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호녀
- 감독
- 허우샤오셴
- 제작년도
- 1995
- 출연
- 이능정, 임강, 고첩, 채진남, 위조혜 , 희상 , 여리근
#1. 1990년대에 영화의 매혹에 빠져들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정성일이라는 평론가를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내가 그를 인지하게 된 것은 잡지 「로드쇼」를 통해서였다. 잡지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편집자들의 짧은 글이 사진과 함께 실렸는데, 늘 사진 속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편집 후기에서는 영화보다는 음악 이야기를 더 많이 했던 거로 기억한다. 그 남자가 정성일이었다. 90년대 초, 내가 다니던 근처의 대학에서 정성일 평론가가 강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몰려갔다. 강당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없었고, 객석의 반응도 그닥 열광적이지 않았다. 강연의 마지막 즈음 U2의 어떤 뮤직비디오를 보여주며 독특한 영상기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조차 반응이 없었다. 그때 정성일 평론가는 치욕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여기 오신 분들은 U2보다 김수희를 들으시나 봐요.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학생들은 그제야 쑥스럽게들 웃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날 밤은, 임권택 감독의 < 길소뜸 >(1985)에 나왔던 롱테이크, 신성일 이 누웠다가 일어나며 프레임에서 사라지다 들어오길 반복하는 그 장면을 충격적으로 목격한 날이기도 했다. 그 강연 이후, 몇몇 학생들은 정성일 평론가와의 뒤풀이 자리에 갔다고들 했는데 소심했던 난 그냥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 후 ‘정은임의 영화음악실’이 있었고 「키노」가 있었다. 복사에 복사를 거듭해 화질이 엉망인 VHS를 보며 영화에 대한 갈증을 채우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 희생 >에 2만 5천 명의 관객이 들고, 영화 전문 잡지가 계속 쏟아져 나오던 그때로 시간은 마냥 흘러갔다. #2. KMDb 영화글의 편집자로서, ‘한국영화걸작선’에 정성일 평론가의 글을 받기 위해 수년간 연락했지만, 늘 불발되었다. 그는 거절하며 언젠가 한 감독의 작품에 대한 글 연재를 하고 싶다는 답을 해온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정성일 평론가는 임권택 감독의 전작 리뷰를 KMDb에서 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다. 그 ‘한 감독’이 임권택 감독이라는 것은 놀랍지 않았지만, 전작 리뷰 옵션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때부터 자료원 안에는 담당자들이 꾸려졌고, 정성일 평론가와 몇 번의 만남을 가지며 여러 가지 협의 및 사전 작업을 끝냈다. 현존하는 임권택 감독 영화의 리스트가 만들어졌고, 그 영화를 어떻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도 강구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2012년 11월 5일, ‘서문’을 시작으로 이 연재는 시작되었다. 당시 칼럼 오픈 이벤트도 있었는데, 우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 연재가 모두 끝나고 거나한 쫑파티를 하자, 그리고 이벤트에 당첨된 사람들을 그때도 초청하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에는 대략 4년 정도 후면 그 파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의 야심보다 빨랐다. 그 시간 속에서 처음 칼럼 제목이었던 ‘임권택x101’은 < 화장 >(2014)의 제작으로 ‘임권택x102’로 바뀌었고, 미보유 영화가 새로 발굴되어 써야 할 글이 늘어나기도 했다. 여러 인터뷰가 비평 글 사이사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임권택 감독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술되었다. 그러면서 작은 임권택의 우주는 스스로 생명을 가진 듯 점점 넓어졌다. 정성일 평론가는 매번 거대한 원고를 넘겼다. 도저히 한 호흡으로 읽히지 않아 퇴근길 전철 안에서 나머지 원고를 읽으며 때로는 탄식하고, 때로는 갸우뚱 하며, 때로는 다시 읽어야겠다며 가방 안에 원고를 주섬주섬 다시 넣었던 그 원고들을 편집하고 참조할 이미지를 준비해 온라인에 올렸다. 그리고 다음에 쓰일 영화를 인코딩했다. 그렇게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프로젝트가 어느덧 절반에 다다르고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이 인터뷰는 편집자인 내가 정성일 평론가에게 제안했다. 인터뷰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 프로젝트를 환기시키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여전히 주요한 이유다. 독자는 인터뷰를 통해 절반이 지나간 이 프로젝트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장면 ‘#1’을 지나온 어떤 사람이 두 번째 장면 ‘#2’을 거치며 그저 정성일 평론가와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가, 실은 이 인터뷰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음을 알아챌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인터뷰이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 인터뷰의 두 번째 이유가 된다. 유성관_ 2012년 11월 5일, KMDb에서 ‘임권택x102; 정성일, 임권택 을 새로 쓰다’ 칼럼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모두 43개의 글을 연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들은 34편의 임권택 감독 영화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은 35번째 영화 < 그 여자를 쫓아라 >가 업데이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칼럼을 시작했던 2012년 기준으로 현존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모두 76편이었습니다만 지금은 2015년 연합영화공사 한규호 대표의 자료를 수집하면서 < 전장과 여교사 > 한 편이 더 늘어나 77편이 되었습니다. 연재를 시작하신 지 3년 5개월의 시간이 흐른 셈인데요, 이 프로젝트가 끝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그 정도의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대략 대장정의 절반에 도달한 지금, 필자로서 간단한 소감을 듣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성일_ 무엇보다 먼저, 이건 내가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가졌던 프로젝트이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상충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맨 처음에 내가 제안을 했을 때도, 솔직히 이야기를 하면,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유성관_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그 자체의 두려움이었던 건가요? 정성일_ 그렇습니다. 시작을 한다면 끝을 봐야 한다는 것인데, 중간에 힘들다고 중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었죠. 일단 시작하면 나로선 많은 것들을 중단하지 않으면 계속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 프로젝트는 영상자료원의 도움이 없이는 진행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쪽 손으로는 (이미 진행 한) 임권택 감독의 전작 인터뷰를, 또 다른 손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전작 평론을 갖고 싶다는 건,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떨치기 힘든 욕심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어떤 비평가도 한 사람에 대한 전작 비평을 쓴 적이 없었죠. 하지만 저는 이 일을 누군가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이런 비평 프로젝트는, 존경해마지않는 하스미 시게히코 평론가조차도 하지 못했는데, 그도 오즈의 전작 비평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그걸 한국에서 해보고 싶었던 거였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내 배움을 검토하는 자리도 되기 때문에 내 자신에게도 매우 간절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사실 맨 처음 생각으로는 3년 4개월이 지난 이 시기 즈음에는 연재가 거의 다 끝날 것으로 생각을 했죠. 하지만 진행하면서 이게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심지어는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어떤 영화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도 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그걸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마치 하나의 생명인 것처럼,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었고 이런 활동이 저로서는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힘이 된 것이죠. 그런 과정 속에서 사실상 앞으로 쓰일 글에서 나의 비평의 내면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흥미진진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내 견해에 대해 고스란히 카피하는 과정이라면 지루했겠죠. 하지만 과정 안에서 비평의 내면이 새롭게 활동하는 힘을 느낄 때 나로선 이 글을 쓰는, 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는 배움을 청하는 것이었다면, 이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배움을 청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유성관_ 그렇다면 이 질문이 꼭 나올 수밖에 없겠습니다. 왜 임권택 감독인가요? 정성일_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의미는... 이렇게 생각해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과정을 통해 영화를 처음 사랑하고, 반복해서 보면서 배움을 청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을 이해하고, 생각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보며 얻는 배움은 잡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에 관련된 책, 영화와 관련이 없더라도 그 책을 보조하는 철학, 사회학, 인문학, 역사 배경 등의 자료를 찾게 됩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영화를 보다가 책에 가까이 가는 순간, 이론과 불장난을 벌이게 되어있습니다. (그 이론과의 사투가) 영화에 대한 지식을 구하는 것처럼 전도되기 시작하고, 그다음부터는 이론들이 이 비평가의 영화에 대한 견해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이건 굉장히 나쁜 상황이란 것을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알았습니다. 내가 너무 감사한 것은, 내 나이 20대 중반 시절, 그때가 80년대였다는 것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구조주의, 기호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시즘 등이 거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지만, 이것에 대해 나의 선배 중에서 그것들을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 세대들은 고스란히 그걸 책에서 배운 것이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의 모든 것들을 깨달은 것 같은 이론적 도구를 가지고 영화를 난자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수술은 성공했는데 환자가 죽었다는 것. 매번 그런 어떤 허망한 느낌이 들었었을 때에, 정말 운 좋게, 저로서는 세월이 훨씬 지난 후에야 운이 좋았음을 깨달은 거지만, 임권택 이라는 감독과 인터뷰를 하게 된 것입니다. 1987년. 이 임권택 이라는, 오로지 영화를 만들어 온 경험만으로 영화에 대한 배움을 청하고 자기를 끊임없이 새롭게 혁신시켜나간 감독. 하지만 이것에 대해 나를 만날 때까지 그 누구와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죠. 이 어린 유치하기 짝이 없었던 애를 만날 때까지 말이죠. 아무도 그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고, 본인도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던 그는 원시림 상태였습니다.(웃음) 만약에 그 당시 임권택 감독이 수많은 인터뷰로 굉장히 숙련된 상태였다면 난 많은 도움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나는 원시림을 완전히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 과정 속에서 영화라는 것이 말하자면, 너무나 간단한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것, 즉, 창작이라는 과정의 예술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책으로는 틀림없이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몰랐던 것들. 임권택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 자신의 방법론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나에게 영화와 이론이 뒤집혔던, 전도되었던 관계가 제자리를 찾게 된 겁니다. 나는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기 전과 후가 있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 후에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영화감독을 만나는 것이 나의 임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임권택 감독을 만나 후, 왕가위, ‘키노’를 만들면서 만났던 홍상수와 김기덕, 그리고 부산에서 만났던 지아장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전주영화제를 하면서 처음 사람으로 만났던 후 샤오시엔, 그다음에 만나게 되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그리고 왕 빙까지. 이 과정은 전적으로 임권택이라는 배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 이상한 말이지만, 왕 빙 다큐멘터리, < 천당과 밤의 안개 >(2015)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임권택 감독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임권택이라는 한 영화감독의 세계로 들어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개인적인 이유라면, 또 하나의 공적인 이유가 있는데, 이 글을 써나가면서 한편으로 내 글의 목표 중 하나는, 1962년 후의 한국영화사, 혹은 1962년 이후의 한국 근대사를 다시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글의 숨은 나의 욕심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연대기적으로 쓰지 않는다, 가 처음부터 원칙이었죠. 작년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갔을 때 장 프랑소와 로제가 똑같이 지적해줘서 너무 기뻤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권택 전작 회고전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이 사람이 한국영화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만희라는 위대한 감독의 이름을 알고 있고, 유현목, 신상옥, 김기영이라는 위대한 이름도 알고 있지만, 그 감독들은 특정한 시기에 위대한 감독들이었다. 오직 임권택만이 완전히 다른 시대를 오로지 자신의 방법을 통해 그 시간을 경유하여 온, 말하자면 한국이 한국전쟁을 끝내고 근대화가 시작된 그 시점에서부터 21세기까지 건너온 유일한 이름이다. 그의 작품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동시에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것이자 한국 영화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완전하게 동의했습니다. 이 글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임권택뿐만 아니라 한국영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한국영화사에 대한 나의 입장이 어떤 것이며, 한국영화에 대한 한 비평가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여기에 기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성관_ 연재의 서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과거의 영화를 현재의 자리에서 미래에 개방하기’로 새로 쓰기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셨습니다. 어쩌면 이곳의 글은 우리가 흔히 읽어 온 일반적인 비평 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에 걸맞게 서문에는 또한 ‘비평의 변주’라는 대목도 있는데요, 한 마디로 필자 자신이 생각하는 이 연재 안의 ‘글’이란 무엇일까요. 정성일_ 명백하게 이 글들은 텍스트 비평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처음부터 피하고 싶었던 것이죠. 한 편의 영화를 미학적으로 평가하고, 영화 안에서 영화에 대한 네트워킹을 찾아내며, 그 영화에 한정 지어진 방법을 찾아내는 것으로는 임권택 감독 영화의 세계, 한국영화사 속에서 임권택 감독이 갖는 위치, 그리고 그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한국영화사의 지도를 배회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임권택 감독을 정의할 때 쓰는 방법 중 하나인데, 누군가 임권택 감독은 어떤 감독이냐 질문할 때, 난 “이 사람은 시행착오의 대가”라고 답변합니다. 이 점이 임권택 감독 영화의 가장 위대한 점 중 하나입니다. 모든 감독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임권택 감독은 특히 만일, 자기를 혁신시키려는 노력이 자기의 예술의 방법론이 아니었다면 60년대의 수많은 범작들 속에서 70년대로 넘어오지 못했을 것이고, 70년대의 국책영화로부터 80년대의 마스터로 올라오지 못했을 겁니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임권택 감독은 스스로 말합니다. 60년대 영화의 많은 작품들은 형편없습니다. 나쁘죠. 하지만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 영화는 앞의 영화에서 못한 무언가 한 가지는 더 한 영화입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임권택 감독의 모든 영화는 일종의 전 미래시제입니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 그렇게 했어야 할 것인데, 라는 걸 포함하는 영화라는 의미입니다. 과거의 경험 없이는 이 영화는 없는 것이죠. 앞의 영화의 절대적인 반성 없이는 다음 영화는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이 영화의 실패만이 이다음 영화에 대해 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쪽으로 열릴지는 앞 영화만으로는 알 수가 없죠. 어떤 영화에 5개의 실패가 있었다고 칩시다. 그중 무엇이 가장 뼈아픈지는 당장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쪽 방향으로 가리라 생각했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쪽으로 나갈 때가 있는 겁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보면, 같은 영화를 두 번 만드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내면적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렇다는 말이죠. 앞에서 못 한 걸 뒤에서 반드시 합니다. 여기에서 잘 안 된 게 저쪽에서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담아 두었다가 세 번, 네 번 건너뛴 다음에 다섯 번째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1981년 임권택 감독은 < 만다라 >를 찍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은 건 하나였겠죠. 원작은 소승불교를 가던 법운이 대승불교를 가는 지산을 닮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던 임권택 감독은 마지막에 원작 소설을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가는 사람은 절대로 대승불교로 못 간다는 것이죠. 이건 그냥 소승불교를 가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소승불교의 길을 남성적인 길이라 이해하고, 대승불교의 삶을 여성적인 세계로 이해한 후, 이걸 < 아제아제 바라아제 >(1989)로 옮겨오게 됩니다. 또 다른 예. 모든 사람들이 성공작이라 생각하는 < 서편제 >(1993)를 임권택 감독은 스스로 실패작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그걸 < 천년학 >(2006)으로 다시 찍습니다. 임권택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서편제>는 다시 보기가 두렵다. 이유는, <서편제>는 그 영화를 찍을 때 내가 판소리를 너무 몰랐다. 그래서 온통 내가 몰랐다는 것만 보인다.” 하지만 < 춘향뎐 >(2000)을 찍은 후에는 <천년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영화는 전 미래시제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한편으로는 지나간 시간을 영화가 끌어안는 한편, 미래를 향해 자신의 영화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죠. 나는 그 방법론을 어떻게 해서든지 비평 안에서 정식화시키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정식화의 과정이 이론적 방식이 아니라 비평의 방식으로 제시하고 싶은 비평가의 소망이 있는 겁니다. 유성관_ 이 칼럼의 글을 읽다 보면 혹은 평론가님의 특정 영화에 대한 강연을 듣다 보면 영화에 대한 견해, 글 자체가 또 하나의 창작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정성일_ 고마운 표현이죠.(웃음) 혹은 과분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들이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대한 문제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있겠죠. 나는 비평의 방법론이 멈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의 방법론도 영화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수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영화에 대한 평가의 수정뿐 아니라 방법론에 대한 수정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다지 눈여겨볼 이유는 없겠지만, 내가 썼던 비평 글은 예전 글과 비교해보면 그간 많이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소망하는 바는, 나의 비평이 그 영화와 닮은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 소망이지는 모르겠습니다.(웃음) 유성관_ 영화와 닮은 비평이란 무엇일까요? 정성일_ 그걸 정식화시켜놓으면 바로 그곳으로 떠나야겠죠. 개념화하거나 도구화한다면... 그건 이론이 해야 할 일이지 비평이 할 일은 아닐 겁니다. 유성관_ 이론가와 비평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정성일_ 발터 벤야민이 한 말을 빌리자면, 한 편의 작품이 타오르는 장작과 같은 것이라면 이론가들은 장작과 타고 남은 재만이 관심이겠지만 비평가들은 타오르는 불꽃의 신비로움 그 자체만이 관심인 것입니다. 유성관_ 연재를 하면서 지금까지 좋았던 것, 혹은 아쉬웠던 것, 뜻밖의 보람 같은 것, 이를테면 굉장히 의외의 사람에게 잘 읽고 있다는 고백을 받았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정성일_ 의외의 고백이라면, 이 비평을 잘 읽었다는 중국 영화 비평가나 일본 영화 비평가를 만났을 때입니다. 그럴 때는 이 사람이 어떻게 한글을 읽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한국말을 못하는 사람인데 말이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에, 생각보다 넓게 읽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죠. 하지만 나의 좀 더 큰 소망은 넓게 읽히기보다 오래 읽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연재가 끝난 다음에도, 혹은 내가 세상에 있지 않은 시간 후에도 임권택 감독을 연구하는 비평가, 이론가들, 혹은 맛보기 시작하는 시네필들이 참고할 수 있는 좋은 기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 글이 시간을 견딜 수 있는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좀 더 두고 봐야겠습니다만.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좋았던 점은... 견해가 바뀔 때입니다. 어떤 영화를 다시 보고, 그 영화를 다시 생각하면서... 이를테면 이런 거죠. 예전에 영화를 봤었을 때는 인터뷰를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비평을 쓰기 위해서 볼 때는 그 목적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 영화를 보는 나의 자리가 옮겨가면서 이 영화를 다시 바라보게 될 때 그 영화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할뿐더러 견해 자체가 바뀌는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 한 편으로는 신나다?(웃음) 그와 동시에 지금 연재의 절반이 지나왔는데, 벌써 다시 쓰고 싶은 글이 있다는 것은 아쉬움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걸 어쩌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연재가 거의 끝나갈 즈음, 문득 이 글로 바꿔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유성관_ 그런 영화에 대한 글은 바꾸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같이 두는 게 좋을까요? 정성일_ 얼터너티브 버전?(웃음) 그건 그때 가서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성관_ 편집자로서는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올라갔던 글이 언제 올라갔다는 것과 그리고 새로 쓴 글이 몇 년 후 언제 올라갔다는 것까지 모두 기록에 남는 것이니까요. 그 자체가 평론의 아카이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선 모두 살아남는 것은 어떨까 하게 되네요. 이미 현재도 그런 글들이 있다는 거지요? 정성일_ 물론 있지요. 유성관_ 어떤 영화인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정성일_ 아직은 비밀입니다.(웃음) 현재 읽은 독자들에게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이번에 낭트와 파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가서 그런 영화들을 스크린으로 다시 보게 된 겁니다. 그때 갑자기 아, 이 영화에 대해서는 생각을 바꾸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성관_ 잘 알겠습니다. 그 영화에 대한 새로운 글은 다시 기다리는 거로 하고, 연재 기간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웃음) 평론가님이 늘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는 글 안에서 참조되는 영화 캡처 이미지가 동영상이었으면 하는 것이었는데요. 정성일_ 그렇죠. 나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스틸사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동영상 참조가 가능하다면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기술적인 이유, 저작권의 이유, 제작비의 이유... 등등이 있을 테니까요. 유성관_ 저희도 저작권만 해결된다면, 물론 힘은 들겠지만 충분히 할 수는 있습니다. 정성일_ 그런데 이렇게 짧은 동영상에 대해서도 꼭 저작권 협의가 필요한 걸까요? 비상업적이고 학술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허문영 평론가의 ‘존 포드 이야기’ 쪽에서도 아쉬워할 것 같은데 말이죠. 유성관_ 평론가님도 지금은 숏바이숏 글을 잠시 멈추신 상태이지만, 허문영 평론가의 ‘존 포드 이야기’에서도 한 장면에 대해 길게 언급하는 장면은 많지 않습니다. 아무튼 평론가님이 다시 숏바이숏을 분석하는 글이 올 것을 대비해 저희 쪽에서도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평론가님이 아까 인터뷰 중에 말씀하시길, 하스미 시게히코도 오즈 영화의 전작 리뷰를 하지 않았다 하셨는데, 혹시 다른 평론가의 전작 리뷰 사례가 있는지요? 정성일_ 이론가들은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보드웰이 오즈의 전작을 리뷰했죠. 작품별로. 보드웰은 에이젠슈타인도 그렇게 설명했고요. 유성관_ 트뤼포는 히치콕과의 인터뷰 말고 리뷰를 쓴 적은 없었나요? 정성일_ 인터뷰만이죠. 인터뷰라면 나도 진즉에.(웃음) 유성관_ 그러고 보니 요즘 사놓고만 있다가 미뤄두고 있었던 책, 「트뤼포」를 평론가님이 ‘영화천국 48호’ 시네필 특집 글 ‘10권의 책’에서 가장 첫 책으로 언급해주신 김에 이제야 꺼내서 읽고 있습니다. 정성일_ 앙투안 드 베크와 세르주 투비아나가 쓴 그 책, 굉장히 빨리 읽히지 않나요? 정보량도 만만치 않고. 그 책을 읽다 보면 그 당시 영화 컬처 전체를 알게 됩니다. 전기는 그렇게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만 아는 게 아니라, 씨네 클럽부터 시작해서 ‘까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진들 그 후의 고다르, 리베트, 샤브롤, 바쟁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비평의 흐름, 영화의 흐름, 누벨바그의 전체적인 흐름까지도 딱 잡히는 책입니다. 굉장히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성관_ 그 책을 읽으면서 눈에 뜨인 것이 있었는데, 트뤼포가 작가정책을 가져가면서, 그 작가에 대해 이야기해야지 개별적인 작품에 대해 혹평한다든가 하는 것은 지양한다는, 이를테면 아벨 강스의 <악의 탑>에 대해서는 굉장히 실망했지만, 그 당시 트뤼포는 ‘아르’지를 통해 <악의 탑>을 옹호하면서 아벨 강스에 대해 작가적으로 접근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평론가님이 이 칼럼을 진행하는 것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일_ 감사합니다.(웃음) 유성관_ 어떤 작품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정말 없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전작 비평’이기 때문에 그런 영화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밖에 없죠. 그런 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정성일_ 정직하게 말해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에 할 이야기가 없는 영화는 없습니다. 60년대 영화를 볼 때 느끼는 점이죠. 허문영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도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는 “하지만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 60년대 영화도 나쁜 영화는 나쁜 영화다.”라고 이야기했고, 나의 대답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나쁜 영화입니다. 하지만 나쁜 영화이기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는 영화인 거죠. 즉, 이 사람의 영화에서 이런 나쁜 점들이 이 사람의 어떤 서명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나쁜 측면이 임권택이 남겨 논 한국영화사의 서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쁜 것에 대해 내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임권택의 나쁜 습관 혹은 한국영화사가 임권택 영화에 침입하여 남겨놓은 나쁜 상처, 그리고 그런 것들이 영화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잘 설명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빴던 60년대 한국영화를 설명할 수 있는 비평의 방법론을 내가 여기서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여기에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큰 배움이 하나 있는데, 브레히트가 했던 말 중, “좋은 옛날에서 시작하지 말고, 나쁜 현재에서 시작하라.”라는 게 있습니다. 이 말이 정확히 적용되는 건 아니겠지만, 변주해서, 나쁜 임권택을 잘 설명할 수 있을 때만, 훌륭한 임권택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난 임권택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왜. 좋은 임권택의 영화 속에 나쁜 임권택이 동거하고 있음을 지금 나는 이제 명백히 알 것 같습니다. < 취화선 >에는 60년대 임권택이 있습니다. 혹은 < 서편제 >와 < 하류인생 >에도 나쁜 임권택이 있어요. 굉장히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걸 감추고, 한편으로는 변형시키고, 좋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 임권택 감독은 여러 가지 훌륭한 테크닉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젠 뭐가 있는지 보이고 있어요. 그게 보이지 않았던 유일한 영화는 오직 < 춘향뎐 > 뿐이었습니다. 그건 완전히 과거로부터 끊어내고 다시 찍은 영화에요. 그래서 <춘향뎐>은 임권택 영화 중 예외 중 예외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최고 걸작을 완전히 예외의 영화로 찍은 겁니다. 그래야만 최고의 걸작을 찍을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그러한 영화적인 경험을 통해 영화 전체를 통과하고 있는 하나의 어떤... 딱히 개념어로는 제시할 수 없지만, ‘그 무언가’가 거기 있습니다. 그 불길한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이 저의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에게 넘겨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결론을 갖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그 무언가’를 해명하는 것이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해야 할 일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유성관_ 임권택 감독이 어떤 감독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시행착오를 거친 감독이라고 소개한다 하셨는데, 가장 걸작은 과거와 모든 것을 끊어 낸 단 한편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정성일_ 그런 점이 흥미롭죠. 그래서 < 춘향뎐 >을 처음 봤을 때는 쇼크였습니다. 완전히 다른 영화를 들고 왔을 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심지어 <춘향뎐>을 맨 처음 봤을 때 비평가로서 이 영화를 무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어요. 이건 예외. 임권택 에는 두 개의 영화가 있다는 거죠. 그의 모든 영화와 <춘향뎐>. (웃음) 유성관_ 이 연재를 통해 평론가님은 임권택 감독, 안성기 배우, 영상자료원의 장광헌 당시 자료서비스부장, 송길한 작가, 허문영 평론가, 봉준호 감독으로 인터뷰를 이어왔습니다. 작년, 2015년에는 아쉽게도 유일하게 인터뷰가 진행되지 않은 해였습니다. 현재 예정 중인 인터뷰이가 있다면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성일_ (이미 이야기가 된) 강수연 배우를 만나야 하는데, 부산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라 지금은 진행할 상황이 아니죠. 김홍준 감독 역시 인터뷰할 계획인데 < 서편제 > 즈음에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직 <서편제>는 다룰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좀 더 뒤로 미뤄두고 있습니다. 그다음...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임권택 감독에게 배움을 청했던 한국영화 감독을 한 명 더 했으면 합니다. 유성관_ 예전에 봉준호 감독과 인터뷰 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말씀이시죠? 정성일_ 그렇죠. 그다음에... 허문영 비평가와 마찬가지로 임권택 감독에게 배움을 청했던 영화 평론가 중에서 누군가와 대화했으면 합니다. 유성관_ 염두에 둔 사람이 있는지요? 정성일_ 현재로써는 없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사실 안타까운 점은, 이청준 작가가 곁에 있었다면 인터뷰를 했을 텐데 하는 생각.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 안타깝죠. 또 잘 성사될는지는 모르겠지만, < 개벽 >을 쓸 즈음에, 도올 김용옥 선생을 인터뷰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그분을 뵙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며, 임권택 감독이 한 기간 동안 이 철학자를 일종의 멘토로 여겼고, 많은 철학자의 사유 방식을 배워왔기 때문에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중요할 거로 생각해요. 만년필을 가지고 가야 하나?(웃음) 유성관_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김용옥 선생과 인터뷰하면 좋고 재미있겠습니다. 하지만 담당자로서 녹취가 걱정되긴 합니다.(웃음) 정성일_ 그 외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유성관_ 저도 딱히 없지만, 이 전에 이야기 나왔던 임권택 감독에 대해 관심이 많은 젊은 비평가들과의 대화에 관심이 있습니다. 정성일_ 누가 있을까요? 유성관_ 그게 누군가라는 게 여전히 잘 잡히지 않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임권택 이라는 감독에 대해 관심이 있는 평론가를 찾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해보면 참 희한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정성일_ 임권택 감독을 어려워하는 것도 있을 겁니다. 유성관_ 편집자로서, 허문영 평론가와의 대화, 그리고 ‘영화천국’ 대담을 통한 김홍준 감독과의 대화가 대단히 인상적이어서 그런 대화를 또 듣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앞으로 그런 대화가 또 있길 바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대화 중에 < 춘향뎐 > 이야기도 나왔고, < 만다라 > 이야기도 나왔지만, 이와 같이 우리가 흔히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 걸작이라는 영화, 혹은 널리 알려진 영화들 대부분이 아직 이 연재를 통해 쓰이지 않았습니다. 정성일_ 일부러 뒤로 배치해 놓은 상태입니다. 이 영화들이 이어지는 선을 쳐다볼 생각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죠. < 만다라 >를 쓴 다음에는 반드시 그다음에는 < 아제아제 바라아제 >를 쓸 겁니다. 그다음 < 개벽 >은 어떤 순간에 딱 끊어내면서 쓰게 될 것이고, 그리고는 < 취화선 >을 쓰게 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짝패를 이루게 되는 겁니다. 혹은 이제까지 없었던 방식의 글 중 이런 방식도 있을 겁니다. 한 편의 영화를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1부, 2부, 혹은 3부로 나눠 쓰는 영화가 나올 것입니다. <취화선>의 경우는 그 영화 자체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영화에 164회 차 촬영 중 90여 회 차를 참여했기 때문에 현장에 있었던 임권택 감독의 인상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있을 겁니다. 세 번째 글은, <취화선> 이 영화는 절대적으로 임권택 감독 자신에 대한 자서전입니다. 그래서 그 영화 속의 대사를 통해 예술가에 대한 태도를 재구성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취화선>을 그러한 방식으로 재구성해서 임권택이라고 하는 한 예술가가, 장승업이라고 하는 한 예술가를 반추시키면서 자신의 예술관을 어떻게 설명했는가에 대한 글 역시 진행될 겁니다. 유성관_ < 취화선 > 외에도 이렇게 몇 가지 다른 버전의 글이 올라올 가능성이 있을까요? 정성일_ < 춘향뎐 >도 그럴 것입니다. 그 영화도 한 번에 설명하기엔 중층적인 영화라, 두 개의 글이 짝패를 이루면서 서로가 서로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쓰일 것 같습니다. 이 칼럼이 인터넷으로만 남을지, 책으로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책이 만들어진다면 <춘향뎐>에 대한 글은 두 개의 버전을 쓰고, 하나의 버전은 오른쪽에, 또 하나의 버전은 왼쪽에 배치하는 편집을 했으면 합니다. 유성관_ 안 그래도 이 칼럼에 대해 책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필자로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성일_ 이거 전집 수준이 아닌가요(웃음). 보낸 원고 중 100매가 넘는 원고가 꽤 있는 거로 압니다. 유성관_ 맞습니다. 분량이 적다고 해도 80매, 90매인데, 텍스트의 절대적인 양보다도 글에 첨부된 이미지들도 어떤 식으로 편집되는 게 맞는가 하는 게 의문입니다. 평론가님은 책이 나온다고 하면 동의하는 건가요? 사실 처음에는 전적으로 온라인 프로젝트였습니다. 정성일_ 맞습니다. 그래서 매수와 관계없이 쓴다는 거였죠. 하지만 이건 내가 절대적으로 종이 세대이기 때문에, 종이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종이로 옮겨 졌으면 좋겠어요. 이는 절대적으로 자료원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니, 자료원의 입장도 포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유성관_ 연재의 마지막 영화는 뭐가 될까요? 정성일_ < 화장 >입니다. 실은 <화장> 직전의 영화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 짝코 >. 임권택 감독의 많은 지지자들이 뽑는 영화들의 최고 걸작은 < 만다라 >와 < 서편제 >이잖아요. 다음 세대의 임권택 감독의 최고 걸작은 <짝코>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음 세대에게 보내는 저의 러브레터?(웃음) 유성관_ < 짝코 >는 5년 후에나 그 글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정성일_ 그 영화는 명백히, 임권택 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임권택 감독다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어떤 정수가 담겨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임권택 영화의 상처와 모순, 문제와 힘과 가능성, 그 모든 어떤 복잡한 것들이 한 편으로 모여있는 것을 들자면, 그게 < 짝코 >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낭트에서 개막작은 <짝코>였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고, 결국 두 행사 모두 <짝코>로 시작했습니다. 유성관_ 이 칼럼에 국한된 질문은 아니지만, 꼭 듣고 싶은 답변이 있습니다. 평론가님의 글에 대해 변치 않는 질문이 있는데, 어렵다. 혹은 읽기 힘들다, 왜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써주지 않느냐, 는 말을 오랜 시간 합니다. 이에 대해 평론가님은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정성일_ 그분들은 실망스럽겠지만, 그런 지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내 글이 잘 읽히고, 잘 전달되고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글이라는 건 그 사람의 의식, 생각의, 좀 멋있게 말하자면 사유를 기록하는 흔적이라 생각합니다. 흔적을 읽어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글은 그 사유를 카피하는 것이고, 카피의 과정을 통해 이 사람의 뇌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흐름을 읽어 나가는 것이지, 이 글 자체가 사유와 동떨어져서 문법 자체와 수사학의 번들거림에 종속되는 것은 일종의 분장이라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것보다 어떤 대목들은 명백하게 나 자신의 글이 비문이란 걸 아는 대목도 있습니다. 물론 주어가 두 개, 이런 문장들은 고치지만, 애매하게 비문인 그런 문장들이 있어요. 이런 문장들이 문제가 되는 거로 생각하는데, 어디서 끊어 읽는가에 따라 비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나의 판단은 하나입니다. 이게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생각했었던 그 사고에 대한 기록인가, 그 문장 구조 자체가 그렇다고 판단되면 내버려두는 쪽입니다. 나중에 나의 글을 읽어볼 기회가 있을 때, 내가 왜 이렇게 썼지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이런 문장을 통해 아, 이래서 내가 이렇게 썼구나, 하는 환기하는 순간이 있어요. 그런 울퉁불퉁한 모퉁이들을 글에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고, 독자들이 이런 글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독자는, 그걸 읽는 게 목표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가장 실망스러운 독자는, 글을 통해 정보를 갖고자 하는 독자들입니다. 그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실망스러운 독자는 지식을 갖고자 하는 독자들입니다. 한편으로는 내 마음속에 그런 독자들로부터 내 글을 방어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 정보를 갖고 가고자 하는 독자들을 실망시키고, 지식을 갖고 가고자 하는 독자들을 좌절시키고 싶은, 대신 내가 사고하고 있는 것을 쫓아와서 아, 이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독서의 방법론을 가져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언제든지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걸 공유하고 싶은 것이고 그 과정만이 나의 글 쓰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나의 문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인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음에도 나의 뇌의 구조를 알 수 있도록, 글이 카피해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임권택 전작 리뷰 연재를 통해 어떤 글은 쓰는 데 보름 이상 걸리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유성관_ 몇 년간 KMDb에서 ‘영화글’이란 섹션을 유지하면서, 요즘 영화에 대한 글을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독자가 남아있는가, 혹은 영화에 대한 글을 생산하는 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으며 또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 라는 고민을 늘 합니다. 영화 글이라는 것이 그럼에도 지속되어야 하는 게 맞다면, 왜 그런 것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정성일_ 이 질문은 글에 대한 역사 쪽에서 보는 것이 훨씬 더 걸맞은 대답이 될 것입니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보죠. 영화에 대한 비평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모두들 말하고 있지만 그 표현과는 정반대로, 정확하게 표현하면, 영화 비평가의 글을 싣고 있는 지면이 줄고 있는 것이지 영화에 대한 글은 폭발하고 있습니다. 온갖 블로그, SNS에서 영화에 대해 쓰지 않는 사람이 없고, 영화를 보면 쓰고 싶어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쓰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읽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겠죠. 즉 남의 글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줄어들고 있다는 문제의 핵심은 어쩌면 글 자체라기보다는 플랫폼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플랫폼은 그 콘텐츠를 올바로 전달하는가, 네트워킹을 하는가, 그 플랫폼들이 그걸 읽고자 하는 사람들을 목표로 정확하게 도달하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KMDb도 그걸 성실하게 운영하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이런 홈페이지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이렇게 플랫폼을 정성스럽게 운영하는 것뿐 아니라, 온라인 속에서 글을 원하는 사람들과 올바르게 접속하는 일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핵심이 아닐까요? 반격이랄까?(웃음) 정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영화아카데미 학생들도 KMDb를 몰라요. 영상자료원 홈페이지가 있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상영일정만 보고 나오는 게 다인 거죠. 영화학교 학생들도 홈페이지를 모를 정도라면, 홍보를 좀 더 잘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유성관_ 갑자기 제 쪽으로 이야기가 넘어온 것 같은데 플랫폼에 대해서는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웃음) 그럼에도 여전히 궁금한 것,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에 대한 남이 쓴 글을 읽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고, 또 영화에 대한 글이 폭발하고 있다고 해도 SNS에 쓰는 짧은 영화 인상 낙서들이 범람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한 지금, 여전히 진지하고 긴 영화에 대한 글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성일_ 저는 SNS를 통한, 전적으로 인상에 의지한 메모도 훌륭한 영화평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런 평이 섬광 같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남들보다 먼저 시사를 보고 나와 으시대는 잡담을 셈에 포함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여전히 영화를 본다는 체험을 글로 옮긴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 영화를 본 시간의 리듬을 어떻게 옮기느냐의 문제입니다. 저는 영화에 관한 훌륭한 글을 읽으면서 종종 위대한 비평가들이 그 리듬을 온전히 구현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비평이 때로는 영화에 완전히 안기거나 혹은 반대로 품어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영화평은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들 때 정말 힘이 있는 것입니다. 혹은 보고 싶게 만들어야 합니다. 영화평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는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건 영화에 다가가는 방법의 기술입니다. 차리리 이렇게 대답하면 어떻겠습니까. 한정 없이 글이 길어질 때 그건 영화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 같은 것입니다. 유성관_ 마지막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또 다른 움직임 중 하나가 영화독립잡지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겁니다. ‘아노’는 이미 오래되었고, 유운성 평론가가 발행한 계간지 ‘오큘로’는 막 1호가 발간되었고, ‘캐스트’라는 독립영화 잡지가 크라우드 펀딩 중이며, 여성 영화를 주제로 하는 ‘세컨드’라는 독립잡지 또한 준비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영화에 대한 저널이, 독립잡지이지만 예전보다는 활발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정성일_ 종이 잡지를 만든다면, 웹도 서버가 돈이 들기도 하지만, 종이는 바로 종잇값, 인쇄비, 배포에 관련된 비용, 정기 구독자 관리 등, 첫 호를 만들 땐 잘 못 느끼는데, 그게 지나가면 반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창고비 까지도 장난이 아니게 됩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개인이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죠. 진심으로 잡지는 많이 팔리는 게 목표가 아닌, 오래 팔리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유성관_ 평론가님은 ‘키노’ 이후 종이 잡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정성일_ 늘 하고 있죠. 지금 현재도. 유성관_ 어느덧 마지막 질문입니다. 오늘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누군가 궁금하다고 추가해 준 질문인데 저 역시도 궁금합니다. 비평가로서 영화를 볼 때, 오늘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제가 인사차 여쭤봤던 질문 “최근에 보신 영화 중 좋은 영화가 있었나요?”에 대해 한숨 쉬며 “없었죠” 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혹은 60~70년대의 부서진 한국영화들을 계속 봐야만 할 때, 혹 비평가로서 내상을 입지는 않으신지요? 정성일_ 물론 상처를 받습니다. 유성관_ 그럼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십니까? 정성일_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임권택 감독의 몇몇 영화를 봅니다. < 짝코 >랄지, < 춘향뎐 > 같은 영화를 또다시 보며 일종의 상처를 해독한 달까요.(웃음) 유성관_ 일종의 영화 해독제인 셈이군요. 정성일_ 정말 그렇습니다.(웃음) 2016년 3월 29일, 북촌
“주인공들이 너무 가여워요” 봉준호 , 임권택 을 생각하(면서 자기 영화들을 돌아보)다 이렇게 말을 꺼내들고 싶다. 봉준호 는 CJ가 아니다. 그와 똑같은 의미에서 봉준호는 홍상수 가 아니다. 어쩌면 이런 표현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읽었다면 당신은 내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점점 CJ 영화를 보는 것은 마치 대중적 흥행을 염두에 두고 정교하게 (엉성하게?) 작성된 매뉴얼을 검토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홍상수 영화를 보는 일은 이야기를 만든 다음 그게 희미하게 보일 때까지 물러나서 남은 인상만을 가지고 엉성하게 (정교하게?) 그려낸 재빠른 스케치를 약간 아슬아슬하게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봉준호가 영화 제작에 돌입할 때 장르를 다루는 것인지, 매뉴얼을 작성하는 것인지 약간 모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종종 영화 앞에서 그가 만들어놓은 콘티가 영화를 보는 내게는 매뉴얼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일사불란한 영화적인 기계 기호들의 운동. (< 살인의 추억 >) 일단 시작되면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쇼트들의 접합과 그 안의 변화. (< 설국열차 >) 그러나 그 도표는 대중적 흥행과 아무 관계가 없다. (< 마더 >) 이때 그의 매뉴얼은 그 자신의 매우 사적인 영화(歷)사의 (그 자신에게만) 명장면에 관한 다소 기형적인, 어쩌면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변태적으로 구부러트린 집합처럼 보인다. (< 괴물 >) 그게 일정한 순열로 놓여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무언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된 것처럼 보이는 리듬 사이에서 삑사리의 순간들이 섬광처럼 나타날 때마다 이 영화를 하나의 집합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고 싶게 만든다. 이상할 정도로 봉준호의 영화는 매번 그 안에 완전히 소속되지 않는 (그래서 여전히 설명하기 까다로운) 분리된 또 하나의 집합이 공존하고 있다. 그것이 둘 사이에서 교집합을 이루고 있지만 그렇게 연쇄망을 이루는 그 고리를 따라 가다보면 어떤 집합들은 중심과 완전히 공집합을 이룬 채 영화 안에서 마치 독립변수처럼 활동하는 쇼트를 만날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잉여의 공집합은 잘 눈에 띄지 않은 채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이를테면 <마더>에서의 나무. 아마도 21세기 한국영화에서 가장 불길하고 아름다운 나무. 이제 막 살인을 저지른 ‘마더’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저 홀로 서서 마치 우주의 복판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나무. 그 나무를 하나의 점으로 하여 이미지가 회전을 시작할 때 거기서 만들어지는 것은 사건을 기다리는 사건이라는 간접화법의 (미처 닫히지 않은) 원을 그려내는 운동이다. < 마더 > 그 다음. 홍상수 와의 대차대조표. 먼저 순열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종종 홍상수를 말하기 위해서 시간을 말하지만 그건 차라리 등식으로 이루어진 순열과 집합의 게임이다. 숫자가 매겨진 영화들. < 오! 수정 >, < 생활의 발견 >. 그리고 < 옥희의 영화 >. 만일 그것을 시간이라고 부른다면 오로지 그것은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당신의 머릿속에서 순열의 조립 과정을 따라 벌어진 거짓 운동일 것이다. 그 안에서 이제 어떻게 접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무엇이 무엇에 속하는가. 그런 다음 그 안에서 정렬될 수 없는 변수들은 어떻게 셈할 것인가. 이번에는 더할 수 없이 마치 조각조각 찢어버리듯이 변수를 나누(고 나서 뒤섞)었다. < 자유의 언덕 >. 13개로 이루어진 편지. 나는 여기서 뒤섞는다기보다는 무언가 매번 고통스럽게 씬 사이를, 그 사이 안의 쇼트를, 찢어버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다음 아마도 어떻게 셈하느냐에 따라 하나, 혹은 둘을 더하거나 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그런 다음 거기서 잃어버린 편지 한 장을 셈해야 한다. 무엇이 무엇에 귀속되는가. 거기서 무엇이 무엇 앞에 있는가.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홍상수가 (그 스스로의 예술적 스승이라고 부른) 세잔에게서 배운 것은 그 순간의 균형 감각이다. 순열 사이의 균형. 집합의 균형. 그 안의 정지 감각(의 균형). 그 어느 그림보다도 나는 세잔이 1890년에 시작해서 이 년간 매달린 두 점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에서 그 배움을 본다. (이상할 정도로 홍상수가 사람을 세워놓을 때 이와 비슷해지는 것은 그저 우연일까) 그때 그것이 하나의 집합이 된다는 것 말고는 그 안의 대상들 사이의 운동을 분별하기 힘들어진다. 심지어 점점 그렇다. 그래서 희미해져가는 것을 누군가는 셈해보고 싶어 하지만 물론 그건 불가능하다. 그때 꿈은 유리한 알리바이이다. 반대로 봉준호 는 일단 시작하면 되돌아가는 법이 없다. 도미노처럼 처음 하나만 쓰러지면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차례로 쓰러져간다. 마치 사연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시작하면 그저 앞으로만 나아간다. 하지만 이 운동이 괴상해지는 것은 그게 사방팔방으로 쓰러져나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걸 붙잡으러 뛰어가는 인물의 동선조차 자기가 쫓아가는 게 누구인지 몰라 여기저기를 뒤지기만 할 뿐이다. 잃어버린 동선. (< 살인의 추억 >) 그래서 이상할 정도로 산만하게 보인다. 영화가 시작한 지 55분 만에 풍비박산 나듯이 흩어지는 가족들이라는 점들. 그 점이 만들어내는 동선. (< 괴물 >) 혹은 찾아갈수록 점점 자기가 붙잡으려는 대상으로부터 멀어진다. (< 마더 >) 심지어 모두가 한 열차에 타서 한쪽 방향으로만 나아갈 때조차 그렇다. (< 설국열차 >) 이때 그는 직선을 온갖 방법을 써서 곡선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어 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진행되는 운동에 대한 가장 명징한 이미지는 직선으로 달려가는 열차가 철로를 따라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할 때 거의 절반처럼 거의 접히다시피 하면서 맞은 편 열차 칸에서 형 프랑코가 절반의 이쪽 칸의 남궁민수를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이다. 직선 속의 곡선. 선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유기체와도 같은 하나. 수많은 형태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직선이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을 하나로 수렴하는 점. 개. 시체가 발견되었던 구멍, 괴물, ‘마더’. 엔진. 잠깐! < 설국열차 > 나는 빨리 임권택 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원래의 자리. 처음 이 자리에 봉준호 를 초대했을 때 나는 둘 사이의 도표를 그리고 있었다. 물론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그릴 것이다. 모든 영화감독(들)은 동시에 그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영화(歷)사의 감독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두 개의 역사 사이의 교차로를 찾을 것이며, 그러는 동안 나를 따돌리고 그 사거리에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이 매번 또 다른 교통의 질서를 만들어낼 것이다. 누군가는 거기서 옮겨 탈 것이며 또 누군가는 거기서 내릴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서로에게 이어질 것이다. 나는 여러 차례 임권택 감독님이 봉준호(의 서로 다른 영화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그건 사적인 자리에서 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므로 그걸 구태여 여기서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이번에는 반대로 듣고 싶었다. 물론 내가 여기서 청해 들으려는 것은 (그 뻔한) 의례적인 존경과 찬사가 아니다. 그 둘은 어디서 서로를 지나쳐 간 것일까. 우발적인 만남. 아마도 그 사이에 얽혀들게 될 한국영화사. 물론 봉준호의 주변에서 어른거리는 이름은 김기영 이다. 그 자신도 그렇게 (자주) 말을 했고 구태여 그 말을 빌리지 않아도 나는 < 마더 >를 보는 내내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더 자주 떠올린 것은 < 붉은 살의 >의 이마무라 쇼헤이였다) 나는 여기서 무리를 해가면서 임권택과 봉준호를 묶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이따금 임권택의 영화중의 무언가가 봉준호의 영화에서의 어떤 순간을 만져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반대로 어디에선가 봉준호의 쇼트가 임권택의 어떤 영화의 장면에 대한 연인처럼 여겨질 때가 있었다. 이런 설명이 비평의 자리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길 사이 바깥으로 빠져나간 이탈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몹시 위험한 자리에 들어섰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가정을 더 밀고 나가고 싶다. 그런 다음 그 가운데서 무언가가 서로를 밀쳐낼 때 그 둘 사이에는 그것을, 말 그대로 그것을, 잠재운다는 인상이 남는다. 저기서 깨어있는 것이 여기서는 잠들고 있다. (내게 조금만 관용을 베풀어준다면) 나는 그걸 공존의 경제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쪽에서 초과해버린 부분이 저쪽에서 부족하면서 겨우 균형을 맞춘 기묘한 교환. 마치 저쪽에서 그래버렸기 때문에 내 쪽에서는 이래도 괜찮아, 라고 그냥 긍(정해버렸다고 가)정된 거래. 하지만 이 비유적인 느낌을 내게 탓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둘 사이에서 내가 느끼는 거리는 딱 그 정도에서 멈춰 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것이 아직 서툴긴 하지만) 용기를 내어 21세기에 들어선 한국영화 안에서 선물의 경제학이라는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모델을 제시해보고 싶다. 우리가 희망의 원리를 비평 담론에서 망설여야 할 어떤 이유가 있단 말인가. < 살인의 추억 > < 악의 손길 > 약간의 잡담. 봉준호 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내게 누군가 말하기를 봉준호의 영화에는 그걸 의도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어떤 장면에서 영화사의 한 순간에 대한 향수를 느껴보게 만들 때가 있어요, 라고 건드렸을 때 잠시 돌아본 적이 있었다. 영화 안에 있는 영화에 대한 기억. 그것이 이야기 안에서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영화를 기묘하게 앞뒤로 오가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봉준호를 설명하면서 왜 어떤 비평가도, 어떤 시네필들도 그런 희한한 운동에 대해서 건드리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 받는 감동은 마치 암호와도 같은 것이다. 하나의 예. 박두만 형사가 시체가 발견된 현장에서 범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논두렁 위아래를 오르내릴 때, 그 뒤를 따라 카메라가 뒤따라가는 긴 롱 테이크의 운동에서, 논둑길을 뛰어 올라와 발자국을 밟지 말라고 저 멀리 오는 경운기를 향해 사선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 살인의 추억 >), 문득, 말 그대로 문득, 마크와 이제 막 결혼식을 끝내고 신혼여행을 온 수잔을 따라 카메라가 뉴멕시코의 작은 마을의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함께 만나고 헤어지면서 또 하나의 동선을 만들어내는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캐딜락 오픈카를 어처구니없게도 떠올리면서(< 악의 손길 >), 롱 테이크에 감탄하는 대신 그 ‘럭셔리한’ 캐딜락이 ‘촌스럽기 짝이 없는’ 경운기로 바뀐 모습에서 깔깔 대고 웃는 극장 안의 그 누군가에게, 나도 지금 함께 극장에서 당신과 영화를 보고 있다는 공감을 가져보고 싶어진다. 우리들 사이의 웃음이라는 인사. 말하자면 그런 의미에서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봉준호는 2012년 영국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에서 앙케이트 한 ‘영화사상 탑 10 영화’에 응답했다. 이 잡지는 1952년부터 10년 단위로 앙케이트를 했고, 2002년부터는 비평가(와 학자, 문화이론가, 영화제 프로그래머)와 영화감독을 분리하였다. 그런 다음 2012년 9월호에 결과를 발표했다. 사이트 앤 사운드 편집진에 따르면 지구상에 활동하는 358명의 감독이 앙케이트에 응했으며, 그 중 100명을 잡지에 게재했고 전체 명단은 온 라인으로 발표했다. 봉준호의 명단은 알파벳 순서에 따라 63페이지에 실렸다. 별다른 설명은 없고 그저 짧게 “Ten films that the biggest impact on my own personal view of cinema”라고 명단 앞에 덧붙였다. 그런 다음 10편의 제목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 비정성시 >(후 샤오시엔), < 큐어 >(구로사와 기요시), < 하녀 >(김기영), < 파고 >(코엔 형제), < 싸이코 >(알프레드 힛치콕), < 성난 황소 >(마틴 스콜세지), < 악의 손길 >(오손 웰즈), < 복수는 우리가 한다 >(이마무라 쇼헤이), < 공포의 보수 >(앙리-조르주 클로조), < 조디악 >(데이빗 핀처). (물론 알파벳 순서이다) < 플란다스의 개 > < 괴물 > < 설국열차 > 이 명단에 기대어 봉준호 는 홀수의 영화가 있고 짝수의 영화가 있다고 다소 익살스럽게 말하고 싶어진다. 먼저 홀수의 영화. < 플란다스의 개 >와 < 괴물 >. 두 영화는 외양으로 볼 때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냥 간단하게 규모가 다르다. 누군가는 둘 사이의 차이를 먼저 지적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영화는 당신의 상상보다 훨씬 가깝게 있다. 무엇보다 개와 괴물. 그 둘은 어떻게 대상에 주인공들이 애절하게 가닿으려고 애를 쓰는지를 보여준 다음 거의, 아마도 거의, 그 근처에 다가갔을 때 비로소 그것이 실패한 목표라는 것을 깨닫는지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들 사이의 기기묘묘한 교환. 종종 봉준호의 슬로 모션에서 운동의 쾌감을 맛보는 대신 허우적거린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운동의 고통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많은 영화들이 증후에 시달리는 동안 봉준호는 충동의 계략을 꾸미는 중이다. 나는 < 설국열차 >를 보았을 때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열차는 어딘가를 향해서 가는 중이 아니다. 모두들 열차 맨 앞 칸에서 벌어진 일에 매달렸다. 그런 다음 뫼비우스의 순환에로 빠져들었다. 그때 봉준호는 아니오, 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목표는 열차의 맨 앞 칸이 아니라 열차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충동의 순환궤도를 멈추지 않고 빙빙 도는 것이 핵심이다. 빙빙 돈다는 것. 앞은 끝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끝은 앞의 힘으로 달아나는 중이다. 그러므로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에서 봉준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환상을 붕괴시키는 순간 현실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패러독스의 세계. 여기서 봉준호는 마침내 영화와 만화가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맛보았을까. 물론 그걸 내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설국열차>보다 <괴물>이, <괴물>보다 <플란다스의 개>가 훨씬 만화에 가깝게 보인다. 만화라는 캐리커처의 예술. 여러 자리에서 봉준호는 자기가 얼마나 만화를 사랑하는지 공공연하게 선언하다시피 했다. 물론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차라리 이 말은 봉준호의 예술적 야심이 때로 영화가 가 닿을 수 없는 어떤 지점을 목표로 한 표현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영화의 블랙홀은 어디일까. 그때 만화는 어디에 있을까. 봉준호는 종종 영화만이 가능한 순간에 과도하게 집착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로는 불가능한 지점이 어디인지를 탐색한다. 이 암흑지점의 이미지를 만날 때 영화 안에서 비-영화를 엿보는 괴상한 순간과 만나게 된다. 그 순간 영화의 감각이 일시적으로 멈추고 때로 어떤 구조가 붕괴되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여기서 봉준호는 현실을 고립시킨 다음 그 속에 불가능한 존재를 집어던졌을 때 사실들이 어떻게 견디고 부서져나가는지, 라는 사건을 만들고 싶어 한다. 아마도, 역시 아마도, (잠시 머뭇거린 다음 소리 내어 읽어주기 바란다) 그래서 봉준호의 웃음은 불길하다. 오고 가며 봉준호 를 여러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앉아서 작정을 하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 마더 >를 찍고 난 다음, 혹은 < 설국열차 >를 준비하고 있을 때 였다. (“봉준호는 지금 다시 시작 한다” _씨네21_800호_20110419/0426) 그때 (함께 씨네 산책을 진행하던) 허문영에게 봉준호에게서 결정적으로 우리가 질문해서 얻어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라고 그 자리가 시작되기 전에 묻자 슬그머니 웃으면서, 물론 (영화 속에서 날뛰는) 리비도의 비밀이지요, 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오랫동안 남았다. 그때 우리의 이야기는 <설국열차>에 모아졌고 영화는 그의 두뇌 속에서 이미 만들어진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다소 이상하게 진행됐다. 우리는 미처 보지 못한 영화에 대해서 하듯이 질문했고 봉준호는 마치 이미 만들어진 영화에 대해서 설명하듯이 대답했다. 이 신기한 불균형. 나는 이 대답 속에 가려져있는 정념의 신호들을 읽는다. 물론 만들어진 영화는 말하여진 영화와 차이가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만으로도 뇌의 영화와 퍼포먼스로서의 영화 사이에 놓인 간극에 관한 흥미로운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 둘을 하나로 합치는 대신 그 둘을 각자 존재하는 두 편의 영화라고 가정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좀 더 느슨하게 말해도 괜찮다면 두 대의 기차가 한 궤도 위에서 달리고 있다. 물론 지금 한 대는 눈 밭 위에 쓰러져있고 다른 한 대는 아직도 달리는 중이다. 그런 다음 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봉준호는 제작의 자리로 물러 난 다음 (< 살인의 추억 >에서 연출부를 한) 심성보 를 연출자로 내세운 < 해무 >를 제작했다. 물론 지금 많은 감독들이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설국열차>는 박찬욱 이 제작한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봉준호의 공백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지 적절치 않은 회색의 베일이 그 앞에 드리워져 있다. 어떤 터치라는 문제. 봉준호의 터치. 나는 봉준호의 연출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때마다 이상하게 (어디선가, 텔레비전에서 했던) 이 대답이 떠오른다. 그 자신이 막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난 다음 한동안 (그의 표현을 빌리면) ‘지리멸렬’하게 지낼 때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죠, 제가 찍은 결혼식 테이프를 갖고 계신 분도 계실 거예요, 근데 아마 모르실 거예요, 제가 찍고 편집한 지는, 잘 찍었어요, 게다가, 신부 엄마 울 때는 딱, 클로즈 업 들어가고, 절대 안 놓치죠, 그런 순간은, 주례사도 끊기면 안 되고, 또 우는 하객들 찍고, 신랑의 과거 여자친구 같아 보이는 사람 또 괜히 막 가까이 찍고(...)” 처음에는 그냥 시작했다. 그러면서 눈을 돌려 신부의 엄마가 흘리는 ‘눈물’을 “절대 안 놓칠”뿐만 아니라 클로즈업으로 다가가서 바라본다. 물론 주례사도 끊기면 안 된다. “우는 하객들” 그런데 여기는 장례식장이 아니다. 하객들이 왜 우는 것일까. 너무 기뻐서? 이건 두 사람의 몰락이니까? 슬퍼서? 무엇이 슬퍼서? 신부의 남자 친구도 여기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신랑의 여자친구 같아 보이는 사람”을 그냥 찍는 게 아니라 “괜히 막 가까이 찍”을 때 봉준호는 이미 이 결혼식장에 관한 또 다른 시각적인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 보이는 풍경. 풍경 속의 이면의 풍경. 이 결혼식장은 봉준호의 친구 혹은 선배의 결혼식장이 아니다. 심지어 지금 이건 이 비디오테이프를 봉준호가 찍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아르바이트였다(고 한다). 그날 온 하객들은 봉준호가 그날 처음 본 사람들이다. 아니, 그날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신부를 처음 보았을 것이다. 이때 봉준호는 두 가지를 따라간다. 하나는 결혼식 장면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그 법칙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음란한 외설적 이면의 얼룩이다. 그때 여기에는 봉준호의 원근법이 잘 설명되고 있다. 나는 진심으로 이 비디오테이프들이 보고 싶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그의 필모그래피에 포함시키고 싶다. 말하자면 그런 의미에서 <해무>를 나는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베일을 열어보는 것은 이 자리에서 할 일이 아니다. 물론 이 영화를 셈에 포함시키기는 했지만 나는 미스터리를 그냥 내버려두기로 하였다. 여기서는 방점을 옮겼다. 오늘 만나서 진행한 이 대화는 지난 대화의 속편이 아니다. 우리 둘 사이에서 나누고 싶었던 것은 임권택 이라는 영화를 어떻게 통과해갈 것인가, 라는 질문의 세션이다. 여기서는 질문을 서정적으로 만들 생각이 없다. 마찬가지로 나는 낭만적인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그 안에서 영화가 던진 체험을 어떻게 견디는지, 어떻게 즐기는지, 그 안에서의 참을성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었다. 참을성? 진정한 참을성. 그것은 매혹에 사로잡힌 우리들이 그 안에서 몸부림친 대가로 얻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영화는 결국 매혹당한 시선이 바라보게 되는 진실이 될 것이다. 물론 알고 있다. 니체는 예술에서 진실에 속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므로 나는 의도적으로 산만하게 질문했다. 매번 봉준호 는 질문 안에서 자신이 놓인 부재의 조건을 차례로 열거했다. 우리들의 임권택이라는 체험 속의 움직임. 그것이 움직이는 장소. 이때 봉준호는 대답을 하면서 몇 차례이고 영화 속의 인물을 향해서 가엽다, 라는 말을 썼다.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말을 썼고 자기 자신의 영화를 향해서도 그 말을 썼다. 나는 자꾸만 이 말 앞에 멈춰 서게 된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그 말의 원래 뜻 안에 머물면서도 그 말을 다르게 쓰는 경우가 있었다. 한번만 더 내게 비교를 허락해준다면, 이를테면 그건 마치 (잘 알려진 대로) 홍상수 가 예쁘다, 라는 말을 쓰는 것과 같은 어법처럼 들렸다. 물론 홍상수는 언제나 자기의 주인공들을 예쁘게 바라본다. 그러나 가끔 그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갈 때 무시무시할 정도로 잔인해진다. 똑같은 의미로 봉준호가 가여운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갈 때 변태스러울 정도로 기괴해진다. 그들은 그런 의미에서 거리 조절의 시네아스트들이다. 여기서 나는 봉준호에 대해서만 생각할 참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성일 _ 설명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자리는 한국영화에서 지금 활동 중인 감독들을 차례로 만나면서 2014년이라는 시간에, 자기의 자리에서 어떻게 임권택 감독님을 바라보는지, 언제 (영화적으로) 만났는지, 거기서 어떻게 헤어지는지, 말하자면 지도를 그려보고 싶은 바람에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마련한 자리입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임권택 감독님의 전작을 차례로 써나가면서 수직선을 그어나가면서 다른 한 편으로 차례로 이야기를 청해 들으면서 수평선을 그어보면 한국영화의 씨줄과 날줄에 관한 하나의 기록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님의 전작 회고전을 하면서 한국영화 감독들에게 백지수표를 나눠주었습니다. 봉준호 감독께서는 < 아제아제 바라아제 >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 자리의 관객석에 앉아 첫 사랑과 이 영화를 본 사연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웃음) 오늘은 임권택 감독님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생각뿐만 아니라 동시에 21세기 평행으로 진행된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질문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두 영화가 공존할 때 어떻게 서로 다른 성질의 영화가 함께 한국영화라는 구도의 집을 세우는지 보고 싶습니다. 봉준호 _ 지금 임권택 감독님 102편 중 몇 편을 볼 수 있는 상황인가요? 정성일 _ (현재 다시 보고 쓸 수 있는 편수는) 75편입니다. 봉준호 _ 생각보다 많네요. 반 정도인 줄 알았는데 꽤 많네요. < 인플루엔자 > 정성일 _ 제 소망은 이런 것입니다. 임권택 전작을 놓고 진행한 이 연재가 끝나면 누군가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을 쓰겠다고 그러겠죠.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저는 뒤늦게 (전주영화제 삼인삼색 중의 하나로 만들어진) 중편 < 인플루엔자 >를 봤어요. 그 영화가 정말 좋았어요. 그냥 이건 걸작이었어요. 그런데 왜 아무도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지 않는지 의아할 따름이었어요. 말하자면 모든 영화는 친구를 가지고 있어야만 외롭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모든 영화에 대해서 하나 이상의 글이 쓰여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영화는 친구가 많지만 어떤 영화는 그저 외롭게 영화 혼자서만 시간을 기다리는 영화들도 있으니까요. 오늘 드릴 질문에는 약간 불편한 이야기도 있고,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궁금한 질문도 있습니다. 재미없는 질문도 있고, 미루어둔 질문도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결심은 하고 있습니다. 일단 봉준호 감독과 이야기를 하려면 내가 주도권을 빼앗기면 안 된다! (웃음) 그렇게 되면 봉준호 감독이 자기 페이스로 진행하게 되니까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런 결심, 왜냐하면 제가 이미 3년 전에 ( 허문영 씨와 함께) 긴 인터뷰를 해본 실전 경험이 있으니까요 (웃음) 그래서 몹시 정신 사납고 산만하게 진행할 생각입니다. 봉준호 _ 제가 정서가 산만해서(웃음) 정성일 _ 무조건 산만하게 얘기를 진행해야겠다, 는 결심 (웃음) 봉준호 _ 국정원에 끌려온 느낌입니다. (일동 웃음) 정성일 _ 우리들의 지난 번 이야기는 < 설국열차 >로 끝났으니까 이번에는 <설국열차>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모든 면에서 작년 여름 <설국열차>의 소용돌이로부터 정확히 일 년이 지났고 지금은 그 사이 제작을 한 < 해무 >가 있습니다. 제가 임권택 감독님과 인터뷰를 할 때에도 그 영화를 막 마쳤을 때와 그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를 지니게 된 다음 일 년이 지나고 나면 같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혹은 적어도 방점이 달라진다고 할까요. 게다가 그 영화가 큰 영화일수록 감독들은 마케팅의 전략 안에 놓여진 전술이 되어 수 없는 자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다보면 인터뷰 자체를 반복하는 학습의 과정을 겪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개봉 당시에는 같은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정말 지겨운 상태에 놓인 달까요. 봉준호 _ 저도 개봉시기가 항상 제일 싫습니다. 이상한 이슈에 끌려 다녀야 하고, 참, 정성일 _ < 설국열차 > 프로젝트를 처음 들은 것은 < 괴물 >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괴물> 직후에 <설국열차>를 만들 줄 알았는데 그 사이에 < 마더 >가 끼어든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봉준호 _ 저는 < 살인의 추억 > 직후에 김혜자 선생님과 약속을 해놨던 상태였어요. 정성일 _ 영화의 규모나 이야기의 태도, 게다가 열차라는 폐쇄공간으로 시종일관 진행하는 사실상 450억 원 실험영화 < 설국열차 >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봉준호 감독의 숙원의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개봉하고 이제 1년이 지났는데 돌아보니 <설국열차>는 자신에게 어떤 영화였나요? 봉준호 _ 아직 완전히 과거형은 아닙니다. 미국과 핀란드에서 개봉중이고, 그래서 지금 극장에 걸려있고, 또 개봉 준비 중입니다. 지금 8월인데, (잠시 생각) 지난 6월 말에서 7월 초에 북미 프로모션을 하다 온 거여서, 미국 프로모션 할 때 정말 지겨웠죠. 거의 인터뷰가 500개, 무대인사 100개, 관객과의 Q&A 50개를 넘어가니까 사람의 멘탈이 이제 너덜너덜해졌어요. 그렇게 하고 온 직후라서 아직도 완전히 객관적으로 보이지는 않아요, 얼마 전 작년에 영상자료원에서 < 살인의 추억 > 10주년 행사를 해주셔서 옛날 배우들이 모여 큰 프린트로 봤는데, 그건 정말 그 영화를 지나왔구나, 라는 기분이 있는데, < 설국열차 >는 그 정도의 느낌은 당연히 아니구요, 지금은 <설국열차>는 철도 레일에서 이제 막 벗어나서 뛰어내리려는 그런 상황이고, 요즘 < 해무 >도 개봉했고, 다음 작품 시나리오도 열심히 쓰고 있지만. (잠시 생각) 아직도 완전히 마무리된 느낌은 안 들어요. 미국판 DVD가 나와서 진열장에 꽂으면 그때 딱 마무리가 되는. (웃음) 제가 소유욕이 강해서, 손에 만져지는 물건화 돼서 나와 책장에 꽂으면 끝날 거 같아요. 아마 다음 그 다음 달에 미국 DVD가 나오면 (마음속에서) 종료될 거 같아요. 미국이 제게 별 의미가 있는 거 아니지만 가장 늦게 개봉한 나라고, 어쨌든 영어 영화였으니까요. 질문은 <설국열차>가 제게 어떤 의미인가였는데 일단 영화 외적으로 너무 과열된 상태로 개봉이 돼서... (망설이다가) 그렇게 흥분할 영화가 아닌데 그게 좀 부담스러웠고, 그리고 제게는 SF 장르를 본격적으로 했다는. 물론 그 전에 < 괴물 >이 있었지만 사실 그 영화는 괴생물체 존재만 제외하면 소시민적인 세팅이었고 여기서는 하나의 세계 전체를 창조하는 거잖아요. 여기서는 기차라는 세계였는데, 그런 것이 SF의 매력인 거잖아요. 골수 SF 팬은 아니지만 정면으로 SF 장르를 다뤄봤다는 것이 제게는 보람이었다. (<설국열차>는) 다섯 번째 영화인데 지금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영화를 함께 준비하고 있지만 그 영화가 저에게 어떤 전환점이 되거나 분기점이 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건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거 같고, 지금 여섯 번째 영화로 쓰고 있는 시나리오도 <설국열차> 전에 2010년에 구상했어요. 그러니까 영화들이 서로 계속 디졸브 되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SF 장르를 도전해서 해봤고, 그런데 거기서는 한국적인 좌표에서 벗어나 보았죠. (그 전에는) 한국적인 로컬리티가 있거나 시공간적인 좌표를 갖고 항상 영화를 해왔는데, 한강에 괴물이 나오고, 80년대 화성이 등장하고, 이것은(<설국열차>) 거기서 완전 벗어난 영화입니다. 다국적 사람들이 기차라는 공간에 있고, 그야말로 ‘사이-파이(Sci-Fi)’ 영화죠. 맥락들은 다른 것 같은데 미국에서 ‘사이-파이’영화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게 제일 보람 있는 부분이에요. 거의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게, IP_TV에서 연말까지 수금을 하면, 그런데 러시아 배급사 애들이 아직 돈을 안준다는데(웃음) 그렇게 <설국열차>는 전 세계 배급의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거 같아요. 프랑스나 일본처럼 점잖게 제때 돈을 주는 나라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남미 및 러시아 배급사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직원 분들께 응원의 한마디를 보내고 싶습니다. (웃음) 정성일 _ 나라마다 영화 문화가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인터뷰하고 또 관객들과 만나보면서 감각적으로 느껴보기에 < 설국열차 >를 봉준호 감독이 원래 시도하려했던 연출의 뜻에 가장 가깝게 잘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는 어디였습니까? 그저 극장에서 느껴보기에는 한국에서 이 영화는 흥행의 결과와 또 달리, 뭐랄까,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상할 정도의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봉준호 _ (잠시 생각) 만든 입장에서 얼마나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구요. 각 나라마다 다른 정체성이 있는 거 같아요. 한국에서는 여름철 개봉하는 제일 대작 블록버스터야, 그렇게 먼저 전제를 하니까, 봉준호 의 울트라 초 블록버스터 대작이 되어야 하고, 제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런 십자가가 지워져 있잖아요. 근데 막상 보니 마이클 베이 영화 같지 않고, 변태적이고 잔인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초등학생을 데려갔더니 애가 경기를 일으키기도 하고(웃음). 기대한 것과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고. 그런데 미국에서는 < 트랜스포머 4 >와 같은 날 개봉을 하면서 오히려 훨씬 더 이상하고 유니크한 영화로 받아들여졌어요. 이 영화를 보면 왠지 젊은 애들 틈에서 좀 더 쿨한 사람인 것처럼 잡지에서 나오기도 하고, 그쪽에서 평가는 훨씬 더 유니크하고 이상할수록 더 점수가 높아지는 상황이었어요. 트랜스포머와 반대말일수록 더 좋아하는 거죠. 로튼 토마토 점수가 상상이상으로 95점, 97점 높이 치솟은 것도 한국에서와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기준이 다르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인터뷰를 정리하고 있는 2014년 9월 6일자 rottentomatoes.com 의 신선도는 95퍼센트이다) 정성일 _ 한국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읽으면서 왜 아무도 이 질문을 하지 않을까 궁금했습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최고의 열차 영화가 무엇입니까? < 설국열차 >를 찍는다고 했을 때 사실 저에게 즉각적으로 든 생각은 그 열차에 어디에선가 영화사 속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와 만날 것이라는 제 멋대로의 상상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영화가 거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열차를 보면 마음이 두근거리지 않습니까? 봉준호 _ 미국 프로모션 때는 미국 평론가나 기자는 그런 질문을 많이 하셨었어요. 한국에서는 영화 역사를 짚어가며 질문하는 분이 많이 없거나 없어지는 추세라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당연히 (< 설국열차 >를 준비하면서) 구로사와 아키라 각본의 (<눈(雪)>을 영화로 옮긴 할리우드 영화) < 런어웨이 트레인 > 같은 거는 다시 꺼내서 봤죠. <폭주 기관차 Runaway Train> 정성일 _ (< 런어웨이 트레인 >을 연출한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봉준호 _ 그 분의 영화는 < 탱고와 캐쉬 >도 못 봤습니다. 별로 본 게 없습니다. ‘돌아온 탕자’와 같은 감독이다, 라고 누가 얘기 하시더라구요. 막상 본 거는 별로 없어요. < 런어웨이 트레인 >하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 마리아스 러버 >가 그 분 영화였나? 나스타샤 킨스키가 나온, 그런데 그거는 청소년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영화라, 시네필적인 관점하고 상관없이 흰 속옷 같은 걸 입고 나스타샤 킨스키가 잡지 광고에 아주 야하게 나왔던 게 기억이 나네요. 진짜 예뻤죠. (웃음) 원래 얘기로 돌아오면 <런어웨이 트레인>이라든가, (로버트 알드리치의) < 북극의 제왕 > 이라고, 어네스트 보그나인하고 리 마빈. 되게 남성적인 중년 마초들이 무식한 무기들을 들고 싸우죠. 제일 좋아하는 열차 영화를 꼭 하나만 꼽으라면 존 프랑켄하이머의 흑백영화 < 트레인 >이었던 거 같아요. 나치들이 프랑스 미술품을 빼돌리려고 하려는 데, (두 손을 치켜들고) 기차를 계속 끌고 가려는 나치들과 휴전 협정 전에 기차를 멈추려는 버트 랭커스타의 싸움이 되게 긴박하게 펼쳐지는데 손에 땀이 나게 재밌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영화에서 보여지는 카메라 워크와 인물들의 우아한 동선에 매혹되었습니다. 거기서 1페니 짜리 동전으로 기차를 못 가게 하는 디테일도 나오는데, 그 영화는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 설국열차 >의 텍스트로 삼으려는 영화는 별로 없었습니다. 기차 자체에 사람들이 계급별로 나누어져 있고 그 안에 온 사회를 압축해서 쑤셔 넣은 것은 이 그래픽 노블밖에 없었어요. 오히려 (디즈니_픽사의) < 월-E >같은 애니메이션 후반부, 또는 거기서 우주선에서의 생활상이 <설국열차>와 비슷한 거 같아요. 우연히 아들 때문에 봤는데 거기 사람들이 비만상태가 되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 2001 오딧세이 >를 응용한 패러디 장면이 나와서. 아마 그런데서 더 영감 받았던 거 같아요. 기차로만 보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 천국과 지옥 >에서 딱 한 시퀀스지만 기차 시퀀스가 나와요. 구로사와 아키라는 기차를 잘 다루는 감독인거 같아요. 그리고 이마무라 쇼헤이의 < 붉은 살의 >를 보면 이 여자의 집이 기찻길 옆에 있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남자가 가는데, 별로 힘주어 찍지 않아도 기차의 가장 강렬한 장면이 나와요. 보면서 제일 싫었던 기차 영화는 < 폴라 익스프레스 >(웃음) 거의 달디 단 제과점 음식을 삼시 세끼 계속 먹어야하는 기분. 눈이 오고 기차 나오니까 한번 보게 되는데 반면교사로 삼았달까요. 아, 저러면 안 되겠다. 싫다. (일동 웃음) 정성일 _ < 설국열차 >에 관해서 영화계 사람들에게 파다하게 퍼져나간 이야기의 공약수는 봉준호 감독의 악전고투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이끌고 끝까지 갈 수 있게 만든 가장 매혹적인 힘이랄까, <설국열차>에서 가장 매혹되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봉준호 _ (단호하게) 기차였죠. 여기 말하는 기차는 하위 장르로써의 기차가 아니라 영화가 두 시간 내내 달리는 기차에서 펼쳐지고, 그 안에 사회와 모든 것이 압축되고, 인간군상이 고농도로 압축된 상태에서 그것을 물리적으로 봤을 때, 달리는 기차 안에서 두 시간 내내 모든 희로애락을 내가 연출한다, 내가 언제 이것을 또 할 수 있겠냐, 아마 다른 감독들도 안할 것이다, 어찌 보면 끔찍한 조건이니까, 잠수함 영화 이상으로, < 설국열차 >를 만든다는 건 그런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해외 나가면 사실 고생하는 건 다 마찬가진데 그게 (거기서) 한국에 들어오는 소문은 과장된 게 많습니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찍었습니다. 정해진 일정 안에서 다 찍었고, 촬영자체는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오래 걸렸지만 그건 역설적으로 그만큼 준비를 많이 했다는 얘기이고, 촬영기간은 굉장히 짧았어요. 다 찍는데 석 달도 안 되었어요. < 괴물 >의 절반도 안되는(셈을 하더니) 2개월과 4주, < 플란다스의 개 > 다음으로 제 영화 중 가장 짧게 찍었죠. 90퍼센트 이상이 스튜디오 촬영이니까 날씨도 상관없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다 스토리보드대로 찍은 거고 여기에 관여했던 미국 라인 프로듀서들은 역사상 제일 쉽게 찍은 영화라고 기억할 거예요. 저는 그런 것들을 지켜내면서 괴로움도 있었고, 통으로 다시 찍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일반화시키면 원래 늘 그러니까요. 준비기간이 무척 길었지만 촬영 프로덕션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잘 끝났습니다. 외국 배우들과 계약 조건도 그럴 수밖에 없었고 제가 제임스 카메론도 아니니까(웃음) 미국적 관점에서 보면 독특한 저예산 사이-파이 영화고, 크리스 에반스도 그렇게 얘기하고 다녔어요. 그는 마블 영화를 주로 하는 배우인데 < 어벤져스 >는 2억불이 넘는 영화잖아요. 그의 관점에서는 < Snowpiercer >라는 작지만 괜찮은 영화를 찍는다, 고 토크쇼에 나가서 얘기를 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역대 최대 제작비니까 두 가지 정체성이 혼란스럽게 하는 면이 있었죠.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면 이건 정말 독특한 영화다. 기차 안에서 이렇게 모든 공간과 인물과 운동이 담긴, 저는 (영화에서) 운동이나 움직임을 몹시 좋아합니다. 기차도 움직이지만 그 안에 사람도 달린다. 그런 흥분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 해무 > 정성일 _ 저는 지난 겨울에서 봄까지 임권택 감독님의 < 화장 >현장에서 다큐를 찍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영화에 < 해무 >에서 넘어온 스태프들이 꽤 있었고, 게다가 영화 현장은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식구 아닙니까. 그때 <해무>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웃음) 좋은 이야기도 있고 과장된 이야기도 있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해무>가 신인감독의 악전고투 신고식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궁금한 건 21세기 한국영화의 새로운 현상 중의 하나는, 홍상수 감독에서 박찬욱 감독에 이르기까지, 많은 감독들이 직접 제작사를 차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 설국열차 >도 박찬욱 감독이 제작한 것인데, 봉준호 감독이 제작사를 차린다는 것의 가장 큰 긍정적인 의미에서 목표, 욕심이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봉준호 _ 강제규 감독님이나 강우석 감독님과 같은 분들은 비즈니스 모델, 사업을 하실 수 있는 성격과 스케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보스 기질도 있고. 하지만 저는 제일 반대지점에 있는 사람으로서 지속적으로 제가 제작사를 운영하면서 다른 감독의 작품을 제작할거라는 계획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일회성으로 그칠 거라고 예상도 했고, < 해무 > 작업하면서 실제 그렇게 마음을 먹었고요. <해무>가 제 마지막 제작 작품이 될 거 같다고 인터뷰 때도 이미 한번 얘기했습니다. 제작은 저와 안 맞고 남은 인생은 연출에만 집중하겠다고 이미 명확히 했어요. 과정이 좀 복잡하긴 한데, (잠시 허공을 쳐다보더니) <해무>를 기획했던 이유는 저를 제외한 공동 제작을 한 다른 두 명이 < 괴물 >때 같이 일했던 프로듀서들인데 < 설국열차 >를 같이 하기로 했다가 못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설국열차>는 준비기간이 굉장히 길어졌죠. <설국열차> 다음 작품, 여섯 번째 영화를 같이 하기로 한 친구들인데 (그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참 기다리고 있는 게 미안했습니다. 그런 미안함과, 그리고 <해무>라는 훌륭한 연극 원작을 2008년에 보고, < 마더 > 캐스팅 과정에서 (그 연극을 보고) 송새벽 씨를 발견했는데, 좋은 스토리라 저걸 누가 영화화 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아무도 안 하더라구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프로듀서 후배들과 내가 기획자로 이 좋은 작품을 맺어주면 좋은 작품이 세상에 나오겠구나. 이왕이면 < 살인의 추억 >때 연출부였고 시나리오를 서포트했던 심성보 감독이라면 또 좋은 신인 감독이 입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기획의 이유입니다. 체코에서 <설국열차>를 준비할 때 화상회의로 투자사 분들과 <해무>를 얘기했습니다. <해무>라는 원작을 한국에서 재공연할 때 가서 보시게끔 제가 원격조정으로 어레인지한 거고 그래서 그 작품이 탄생하게 된 거고, 음, 체코에서 (<설국열차>를 다 찍고) 돌아왔을 때는 심성보 감독이 시나리오를 많이 썼고, 저는 <설국열차> 후반작업을 하면서 <해무>의 시나리오 마지막에 도움을 줬습니다. 제가 오야붕이고(웃음) 제작자인데 촬영 현장에 가면 얼마나 싫겠어요, 그래서 거의 한 달간 제가 촬영 현장에 안 갔는데 그때 많은 일이 있었어요. 그건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어쨌든 무사히 개봉하게 돼서 기쁘고 저도 거기에 책임을 져야할 입장이고 그것에 일조한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해무>가 마지막 제작 작품입니다. 더는 없습니다. 정성일 _ < 해무 >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어디입니까? 봉준호 _ 오프닝 씬을 제일 좋아합니다. 모든 사건이 시작되기 전에 선원들의 일상이 나오는데 거기 모든 배우들의 느낌이 제일 좋고. 그리고 영화 뒷부분에 이희준 씨가 거의 발정난 수캐가 되어 사상초유의 전자발찌 캐릭터죠. (웃음) 우리끼리는 전자발찌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막 뛰어다닐 때 이희준 씨 장면 좋아하고, 그리고 김윤석 씨가 밀항을 제의받는 장면이 있어요. 사료에서 시계 꺼내고 그때 뱀장어가 왔다 갔다 하고, 그 씬에서 김윤석 선배님의 연기가 참 좋았습니다. 존경할 만한 배우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 순간들이 좋았습니다. < 마더 > (흑백버전) 정성일 _ 지난 겨울 서울 시네마테크에서 < 마더 >의 흑백버전을 상영했는데, 그 말은 <마더>의 감독 버전이 흑백버전이라는 뜻입니까? 저는 두 개가 별개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준호 _ 2008년도에 그 영화를 처음 기획할 때 저나 홍경표 촬영감독이 < 마더 >는 흑백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때 인더스트리적 조건으로 그게 좌절되면서 컬러로 바꿨다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컬러로 만들었는데 <마더>를 개봉하고 어떤 시점에서 둘이 좋아하는 서로의 흑백영화 로망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코엔 형제의 <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도 컬러 네거티브로 찍은 거를 개봉은 흑백으로 했고 컬러, 흑백 버전 두 가지로 DVD가 나왔다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때 둘이서, 우리도 한번 해보자, 돈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는다, 라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흑백에 대한 로망을 얘기하다가 나중에 흑백버전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래서 디지털 상태에서 충분히 할 수 있고, 그걸 쇼트 단위로 다 조절한 거예요. 저희도 궁금한 거죠. 같은 사운드, 같은 편집, 같은 퍼포먼스인데 흑백으로 바꿀 때 뭐가 바뀔까, 저희도 흥미로워하면서 저랑 홍경표 촬영감독과 강성표 컬러리스트가 작업을 한 거죠. 재개봉은 안했지만 DVD도 나왔고 해외에서도 틀고 있고 올 가을에 부산에서도 틀 거 같은데. 김혜자 선생님도 모시고 봤죠. 다들 나름의 감상이 있어요. 정성일 _ 흑백 버전을 봤었을 때 저는 이쪽이 감독 버전이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처음 < 마더 >를 보았을 때 몇몇 장면들에서 표현주의 영화의 느낌이 들었습니다. 밤이 되었을 때 그림자로 이어지는 골목 장면들이나, 혹은 의도적으로 벽을 찍은 정면으로 찍은 쇼트들 경우 의도적으로 화면을 만든 것 같은 장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프릿츠 랑 영화의 자장권 아래 있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분을 컬러가 약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첫 장면을 흑백으로 봤을 때 굉장히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흑백버전을 영화를 처음 보면서 상상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전체를 흑백으로 진행하다가 해가 저물가면서 햇살이 쏟아지는 고속버스 장면만을 칼라로 하면 어떨까, 라는 상상, 그런데 그 기대감이 충족되었을 때의 만족감이랄까, <마더>가 CJ에서 제작될 때, 그때 저는 시네마 디지털 서울 영화제에서 일하면서 가끔 CJ 사람들과 회의를 해야 했는데 휴식 시간에 제작중인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모두들 <마더>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대부분 산업적인 것이었고,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우리가 < 괴물 > 천만 기록을 깰 겁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CJ는 천만 영화가 없었다) 그래서 <마더>를 보았을 때 마지막 장면의 칼라를 위해서 결국 모든 장면을 칼라로 보아야하는 거야, 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런 다음에는 다시 흑백 버전을 보게 되었으니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가상적인 상상의 가정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실현되는 가는 것을 본 달까, 봉준호 _ CJ에서 제작할 때 < 마더 >에 대한 간섭은 전혀 없었습니다. 100퍼센트 다 제가 할 수 있도록 하게 해주셨습니다. 흑백으로 한 건 개봉 후에 떠오른 아이디어였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만약 이상한 법이 생겨, 두 작품 중 하나만 남겨놓으라고 한다면 저는 흑백 버전을 남겨놓을 거 같아요. 마지막에만 햇볕이 퍼질 때 컬러가 폭발하는 그 버전을 남겨놓을 거 같아요. 영화란 것이 의도를 향해서만 돌진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 심지어 배우의 연기조차도 흑백으로 봤을 때 더 오롯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역으로 돌아봤을 때 우리가 흑백 고전에서 느끼는 매혹들 있잖아요. 크라이테리온에서 다시 출시된 펠리니의 흑백 영화나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같은 것을 봤을 때 느껴지는. 처음 그 영화가 흑백으로 개봉했을 때 아직 프린트가 손상 안 되었을 때 극장에서 보는 느낌. 반대로 그 영화들에 컬러를 넣어서 생각해본다면 뭔가 흐트러트리는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만약 영상자료원에서 한 작품만 남겨달라고 한다면 흑백만 남겨 주십사, 말할 거 같고 (그렇게) 선택하겠습니다. 같은 영화인데 다른 영화인 거 같아요. 김혜자 선생님 얼굴이나 눈빛도 흑백에서 더 좋았고. 정성일 _ 저는 봉준호 감독 인터뷰 중에서 21세기 첫 10년을 회고한 카이에 뒤 시네마 특집호(Cahiers du Cinema_652호_201001)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와 대담한 것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도 미국영화광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서 미국영화를 예찬한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물론 후반부에 < 아바타 >를 앞에 두고 제임스 카메론 영화를 보는 게 두려워 그런 말도 있었지만(웃음) 구로사와에게는 영화청년시절을, 그리고 당신에게는 영화소년시절을 통과하면서 70년대 3명의 할리우드 감독이 인상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스필버그. 드 팔마. 존 카펜터. 봉준호 감독께 그런 의미에서 미국 영화란 어떤 겁니까? 이를테면 박찬욱 감독의 미국영화에 대한 애정은 상당히 유보적이죠. 계속 유럽영화와 밸런스를 갖고 싶어 한다고 할까요. 구태여 호명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어떤 감독은 명단을 보고 있노라면 시네필이라고 믿기 난처한 허풍도 있고(웃음), 봉준호 감독의 미국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듣고 있으면 특별한 애정이라는 생각이 있어요. 물론 봉준호 감독 이전 세대의 감독 중에도 영화에 대한 시네필의 애정을 갖는 감독들이 있죠. 하지만 그런 감독들은 이상할 정도로 밸런스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측면이 있어요.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봉준호 감독은 한국영화에서 미국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세대라고 불러보고 싶어집니다. 저는 영화는 결국 미국 영화라는 생각이 있어요. 영화의 문법은 여기서 나왔고, 우리들이 질문하는 영화의 투명성이라는 것도 이 영화들을 보면서 배운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피스, 그 중에서도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라는 이름, 얼마든지 불러 볼 수 있습니다. 킹 비더, 라울 월쉬, 니콜라스 레이, 더글라스 서크, 안소니 만, 어떤 의미에서 서로 다른 나라들은 미국 영화를 받아들이는 과정만으로 그 나라의 영화사를 다시 쓸 수도 있습니다. 이건 긍정의 의미입니다. 그게 프랑스 영화이건, 일본 영화이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 영화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하스미 시게히코와 아오야마 신지의 대담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하스미가 지나치듯이 말하면서 봉준호 감독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 사람의 영화는 한국 영화 감독으로는 드물게 미국영화의 순혈(純血)을 받고 있다, 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멈춰 선 적이 있습니다. 봉준호 _ 저도 제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거는 늘 민망한데(웃음) 나는 오늘날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나, 나는 뭘 봤나, 어릴 때 자라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아마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저는 TV를 시네마테크로 삼았기 때문에 선배님들 세대처럼 프랑스, 독일 문화원을 출입한 세대는 아니었으니까, TV에서 한 영화는 70퍼센트는 미국 영화가 많았고, 저는 특히 AFKN 보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주한미군영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거기서 B급영화도 많이 방영했었구요.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일본 영화를 얘기할 때 오즈를 말한다거나 프랑스 영화를 얘기할 때 르누아르를 얘기한다거나, 그런 맥락은 제게 없는 거 같아요. 미국 영화 중에서도 약간 반 발짝 사이드로 빠지거나 B급 영화를 더 좋아했던 거 같아요. 존 카펜터나, 그 사람이 윌리엄 와일러같은 대접을 받지 않잖아요. (웃음) 유럽의 이상한 애들이 더 좋아하고, 스필버그가 < 죠스 >로 블록버스터의 이름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가 이상한 영화를 많이 만들기도 했고, 느끼해지기 전, 여유가 생기기 전의 스필버그를 좋아하는 거고, 드 팔마도 사실, 프랑스에서도 저에게 좋아하는 감독은 클로드 샤브롤의 범죄 영화를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도 미국 영화를 좋아하는 유럽 감독을 좋아하는 구나 생각했어요. 셀프 진단이라 정확하진 않겠지만(웃음). 클로드 샤브롤이 히치콕에 대해 쓴 책이나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도 재미있게 읽었고. 구로사와 기요시도 미국 영화를 좋아하는 일본 감독이고, 그래서 카이에와의 대담도 그렇게 성립될 수 있는 거 같고, (잠시 생각) 미국 영화란 제게 깔려있었던 거 같이요. 대학교 다닐 때, 거기서 학교 영화 동아리를 할 때 대만 뉴웨이브에 동조된 시기가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길게 가지 않더라구요. 다음 달 10월에 마침내 크라이테리온에서 (에드워드 양의) <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이 블루레이로 나온다고 해서 프리 오더로 예약해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웃음) 너무나 그 영화를 좋은 화질로 다시 보고 싶고.. 대만 영화의 아름다움, 한국 영화가 저러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삶과 역사가 다 있고.. 그런 생각했다. 나는 영화 동아리니까, 시네필이니까 저런 영화 다 봐야해. 그런 생각을 했어요. 허우샤오시엔 영화를 다 볼 거야. < 비정성시 > 보면서 양조위가 참 안됐다, 왜 저렇게 어깨가 좁을까, (웃음) 그런 생각도 들고. 그 마음은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게 제 본령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저의 뼈와 살을 이룬 건 미국 영화라고 저 스스로도 생각이 들구요. 덧붙여 시네필이 된 후에 완전히 매혹된 김기영 감독이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스스로 제 멘토라고 믿고 싶어지는 감독님들은 미국이나 대만 뉴웨이브 사이 어디에 자리매김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분들에 대한 광적인 마음은 굉장히 오래 지속되는 거 같아요. 대만 뉴웨이브에 대한 매혹이나 그 당시 처음 KINO 창간될 시 베스트 10을 꼽으면 그런 영화들이 들어가곤 했는데 그건 일시적이었던 어느 한 시기였던 거 같아요. 정성일 _ 2012년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앙케이트에서 부탁한 10편의 영화를 뽑아서 보내면서, 전제는 나의 창조적인 생각에 가장 임팩트를 준 10편의 영화라고 단서를 달았고, 기억을 환기시켜 드리자면 알파벳 순서대로 허우샤오시엔의 < 비정성시 >, 구로자와 기요시의 < 큐어 >, 김기영 의 < 하녀 >, 코엔형제의 < 파고 >, 히치콕의 < 사이코 >, 마틴 스콜세지의 < 성난 황소 >, 오손 웰즈의 < 악의 손길 >, 이마무라 쇼헤이의 < 복수는 우리가 한다 >,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 공포의 보수 >, 데이비드 핀치의 < 조디악 >. 이렇게 열 편이었습니다. 봉준호 _ 저는 항상 연쇄 살인 특별 우대합니다. (웃음) 항상 서너 편이 들어가 있어요. 정성일 _ 어떤 영화를 선택하느냐는 그 사람의 취향이고 태도이기 때문에 저는 명단에 우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명단을 보면서 즉각적으로 드는 생각은 이른바 이야기하는 모더니즘 영화에 전혀 관심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명단에서 얘기하는 로베르 브레송이나 고다르, 브뉘엘, 이런 이름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만 말하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 후기 펠리니 영화가 있었을 거 같은데, 이를테면 < 카사노바 >나 < 사티리콘 >같은 영화가 있었을 것만 같은데, 아니면 베르히만의 과도한 바로크적인 영화, 이 영화가 취향이 아닐 수도 있지만 < 마더 >의 흑백버전을 보고 나면 왠지 <침묵>이나 <마술사>, < 처녀의 샘 > 같은 영화들, 그런 모더니즘 영화들. 열편 안에 들어오지 못할 만큼, 이 영화들은 20위권 바깥에 있어, 라고 한다면 그건 그런 영화들과 멀어, 라는 선언처럼 읽힙니다. 봉준호 _ 네, 먼 것 같습니다. 특별히 그런 질문을 해본 적 없지만, 고다르 영화를 본 건 영화 동아리 때가 전부였습니다. < 비브르 사 비 >는 라스트 씬이 굉장히 흥미로웠던 기억이 생생히 있지만 DVD를 사서 모은 이후에 고다르 영화의 DVD를 산 적이 없습니다. < 미치광이 피에로 > 블루레이를 산적은 있지만 사놓고 안 봤습니다. (웃음) 2년 됐는데, 패키지가 너무 예뻐서 샀는데 손이 안가요. 이미 본 < 피아니스트를 쏴라 > 이런 걸 한 번 더 본다거나 아니에스 바르다를 본다거나 그러기는 하지만 고다르 영화는 손이 안 가는 것 같습니다. 취향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만드는 입장에서 그런 영화를 잘 할 수 있는 분들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구요. 제 친구 중 그런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만 영화계를 떠났어요. 영화아카데미 11기 동기 중에 허재영이라는 친구가 그런 영화를 굉장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청어람에서 데뷔를 할 뻔 하다가 못했어요. 그 친구의 < 모자 >라는 졸업 작품이 있는데 제가 촬영을 했어요. 그 친구가 한국의 고다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영화계를 떠났습니다. 그 친구와 저는 많이 다르다, 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취향이나 식성까지도(웃음). 고다르 영화를 보는 것보다 이마무라 쇼헤이나 끌로드 샤브롤 영화를 한 번 더 보는 쪽으로 항상 손이 더 가는 거 같습니다. 정성일 _ 좀 더 산만하게 진행해보겠습니다. (웃음) 임권택 감독님 영화로까지 다가가는데 좀 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첫 번째 영화 < 플란다스의 개 >를 보기 전에 이른바 영화 커뮤니티 안에서는 이미 봉준호 라는 이름은 기대의 명단에 들어있었습니다. 아카데미 졸업 작품인 < 지리멸렬 >때문일 텐데 흥미롭다는 생각은 했지만 저는 이 영화를 연출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플란다스의 개>를 처음 보았을 때 봉준호 감독에 관해서 전혀 모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영화잡지 키노를 만들고 있었고, 창간 일 년 후에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첫 번째 영화를 다시 보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상대로 아류들이 쏟아져 나오거나 아니면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고전적인 방식의 영화에 머물러 있거나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플란다스의 개>를 보게 되었을 때 살짝 쇼크에 빠졌습니다. 뭐랄까, 이 영화는 갑자기 나타난 UFO 같았습니다. 우리가 만나기 전, 그러니까 며칠 전 이 영화가 막 나왔을 때 키노를 다시 펼쳐서 인터뷰를 읽어보았습니다. 사실 모든 감독들은 첫 번째 영화를 찍고 나서의 인터뷰가 가장 솔직합니다. (웃음) 무언가 이해받고 싶어 한달까요. 봉준호 감독은 여기서 여러 차례 만화적 프레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모델의 위기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이 위기가 영화 안에서 한번 작동을 시작하자 멈추지 않고 달려간다, 는 그 느낌이 신나는 영화입니다. 비탈을 달리는 그 아슬아슬한 느낌.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플란다스의 개>는 시장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 살인의 추억 >은 무언가 후퇴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우아하긴 하지만 고전적인 모델로 되돌아가버렸을 때 저는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떤 적개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웃음) 뭐랄까, <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 사이에는 어떤 블랙홀이 있는 느낌입니다. 이제는 그 둘 사이에 놓인 블랙홀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게 아닐까요? 봉준호 _ 네, 강을 건넜습니다. < 플란다스의 개 >가 좀 모던해보일 수 있는 건, (잠시 생각) 그것을 만들었을 당시 제가 가졌던 불안한 상태가 있고 편집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편집기사였던) 이은수 씨와 계속 불협화음이 있었습니다. 음악으로 보면 텐션노트 상태로 편집에 반영되는 것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구요. <플란다스의 개>를 제가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만 제가 그 당시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제작자였던) 차승재 대표가 전혀 터치를 하지 않았어요. 완성한 편집본을 들고 차승재 대표 집에 갔던 게 생각납니다. 같이 편집본을 보자고 해서 마음속에 준비를 하면서 갔어요. 이 씬을 빼자고 하면 이렇게 반박해야지, 저 씬을 빼자고 하면 저렇게 반박을 해야지 하고, 온갖 경우의 수를 준비해서 갔는데 딱 보고 아, 고생했다 이제 술 먹자, 해서 아무 관심 없구나, 결국 역시 이건 버리는 영화군, 하고 상처를 받았죠. (웃음) 한편으로는 행복했죠. 그대로 개봉할 수 있겠다. 한번 엎어졌다가 다시 살아나면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죠. 우노 필름이라는 (예전) 싸이더스의 한구석에서 적은 예산으로 아무 간섭 받지 않고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기도 했었는데, 그런데 그 영화를 찍고 흥행뿐 아니라 비평에도 미지근하게 별 반응이 없었고, 개봉하고 일 년 반이 지나면서 홍콩이나 뮌헨 영화제에서 상을 수집하면서 씨네21에서 다시 새롭게 쓰는 리뷰가 나오고 그랬지만 개봉하고 1년은 굉장히 쓸쓸했습니다. 나에게 질문을 했죠. 이 영화를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하나. <플란다스의 개>의 이성재 심리와 굉장히 비슷해져 버렸어요. 거기서 성인들의 세계, 룸살롱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많이 마신 술로 구토를 하는 그런 세계로 들어갈락 말락 하고 있잖아요. 이성재가 어떤 경계선에 서서. 내가 충무로 감독인가? 그때는 그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인디 장편을 찍어야하나? 아니면 단편을 계속 할까? 당시 말하는 충무로 35미리 상업영화 감독이 될 수 있을까, 또 되는 게 옳을 것일까 질문을 하면서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그런 것이 주인공 이성재가 케이크에 돈다발을 넣어갖고 교수에게 먹이러 가잖아요. 그것도 지하철을 타고. 그 심리와 비슷한 상태였어요. 거기서 막 요동을 치면서. 또 싸이더스라는 굉장히 큰 회사에 일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진 않았지만, 내 나름의 순결주의가 있었습니다. 이게 4번째 영화여야 한다는 강박. 단편 3개를 찍었는데 비록 길이가 1시간 30분이 되었지만 내 독립적으로 단편을 찍던 때와 똑같아야만 해. 누가 충무로 영화와 같지 않다. 단편을 늘린 거 같다는 건 내게 찬사야. 현장 스태프들은 되게 이상하게 생각했죠. 그 영화를 보면 행인이 없어요. 왜 저 감독 영화에는 엑스트라가 없나, 협회 엑스트라가 싫었어요. 다 빼! 주인공만 걸아가! 길에 행인이 없을 수도 있잖아! 이건 나의 네 번째 영화여야하고 첫 충무로 상업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시나리오 써서 주변 선배들에게 보여주면, 너 정말 이 영화로 데뷔하려고 하냐, 차승재 제정신이냐, 이야기가 왜 이렇게 조잡 하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더 오기가 생겨서 무말랭이 하나로도 드라마에 반전을 끌고 올 수 있다는 걸 보여주마. 더 세세하고 작고 쪼잔한 것에 더 집착하게 된 게 <플란다스의 개>였습니다. < 살인의 추억 >은 그 결과에 대한 나 스스로의 반작용이 있었습니다. 역시 누군가 강요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이번에는 굉장히 큰 사건으로 정면대결하고 싶어졌습니다. 사건의 바다로 내가 다이빙 하고 싶다. 그게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었죠.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국회도서관에 출근하다시피 했었어요. 국회도서관의 거대한 자료들. 거기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 취향은 접어놓고 그 당시 중앙일보, 경향신문, 다 보면서. 나는 아주 조그맣고 이 사건은 이렇게 거대한데, 그 사건에 80년대라는 더 거대한 것까지 포함되어 있고, 아주 작은 내가 거기에 다이빙한다, 사건 자체를 존중한다, 사건에 대한 내 입장을 정하고 그것을 영화로 표현하자. 나는 어차피 충무로 감독이 됐다. 쫄딱 망했지만 그런 경계선의 갈등도 없어졌고. 이게 세 번째 네 번째 상관없이 나는 직업감독이 됐다. 안도감 플러스 실망감이 믹스된 거죠. 그렇게 되니까 마음이 편해지면서, 그 사건에 되게 심하게 몰입을 했어요. 나중에는 진짜 제가 범인을 잡을 줄 알았다니까요. 관련 주민들을 만나고 심성보 감독이랑 하도 많이 돌아다녔죠. 나중에는 범인의 생각을 알 거 같은 거예요. 그 사람 생각을 하도 많이 해서. 그렇게 접근한 결과물이 <살인의 추억> 이었던 거 같아요. 처음 얘기하지만 그런 마음도 있었어요. (잠시 생각) 이런 심정도 있었죠. <플란다스의 개>를 만들었을 때 다들 나를 무시했었지 이런 이상한 앙심도 있었습니다. 촬영 김형구, 조명 이강산 감독님처럼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 약간 중년남자가 찍는 압도적인 완성도의 영화? 왠지 대종상에서도 환영받을 것 같은 향취의 영화를 찍어서 너희 모두를 압도해주마 이런 앙심도 있었습니다. (웃음) <플란다스의 개>는 재기발랄하고 영화 동아리를 갓 졸업한 애의 영화라면, 이번에는 이런 복수심도 있었어요. 내가 이런 영화도 찍을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마. 좌 형구, 우 강산으로 모시고 송강호란 배우가 정면에 있는 상태에서 그런 삐뚤어진 마음도 있었던 거 같아요. 정성일 _ 봉준호 감독에게 프로페셔널이라는 게 특별한 의미였던 거 같아요. 봉준호 _ 충무로 직업감독이 된다, 직업감독이 된다는 데 동경도 있었지만 공포도 있었어요. 내 성격에 될 수 있을까. 그걸 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병신이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잘났고 기가 세고, 무시무시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차승재 대표님도 그렇고, 소위 영화를 하신다는 사람들에게 경외심과 두려움이 있었어요. 내가 과연 저걸 할 수 있을까. 연기영화과를 지원했다가 포기할 때도 그런 생각했습니다. 참가번호를 달고 와서 면접관 앞에서 오열도 할 수 있고 탭댄스도 할 수 있는 애가 오십 몇 대 일로 올 텐데, 나는 변태 샌님인데 교수님 앞에서 춤추고 그럴 수 있을까. 그런 공포감이 항상 있었고, 그래서 연영과를 포기하고 영화 동아리를 했는데 그런 어정쩡함이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영화판에 적응할 수 있을까. 조감독을 할 때도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십 년 베테랑인 사람에게 나는 매일 깨질 거야. 조감독인 저 사람이 보면 나는 되게 병신 쪼다일거야. 임권택 감독님이 소품 일부터 시작하셨나요? 현장에서의 모든 걸 짊어지고 출발해서 감독의 자리에 오르시거나. 예를 들면 임권택 감독님의 조감독 출신인 김영빈 감독님처럼 남성적이고 카리스마적인, 감독은 그래야만 할 거 같고, 근데 관심 있는 건 영화밖에 없고, 또 만화를 좋아하니까 장면을 그려서 찍고 싶고 충무로 직업 감독으로서 형상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많이 다르고 그게 계속 지속되었어요. 근데 < 살인의 추억 >을 하면서 좌 형구 우 강산을 모셔놓고 그런 것을 극복했었던 거 같아요. 강호 형님과 새벽 4시까지 나도 술 마실 수 있다. 그러면서 많이 편해졌던 거 같아요. (웃음) 정성일 _ 영화 아카데미를 입학할 때 롤 모델이었던 한국영화 감독은 그 당시 누구였나요? 이제 이 학교를 들어온 건 고민은 끝났고 한국에서 영화감독이 되느냐, 마느냐만 남는다는 자기 선언 같은 것이니까요. 그때 내가 열심히 하면 저기까진 할 수 있어, 라는 꿈같은 것이라고 할까. 봉준호 _ 나는 유영길 촬영감독님과 일하는 감독이 되고 싶었어요. 故 유영길 촬영감독 정성일 _ 유영길 촬영감독님의 어떤 영화가 마음을 끌었나요? 봉준호 _ 많습니다. 극장에서 본 ( 박광수 의) < 그들도 우리처럼 >. 장선우 감독님의 < 너에게 나를 보낸다 >. 제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게 94년도인데, (박광수의)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 허진호 의) < 8월의 크리스마스 >는 훨씬 뒤였고. ( 정지영 의) < 남부군 >. 김유진 감독의 <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도 유영길 감독님이죠. 유영길 감독님이 나를 감독으로 인정해주고, 같이 쇼트에 대해서 얘기할 수도 있고 그러면 나도 충무로 감독인 게 아닌가. 유영길 감독님은 성품도 점잖으시고, 게다가 젊은 감독들이나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감독에게 잘해주신다, 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곤조도 안 심하시고. (웃음) 당시 아카데미 동기였던 조형기 촬영감독이 유영길 감독님의 조수생활도 잠시 했었고. 유영길 촬영감독님에 대한 동경이 있었죠. 그런데 제가 입봉하기 3-4년 전에 98년에 돌아가셨죠. 그리고 90년대 장선우 감독님 영화를 되게 좋아했어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도 참 아름다운 영화고 <그들도 우리처럼>도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음적으로 더 끌렸던 건 장선우 감독님 영화였어요. <너에게 나를 보낸다>나 < 경마장 가는 길 >은 정말 좋아했었고. < 우묵배미의 사랑 >은 거의 대사를 외우다시피 했었죠. 집에 비디오를 아직도 갖고 있는데, 아, 그 영화는 블루레이가 나와야되는데. 그때 삐삐 시절에 인사말에 <우묵배미의 사랑>의 대사를 입력하고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음성을 흉내 내면서) “혹시 백일도 선생 아니십니까?” 이대근 씨와 박중훈 씨가 논에서 만났을 때 그 대사. (웃음) 박중훈 선배님과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 작년 부산에서 만나서 새벽까지 술 마시면서 <우묵배미의 사랑> 시절을 직접 들었어요. 거의 포장마차의 Q&A같은. <그들도 우리처럼>도 하셨잖아요. 박중훈 선배님께 직접 듣는 두 영화에 관한, 그 두 작품은 똑같이 90년도에 나왔지만 전혀 다른 영화잖아요. 장선우 감독님이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신 건 굉장히 안타까운 일인 거 같아요. 더 많이 작품을 하시면 좋았을 텐데. < 우묵배미의 사랑 > 정성일 _ 약간 우회를 하고 싶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따라가면서 영화 안에서 차례차례 한국을 지워간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시작할 때는 동시대 한국을 찍었고, 그런데 두 번째 영화에서 동시대 한국을 버려두고 뒤로 물러나서 86년에서 91년 화성으로 옮겨갔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화성은 시간의 지표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아니라면 잘 잡히지도 않습니다. 다시 한강으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괴물이 나타나면서 한국의 풍경 자체를, 말하자면 불길하게 만드는 거죠. 거기 있을 수 없는 어떤 잉여가 나타나면서. 그리고 나서 이상한 < 마더 >가 있습니다. 아주 이상한 영화. 이 영화는 한국의 불가능한 지리학에 관한 영화입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거기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그 동네 사는 사람도 저 골목이 우리 동네가 아닌데. 우리 동네는 저렇게 이어지지 않는데, 라면서 가상의 동네가 성립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 설국열차 >까지 오면 자기 영화 안에서 한국 자체를 블랙홀 안으로 계속 밀어 넣어버린다고 할까, 여기서 구체적인 한국 자체가 사라져간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종종 구멍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 부분이 미학적이거나 정치적 구멍이라는 블랙홀이라는 느낌에 멈추지 않고 무언가 다른 표현을 쓰고 싶어집니다. 저는 아직 그것을 표현할 개념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자기 영화 속에서 사라져가는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이 있는 지 궁금합니다. 약간 과도하게 단순하고 과격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을 부숴버리고 싶다는 생각. 봉준호 _ (잠시 생각) < 플란다스의 개 >는 심지어 제가 살던 아파트에서 찍었습니다. 신혼 생활을 했던 아파트와 제가 결혼 전에 살던 아파트 지하에서 찍고. 그 영화는 세트가 없었어요. < 살인의 추억 >은 아주 명확한 시공간 좌표가 있어요. 86년 화성에서 시작하는. < 괴물 >은 한강이 나오고. 글쎄, 어렸을 때 한국이나 한국 로컬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있지만, 사진에 관한 아주 단순한 책에서, 바르트의 「밝은 방」 이런 책이 아니고, 사진 잘 찍는 법 이런 책이었는데 어린 제게 마음에 남은 것은 사진 잘 찍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찍을 때 그 사람에게 점점 다가간다. 그 사람의 눈과 얼굴을 향해서. 점점 하나씩 빼면서. 못 찍는 애는 점점 뒤로 물러난다. 나무도 넣어야지, 저런 것도 넣어야지, 이렇게. 어린 마음에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괴물>을 만든 후에 제가 초등학생 때 읽었던 그 문구가 떠올랐어요. <괴물>은 한강에 괴물이 나오지만 한 발 물러서면 못난 가족이 있고, 더 한 발 물러서면 한국 사회가 있고, 더 빠져 나오면 미국이 있다. 그런 식으로 물러났던 게 아닌가. 물론, 더 버라이어티하고 풍자의 전시장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왠지 그런 작업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점점 사람을 향해 다가간다. 그게 김혜자 선생님의 얼굴이었던 거 같아요. 다 지우고 싶은 거예요, 다른 것들은. 그때 < 마더 >를 준비할 때 그런 충동이 있었어요. 김혜자의 눈을 찍는 영화다. 다가가자, 더 다가가자. 영화에 핸드폰이 나오긴 하지만 시대가 뭔지 애매하게. 핸드폰이 나오지만 로케이션은 80년대인 거 같기도 하고, 도시인거 같기도 하고, 시골 같기도 하고, 또 그 언저리인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하나씩 지울수록 김혜자 선생님의 얼굴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서 <마더>의 흑백 버전에서는 컬러마저 지워버린 거죠.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애초의 의도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버전만 남겨야 한다면 흑백을 남기겠다고 말한 겁니다. 어쨌든 <괴물> 이후 <마더> 때 한국을 블랙홀에 밀어 넣는다, 이전에 그런 단순한 충동이 있었던 거 같아요. 사진을 찍을 때 점점 그 사람의 눈을 향해 다가간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처럼요. 그렇게 <마더>를 찍었다고 자평했었거든요. 그래서 < 설국열차 >에 맘 편하게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온갖 나라 사람을 모아놓고 기차라는 용광로에 쑤셔 넣어서. 무대 자체가 이동하는 거잖아요. 단순 추상화된 기차라는 섹션, 이 섹션에 좌표가 없는 거죠. 송강호 , 고아성 한국 캐릭터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사실 지금 개봉하는 핀란드 관객들은 그 사람이 한국어를 안 하면 그들이 한국 사람인지도 모를 거예요. 우리가 노르웨이어와 스웨덴어를 구별 못하는 것처럼 한국어와 중국어를 구별 못하는 북유럽 사람들이 보면 송강호, 고아성이 한국말을 하는지 한국배우인지 모를 거란 말이에요. 그런 느낌을 원했거든요. 일부러 송강호 씨가 김치 얘기를 한다거나 태권도 얘기를 하지 않게 했어요. 한국이 아니라 동양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봤습니다. <살인의 추억>이나 제가 살았던 아파트에서 찍었던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 정말 멀리 돌아온 거죠. 정성일 _ 산만하게 질문한다고 했으니 다시 산만하게 돌아오겠습니다. (웃음) 봉준호 감독에게 한국영화는 김기영 입니다. 여러 차례 김기영 감독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셨습니다. 이를테면 다른 자리에서 다른 감독들로부터 자주 호명되는 유현목 , 이만희 , 하길종 , 이장호 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봉준호 감독에게 임권택 은 무엇입니까? 봉준호 _ 김기영 감독님을 한국 영화다, 한국 영화는 김기영이다 라고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이마무라 쇼헤이나 신도 가네토나 (아르튀르) 립스타인 같은 분들 중 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기영 감독님이 한국적이다, 한국 영화. (잠시 생각) 이를테면 일본 영화는 오즈다, 라는 식의 접근으로 김기영 감독님을 선택한 적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너무 재밌는 거예요. 나를 미치게 하는 요소가 있어요. 이장호 감독님의 영화들, < 바람 불어 좋은 날 > < 바보선언 >이나 < 과부춤 > 이런 것도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김기영 감독님의 영화 팬으로서, 팬심 이런 거는 압도적으로 큰 거는 사실입니다. 그분에 관해서 많이 수집했고 책이건 비디오이건. 하지만 김기영 감독님이 한국 영화고 충무로다. 일본 영화의 오즈다, 라고는 한 번도 생각 못했어요. 임권택 감독님은 뭐랄까, 동경하는 부분, 존경과 또 다르죠. 물론 존경하지만 내가 정말 할 수 없는 것들만 다 하실 수 있는 분. (잠시 생각) 그 분이 갖고 계신 스타일이나 경지 같은 거는 제가 이해하거나 손에 안 잡히는 부분들이 많아요. 그리고 임권택 감독님은 몇 편 안되지만 제 영화를 어떻게 보셨을까 이런 게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궁금하죠. 저는 임권택 감독님 영화에서 훔쳐다 쓴다, 존경의 의미에서의, 그런 게 저에게는 불가능 한 거 같아요. 스타일이나 스케일이나 하시는 방식이 아름답고 동경의 대상이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새끼발가락 하나라도 걸치거나 오마주하거나 응용하거나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제가 가장 최근에 본 건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 아제아제 바라아제 >와 오늘 아침에 < 짝코 >를 봤어요, 영상자료원의 DVD로. 그게 되게 좋아했던 임 감독님 영화인데 아주 옛날에 방송에서 해줬던 거라 제대로 된 프레임으로 본 건 오늘 처음 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모르겠어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보고 항상 느끼는 감정은, (한참 생각)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새까만 후배로서 영화를 찍는 거리라고 해야 하나, 사건이나 인물이나 어떤 감정이나 되게 시니컬하고 냉소적이고 차가운 거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감정을 강요하는 관객을 특정 위치로 몰아넣는 것도 아니고 특유의 선선한 느낌? 선선한 바람을 쐬는, 분명 아무것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거나 관객을 푸시(push)하지 않는데 감독님이 세팅한 대로 두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감정에 푹 젖게 되는, 그런 게 재밌잖아요. 객관적이고 냉소적인 거리 또는 주관적이고 감정을 저킹(jerking, 갑자기 낚아채버리기도)하는, 그 양쪽 다 아닌 거 같아요. 그 느낌이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상상을 해도. 예를 들어 관객을 되게 몰입되게 몰고 가다가 쇼트를 바꿔서 어떤 의도된 디스탠스(distance)를 주면서 관객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그런. 삑사리의 장난을 저는 칠 수 있지만 임권택 감독님께서 축적되고 쌓는 느낌을 저는 모르겠어요. 어떻게 가능하고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지. 작품마다 상대적인 차이가 있겠죠. < 길소뜸 >의 언덕배기에서 마지막 걸어가는 장면에서 상대적으로 더 서늘한 장면이 있겠고, < 서편제 >에서 오정해가 울면서 김수철 씨의 음악이 확 덮어버릴 때처럼 상대적으로 덜 들어가는 것 같은 것도 있겠지만. 임 감독님의 선선한 거리가 있는 거 같아요. 요즘 저녁의 선선한 날씨처럼. 선선하면서도 그 친구가 참 안됐어. 그 사건이 참 슬퍼. 그러면서도 전혀 울고 짜고 하는 건 아닌데, 묘한 거리가 분명히 있는 거 같구요. 두 번째로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오늘 <짝코>를 보면서 다시 느꼈지만,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보면서 또 느꼈지만 세월의 두께. 두 시간의 러닝타임 안에서 늘 영화라는 게 시간이 비약하거나 점핑하기도 하고 시간이 확장되기도 하고. 그걸 다루는 게 감독의 일이지만 영화 전체의 스케일에서 시간이 흘렀다, 세월이 흘렀다, 개인이 세월을 감당한다는 느낌을 임권택 감독님처럼 표현할 수 있는 분은 유일무이한 거 같아요. 예를 들어 < 시네마천국 >에서 영화 초반 보여주다 말았던 키스 씬들을 라스트에서 다 보여주고 엔니오 모리꼬네 음악이 엄청 높은 볼륨으로 막 커지면서 관객들 다 울고, 물론 좋죠. 그것도 세월의 거리가 있고 알프레도는 지금 없고 그 사람이 모아둔 키스 씬 자투리만 남았지만 거기서 표현되는 영화의 시대, 광장에서 영화를 보던 시대, 알프레도의 시대는 갔고 극장은 허물어지고 온갖 것을 열나게 박아놨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세월의 거리와는 게임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훨씬 작은 단위의 시퀀스에서도 임 감독님은 놀랍게 그것을 표현하시던데 그 비밀이 뭔지 모르겠어요. 미국식 에픽, 소위 서사. 오늘 <짝코>를 보니까 베르톨루치의 < 1900 >도 생각이 나더라구요. (로버트) 드니로와 (제랄) 드파르디유가 애기 때부터 십년에 걸친 얘기잖아요, 지주와 소작농의. 최근 디스크 두 개짜리의 확장버전도 봤지만, 거기서도 드니로가 머리 허옇게 바르고 나오지만, 임권택 감독님만큼 세월의 두께를 표현하지 못하는 거 같아요. 나이든 분장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닌 거 같아요. 영화 전체 리듬을 어떻게든 본능적으로 컨트롤하시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있는 거 같아요. < 취화선 >에서 최민식 아저씨랑 안성기 선배님이 재회하는 장면, 눈발이 날리면서 갯벌에서 멀리서 찍잖아요. 그때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은 최민식 분장했네. 안성기 선배 머리 분칠했네. 롱 쇼트에서 서로 껴안네, 이런 게 아니라 저는 거기서 되게 실제 세월의 감정이 느껴져요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강수연 선배가 먼 길을 돌아서 원래 멘토인 스님 앞에서 돌아왔을 때의 느낌들. 그 모든 일들을 섬에서부터 탄광에서 부터해서 그런 두께의 느낌이 전해오거든요. 유인촌 , 한지일 , 그리고 안병경 님을 거쳐 거쳐 오거든요. 그 모든 세월을 겪고 돌아오는 느낌. 그 느낌의 비밀을 저는 잘 모르겠어요. <서편제>에서도 과거와 현재의 플래시백. 오늘 다시 본 <짝코>에서도 김희라 선배와 최윤석 씨가 다 늙어서 갱생원 옷을 입은 채 서울시내로 나오잖아요. 학생 때는 못 느꼈는데 되게 이상한 카메라 워크가 있더라구요. 요즘 젊은 사람이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두 인물 노인네가 얽혀서 싸우는데, 이 말도 웃긴데, 이 사람은 망실공비요!!, 그러면서 소리쳐도 경찰들은 “후 캐어즈(who cares)?” 라며 무심하게 지나가잖아요.(웃음) 노인네 둘이 엉켜 싸우는데 두 주인공이 카메라 밖으로 나가버려요. 도시를 지나가는 차를 잡고 있다가 카메라가 가만히 있으면 이 두 사람이 알아서 프레임 안으로 (다시) 들어와요. 두 노인이 엉키고 있는 모습이 묘한 세월의 두께가 느껴지거든요. 금가락지를 발에서 빼고 임신한 여자를 데리고 산에서 김희라가 뛰어내리고 그 시간들과 단순히 노인분장이 아니라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다른 평론가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예전부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했었어요. 유난히 세월의 긴 폭을 다룬 영화도 많이 하셨잖아요. < 씨받이 >처럼 집중된 스팟(spot)의 영화도 했지만 저는 세월의 폭이 되게 넓은 임 감독님 영화를 좋아하는데요. <취화선>도 그랬고, <아제아제 바라아제>도 그랬고, <짝코>도 그랬고. <서편제>도 포함이 되나요? 데이빗 보드웰의 개론서를 보면 스크린 듀레이션(duration), 플롯 듀레이션, 스토리 듀레이션으로 이렇게 기계적으로 3가지 듀레이션을 나눠놓고 서양 애들 식의 분석의 세계를 임 감독님은 이미 넘어서 있으신 거 같고, <짝코>나 <서편제>처럼 시간대가 막 왔다 갔다 하고 <짝코>는 플래시백에 또 플래시백이 있고 그렇잖아요, 그걸 벽돌을 쌓듯 축조하는 듯한. 세월의 몇 십 년, 두 사람이 걸어온 것. 베르톨루치의 <1900>보다 훨씬 더 세월의 두께가 깊게 느껴지는 거 같아요. 그 마술을 저는 잘 모르겠어요.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데 싫어하실 거 같아요. (웃음)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은 봉준호 감독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영화를 찍어 오신 분이니까 당연히 영화를 보면서,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께서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하기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왔으니까, 계속해서 무심하게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라고 임권택이라는 이름을 유심히 보기 시작한 영화는 언제부터입니까? < 씨받이 > 봉준호 _ < 씨받이 >. 87년 개봉작인 <씨받이>입니다. 그 영화를 비디오로 출시했을 때 대여해서 봤습니다. 극장에서 못 봤어요. (그 영화가 개봉한) 87년은 고3 때였습니다. 제가 88학번이니까요. 하지만 임 감독님의 명성은 이미 신문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 만다라 >를 하셨으니까요. 사실 강수연 누나 때문에 보게 된 거죠. 동경해 마지않던. 중고등학교 발정기 때 보게 되었습니다. (웃음) 제 꿈과 로망이었던 강수연 선배를 이제는 실제 몇 번 뵙고 얘기도 나눠봐서 지금 이렇게 얘기하려니 되게 쑥스럽네요. 강수연 선배덕분에 임 감독님 영화를 보게 된 거죠. <씨받이>에는 분명 야한 장면이 있을 거야, 씨를 받으려면 분명 야할 거야. 야한 장면 없이 씨를 받지 않겠지, 라는 아주 고등학생인 마인드로.(웃음)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빌려봤는데 별로 야하지 않았고,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아직 박광수 , 장선우 감독님이 등장하기 이전이었고, 제가 김기영 감독님에 빠지기도 훨씬 전이었고. 정성일 _ 저는 그 영화를 임권택 감독님과 인터뷰를 한 직후, 그때는 남산에 있던 영진공(영화진흥공사) 지하 시사실에서 박광수 감독과 함께 보았습니다. 남산에서 보고 나서, 그때 박광수 감독이 이장호 감독님의 조감독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사무실이 종로 3가에 있어서 남산에서 보고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그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 말이 없이 그냥 걷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박광수 감독이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딴 감독들은 다 자신이 있는데, 아직도 이 감독하고는 아직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 사람 앞에서 여전히 아이로 남아있는 기분이 드는구나. 봉준호 _ 박광수 감독님은 영화를 격투기처럼 생각하시나 봐요. 대결 같은. (웃음) 정성일 _ 진짜 말없이 걸어가다가 갑자기 그 얘기를 했어요. 그리고 그 마음은 진심이었고 아마 평생을 담아두신 것 같아요. 결혼하면서 임 감독님을 주례로 모시고 지금도 매년 새해가 되면 세배를 하러 오시니까요. 봉준호 _ 저도 강수연 의 뭔가를 영접하는 마음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틀었다가 어, 하고 되게 놀랐어요. 첫째, 메시지가 그렇게 강렬할지 몰랐었어요. 조선시대 양반사회에 대한 얘기가 굉장히 직접적이지 않나요, 시작부터. 마당에서 강수연 언니가 뭘 하는데 안에서 사대부 양반들이 모두 모여 제사나 그런 걸 길게 논하고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이 시각적으로 강력하게 형상화되어서 보여질 때, 이 집의 기와집의 기하학적 패턴들, 생각나는 게, 그 장면에서 기와지붕들이 구중모 기사님의 렌즈로 포착되었을 때 아지랑이가 막 피어오르잖아요. 아마 렌즈 밑에서 버너 같은 걸로 뭘 피우셨던 거 같아요. 그런 비주얼도 처음 보는 거 였구요. 완전 다른 영화구나! < 씨받이 >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강수연 님이 별로 야하게 안 나왔다는 실망감을 압도하는. (웃음) 그때부터 임권택 감독님 영화를 봐야한다. 그래서 < 아제아제 바라아제 >도 서울극장에서 개봉할 때 가서 봤던 거고, <씨받이>와 <아제아제 바라아제> 사이에 있던 < 아다다 >는 극장에서 놓쳤는데 대부분 극장에 가서 봤어요. < 개벽 >, < 서편제 >, < 태백산맥 >, < 장군의 아들 > 전부 다. 그리고 대학 때 제일 큰 취미가 황학동 가서 비디오 사는 거였는데, 동대문운동장 지나서 4호선 역에서 내려가서 개봉하는 영화들뿐만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죠. < 길소뜸 >, < 티켓 > 이런 작품들 비디오로 봤습니다. 거기 사인도 받았는데 플라스틱이 아니라 비닐 케이스 밑으로 커버를 빼는. < 천년학 > 행사 뒷풀이 때 거기 종이 케이스에 사인도 받았습니다. <티켓> 마지막 장면에서 김지미 여사가 품에서 달걀을 꺼내듯이 (임 감독님의 비디오 자켓을 꺼내들면서) 슬그머니 다가가서 저기 너무 실례지만, (하고 인사를 드리니 임 감독님이) 자네 < 괴물 > 신기해, (라고 하셨을 때 개의치 않고) 아, 저기 (여기에 사인을 좀) 이러니까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구요. (웃음) <길소뜸>, <티켓>, < 만다라 >는 테이프로 구했었죠. 영상자료원이나 회고전할 때 본 것도 있고, <씨받이>가 어쨌든 출발점이었던 거 같아요. < 장군의 아들 > 정성일 _ < 씨받이 >로 임권택 감독님 영화를 시작했다면 전혀 다르지만 뒤이어 만나게 된 < 장군의 아들 >을 보았을 때 느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봉준호 _ 이분이 어렴풋하게만 듣던(건데) 옛날에 장르 마스터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액션 그런 걸 한 번도 못 봤었거든요. < 만다라 >, < 씨받이 >만 머릿속에 있고. 근데 이 분이 한때 일 년에 4편씩 다찌마와리를 찍었다니! 그러다가 < 장군의 아들 > 보니 너무 재밌는 거예요. 특히 박상민이 싸울 때 직부감(vertical_high_angle)으로 찍은 쇼트들. 벽을 밟(고 뛰어올라 걷어차)는 장면. 미국 영화나 홍공 무술영화와 너무 다르고, 너무 재밌고 흥분되는데 동시에 6, 70년대 이분 액션영화는 어땠을까 추측해봤죠. 그때 그 가닥을 보여주시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재밌었어요. 장르 마스터였을 때 어떠했을까 추측해보게 되더라구요. 류승완이랑 얘기도 많이 해봤습니다. 자기도 벽 밟는 거 흉내내봤다고 하더라구요. (웃음) 인상적이었어요. 그 분이 <길소뜸>이나 <짝코>나 < 아제아제 바라아제 >나 그분 특유의 롱 테이크라든가 아주 유연하고도 마술 같은 리프레이밍(reframing)이라 해야 하나, 관객이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프레임을 새로 잡는데 조잡한 트래킹이나 줌에 의지하지 않고. 표준렌즈나 단렌즈(wide-lens)를 끼운 상태에서 굉장히 절묘하게 리프레임 되면서 모든 미장센이 완벽하다고 느껴지는 그런 굉장히 마술적인 순간이 많았거든요. 근데 액션을 찍을 때는 이 분이 그런 걸 어떻게 하시려나. 빠른 편집으로 그걸 또 하시더라구요. 반대로 막 싸우는데 겹쳐진 상태에서 (인물들 사이의 동선이) 하나도 엉키지 않고, 액션을 저렇게 찍으실 수도 있는 거구나. 심지어 아주 옛날부터 저렇게 찍으셨나보다. 아직도 임 감독님이 6, 70년대 찍으신 액션 영화를 못 봤어요. 하나만 추천해주시면 보고 싶어요. 어떻게 그렇게 하셨고 뭐가 같고 다른지. 정성일 _ 그렇다면 역시 저라면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를 먼저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제게 부탁의 기회를 주신다면 저는 봉준호 감독의 사극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액션영화뿐만 아니라 임 감독님의 60년대 사극영화를 보신다면 몹시 흥미롭게 보실 수 있으실 거 같아요. 봉준호 _ 저는 임 감독님의 사극은 유인촌 , 김진아 의 < 연산일기 >만 보았을 뿐입니다. 60년대 사극영화도 보고 싶네요. < 망부석 > 정성일 _ 추천한다면 저는 세 번째로 찍은 < 망부석 >이라는 영화를 먼저 고르겠습니다. 약점도 동시에 있지만 이미 세 번째부터 이 사람은 완성된 영화를 만들고 있었구나, 라는 당혹감마저 불러일으킨다고 할까요. 31살에 만든 신상옥 규모의 영화라고 할까. 봉준호 _ 컬러인가요? 정성일 _ 흑백으로 찍었습니다. 임권택 감독님의 첫 번째 컬러 영화는 67년에 찍은 < 요화 장희빈 >입니다. 이 영화도 사극입니다. 봉준호 _ 말씀하시는 거에 제가 동의하는 것은 마술적인 순간들이 임 감독님 영화에, 이런 말은 외람되지만, 임 감독님의 별로라고 하는 영화에도 꼭 한두 번 씩 있는 거 같아요. 정성일 _ 심지어 저렇게 포기한 영화에서조차도 이런 장면에서는 이렇게!! 봉준호 _ 빈손으로 돌아가시진 않는구나(웃음) (2부에 계속) (註)_ 인터뷰 중의 대화는 가능하면 오가던 이야기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일부 어휘들이 영어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에도 옮기지 않고 그냥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그 까닭은 의미는 옮길 수 있으나 대화의 문맥에서 그 단어가 가지는 ‘뉘앙스’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화중의 일부가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충분히 다시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서 마치 점프 컷처럼 진행될 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괄호를 치고 보충설명을 덧붙였다. 일부독자들에게는 필요치 않을 수 있지만 이 점 이해를 바란다. 또한 서로에게 약간의 어색한 표현들도 대화의 ‘라이브’한 무드를 돕기 위해 수정하지 않았다.
임권택 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혹은 영화라는 우정의 이름으로 나눈 대화 (1) 영화에서 우정이란 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여기서 철학에서 사랑을 말하는 것처럼 이 말을 개념적으로 꺼내든 것이 아니다. 그저 우정에 대해서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지금 당장 내 안에 가득 찬 사랑의 감흥이 막 넘쳐나고 있어서 그걸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말이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군가와 마주치기 싫어진다. 지금 막 보고 나온 영화에 대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기분? 물론이다. 나는 이 말을 엄밀하게 사용하는 중이 아니다. 약간 핵심을 벗어나고 싶다. 영화를 마주 대할 때 가장 당혹스러운 사실 중의 하나는 이 모든 것이 지나칠 정도로 기계군의 집합과 규칙으로만 이루어져있다는 어쩔 수 없는 결론이다. 노엘 버치는 좀 더 단정적으로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는 영화감독이나 분석가들,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영화 용어를 보면 영화에 대한 그의 사유를 알 수 있다고 선언하듯이 장황한 영화의 요소들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 그의 저서 「영화의 실천」의 첫 문장)을 시작한다. 기술의 수사학들. 테크놀로지의 개념들. 그 안에서 만들어진 미학적 계보.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때 우리는 이 기계군의 인간성을 증명해야 하는 다소 난처한 입장에 처한다. 비평의 투쟁은 이 자리에서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취한다. 한편으로는 영화라는 기계군의 리듬이 만들어내는 선과 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설명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리듬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다시 생명의 개념으로 옮겨놓아야만 한다. 이때 우리는 파국적 진술을 주의 깊게 경계해야만 한다. 잠시 게을러질 때 이 둘 사이에 있지도 않은 서사를 만들어 하나로 봉합시켜버리고 싶은 유혹이 단숨에 우리를 삼켜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설명하기 위한 노력 중에서 이미 만연한 프로젝트는 다른 데서 가져온 시도를 내세운 다음 거짓 화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도로서의 서사. 이때 서사는 이상할 정도로 논리적이거나 과잉에 가득 찬 정치적 파토스로 넘쳐나거나 때로 허수아비의 정신분석이라는 불장난에 걸려든다. 자기참조의 동어반복이라는 함정. 우리는 원래의 자리에로 돌아가서 계속해서 물어보아야 한다. 내가 막 보고 나온 이미지와 사운드의 카오스 속에서 영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가 닿기 위해서 이 질문을 반복하고 싶다. 영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낭만적인 메아리. 누군가의 대답을 기다리는 호소. 이때 우정은 지금 보고 나온 영화에 대한 진리를 공유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 대한 사랑을 나누려는 사람들은 좀 기이한 몸짓을 보여줄 때가 있다. 나는 지금 그 순간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 스트롬볼리 >(1950), < 리오 브라보 >(1959) 나는 이 자리에 차례대로 친구들을 호명할 생각이다. 아마 임권택 은 좋은 참조점이 되어줄 것이다. 당신께서는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자리를 만든 것은 임권택이라는 이름, 그가 만든 영화에 대한 신화적인 재창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있을 지도 모를 그런 과정을 생산할 수 있는 담론들과 단호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 혹독한 비판을 견딜 수 있는 지에 대한 비평적 시련을 제공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렇다면 친구들은 무슨 역할을 요구받을 것인가. 영화를 만나는 시간에 각자가 경험하는 사건 안에서 서로의 경험을 나누게 될 것이다. 나는 영화가 공동체 문화라는 것에 대해서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에는 커다란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반복해서 한 편의 영화 안에 함께 거주하는 것에 대한 내 바람이 지나친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그래서도 안 된다는 믿음을 갖는 쪽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좀 미묘한 문제가 있다. 우선 영화라는 사건과 마주칠 때 각자에게 도래하는 힘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방식, 그런 다음 다시 개념으로 옮기는 작업, 종종 거기서 더 나아가 그것을 놓고 대차대조표를 만든 다음 자신이 만들어놓은 전체의 지도 안에 다시 기입시키려 들 때 이루어지는 수정 작업에 이르게 되면 가끔 우리는 서로의 대화의 교차점이 어딘지에 대해서조차 어리둥절해 질 때가 있다. 지금 금방 떠오르는 두 가지 예. 나는 로베르토 롯셀리니의 < 스트롬볼리 >를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별달리 이 영화가 걸작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곧장 결론에로 달려가고 싶었다.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 앞에 섰을 때 내 기대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선택에 대한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관객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유별난 취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우리들 사이에 놓인 간극을 생각해야만 했다. 물론 둘 사이에 놓인 차이를 과도하게 단순한 도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이 둘 사이에 어떤 종합화를 시도하는 것은 이론적 폭력이 될 것이다. 그 둘은 그 자체로 각자의 힘을 소유하면서 공존의 화음을 서로의 노력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일시적으로 분쟁을 피하려는 거짓 화해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으로부터 누구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스트롬볼리>를 설명하면서 어느 순간 문득 관객 앞에 외롭게 무대에 서 있던 나는 이 간극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 올려야만 화음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정확하게 화음은 하나의 발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두 번째는 학생들과 하워드 혹스의 < 리오 브라보 >를 서로 논쟁하듯이 의견을 나누는 수업 중에 일어났다. 다소 신기한 것은 그 중에 대부분은 이 영화를 그 전에 본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하와드 혹스의 영화를 처음 본 학생도 있었다. 질문을 열심히 듣고 있다가 우리들의 대화가 완전히 실패로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지 여기에는 지식의 차이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하워드 혹스의 영화를 보면서 미장센의 투명성이랄까, 말하자면 일종의 투시도법과도 같은 방법에 대해서 일종의 영화적인 기적이라는 리베트의 지적에 완전히 감명을 받은 다음 그 위에서 벌어지는 교환의 운동에 심취했기 때문에 무언가 거기서 출발해서 그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투명성이라는 말이 증명되기를 원했다. 이때 여기에는 의미의 논리나 장면의 수학적 배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도약의 차원에 대한 공감이라는 결정적 요청이 있다. 이를테면 오즈의 필로우 쇼트가 그저 풍경을 찍은 사진적 장면의 연결이라고 받아들일 때 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상대방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 그건 히치콕의 <사이코>에서 마리온을 샤워 룸에 데려가기까지의 동선을 설명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때로 주석을 길게 달아야 할 필요가 있지만 반대로 직관의 순간이 사유를 건드리고 그런 다음 거기서 울린 공감의 진동판이 비로소 만남을 열어줄 때가 있다. 물론 나는 간극 사이에 놓인 긴장을 즐긴다. 어떤 경우에는 끝내 좁혀들지 않는 거리를 통해서만 서로를 존중하면서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나는 이제까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호의를 지닌 수많은 지지자들을 만났지만 나와 동일한 방식의, 말하자면 체험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기쁨, 그 안에서 영화가 만들어낸 효과와의 접촉,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진정한 의미의 긍정적인 좌절과 희열에 가득 찬 패배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다. 아마 나도 그들에게 반대편에서 동일한 자리에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이럴 때는 나의 지지에 동의하지 않는 친구를 만났을 때 비로소 더 많은 의견을 나눌 수도 있다. 친구란 살아있는 하나의 범주이자 서로 다른 견해의 선험적 존재이다. 영화에서의 우정. 말하자면 내가 영화를 본 다음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은 어떤 경우에도 나의 분신을 대면함으로써 나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허문영 문화평론가 첫 번째 초대한 친구는 허문영 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지난해 부산 영화제에서 (한국영상자료원 바깥에서는) 처음으로 임권택 전작 회고전을 했기 때문이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허문영의 영화에 대한 견해에 항상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그건 그도 그럴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그걸 거의 의식하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그의 첫 번째 비평집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의 추천사를 쓰기 위해 1998년부터 2009년에 이르는, 말하자면 거의 십년간에 걸쳐 서 있는, 58편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서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오해한 것인 지도 모른다. 단지 서로 다른 영화를 지지한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같은 영화에 대해 우리는 서로 다른 감각의 바탕 위에서 각자의 개념 제작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충돌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자주 만난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종종 서로의 견해를 궁금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매번 확인한 것은 (심지어 바로 옆자리에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서) 같은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일 지라도 그 안에서 전혀 다른 영화적 순간의 비탈(傾斜)에서 각자 서로 다른 참을 수 없는 기쁨과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허문영은 영화에서 욕망이 활동하는 반경 거리를 측정하는데 언제나 예민했으며 때로 매혹되었고 그런 만큼 그 활동에 대해서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이때 허문영이 사용하는 욕망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용법이 아니다. 종종 남근을 영화의 중심으로 끌어당기고 그 안에서 성숙하지 않은 소년성에 대해서 주목을 하고 막(膜)의 신비로운 장벽과 폭력적인 파괴에 대해서 다루긴 하지만 은유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욕망을 꺼내들 때 거기서 그는 영화적인 순간이 하나의 힘으로 집결된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에게 힘의 화음은 소중한 속도이며, 거기서 외부와 접촉하는 쟁점들은 단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예술과 세상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에너지이며, 종종 그 흔적들과 변주는 위대한 영화를 위한 조건이다. 허문영이 존 포드를 위대하다고 느끼는 장면은 여기에 있다. 수 없이 주문처럼 되풀이해서 불러오는 존 포드의 ‘랜드스케이프(landscape)’는 분명히 거기 있는데 가 닿을 수 없다. 가 닿을 수 없는 욕망. 닿을 수 없는 데도 마치 사이렌처럼 잡아당기는 힘. 둘 사이의 긴장. 사로잡힌 존재의 시선. 사로잡힌 자의 시선. 그 존재와 미칠 듯이 접촉하고 싶은데도 만질 수 없을 때 겪는 결핍 안에서의 시련. 그가 ‘랜드스케이프’를 풍경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존 포드의 풍경은 영화 용어이기 때문이다. 다소 도식적으로 내가 이해한 것이긴 하지만 그는 가끔 욕망과 의지를 섞어서 사용한다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이 설명으로 허문영을 니체(-푸코)주의자라고 손쉽게 부르기 위해서 서둘러 정의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런 방식이라면 (허문영 자신은 별로 동의하지 않겠지만) 말리노프스키를 연상케 할 정도로 그는 영화 안에 들어가서 살면서 체험을 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 말하고 싶어진다. 허문영은 내가 알고 있는 한 모든 영화비평가들 중에서 촬영 현장의 자리에 가는 것을 가장 즐기는 관찰자이다. (일종의) 인류학을 방불케 하는 태도. 마치 현장탐사와도 같은 참여. 심지어 그는 홍상수의 <밤과 낮>에서 연출부를 하기도 했다. 꼼꼼하게 지켜보는 카메라의 위치와 이동. 그 안에서 스텝들의 활동. 아니, 말 그대로 공기의 리듬. 그런 다음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바르뜨의 에로티시즘에 이끌렸다. 현대 영화이론은 그를 전혀 매혹시키지 못했으며, 다소 거슬러 올라가서 앙드레 바쟁을 자주 참조하긴 했지만 때로 경계심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거리를 유지했다. 조나단 로젠바움을 존경하지만 그건 시네필의 태도에 한정해서일 뿐이며 그의 문제의식을 자기의 글 안으로 끌어들이진 않았다. (최근의 글로 한정지어) 제한적으로만 말한다면 토마스 엘세서와 D. N. 로도윅의 그림자를 읽지만 허문영은 이론과 불장난에 빠진 적이 없다. (그런 다음 당연히 미처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그림자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언제나 그는 영화 안에서 자기를 불러 세웠던 욕망 주변으로 흩어져있는 개념들을 배열하려고 애를 쓴다. 애를 쓴다? 그렇다. 바로 그 태도가 그의 영화 비평을 읽을 때 다소 음란하게 논쟁을 전개되고 있을 때조차도 예의바르게 느껴지게 만든다. < 천년학 >(2006) 영화에 관한 우정의 대화를 빨리 시작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제목들을 호명하는 일이다. 나는 여기서 허문영 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가 작성한 두 개의 명단을 내놓을 것이다. 먼저 그 하나는 영화 주간지 씨네21에서 2008년 창간기념호에서 1995년부터 2008년까지 당신에게 10 베스트 영화는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한 대답이다. 허문영은 다음 열편을 썼다. (공동) 1위 < 아버지의 깃발 >과 <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 (클린트 이스트우드). 2위 < 엘리펀트 > (거스 반 산트). 3위 < 밤과 낮 > ( 홍상수 ). 4위 < 스틸 라이프 > (지아장커). 5위 < 천년학 > ( 임권택 ). 6위 < 폭력의 역사 > (데이빗 크로넨버그). 7위 < 남국재견 > (후 샤오시엔). 8위 < 멀홀랜드 드라이브 > (데이빗 린치). 9위 < 우주전쟁 > (스티븐 스필버그). (공동) 10위 < 일상적인 연인들 > (필립 가렐), < 행진하는 청춘 > (페드로 코스타). 나는 이 명단에서 임권택만을 물어볼 생각이다. 1995년에 임권택은 < 태백산맥 >을 만들었고, 2007년에 <천년학>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 < 축제 >와 < 춘향뎐 >, < 취화선 >, < 하류인생 >이 있다. 그런데 허문영은 그냥 간단하게 <천년학>을 선택했다. 배치는 구조나 체계, 혹은 과정이 아니다. 두 번째 명단. 한국영상자료원은 2014년에 40주년을 맞으면서 영화비평가들과 영화학자들, 기자들,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에게 앙케이트를 돌렸다. 당신의 한국영화 100편은 무엇입니까? (아마 전체 명단은 이 토크가 소개될 무렵에 공개될 것이다) 여기서 허문영은 임권택의 영화를 15편이나 선정했다. 아무리 1950년 이전의 영화 프린트 상당수가 사라졌다 할지라도 이건 한국영화사 전체를 놓고 100편을 결정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허문영은 어떤 균형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결정했)다. 현재 볼 수 있는 임권택의 영화중에서 허문영은 < 두만강아 잘 있거라 >,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 < 족보 >, < 만다라 >, < 짝코 >, < 길소뜸 >, < 티켓 >, < 씨받이 >, < 개벽 >, < 서편제 >, <축제>, <춘향뎐>, <취화선>, <하류인생>, <천년학>을 추천했다. 나는 이 목록 사이의 여백을 채워나가거나 혹은 간격 사이의 빈칸을 파고들거나 (같은 말이지만) 거기 있지 않은 제목을 호명하여 상속의 위계질서를 세우려 들지 않을 생각이다. 그냥 이 목록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내가 이 명단에서 놀란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미 말한 것처럼) 숫자이다. 일백편의 목록 안에서 그저 우글거린다는 표현 이외에 달리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임권택의 영화들은 허문영의 한국영화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 한국영화사에서 백번의 사건 중에서 열다섯 번의 의미의 매듭. 다른 하나는 반대로 그 안에서 임권택의 영화들에 대한 표준 판본의 선택에 머물기 위해서 이상할 정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간단한 비교. 허문영은 김기영 의 이름으로 물론 < 하녀 >를 추천했다. 하지만 그런 다음 갑자기 < 이어도 >와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에로 옮겨간다. 김수용 의 < 안개 >는 걸작이다. 그러나 < 화려한 외출 >이 김수용이 그려낸 소시민 인정극을 대신할 만큼 중요한 영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견해이다. 신상옥 은 < 지옥화 >도 없고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도 없고 < 로맨스 빠빠 >도 없고 < 폭군 연산 >도 없다. 단지 < 다정불심 > 단 한 편만이 있을 뿐이다. 반대로 이만희 의 목록을 만들면서 < 생명 >과 < 04:00 -1950- >를 포함시킨 것은 단지 역동적일 뿐만 아니라 과격한 인상을 자아낸다. 목록을 쳐다보는 내 감상은 이렇다. 허문영은 자신의 목록에서 계속해서 균형을 무너트리고 자꾸만 열어놓은 다음 그 무언가와 접속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그 접속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윤곽 전체가 부서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이만희는 허문영의 한국 영화사 안에서 벗어나려는 동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반대로 임권택은 그 안에서 역사를 옹호하려는 듯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 그럴 필요가 생긴 것일까. 우리들의 대화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나는 이것을 우정이라고 믿는다. 말하자면... 정성일_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한국극영화의 개벽, 거장 임권택 의 세계_ Fly High, Run Far, The Making of Korean Master IM Kwon-taek’이라는 제목아래 전작전을 한국영상자료원 바깥에서 가장 큰 규모로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이 행사의 프로그래머셨는데, 행사를 진행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적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 장군의 아들 > (1990) 허문영_ (망설이지 않고) 그냥 기억에 깊게 남았던 장면 하나는, 사실 제가 그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류승완 감독이 < 장군의 아들 >을 보고나서 관객과의 대화를 했는데, 그때 제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류승완 감독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말을 했는지는 듣진 못했고, 나중에 감독과 통화를 했어요. 류승완 감독이 굉장히 들뜬 목소리로,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액션영화 전문 감독으로 알려져 있고, 그리고 <장군의 아들>은 임권택 감독님의 가장 완성도 높은 액션 영화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한국의 액션영화 중 한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선택해서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게 좋다고, 고민하지 않고 선택을 했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본 <장군의 아들>이 아니었다. 이 영화는 액션영화라기보다는 풍경의 영화다, 혹은 무드의 영화다. 이 영화는 액션을 풍경처럼 다뤘다. 정통 액션이 벌어지는 순간보다 그 액션을 둘러싼 무드로 찍은 영화다. 어떻게 이 영화가 당대 상업영화로 인식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모든 걸 떠나서, 나도 이런 영화를 찍고 싶다. 이러한 말을 들었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류승완이라는 젊은, 지금은 그렇게 젊지도 않죠(일동 웃음) 어쨌든 임권택 감독에게는 열혈 청년 액션 매니아 감독이라고 인상지어진 류승완이라는 후배 감독이 십여 년 만에 임권택 영화를 다시 보면서 거기서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보았고, 그 새로움에서 임권택 감독의 어떤 비밀을 본 것 같은 인상의 말을 했을 때, 그때 이것은 이 회고전의 멋진 순간 중의 하나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더 재밌는 건 제가 그 말을 임 감독님께 전해드렸어요. 감독님, 류승완 감독이 그러는데요, 이거 상업영화 아니래요. 거의 마치, 고도의 예술영화를 본 것처럼 얘기 하던데요. 그때 임권택 감독님은 충격을 받으셨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여러 인터뷰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장군의 아들>은 장사하려고 만든 영화다. 물론 개인적인 궁금함이 있긴 했지만, 예전에 찍었던 다찌마와리 영화들에 대해, 남성성, 남자다움이라는 것에 대해 오랜만에 다시 생각해보는 개인적인 계기가 있었지만, <장군의 아들>은 철저히 상업영화로 기획되고 맞춰서 찍은 거다. 근데 그게 무슨 소리냐, 하시는 거예요. 굉장히 충격을 받으신 거죠. 이 장면은 굉장히 재밌어요. 실제로 제가 <장군의 아들>을 이번에 다시 본 느낌은 류승완 감독의 것과 비슷해요. 저도 이 영화를 굉장히 잘 만든 우아한 액션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 영화를 지금 2013년에 보고 있으면, 이 영화가 왜 상업영화였지? 그 해 흥행 1위였잖아요. 아마 서울에서만 60만이 본 영화죠. (<장군의 아들>은 1990년, 67만 9천명의 관객 동원하며 흥행 신기록을 세웠고, 그 이전 최고 기록은 < 겨울여자 >로 58만6천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거죠. 대대적인 흥행 기록을 세운 거죠. 여기에는 액션영화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액션장면의 화려함, 격렬함이 없어요. 두 번째, 비극적 결말도 없어요. 남성영웅의 비극적 최후도 없고 그렇다고 화려한 승리가 있는 것도 아니죠. 게다가 90년대 이후 모든 한국의 액션영화가 갖고 있던 로맨스도 없어요. 하다못해 남성간의 로맨스도 있거든요. 90년대 이후 한국액션영화에는 남성 공동체, 의리의 파토스 같은 게 있는데. 물론 남자주인공과 여자와의 로맨스가 반드시 끼어들긴 하지만. 어쨌거나 로맨스, 사랑의 파토스 같은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상업영화가 될 수 있지, 생각했어요. <장군의 아들> 하나만 가지고도 임권택 감독님의 작품 세계를 완전히 되짚어 봐야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죠. 다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임권택 감독님의 반응은 생각을 해봐야 겠다, 라고 하셨어요. 내 의지는 철저히 상업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당신들이 왜 그렇게 얘기하는지 알 수 없다. 그걸 충격이라고 말씀하신 건, 뭔가 자기의 의지를 벗어나 작품에 투영된 중핵이 따로 있다는 거죠, 그걸 감독님도 생각해보실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 임권택 감독이야말로 인터뷰를 통해 알기 가장 어려운 감독이 아닐까 하는 건, 그가 말을 아끼기 때문이 아니라, 종종 자신의 의지를, 의도를 벗어나는 영화적 순간을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정성일_ 그렇다면 이번 임권택 감독님 전작전을 통해 재발견을 했거나, 재평가했거나, 말하자면 생각이 바뀐 작품들이 있습니까? < 상록수 > (1961) 허문영_ 저 개인적으로 굉장히 감동을 받았던 건 < 상록수 >였어요. 정 선배가 그 영화를 미지의 보석중의 하나로 추천하시기도 하셨지만, 저는 그전에 그 영화를 보지 못 했어요. 줄거리는 진짜 너무너무 뻔한 계몽영화인데, 이 뻔한 계몽영화를 만들면서, 저는 정 선배처럼 쇼트 단위로 기억을 하지는 못하겠어요. 기억이 안돼요. 그냥 그 영화를 보고 즉각적으로 받은 느낌은, 이것은 사무치는 기다림의 영화다. 사무치는 기다림의 어떤 순간을 끝내고자하는데. 그걸 다 알고 있어요. 나도 알고 있고, 만든 사람도 알고 있고, 심지어 (영화 속의)인물들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웃음) 그런데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場)에 놓인 사람들이 그냥 기다리는. 그게 너무 사무치는 느낌. 그 사무치는 느낌은 단순히 하나의 쇼트를 잘 찍어서도 아닌 것 같고 연기를 잘 해서도 아닌 것 같고, 뭔가 카메라와 인물과 감독이 그냥 어떤 순간에 어떤 시간으로 만났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밖에 생각을 못하겠어요. 임권택 영화를 종종 보고 나면 분석하고 해명을 하고 싶은 의욕을 잃어버리게 만드는데, 그냥 그 느낌 자체에 빠져있게 되는데,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상록수>가 그런 영화였어요. 끝나고 나서 그냥 멍하게, 멍하게 있던 기억이 나요. 정성일_ 이 마음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네필처럼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데, 말하자면 이건 지금의 마음의 상태가 < 상록수 >를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게 한 건데 올해 본 새로운 동시대 영화중 베스트는 무엇입니까? 허문영 선생의 심리적 상태를 알아봐야 하니까요. (웃음) 과거 영화는 무조건 존 포드가 차지하고 있으니 궁금하지 않잖아. (일동 웃음) < 풍경 > (2013) 허문영_ 과거영화를 얘기해야한다면 (존 포드의) < 선 샤인 브라이트 The Sun shines bright >(1953년)를 얘기하려고 했지만. (웃음) 그냥 인상적으로 떠오르는 영화는, (망설이다가) 이미 평가받은 영화들은 재미없으니까, 제일 최근에 본 영화가 말씀하시니까 막 떠오르는데, 저는 장률 의 < 풍경 >이었어요. 저는 (씨네 21에 실린) 정 선배의 인터뷰를 보니, 이걸 장률의 걸작으로 꼽고 있지는 않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근데 저는 이 영화가 걸작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그냥 사람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도록 해주는 구나. 그냥 사람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제대로 하지 못했나, 그 사람이 놓인 사회적 처지나 운명이나 뭐, 여러 가지 현실적 어려움, 곤경, 그 사람의 개인적인 소망. 그런 거와 아주 무관하게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 그게 우리가 못해오고 있었던 일이었구나. 그렇게 영화를 많이 보면서도, 우리의 생활자체는 점점 타인의 얼굴을 외면하고 살도록 되어가잖아요. 심지어 카페에서도 얼굴대신 스마트 폰을 보고, 생활이 그렇게 흘러갈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도 그런데, 근데 이 영화는 얼굴을 보도록 권유하고 있구나. 아니, 보는 것이 좋은 일이고, 보는 것이 괜찮은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구나, 이런 느낌. 저는 영화 보면서 그게 드문 일이었어요. 그게 다큐여서 가능한 일이고, 장률이라는 사람이 어제 꾼 꿈이 무엇이었습니까?, 라는 질문을 잘 선택하기도 했고, 이게 영화적으로 훌륭하다, 아니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그런 점에서 <풍경>이 올해 최고의 영화는 아니어도 굉장히 특별한 영화라고 머리에 남을 것 같고,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정성일_ 질문을 조금 바꿔보겠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기 전부터 임권택 감독님은 영화를 만들었잖습니까?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의식하지 않고 있다가, 이 영화를 찍은 사람이 누구지, 하고 임권택이라는 이름을 처음 확인하게 된 영화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 감독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첫 번째 영화는 무엇이었습니까? < 짝코 >(1980) 허문영_ 저는 정 선배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그런 순간이 있었던 거 같아요. 물론 극장에서 개봉한 임권택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은 잘은 기억은 안 나지만 <만다라>였던 거 같아요. 그게 대학 1학년 즈음 됐겠죠. < 아제아제 바라아제 >도 극장에서 봤었고. 물론 < 만다라 >이후부터 임권택이라는 이름을 모를 수가 없죠. 하지만 제가 20대부터 영화를 의식하고 공부하고 찾아보고 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전에 직접 뵙기도 했었죠. 70년대 말인가, 80년대에 아버지를 따라 뵌 적도 있었던 거 같아요. ( 허문영 씨의 아버지는 영화평론가인 고 허창 선생이다) 학생시절에 OB 베어즈에 가서 뵈었던 거 같아요. 아버지가 당시 영화진흥공사에 계셨던 시절에, 그때 임 감독님을 가끔 뵌 거 같은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따라가서 인사를 드렸던 거 같아요. 막연히 그때는 <만다라>이후 임권택 감독님은 한국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거장 감독이라고 평판이 굳어졌기 때문에 그 평판의 영향아래 영화를 보았던 거 같고, 영화로 감독님의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다, 라는 느낌을 받은 건 그 뒤였던 거 같아요. 80년대 말인지 90년대 초인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1990년 즈음 < 짝코 >를 비디오로 우연히 보았을 때였습니다. 개봉할 때는 못 봤고. 물론 그 영화가 임권택의 영화라는 건 표면적인 지식으로 알고 있는 상태였고, 이 어른이 이런 영화도 만들었네, 뭐지? 하고 본거 같아요. 이 영화가 얼마나 정교한 플래시백의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지는 그 뒤에 다시 한 번 봤을 때 느꼈고,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제 머릿속에 남은 건 이 영화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무대는 1980년 현재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야기의 배경은 6.25이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좀 심원한 비극성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굉장히 마음이 아픈데, 이건 역사적인 어떤 허깨비를 쫓는 거잖아요. 평생을 바쳤는데 그게 허깨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 그 허망함의 무게가 굉장히 크게 느껴졌어요. 기억에 남는 장면이 그거였어요. 정교한 플래시백보다 훨씬 기억에 남아요. 두 사람이 탈출하고 나서 싸우는 데, 세상에 그렇게 비루하고 그렇게 초라하고 어이없는 싸움이나 액션이 도대체 어딨나, 심지어 카메라가 계속 찍지도 않아요. 둘이 계속 싸우는데 카메라 (프레임) 밖에 나가요. 둘이 빠져나가는데 카메라는 그냥 가만히 서있어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걸 잡고 있는데, 여기 지금 찍히고 있는 게 뭔가라는 생각. 카메라가 대체 뭘 찍고 있나. 그런 기억. 뭐, 이런 저런 이유로 이걸 만든 사람은 참 특별한 사람이다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훌륭한 감독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다. 임권택 감독은 참 특별한 사람이구나. <짝코>를 90년대에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 같아요. 정성일_ 임권택 감독님의 무슨 영화 다음에 < 짝코 >를 보았습니까? 허문영_ 아마 < 아제아제 바라아제 >와 < 씨받이 >를 띄엄띄엄 보고 보았어요. 정성일_ 1989년 전후가 될 텐데 그때 허문영 씨가 심취했던 영화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걸작의 명단이라고 움켜쥐고 있던 그런 영화들, 그때는 사실 애매한 시절이었죠. 비디오가 쏟아진 것도 아니고 DVD가 도착한 것도 아닌 시절. < 화이트 히트 >(1949) 허문영_ 그때는 영화를 열심히 본 시기가 아닌데, 한동안 제가 그 시기 3-4년 정도 완전 사로잡혔던 영화는 < 화이트 히트 >였어요. (감독) 라울 월시의. (주연배우) 제임스 캐그니의 정유 공장의 마지막 시퀀스는!! “Mom, I'm on the Top!”하고 불타버리는 장면은... 아, (깊은 한숨) 세상에... 남자의 심금을 울리죠.. 오우삼? 너는 라울 월시의 손자다. 손자라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또 당연히 그때는 우리가 홍콩영화에 혼절할 때가 아닙니까? 다 봤죠. 열심히 봤죠. 그때 (필름 포럼을 운영하는) 임재철이, 너 그런 이상한 영화를 보지 말고 이런 영화 좀 봐, 하고 영어 자막 캡션이 달린 영화를 보라고 주더라구요. 아, 영어 자막 피곤한데,.. (하고 집에 가서 본 다음) 그날로 형님, 월시 형님! (일동 웃음) 오우삼이 최고의 남자 감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부터 월시 형님을 모시겠습니다, 했죠. 정성일_ 사실 많은 영화 비평가들, 혹은 연구자들이 겪는 일이기도 한데, < 짝코 >를 전후로 해서 임권택 이라는 이름을 의식하게 되었을 때, 이전의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들과 이후의 영화들은 비평가들에게 내면적으로 어떤 불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허문영 씨께서는 앞의 영화들은 불완전하거나, 그 영화가 갖고 있는 다른 기준들, 그런 불화를 화해시킬 수 있었던 비평적 프레임의 변화랄까, 아니면 영화의 어떤 새로운 방점을 찍거나, 미학적이거나 영화의 존재론적인 방점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이 자신의 비평적 프레임워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 개벽 >(1991) 허문영_ 저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세계 전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해본 건 오히려 최근 들어서고 그전에는 계속 잘 모르겠다, 였던 거 같아요. 새로 만든 영화를 지속적으로 챙겨보진 않았지만, 어쨌든 90년대는 꾸준히 극장에서 보게 되었는데, 제가 90년대 겪었던 건 제가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때는 계속 놓치게 돼요. 이를테면 < 개벽 >을 극장에서 봤거든요. 참 아름답다 근데 잘 모르겠다, 근데 그 영화가 비범한 영화란 생각이 든 건, <개벽>을 다시 본 건 2-3년 뒤에 TV에서였습니다. 그걸 보고 완전히 빨려들어 갔습니다. 그냥 아름답고 약간 비극적인 이야기가 좀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었는데, TV에서 <개벽>을 다시 보며 이 영화가 인물을 찍은 게 아니구나, 인물이 이 영화에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찍었구나, 라는 느낌. 일종의 패배의 이야기.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이 일본과 싸워서 졌다는 게 아니라, 인물이 서사 안에서 주인공이 되기에 실패한 영화구나, 그 실패가 어디서부터 온 건지 영화가 대답해주지는 않지만, 그 패배의 불가피성에 대해 풍경이 대답을 해야 하는데, 풍경은 침묵하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요. 풍경이 사무치게 슬프다는 그런... (잠시 생각하고) 굉장히 특별한 영화구나. 그 격동기에 격렬한 역사적 사건 한가운데 있는 인물을 찍으면서, 그 인물의 역사적 문제가 아니라 서사 안에서 실패라는 것들. 그 풍경의 비애라는 것. 굉장히 특별한 영화구나. 근데 정선배도 (지금 이 ‘임권택 X 101’) 연재에서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지적을 하고 있으시지만, 임권택 감독의 다음 영화를 봤을 때 그 이전 영화의 가설이나 프레임이 무너질 때의 난처함. < 축제 >를 극장에서 봤을 때 또 놓쳤어요. 이 동화적인 화해의 서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철저한 실패를 다룬 감독이 왜 동화를 통해 화해를 하려고 하는가. 그 영화를 또 다시 보고 영화가 또 그게 아니구나, 깨달은 것은 몇 년 후 비디오로 보고서였죠. 임권택 영화를 보는 제 반복된 체험은 처음 봤을 때는 계속 놓친다는 겁니다. 두 번 봤을 때 새로운 영화를 보게 되고, 세 번 봤을 때 또 다른 영화를 보게 되고. 오히려 임권택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영화 전체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계기는 <개벽>에서 시작되었다고 봐야죠. 그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 것인가를 본격적으로 고민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은 굉장히 이상하다, 절대 한 번에 닿을 수 없는 세상. 계속 진격을 거듭하지 않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 직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2000년대 들어와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좀 더 자주 보게 되면서 계속 느끼게 되죠. 딴 것 보다 임권택 영화를 보면, 너무 재밌어요. 어떤 영화를 골라 봐도 재밌어요. 심지어 두세 번 봤는데도 또 새로운 것이 펼쳐지기 때문에. 어떤 때는 그냥 계속 보기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성일_ 이렇게 나눌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막 영화비평을 시작하고 있는 세대와 우리 세대가 다른 것 중의 하나는 처음부터 한국영화를 좋아하기 힘들었던 세대이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영화들이 너무 나빴으니까. 그 나쁜 한국 영화들을 끌어안게 된 계기, 의식적인 포섭, 그런 계기를 개인적으로 얘기해줄 수 있습니까? 전 사실 그 한국 영화가 너무 싫었기 때문에 그 시간이 매우 오래 걸렸고 그것을 끌어안는 게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의식적으로 보지 않았다면 훨씬 더 긴 시간 한국영화에 대해 더 무관심했을 거 같아요. < 칠수와 만수 >(1988) < 개그맨 >(1988) < 성공시대 >(1988) 허문영_ 저는 20대였던 80년대에 영화광으로 살지는 않았기 때문에 영화를 열심히 챙겨본 것은 아니었지만 꽤 많이 보았고, 의식적인 고민의 대상은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아요. 제게 임권택 은 한국영화에서 굉장히 예외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임권택이 한국영화 범주나 역사 안에 있다기보다는, 한국영화가 있고 임권택이 또 있어서. 이 사람이 만드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영화이기 때문에. 그걸 깨준 건 사실은 코리안 뉴웨이브라고 봐야죠. < 칠수와 만수 >( 박광수 ), < 개그맨 >( 이명세 ) 그리고 장선우 감독의 < 성공시대 > 인거죠. 한국영화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준 것은 이 세 사람이었어요. 게다가 그 사람들이 만든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들까지도 굉장히 훌륭했기 때문에 88년부터 90년, 91년까지 이 세 사람이 한국영화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놨어요. 이 세 사람이 또 전혀 다르잖아요. 사실은 코리안 뉴웨이브를 쓰는 게 가능한지도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특히 이명세를 거기에 끼워 넣는 건 굉장히 이상하죠. 하지만 한국영화에서 완전히 새로운, 없던 것들이 만들어지기도 했구나. 그 세대는. 정성일_ 조금 사적으로 질문을 해볼게요. 허문영 씨 경우에는 다른 비평가와 달리, 영화비평가 아버지를 갖고 있는 유일한 비평가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버님이 매우 눈이 밝은 분, 이런 얘기가 듣기 불편할 수는 있지만, 저는 살아생전에 아버님을 뵙고 영화에 관한 인터뷰도 했었으니까요, 눈 밝은 의견을 존중할만한 영화비평가이셨는데, 아버지와 영화 얘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까? < 그들도 우리처럼 >(1990) 허문영_ 거의 없어요. 아버지는 얘기를 하려고 하셨는데, 제가 피했어요. 의견이 달라서가 아니라, 아버지란 존재 자체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하나 기억나는 건 있어요. 대화를 나눴다기보다는 그냥 일방적으로 들은 건데, 좀 전에 말씀드렸지만 저한테 한국 영화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준 게 박광수 , 장선우 , 이명세 라고 말씀드렸는데, 90년에 < 그들도 우리처럼 >을 보고 말 그대로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냥 아, 이건 정말 걸작이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근데 아버지가 그때 대종상 심사 예심을 할 땐가 본심을 하실 땐가 인데, 그때 잠시 같이 살았던 때인데, 피할 수 없이 얘기를 해야 하는 자리가 있잖아요, (웃음) 같이 밥을 먹어야하는 자리. 그때 <그들도 우리처럼>을 봤는데 그건 한국영화사 최고의 걸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나는 이 영화가 대종상 본심에 올라오지 않은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심사를 안 하기로 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떤 과장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어요. 내 기억이 조금 과장되었을 수도 있는데,.. 제가 절대 피해왔지만, 일상적인 대화와 영화에 관한 대화를 피해왔지만, 갑자기 그 말씀을 하셨을 때 두 가지가 분명해졌죠. 이 사람이 나하고 한 편의 영화에 대해 완전히 공감을 하고 있구나, 그건 쉽지 않은 체험이잖아요. 영화 글을 찾아 읽었을 때도 아니니까. 또 다른 하나는 이 사람은 비평가구나. 자기가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영화가 존중받지 않았을 때 자신의 선택을 어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구나, 이 사람 비평가구나, 괜찮은 사람이구나... 이게 얼마나 사실에 근거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대화밖에는 내 머릿속에 남은 게 없어요. 자기가 정말 최고라고 생각한 영화가 대종상 본심에 올라오지 않았다고 해서 대종상 심사위원을 거절한다, 정말 비평가적인 태도잖아요. 물론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해서 계속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웃음) 여전히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부담, 무게가 버거웠으니까. 그래도 그때 그 말은 계속 기억이 나요. 정성일_ 영화 비평을 쓰거나 보거나,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진전시켜 나가면서 지금 생각해보니 자기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영화 비평가, 비평의 방법을 보여줬던 사람. 그 사람이 꼭 비평을 쓰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걸 전용할 수는 있는 거니까. 이 사람에게 영화에 대한 배움을 내가 구했지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김현 문학평론가 허문영_ 사유를 배웠다기보다는, 그 태도를 늘 떠올리게 한 사람은 김현이었어요. 우리 시대 제가 20대 때 많은 스승들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백낙청, 김현, 유종호, 김우창, 김치수도 있었고. 단순히 문학 평론가여서가 아니라 비평가란 말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꽤 많았죠. 그렇게 보면 인문학적 환경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김현이 좀 특별했다고 볼 수 있는 건, 한 사람의 작품을 말할 때 그 작품 안으로 기꺼이 들어간다는 느낌. 그게 애정일 때도 있고 비판을 위해서 일 때도 있지만, 보통 다른 글을 읽을 때는 작품 밖에서 얘기를 한다는 느낌인데, 이 사람의 글을 읽을 때는 그 작품 안으로 들어가서 그 작품과 함께 어떤 것을, 정 선배가 많이 쓰시는 말인데, 느껴본다, 아, 이 사람이 느껴보는 것 같아요. 제 표현으로 하자면 작품 안으로 기꺼이 들어간다, 그 안에서 헤매고 뭔가 바깥으로 나오는 줄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들어간다는 그 태도가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게다가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 글이 너무 아름답잖아요. 한국어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 수가 있구나. 김윤식 선생의 그 훌륭한 평론도 글의 딱딱함 때문에 질리게 될 때가 있잖아요. 김현은 자기 작품 안에서의 방랑, 방황의 과정을 너무 아름답게 표현하는 사실이 좋았고, 뭐, 무엇보다 그 사람의 태도가 첫 번째로 비평의 굉장히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뒤로 오랫동안 뭘 쓰다가, 그게 무슨 기사든지, 잡문이든지, 비평이든지 상관없이, 글이 막히면 김현 선생의 글을 아무 거나 읽으면 약간 뭔가 정화되는 느낌이 있어요. 직접적인 힌트를 준다거나 사유의 틀을 제공한다거나 하지 않더라도. 정화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정성일_ 다시 임권택 감독님 안으로 기꺼이 들어가겠습니다. (웃음) 당장 내일 바뀔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임권택 감독님의 최고 걸작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허문영_ 최근의 마음으로는 < 장군의 아들 >이에요. 영화를 다시 보는데, 영화에 걷잡을 수 없이 빨려들어 갔어요. 그 영화를 이전에 두세 번 정도는 봤었겠죠, 당연히. 정성일_ 우리 토크의 제목을 “결국 임권택 은 < 장군의 아들 >이다”라고 하면 어떠실까요? (웃음) 허문영_ 굉장히 안 좋아 하시겠죠. 이거는 뭐, 할 수 없습니다. 최근의 체험이기 때문에. 최고작이라는 질문은 사실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렇게 얘기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극장에 가서, 임권택 의 영화를 한 편 봐야 한다면 뭘 보고 싶으십니까, 라고 질문하신다면... (잠시 생각) 약간 황홀하다는 느낌, 그런 게 있었어요. 뭔가 기적 같은 영화다, 이런 느낌. < 춘향뎐 >이야말로 정말 기적 같은 영화긴 한데. < 장군의 아들 >은 전혀 다른 철저히 상업적인 기획 아래 태어난 영화고 그렇게 소비되었기 때문에 그런 영화를 다시 볼 때 이런 느낌을 준다는 게, 황홀감을 준다는 게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성일_ 그 대답을 보충하기 위해 두 가지 질문을 더 하겠습니다. 단 한편의 한국영화라고 하면, 완전히 주관적으로 얘기할 때, 공식적이거나 객관적으로 말고. ‘한국영화는 무엇이다’라는 화법으로 얘기하면, 어떤 영화를 말하고 싶습니까? 허문영_ 사실 정 선배는 임권택 의 영화 세계를 고민하시면서 한국적인 쇼트, 한국의 영화를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 범주가 아직 제 비평적 생각 속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잘 못 잡겠어요. 그래서 어떤 영화를 볼 때나 그 범주는 먼저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는 않는데, (망설임) 글쎄, 지금 그렇게 물어보신다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영화는 < 개벽 >이에요. 정성일_ 임권택 이 아니어도 한국영화는 < 개벽 >이다. 이만희 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허문영_ ‘한국’이 붙어 있으니까... 한국의 최고작, 한국영화사의 최고작과는 다른 뉘앙스로 생각하게 되는 게, 이만희 영화에는 풍경에 대한 사유가 없어요. 장소에 대한 사유는 있는데... (망설이다가) 심지어 < 원점 >같이 설악산에 가서 찍은 영화도 풍경에 대한 사유가 없어요. 임권택 영화는 사유라고 표현하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지만, 풍경에 대한 깊은 감각. 존 포드의 서부극이 미국 풍경에 대한 깊은 감각이 있듯이, 그 감각을 가진 영화는 임권택의 영화 같고. 제일 내 머릿속에 깊이 남게 한 영화는 < 개벽 >이었던 거 같아요. < 취화선 >이나 < 춘향뎐 >이 굉장히 아름다운 영화이긴 하지만, 그때 풍경은 장식적이라는 뉘앙스가 더 강했던 거 같아요. 장식이 아니라 거기 있는 풍경, 그 풍경과 나와의 거리, 되게 특별한 풍경에 대한 감동을 전해주고 내 머릿속에 남긴 것이 <개벽>이었습니다. 정성일_ 부록으로 두 번째 질문입니다. (웃음) 한국영화를 제외하고, 내일 당장 명단이 바뀔 수 있다 치고, 마음속의 단 한편의 영화는 무엇입니까? 마음속의 가장 큰 별이랄까, 자기 머릿속에 영화의 별자리를 짜고 있는 그 중심의 별이랄까... < 바람 >(1928) 허문영_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오기 싫었는데 (일동 웃음) 즉각적으로 그것도 비교적 최근에 본 영화기 때문에, 계속 오래 남아 있는 영화는 빅토르 쉐스트롬의 < 바람 The Wind >(1928년)이에요. 영화사에도 자주 언급되지도 않고, 시네마테크 프로그램에도 잘 안 들어오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전 그 영화의 굉장히 단순한 구도 안에 거의 모든 게 다 담겨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사람, 자연, 선택, 사랑... 게다가 그 무성영화 시대 말기의 영화들은 어떤 시대, 어떤 영화들보다 제일 시네마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1925년부터 1930년 그 5년 동안 나온 영화들은 어떤 영화보다 더 훌륭해요. 유성영화가 나왔을 때, 마치 무성을 고집하듯이 만든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시네마틱한 힘이라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한 힘, 에너지가 있는 거 같아요. 그 시대 많은 위대한 여러 영화들이 있고, 다 훌륭하지만, 그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훌륭하다는 건 <바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작품 자체로 치면 < 썬 라이즈 >가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썬 라이즈>는 워낙 오랫동안 표준화된 전범처럼 남아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를 봤을 때 충격은 <바람> 쪽이 훨씬 셌어요. 바람이 스크린 바깥으로 불어오는 듯한 느낌. 어떤 특수효과도 없이 대형 선풍기만으로 그 바람을 만들었다는 거... 그거는 카메라가 혹은 만드는 사람들이 바람을 찍겠다가 아니라 바람과 대결하겠다는 방식으로 찍지 않았다면 그 느낌이 안 살아났을 거 같아요. 거의 원시림 안에서 자연을 찍는 다큐멘터리스트의 방식으로 찍은 게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바람이 주는 그 감각적인 느낌은 굉장히 셌어요. 굉장히 특별한 영화다, 라는 느낌을 갖고 있어요. 정성일_ 이렇게도 한 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와 상관없이, 이 질문을 받는 순간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의 명장면은 어떤 것입니까? < 길소뜸 >(1928)의 장면들 허문영_ 사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재미없는 말이긴 하지만, 임권택 감독님 영화는 명장면 투성이에요. 이야기가 아무리 후져도 명장면을 만들어내는 이상한 감독인데, 제가 지금 떠오르는 건 < 길소뜸 >에 관한 장면이에요. 간단하게 거기에 대해 쓴 적도 있는데 <길소뜸>에서 신성일 과 김지미 가 자기 아들로 추정되는 남자를 찾아가 하룻밤을 묵어야하는 상황이 나오잖아요. 신성일은 그 남자 집에 들어가자고, 김지미는 중산층이자 비교적 그 영화에서 상류층 계급인데, 김지미는 그 남자 집에서 잘 수 없어서 자기 차 안에 기대있어요. 그 남자, 한지일 은 술 퍼먹고 있다가 잔소리하러 나온 자기 아내를 평상 위에서 부부 사이인데도 거의 강간하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부인이 쌩하고 들어가 버리는 그 장면. 아주 짧은 장면이죠. 마누라가 쌩하고 들어가고, 한지일이 몸을 김지미 쪽으로 스윽 돌려요. 카메라는 그대로 서있고 차 안의 김지미의 시선으로 그 장면이 찍혀 있는데, 그 장면이 임권택 영화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 무서운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 기억 속에는 어떻게 남아있냐면 한지일이 걸어오는 거예요. 김지미는 차를 빼고 어디론가 가버려요. 나중에 다른 숙소에서 잔 걸로 나오기는 하는데, 이쪽에 발기한 아들의 성기가 있고, 또 상류층 엄마가 있고. 나는 임권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어떤 특별한 관심이 있다거나 그걸 주요 모티브로 찍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장면 같은 경우는 너무 사악하고 강렬한 성적 에너지로 가득한 장면이어서, 실제로 그 장면 없이도 영화는 성립되지만, 이 여인의 선택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 장면이 나온 후 김지미는 이 장면이 없던 것처럼 어떤 선택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한지일은 이미 낮에 차에 치어 죽은 개를 잡아먹었잖아요. 사악한 성기, 사악한 아들의 성기. 이걸 역사적인 맥락으로도 해석을 할 수 있고, 계급적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지만, 이 장면에서 절대적으로 바로 끊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악한 리비도로 가득 차있는, 그래서 <길소뜸>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길소뜸>도 보면 앞에 처음부터 얼마나 구린 대사가 많습니까. (웃음) 그 구린 대사를 완전히 다 한방에 보내버리는 장면이었던 거 같아요. 1980년대 임권택 영화에는 이상하게 그로테스크한 정념의 쇼트들이 되게 많아요. 많다기보다 그런 장면들이 느닷없이 튀어나와요. < 티켓 > < 씨받이 > < 만다라 >도... < 안개마을 >은 그 자체가 모티브이고, 그 자체가 모티브가 아닌 영화도 리비도가 그 서사를 초과해 버려요. 정성일_ 허문영 씨의 자리에서 1980년대 임권택 의 영화를 ‘리비도’의 시대라고 다시 한 번 정의할 수도 있겠네요. 허문영_ 네, 저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 아제아제 바라아제 >도 굉장히 센, 정념, 리비도가 막 서로를 키워나가는 순간이 있고, 그게 어떻게든 수습되거나 차단당하면서 결말이 대부분 다 비극적이거나 우울하거나. 근데 임권택 스스로는 그런 장면들에 대해서는 늘 말씀을 안 하시는 것 같아요. 정 성일_ 늘 피하시죠. 그냥 그런 장면도 필요한거요, 라고 대답하시죠. 허문영_ <길소뜸>의 그 장면은 너무나 강렬해서 다시 보니까 그 장면에서 한지일 이 김지미 차로 걸어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몸만 살짝 틀었는데, 그 튼 것만으로 성기가 막 다가오는 느낌인거에요. 그만큼 이 장면의 리비도가 센 거죠. 사실 잘못 기억된 상태로 있는 게 훨씬 더 이 영화를 정확하게 보는 거 같고, 보고 걸어온 건 아니었네, 라고 정리하는 게 오히려 잘못 기억하는 거 같고, 걸어오는 걸로 기억하는 게 이 영화에 대한 정확한 기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 두만강아 잘있거라 >(1962) 정성일_ 좀 이상한 질문이긴 하지만 임권택 감독님의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는 처음 개봉했을 때 볼 수 없었고 긴 시간이 흐른 다음 비평가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본 영화이기 때문에 오히려 지난 영화를 회고한다기보다는 이 영화를 마치 1962년에 만들어진 현대영화처럼 본 느낌이 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임권택 감독의 시작은 어떤 감독이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허문영_ 그 영화에 대해서는 정 선배가 잘 말씀하셨기 때문에 제가 더 보탤 말은 없고 (웃음) 그 영화는 29살에 만드신 첫 영화인데, 제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감독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인상만으로는 감독이 마지막 장면만을 위해 만든 영화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마지막 장면까지 이르는 이야기는 일종의 핑계처럼 느껴지고, 오직 마지막 한 장면에서 모두 죽었고, 정 선배가 전멸의 테마라고 말씀하신 걸로 기억되는데, 설원에 서 있는 건 나무밖에 없고 인간은 전부 가느다란 실이나 점처럼 누워있는 느낌. 그 영화가 충격을 주는 것은, 임권택 감독이 데뷔작부터 잘 만들어서가 아니라, 데뷔작에서부터 철저히 상업영화를 만들겠다고 한 사람이 만든 첫 영화에 순전한 죽음의 이미지로 시작한다는 건 도대체 어떤 시작일까, 어쩌자고 이런 것일까, 실제로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모든 영화를 제가 다 보지 않았지만 임권택의 대부분의 영화들은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한 느낌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어요. 실제로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느낌으로 흘러가고, 인물들도 끝이 아닌 척 하지만, 실제로는 알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느낌으로 행동하면서 말과 이미지가 계속 충돌해요. 굉장히 특별하고 괴기스러운 데뷔작이다, 란 생각이 들어요. 그게 임권택 영화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습작이 아니라 굉장히 의미 있는 출발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성일_ 두 번째 질문은, < 잡초 >가 블랙홀처럼 머물러 있긴 한데,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젊은 임권택, 작가 임권택이라고 이분화 시키는 건 굉장히 위험한 시도이긴 합니다만, 그리고 오랜 동안 저 자신이 반대해온 방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작전을 진행하면서 임권택이 임권택다워졌다고 생각한 그런 단락(短絡)의 지점은 언제였다고 생각됩니까? < 망부석 >(1963) 허문영_ 필모그래피가 워낙 울퉁불퉁해서 시작부터 어느 시점부터 명백히 임권택 적이라고 말하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은데, 제가 받은 느낌은... (잠시 생각) < 망부석 >. 아마 그렇게 훨씬 앞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인거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 바로 임권택적인 세계가 자리를 잡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의외로 너무도 젊은 나이, 64년 31세에 만든 작품인 <망부석>에는 임권택적이라고 말할 만한 게 많아요. 이 네 번째 작품에서 제가 그 이후의 임권택 영화에서 느끼는 게 여기 아주 많이 있구나하는 느낌. 이를테면 < 짝코 >에서 두 죽어가는 노인이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프레임의 한 귀퉁이에서 벌이다가 프레임 밖으로 거의 빠져나는 그런 느낌과 유사한 느낌을 주는 쇼트가 <망부석>에도 있어요. 혜경궁 홍 씨가 진짜 망부석처럼 서서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데, 거기서 그 장면의 주인공은 혜경궁 홍 씨가 아니라 그 마당이고 정원이에요. 이미 자기의 네 번째 영화에서 어떤 예술을 찍겠다는 의도 없이 만들어진 전형적인 사극영화에서도 임권택의 쇼트가 등장하는구나. 되게 특별한 쇼트다, 라는 느낌. 물론 <망부석>은 이야기가 굉장히 울퉁불퉁하죠. 이후에 <요화 장희빈>만해도 <망부석>보다는 훨씬 세련되게 잘 짜여 졌어요. 그런데도 <망부석>은 이야기를 어떤 시점까지 끌고 가다가 자기가 찍고 싶은 쇼트를 그 순간에 등장시키는 어떤 연출의 힘이 여기 들어갔다고 생각됩니다. 정성일_ 비평가들의 습관이자 씨네필들의 버릇 중의 하나로 이해할 텐데, 임권택 의 영화를, 말하자면 다른 감독의 영향 관계 아래 놓으려는 시도, 노력이 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끈질기게 임권택 감독을 미조구치 겐지의 계보 아래 놓으려고 한달까, 정작 임권택 감독 자신은 자기에게 영향을 끼친 감독으로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 빌리 와일더 이 세 사람을 얘기합니다. 좋아하는 영화로 꼽은 펠리니의 < 길 >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데, 아마 그건 심정적인 공감일 것입니다. 결국 임권택의 영화에 영향을 준 것을 세 명의 할리우드 감독인데. 이 명단이 우리를 몹시 당황하게 만듭니다. 그 세 감독은 워낙 다른 사람이니까, 교집합을 찾자면 찾을 수 있겠지만, 영화사의 상식적인 교집합은 아니니까요.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우리 쪽의 질문인데, 영화사 안에서 임권택을 의식하든, 안하든 계보 안에 끌어들여 놓아야한다면 임권택 영화를 우리는 어느 계보 안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허문영_ (망설임) 솔직히 계보는 잘 모르겠어요. 해외 비평가들이 임권택 의 영화를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계보 아래 놓으려고 한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게 잘 동의가 안 돼요. 정성일_ 저는 임권택 감독님 영화 중 사실 미조구치 겐지의 영향을 받은 건 < 아제아제 바라아제 > 단 한편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허문영_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정 선배가 생각하시는 이유는 다를 수 있겠지만, 해외 비평가들이 떠올리는 건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50년대, 미학화된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일 텐데, 그것과 임권택 의 유사성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임권택의 롱 테이크와 롱 쇼트는 장식적이거나 미학적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뭔가 다른 게 있어요. 그게 역사적 시간에 관한 것이든, 풍경의 침묵에 관련되었거나, 임권택의 경우 롱 테이크와 롱 쇼트는 장식적이지 않아요. 미조구치 겐지의 50년대의 카메라 워크는 거의 즐길 수 있을 만큼 장식적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미조구치 겐지의 50년대 영화 못지않게 30년대 영화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조구치 겐지는 어쨌든지 인물의 힘을 어떤 방식으로든 믿었던 사람이고, 그것으로 버텨내려고 했는데 임권택 감독은 믿지 않는 것 같아요. (망설이다가) 그냥 지켜보는 사람인 거 같아요. 이렇게 지켜보고 저렇게 지켜보고, 이 스산한 거리감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 같고, 그런 점에서 미조구치 겐지가 떠오르지는 않아요. 그 스산한 거리를 말한다면 차라리 존 포드가 가깝다는 생각이 들고, 오히려 롯셀리니 이후의 모던 시네마에 정신적으론 더 가까울 수는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모던 시네마는 역사적 시간에 걸쳐 있기 때문에 직접 연결시키기는 좀 힘든 거 같고 임권택 영화는 계보에 넣기에 참 까다로워요. 지금 우리가 보기에 < 춘향뎐 >과 < 축제 >는 거의 전위적인 아방가르드 영화 아닙니까. 이 아방가르드 영화의 역사적 시간, 역사적 풍경, 역사적 소재라는 풍경, 인물이 있고 심지어 전통적인 서사가 있고 동시에 가장 비서사적인 음악적인 리듬과 공존해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당분간은 임권택 영화를 어떤 계보에도 포함시키지 않고 생각을 하는 게 차라리 더 낫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훨씬 더 많은 연구를 하고 정교하게 분석해서 언젠가는 누군가, 혹은 정 선배가 찾아내시겠지만, 저는 계보에 넣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을 하고, 저는 KMDb에 지금 연재하는 글의 제목을 '임권택 X 101'로 잡은 건 그런 뜻이라고 생각해요. 101명의 임권택이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요. 임권택이 101편을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101명의 임권택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어떤 틀이나 모델은 당분간 없는 걸로 하자, 그것이 억지로 찾아내는 것보다는 임권택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다, 그런 취지에서 이런 제목을 달았다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 정성일_ 그렇다면 이번에는 임권택 쪽의 질문인데,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 빌리 와일더, 그 세 명의 감독들로 부터 어떤 영향을 받은 걸까요? 사실 이게 더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계보를 짜는 건 주관적으로, 편의적으로, 실용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짤 수 있지만, 임권택 쪽의 방법이 더 이해가 안된달까... 허문영_ 빌리 와일더 쪽은 잘 모르겠어요. 윌리엄 와일더나 존 포드 쪽에서는 (망설이다가) 너무 딱딱하고 진부한 표현일 수는 있겠지만, 공동체의 윤리라는 문제, 혹은 공동체적 제의? 공동체적 윤리라는 영화적 가치와 공동체적 제의라는 모티브는 임권택 영화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거 같아요. 존 포드의 영화에서는 그 윤리를 어쨌거나 실천하는 사람이 있고, 임권택 영화에서는 그 실천이 사실은 늘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 다 그 문제를 끝끝내 붙들고 있었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윌리엄 와일러도 그런 점에서 비슷하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 우리 생애 최고의 해 >나 < 작은 아씨들 >이 갖고 있는 공간의 드라마라는 게 있잖아요. 사람의 드라마, 사건의 드라마도 있지만 공간의 드라마틱한 배치라는 게 있잖아요. 굉장히 아름답고 영화적인 느낌을 그의 몇몇 영화에서 받습니다. 그 우아함이란 것도 임권택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거 같아요. 그 우아함, 고귀함이라는 가치. 임권택이 보통 한국의 전통 문화를 중시한다, 라고 하는데, 저는 그 말이 그렇게 정확하지 않은 거 같아요. 임권택은 오히려 전통 문화에 대해 굉장히 냉소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많아요. < 씨받이 > 같은 경우도 그렇고. 임권택이 갖고 있는 윤리적 질문은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가, 그게 가능한가, 라는 오히려 보편적인 질문에 가까워요. 그것이 혹시나 전근대적인 혹은 종교적인 어떤 것에서 그걸 찾을 수 있는가 질문을 하고 있는 거지, 전통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고 하는 건 정확하지 않은 거 같아요. 반복해서 < 장군의 아들 > 얘기로 다시 돌아오면 화면도 굉장히 아름답지만, 그런 것들이 다 들어있어요. 윌리엄 와일러 적인 것, 존 포드 적인 것, 심지어 빌리 와일더 적인 것. 되게 훌륭한 영화라니까요 (웃음) 정성일_ 재평가하겠습니다. (일동 웃음) 허문영_ 그 영화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좋은 점 중에서 영화적인 요소가 아닐 수는 있어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예의에요. 예의라는 게 참 아름다운 거구나. 예의의 몸짓이라는 게 있잖아요. 싸우고 나서도 어떻게 예의를 지킬 것인가. 그게 사람을 되게 감동시키는 게 있어요. 영화적 훌륭함과 별개로. 예의라는 것, 공동체의 윤리라는 것, 우아함이라는 게 어쨌든 뭔가 연결되어 있는 거 같고 그게 < 장군의 아들 >이라는 영화에서 집약화 되어 있다는... 정성일_ 사실 대사를 할 때마다 굉장히 뭉클하죠. ''동생, 내가 졌소. 떠나겠소'' 허문영_ 그게 영화적으로 촌스럽다거나 대사가 후지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되게 가슴이 아픈... 정성일_ 마치 우리 시대가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점에서 일제 식민지 강점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허문영_ 저렇게 해도 행위가 성립하고 얘기가 성립하는데 그게 지금은 마치 없는 것처럼 얘기가 만들어질까 싶은 거죠. 얘기가 성립하잖아요. 임권택 이 그런 세계를 보여주는 거죠. 예의를 지키면서 성립되는 세계. 정성일_ 장르를 갖고 얘기하자면 임권택 감독 자신은 수많은 장르를 찍었습니다만, 그 자신이 언급하는 것은 서부극 외에는, 많은 인터뷰를 하면서도 장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어요. 말하자면 이제 KMDb에 '존 포드'를 연재하는 허문영 존 포드 매니아 덕후께서 (웃음) 임권택과 서부극이란 것 사이에서, 그가 만든 짧은 시기 만주 웨스턴이 아니라, 임권택 영화 전체를 놓고, 그런 다음 그 곁에 서부극을 놓고 임권택 영화와의 친화성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수색자 >(1956) 허문영_ 굉장히 도식적으로 대답하게 돼요. 왜냐하면 저는 개인적으로 서부극은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원형적인 장르라고 생각해요. 서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다른 모든 장르들은 서부극의 하위 장르다, 서부극의 어떤 특정한 측면을 가져온 하위 장르다, 라고 까지 다소 지나치게 말하고 싶어요. 그게 원형적인 장르인 이유는 제가 아까 말씀드렸을 때 임권택 영화에서 발견하게 되는 세 층위가 있는데, 하나가 쉽게 말해서 인물의 시간이 있고, 인물이 하나의 얘기를 만들어가는 거죠. 또 임권택 영화에서 역사적 시간이라는 층위가 있잖아요. 영화에 끊임없이 역사적 인물을 끌어들이면서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역사적 시간, 또 다른 시간으로는 풍경의 시간, 전 이 점이 굉장히 특별한 층위라고 생각되는데요. 제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가설은 임권택 영화는 이 세 가지 시간이 끊임없이 서로 긴장하는, 서로 서로 모습을 바꾸고 자리를 바꾸는 긴장과 자리바꿈의 영화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근데 이 세 개의 시간을 같이 담고 있는 유일한 영화가 서부극인데, 서부극은 미국의 역사적인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졌는데, 그 경험으로부터 신화적인 영웅이 태어나지만, 신화적인 영웅은 풍경에서 자유롭지 않죠. 풍경이 무언가를 바라보고 심지어 이 두 개의 시간들을 삼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부극이 갖고 있는 아주 원형적인 세 층위의 긴장과 대립이라는 게 임권택 영화에서 똑같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임권택 영화는 서부극적 이라고 생각해요. 정성일_ (잠시 생각) 음... 설득력이 있네요. 허문영_ 정확한 용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 느낌으로 항상 세 층위가 같이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늘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자리를 바꾸기도 하고, 어느 한쪽이 가려서 안보기이기도 하지만, 임권택 영화에서 늘 그 세 개가 항상 작용한다... 굉장히 도식적이죠. 정성일_ 느닷없이 질문을 하자면, 영화에서 고전주의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대체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허문영_ 저는 개인적으로 고전주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크 오몽에게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고전주의적인 영화가 있을 뿐이지, 고전적인 시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존 포드에 관한 글을 연재하면서 그 이야기를 말할 생각인데, 존 포드는 고전적인 서부극을 만든 적이 없어요. 영화학자나 평자들에게 고전적인 서부극이라는 틀이 있지만, 그 틀에 맞는 존 포드 영화는 없어요. 서부극은 가장 고전적인 장르이고 존 포드는 서부극의 가장 고전적인 장인인데, 그가 고전적인 서부극을 만든 적이 없다면 고전기란 게 도대체 있었는가라고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무성영화가 얼마나 아방가르드의 천국이었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잖습니까? 정성일_ 그 관점에 따른다면 영화라는 건 모던 시네마, 울트라 모던 시네마, 포스트모던 시네마 같이 시기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네요? 허문영_ 그것들이 비중을 달리하면서 어떤 경향을 만들어 낸 적은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진화론적인 단계를 거친 적은 없다,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아직도 1925년에 만들어진 무르나우의 < 썬라이즈 >가 항상 영화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언급되겠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항상 다른 어법들이 명멸하고 진행되어 오면서 어떤 기법들, 어떤 방식들이 추세적으로, 경향적으로 우위에 선 적은 있지만, 고전적인 시대가 있고 모던한 시대가 있었던 적은 없었고, 심지어 가장 고전적인 것처럼 보이는 영화들조차 모던한 혹은 포스트 모던한 힘이나 요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일_ 만일 그렇다면 영화란 결국 모던한 것이다, 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모던한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의 가장 중요한 힘, 양태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던을 작동시키는 그런 힘? 허문영_ 시간과 풍경, 시간과 장소. 이건 영화 이론가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시간이라기보다는,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만이 장소의 시간, 풍경의 시간을 담아낸다고 생각해요. 20세기의 영화만이... 풍경이나 장소는 사실 보통 영화에서 고정적인 것으로 등장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실제로 위대한 영화들에서는 항상 풍경이 승리하고, 장소가 승리한단 말이죠. 시간적 승리죠. 개인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이 풍경의 시간과 장소의 시간 앞에서 어떻게 버텨내는가가 영화가 시도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앞에서 위대한 영화들은 종종 결국 풍경의 시간과 장소의 시간 앞에서 승리를 하는 방식으로 끝나거든요. 모든 인간의 개인적 승리와 역사적 승리는 잠정적인데, 영화만이 그걸 했던 거 같아요. 그런 점에서 그런 영화는 1910년대, 20년대에도 있었고, 영화만이 아직 그걸 가능한 것으로 보여주는 매체이기 때문에 영화는 본질적으로 모던하게 찍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본질적으로. 아무리 고전적인 의도를 가진 감독이라고 하더라도 영화를 찍는 순간 모던한 세계에 진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장소가 나오고 풍경이 나오는 거죠. 정성일_ 우리 얘기로 돌아온다면, 그 주장을 따라가면서 임권택 영화를 가장 모던하게 만드는 시네마틱 모멘트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허문영_ 제가 어느 순간부터 임권택 영화에서 감동받는 것은 카메라가 갑자기 물러설 때. 사건을 찍고 있다가 카메라가 느닷없이 물러서면서, 심지어 그것을 정면으로 찍지도 않아요. 한쪽에 몰아놓고 찍는데, 누구의 시선도 아니죠. 오직 카메라의 시선이나 감독의 시선인데 그게 미학적인 선택이 아니라 임권택이 인물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사건에 대해 그가 갖고 있는 세계관이나 감각을 고스란히 한 표현인데, 그 표현이 저에게 그걸 굉장히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런 느낌이 들거든요. 임권택의 롱 쇼트는 미학적인 선택이 아닌데도, 구도를 아름답게 한 것이 아닌데도 그자체로 너무 아름답지만, 물러서는 순간 굉장히 쓰라리고 뼈아픈, 슬픈 느낌이 동시에 들고, 인물이, 인간이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구나. 임권택의 롱 쇼트가 갖고 있는 굉장히 특별한 힘인 거 같아요. 이를테면 롱 쇼트를 굉장히 아름답게 찍은 영화들이 많이 있잖아요. 하지만 임권택의 롱 쇼트만큼 슬픈 느낌을 주는 롱 쇼트는 거의 못 본거 같아요. 정성일_ 임권택 영화를 굉장히 모던하게 만드는 힘 중의 하나는 플래시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이미 < 망부석 >에도 플래시백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변주를 거쳐서 이제 < 짝코 >에서부터 의식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플래시백의 구조는 가장 영화적인 토픽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만, 플래시백은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기억의 방식이기도 한 것인데, 임권택의 플래시백이란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천년학 >(2006) 허문영_ 저는 임권택 의 플래시백에 대해서는 아직 정리된 견해가 없어요. 그냥 잠정적으로만 말씀드리면, 임권택 영화에서 플래시백은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와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과거가 결별하기 위해 등장한다는 것이 제 잠정적인 가정입니다.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플래시백이 등장한 적은 없어요. 그렇게 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최종적인 결말은 그 플래시백이 현재에 도달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끝나는 거 같아요. 굉장히 이상한 플래시백인거죠. 현재와 늘 불화한다는 게 참 이상한 건데, 그 불화라는 게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건 아닌데, 항상 그것을 등장시켜놓고 그것으로부터, 오늘을 설명하진 않아요. 아주 예외적인 경우 하나가 < 천년학 > 마지막 장면에서 송화가 등장해버리잖아요, 이것은 변형된 임권택의 플래시백이지 전통적인 플래시백은 아닌 거 같아요. 아 그래서 이렇게 됐구나가 아니라 튀어 나버린 거죠. 그렇게 보면 <천년학>도 매우 기괴한 영화인 거죠. 정성일_ 그렇죠, 매우 기괴한 영화죠. 카메라가 물러나는 것이 임권택 영화에서 감동적인 부분이라고 하셨는데, 임권택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허문영_ 흥미롭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재미있다고 보는 건 섹슈얼한 부분이에요. 임권택 감독님은 자연스러운 거라고 하시지만. 성적인 것에 대한 관심? 성적인 에너지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재밌어요. 90년대 이후 영화에는 그런 게 오히려 절제되어 있는 편이긴 한데 < 장군의 아들 >도 다시 보면서, 여기에 노골적인 정사 장면이 있다는 걸 다시 보고 깨달았어요. 완전히 까먹었거든요. 노출이 다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장군의 아들이 게다가 조루라는 설정... (웃음) 심지어 하고 나서 벗은 두 남녀의 뒷모습이 보이고, 여자가 박상민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고... 그거 너무 재밌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에피소드는 이 양반이 도대체 저 에피소드를 왜 넣었을까, 그 다음에 성적으로 성공한 장면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또 < 티켓 >같은 영화는 몰락하는 영화고 타락하는 영화고 그 몰락과 타락에 분노하는 영화인데, 이상하게 그 막내 다방 레지가 고객과 섹스를 하면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장면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찍어요. 그런 대목들이 임권택 영화의 균질성을 깨뜨린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이걸 분노의 영화로 보면 그 장면은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거든요, 근데 그 장면이 있어요. 저는 임권택이 가지고 있는 정직함, 솔직함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도 모르게 드러난 솔직함일 수도 있고 설계된 솔직함 일수도 있는데 어느 쪽인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질문을 드리면 그럴 수도 있지 않나요, 라고 틀림없이 반문하실 거 같아요. 정성일_ 대담무쌍하게 제가 27살에 딱 그런 맥락으로 질문을 했어요. (웃음) 임권택 감독님이 대답을 하다말고, 저를 30초 동안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시더라구요. 그러시더니 그건 정성일 씨가 더 살아봐야 아는 거요, 하시는 거예요. 그냥 멍한 표정으로 다음 질문을 잊어버린 거죠 (일동 웃음) 허문영_ 이를테면 < 천년학 >에서 백사 노인의 화려한 죽음도, 표면적으로 보면 화려함이지만, 그 이면을 보면 솔직함이거든요. 그 친일파가 호사스럽게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맞습니다. 그걸 이 영화가 거부합니까? 거부하기는커녕 어마어마한 방식으로 찬미하지 않습니까? 찬미한다는 표현이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을 수긍하지 않습니까? 그걸 수긍한다는 건 엄청난 솔직함, 정직함인 거 같아요. 정성일_ 그런 것이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서 흥미롭다면, 불편한 대목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허문영_ 불편한 대목들은 대사들이죠, 대사들. 어마어마하게 교훈적인 대사들. 저는 임 감독님께 직접 말씀드린 적은 없는데, 감독님이 < 짝코 >를 말씀하실 때 늘 삭제되어서 아쉽다고 말씀하시는 장면 있잖아요, 그게 뭐냐면 행려 감호소에 있는 TV에서 방영하는 내용인데, 거기서 아나운서의 멘트로 6.25는 열강들에 의한 대리전 이었다, 그걸 말하는 장면인데 그게 짤린 거에 대해 굉장히 아쉬워하시잖아요. 그 말씀을 두세 번 들었는데, 임 감독님은 그게 그 영화의 주제와 직결된 중요한 장면이라고 하셨는데 제 마음 속으로는 그 장면이 없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장면은 너무 설명적이고, 그 장면을 보고 두 사람이 깨닫는 건 말이 안 돼요. 두 사람은 이미 삶 자체로써 충분하고 그리고 상대방의 죽어가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거기에 무슨 새로운 각성이 필요해요? 그런 설명은 없어도 되는데, 말로 꼭 설명을 해줘야 애들은 알아먹어, 하는 순간이 있어요. 그런 대목이 되게 많아요. 그 설명이 나올 때마다, 감독님 설명을 조금 줄이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말하고 싶어요. 정성일_ 이를테면 허문영 씨께서 새로이 등극시킨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걸작, < 장군의 아들 >에서도 김두한과 김동회가 싸우는 클라이맥스의 순간에 김두한의 친구가 싸움판에 끼어들어 저놈은 일본의 개다, 라고 소리칠 때, 김동회는 나는 맞아죽어도 싸다, 라는 표정으로 일방적으로 맞을 때는 사실 김이 세죠. (일동 웃음) 허문영_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건 젊은이들에게 꼭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 대사는 늘 설명적이 되고 교조적이 돼요. 그때 저 장면이 빨리 넘어가면 좋겠다 싶어요. 정성일_ 우리가 임권택 감독님의 걸작의 시기만 얘기를 했었는데, 임권택 감독님의 68년에서 < 잡초 > 직전에 이르는 영화들, < 삼국대협 >, < 뢰검 >, < 비검 >... 참으로 장점을 말하기 힘든 영화라고 할까, (웃음) 말하자면 주어진 조건이나 상황에서 정말 어쩔 수 없었지만 하여튼 영화를 만들어야만 했던 이 시기의 영화를 바라보는 느낌이 어떻습니까? 허문영_ 그 얘기가 나왔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질문을 드릴게요. 사실 제가 할 말은 특별히 없는데, 정 선배가 연재를 하시기 때문에 제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정 선배가 쓰신 <장안명기 오백화>와 <뢰검- 번개칼>을 읽었습니다. 그 글을 보고 필사적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웬만하면 구원비평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이건 구원비평을 넘어서 신을 사도가 방어하듯이 필사적으로 방어한다는 느낌이었어요, 한 사람의 작가를 방어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까지 했어야했나요? <삼국대협>(1972) 정성일_ (잠시 생각) 무언가 이 시기를 비평이 써야 한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아마 그건 허문영 씨께서도 동의하실 것입니다. 저는 거기서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하면 더 미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화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 영화들이 무언가 부서져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제가 본 것은 의도적인 자포자기였습니다. < 망부석 >을, < 법창을 울린 옥이 >를, < 황야의 독수리 >를,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를 만든 감독이었습니다. 심지어 < 삼국대협 >에서 대나무 숲에서의 검술 액션 장면도 그 자체로 어떤 영화적 쾌감이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그걸 찍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영화 안의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적장 구로다가 명검을 휘두르니까 대결이 시작되자 마자 중국의 외팔이, 일본의 맹협, 조선의 일지매의 칼이 그냥 무 잘리듯 부러져나갑니다. 이건 대결장면 자체를 찍지 않겠다는 선언 같은 것입니다. 검술 영화가 클라이맥스에서 마지막 대결의 순간에 그걸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구로다가 명검을 두 번째 휘두르니까 외팔이의 팬티가 벗겨져서 그걸 추스르며 이 방 저 방을 도망쳐 뛰어다닐 때, 이건 그냥 이 순간을 마치 망쳐버리고 싶은 포기의 의지랄까, 긍정이 아닌 부정 안의 결단이 있을 때, 물론 저는 이것이 < 잡초 >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말 그때 막바지까지 와있는 임권택 을 보는 느낌이 있었던 거예요. 저는 구원하고자 한 게 아니라 자포자기를 묻고 싶었던 거예요. 이 시기에 제가 건드려보고 싶었던 건 자포자기의 연출이란 무엇인가, 이것도 하나의 개념이 되지 않을까. 한 번도 영화비평이 건드려보지 않았던 문제, 만약 이걸 이론적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면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갔었을 때 수많은 감독들, 이런 관점에서 이만희 를 구원할 수 있고 김기영 을, 또 유현목 을 새로운 자리에로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 시기가 단지 폭력적인 검열뿐만 아니라 끔찍한 산업적 구조 안에서 영화에 어떤 기대도 없는 구경꾼에 가까운 관객들을 대상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세대의 감독들이 견디는 와중에 자신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포자기의 연출, 의지가 아니라 할지라도 매우 부정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살아냄이랄까, 그런 것에 관한 하나의 서문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68년에서 79년에 이르는 이 시기의 한국영화를 위해서 누군가는 새로운 비평의 전술이랄까, 모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1960년대가 에덴동산이었다면 1970년대는 지옥의 연대기였습니다. 저는 지금의 영화 학자들이 하는 방식으로는 그 시기를 복원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어떤 실망감이 있습니다. 이건 절대적으로 비평가들의 임무 같은 것입니다. 이건 영화의 담론이 망가진 것이 아니라 영화의 형상이 부서진 것이니까요. 그런 생각이 있는 거죠. 너무 위험한가요? 허문영_ 약간은 이해가 되네요. < 뢰검 >을 보며 들었던 생각은 이건 너무 지나치다. 이 영화를 정 선배가 설명하는 방식도 오마주도, 그리움도, 그 시대에 대한 회복에의 의지도 없는 어떤 특별한 방식의 회상이다, 라고 말했을 때, 이 설명이 성립하려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인격과 기억이라는 완전히 영화 외적인 요소를 동원하지 않으면 전혀 설명이 성립하지 않잖아요. 이 감독의 인격과 영화적 경험을 동원해야지 설명된다면, 이 영화에 대한 설명이 아니지 않은가, 이 감독의 평전이 아닌가, 이건 이 감독의 삶을 말하기 위해 영화가 끌려온 게 아닌가, 그래서 과도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처음 이 연재를 시작할 때 모든 영화를 처음 보듯이 본다고 했는데, 그럼 처음 보듯이 봐야지 왜 임권택 감독의 개인사와 영적 고뇌와 기억을 영화를 설명하는데 끌어들여서 이 영화를 왜 그의 삶을 말하는 데 쓰고 있는가, 이건 본인 필자의 처음 약속과 다르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하고 싶었는데 정 선배가 지금 하신 말씀은 이건 임권택 개인의 어떤 선택일 뿐만 아니라 그 시기를 살아온 감독들, 어떤 시기에 감독들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종의 패턴이고 양식이었다면 비평적으로 충분히 고민해 볼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다고 과도하다는 느낌 자체가 없어지진 않네요. 정성일_ 이제 제 질문에 답할 시간입니다. (웃음) 허문영_ (웃음) 저는 그 질문 외에는 정 선배의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어쨌든 임권택 영화뿐만이 아니라 히치콕, 존 포드 영화에도 버려야 할 영화는 버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그걸 다른 평자가 선택해서 내가 못 본 걸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걸 내 눈으로 보기에 버릴 수밖에 없는 영화는 버려야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다 끌어안을 만큼의 힘은 없는 거 같아요. 그거는 인정을 해야 할 거 같고. 그래서 그 시절의 영화들, < 뢰검 >이나 < 장안명기 오백화 >에 대해 고민하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웃음) <하류인생>(2004) 정성일_ 알겠습니다. 이건 제 숙제이군요. (웃음) 임권택 감독님이 < 만다라 > 이후에, 혹은 < 씨받이 > 이후에, 혹은 < 서편제 > 이후에 < 취화선 > 이후에 비평가들의 환호를 받고 잘 받아들여진 것 같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비평가들이 가장 오해하고 있는 감독 중 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대표적인 게 최근작, < 하류인생 >에 대한 비평의 실패, < 천년학 >에 대한 비평적 무관심. 말하자면 곁에서 생각하기에 한국의 비평 담론이 임권택 영화에 대해 가장 오해하는 측면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허문영_ 저는 그 오해에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 임권택 감독님 본인이라고 생각해요. 그 스스로 자신의 영화를 < 개벽 >에서 인본주의라고 말한 순간부터 저는 그 오해가 완전히 지배적인 게 되어서, 아직도 그 안에서 못 벗어났다고 생각해요. 저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임권택 영화는 한 번도 인본주의적이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이 세상의 모든 영화는 인본주의적이에요. 따라서 인본주의는 임권택 영화를 설명할 어떤 키워드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차라리 임권택 영화는 반인본주의적인, 통상적인 의미로 인본주의라고 말하는 것과 정반대이기 때문에 그가 영화적 순간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고 생각해요. 임권택 영화의 키워드를 굳이 말하자면 저는 반(反)인본주의라고 생각해요. 임권택 감독님 스스로 굉장히 공들여 찍었고 알아봐줬으면 하고 바라는 장면 중 하나인, 춘향이가 곤장을 맞을 때 카메라가 뒤로 휙 빠질 때 그게 인본주의적입니까? 그게 곤장을 맞는 춘향이의 아픔을 카메라가 지금 같이 겪고 있습니까? 전혀, 천만의 말씀이죠. 전혀 아니죠. 인간의 개별적 고통이라는 것에 영화가 몰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걸 외면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거에 매달려서는 영화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인본주의라는 틀로는 카메라가 뒤로 빠지는 순간을 볼 수가 없죠. 그게 보입니까, 안보이죠. 뒤로 빠지면서 그 영화는 무엇에 봉사합니까? 판소리의 리듬, 음악적인 어떤 조화의 순간, 아름다움.. 인간의 개별적 사연, 인간의 개별적 드라마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의 순간을 위해 개별적인 고통과 시련을 포기해버리잖아요. 포기하는 게 아니라 그걸 뒤로 밀어내면서, 카메라가 뒤로 빠진단 말이에요. 이 카메라는 반인본적인 카메라에요. 이 카메라를 선택한 사람이 자신의 영화를 인본주의적이라고 설명하는 순간 그걸 듣는 사람은 그런가 생각하고 그때부터 오해의 말들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장승업이 불가마 속에 뛰어 들어가는 장면이 인본주의적입니까? 전혀 아니죠. 장승업은 인본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한 사람이잖아요. 실패한데서 이 영화가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런 인간사와 다른 층위가 뭔가 있지 않을까하는 게 장승업의 최후의 선택이잖아요. 자기가 가마가 되고 자기가 도자기가 되고, 자기가 도자기 표면에 새겨진 그림이 되는 거잖아요, 흙이 되고 어떤 물질이 되는 거잖아요. 임권택의 영화는 끊임없이 자기도 모르게, 인간이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고민을 끊임없이 하지만, 결국 그게 불가능하다면, 대신 어떤 고백을 계속 해왔다는 느낌이 들어요. 고백의 어떤 시점부터 말 그대로 미학적인, 어떤 비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까지 결국 자기 영화를 밀고 나갔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 하류인생 >에서 다시 인간의 얘기로 돌아왔을 때 미학으로 나갈 가능성이 전무한 인간의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 그 모든 시간은 죽어버리잖아요. <하류인생>에서 주인공의 시간은 결국 다 죽어버리잖아요. 각성이 없잖아요. 각성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각성이 어떤 비약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죽어버려요. 죽어버리기 때문에 영화가 자막으로 보충하는 거잖아요. 그 자막이 뭡니까? 맑아질 조짐이 보입니다. 맑아졌다는 것도 아니야, 맑아질 조짐이 보인다는 것, 이 드라마가 얼마나 완전히 실패했는지를 이 자막보다 더 철저히 드러내주지 않아요. <하류인생>은 아마 제 생각에는 감독님이 이렇게 만들려고 하지 않았는데, 만들다보니까, 아, 내가 더 이상 인간의 드라마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냥 깨달은, 스스로 만들면서 알게 된 영화, 그래서 마침내 그 영화를 어처구니없는 자막으로 보충할 수밖에 없는 영화, 마지막 그 몇 문장의 자막이 영화를 덮어버리는.. 그래서 난 이 오해로부터, 영화를 평하는 사람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임권택 감독님 스스로 표명하신 인본주의라는 키워드를 빨리 폐기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감독님 본인이 들으시면 굉장히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기 때문에 임권택 영화를, 상식적인 의미와는 다른 반인본주의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하고 볼 때마다 우리를 새롭게 만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성일_ 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비평가들이 정식화시킨다면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가 우리에게 준 영화적 유산이란 뭘까요? 너무 서두른 것일 수도 있지만. 허문영_ (망설이다가) 임권택 의 영화는 컨셉츄얼한 모던 시네마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거 같아요. 한 번도 없었어요. 한 번도 임권택은 컨셉츄얼한 모더니즘에 이끌린 적은 없었는데,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임시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임권택의 영화는 체험적인, 경험적인 모더니즘 영화인 거 같아요.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소재에서 시작을 하더라도 모던 시네마가 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그의 모던 시네마가 주는 어떤 감흥은 형식이 주는 감흥이 아니라 생(生)체험이 주는 감흥. 모던 시네마는 사실은 생체험이라는 게 키워드가 아니거든요. 근데 희한하게도 임권택의 모던 시네마는 생체험이 거의 절대적인 요소예요. 그게 임권택의 영화를 아주 특별하게 만들어요. 스스로 만들면서도 그걸 새겨놓고 그걸 보는 사람에게도 전이시켜요. 아마 우리가 임권택과 같은 땅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걸 좀 더 잘 느낄 텐데, 해외 관객들에게 종종 알쏭달쏭한 영화처럼 비쳐지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 같기도 하고. 굉장히 특별한 유형의 특별한 모던 시네마이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임권택이 어떤 형식의 모험을 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더라도 어떤 미학적인 몸부림으로 느껴지기 이전에 그가 처음부터 자기 머릿속에서 떨어질 수 없는 공동체의 윤리라는 문제.. 일종의 탐구과정이라고.. 뭐 잘, 하나의 몇 가지 키워드로 잡힐 수 없는 세계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요. 공동체의 윤리가 사라졌다, 불가능해졌다라는 얘기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모던 시네마는 그 이후에 찍는데, 임권택은 그 이후를 살면서 그 이전을 결코 잊지 못하는 사람.. 잊지 못한다는 자신과 눈앞에 보이는 가능성이 모두 사라진 세상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잖아요. 분열 자체를 그 영화가 계속 담고 있기 때문에 항상 위태위태한, 언제든지 분열 직전, 파열 직전의 모더니즘.. 그래서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 늘 아슬아슬한 느낌. 아슬아슬하게 넘어간다는 느낌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냥 미학적인 선택을 해버리면 되는데, 미학적인 선택에 만족을 못하거든, 그래도 혹시 라는 게 임권택의 영화를 위태롭게 만들고 그래도 정직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자기 분열을 방어하기 위해 장치들이 들어오고, 그 장치들이 혼란스럽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기적적으로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어느 경우든지 위태로운 느낌은 들어요. < 하류인생 >이나 < 천년학 >은 엄청나게 위태롭고 < 취화선 >도 위태롭고, <춘향전>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점에서 몸으로 버텨낸다는 게 어떤 감독에게도 찾기 힘든 진정한 미덕이라기보다는.. 뭐, 팔자고 운명이고, 그 운명이 그 사람을 만들기 때문에 영화적으로 영화라는 출구로 삐져나온 힘 같은 게 되는, 그런 느낌을 남겨주신 것 같습니다. 정성일_ 잘 들었습니다. 함께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생각해주어 감사합니다. 2013년 12월 26일 약간 비가 내린 다음 몹시 바람이 차가웠음 진행, 정리, 사진_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