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혼 뉴스 제7호
- 제작년도
- 1940
부산에는 1900년 이전부터 극장이 존재했다. 1900년대~1910년대에는 행좌, 송정좌, 변천좌, 부산좌, 동양좌(이후 대흑좌[大黑座]), 질자좌, 욱관, 보래관, 초량좌, 행관, 상생관 등 여러 곳에 극장이 난립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활동사진관을 중심으로 극장이 정리, 재편되었다. 해방 전까지 존속하고 있던 극장을 중심으로 부산지역의 극장과 영화관에 대해서 살펴보자. ① 행좌(幸座), 행관(幸館), 소화관(昭和館) 행좌(幸座)는 부산 남빈정에 있던 극장이다. 1903년 발행된 「부산항시가 및 부근 지도」에 송정좌(松井座)와 더불어 그 위치가 표기되어 부산 지역의 가장 오랜 극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1904년, 부산에서 최초의 활동사진을 상영한 이 극장은 1910년대 들어 활동사진이 큰 인기를 끌면서 활동사진 전용관으로 신축되는데 그 이름을 행관(幸館)이라 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부산의 일본인 실력자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였다. 1915년 12월 개관한 행관은 비슷한 시기 활동사진전용관으로 전환한 보래관이나 상생관에 밀려 고전했다. 하지만 1917년 하야가와연예부가 직영하고 이어 1919년부터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둔 만카츠(萬活)에서 직영하면서 부산 흥행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만카츠 특파원으로 부산으로 건너왔다가 이후 행관을 운영하게 된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는 행관을 중심으로 일본의 중소프로덕션의 영화를 배급하면서 조선흥행계에 큰 주목받았다. 하지만 행관은 개관 15년 만인 1930년 11월 10일, 영화 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다. 큰 피해를 입은 사쿠라바 후지오는 자본금 10만원의 주식회사 사쿠라바상사를 세우고 지상 3층 규모의 최신 영화관인 소화관(昭和館)을 지어 사업을 확장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쿠라바 후지오, 지배인은 사쿠라바 토시오(櫻庭敏雄)이며 1,0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직후 그 이름을 조선극장으로 바꾸었다. ② 부산좌(釜山座) 1907년 7월 15일 부평정에 만들어진 극장이다. 부산의 대표적 실력자인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를 중심으로 일본인 유지들이 만든 부산연극합명회사에서 설립했다. 개관 당시 가장 크고 호화로운 극장으로, 회전무대를 갖춘 최신의 설비를 갖추었으며 다양한 공연은 물론 활동사진도 상영되었다. 1923년 3월 22일 화재로 소실되어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③ 보래관(寶來館) 1914년 무렵 부산부 행정에 개관한 극장이다. 개관 초기에는 라쿠고(落語)와 같은 연희를 공연하는 요세(寄席)로 활용되었으며 흥행일수도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5년 1월 운영자가 고노(小野)에서 호소미(細見)로 바뀌면서 연중무휴의 흥행을 천명했고, 그해 3월 경성의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연예부로부터 텐카츠회사의 필름을 공급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사진관으로 이용되었다. 1916년 12월 27일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신축되었고 오사카에 근거지를 둔 스기모토(杉木)상회가 직영하게 된다. 1924년 무렵에는 오카모토(岡本松造)가 운영자로 이름을 올렸다. 1930년 10월 8일에는 영화상영 도중 필름에 불이 붙어 화재가 일어나기도 했다. 1937년 상생관과 함께 건물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신축을 명령받고 1938년 10월 다시 신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와사키 다케지(岩崎武二), 지배인은 이와사키 모모타로(岩崎桃二郞)이다. 객석수는 총 952석이었다. 해방 후 국제영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④ 변천좌(辨天座), 상생관(相生舘) 변천좌는 1912년 무렵 부산부 본정에 들어선 요세(寄席)이다. 1914년 무렵 좌주는 교야마(京山花丸)였다. 활동사진의 인기가 비등하면서 변천좌는 활동사진관으로 개축을 꾀한다. 1916년 11월 1일 활동사진관 개업을 하면서 이름을 상생관으로 바꾸었다. 개관 초기 닛카츠영화를 상영하던 상생관은 1922년부터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으며 1925년 쇼치쿠와 공동경영을 시작하며 쇼치쿠 만선(滿鮮) 봉절장이 되었다. 이에 맞춰 당시 관주인 아라이(新井幸吉)는 극장 개축을 추진하여 2개월의 공사 끝에 1925년 11월 15일 새롭게 개관하게 된다. 1933년 11월 무렵 상생관의 관주는 미쯔오 미네지로오(滿生峯次郞)이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 역시 미쯔오 미네지로오(滿生峯次郞), 지배인은 미쯔오 타다오(滿生忠雄)이었다. 좌석수는 총 805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사진] 변천좌에서 이름을 바꾼 상생관 ⑤ 국제관(國際館) 부산부 안본정(岸本町)에 위치했던 영화관이다. 1920년 8월 22일 자본금 20만원, 불입금 13만원의 주식회사 국제관에서 설립했다. 대표는 기노시타 모도지로(木下元次郞)이다. 설립 당시 부산지역의 가장 호화로운 극장이었기에 영화상영 외에도 연극장으로 활용되었으며 부산에서 조선영화가 주로 상영되던 곳이다. 1929년 2월 27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고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⑥ 유락관(遊樂館) 부산부 좌천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자본금 15만원, 불입금 37,500원 규모로, 부산흥산주식회사가 1921년 12월 11일 세웠다. 대표는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였다. 1932년 1월 2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지 못했다. ⑦ 태평관(太平館) 부산부 행정 1정목에 있었던 극장으로 1922년 설립되었다. 1923년 부산좌가 소실된 이후 부산의 대표적인 연극전용극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37년 11월 20일 개축되었으나 1943년 11월 19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사진] 부산 태평관 사진 ⑧ 수좌(壽座) 부산부 목도(牧之島, 지금의 영도)에 있던 극장이다. 1924년 목도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극장설립을 추진하여 1924년 3월 6일 덴도(田頭孝一)를 조합장으로 하는 수좌경영조합이 설립했다. 1926년 행관을 경영하던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가 임대하여 제2행관(第二幸館)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1932년 다시 수좌라는 이름으로 복귀 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미가(富賀四郞)이며 객석은 총 341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중앙극장(中央劇場), 대생좌(大生座) 부산부 초량정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1929년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와 가나모리 신기치(金森新吉)가 출원하여 1만 4천3백여원의 공사비를 들여 2층 규모로 만들었다. 같은 해 7월 22일부터 공연을 시작했다. 중앙극장은 당대 유명 사기꾼인 호리가와(堀川辰吉郎)의 사기행각에 말려들어 1934년 경매에 붙여졌으며 상생관 흥행주 미쯔오(滿生峯次郞)가 낙찰 받아 이름을 대생좌(大生座)로 바꾸었다. 이 사건은 원 중앙극장 소유주 가나모리가 소유권 이전 말소 소송에서 승소하며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대생좌라는 이름은 이후에도 계속 사용하였다. 일본인 극장이던 이곳에서는 1939년 5월 극연좌가 공연한 적이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기시타(杉下末次郞)이며 총 498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⑩ 부산극장(釜山劇場) 부산부 서정(西町) 1정목에 있던 극장이다. 1934년 11월 5일 개관했다. 가부키를 공연할 수 있는 대극장으로 건축되었다. 연극전용극장이었지만 가끔씩 영화도 상영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영화관으로 활용되었다. [사진] 부산부 서정 1정목에 위치했던 부산극장 ⑪ 대화극장(大和劇場) 부산부 수정정에 있던 극장이다. 1942년 건립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이조(西條貞利), 지배인은 고야마(小山秀一)이며 객석은 총 55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환서좌(丸西座), 앵관(櫻館) 1910년대 이전부터 마산에 있던 극장으로 각종 연예물과 활동사진이 상연되었다. 1925년 당시 지배인이던 무라카미(村上竹次郞)가 천여원의 비용을 들여 내부와 외부를 수리했다. 1932년 자본금 2만원, 불입금 2만원의 마산연예주식회사가 영화관 신축을 위해 매수하여 1933년 5월 마산 경정 3정목에 앵관이라는 극장을 짓게 된다. 영업은 오오츠카(大塚寅吉)가 맡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미타(住田春三)이며 객석 수는 79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⑬ 도좌(都座), 마산좌(馬山座), 마산극장(馬山劇場) 마산부 도정에 있던 극장이다. 1910년대 설립된 극장으로 보인다. 1918년 활동사진상설관으로 개수되었다. 1922년 무렵까지 영화 상영내역이 확인된다. 이후 마산좌(馬山座)로 개칭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산좌는 1932년 개축하면서 그 이름을 마산극장으로 바꾸었다. 혼다(本田槌五郞)가 건립하였다. 1941년 극장 일부를 수리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혼다(本田槌五郞), 지배인은 혼다(本田宗弘)이었다. 6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⑭ 수좌(壽座), 공락관(共樂館) 수좌는 구마산 지역의 대표적인 극장이다. 1915년 구마산 지역민들이 극장설립을 추진하였으며 1916년 3천원 예산으로 극장을 세우기 위해 주식을 발행하여 조선인 70여명, 일본인 43명으로 주주를 구성하였고 1917년 10월 구마산 지역의 수정에 극장을 설립하고 이름을 수좌라 지었다. 1917년 10월 20일 개관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사용하던 극장이었다. 하지만 1932년 9월 마산경찰서에서는 장내의 협착, 설비의 부패 등을 이유로 휴관을 명령하고 새로운 극장의 신축 출원을 받았다. 그 결과 마산극장 주인인 혼다(本田槌五郞)가 출원한 극장 설립안이 인가 받아 1935년 구마산 석정 64번지에 공락관이라는 영화관이 만들어진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혼다(本田槌五郞), 지배인은 혼다(本田宗弘)이었다. 4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⑮ 봉래좌(蓬萊座) 통영읍 대정정에 있던 극장이다. 1914년 쓰야마(陶山美賀藏)를 중심으로 주식을 발행하여 설립했다. 1931년에는 하시모토(橋本米吉)가 운영하며 영화관으로 활용했다. 1938년 이후 낙후한 상태로 폐쇄되었던 봉래좌는 1939년 신축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하시모토(橋本公博)이며 500석 규모의 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통영좌(統營座) 통영읍 길야정에 있었던 활동사진 상설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27년 다케타(竹田應吉)가 조합장을 맡고 있었으며 1936년 주주간의 분규로 문을 닫았다. 1937년 봉래좌의 운영자 하시모토가 운영을 맡으며 정상화 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무라카미(村上善藏)이며 480석 규모의 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영좌(榮座) 경남 진주의 매립지에 지어진 극장으로 1914년 6월 24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고야나기(小柳藤介) 등 진주의 유지들이었다. 개관 1년 후 경남지역의 유력자인 하자마(迫間房太郞)의 땅에 타구치(谷口秀楠)가 부산 행좌를 이전하여 극장을 새로 짓게 되자 활동을 멈췄다. 1917년 해체되었다. ⑱ 진주좌(晋州座), 진주극장(晋州劇場), 동보영화극장(晋州東寶映畵劇場) 1922년 진주부 영정에 있던 극장이다. 진주좌조합에서 설립했다. 설립 이후 오랫동안 진주의 유일한 흥행장이었다. 1936년 2월 서종숙(徐宗淑)이 인수하여 낙후한 극장을 최신의 영화관으로 개축했다. 1940년 동보영화사의 직영으로 바뀌어 이름도 진주동보영화극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1941년 10월 동보측이 손을 떼면서 서종숙 단독으로 극장을 경영하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서종숙(창씨명 平山宗淑)이며 6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⑲ 삼포관(三浦館) 진주부 금정에 있던 극장이다. 진주의 실업가 미우라(三浦仁八)가 1936년 7월 4일 건립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요시(三吉範夫)이며 객석수는 515석이었다. 해방 후 이름을 동명극장(東明劇場)으로 바꾸었다. ⑳ 진해좌(鎭海座), 묘락좌(妙樂座) 진해좌는 진해읍 국천정(菊川町)에 있던 극장으로 1915년 이전에 설립되었다. 1930년 3월 진해 창고에서 영화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소학생 백여명이 소사한 사건이 발생하자 낙후한 시설의 진해좌는 영업 중지 상태가 되었다. 진해좌의 소유주 데즈카(手塚松一)는 극장을 신축하기로 하고 1만원의 경비로 활동사진관을 건설하게 된다. 새롭게 건설된 활동사진관의 이름은 묘락좌(妙樂座)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데즈카이며 4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이후까지 존속했다. 21. 밀양극장(密陽劇場) 밀양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1928년 11월 16일 가나모리(金森新吉)가 밀양역 앞에 설립했다. 1929년 밀양 성내에 조일극장(朝日劇場)이 설립되면서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22. 조일극장(朝日劇場) 밀양 성내에 건축된 극장이다. 밀양성내동지회에서 세웠으며 1929년 2월 4일 개관했다. 1939년 3월 밀양의 육군기념일 행사가 이곳에서 있었다. 1939년 12월 당시 조일극장의 흥행주 미즈카미(水上至海)가 조일극장 옆에 밀양영화극장을 설립하면서 문을 닫은 듯 보인다. 23. 밀양영화극장(密陽映畫劇場) 밀양 성내에 건축된 영화관이다. 1939년 12월 밀양 조일극장의 흥행주 미즈카미(水上至海)가 세웠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즈카미(水上至海)이며 2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4. 삼천포극장(三千浦劇場) 삼천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9년 사천군 육군기념일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 것으로 보아 1939년 이전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시라가와(白川晃)이며, 275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5. 구포극장(龜浦劇場) 구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필름손실방지와 사고방지를 위해 전국의 영사기를 조사했을 당시 한 대의 영사기로 영사하여 배급정지처분을 받았다. 당시 흥행주는 하라구치(原口淸見)였다. 293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6. 김해극장(金海劇場) 김해읍 대화정에 있던 극장이다. 1929년 김무일(金武日)과 배봉을(裵鳳乙)이 약 8천원의 공사비로 제작하였다. 건평 51평 2층 규모로 9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케시(武伺吉恒)이며 46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옛 창고를 연상하는 낙후된 시설이었다. 27. 거창좌(居昌座) 거창읍에 있었으며 언제, 누가 세웠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전상길(全相吉, 창씨명 酒井相吉)이다. 그는 양조장 등을 거느린 거창지역의 대표적인 실업인이었다. 지배인은 타마야마(玉山榮秀)이며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8. 울산극장(蔚山劇場) 울산읍 성남동에 있던 극장이다. 1920년대 만들어진 낡은 극장이 울산 역전에 있었는데, 당지 유지들인 김재문 외 5인의 발기로 1936년 현대식 건물로 신축이 추진되었다. 군에서는 1만 5천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극장을 공회당의 성격으로 활용하려 했다. 1937년 9월 1일 낙성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시라이(白井叶), 지배인은 니시가와(西川康南)였다. 객석은 7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29. 사천극장(泗川劇塲), 국민좌(國民座) 경상남도 사천읍 내에 있는 극장으로 고바야시(小林齊吉)가 1만원의 예산으로 지었다. 1938년 9월 12일 개관했으며 외관은 2층 양옥 모양이었다. 이곳에서는 1939년 방공영화상영회 등이 열렸다. 1940년대 이름을 국민좌(國民座)로 바꾼 듯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달오(창씨명 金村達五)이며 객석은 300석이었다. * [사진](상단) 부산부 행정에 위치했던 보래관 [자료] 《매일신보》, 1930.03.01. 중앙극장 신축낙성(洛城), 근일 개관할 터 【부산】 작년 오월 일일 고(故) 대지충조(大池忠助)씨와 밀양 금삼신길(金森新吉)씨가 출원한 부산 초량정 중앙극장은 동년 십일월 이십일일 경비 일만 사천삼백삼십사원으로 공사에 착수하여 신축 중이든 바 일전에 준공되었음으로 당국의 검사가 맛치는데로 근간 개관하리라더라. [자료] 《매일신보》, 1937.07.10. 신축 울산극장, 삼십일경 준공 【울산】 신축 중의 울산극장은 삼십일경 준공케 되야 당일 성대한 낙성식이 잇스리라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41.03.23. 방어진(方魚津)극장 전소(全燒) 【부산지사전화】 이십이일 오전 일시경 경남 방어진읍(方魚津邑) 방어진극장으로부터 불이 일어나 목조 극장 한 채를 전소하고 동 이시 반에 진화되었다. 손해는 5만원이고 원인은 전날 밤 객석에서 사용한 화롯불 건사를 잘못하야 화로로부터 이러난 것으로 판명되엇다. [자료] 《동아일보》, 1929.03.22. 김해에 극장, 불원간(不遠間) 준공(竣工) 경남 김해군에는 아즉 극장설비가 무(無)하야 매양 차종(此種)의 집회가 유(有)한 시(時)는 곤란을 만히 당하야 옴으로 이에 향의(向意)한 당지 청부업자 배봉을(裵鳳乙)군은 읍내 서문통에다 극장 신축을 벌서 수월 전부터 착수하야 공사에 착착 진행하얏슴으로 금후 일주간이면 준공하야 도당국의 검사(檢査)를 경(經)한 후 일반 사용에 제공하겟다하며 건평은 오십일평임으로 이층 합하면 약 구백명의 수용을 행(行)할지며 총공비(總工費)는 팔천원을 요(要)하얏다더라. 【김해】 [자료] 《동아일보》, 1935.08.19. 구(舊)마산에 극장 【마산】 문제 중에 잇든 구마산의 극장 신축의 건에 대하야 오래전부터 부민의 관심을 끌어오든 바 요지음 와서 부내 도정(都町) 팔번지 본전퇴오랑(本田槌五郞)씨에게 극장 신축 인가가 낫다고 한다. 장소는 석정(石町) 육십사번지 전(前) 마산구락부(俱樂部) 폐터라는 바 건평 백이십평에 방화식 대용(防火式 代用) 콩크리트 이층 총공비 지료 합하여 일만 오천원이라 하며 내부는 역시 일본식으로 다다미를 깔고 이층에는 긱연실(喫煙室)까지 설치하리라는데 공사는 오는 이십일에 착수하여 십일월 하순경에 준공하리라고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7.09.07. 울산극장 준공 【울산】 약진하는 울산으로 우금 극장 한 개가 없엇음을 한탄한 당지 유지로 극장조합을 조직하야 금춘 이래 구역전(舊驛前)에다 총공비 이만여원으로 공사에 착수 진행중에 잇던 바 드디어 금번 준공되어 지난 1일 신극장 내에서 관민 다수를 초대하야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는 바 신설된 극장은 내외관 설비가 완전하야 『토-키』 발성기게 등도 대도시 일류 극장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하며 외관에 잇어서도 명랑한 맛이 잇는 모던 건물이라고 한다. (사진은 울산극장) [자료] 《동아일보》, 1937.06.30. 의령(宜寧) 공회당 착공 【의령】 경남 의녕에서는 일정한 공중의 집회장소와 또는 극장 등속이 없음을 일반이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고 오든 중 작년 가을부터 임(林) 의녕군수의 주선 하에 유지 이명후, 이태희, 이종덕(李明厚, 李泰羲, 李鍾德) 삼씨의 의연금이 모집되어 공사비 오천원으로 의녕 신시장통에 의령공회당을 건축케 되어 멀지 안흔 시일에 준공이 되리라는데 해 공회당이 준공되면 의녕 발전에 한층 더 이채를 증가하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0.02.05. 밀양성내(城內) 소화(小火) 【밀양】 밀양군 성내 조일극장(密陽郡 城內 朝日劇場) 압 밀양은행 소유 가옥에 잇는 박경모(朴景某)씨의 소실 장씨(張氏)의 부억에서 지난 초이일 오후 열시경에 불이 나서 집 처마위로 타올라가는 것을 그 이웃에서 풍물을 치고 놀든 사십여명이 달려들어 즉시 진화시키엇다는데 그 원인을 듯건대 어린 아이를 시키어 군불을 ᄯᅢ다가 그와 가티 실화된 것이라 한다.
2018년 사사로운 리스트 슬럼프가 왔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영화들을 봤지만 감흥이 느껴지는 영화가 드물었다. 머리로는 얼마나 좋은 영화인지 알겠는데, 심지어 영화를 보면서 울컥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영화들은 마음에 남지 않고 사라졌다. 그래서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를 만들기 위해 한 해 동안 보았던 수많은 영화들의 제목을 살펴보면서 막막해졌다. 그러다가 간신히 추려낸 약 20여 편의 리스트에서 한국에서 정식으로 볼 수 없는 영화, 이미 많이 봤을 법한 영화, 다른 분들이 언급할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들을 하나씩 빼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올해 이 사사로운 리스트는 말하자면, 개인적인 올해의 영화 리스트라기보다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을 위한 특별한 추천작 목록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델마 먼저 < 델마 Thelma>(2017), 요아킴 트리에는 우울과 불안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고 깊이 있게 다루지만 이것을 주인공의 성장 서사를 위해 소비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영화 언어로 자기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몇 안 되는 동시대 감독 중 하나다. 어떤 장르의 외투를 둘러도 그의 영화의 중심에는 인물의 내면이 있다. 따라서 그의 모든 영화는 본질적으로 심리 드라마다. 초능력 소녀가 주인공인 평범한 스릴러 공포 영화일 수도 있었던 요하킴 트리에의 네 번째 장편영화 <델마>가 특별했던 건 이 때문이다. 어려움을 겪는 주인공을 다루는 모든 영화는 기본적으로 성장영화다. 성장 드라마가 주는 진짜 감동은 주인공이 겪는 고난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어느 순간 영화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때 찾아온다. 좋은 성장영화에는 항상 이런 영화적 순간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클레오 자오의 두 번째 장편영화 < 로데오 카우보이 The rider >(2017)와 앤드류 헤이의 네 번째 장편영화 < 린 온 피트Lean on pete >(2017)은 웨스턴 무비와 로드무비라는 각기 다른 영화적 틀을 빌려왔고, 두 감독의 나이도 성별도 문화적 배경도 다르지만 서로 닮은 구석이 많은 꽤 괜찮은 성장영화들이다. 살다 보면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힌다.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누군가는 견딜 수 있지 않으냐고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그 고통스러운 현실의 깊이를 판단할 수 없다. 영화가 이런 현실에 처한 주인공을 다룰 때 취하는 두 가지 대표적인 방법은 현실에 대한 설명을 아예 생략하고 현재만을 보여주거나 관객에게 고스란히 현실의 고통을 체험케 하는 것이다. 데브라 그래닉의 < 흔적 없는 삶Leave no trace >(2018)이 전자의 경우라면 자비에르 르그낭의 < 아직 끝나지 않았다Custody >(2017)는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이야기나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이 특별하진 않지만,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올해 국내에서 개봉한 대표적인 해외 전기 다큐멘터리는 < 맥퀸Mcqueen >(2018)과 < 휘트니Whitney >(2018)였다. 두 영화 모두 재미있게 봤지만 새롭진 않았다. 그럼에도 <휘트니>에 더 관심이 갔던 건 인터뷰 장면에서 감지되는 긴장 때문이었다. <맥퀸>의 인터뷰는 매우 신중했고, <휘트니> 속 인터뷰는 종종 공격적인 동시에 방어적이었다. 두 영화 모두 유명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지만 <맥퀸>에 비해 <휘트니>가 상대적으로 영화가 다루는 인물의 깊숙한 내면과 뒷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던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인터뷰어의 태도와 질문,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에 만들어진 긴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반면 EBS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18분짜리 단편 다큐멘터리 < 레노와 엔젤피쉬Lenno and the angelfish >(2017)는 현실을 재구성해내는 스토리텔링과 영화적인 편집이 인상적이었다. 올해 여러 가지 이유로 상당히 많은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지만,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행동장애를 가지고 있는 10살의 남자아이의 내면과 일상의 긴장을 이 정도로 밀도 있고 생생하면서도 깔끔하게 담아낸 다큐멘터리를 적어도 올해에는 본 기억이 없다. 넷플릭스가 코엔 형제의 < 카우보이의 노래The ballad of buster scruggs >,(2018) 폴 그린그래스의 < 7월 22일 22 July >(2018), 알폰소 쿠아론의 < 로마Roma >(2018)를 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오손 웰스의 미완성 유작 < 바람의 저편The other side of the wind >(2018)이 넷플릭스를 통해 완성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문득 앞으로 예술영화도 결국 더 큰 욕망을 가진 자본으로 지속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40여 년이 지났어도 모던함을 잃지 않은 오손 웰스의 세련된 영화적 감각에 감탄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어떤 투자사도 수익을 보고는 감히 투자하지 못했을 이 영화에 돈을 댄 넷플릭스의 욕망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마지막으로 올해 리스트의 유일한 한국영화인 김보라 감독의 < 벌새 >(2018)는, 맥락은 다를 수 있겠지만, 68년 프랑스의 신좌파로부터 시작되어 최근 페미니즘 논쟁에서 종종 회자되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는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벌새>가 정치적인 영화라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영화가 되려는 욕망 없이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로 한 시대를 온전히 담아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영화를 또는 다큐멘터리를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현실을 담아내는 도구로 활용하곤 하는 최근 독립영화의 어떤 경향 속에 튀어나온 이 영화가 그래서 무척 반가웠다. 올해 사사로운 리스트에 언급한 10편의 영화 중 8편은 네이버, EBS D-Box, 넷플릭스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정식으로 볼 수 있고, 영화제에서만 공개되었던 <벌새>는 멀지 않아 극장에서 개봉할 것이다. 혹시 언급된 영화에 관심이 생긴 분들은 찾아보면 좋겠다. 이제부턴 올해 리스트에 있는 영화들 중 유일하게 특별한 기회가 오지 않으면 다시 볼 수 없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고도 그 흔한 감상평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그러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이번 기회를 빌려 꼭 소개하고 싶은 잉량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 가족 여행A family tour >(2018)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영화가 바꾼 삶 2012년 4월, 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를 1주일쯤 앞두었던 어느 날이었다. 영화제 준비로 어수선한 사무국에 동네 아저씨 같은 차림을 한 까무잡잡한 얼굴의 한 남자가 찾아왔다. 이름도 말하지 않고 연변에서 온 사업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사람은 ‘상하이에 있는 자신이 아는 사업가가 중국의 잉량 감독이 완성한 영화의 판권을 사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는 영화 제목은 물론이고, 영화의 내용도 잘 모르는 듯했다. 영화를 사면 영화제에서 상영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물었고 자신은 중국 정부가 보내서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연히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잉량 감독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잉량 감독 2012년 당시 잉량 감독은 장 위엔, 왕 샤오수와이, 지아 장커 등으로 대표되는 중국 6세대 감독 이후 국제 영화계에 등장한 중국의 대표적인 신진 독립영화감독 중 하나였다. 1977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는 상하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베이징사범대학 예술학과와 중경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방송국에서 조연출 생활을 했지만 그에게 방송국은 창작할 여지가 없는 상업적인 공간일 뿐이었다. 1999년부터 틈틈이 매년 2편 정도의 단편영화를 만들어왔던 그는 2003년에 단편영화 <잃어버린 집 Missing Home>을 완성하여 홍콩국제단편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독립영화감독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영화사 ‘90분’을 설립했다. 이후 2005년, 3만 위안(한화 500여만 원)의 제작비로 장편 데뷔작 < 아버지를 찾아서 Taking Father Home >를 완성했다. 이 영화는 도쿄필름엑스, 샌프란시스코, 런던, 밴쿠버 등 전 세계 영화제에 상영되었고 여러 개의 상을 수상했다. 그는 단번에 주목받는 중국의 독립영화감독이 되었다. 이듬해 그동안 받은 상금과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후벌트 발스 펀드의 지원으로 2006년 두 번째 장편영화 < 다른 반쪽 The Other Half >을 완성했다. 이 영화 역시 호평을 받으며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우석상을, 도쿄 필름엑스에서는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세 번째 장편영화 < 호묘 Good Cats >를 완성했고, 이후 세 편의 단편영화를 연달아 연출했다. 그중 버스가 강으로 추락한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이야기를 한 개의 쇼트로 담아낸 단편영화 < 위문 Condolences >(2009)은 로테르담영화제 단편부문 대상(타이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5년 데뷔작을 완성한 후 2011년까지 그는 총 3편의 장편영화와 4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했다. 그의 모든 영화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들을 결합하여 중국의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며 비판해왔다. 이러한 그의 영화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도시의 주변부를 부유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어려운 일상과 복잡한 심리를 담아내고 결국 중국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했던 중국의 6세대 감독들의 강력한 자장 안에 있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는 6세대 영화감독, 특히 지하전영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의 지아 장커의 영화적 자산을 독창적으로 계승한 거의 유일한 중국 감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영화들은 선배들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먼저 상영되었고 주목받았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그런 그가 중국에서 독립영화를 만드는 일은 당연히 쉬운 일 일리 없었다. 2008년 이후 그가 단편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건 이런 현실적인 이유가 컸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전주국제영화제는 1회 영화제부터 세 명의 감독을 선정해 5천만 원의 제작비를 지원하여 세 편의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단편영화 제작 프로젝트 ‘디지털 삼인삼색’을 운영해왔다. 당시 전주국제영화제는 매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대륙별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2012년 디지털 삼인삼색의 기회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었던 아시아의 젊은 감독 3인에게 돌아갔다. 필리핀의 라야 마틴, 스리랑카의 비묵티 자야순다라, 그리고 중국의 잉량이 그 주인공이었다. 5천만 원의 제작비는 유럽 감독들에게는 단편영화를 만들기에도 적당한 돈이 아니었지만, 아시아의 젊은 감독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잉량과 라야 마틴은 5천만 원의 제작비로 각각 장편영화를 완성했다. 잉량 감독이 4번째 장편영화를 위해 선택한 이야기는 2008년 상하이에서 여섯 명의 경찰이 살해된 실제 사건이었다. 이후 중국 사법제도 개혁의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진 이 사건에서 중국 정부는 재판을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 경찰을 살해한 범인의 어머니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어머니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은 채 판결 후 7일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영화는 범인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탄원서를 쓰고 노력하는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내면서 어머니의 시선을 통해 중국의 이러한 독단적이고 불합리한 사법제도를 날카롭지만 은유적으로 비판했다. 제작 당시만 해도 아무도 몰랐던 이 영화는 완성될 무렵 그 존재가 알려졌고, 실제 영화의 내용과 관계없이 소재만으로 중국 정부의 심기를 자극했다. 잉량 감독을 통해 나중에야 들었지만, 그가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압박은 단순한 압력이 아니라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내가 만났던 연변 사업가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중국 정부와 상하이 공안은 2012년 2월부터 전주국제영화제가 개최되었던 5월까지 약 4달간 감독에게는 물론이고 중국의 여러 도시에 있는 감독과 아내의 부모와 지인을 수십 차례 찾아가 다양한 방법으로 재편집과 상영 취소, 영화 폐기를 강하게 요구했다. 말이 요구였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회유와 압박을 거부하고 영화 상영을 강행했다. 돌이켜보면 영화의 판권은 영화제가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감독이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영화제 측에 상영 취소나 영화 폐기를 요청했다면 영화제는 이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이 영화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이 문제에 관해 망설이는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 이렇게 온갖 어려움을 뚫고 세상에 공개된 <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 When Night Falls >(2012)은 그의 전체 필모 중 최고의 영화라고 할 만큼 좋은 영화였다. 그는 이 영화에 그동안 축적해온 영화적 자산과 재능을 온전히 쏟아부었고 부조리한 현실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만의 영화적 감각과 리듬으로 재구성해냈다. ‘다큐멘터리적인 영화’ 또는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영화’라는 평가를 받으며 영화와 현실의 경계에서 쌓아 올려왔던 그의 영화 세계는 그렇게 완성된 모습을 드러냈다. 첫 상영 이후 곧바로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국제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함께 수상했다. 그리고 전 세계 수많은 영화제에 초청받았다. 2012년 말에는 미국 영화 전문지 필름코멘트가 선정한 미국 미개봉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 네 번째로 그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전주국제영화제 이후 다시는 자신이 태어난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영화 한 편은 이렇게 한 영화감독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삶은 다시 영화가 되다 홍콩에서 가족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는 홍콩 영화 아카데미 등에서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치고 태어난 아이를 돌보며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2016년 로테르담국제영화제가 로테르담 도시 재건 75주년을 맞아 기획한 ‘재건의 시작 This Is Where Reconstruction Stars’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단편영화 < 9월 28일, 맑음 A Sunny Day >를 완성했다. 홍콩 행정장관 선거의 완전 직선제를 요구하며 79일간 이어진 민주화 시위 ‘우산 혁명’이 시작된 첫날, 2014년 9월 28일 오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시위에 참여하기 전에 오랜만에 아버지 집을 방문한 딸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성찰케 하는 따뜻한 가족 드라마다. 그러나 잉량 감독은 ‘시위에 참여하려는 딸’이라는 설정과 TV 뉴스, 라디오, 휴대폰 등을 활용하여 당시 홍콩의 첨예했던 현실을 영화에 끌어들이며 영화에 자신의 인장을 새겨 넣었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감동을 끌어낼 수 있는 가족 이야기는 이렇게 그의 손을 거치면서 당시 홍콩의 현실을 은유하는 사회 드라마로 확장, 변화되었다. 그는 그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도, 중국의 외교 정책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예민한 소재인 ‘우산 혁명’의 순간을 자기만의 시선으로 담아내며 자신의 영화가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지난 6년간의 자신의 실제 삶을 토대로 한 다섯 번째 장편영화 <가족 여행>을 완성했다. 2018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국제경쟁 부문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된 이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영화를 만든 후 5년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홍콩에서 살고 있는 중국의 여성 영화감독 양수다. 양수는 홍콩 국적의 남편과 4살이 된 아들과 살면서 차기작을 준비하던 중 대만의 가오슝에서 열리는 한 영화제에 초청받게 되자, 남편의 도움을 받아 대만에서 5년 만에 엄마와 다시 만나기로 한다. 중국의 단체 여행객 틈에 섞여 대만에 온, 그러나 곧 큰 수술을 앞두고 쇠약해진 엄마와 오랜만에 재회한 양수는 서로 떨어져 살았던 시간을 절감하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낸다. 사실 <가족 여행>은 2017년 대만의 가오슝 필름 펀드의 지원을 받아 완성한 흑백 단편영화 < 엄마의 고백 I Have Nothing To Say >과 한 쌍인 영화다. 장편과 단편 시나리오 작업도 동시에 진행되었고, 촬영도 마찬가지였다. 두 영화 모두 양수와 엄마의 재회를 다루지만 <가족 여행>이 딸인 양수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화인 반면, <엄마의 고백>은 같은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겪은 엄마의 여정을 엄마의 독백으로 담아낸 영화다. <가족 여행>에서 오랜만에 만난 모녀는 애틋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자주 소소하게 다툰다. 양수는 양수대로 지난 5년간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혼자 사는 나이 든 엄마는 엄마대로 딸 때문에 중국 정부로부터 어지간히 시달리며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고, 매일 안부를 주고받으며 영상통화를 했지만 그건 한 공간에서 일상을 부대끼며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기 때문이며, 자신의 상황을 헤쳐나가기에도 바빴던 무뚝뚝한 딸은 엄마와의 소통을 남편에게 미뤄두었고, 엄마는 딸의 상황을 헤아려 자신이 겪어야 했던 모든 것들을 말하지 않았기, 아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 짧은 만남은 오랫동안 떨어져 살면서 소원해진 엄마와 딸이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복원해가는 시간임과 동시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각자의 사랑의 방식을 확인하고 이해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오랜만에 만난 모녀가 서로 얼싸안고, 반가워하고, 소리 내어 웃거나 우는 장면 따윈 없다. 그저 담담하게, 하지만 아주 세심하게 두 인물의 복잡한 감정과 심리를 포착하면서 그들의 여정을 따라갈 뿐이다. 영화에 이렇게 밀도 높은 인물의 감정이 담길 수 있었던 건 감독을 포함한 세 명의 작가가 신중하고 꼼꼼하게 쓴 시나리오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주연 배우들의 공이 크다. 양수를 연기한 공저(Gong Zhe)는 전문 배우는 아니었지만 매일 양수 입장에서 일기를 쓰며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면서 이방인의 정체성을 절감하며 살아가는 한 영화감독의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한다. (그의 일기는 나중에 정리되어 영화에 담겼다.)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2012)에서 살인자의 어머니 역을 맡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오랫동안 로우 예 감독 영화의 프로듀서를 맡아온 베테랑 배우 나이 안 Nai Ahn은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엄마 역을 맡았지만 그야말로 원숙한 연기력으로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하는 딸을 둔 엄마의 심정을 사실적으로 연기해낸다. 말레이시아 독립영화에서 주로 악역을 소화했던 테오 펫(Teo Pete)는 고집 센 양수의 곁을 지키는 이해심 많은 남편 역을 맡아 이야기의 한 축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잉량 감독은 세 배우의 연기 앙상블을 통해 자칫 너무 감상적이거나, 너무 무거울 수 있는 영화의 톤을 적절한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가족 여행>은 기본적으로 픽션이다. 잉량은 자신의 개인사와 분리시킬 수 없는 이 영화를 더욱 픽션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리고 영화와의 거리를 두기 위해 처음에 남성이었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꾸었고, 대만에서 가족을 만난다는 설정도 자신의 경험이 아닌, 3명의 작가 중 한 명이자 영화에서 중국 단체 관광객의 인솔자로 출연한 배우이기도 한 아내 펭샨의 경험에서 빌려왔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양수와 엄마가 겪은 에피소드들은 지난 6년간의 자신의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가져온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이 영화에는 2012년 이후 만든 그의 모든 영화들이 호명되는데, 양수가 만든 정부 비판 영화는 제목을 바꾸고, 다시 찍은 장면을 썼지만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과 같은 영화이고, 양수가 만들고자 하는 차기작은 장편영화이긴 하지만 <9월 28일, 맑음>과 같은 영화다. <가족 여행>에서 차기작을 위한 오디션을 보는 장면에 등장하는 배우는 <9월 28일, 맑음>에서 실제 아버지 역을 맡았던 배우다. 따라서 <가족여행>은 픽션영화이긴 하지만 2012년 이후 잉량 감독의 인생과 그가 만든 영화들의 총합인 동시에, 잉량 감독의 영화 인생에 있어 중간 결산과도 같은 논픽션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9월 28일, 맑음 잉량 감독은 2012년까지 최소의 예산으로, 자신이 주도하는 최소한의 제작팀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동안 그는 말 그대로 중국의 독립영화감독이었다. 중국의 독립영화는 단순히 자본과 영화의 내용으로 규정되기보다 일반적으로 ‘검열의 유무’로 규정되어 왔다. 잉량도 마찬가지였지만 중국의 많은 독립영화감독들이 해외의 국제영화제들을 주 무대로 활동했던 것은 이 검열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시진핑이 국가 주석으로 선출되었던 2013년 전후로 검열받지 않은 영화의 제작과 상영을 강하게 규제했다. 중국독립영화를 의미하는 ‘지하전영’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 시기도, 2006년 시작된 중국의 대표적인 독립영화제였던 베이징독립영화제가 2012년과 2014년 사이 중국 공안의 방해로 열리지 못하기 시작한 시기도 이 시기와 오버랩된다. 이제 중국에는 정부의 승인 없이 만들어지는 영화도, 개최되는 독립영화제도 공식적으론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의 독립영화를 매핑하기에는 본 영화의 숫자가 적어서 정확하게 말할 순 없겠지만, 그리고 왕빙을 비롯한 몇몇 감독들이 영화가 아닌 다른 분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며 여전히 활동하고 있긴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잉량 감독의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은 우리가 알고 있던 중국 독립영화의 생명이 다할 무렵 만들어진 마지막 중국 독립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가족 여행>은 잉량이 중국에서 만들었던 장편영화들과 완전히 다른 영화다. 여전히 적은 예산으로 제작되었지만 이번 영화는 처음으로 투자의 과정을 통해 제작비를 확보했고, 여러 분야의 전문 스텝이 참여했다. 일반적인 영화제작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 전작에 비해 영화 곳곳에서 훨씬 더 세심하게 공을 들이고 신경 쓴 흔적들이 많이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족 여행>은 중국이 아닌 홍콩에서 만든 첫 장편 영화다. 비록 홍콩이 중국의 특별자치구이긴 하지만 영화의 제작 국가는 중국이 아니라 홍콩이고, 그는 이제 중국 독립영화감독이 아니라 홍콩의 독립영화감독이 되었다. 영화 속에서 양수를 이해하고 온 힘을 다해 아내를 지키는 남편이 홍콩 사람인 건 잉량 감독에게 홍콩이라는 제2의 고향이 가진 의미의 표현일 것이다. 또한 대만을 배경을 한 이번 영화에서도 변함없이 대만의 가장 예민한 정치적 이슈인 ‘양안 문제’를 택시 기사와 TV 뉴스를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영화에 끌어들이고, 양수가 3명의 투자자가 실종되는 사건을 겪으면서도 홍콩의 가장 예민한 정치적 이슈인 ‘우산혁명’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기어이 영화에 넣어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의 진로가 여전히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의 이번 영화가 소재와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분명히 2012년 이전보다 훨씬 다듬어졌고, 세련되어졌으며, 이른바 ‘다큐멘터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전 영화들에 비해 훨씬 더 극영화스러워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족 여행>은 잉량 감독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영화의 영역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건 선택하지 않은 걸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다. 잉량 감독은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했고, 지금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자주 지금의 삶이 괜찮다고 말하지만, 그의 복잡한 심정은 영화의 한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의 마지막, 양수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자신의 영화를 아이와 함께 다시 보기 위해 극장에 들어가기 직전, 기자가 묻는다. “당신은 홍콩 사람입니까? 중국 사람입니까?” 그는 대답한다. “나는 이방인입니다.” 망설임 없이 답변하는 양수 뒤편으로 자신과 자신의 영화를 초청해준 영화제의 포스터가 보인다. 그 포스터의 중앙에는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쓰여있다. ‘어떤 사람도 아웃사이더로 계속 살 순 없다. No One Can Stay an Outsider.’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량 감독이 견뎌낸 지난 6년 동안의 인생의 결산과도 같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바친다고 말하며 끝난 <가족 여행>이 반갑고 감동적이었던 것은, 이 영화가 잉량 감독이 앞으로 다시 한 발짝 전진할 수 있을 기회가 되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들 저런 인생을 살았다면 한 번쯤은 진지하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갖고 싶을 것이다. 잉량 감독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영화로 인생의 한 챕터를 정리해냈다. 영화가 바꾸어 놓은 삶은 다시 이렇게 영화가 되었다. 그는 이제 과거와는 다른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언제나 그의 삶을 응원하면서 다음 영화를 기다릴 것이다. (보태기)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영화 웹진 리버스의 요청을 받아 <가족여행>의 상영을 위해 부산을 방문한 잉량 감독과 인터뷰를 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이 인터뷰를 살펴봐도 좋겠다. ( http://www.reversemedia.co.kr/article/89 )
연일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올여름은 1994년의 더위를 넘어설 것이라는 뉴스도 전해진다. 피서 방법과 피서지 추천 또한 다양한 뉴스를 통해 전달된다.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최우선으로 꼽히는 피서지는 바다이다.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뉴스는 전국 각지의 해수욕장 개장 소식이다. 1950~1960년대 초반 TV 방송이 활성화되기 전 ‘해수욕장 개장’ 같은 생활뉴스는 극장이나 이동 상영에서 볼 수 있는 정부의 <대한뉴스>나 미 공보원의 <리버티뉴스>를 통해 전해졌다. 주 단위로 발행되는 뉴스인지라 지금에 비하면 신속성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볼 수 있다. <대한뉴스>와 <리버티뉴스>는 정치‧사회 뉴스를 중심으로 공보선전에 치중했기 때문에 생활뉴스는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을 차지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철 무더위 소식과 피서지 풍경은 매해 단골로 등장하는 인기 뉴스였다. 이 뉴스들은 주로 바다와 강, 계곡에서 더위를 피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1분여의 짧은 시간 동안 단조롭게 스케치하는 것이 전부지만, 피서지 풍경은 서울 중심이 아닌 전국 각 지역의 다양한 풍경을 살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영상이다. 다음의 뉴스들에서 1950~1960년대 전국 각지의 피서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소개할 영상은 1956년 <리버티뉴스 제169호>에 등장하는 대구 동촌유원지의 모습이다. 이 영상에서는 1950년대 사진작가들의 도시로 유명했던 대구답게 아마추어 사진대회가 열리는 모습과 더위를 피해 보트 놀이를 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여름철을 맞는 대구 시민들의 아름답고 서늘한 놀이터”로 소개되는 1956년의 동촌유원지와 현재의 동촌유원지를 비교하면 더욱 흥미로울 영상이다. 1956년 여름 대구 동촌유원지의 모습: 아마추어 사진대회 1956년 여름 대구 동촌유원지의 모습: 보트를 타는 사람들 1956년 여름 대구 동촌유원지 전경 두 번째로 소개할 영상은 1957년 <대한뉴스 제127호>에 실린 <성하(盛夏)의 메모>로 한여름 더위를 피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름철 과일을 사고파는 사람들과 계곡, 강,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흑백 영상이나마 시원한 여름나기 모습을 전달하고자 하는 뉴스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1957년 여름: 과일 좌판 앞의 상인과 시민 1957년 여름: 야외 간이수영장 세 번째로 소개할 영상은 1960년 <대한뉴스 제274호>의 ‘어린이 풀 개장’ 소식이다. 1960년 서울시는 장충, 탑동, 인현, 사직, 묵정, 삼청, 영등포 등 7개 공원에 어린이 수영장을 마련해 초등학교 여름방학 시작과 함께 개장했다. 개장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였으며, 입장료는 초등학생 기준 두 시간 이용에 30환이었다. 1) 당시 국숫값이 30환, 재개봉관의 입장료가 150~250환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입장료는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다. 서울 시내 각지에 대대적으로 어린이 전용 수영장을 개장한 것은 이 시기 어린이의 여가활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상에서는 현재 충무로5가에 위치한 묵정 어린이 공원의 과거 모습인 ‘묵정 어린이 풀’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 여름: 묵정공원 어린이수영장 네 번째로 소개할 영상은 1961년 <대한뉴스 제325호>에 실린 <더위 95도 2분>이다. 섭씨 34도를 넘는 최절정의 폭염을 알리는 제목으로 이 영상이 여름철 주요 소재인 피서지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해수욕장과 피서객의 모습을 스케치한 영상이지만 이 뉴스를 선택한 것은 현재는 없어진 인천 송도해수욕장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인천 송도해수욕장은 한국전쟁 후 유엔군 전용으로 운영되다가 1958년 징발 조처가 해제되었지만, 복구공사와 권리자의 내분 등을 이유로 개방되지 않다가 1961년 임시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운영은 송도유원지로 이름을 바꾼 1963년 이후 이루어졌다. 영상에서는 전쟁 후 처음으로 대중에게 개방된 인천 송도해수욕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61년 여름: 인천 송도해수욕장 마지막으로 소개할 영상은 1964년 <리버티뉴스 제574호>와 1965년 <리버티뉴스 제629호>의 해수욕장 풍경이다. 두 영상 모두 부산 송도해수욕장의 모습을 담고 있다. 부산 송도해수욕장은 해운대해수욕장, 대천해수욕장과 함께 피서지 소식에 단골로 등장하는 해수욕장이었다. 두 영상 모두 송도해수욕장의 전경과 더불어 1964년부터 운행을 시작해 부산의 명물로 이름을 날린 한국 최초의 해상케이블카와 1927년 설치돼 수많은 피서객의 사랑을 받았던 해상다이빙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케이블카, 다이빙대와 더불어 피서객들로 빽빽한 해수욕장은 이 시기 피서지를 상징하는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상다이빙대는 1987년 태풍 셀마로 철거되었다가 2013년에, 케이블카는 1988년 운행 중단되었다가 2017년에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2 ) 영상을 통해 송도해수욕장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리고 무더위가 이어질 2018년 피서지는 어떤 모습으로 기록될지 상상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가 될 것이다. 1964~1965년 부산 송도해수욕장 전경 1964년 여름: 부산 송도해수욕장의 해상다이빙대 1964년 여름: 부산 송도해수욕장의 해상케이블카 2018년 현재: 복원된 부산 송도해수욕장의 해상케이블카 1) 『경향신문』, 1960년 7월 22일자 2) 『연합뉴스』, 2013년 7월 7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