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승리
- 제작년도
- 1971
<만다라>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스튜디오가 인플루언서들의 극찬을 수집할 수 있다면 누가 영화평론가를 필요로 할까요?” 2023년 7월, 《가디언》에 실린 기사의 도발적 제목은 영화 저널리즘이 직면한 현실을 꼬집는다. 평론가 마누엘라 라직은 < 바비 >(그레타 거윅, 2023)의 런던 시사회 경험을 크게 두 가지 풍경으로 일축했다.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인플루언서들 사이에 합류한 기자에게도 각종 굿즈를 건네주는 안내원. 그리고 이어지는 독려. “긍정적인 느낌을 공유해주세요!” 프리랜서 크리틱인 그는 자기 계정에 무슨 말을 쓰려다 말고 개봉 이틀 전에야 엠바고가 해제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당황했다고 쓴다. 기사는 가뜩이나 영화 매체의 대중문화적 위상이 위기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이와 같은 문제 제기가 무슨 소용인지 자조하는 모순적 자기검열로 마무리된다. 올해 칸 기자회견장 옆자리에서 통성명한 《인디와이어》 에디터에게 용기 내 이 기사를 본 적 있냐고 물었을 땐 심드렁한 답변이 돌아왔다. “뻔한 소리, 요샌 부정적 평가를 미리 예측해서 특정 비판은 하지 말아 달라는 식의 가이드도 오는데요 뭘.” 비평가를 위한 친절한 가이드라. 선댄스발 코미디 영화 제목 같다고 생각했다. 취재 기자의 실무는 산업적 관점에 자주 노출되고 그래서 홍보, 마케팅 환경에 질식하기도 쉽다. 잡지사의 생리는 작품의 시의성이나 신속한 이슈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영화는 너무 성급히 말하게 되고 어떤 영화에 대해서는 말할 기회를 놓친다. 다각의 요구와 마감 시한, 닥쳐오는 개봉작들을 포용하는 이 일은 자기 감식안의 모서리를 ‘업계’의 비바람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 극장에서 상영관을 확보하는 영화들은 중·저예산의 참신한 기획을 내건 작품들조차 아찔할 정도로 안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맞서지 않고 있다가는 예리해지긴커녕 시시각각 풍화될 가능성이 크다. 행여 영화기자의 호러라는 장르가 생긴다면 명대사는“그래, 그래도 이 정도면 좋은 영화지”일 것이다. 취재의 특권은 비평 앞에서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그보다 본질적으로는 분열하고 충돌하는 내면의 목소리들이 가끔 시끄럽다. 이 일은 자연스럽게 필름메이커들의 속내와 고충을 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과물로서의 작품 이전에 만드는 과정과 방식을 관찰하는 일도 중요해진다. 걸작이든 범작이든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말한)다. 주관적 진실 속에서 창작자의 자부심과 소통하는 저널리스트의 객관성은 늘 자기 의심의 대상이다. 현장 비평을 향한 열의가 때로 거의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겠다는 실의를 동반한다. 매주 지면 안팎에서 줄다리기가 열린다. 감독, 창작자, 제작진의 예술적 비전을 정확히 전달하고 해설하는 중간자의 본분이 한쪽에, 작품 본연의 의도보다 평자의 패러다임이 선명한 창조적 쓰기가 다른 한쪽에서 실랑이하는 형국이다. 잡지계의 악명 높은 평론가 폴린 카엘에 관해 《뉴요커》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반대자(contrarian)”라고 정의한 바 있다. 카엘의 탁월한 반대는 역설적으로 발굴과 호명으로 이어졌다. 그는 지금은 고전이 된 < 보니 앤 클라이드 >(아더 팬, 1967)를 구해내어 할리우드가 그 명성을 스스로 재창조하도록,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독려한 인물로 기억된다. 걸출한 반대자의 식견, 호전성, 무시무시한 헌신과 성실함을 동경하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가 않다. 문제는 지금 여기에 선 사람의 막막한 과제다. <만다라> 중 법운과 지산 번뇌 앞에서 임권택 감독의 < 만다라 >(1981)를 되짚어본다. 6년의 수행에도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자조 속에서 고뇌하는 승려 법운( 안성기 )은 술 취한 탕아 행색이 더 어울리는 행자 지산( 전무송 )과 스치고 헤어지길 반복한다. 법운은 지산에게서 구도의 가능성을 본다. 그의 야생성은 안쪽에 자리한 단호함과 순수를 동경하게 만든다. 그러나 법운의 갈망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지는 끝내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신당의 불상 점안식을 도운 뒤 마을 어귀에서 술에 의지하던 지산은 불탑 아래 엎드리며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얼어 죽는다. 지산을 발견한 법운은 그동안 자신이 찾아 헤맸던 깨달음을 하나의 형상으로 발견한 사람처럼 슬피 운다. 혹한의 날씨에 불상 앞에 납작 엎드린 자세로 굳어버린 수행자를 기리는 마지막 의식이 곧 법운의 몫이 된다. 지산의 죽음 이후 법운의 행적에 어떤 망설임도 없어 보이는 것이 신기하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처럼 움직인다. 임권택 감독, 송길한 작가, 정일성 촬영감독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통과하며 청년들의 죽음이 들려오는 시절의 수치와 공허를 절감하는 중에 <만다라>를 만들었다. 지금 돌아보기에 <만다라>는 시대를 감당하기 힘든 이들의 흔들림이 걸어갈 수 있는 하나의 길, 우회로를 터 내는 영화다. 말미에 이르러 법운은 승려라기보다 매개자로 변모한 모습이다. 암자에 불을 붙여 다비를 마친 후, 법운은 지산이 잊지 못했던 여인 옥순( 방희 )을 찾아간다. 지산의 유품, 그가 직접 조각한 매우 고통스러운 얼굴을 한 불상을 전하러 간 것이다. 이어서 법운은 오랫동안 외면했던 어머니를 찾아가 더 이상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담히 전한다. 직접 불붙인 암자의 화마를 잠자코 지켜본 뒤 여관방과 다방을 향한 법운은 혼란을 거두고 세속의 안쪽을 통과한다. 유품을 건네고 어머니(들)에게 (대신) 안부한다. 이 뜻밖의 행로에서 법운은 자기 안에 지산이, 또 다른 죽음들이 들어찬 사람같이 부지런하다. <만다라>의 마지막에는 먼 길을 걸어가는 매개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다시 방향을 뒤집어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움직임이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그는 멀어진다. 물론 되돌아오기도 할 것이다. 불탑 앞 기도하는 자세의 지산 / 암자에 불을 붙인 법운 속세와 구도의 경계에서 겁먹은 수행자의 클로즈업이 종내에 아득한 롱쇼트로 바뀌어 갈 동안 나는 극장에 앉아서 짐짓 딴생각을 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말을 전하고 의식을 치르는 매개자의 역할이 품을 수 있는 쓸모 같은 것을 궁리했다. 창작자와 관객, 예술과 산업, 비평과 저널리즘 사이에서 각각의 형식과 규격, 정당성 같은 것을 찾고 또 찾는 것이 아니라 영화 매체의 본래적 지향과 그것을 만들고 보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태계에 제각기 충실할 수 있다면. 영화를 만드는 데 바탕이 되고, 이미 만들어진 영화가 관객에게 가는 경로를 터 낼 수 있다면. 한 주에 80페이지가 훌쩍 넘어 과연 어느 성실한 독자가 다 소화하고 있는 것인지 근심하게 되는 지면에 틈새를 더 파내어 보기로 한다. 이상할 정도로 말해지지 않는 영화들 쪽으로 조금 더 움직여보기로 한다. 슬며시 머릿속에 내게 주어진 길 하나를 그려본다. 직업적 특권 아래 남보다 조금 일찍, 그리고 조금 더 많은 영화와 영화 안팎의 사람들이 지나가게 하는 길. 이 길이 안녕하냐고 물어올 때 드리우는 암울한 직업적 자의식을 거둬내고 나면 답은 간명하다. 저널리즘과 비평가를 위한 가이드가 주어지는 현실은 동시대 영화 매체가 처한 메마른 환경부터 극명히 가리킨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중심에서 바깥으로 다시 밖에서 안으로 황무지를 횡단하는 시도의 필요를 믿어볼 때다. 영화 안팎의 안부를 그러모으는 매개자의 눈과 손이 겁을 떨쳐내기를. 말끔히는 어렵더라도 부단히, 부단히. <만다라> 중 김소미(영화기자) l 영화주간지 《 씨네21 》 취재팀장. 책 『불이 켜지기 전에』(2025)를 썼다.
* 본 영화글은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영화+글’ 시리즈 3: 영화 비평 쓰기> 과제 선정작입니다. 녹색 기사가 자신의 머리를 들고 사라지자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크리스마스 연회가 계속된다. 가엾은 가웨인(데브 파텔)을 두고 약속한 1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흐르고, 이제 그는 자신의 목을 바치기 위한 모험을 떠나야 한다. 그런 가웨인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관심은 무척이나 지대해 그의 미래를 예견하는 인형극까지 만들어질 정도이다. 서로의 목을 번갈아 내려치는 가웨인과 녹색 기사, 즉 지나간 크리스마스와 다가올 크리스마스의 간극을 원판의 그림 배경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담아낸다. 이 조악하게 꾸며진 시간의 흐름과 인형극에 열중한 마을 사람들의 정적인 리액션 숏이 교차한다. 배경을 교체해 끼우지 않고 그것을 이어서 회전시키는 것. 운동과 부동성의 아이러니한 공존. 서막의 짧은 시퀀스는 < 그린 나이트 >가 보여줄 강렬한 장면의 예고처럼 느껴진다. 그 장면을 말하기 위해서는 조금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시체로 뒤덮인 황무지에서 홀연히 나타난 소년(배리 케오간)이 가웨인의 등 뒤로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진다.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소년의 정체는 곧바로 드러난다. 그가 이끄는 강도 무리는 가웨인의 말, 허리띠, 도끼를 강탈하고, 가웨인은 꽁꽁 묶여 비참한 꼴로 숲에 버려진다. 그런데 잠자코 가웨인을 응시하던 카메라가 그를 버리고 시계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프레임은 자연의 소리와 함께 계절에 따라 변하는 숲의 풍경을 담는다. 이윽고 원점으로 돌아오자 유골이 된 가웨인이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그런데 카메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녹음이 우거졌던 숲이 서서히 낙엽이 깔린 익숙한 풍경으로 돌아오고, 다행히 살과 가죽이 붙은 가웨인이 정신을 차려 탈출한다. 누군가는 가웨인이 사실 이 장면에서 죽었으며, 이어지는 모든 내용이 그의 사후세계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중년의 가웨인이 목이 잘려 명백한 죽음을 맞게 되는 순간은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또 다른 이들은 이 야심찬 카메라 움직임이 가웨인을 각성시키기 위한 최악의 미래에 대한 상상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정말 그것뿐인가. 그렇다면 감독은 단순히 경우의 수를 보여주기 위해, 심지어는 기껏 움직였다가 다시 돌아오는 (+)(-) 360°, 즉 0의 결과를 감수하며 약 2분의 시간을 정적인 자연을 담아내는 모험을 한 셈이다. 무엇보다 이 카메라 움직임을 단순한 환상의 시간으로 스쳐 보낼 수 없었다. 나를 사로잡은 원점으로 돌아오는 무위의 운동, 이 장면을 다소 도전적으로 읽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카메라가 죽음의 시간을 거슬러 가웨인을 살려내는 행위,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부활이 아닌가. 죽었던 가웨인을 다시 살려내는 기적이 영화에서 이 순간 한 번뿐인 것은 아니다. 녹색 성당에서 도망친 이후 ‘집으로의 여정’ 파트가 시작되자 모든 등장인물이 목소리를 잃는다. 비장한 사운드트랙이 흩어진 시간의 파편을 하나로 엮어낸다. 그 안에서 가웨인은 첫 아이를 얻고, 전쟁으로 그를 잃고, 새로운 여인과 결혼하기도 한다. 그의 왕국이 멸망을 목전에 두고, 홀 안으로 적들이 쳐들어오는 절체절명의 순간. 바로 그 카메라 움직임이 반복된다. 왕좌에 앉은 가웨인을 두고 카메라가 반시계 방향으로 돌기 시작한다. 철문을 부수는 적들이 보이고, 가웨인 곁을 지키던 가신들이 하나둘씩 떠나간다.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 홀로 남은 가웨인이 자신을 지켜주던 허리띠를 뽑아내자 그의 목은 무형의 무언가에 의해 날카롭게 잘려 나간다. 멀쩡히 붙어있던 머리가 갑자기 떨어질 때 느껴지는 당황스러움, 나는 그것을 이미 겪어보았다. 이 시점에 영화는 돌연 가웨인을 녹색 기사와 조우한 성당으로 옮겨 놓는다. 가웨인의 목은 굳건하게 붙어있고,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되살아난다. 그런데 이 시퀀스에는 앞선 숲속의 장면과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 하나가 결여되어 있다. 카메라가 반시계 방향으로 돌기 전, 죽어가는 가웨인을 방치해두고 자연을 담아내던 순방향의 움직임이다. 살이 다 썩어 유골로 변하기까지 아주 긴 시간을 압축한 그 운동. 여기에 녹색 성당에서 빠져나온 이후 가웨인의 삶, 늘어진 시간의 목을 끊어 잇는 장면들이 겹쳐지자 비로소 두 운동의 조응관계가 완성된다. 이 일련의 장면들은 앞선 화면과 달리 모두 모서리가 어둡게 비네팅되어 있어 현실감각을 떨어트리는 동시에 그 장면들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결국 가웨인이 녹색 성당에서 빠져나와 왕좌에서의 최후를 맞이하기 전까지의 시간은 죽음을 향해가는 운동과 다름없다. 카메라가 회전하기 직전 왕좌에 앉아 침묵하는 가웨인이 유골만 남은 그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렇다면 카메라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 유골 상태였던 가웨인이 되살아나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그때처럼, 그는 목이 바닥으로 떨어진 직후에 곧바로 부활할 수밖에 없다. 가웨인은 이 왕복운동을 하는 동안은 주인공 자리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영화는 처음에는 아예 그를 프레임에 담지 않는 방식으로, 두 번째에는 인물의 목소리를 빼앗아 시간의 노예로 끌고 다니는 방식으로 그의 주체성을 앗아간다. 그리하여 이제 이 운동의 주인은 시간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의지를 가지고 카메라를 조종하는 이 시간은 가웨인을 되살려내면서까지 명백하게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하다. 무엇을 해야 그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가웨인은 시곗바늘이 원점으로 돌아올 때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손목을 결박한 줄을 끊어내 숲을 탈출해야 했고, 기사의 덕목을 해치는 마법의 허리띠를 빼내야 했다. 결국 이런 영웅적 결단이 가웨인을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며, 그가 결심하기 전까지는 그를 거대한 시간의 흐름에 가둬두는 수밖에 없다. 정작 가웨인은 자신이 시간의 흐름에 갇혔다거나 부활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영화에서 가웨인의 부활이 주는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오롯이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의 몫으로 돌아간다. 카메라가 느릿하게 회전하는 동안 참아왔던 숨이 충격적인 죽음과 부활의 순간을 목도한 후 확 터져 나오는 그 순간. 무엇이 그의 부활을 종용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파고드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다시 주어진 삶의 기회를 어떤 방식으로 이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피해갈 수 없는 과정인 죽음이, 영화에서는 패배나 종말이 아닌 새로운 도약과 기회로 그려진다. 되살아난 그는 여정의 끝에 자신의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도끼에 머리가 잘려 나갈 것을 알면서도 허리띠를 빼낸다. 영화가 초월적인 힘을 빌려오면서까지 가웨인을 되살렸던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린 나이트>는 선고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오히려 생생해지는 가웨인의 얼굴을 통해, 한 인간이 두려움을 털어내고 죽음과 맞서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버틸락 성의 귀부인이 가웨인의 초상화를 그려준다며 커튼을 치기 시작한다. 이미 초상화가 있다는 연약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두운 공간에 갇히고 만다. 19세기에 발명된 사진술, 니엡스의 헬리오그래프가 14세기 영국의 서사시를 재현한 영화에서 이루어진다. 이 사진은 영화의 마지막 왕궁 홀의 벽면에 걸려 있다. 그림은 화가의 주관에 따라 이리저리 변형되며 상상 속 존재들도 얼마든지 캔버스 안에 재현될 수 있다. 반면 사진은 피사체의 실존을 ‘그 자체로’ 증명해주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이 최후의 순간 그 자리에 초상화가 아닌 사진이 걸려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가웨인이 이 세계 내에 존재했음을 명백하게 증명하는 사진 앞에서, 그는 비로소 유한한 운명에 반항하듯 자신의 죽음을 마주 본다.
얼마 전 서울에서 체코의 애니메이션 감독 얀 슈반크마예르의 회고전이 열렸다. 조촐한 규모였지만 한국에서도 이 감독의 인지도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는 귀중한 회고전이었다. 체코에서 태어난 얀 슈반크마예르는 어린 시절부터 체코 전통 인형극에 몸을 담았으며, 초기 경력 역시 인형극 연출가로 시작했다. 그랬던 그는 1964년 첫 단편 <마지막 속임수>를 만들면서 애니메이션으로 영역을 옮겨가게 된다. 이후 체코 초현실주의와 접촉하게 되고, 슈반크마예르는 결국 노선을 변경해 초현실주의를 기조로 삼기 시작했다. 공산당 독재의 엄격한 검열 아래에서도 몇 개의 단편을 만들며 경력을 쌓던 슈반크마예르는, 1980년 < 대화의 가능성 >이라는 단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1988년 첫 장편 < 앨리스 Neco z Alenky >을 찍게 되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얀 슈반크마예르의 < 앨리스 >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슈반크마예르는 단편을 만들던 시절 이미 루이스 캐럴의 넌센스 시 ‘재버워키’를 영화화하면서 루이스 캐럴의 세계에 관심이 있다는 걸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이처럼 앨리스의 영화화는 슈반크마예르의 평생 프로젝트 중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슈반크마예르의 또 다른 평생 프로젝트는 ‘파우스트’다. 이것도 1994년 영화화되었다.) 슈반크마예르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앨리스의 각색물들이 원작을 동화로 해석하는 행태가 못마땅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이미 디즈니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거쳐 간 이 동화를 슈반크마예르는 어떻게 바라봤을까?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 특유의 환상성과 영어라는 언어를 통해 유창하게 쏟아지는 작가의 필력, 그리고 작품에서 풍기는 독특한 광기로 많은 창작자들이 재구성하고 해체하길 즐겼던 텍스트다. 주목할 만한 예로는 2000년에 출시된 미국 현대 고딕 문화와 만화적 상상력이 접목된 게임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가 있다. 아메리칸 맥기는 앨리스의 등장인물들을 마구잡이로 해체해 캐롤이 가지고 있던 긍정적이고 순진무구한 에너지를 싹 빼고 앨리스를 고딕 서브컬처와 그랑 기뇰적인 고어로 점철된 심리 호러로 재구성했다. 그에 비해 슈반크마예르의 < 앨리스 > 역시 각색이 이뤄지긴 했지만, 대체로 루이스 캐럴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과 서사, 캐릭터에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 앨리스 >는 맥기의 앨리스와 다른 방식으로 이상하다. 도입부에서 슈반크마예르는 앨리스의 입을 빌려 말한다. “당신은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아마도”. 이 “아마도” 야말로 <앨리스>를 이상함으로 인도하는 마법의 한 마디다. 우선 슈반크마예르가 기용해 앨리스를 연기한 아역 배우 크리스티나 코흐토바는 심술?을 정도로 원작 삽화가인 존 태니얼이나 디즈니가 정립한 앨리스 상에서 도망가고 있다. 원작과 상이한 비주얼도 그렇지만 이 앨리스는 대체로 위축되어 있으며, 이상한 나라의 주민들을 향한 반응도 어딘가 소극적이다. 슈반크마예르가 만들어내는 이상한 나라 역시 앨리스만큼이나 원작에서 멀리 있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가다가 이상한 나라로 떨어지는 시퀀스는 슈반크마예르의 재해석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원작을 읽은 사람이라도 이 시퀀스를 보는 순간 루이스 캐럴의 원작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잠시 믿지 못할 것이다. 박제된 토끼는 진열대 유리를 깨트리고 발에 박힌 못을 뺀 뒤 황무지를 달려가 책상 서랍으로 사라지며, 앨리스는 토끼가 들어간 서랍 속에 들어갔다가 컴퍼스를 비롯한 문구류로 깔린 터널을 헤쳐 지나간다. 이 시퀀스는 전원적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먼지와 녹이 슬어 있는 황폐함으로 가득하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도착하면서 < 앨리스 >의 이상함은 본색을 드러낸다. 슈반크마예르가 만든 이상한 나라는 화사하기는커녕 텁텁한 색감과 조명으로 이뤄진 폐쇄적인 공간이다. 과격한 프로덕션 디자인도 그렇지만 이 나라의 주민들은 한술 더 뜬다. 디자인부터 그들은 캐럴의 유쾌한 유머에 봉사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원전에 쓰여 있던 행동을 생기 없게 반복한다. 여기다 갑작스러운 음향 연출, 기괴한 소도구, 체코 인형극의 전통을 스톱 모션으로 옮겨 놓은 애니메이팅도 이들의 비인간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이 세계에서 유일한 인간인 앨리스 역시 그런 애니메이팅 속에서 종종 길을 잃곤 한다. 앨리스가 축소되어 인형이 되는 시퀀스가 원작과 달리 무시무시하게 다가온다면, 그 생기 없는 애니메이팅에 감염될 것만 같은 공포 때문일 것이다. <재버워키>에서 보였던 단초가 <앨리스>에서 본격화된 셈이다. < 앨리스 >의 세계는 기계적인 ‘음울함’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이 음울함은 영국에서 상상할 법한 질감의 음울함이 아니다. 오히려 변방의 유폐된 정서에 가깝다. 이 이상한 나라를 언급할 때 체코가 낳은 위대한 작가들인 프란츠 카프카나 카렐 차페크가 언급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이 슈반크마예르는 <앨리스>를 만들면서 원전을 자신이 살고 있는 체코로 옮겨 놓은 뒤 재해석하고 있다. 이 재해석은 마리오네트처럼 체코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며, 유럽에서도 다소 변방인 체코 사회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결과는 신선하다. 슈반크마예르는 원작이 가지고 있는 광기를 동유럽/체코 문화의 전통에서 재해석하면서, 그간 <앨리스>를 각색한 영미권 창작자들과는 다른 가능성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 앨리스 >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하나는, 대부분의 서사 전개가 앨리스의 독백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다. 이 애니에서 이상한 나라의 주민들은 대사가 없다. 정확히 말해서, 말하는 장면에서도 입만 뻐끔거릴 뿐이다. 대신 앨리스가 독백을 통해 그들의 생각이라든가 대사를 대신 전달해준다. 그런데 슈반크마예르는 이 독백을 화면밖에 배치하지 않고 독백을 읊는 앨리스의 입술을 확대해 찍은 뒤 중간중간에 삽입하고 있다. 슈반크마예르의 다른 작품들에서 입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를 드러내는 장치였다면 (단편 <자연의 역사> < 대화의 가능성 >, 장편 <쾌락의 공모자들>이 대표적이다.) <앨리스>에서는 조금 다르게 앨리스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에서 ‘애니메이팅’되지 않는 인물은 앨리스뿐이기 때문에 독백을 읊는 입술 샷들은 영화 전반을 차지하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과 충돌하게 된다. 독백 내용 역시 (원작의 서술을 차용한 거겠지만) 앨리스 자신의 생각마저 3인칭화해서 들려주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뤄져 있다. 요컨대 말을 할 때도 자기 목소리 없이 뻐끔거릴 뿐인 스톱 모션 인형들과,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데다 아예 전지적 시점의 내용까지 말하는 앨리스 사이에서 어떤 긴장 관계가 성립하고 있다. 이런 대립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다만 영화 속 ‘이상한 나라’가 체코의 문화적 전통에 기반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슈반크마예르 본인의 의도는, 자국에 대한 비평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슈반크마예르는 자신의 작품들은 ‘정치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 앨리스 >는 사람들이 떠올릴 법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다루는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하지만 발표된 지 3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많은 이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그 매력은 대체 무엇일까? 여기서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앨리스>의 원제 < Neco z Alenky >는 “앨리스의 무언가”라는 뜻이다 슈반크마예르는 타국의 고전 문학의 충실한 각색물을 만드는 대신, ‘무언가’를 끄집어내 새로운 걸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그 ‘무언가’는 체코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개성이기도 하고, 원전이 가지고 있던 다른 측면이기도 하며, 슈반크마예르만이 가능한 초현실적인 상상력이기도 하다. 이 ‘무언가’의 위력은 직접 봐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