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영화인 구술인터뷰] 황려희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황려희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대일본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 조선권번기생 오은희 한성권번기생 최옥진 종로권번기생 박금도 빠-「멕시코」 여급 김은희 영화여우 오도실 동양극장여우 최선화 경무국장게 보내는 아등의 서 삼교경무국장 각하여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줍시사고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하략)” 1)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며 경무국장에게 편지를 보낸 장안의 내로라하는 문화계 인물 중에는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卜惠淑(馬利),1904~1982)’도 있었다. 한국의 대중문화, 연예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예의 복혜숙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연극, 영화, 방송에서의 연기 생활은 물론 가수와 성우 활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연예사의 곳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빼놓을 분야는 없기 때문이다. 연극 연기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마호정, 이월화에 이은 세 번째 여성 영화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영화계를 점령했던 예쁘장하고 다소곳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성 배우와는 거리가 멀었던, 배우 복혜숙은 초창기 조선영화에서 담대하고 현대적인 역할을 맡아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복혜숙은 한국 대중연예사에 살아있는 성좌로, 원로 여성영화인으로 선구적인 역할을 해내며 60여년의 연기생활을 이어갔다. (사진1) 왼쪽부터 배우 전계현, 배우 복혜숙, 홍은원 감독 (사진2) 배우 최은희(가운데)와 함께 한 노년의 복혜숙 (오른쪽) 충청남도 대천에서 태어난 복혜숙은 서학을 공부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버지와 담대하고 영민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에게 한글은 물론 한학도 배워 당시 배우로서는 보기 드문 학식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니며 배운 수예에 흥미를 느껴 수예 선생이 될 요량으로,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갔다. 정작 일본에서는 영화, 연극, 가부키에 마음을 빼앗겼다. 특히 <충신장 忠臣藏>에 감동을 받아, 그녀는 연기자가 될 생각에 수예학교를 나와 시와모리 모리노무용소에 입학했다. 하지만 딸을 찾아 나선 일본까지 건너온 아버지는 복혜숙을 자신이 관여하던 강원도 금화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만들어 버렸다. 1920년,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상경한 그녀는 단성사의 인기 변사 김덕경의 소개로 김도산을 알게 되어 신극좌에 입단했다. 이듬해 복혜숙은 <오! 천명>으로 첫무대에 서게 되었다. 복혜숙은 극단이 지방 공연을 다닐 때면 악대를 앞세우고 공연 홍보를 위한 거리행진(街廻り)을 도맡았다. 또 일본에서 여러 번 관람하여 대사를 기억하고 있던 <대위의 딸 大尉の娘>을 각색한 <누교 淚橋>를 직접 쓰고 주연까지 맡아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사진3) 젊은 시절의 복혜숙 극단생활을 이어나가면서도 1925년에 복혜숙은 연기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현철이 세운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했다. 비슷한 시기 극단 토월회에도 입단했다. 토월회의 인기 배우 이월화를 대체할 배우로 복혜숙이 등장했던 것이다. 복혜숙은 토월회가 공연한 <춘향전>의 ‘춘향’ 역으로, <카쥬-샤>의 ‘카쥬-샤’ 역으로 이월화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됐다. 2) 그 뒤에는 조선극우회와 중앙무대로 옮겨 무대에 섰다. 무대에서 인기를 얻은 그녀는 1926년부터는 최초의 방송국 경성방송국에서 시험용으로 내보낸 첫 방송극 <새벽종>(1926)에도 성우로 출연했다. 3) 또 복음성가를 잘 부르던 복혜숙이 음반도 냈다. 영화대본을 직접 연기하듯 읽어 녹음하는 영화극 음반인 <장한몽>(1929)이 그 시작이었다. 이어서 <쌍옥루>, <부활>, 그녀가 출연한 <낙화유수>에서 주인공의 비련의 운명을 담은 주제곡 ‘강남 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강남달>을 선보였다. 그 후로도 <숙영낭자전>, <심청전>, <춘희> 등의 수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곧 1930년 <애(愛)의 광(光)>을 발표하고는 장안 최고의 재즈가수로 불리기도 했다. 4)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다재다능한, 명실공이 그녀는 ‘만능 탤런트’였다. 물론 그녀가 이렇듯 많은 재능을 발휘하게 된 데에는 한국 대중문화사 초창기의 한계적 특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중문화에 투신했던 인원이 적기도 했거니와 연극배우, 영화배우, 성우나 가수 등의 역할 분할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복혜숙은 한국의 개척기 대중문화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쌓은 선구자이자 연예계의 지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주요 활동 영역은 영화였다. (사진4) 영화 <농중조>(이규설, 1926)의 현장. 복혜숙은 아버지의 엄한 감시 때문에 새장 속의 새처럼 집안에 갇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여학생 화숙을 연기했다. 연극계에서는 이미 장안에 이름이 났던 복혜숙은 1923년 영화에도 출연을 시작한다. 첫 출연은 마호정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계몽을 목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윤백남이 연출을 맡은 위생 영화 <방역 防疫>이었다. 5) 출연료 2원을 받은 영화에서 그녀는 길거리에서 파는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눕는 주인의 딸 역할을 했다. 곧 극영화에도 출연하는데, 첫 출연작은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 제국키네마의 <농중조 籠の鳥>(松本英一, 1924)를 번안한 이규설의 <농중조 籠中鳥, 새장 속의 새>(1926)였다. 유교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에서 젊은이들의 자유연애를 다루어 당시로서는 퍽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사랑을 쫓는 신여성 화숙으로 분한 복혜숙은 다리를 노출하기도 하고 안식(이규설)과 손을 잡는 러브신이 있어 인구에 회자되었다. 통속 신파 번역극이라는 비판 속에도, 남녀 학생들에게는 큰 환영을 받았다. 6) (사진5) <낙화유수>(이구영, 1927)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복혜숙은 주인공 기생 역할을 맡았다. (사진6) <낙화유수>(이구영, 1927)에 참여한 스태프들 이듬해 복혜숙은 조선배우학교 시절 선생님이던 이구영이 연출하는 〈낙화유수〉(1927)를 찍었다. 배우학교의 동기생 이원용이 남자 주인공이었다. 이번에는 기생 역할이었다. 당시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기구하게 기생이 된 여인과 젊은 화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린 이 신파극은 개봉 당시 장안의 기생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라며 치맛자락을 휘감고 구경들을 와 더 화제가 되었다. 7) 실연의 마음을 가누지 못해 여인이 투신하는 장면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는데, 장마철에 한강에 자살하기 위해 뛰어드는 장면을 회고하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오고가는 행인들이 여자가 자살한다고 구경이 났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대담한 연기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당대의 다른 여배우와는 달랐다. 그녀는 연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배웠다. 서예를 배우는가 하면 창과 러시아 댄스, 유도는 물론 자동차 운전을 배우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8) 그렇게 배운 솜씨들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사진7) 감독이자 배우 이규설. 복혜숙은 이규설의 작품 <농중조>(1926), <홍련비련>(1927), <순정은 신과 같다>(1928)에서 주연으로 열연했다. 그 뒤 ‘현대학생극’으로 불리던 〈홍련비련〉(이규설, 1927) 9) 에서 복혜숙은 지극히 우정이 깊은 두 대학생 김일과 현진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배우 편실 역할을 했다. 이어 이규설 감독과의 세 번째 작업은 <순정은 신과 같다>(1928)였다. 둘은 지주의 아들 이규설과 소작인의 딸 복혜숙로 만나 부부로 연기했다. 같은 해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에서 복혜숙은 어부의 딸 역을 맡아 사랑에 빠지는 연기를 선보였고, 만주 현지 촬영으로 이월화와 함께 출연했던 〈지나(支那)가의 비밀(일명 흑진주)〉(유장안, 1928)에서는 중국인 거리에 인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을 맡았다. 주연으로 활동하던 이 시절 ‘얼굴이 땡그랗’던 복혜숙은 쾌활하고 발랄한 왈가닥 ‘잇 걸(It girl)’로 불린 클라라 보(Clara Bow)를 닮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10) 해방 이전은 배우 복혜숙의 전성기였다. (사진8)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의 한 장면, 복혜숙은 사랑에 빠지는 어부의 딸 역을 맡았다. (사진9) <지나 가의 비밀>(유장안, 1928) 신문 광고. 만주 현지 촬영을 감행한 이 영화에서 복혜숙은 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이었다. 《동아일보》 1928년 5월 25일자 6면 하지만 배우 활동만으로 생활을 꾸려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1928년부터 8년간 카페 비너스를 운영했고, 이때 결혼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두 젊은이들의 사랑의 도피를 다룬 영화 박기채의 <춘풍>(1935)에 출연으로 영화계에 복귀했다. 안종화의 <역습>(1936)에는 살인자의 아내 역으로 출연하면서 카페 비너스를 제작 사무실로 제공하면서 실질적인 제작에 참여했다.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는 배우가 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정희와 함께 방을 쓰는 음반회사 직원으로 등장했다. 조선인들의 영화 제작이 힘들어진 식민지 말기에는 <감격의 일기 感激の日記>(신경균, 1943), <그대와 나 君と僕>(허영, 1944)를 비롯한 다수의 어용영화에도 출연했다. (사진10) <역습>(안종화, 1936)의 한 장면 (사진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 음반회사 직원 모경숙 역의 복혜숙 1920년대 말 자유분방한 신여성의 아이콘이던 복혜숙이 연기를 전환하게 된 계기는 최인규의 <수업료>(1940)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동시녹음이 진행된 이 영화에서 30대 복혜숙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자식 내외가 행상을 하러 도시로 나가자 소학교에 다니는 손자 영달을 돌보기 위해 넝마를 주우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할머니 역을 맡았다. 당시 그녀 나이 37세였다. 이 영화 이후 그녀는 노역을 주로 맡았다. 인자한 어머니,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상인, 유난스런 할머니 같은, 그녀는 연기력을 요구하는 조역으로 이후 300여 편의 영화에 얼굴을 비쳤다. 또 텔레비전 드라마 <아내의 얼굴>(KBS, 1962), <아씨>(TBC, 1970), <옛날 나 어릴 적에>(MBC 신년특집, 1981) 같은 작품에도 종종 출연하였다. (사진12) <수업료>(최인규, 1940)에서 복혜숙은 병상에 누워서도 어떻게든 손자 영달이의 수업료를 마련해보려는 애달픈 할머니를 연기했다. 해방 후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재와 필름이 부족해 영화제작이 열악했던 시기,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계에서 그녀 역시 주조연을 마다않고 성실히 한몫을 했다.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에 간호사 혜자(황려희)의 어머니를,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에서는 똘똘이의 어머니를 맡았다. 또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여명〉(안진상, 1948), 〈수우〉(안종화, 1948),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도 작은 역이나마 출연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에 입대해 공연을 하며 전장을 누볐고, 잠시 머물렀던 마산에서 촬영한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에서는 전선에서 실명한 아들(최현)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주는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3) <여명〉(안진상, 1948) 신문광고 (사진14)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 신문광고 (사진15)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광고. 아들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 주는 어머니 복혜숙이 보인다. 전후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한국영화계에서 복혜숙은 전성기를 넘은 나이에도 활동을 이어나가는 거의 최초의 여성 배우였다. 더 이상 주연을 할 만한 시나리오가 없었지만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 <아리랑>(김소동, 1957), <조춘>(유두연, 1959), <삼등과장>(이봉래, 1961), <청춘교실>(김수용, 1963), <여판사>(홍은원, 1963), 그리고 미공보원(USIS-Korea)이 제작한 문화영화 <황토길 Litany of hope>(양승룡, 1962)에서 어머니와 할머니 역할을 전담하면서 꾸준히 식지 않은 연기력과 열정 보여주었다. (사진16)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에서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중학교 교사 명호(황해)의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7) <삼등과장>(이봉래, 1961) 구소장(구봉서)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사진18) <황토길>(양승룡, 1962)에서 한센 병을 앓고 있는 시인 한하운(김웅)의 어머니로 출연한 복혜숙 (사진19) <청춘교실>(김수용, 1963)에서는 손녀 셋을 거느린 왈가닥 할머니로 등장했다. (사진20) <여판사>(홍은원, 1963)에서는 치매를 앓고 있어 우연히 독을 마시게 되는 시할머니 역할을 했다. 김수용 감독이 배우 복혜숙이 자신의 영화에서 열연했던 강렬한 장면을 회고한 적이 있다. 해방촌 빈민들의 군상을 그린 김영수의 희곡을 영화화한 <혈맥>(1963)에서 김덕삼(김승호)은 새로 얻은 아내가 자신의 돈을 훔쳐 달아나자, 중신을 선 대폿집 주인(복혜숙)에게 무작정 따지러 간다. 아내를 찾아내라는 어깃장을 놓는 덕삼과 이 어이없는 주장에 맞서는 꼿꼿이 맞서는 대폿집 주인 아낙의 대단한 육탄전이 펼쳐진다. 이 장면에서 복혜숙은 담배를 입에 물고 김승호와 몸싸움을 하면서 거칠게 대거리를 하는데, 그녀는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생활 전선에 나서야했던 강단 있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몸소 보여준다. 김수용의 또 다른 영화 <사랑의 조건>(1979)에서 일흔이 넘은 복혜숙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 필사의 힘으로 한 겨울 눈 내리는 대관령을 넘는 할머니로 특별출연을 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모진 날씨 따위에는 아랑곳없던, 여전히 두 눈에서는 광채를 내뿜으며 서슬 퍼런 연기를 해내던 노년의 복혜숙을 잊지 못한다. 12) (사진21) <혈맥>(김수용, 1963) 중 김덕삼(김승호)과 대폿집 주인(복혜숙)의 육탄전 복혜숙은 평생을 배우로 무대 위와 또 카메라 앞에 있었다. ‘남들이 안하던 때에 배우로 입문해 연예계의 여러 방면에서 초창기 증인으로 또 산 역사 노릇’을 했다. 다방면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여성으로서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 ‘복혜숙 여사의 연기생활 40주년 기념하는 스타의 밤’에는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기꺼이 함께 해줄 만큼 평생 한국영화를 지켜온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평가를 받았다. 또 ‘뭐든 뒤로 미루지 못하는 성격 탓’에, 또 연예계를 통찰하는 식견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로 영화인들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13) 18세부터 연기해 온 그녀의 일대기가 특별드라마 <얼굴>(1981, KBS)로 만들어질 만큼 그녀의 생 그 자체가 한국 대중연예사이기도 했다. (사진22) <대한뉴스>(제 387호, 1962) 연예계 소식 중. 962년 10월 12일부터 2일간 시민회관에서 복혜숙의 연기생활 40주년을 기념하는 스타의 밤‘ 행사가 열렸다. 당시 이원우 공보부 장관이 복혜숙에게 표창을 수여하고 있다. 스크린 밖에서도 그녀는 영화계의 원로로서 업계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발 벗고 나섰다. 1954년 한국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선봉에 섰고, 한국영화협회가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에도 앞장 서 힘을 보탰다. 1955년 대한영화배우협회를 창설해 10년간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1962년부터 한국영화인협의의 연기분과 위원장으로 배우들의 뒷바라지에 힘을 쏟았다. 그녀의 은막 인생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영화는 진용(박재호)의 할머니 역을 맡은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였다. 하지만 78세의 그녀는 아직도 ‘못 다한 일 많아 은퇴할 생각이 없’ 14) 었다. (사진23)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 포스터. ‘윤봉춘 복혜숙 지휘’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24)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에서의 복혜숙 1)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삼천리》 1937년 1월호 9권 1호, 162~166쪽. 2) “명우와 무대(7), 복혜숙 양의 『카쥬-샤』, 부활의 여주인공으로, 토월회 무대에”, 《삼천리》 제5권 4호, 1933년 4월, 11쪽. 4) 복혜숙의 생애는 다음 자료들을 참고해 요약 기술하였다. 『여성실화: 빛나는 성좌 복혜숙』, 명서원, 1976: 이영일, 「스크린을 빛낸 예도 60년-복혜숙」, 『한국영화인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황문평, 「여성 연예계의 선구자 복혜숙」, 『삶의 발자국』(1), 선, 1988; 조영만, 「여배우 복혜숙의 활약」, 『30년대 문화예술인들: 격동기의 문화계 비화』, 범양사, 1988;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복혜숙·이구영 편』, 도서출판 소도, 2003, 이순진, 「복혜숙」, 이승희 외 지음,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도서출판 소도, 2006; .한상언, “한상언의 <한국영화스타>3 :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한국영화의 어머니 복혜숙”, 오마이스타, 2004년 10월 13일,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214631 4) 이동순,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한국 최초 재즈가수 복혜숙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조선Pub, 2013년 10월 18일, 조선Pub 홈페이지 http://pub.chosun.com 5)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복혜숙 편」, 월간 《영화》 1974년 1월호, 53쪽;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3> 영화계 데뷔”, 《동아일보》 1981년 5월 6일 7면. 6) “영화평 농중조 조선키네마 작품”, 《동아일보》 1926년 6월 27일 5면. 7) 안종화, 앞의 책, 157쪽; 김남석, 「배우 복혜숙 연구」, 『인문과학연구』 13,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123~125쪽. 8)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1>”, 《동아일보》 1981년 4월 29일 7면. 9) KMDb에는 이필우가 감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문지상에는 이규설이 감독으로 명시되어 있다. “홍련비련”, 《동아일보》 1927년 2월 5일 5면. 10)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앞의 책, 144쪽. 11)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32세 때부터 노인역만”, 월간 《영화》 1974년 3월호, 68쪽. 12) 김수용,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탄 복혜숙: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2014년 2월 26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http://siwff.tistory.com/503 13)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7> 첫 TV드라마”, 《동아일보》 1981년 5월 26일 7면. 14)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100> 복혜숙 연예생활 60년”, 《동아일보》 1981년 5월 30일 12면.
홍은원 (洪恩遠)은 영화계에서 그 본명과 예명 홍설아(洪雪娥)·홍진아(洪眞娥)만큼이나 여러 일에 종사했다. 그는 스크립터로 출발해 조감독을 거쳐 시나리오작가, 작사가, 감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능을 보인 충무로의 정통파였다. 두 예명에 예쁠 아(娥)자를 넣을 만큼 그는 눈처럼 아름답고 참되게 살려고 했던 것일까. 실제로 스튜디오에선 언니로 통할 만큼 영화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1950년대 중후반 그는 전창근 , 유두연 감독과 허백년 평론가 등 영화인들이 즐겨 찾던 명동 나일구 다방에 자주 나타났다. 명동에는 이 다방과 함께 김승호 , 김동원 , 장민호 와 같은 배우들이 드나든 동방살롱 등이 있었다.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에서 명동 방향 골목에 있던 예술인들의 찻집이었다. 충무로에 스타다방, 청맥다방과 같은 영화인들의 휴식 공간이 미처 생기기 전이었다. 아침에는 으레 날계란을 띄운 모닝커피가 나왔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이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창근 감독 일행과 한자리에 있던 한 여성이 담소 중에 크게 웃었다. 누군가가 야한 농담을 한 모양이었다. 궁금해서 돌아보니 바로 홍은원 씨였다. 작고 가냘픈 몸매였지만 베레모를 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정작 그와 알고 지내게 된 것은 훨씬 뒤였다. 자주 마주치다 보니 은연중에 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직접 만나고 보니 활달하고 정이 깊은 분이었다. 그의 두 번째 감독 작품 < 홀어머니 > (1964)가 개봉된 시기였다. <오해가 남긴 것> 촬영현장 홍은원은 명문가 출신이다. 구한말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홍철주(洪澈周)의 손녀로, 1922년 9월 24일 은행가인 홍우만(洪佑晩)의 2남2녀 중 둘째 딸로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교육자인 어머니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서울 재동국민학교를 거쳐 경기고녀(경기고등여학교, 現 경기여고)에 입학한 뒤에는 학과보다 오히려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광복 전 경기고녀를 졸업했으나 집안 형편이 나빠지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들어가게 된 것이 마루젠(丸善)주식회사였다. 다행히 서적부 소속이라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1년 3개월을 보내고 아버지를 따라 만주 신경(新京)의 반관반민의 직장으로 옮겼다. 1940년 초여름이었다. 그는 새 직장에서 합창단원으로 뽑히고 다시 1년 만에 신경음악단의 홍일점 가수가 된다. 그때 받은 월급이 120원, 웬만한 봉급자의 갑절이 넘는 고액이었다. 조선영화사에서 음악을 담당한 친지를 졸라 최인규 감독을 소개받은 것은 여름휴가를 얻고 경성(서울)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최 감독은 그에게 < 태양의 아이들 >이라는 시나리오를 건네주며 하고 싶은 역할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연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8·15 광복을 맞아 서울에 돌아온 것은 1946년 11월 초순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박계주 작가 일행을 따라 돈암동 최인규 감독 집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는 < 자유만세 >의 주인공인 전창근, 황려희 와 감독을 꿈꾸는 박남 옥도 와 있었다. 최 감독은 그에게 다음 작품인 < 죄 없는 죄인 >(1947)의 스크립터 일을 제의했다. 이때 그가 촬영 현장에서 터득한 것이 영화제작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홍은원은 이 일이 끝나자 다섯 살 아래인 극작가 이용찬과 결혼했다. 그러나 양가 부모의 반대 속에 이루어진 부부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딸(이희재 숙명여대 교수, 박물관장 역임)을 낳고 4년 8개월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여판사> 촬영현장 1953년 초가을 그는 전쟁이 할퀴고 간 서울의 한 모퉁이에서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촬영기사 한형모 였다. 그는 결혼에 실패한 후배를 위로하며 영화로 보람을 찾으라고 권유했다. 이에 힘입어 조정호 감독의 < 여군 >에 조감독 겸 스크립터로 들어가 현장 감각을 익히고, 잇따라 전창근 감독의 < 불사조의 언덕 >(1955), < 단종애사 >(1956)와 이강천 감독의 < 백치 아다다 >(1956), < 사랑 >(1957)의 스크립터 겸 조감독 일을 했다. 특히 “초여름 산들바람 고운 볼에 스칠 때/ 검은 머리 큰 비녀에 다홍치마 어여뻐라”로 시작되는 그의 작사곡 ‘백치 아다다’(김동진 작곡)는 여주인공인 가수 나애심이 불러 크게 히트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홍은원은 그사이 시나리오에도 손을 댔다. 신경균 감독의 < 유정무정 >(1959)과 유두연 감독의 < 젊은 설계도 >(1960) 등이 대표적인 예다. 영화계에 들어선 지 11년 만이다. 이후 시나리오작가 유두연 의 콘티뉴이티 담당 수석 조감독으로 들어가 그의 감독 데뷔작 < 조춘(早春) >(1959)과 < 사랑의 십자가 >(1959)를 완성시키고 윤봉춘 감독의 < 여인천하 >(1962), < 애정삼백년 >(1962) 등에 참여하며 시대물을 익혔다. 그에게 메가폰을 잡을 기회가 온 것은 이 무렵이다. 1962년 4월 <사랑의 십자가>를 찍은 장환(張煥) 기사가 원고 한 뭉치를 들고 찾아온 것이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어느 여판사의 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 여판사 >(1962, 명보극장 개봉)였다. 뜻밖에 화폐개혁이 단행되는 악조건 속에서 어렵게 완성한 문정숙 주연의 <여판사>는 “여감독다운 섬세한 플롯의 전개에 명확한 커팅은 몇 사람의 중견감독을 조감독으로서 오히려 길러낸 숨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새영화 ‘여판사’, 「경향신문」)는 호평을 받았다. 이어 조미령 주연의 < 홀어머니 > (1964, 아세아극장)와 김지미 주연의 < 오해가 남긴 것 >(1965)을 만들었다. 그런데 세 작품 이후 그에게 좀처럼 연출의 기회가 오지 않았다. “홍은원은 환갑이 지나도 다람쥐처럼 영화계를 누비고 다닐 것”이라던 유두연의 예상과 달리 그는 스스로 표현했듯 “환갑은커녕 50세도 못 돼서”(여류감독의 비애, 「세대」 1976년 1월호) 영화 현장에서 물러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앓다가 1999년 1월 5일 세브란스병원에서 76세의 생애를 마쳤다. 37년 전인 1981년 늦은 봄, 첫 여감독과 함께 셋이 커피를 마시며 추억의 영화를 얘기하던 서울 서대문 근처의 다방 정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김영희 편집기사와 홍은원 감독
< 예라이샹 >이라는 영화는 기묘한 구석이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조세영( 신성일 )이 긴급하게 도피하고 있다. 4.19. 혁명의 시간이다. 세영은 난희( 문정숙 )의 집으로 들어간다. 난희는 세영을 모르지만 당시의 정치적 저항에 공감하는 그녀는 오른손을 다친 세영을 의사를 불러 와 치료해준다. 이러한 도입부는 정치적 긴급 상황이 로맨스의 조건이 되는 다른 해방 이후 영화들에 대한 기억을 불러온다. 예컨대 대표적인 포스트 해방 영화 < 자유만세 >(1946)도 이렇게 시작하고 끝난다. “일제하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지하공작을 하던 전창근이 어느 날 일경에게 쫓기다가 총을 맞고 급한 김에 아무 집에나 뛰어 들어가 숨게 되었다. 간호원인 그 집 딸 황려희가 그를 숨겨주어 위기에서 구출된다. 두 사람은 어느덧 사랑을 느꼈지만 전창근은 조국광복에 바친 몸이기에 미처 사랑도 외면해야만 했다. 그런 어느 날 그들이 일경에게 발각된다. 악착같은 일경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조국광복의 날을 눈앞에 두고 장렬하게 죽어간다.” 배경은 이렇듯 1960년의 4.19이고, 세영과 난희의 만남도 혁명의 시간 속에서 배태되었으나 < 예라이샹 >이 사회와 개인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물론 매우 다르다. 우선 세영과 난희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다기보다 난희는 세영을 극진하게 간호하고, 세영은 난희에 감사와 애정을 가지게 된다. 위의 < 자유만세 >와는 달리 세영은 난희를 조국을 위해 외면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계층적 위치가 일차로 문제로 등장한다. 난희는 바 (bar)걸이고 세영은 명문 법대 4학년이라 고시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 계층의 문제가 내러티브의 쟁투 지점은 아니다. 솜씨 좋은 감독이자 흥행사인 정창화 가 조각해내는 긴급 상황 속의 남녀, 세영과 난희에겐 풀어야 할 다른 숙제가 있다. 그것은 이 혁명의 시간과 어긋나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상해에서 일어났던 모종의 사건이다. 이 상해의 시간과 현재 (1960)의 시간의 중첩이 일어나는 시점은 영화가 공개되는 1966년쯤이다. 그 사이 1961.5.16이 있었으나 영화는 그 사건을 부재시킨다. 동시대적 이벤트를 서사의 의식 안에 매립하고, < 예라이샹 >은 과거 상해 조직 세계의 어떤 치명적 문제를, 현재에 간섭하는 역사의 트라우마로 삼고 예의 바걸과 재즈 밴드를 클럽에 소재시켜 ‘Moritat’을 연주하게 한다. 여기서 영화는 역사와 한 시기(period)를 전면화하는 형식과 이별하고, 가정과 세계의 변증법인 멜로드라마와도 작별하여 필름 누아르의 뒤틀린 어법과 미장센으로 우리를 이끈다. 밤의 거리, 밤의 여자인 팜므파탈, 성적 도착, 남성적 힘과 권력의 간극, 폭력의 법, 방관하거나 지나치게 참견하는 국가의 법, 음모, 돈의 어지러운 누빔이 만화경처럼 펼쳐지는 필름 누아르 말이다. 그래서 <예라이샹>은 상해의 프랑스 조계 지역에 주로 거주하며 독립 운동가로서 그리고 문예활동가로서 살아가던 사람들보다는, 당시 가난에 못 이겨 매매춘과 아편 판매를 하던 유민들도 어느 정도 의식하지만, 오히려 <상해에서 온 여인>과 같은 1948년 오손 웰즈의 필름 누아르를 인용하고 있는 듯하다. 웨스턴을 참조한 대륙 활극, 액션 장르, 한홍 합작을 열었던 장르 영화의 대가의 참조체계를 보자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필름 누아르가 불려옴으로써 영화는 상해의 밤과 더불어 미국의 밤을 서울의 밤거리에 이중인화시킨다. 역사적 파편과 당대 긴급성의 선택적 배치 (4.19의 현존과 5.16의 부재), 장르적 관행이 <예라이샹>을 이질적으로 횡단하고 있다. 이것이 기묘한 복합성을 이루는 야래향의 “리좀” 들이다. 야래향의 향기 따위는 이 영화의 관심이 아니다. 환원되지 않는 이질성들이 걸출한 장르 영화 감독이 만든 대중 영화의 데칼코마니적 비/재현 안에서 표출된다. 리좀들이 만들어내는 지도 그리기 (cartography)는 해결되지 않은 도착적인 근대의 기억과 트라우마가 행위자의 연속적 수행에 의해 재연되며 재앙과 비극이 재생산된다. 가까운 5.16을 오히려 부재시키고, 상해를 소환하는 문제는 잠깐 괄호 속에 넣고, 기묘한 시간의 중첩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 예라이샹 >이라는 제목 자체가 대만 가수 덩리쥔의 노래 <夜?香 yelai xi?ng>( 문근영 이 < 댄서의 순정 >에서 번안해 불렀던)를 연상하게 하는 것처럼, 영화는 지리적 상상력의 배후를 서울의 클럽 풍경을 매개해 중국 상해로 끌고 간다. 서울의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명곡 ‘Moritat’는 “미국의 밤”으로의 접속이다. 시간과 공간의 이과 같은 전치적 중첩은 위에서 이야기한 필름 누아르 인용과 더불어, 동시대적 한국 영화의 지형에서 보면 정창화 감독 자신이 성취한 “대륙 활극”과도 접속한다. 대륙을 전면적으로 배경화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 이만희의 대륙 활극이 엮어내는 비대칭적 “역사적 쌍” (강점기의 민족주의와 박정희 체제의 국가주의라는 다른 시대적 요구들을 배치해 비대칭성을 강조하는 < 쇠사슬을 끊어라 >)을 이 영화에 소급 적용해보면 상해의 1930년대와 남한의 1960년대가 어둠의 세계로 겹쳐지고, 거기에 재즈와 댄스가 있는 클럽 문화로 불야성을 이루는 미국의 밤이 삼중 노출된다. 밤에 도착하는 꽃향기라는 야래향을 빌어 말하자면, 밤들이 도착한다. 상해와 남한의 혁명의 어둠 , 그리고 미국의 밤. 다문화라면 다문화이고, 한국 영화가 불러오는 세계라면 세계인데 거기에 역사성과 정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와 정치가 표준어가 아닌 다른 방식의 “은어”, 필름 누아르를 통해 형상화되기 때문에 다른 읽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 은어는 성적 변이와 청산되지 않는 과거의 비밀을 말하기 위한 방식이다. 은어와 더불어 방언이 있다. 필름 누아르의 번역으로서의 방언인 코리안 누아르는 선취된 근대의 밤인 상해를 아메리칸 필름 누아르의 형식으로 말한다. 영화의 도입부는 혼자 칵테일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여자 난희( 문정숙 )의 미디엄 숏으로 거기에 제작 등 크레딧이 올라간다. 팜므파탈이 소개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걸과 엘리트 남자 대학생의 결합은 사실 큰 반대에 부딪히지 않는다. 난희와 세영, 두 사람 모두에게 부모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국이 어수선하기도 하여 세영의 지도교수도 별달리 이들의 관계를 비판하지 않는다. 관계의 문제는 오히려 예의 “상해” 커넥션에서 발생한다. 난희의 단골고객들인 박사장 ( 최남현 )과 허상무( 허장강 )은 난희에게 도착적인 관계를 강요한 사람들인데, 4.19로 가정교사를 하던 집이 불타버려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세영은 박사장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설상가상 박사장과 허상무는 상해에서 난희의 아버지를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 박사장은 어머니를 겁탈해 딸까지 낳았는데 가정교사로 들어간 세영을 흠모하는 박사장의 큰딸이 바로 박사장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난희의 이복자매다. 물론 난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상해에서 아버지의 옛 친구가 “중공”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돌아와 이 비밀을 알려주는데, 그는 박과 허에게 살해당한다. 난희는 클럽에서 춤을 추다가 박사장을 죽여 복수한다. 그녀는 감옥에 갇히고 세영과 난희의 이복 자매가 그녀를 찾아온다. 복수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복수를 통한 정의의 구현이라기보다는, 허망한 정서가 만연하지만 젊은 세대의 패배는 아니다. 팜므파탈적 여성의 소란한 출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4.19를 거친 새로운 젊은 남성 엘리트가 처한 어떤 국면, 함정, 유혹, 필요 등을 포착한다. 그가 법대생이라는 것은 우연한 설정만은 아니다. 법을 이해해야 하는 사람이 목도하고 관계하게 된 상해에서 서울에 이르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폭력적 (불)법의 존속. 난희는 그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하고, 체험하게 하지만, 몸으로 그 사태를 받아치고 끊어내는 것은 그녀 자신이다. 아버지가 부재한 세대, 5.16은 괄호 부호 속에 여전히 은밀하게 숨어 있고 어머니 대신 팜므파탈적 여성이 과거의 매듭을 끊고 간다. 5.16의 텍스트 속 은닉과 더불어 구조화된 부재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역사적 언급이나 참조다. 필름 느와르, 재즈의 문화적 형식을 빌어 미국적 모더니티는 텍스트의 형식으로 통합되어 있고, 상해는 두 명의 악당 에이전시를 통해 불려오나 한국 근대사에서 상해가 놓여있는 자리, 맥락은 일제 강점기이나 이 텍스트에는 그런 컨텍스트적 의식이 없다. 증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언급했듯이 대륙활극, 한홍합작 등을 이루어낸 감독의 지정학적 역사 판타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나이트 클럽이 끝날 때를 기다려 난희를 찾아온 세영과 밤길을 걸어갈 때 난희가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이전 이들은 고통을 겪었다. 세영의 표정을 살피며 난희가 “사랑해”라고 말하고 거리는 어둠 속에 있고 그들은 계속 걷는다. 표정과 언어와 발걸음, 카메라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정동을 미묘하고 가슴 저리게 전한다. 한국영화사에서 드문 장면이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어두운 골목길에서 움직이며 전달할 수 있는 여성의 자리, 여배우 문정숙 의 탁월한 연기의 성취는, 순간적이나마 “세계를 안에서부터 밖으로, 밖에서부터 안으로 ” (아리프 딜릭) 읽는 하이데거의 월딩의 새로운 자리이며 열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