이 정인엽 감독이 이 영화에서 바라는 단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숙은 당시의 젊은이일 뿐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녀의 배경에 대해 어떤 설명도 들을 수 없다. 결국 그녀는 무존재 그 자체다. 정인엽 감독이 바라보는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는 1970년대의 청년은 결국 이런 아버지세대의 노동이 만든 풍요를 갉아먹는 세대일 뿐이다. 결국 기존 질서의 내면화를 거부하는 그들의 존재의의는 가차 없이 거부당한다. 그래서 감독은 진숙을 그렇게 냉정하게 팽개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가장 냉정한 결말이 이 영화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기만이기도 하다.. 나하영 진숙 정인하 동석 고은님 유미 감독 정인엽 각본 유동훈 , 김원두 촬영 홍동혁 1974년 75분 칼라 판매원 (주)일진프로덕션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1435
내가 이감독을 처음 만난건 1950년대 명동에서였다. 피차 20대 초반의 나이로 영화계에 청운의 꿈을 안고 뛰어들고 나서였다. 당시 명동 한복판(옛날 명동 공원) 바로 옆에 5층 건물 있었고 3층에 고 이병일 (李炳逸) 감독님 사무실이 있었다. 다섯평 정도의 조그만 사무실이었다. 그 사무실에서 이상언 을 처음 만났다. 나는 수도(首都)영화사( 홍찬 사장 경영)에 공채로 합격하여 영화계에 화려하게 입문했으나 얼마 못있다가 영장이 나와 군에 가야만 했다. 군제대 후 영화계에 돌아 와 보니 수도영화사는 최초의 칼라 영화 ' 생명 '( 이강천 감독) 영화 하나만 만들고 어쩐지 비실거리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나는 반실업자가 되어 방황하게 되었다. 어떻게 알음알음으로 이병일 감독님 사무실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그 사무실에서 만난 사람들이 김지헌 시나리오 작가, 이성구 감독, 촬영기사 홍동혁 그리고 이상언이었다. 이상언은 당시 홍동혁 촬영기사의 촬영부 제2 조수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병일 감독님의 작품을 촬영중이어서 그런지 활발한 모습으로 요즘 말로하면 튄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난 연출부 지망이었으므로 직접적으로 이상언과 부딛칠 기회는 없었다. 충무로 바닥이 워낙 좁은 곳이라 길거리에서 이상언과는 눈인사 정도는 하였으나 너는 너 나는 나 식으로 따로 놀았다. 그러다가 내가 이성구 감독 밑에 조감독으로 들어 갔는데 거기 연출부에 상언이 들어 왔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상언 은 일찌기 대구에서 연극을 하였다니까 아마 배우 쪽에 관심을 많이 가졌었나 보았다. 몇편의 영화 출연도 했다고 들었다. 나중에 그가 촬영부에서 카메라를 익히다가 다시 연출부로 뛴걸 보면 상당한 계산을 두고 차곡차곡 계단을 밟지 않았나싶었다. 일테면 상언이는 말을 똑똑하게 잘했고 좀 설친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적극적인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난 그렇치가 못했다. 촬영 현장에서 이성구감독은 이상언 을 주로 상대하면서 작업을 진행시켰다. 나는 현장에서는 상언이에게 밀리는 신세였지만 내가 시나리오를 쓴다는 점에 있어서는 상언이가 나를 경계한다고 할까. 어쨋던 그럭저럭 상언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나 상언이는 술을 못해서 술을 좀 하는 나와는 어울리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상언이 나한테 갑자기 친절하게 대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그 이유가 밝혀졌다. 그의 집이 중구청 뒤쪽 적산집 이층이었는데 모친님과 동생 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무튼 상언이는 자주 그의 집에 나를 끌고 갔다. 그 이유는 그가 구상한 시나리오를 나한테 씌우려고 한 것 같다. 그 시나리오 쓰는 일 때문에 나는 그의 집에서 먹구자고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자연히 상언의 생활 반경이 나한테 노출되었다. 그때 상언의 교제하는 애인이 그 유명한 부인 김숙자 여사였다.(상언은 김숙자 여사를 잘도 물었지) 김숙자 여사는 영화계에서 다 알다싶이 이름 난 헤어드레서로서 김지미 여사와 동거동락 하는 사이였다. 그 때문에 나는 상언이와 김숙자씨 연애하는 사이에 끼어서 맛있는걸 얻어 먹곤했다. 이감독은 1965년도에 합동영화사에서 ' 후회하지 않겠다 ' 란 작품으로 데뷔를 했다. 무난한 데뷔였다. 그는 총 33편의 작품을 감독했는데 이 정도면 영화 감독으로서는 상당한 작품을 감독한 셈이다. 특히 ' 형 ' 이란 작품은 두 번씩이나 리바리벌 활 정도로 힛트를 했다. 형이 택시 운전을 하면서 갖은 고생하여 공부시킨 아우가 나중에 번듯하게 출세를 했음에도 그 신세진 형을 되게 괄세한다는 내용이다. 일테면 (孝) 문제를 다룬 영화인데 많은 관객을 울렸다. 그리고 ' 2박 3일 ' 영화. 이 작품은 연방영화사(사장 주동진 )에서 제작했는데 애당초는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하기로 됐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으나 난 겹치기 연출로 스케쥴이 맞지 않자 이상언 감독이 레디고를 부르게 되었다. 당시 배우는 하명중 윤연경 김희갑 등 호화 캐스팅은 결코 아니었다. 일종의 쿼타용 맞춤 영화였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선전도 별로 하지를 않았고 충무로에서는 아무도 관심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 '2박 3일'' 영화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을 만났을 당시 김위원장과 기자들 사이에 한국영화가 화제에 올랐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갑자기 김위원장이 '2박 3일'' 영화를 아느냐고 기자들에게 물었다.(홍콩을 통해 프린트가 북으로 넘어 간 모양) 그러나 기자들 중에 아무도 그 영화를 본 사람이 없어 잠잠하자, 김위원장이 '2박 3일' 의 영화 내용을 침을 퉁기며 얘기했다고 전해진다. 그 얘기가 또 국내 일간 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연출을 담당했던 이상언 당사자는 이미 고인이 되어, 그 대신 '2박 3일' 시나리오 쓴 나를 기자들이 찾아와 묻기에 인터뷰에 응하고 한 기억이 새롭다. 상언은 참 입담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얘기도 그의 입을 일단 거치면 개똥 철학이든 아니든간에 뭔가 그럴듯한 인생이 담겨 있는 듯 했다. 때문에 상언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은 그냥 듣기만 하면 밑천을 건지고도 남는다. 이상언 이 사망하기 전까지 영화사 사장직을 맡아서 일 한때가 있었다. 김숙자 여사는 이때가 가장 행복했었다고 추억한다. 남편이 영화 감독이 되고 난 후로 제때 또박 또박 월급 봉투를 안겨 준게 생전 처음이라는 것이다. 상언이 친구들 밥 먹이고 술 사는데 쓰는걸 다 알면서도 김여사는 그런 남편이 뿌듯했다고 얘기한다. 나는 이상언의 단골 쯤 되어 그의 술 파티(상언은 그냥 폼으로 술 마시는 형)에 빠지지 않게 끼이게 된걸 지금 생각하면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다. 저녁 때 쯤이면 상언이한테서 전화가 온다. 나는 나 혼자만 불러서 갔는가 혀여 자리를 잡고 앉으면 잠시 후 줄줄이 사탕으로 배고픈(?) 손님들이 하나 둘씩 꾸역꾸역 기어들어 온다. 별로 중요한 일 때문에 만나는게 아니고 그냥 친구들 밥먹여서 보내고 잡담하며 지내는걸 즐기는 상언이인지라 아무 부담이 없다. 거기에는 반듯이 김숙자 여사가 그림자처럼 동석하게 마련이다. 상언이 친구들을 좌우에 좍 거느리고 그 유명한 담론을 쏟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한눈을 팔래야 팔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상언은 얘기의 달인이다. 그의 화제가 값이 있는 건 흔이 술자리에서 있게 마련인 남에 대한 험담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의 인격이 돋보이고 듣는 사람들은 편안해지는 것이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게 있는데 그의 일본말 구사 능력이다. 별로 학구적으로 배운 것 같지는 않은데도 일본말 구사는 기름을 친 듯 거침이 없다. 어디서 언제 배웠는지 간단한 생활 일본어임이 분명한데 그럴듯하게 구사하는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 더러 일본인이 합석하여 상언의 일본어 구사를 듣게 되는데 일본인들이 요절 복통을 하는걸 옆에서 지켜 보면사 감탄 한 일이 한두번 아니다. 원어민을 앞에 앉혀놓고 일어로 웃긴다는건 보통 수준이 넘는다. 난 일본어 원서를 읽지만 회화는 아작도 더듬거리는데 말이다. 언젠가는 상언이 일본갔다가 무슨 집회 같은데서 백여명 넘는 일본인들 앞에서 연설한 하는데 그 자리에서도 되게 일본인들을 웃겼다니 참 대단한 친구다. 상언의 기지(機智)라면 일본어를 기가 막히게 잘 했대서 웃는게 아니라 일부러 어수룩하게, 또는 유치하게 단어를 골라서 함으로서 일본어로 웃기는 그런 재주는 보통이 아니다. 상언이는 한번 일본인을 사귀면 상언이를 계속 쫒아 다니게끔 만드는 모양이다. 특별한 공무가 아니고도 일부러 일본에서 건너 와서 상언이를 만나고 가는 그런 일본친구들을 나도 몇 명인가 인사를 받았다. 그는 무슨 영화인 단체회의 모임에, 주최측은 이미 짜고 진행되는 회의임에도 불구하고 꼭 나서서 독불 장군식으로 한마디 하고나서야 넘어간다. 이상언 은 그런데 단골멤버이다. 이상언이 그냥 말없이 넘어가면 심심 할 지경이다. 그러나 맹탕 헛소리 하는 경우는 드믈다. 외톨이 동끼호테 기질인지 모르겠다. 그에게서 딱 한가지 배울게 있다. 이상언 이 같은 말도 기왕이면 듣게좋게 돌려서, 양념을 처서 하는 솜씨는 일단 평가 해줘야 마땅하다. 그런 그가, 참 잘 나가기 시작하던 그가 뜻밖에도 1993년 6월 14일, 그러니까 지금부터 딱 10년전에 우리 곁을 부랴 부랴 떠났다. 당시 이상언 이 사장으로 있던 SKC 영화사 작품 '남자위의 여자'를 고용남 감독한테 맡겨 한강변에서 촬영 진행중이었다. 특별히 헬리콥터까지 동원되었다. 원래 찰영부에서 솜씨를 닦았고 나중에 연출까지 익힌 이상언 감독이 고영남을 대신하여 헬리콥터에 오른건 숙명이 아니었나싶다. 헬리콥터에서 부감으로 낮게 날게끔 이상언이 독려한건 하나도 이상하지가 않다. 단지 헬리콥터 조종사가 미숙했을 뿐이다. 이상언은 일찌기 촬영부에 있을때 익힌 카메라에 자신만 있지 않았드라도, 또는 감독 출신만 아니었드리도 그런 모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헬리콥터 부감에서 고도를 점차 낮추면서 가장 멋진 캇트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카메라가 돌아가는 신바람나는 그 순간만큼은 이상언에게 있어 어떤 행복감에 도취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는 현장에서 일하다가 고귀하게 순직하고 그 이름을 남겼다. 이상언 의 장례직장에는 영화계에 유례없는 조객이 모여들어 고인을 추도했다. 일본에서도 친구들이 다수 참석했다. 고인에게는 안됐지만 영화감독이 촬영을 하다가 현장에서 타계한건 더 없는 명예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조문진 (영화감독) / 2003년 <프로필> 1937년 2월 1일 경북 김천 출생 1965년 < 후회하지 않겠다 > 데뷔 1993년 6월 14일 타계 <작품 연보> 1965 후회하지 않겠다 / 잃어버린 세월 / 현금은 내것이다 1966 집없는 천사 / 소금장수 1967 동심초 1968 갈망 1969 형 1970 당신을 알고 나서 / 범띠 가시내 / 잊을 수가 있을까 / 저 하늘에도 슬픔이(속) / 누가 그 여인을 모르시나요 / 타인의 집 1971 흐느끼는 두 여인 / 검은 장갑을 껴라 / 오빠 1972 불장난 / 항구의 등불 1973 똘똘이 해상특공대 / 흑조 1974 시집갈래요 / 2박3일 1975 조약돌 1976 별하나 나하나 1978 오빠하고 누나하고 1979 터질 듯한 이 가슴을 1981 0번 아가씨 1982 화순이 1984 형 1985 오싱 / 여자정신대 1987 뜨겁고 깊은 겨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