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맥
- 감독
- 이만희
- 제작년도
- 1965
- 출연
- 신성일, 문희, 유춘수, 김정철, 강민호, 이해룡, 한명환, 맘보, 송재호, 최성, 황건, 박민호, 쟈니 리, 강미애, 서우림, 정애란, 한유정, 유하나, 라정옥, 김찬일, 이윤영, 배병기, 양택조, 이일용, 문달, 변일영, 추봉, 김기범, 김세라, 이풍구, 서군수, 김창범, 유재호, 이윤국, 김월성, 차길, 김종선
지난해 12월 12일,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은 “스크린 케미스트리: 스타로 보는 한국영화사”라는 제목으로 1950~1990년대 한국영화계 스타 커플의 관계성을 분석하는 시네포럼을 개최했다. 한국영화사 연구를 수행하는 아카이브로서, 영화연구자는 물론 관련 분야에 관심을 가진 참여자들이 한국영화사와 관련해 새롭게 논의될 만한 지점을 발견하며 대화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영자원은 매년 이와 같은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학술적인 분석 중심의 발제나 토론이 아니라 발표자들이 청중의 질문을 받아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시네포럼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내 주요 스타 커플이 등장한 시기를 네 구간으로 구분하고, 각 구간별로 등장한 스타 커플과 당시 한국영화나 대중문화의 특성 간의 상관관계를 조명했다. 시기별로 논의될 만한 스타들을 미리 설정해놓기는 했지만, 이들의 활동이 갖는 의미는 발표자가 스스로 고민한 후 관객에게 제안하도록 열어뒀다. 1950~1990년대 급변한 한국사회의 분위기와 영화산업의 지형을 참고하면서, 시대를 ‘풍미’한 스타들이 대중에게 남긴 여운을 발표자와 참여자가 함께 추적할 수 있었던 포럼 현장을 요약한다. 1950~1960년대 스크린 속 스타 커플 영화평론가·영화사가 김종원 김종원 평론가는 1950~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커플로 등장한 스타들 간 케미스트리를 발견했다. 1950년대 스타 커플의 역사는 < 출격명령 >(홍성기, 1954)에서 처음 호흡을 맞추고 실제 부부가 되어 < 춘향전 >(이규환, 1955)에서 향단과 방자를 연기한 전택이 와 노경희 부터 시작한다. 배우 노경희는 < 내가 넘은 삼팔선 >(손전, 1951)을 비롯해 < 피아골 >(이강천, 1955) 등에서 해방 이후 스크린을 통해 강렬한 카리스마를 분출하는 여성 배우로 거듭나고 있었으며, < 아리랑 3편 >(나운규, 1936)으로 데뷔한 전택이와 여러 작품에 동반 출연하며 20세기 중반 한국영화사에서 함께 활약했다. 이후 김승호 와 황정순 이 강대진 감독의 < 박서방 >(1960), < 마부 >(1961), 김수용 감독의 < 굴비 >(1963)에서 돋보이며 또 다른 스타 커플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 새로운 맹서 >(신경균, 1947)로 데뷔한 배우 최은희 는, 커플을 구성하는 인물들 간 관계가 남성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당시 시대적 한계에서 벗어나, 케미스트리를 주도하는 여성 인물로 떠올랐다. 김진규 와 신영균 의 상대역으로 등장한 신상옥 감독의 < 동심초 >(1959), < 상록수 >(1961), < 산 >(1967)과 같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측면이 두드러진다. 한편, 스타 커플의 일원으로 거론된 적은 드물었지만 멜로드라마 위주의 문예영화 영역 밖의 상업영화 작품들에도 다수 출연하며 입지를 다진 김지미 배우의 행보도 독특했고, 그의 활약은 < 골목안 풍경 >(박종호, 1962), < 불나비 >(조해원, 1965)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60년대에 등장한 ‘트로이카’의 구성원으로, 김종원 영화사가는 배우 엄앵란 , 윤정희 , 문희 를 꼽았고, 그들과 배우 신성일 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했다. 엄앵란은 < 청춘교실 >(김수용, 1963), < 맨발의 청춘 >(김기덕, 1964) 등에서 그와 함께 연기하며 ‘청춘영화’의 전성기를 불러왔으며, 두 배우의 호흡은 한국영화계에서 ‘스타’의 존재를 부각함과 동시에, 이전까지 외화에 치중됐던 국내 관객의 관심이 한국영화로 선회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윤정희는 데뷔작 < 청춘극장 >(강대진, 1966)부터 < 안개 >(김수용, 1967), < 장군의 수염 >(이성구, 1968)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며 1960년대 한국 예술영화의 주축을 구성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문희 역시 이만희 감독의 < 흑맥 >(1965)과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등에서 신성일의 상대역을 연기하면서 트로이카의 구성원으로서 영화계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신성일 중심의 트로이카 구도로 대표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스타 커플 구조는, < 결혼교실 >(정인엽, 1970) 속 신성일과 윤정희, 문희, 남정임 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윤정희 X 신성일: 1960~1970년대 개발독재시대의 ‘밀고 당기기’ 영화평론가·영화연구자 금동현 금동현 평론가는 1960~1970년대 대표 배우이자 청춘스타였던 신성일과 윤정희가 동반 출연작에서 연기한 인물들의 관계를 ‘밀고 당기기’라는 용어로 재해석했다. 극중 그들의 배역이 점하는 위치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함께 출연한 87편에 달하는 작품들에서 거듭 역전되고, 둘 간의 케미스트리가 두드러진 <안개>와 < 야행 >(김수용, 1977)에서 이 점이 선명히 관찰된다. 배우 신성일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 아낌없이 주련다 >(유현목, 1962)로 데뷔한 이후 유수의 작품에서 줄곧 주연을 맡았고, 특유의 소년미로 ‘청춘의 영원한 아이콘’이자 현대사회에 완전히 정박하지 못한 무책임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도회적이고 지적인 여성 인물을 대표했던 배우 윤정희는 1972년 석사 논문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여배우 연구: 1903~1946년을 중심으로」를 발표하면서, 배우이자 여성인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는 면모를 보이며 ‘멜랑콜리’한 정서를 중심으로 스타 이미지를 갱신했다. <안개>와 <야행> 중 신성일, 윤정희 / © ㈜태흥영화 일례로, <안개>에서만 해도, 윤정희는 주변 소품이나 인물들 사이에 갇혀있고 신성일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인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야행>의 몇몇 장면에서 윤정희는 자신을 향한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는 연기를 수행함으로써, 1970년대 한국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활성화하는 성취를 이루는 데 기여한다. 신성일과의 케미스트리를 일으킴과 동시에 한국영화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구축된 윤정희의 스타 이미지를 참고하면, 금동현 평론가는 그가 ‘보여지는(보이는) 여성’에서 ‘보여주고 보는’ 여성으로 변화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1960~1970년대 한국고전영화 중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인 두 작품의 영화사적 의미가 제대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당대 형성된 두 배우의 스타 이미지를 반드시 경유해야 한다는 관점도 공유했다. 더불어, 두 사람이 우울하지 않은 명랑한 얼굴로 콤비를 이룬 작품 < 아파트를 갖고 싶은 여자 >(정인엽, 1970), < 모범운전사 갑순이 >(이형표, 1972) 역시 언급하면서, 둘의 케미스트리를 다른 방식으로도 재조명하고 싶다는 소회를 밝히며 발표를 마쳤다. 장미희 X 안성기 198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 커플 영화연구자 이윤종 이윤종 영화연구자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 장미희 와 안성기 를 다루면서, 당대 한국영화 주요작에 출연하며 강력한 케미스트리를 발휘한 이들을 ‘황금 커플’로 지칭했다. 안성기는 김기영 감독의 1957년작 < 황혼열차 >에서 아역 배우로 데뷔해 연기 활동을 지속하다가 < 애수의 언덕 >(김대희, 1969) 이후 10여 년간 휴식기를 보내고 < 병사와 아가씨들 >(김기, 1977)로 복귀했다. 이때부터 < 바람불어 좋은날 >(이장호, 1980), < 적도의 꽃 >(배창호, 1983), < 고래사냥 >(배창호, 1984),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 등 1980년대 화제작의 주연으로서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을 연기하며 ‘국민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시기 장미희와의 동반 출연이 특히 빛났다. 장미희는 < 성춘향전 >(박태원, 1976)으로 데뷔하고 흥행작 < 겨울여자 >(김호선, 1977)에 출연한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어 당대 여성 배우 트로이카에도 합류한다. 이후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등에서는 안성기와 상대역으로 만나 열연함과 동시에 흥행까지 거두면서 두 배우 모두 영화계 입지를 굳히게 된다. <적도의 꽃>와 <깊고 푸른 밤> 중 장미희, 안성기 / © ㈜동아수출공사 그런데 이들이 동반 출연한 1980년대 작품들에서 각자가 욕망의 주체(안성기)와 대상(장미희)으로 설정되면서 둘 간의 케미스트리가 ‘파국’의 결말을 통해 발휘된 점이 인상적이다. 안성기는 순수함부터 비열함에 이르기까지 중·하층민 남성의 변화무쌍한 얼굴을, 장미희는 세련된 외관을 지닌 채 심리적 결핍을 겪는 부유한 여성 인물을 자주 연기했다. <적도의 꽃>에서는 중년 사업가에게 착취당하는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한 미스터 M(안성기)이 그를 구출하려 하지만 결국 화합에 실패한다. < 황진이 >(배창호, 1986)에서 황진이(장미희)에 대한 마음을 전하지 못한 갓바치(안성기)는 극단적 선택을 감행하고, <깊고 푸른 밤>에서는 미국 영주권과 돈벌이에 집착하는 백호빈(안성기)이 계약 결혼을 통해 제인(장미희)을 이용하며, 두 인물이 파멸로 치닫는 과정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이 드러난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두 배우는 이렇게 산업화와 군부 독재의 한가운데 드리운 감정 소외나 우울감의 그림자를, 불행의 케미스트리로 스크린에 옮겨왔다. 김혜수 X 한석규: 1990년대 소비문화와 트렌드 신화, 도시의 얼굴 영화평론가·성결대학교 교수 정민아 이전까지 언급된 배우들의 활동이 과거 한국사회의 시대별 흐름에 맞춰 전개됐다면, 정민아 평론가는 1990년대에 두각을 드러내 현재까지도 활발히 필모그래피를 갱신하고 있는 배우로서 배우 김혜수 와 한석규 를 조명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였지만 그들이 함께 출연한 작품은 사실 많지 않다. 로맨틱 코미디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 닥터봉 >(이광훈, 1995)에서 처음 협업한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 이층의 악당 >(손재곤, 2010)으로 다시 만났다. 그래서 그들이 한 작품에서 발생시킨 케미스트리보다는, 1990년대를 배경으로 각자의 역량을 개발한 시간을 되돌아보며 오늘날까지도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는 두 배우의 존재감을 분석했다. (상) 영화 <쉬리>, 드라마 <신사장 프로젝트> 중 한석규 / (하) 영화 <첫사랑>, <내가 죽던 날> 중 김혜수 © ㈜필름쿡플러스, tvN 1990년대 국내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민주화와 세계화가 본격화되며 대중문화 산업의 규모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대중의 취향과 ‘트렌드’에 부합하는 다양한 콘텐츠나 인물이 주목받았던 때로, 이때 등장한 스타들은 대체로 산뜻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로 팬덤을 확보했다. 그중에서도 김혜수와 한석규는 외모와 목소리, 연기,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당시 대중이 선망한 ‘세련됨’을 구현했고, 데뷔 이후부터 현재까지 작품 속에서 쉼 없이 대중과 호흡해왔다. 한석규는 지성과 인품을 겸비한 도시 남성의 이미지를 표방했지만, 드라마 <서울의 달>(1994)에서처럼 냉정한 현대사회에서 불운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처연한 청년의 모습으로도 기억된다. 이는 최근까지 그가 TV 드라마에서 보여준 ‘소시민적’ 영웅의 리얼리티와도 맞닿아있다. 또한 감독에 의해 ‘선택받는’ 배우를 넘어 자발적인 비전에 따라 작품과 장르를 선택하고 신인 감독의 성장까지 견인하는 흥행보증수표 영화인의 시초 격이기도 하다. 한편, 김혜수는 활동 초기에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나 영화 < 첫사랑 >(이명세, 1993)을 통해 젊고 발랄한 청춘스타의 면모와 특유의 건강미로 호응을 얻었다. 200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보다 다채로운 배역을 맡아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했으며, 특히 2020년대 즈음에는 < 굿바이 싱글 >(김태곤, 2016)과 < 내가 죽던 날 >(박지완, 2019), < 밀수 >(류승완, 2023) 등을 통해 독립된 여성 자아가 돋보이는 씨네페미니즘의 상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비디오 에세이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비디오 에세이스트 이무언,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연구원 윤서연 비디오 에세이스트 이무언 과 영자원 학예연구팀 윤서연 연구원은, ‘비디오 에세이’라는 작업의 의미를 소개하며 포럼 주제에 맞는 작업 결과물 한 편을 직접 제작해 선보였다. 이무언은 관객이나 연구자로 하여금, 각자가 작품에서 발견한 특별한 지점을 중심으로 연출과 편집을 주도하면서 영화와 한층 더 친밀해지는 기회로 비디오 에세이를 인식했다. 윤서연 연구원 역시 비디오 에세이가 주제가 되는 대상(물)과 이를 둘러싼 세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통찰”한 결과이자 “매혹적인 또 하나의 작품으로 기능”한다는 논의 [1] 를 인용하며,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으로서 비디오 에세이의 영역이 지닌 비평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측면을 소개했다. 이날 소개한 작업은 영자원이 올해 ‘우수영상물 다국어자막 DVD 제작 및 배포 사업’을 수행하던 도중 두 사람이 기획하게 됐다. 우수영상물 다국어자막 DVD는 영화사적·예술적 가치를 지닌 한국영화 몇 편의 공통 소재를 제목으로 하여, 작품별 본편 영상과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자막, 그리고 코멘터리 영상 등을 수록한다. 영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전반을 해외에 소개할 목적으로 매년 해외 공관이나 문화원 등에 비영리적으로 배포되고 있다. 작년에는 “영화와 남성: 영화로 보는 스타 페르소나”라는 제목의 DVD에, 한국사회의 일면과 시대의 감성을 머금고 있는 남성 인물들이 인상적인 한국영화 6편을 수록했다. 그리고 감상자들이 한국에 대해 간략히 소개받을 수 있는 짧은 콘텐츠를 기획해 부가 자료로 함께 수록하고자, DVD에서 다루고 있는 남성 배우 6인 중 한 명에 대한 비디오 에세이를 기획했다. 내부 논의 끝에 최종 선정하게 된 에세이의 주인공은, 순정과 헌신, 소시민의 나약함, 일그러진 욕망 등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한 국민 배우이자 고전과 동시대를 아우르는 스타로 기억되는 한국영화의 얼굴, 안성기였다. 실제 연령대로 비춰볼 때, 안성기는 에세이를 제작한 이무언의 아버지 세대이면서 작품 촬영 당시에는 그(이무언)와 같은 또래였다. 또한 안성기가 극중 인물을 형상화하며 선보인 특유의 ‘얼굴’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한국사회의 각기 다른 국면을 관통함에 따라, 1980년대의 시절이 하나로 통합되는 듯한 느낌 역시 받았다고 이무언은 전했다. “이미지들의 느슨하고 싱거운 연결”을 통해 이러한 인상이 에세이를 감상하는 이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반면 윤서연 연구원은 안성기가 각기 다른 영화에서 선보인 대사들 중 인상 깊은 부분들을 모아 1980년대 시대정신과 같은 특정 의미를 강조하여, 작품과 쇼트들의 의미를 비교적 명료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 두 가지 입장은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2017년 시네마테크KOFA에서 그에 관한 특별전을 개최했을 때 제작된 영상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전”을 참고하고, 구술채록 사업 진행 중 그의 구술 내용이 녹음된 파일들을 다시 들어봤으며, 그가 출연한 수많은 작품 중 10편을 골라 실제로 삽입할 쇼트를 신중히 선택했다. 쇼트마다 배어있는 정서를 자막과 음악으로 배치하기도 했다. 특히 서로 다른 작품에 속한 장면을 소품이나 장소 등을 매개로 연결하며 안성기가 작품과 작품 사이를 유기적이면서도 자유롭게 오가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출 중 하나는,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 중 덕수궁의 벤치에서 각각 아내( 황신혜 )와 딸에게 자상함을 베풀지만 냉대를 받고 마는 두 장면을 한 화면에 나란히 배치해 동시에 재생한 대목이다.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아내와 딸을 향한 그의 행동이 중첩되는 순간들이 보이는데, 이는 필름이 아닌 디지털 영상이 보편화된 시대에 두 개의 영상을 2채널로 나란히 배치하며 가능해진 실험이라고 윤서연 연구원은 덧붙였다. 한국고전영화 에세이 -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이미지 클릭 후 재생) 관객과의 대화 (질문1) 198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스타’들에게는, 할리우드 스타들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국내 관객의 욕망이 투사되는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1990년대부터는 이들만의 영역이 독립적으로 구축됐다는 느낌을 받는데, 한국영화의 각 시기가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에 대해 발표자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답변_이윤종 영화연구자) 고전 할리우드 시기 영화산업은 몇몇 주류 영화 스튜디오가 제작과 배급, 상영을 전담하는 방식으로 운영됐고, 배우들 역시 각 스튜디오에 소속된 채로 활동했다. (하지만 1948년 미국 대법원에서 이러한 영업 활동이 ‘독점’에 해당한다고 판결하면서 여러 스튜디오가 해체됐고, 여기에 소속됐던 배우들이 개별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불가능했던 측면도 있지만 이러한 스튜디오 중심의 스타 시스템 자체가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고, 할리우드의 방식을 모방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해방 이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이 당시 국내 영화산업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스튜디오 시스템에 근접한 운영 양태를 보였는데, 1970년대부터는 이마저도 쇠퇴했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감독과 배우, 영화 스태프들 모두가 독립된 개인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1980년대까지는 1990년대 이후에 비해, 영화를 비롯해 여기에 출연한 배우들 역시 대중에게 큰 파급력을 얻지는 못했던 시점인데, 와중에 안성기와 같은 ‘국민 배우’가 탄생했다는 점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질문2) 20대 관객의 입장에서는 < 라디오스타 >(이준익, 2006)나 < 실미도 >(강우석, 2003) 등의 2000년대 이후 작품을 중심으로 안성기 배우를 기억하게 되는데, 과거의 다양한 출연작들을 통해 그의 활동을 한국영화사의 맥락에서 돌이켜볼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다. 비디오 에세이를 제작하면서, 여러 출연작 중에서도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장면들을 구분해내고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고 예상된다. 작업 도중 겪게 되신 고충 이 있다면 듣고 싶다. (답변_이무언 비디오 에세이스트) 감상을 공유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인상 깊은 장면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장면을 확인할 때마다 영상의 일부를 이미지로 캡처해두고, 작품 안에서의 타임코드와 함께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를 메모했다. 에세이에서 다룰 모든 작품에 대해 이 작업이 완료되면, 캡처된 이미지들을 훑어보며 관련 장면을 어떻게 연결할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각 이미지를 연결하는 과정에서는, 안성기의 연기를 통해 전달되는 여러 가지 인상들(‘아버지’, ‘남성’ 등)이 쇼트들의 유기적인 연결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지각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안성기 개인의 삶이 연상되거나 관객 스스로가 처한 ‘현실’ [2] 과 작품 속의 ‘허구’가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흥미로웠던 장면들도, 어렵지만 제시하고 싶었다. 또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안성기의 ‘얼굴’ 외에 다른 요소들도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잔을 부딪치며 건배하는 이미지, 수면 위에 반사된 이미지, 극중 시계를 비춘 이미지 등이, 매 장면 돋보이는 그의 다채로운 ‘얼굴’들을 연결해줬다. 한국고전영화 에세이 -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중 시계와 잔이 등장하는 쇼트 (질문3) 1960년대 한국영화의 멜랑콜리적 지식인 주체성에 대해 연구한 바가 있는데, 금동현 평론가의 발표에서 <장군의 수염>과 <안개>가 다뤄져서 반가웠다.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배우들이 담지하고 있는 멜랑콜리적 주체성 이 무엇일지에 대해 여쭙고 싶다. (답변_금동현 영화평론가) 오늘 분석한 작품들에서는 멜랑콜리를 자아내지 않고 ‘체현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물론 1960년대에는 멜랑콜리를 재현하는 몇 가지 요소가 발견될 뿐 멜랑콜리라는 감수성 자체가 이 시기에만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멜랑콜리의 흔적이 관찰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한 대목을 꼽자면, ‘코미디’라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 한국 코미디영화에서 웃음은 모종의 이유로 ‘경직되어버린’ 무언가를 조롱할 때 자주 발생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웃어야 하는 데 웃지 못하는 순간( 이봉래 감독의 영화에서의 몇 가지 장면이 예가 될 수 있다)이 어떻게 보면 멜랑콜리한 상태에서 받는 느낌과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질문4) 오늘 언급된 배우 중, 배우 김혜수가 유독 눈에 띈다. 1990년대 당시 그는 확고한 ‘무비스타’로 자리매김한 상태가 아니었고, 광고나 드라마를 통해서도 아직 다른 스타들만큼의 파급효과를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김혜수 가 자연스레 떠오른다는 것이 독특한 지점이다. 이 시기 스타로서 김혜수의 부상을 분석하실 때 다른 배우들과 비교하여 어떤 접근법을 적용하셨는지가 궁금하다. (질문5) 2000년대 이후부터 최근까지 배우 김혜수와 한석규가 선보인 연기 스타일이, 그들이 1990년대에 수행하던 방식과는 달라졌다고 말씀해주셨다. 배우들이 선보이는 연기의 방향성이 재정립되는 데는, 영화에 대한 관객의 욕망이 변화하는 현상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시대별로 이념이나 정치성, 관객의 욕망 등의 변화가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 변모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을지 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답변_정민아 영화평론가) 두 질문에 대해 한 번에 답변 드리고 싶다. 말씀하신 대로 김혜수 배우가 영화계 스타로서 두각을 나타낸 시점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다른 배우들에 비해 다소 늦다. 하지만 1990년대 화보와 예능, TV를 포함해 대중매체 전반에서 그가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성장한 여정을 고려하면, 그리고 이 시기 관련 콘텐츠를 향유했던 경험을 되새겨보면,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가 김혜수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는 오늘날 스타가 탄생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영화’와 그밖의 영역(방송 등)이 명확히 구분됐던 과거와 다르게, 200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배우’의 활동 분야가 대폭 확장됐고 분야 간 경계도 거의 사라졌다.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분야에서 연기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은 모두 ‘배우’로 호명되며, 그들이 연기를 선보이는 분야 역시 한 가지로 국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스크린을 통해서만 스타로 거듭나기보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파급된 각기 다른 매체에서 강렬한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만의 스타 이미지를 구축한 김혜수가, ‘멀티 플레이어’로 활약하는 복합적 차원의 배우상을 1990년대부터 선구자적으로 확립한 이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 같다. * 현장 BEHIND CUT * *** [1] 박진희, “ 복혜숙과 석금성을 헷갈려하다 ”, KMDb 영화글, 2023. 7. 27. [2] < 개그맨 >(이명세, 1988) 중 이발사가 이종세(안성기)에게 “어렸을 때부터 그 방면에 재능이 많으셨죠?”라고 물어 아역 배우 시절 안성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거나, < 칠수와 만수 >(박광수, 1988) 중 “우리 쳐다보는 거 아니에요?”라는 대사 이후 배우 박중훈과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 등이 있다.
기관총과 아편, 그리고 ‘갱’이라는 단어의 등장까지 < 검은 머리 >에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필름누아르의 요소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잠깐이긴 하지만 알 카포네와 금주법으로 대표되는 1920-30년대 할리우드 갱스터 무비에서나 볼 법한 자동화기를 든 조직원이 초반부터 등장하고, 아편에 찌들어 ‘검은 머리’ 연실( 문정숙 )을 괴롭히는 아편쟁이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영화에서 저런 묘사가 일상적이었던 범죄 누아르 영화가 있었나?’ 싶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더불어 유지형 감독이 쓴 「영화감독 이만희 」에서 그가 얘기한대로 “나는 한국영화의 배우들을 보면서 저렇게 조용하게 연기하는 패턴의 모습을 이만희 감독 외에는 보지 못했다. 다들 뭔가 좀 서두르고 말이 많은데, 이만희 영화의 배우들을 보면 절제와 절도가 있어 좋다”거나 “이만희 영화는 ‘내 영화는 뭔가 다르다’라는 걸 언제나 도입부터 관객에게 늘 알린다”는 말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처럼 <검은 머리>는 그때까지 알고 있던 한국영화사의 다른 범죄 누아르 영화들과는 사뭇 달랐다. 돌이켜보면 1964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만희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들에 속하는 < 마의 계단 >과 < 검은 머리 >, 그리고 < 추격자 >가 동시에 등장한 해가 바로 1964년이다. < 내가 설 땅은 어디냐 >와 < 협박자 >같은 영화들까지 더하면 무려 6편이 개봉했다. 22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감독의 입지를 다져준 < 돌아오지 않는 해병 >이 개봉한 1963년부터 문희 의 데뷔작 < 흑맥 >(1965), 사라진 신화 < 만추 >(1966)를 지나 < 귀로 >를 포함해 무려 11편을 내놓았던 1967년까지, 그렇게 이만희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시기를 가득 메운 전쟁영화와 멜로드라마 사이에서 범죄 누아르 <검은 머리>는 그야말로 독특하다. 무엇보다 머리를 반쯤 가린 ‘검은 머리’라는 여성 캐릭터부터 매력적이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가사처럼 팜므 파탈인 듯 팜므 파탈 아닌 팜므 파탈 같은 검은 머리랄까. 보스 동일( 장동휘 )의 아내인 연실( 문정숙 )이 동일의 부하이자 아편쟁이인 만호( 채랑 )와 정분이 난다. 다른 부하들은 조직의 계율대로 간통을 한 연실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고 쫓아낸다. 이후 그녀는 얼굴의 상처를 검은 머리로 가린 채 창녀로 생활하며, 어쩔 수 없이 만호와 함께 지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연실은 택시 운전수( 이대엽 )를 만나 사랑에 빠질 듯 했지만, 어떤 위험이 찾아올지 알기에 연실은 그를 거부한다. 한편, 연실은 보스를 만나려 조직이 운영하는 바를 찾아가지만 조직원들은 보스 몰래 그녀를 죽이기 위해 철길로 데려가고, 그를 뒤쫓아 온 택시 운전수가 그녀를 구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아편쟁이는 사라진 ‘돈줄’인 그녀를 찾기 위해 자신의 패거리를 풀어 정형외과마다 지키게 한다. 연실이 얼굴을 고칠 거라고 생각해 서울의 모든 병원을 지키고 선 것이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범죄의 세계랄까, 검은 머리 연실을 둘러싼 악순환의 구조는 인상적이다. 택시 운전수의 여동생의 남자 친구는 연실을 찾으려는 아편쟁이의 패거리로서, 연실의 사진을 들고 정형외과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또한 택시 운전수의 여동생은 자신이 일하는 바에서 우연히 검은 머리의 그녀를 본 기억이 있다. A가 B를 알고, B는 C를 아는데, A와 C는 서로 몰라서 발생하는 기막힌 수수께끼의 상황이다. 이만희 감독은 적은 숫자의 인물로도 서로 엮고 엮이는 관계를 만들어내며 긴장감을 자아낸다. 그런 가운데 당대 한국영화계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용팔이’( 박노식 )의 반대편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이대엽 의 존재는 믿음직하다. “어차피 내 여자도 아닌데 (얼굴의 상처는 상관없다)”라고 무심하게 대하는 것 같더니, “고향선배 중에 정형외과 의사하는 분이 있으니까 고쳐주꾸마”라며 연실을 향해 조건 없는 사랑을 드러내는 그의 존재는 꽤 매력적이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정서는 사랑하는 여자를 처벌하여 내쳤다는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살아가던 장동휘 의 비애감과 인간미다. 그는 이만희 의 이후 작품 < 암살자 >(1969)에서도 자신이 암살한 남자의 딸을 대신 키우는 사내였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하들 중 장혁의 상처 난 얼굴은, 장동휘의 인간적 고뇌의 반대편에서 도대체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조직의 규율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원시성’을 상징한다. 연실 앞에서 “사랑을 어떻게 하는 것인 줄은 모르지만 난 너를 좋아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너를 처형하고 말았어”라고 참회하거나 “악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야. 내게 주어진 거야”라며 항변하는 장동휘의 모습 역시 이만희의 다른 영화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정서다. 어쩌면 유일하게 ‘추남’이라는 필명을 쓰면서까지 < 검은 머리 > 각본 크레딧에 자신의 존재를 올려놓은 이유일 것이다. 끝으로, 매력적인 장르적 요소만으로 < 검은 머리 >를 마무리하기는 아쉽다. 바로 전쟁의 상처다. 이만희 는 실제로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고등학교를 미처 졸업하지 못하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영화감독이 안 되었다면 직업군인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전쟁의 기억은 장르를 떠나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정서다. 영화에서 보스에 반기를 들려는 부하들 중 한 사람은 “힘들었을 때 가진 것 없는 우리를 데려다 보살피고 품어준 게 바로 큰 형님”이라며 그에 반대한다. <검은 머리> 또한 바로 그 한국전쟁으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얼굴에 상처 입은 한 창녀의 실제 모습에서 출발했다는 이 영화의 시작점을 떠올려 봐도, ‘과연 그 상처가 어떻게 난 것일까’ 생각해보면 자연스레 그 전쟁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처럼 <검은 머리>는 장르의 매력과 현실의 상흔이 기막히게 결합한 걸작이다. 2009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복원한 <검은 머리>는 작년 이탈리아 볼로냐영화제에서도 상영됐다.
이만희 감독은 1965년 한 해 동안 < 흑룡강 >, < 7인의 여포로 >, < 흑맥 >, < 시장 > 등 네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 가운데 <흑맥(黑麥)>은 이 감독이 <7인의 여포로>로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재판 중인 과정에서 읽은 이문희 (李文熙)의 장편소설이 원작이다. 이 작품은 그가 처음 손댄 문예물이라는 사실과 당시 갓 여고를 나온 열여덟 살 대학 신입생의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그 신인 배우가 1천여 명의 공모자 가운데서 뽑힌 이순임(李順任). 바로 뒷날 윤정희 , 남정임 과 함께 트로이카 스타의 한 축을 이루며 한국영화에 기여한 문희 (文姬)이다. 이만희 감독은 그녀에게 본명 대신 원작자의 이름(발음)을 딴 ‘문희’라는 예명을 붙여 주었다. 전쟁의 후유증과 사회악에 대한 비판의식이 짙게 깔린 이 영화는 이만희 특유의 과감한 용인술과 캐릭터의 설정, 영상 감각이 돋보인다. 여기에는 서정민 (촬영)의 짜임새 있는 화면구도도 한몫을 하였다. 6,25동란 후 서울역 주변에는 깡패, 양아치들의 폭력과 절도, 매음이 만연되고 있었다. 이들 독초의 왕초는 목사인 아버지를 잃고 단신 월남하여 거리를 헤매다가 용산 패를 거느리게 된 독수리( 신성일 )이다. 이런 그 앞에 어느 날 미순( 문희 )이 나타난다. 하나뿐인 어머니를 여의고 서울로 일자리를 얻으러 왔다가 날치기 패들에게 걸려든 시골소녀이다. 독수리의 똘마니가 미순의 성경책을 훔치고 달아나는 바람에 생긴 일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미순은 비록 그들의 소굴에서 지내지만 두려움을 거두고 더러운 빨래와 끼니를 도와주며 잘 적응해 나간다. 마음도 열게 된다. 독수리도 미순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청순한 미순의 사랑이 빗나간 왕초의 마음을 녹인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그의 진심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미순을 사랑하면서부터 독수리는 두목으로서 박력을 잃기 시작한다. 이런 가운데 미순이 집을 나가자 독수리는 그녀가 몰래 나간다는 명동의 스탠드바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미순을 희롱하는 명동파 왕초를 보고 참다못한 독수리가 격투 끝에 그만 그를 살해하고 만다. 미순을 뒤에 남기고 수사관에게 끌려가는 독수리. 그는 수갑 찬 손을 미순이 보지 못하도록 성경책으로 얼굴을 가리라고 부탁한다. “인생이란 결코 뜻대로 운행되지 않는다. 본래는 허약했던 목사 아들이 도둑놈 우두머리로 출세했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 주고 있어. 기차를 탄다고 반드시 가고 싶은 델 갈 수 있는 건 아냐. 도중에 기차가 뒤집히는 수도 있거든.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이 장난감 기차뿐이야!” 피를 토하듯이 내뱉는 독수리의 독백이 화면을 덮는다. < 흑맥 >은 전쟁으로 인해 깜부기병에 걸린 보리처럼 사회에서 버림받은 부초(浮草) 같은 인생의 이야기이다. 이만희 감독은 여주인공 미순을, 때는 묻었지만 진흙 속에 핀 연꽃처럼 청순한 이미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녀는 독수리에게 신앙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이 영화에는 ‘쪼아온다’, ‘토꼈다’는 등의 은어가 많이 나온다. 이런 대사에서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전후 젊은이들의 비행과 일탈적 삶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의 특징은 등장인물을 거의 신인으로 충당했다는 점이다. 그들 중에는 배우지망생이 아닌 촬영 조수나 조명기사, 연출보 등 뒤에서 돕는 스태프들도 끼어 있다. 연기 면에서 독수리 역의 신성일 은 < 성난 능금 >( 김묵 , 1963) 이후 모처럼 분출하는 힘을 안으로 삭이려는 노력을 보여 주었고, 문희 역시 눈의 매력을 활용한 연기로 기대를 모으게 하였다. 아무튼 < 흑맥 >은 < 돌아오지 않는 해병 >, < 만추 >, < 삼포 가는 길 >과 더불어 이만희 영화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필름이 보존되어 있지 않아 기록상으로나마 반드시 남겨야 할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