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속
- 감독
- 장윤현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한석규, 추상미, 김태우, 박용수, 강민아, 박수영, 강정식, 최철호, 손민석, 이주석, 배정길, 김진욱, 김연교, 이호영, 전영, 이범수, 김민경, 박경희, 유정아, Michael Fitzgerald, 이장욱, 표제가, 신순식, 배장수, 전도연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1. 2013년, 영화진흥위원회가 홍릉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30여 년간 운영해오던 필름 현상 업무를 종료했다. 이를 끝으로 국내의 모든 필름 현상소가 문을 닫게 되었고, 사실상 한국의 상업적 필름 관련 산업 대부분도 정리되었다. 이제 무비 필름을 현상하고 프린팅 하려면 해외로 보내야만, 무질서하게 흩어진 필름의 은입자를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필름이라는 매체의 물성을 점점 더 멀리 밀어내고, 디지털 이미지의 매끈하고 평평한 표면만을 우리의 시각 경험 중심에 남겼다. 미디어의 발전은 흔히 필름에서 비디오, 그리고 디지털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궤적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비디오와 디지털을 먼저 접한 뒤 필름을 경험한 내 입장에서, 적어도 필름은 과거의 매체가 아니라 디지털 이후 새롭게 등장한 ‘뉴미디어’였다. 그러나 내가 필름이라는 매체를 알게 되었을 때, 이 ‘뉴미디어’는 이미 영화산업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있었다. 사물의 가치가 경제적 효용성과 합리성을 통해 판단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름은 디지털 매체의 편리성과 효율성에 밀려 점차 추방되었던 것이다. 나조차도 효용의 관점에서 퇴보한 기술로 여겨졌던 이 사물을 직접 다뤄 보기 전까지는 필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흔히 필름은 그저 과거의 감성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소비되거나, 디지털과 이분화된 대립 속에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지금의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이 사라진 매체를 추억할 기억도, 향수에 젖을 과거도 없다. 이들은 단순히 필름과 디지털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두 매체가 발생시키는 관계 를 통해 필름을 이해하고, 다룬다. 오히려 이런 관계가 미디어가 하는 일을 더 잘 알 수 있게 하며, 선형적 시간성에 대한 기성의 인식을 갱신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과 마주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투명한 감각>(2022) 독일 하메른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의 뒷이야기를 다룬 <투명한 감각>(2022)은 이와 같은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필름 애호가들의 실천을 사라진 친구를 기억해 내기 위한 세 사람의 분투로 알레고리화한다. 카메라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남겨진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간다. 다리를 저는 아이,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아이. 이 세 아이는 피리 소리를 쫓아 사라져 버린 친구들이 남기고 간 사물들을 매개로 그들을 기억해 낸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조각을 덧대고 연결해가면서 서사를 작동시키고자 하는데, 이들이 재연해 낸 서사는 사라진 친구들의 시간을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지금 공동의 증언을 통해 새로이 구성되는 것이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 시대에 여전히 필름으로 작업하는 이들의 창작하는 방식에 관한 은유로, 이들은 더 이상 산업적으로 생산되지 않는 장비와 장치를 3D 프린트를 이용해 직접 생산하고, 그것들을 온라인 공간에 올려 자신과 같은 애호가들과 공유한다. 3D 모델링으로 새롭게 고안되어 공유되는 16mm 현상장비 3D 모델링 영사기 부품 중 필름 롤러 (사진: Thingiverse ) <투명한 감각>이 공동의 실천을 통해 과거의 매체를 ‘지금, 여기’로 불러냈다면, <베르팅커>(2022)의 경우 상상력을 통해 실존하는 별자리와 가상의 신화를 연결하여 매체를 ‘지금 여기’로 소환한다. <베르팅커>(2022) <베르팅커>는 실제 존재하는 별자리 ‘파리자리’에 착안해, 별자리가 된 사물의 삶을 은유한 작업이다. 1603년, 독일의 천구 지도 제작자인 요한 바이어(Johann Bayer)가 만든 천체 지도 ‘우라노메트리아(Uranometria)’에는 51개의 별자리가 표기돼 있는데, 그중 하나가 파리자리이다. 이 작품은 ‘파리자리’에 대한 가상의 설화를 만들어 필름의 의미에 대해 질문한다. <베르팅커>는 과거에 사물과 장소를 실로 묶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내는 정령에 대한 이야기로, 존재한 적 없는 ‘베르팅커’라는 대상을 상실된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세계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디지털로 이미지를 촬영하고, 3D로 이미지를 생성한 뒤 이를 필름에 프린팅하고, 필름 위에 잉크로 직접 드로잉하는 과정을 통해 제작되었다. 디지털 작업을 통해 추상화된 이미지는 필름의 물질적 표면 위에 드러나며, 그 후 잉크라는 물질 자체가 필름 표면 위에 새겨지는 화학적 과정을 거친다. 이처럼 디지털과 아날로그 기기 사이를 반복적으로 오가며 제작된 <베르팅커>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익숙하지 않은 시각적 경험을 제안한다. 2. 디지털 시대에 우리의 경험은 더욱 개별화된 가운데 선택의 폭은 더 넓어졌다. 영화 역시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제작 과정에서도 물리적·시간적 제약으로부터 한층 더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이렇게 확장된 선택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알고리즘이라는 체계는 우리의 선택의 폭을 익숙하고 비슷한 관심사 안에 가두고 있으며, 디지털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 역시 정해진 프로그램과 에셋(Asset)의 사용에 의존하여, 역설적으로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George Walton Lucas Jr.)는 디지털 기술이 전례 없는 창작의 자유와 효율성으로 모두가 영화를 제작, 배포할 수 있는 민주적 시대를 열 것이라 예견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대로 디지털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환상적인 세계가 과연 우리의 경험을 민주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확장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패터슨>(2016) 영화 < 패터슨 >(짐 자무쉬, 2016)의 주인공 패터슨은 버스 기사이자 시인이다. 그의 시는 버스 안에서 만나는 무작위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패터슨이 좋아하는 시인이자 소아과 의사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의 시 또한, 진료 현장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탄생했다. 영화 속 래퍼가 읊조리는 윌리엄스의 시구 “관념이 아닌 사물로(No ideas but in things)”는 이러한 ‘직접적 접촉(immediate contact) *주1 ’이 창작의 본질임을 상기시킨다. 이렇듯 ‘직접적 접촉’은 단순히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과정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사람이나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확장해가는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는 접촉을 통해 개별화된 ‘나’ 라는 존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경험이었다. 이 접촉의 중요성은 비단 창작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데,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관람이라는 행위를 통해 예상치 못한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낯선 이야기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것. 영화는 그런 낯선 접촉을 통해 우리의 시야를 확장한다. 반면 최근 디지털화된 우리의 경험은 점차 통제 가능하고 선택된 것들로 제한되며, 예측 불가능한 접촉에 대한 면역력을 잃어 가는듯하다. 이런 디지털 시대에, 필름 작업은 창작에서의 접촉과 제약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필름 장비를 구하기 위해서는 온라인 중고 거래 플랫폼을 통해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접촉해야만 하는데, 이 과정에서 때로는 퇴역한 군인의 삶, 때로는 사라져 버린 극장의 은퇴한 영사 기사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필름이라는 물질적 저장 매체는 단순 도구를 넘어, 창작자와 물리적 환경, 그리고 그 환경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일종의 연결 고리로 작용한다. 작업을 하며 만나게 된 사람들 (좌) 카메라 관련 장비수리 진영사 / (우) 서울아트시네마 전 영사 기사님의 작업실 또한, 필름의 물리적 특성은 창작에 있어 물리적 제약을 제시한다.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은 필름의 길이에 의해 제한되며, 이미지를 보기 위해 복잡한 현상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온도와 습도, 스크래치 등 물리적 조건에 민감한 필름은, 디지털 기술에서 간과되는 물질성과의 상호작용을 다시 일깨우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확실성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경험이다. 작업 중 만나게 되는 이러한 예상 밖 사람들과 물리적·시간적 제약은 상상력을 요청했고, 예상치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알지 못했던 세계와 연결될 수 있었다. 상상력은 현실적 제약과 접촉을 토대로 성장하며, 디지털 세계의 무한한 자유만으로는 물질적이고 유한한 우리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루프>(2024), 설치 전경, 아마도예술공간 (사진: 조준용) 최근의 작업 <루프>(2024)는 이렇듯 디지털 장치들의 물질적 조건이 신비화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디지털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환상적 세계는 디지털 매체가 지닌 물질성을 얇은 표면 안으로 숨기고 이음새를 보이지 않게 만듦으로써 마치 그것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특징은 디지털 이미지가 무한히 확장 가능하고, 물리적 한계에 구애받지 않는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신비화의 전략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단편만을 경험하게 한다는 비판 아래, 최근 이미지 지지체들의 얇아진 세계를 열어젖혀 이미지 기기의 기능 중 하나인 반복 재생의 기능을 루프라는 시스템으로 가시화했다. 보다 가볍고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디지털 미디어의 시간에서, 인간의 몸을 비롯해 유한할 수밖에 없는 물질세계와 마주해 보려는 의도로 진행한 작업이다. <루프>(2024), 설치 전경, 아마도예술공간 (사진: 조준용) 디지털을 경유한 필름의 이미지들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세계를 더욱 잘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필름 이미징 작업은 단순히 과거 매체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롭게 주어진 선택지를 활용해 지금의 선택지들을 재평가하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필름은 우리에게 ‘관념이 아닌 사물’로서, 일상 속에서 우리가 가진 제약과 타인의 이야기로부터 예상치 못한 응답을 이끌어내는 활동이 아닐까? 디지털 시대에 불편하고 현실적인 제약에 끊임없이 응답해야 하는 접촉과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궤도를 이탈하게 되는 필름 작업은 포스트-시네마 시대에 영화가 가진 힘을 재조명하며, 다양한 존재와 현실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시하는 상상력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 주1. 윌리엄스는 시는 도서관 같은 고독한 공간에서 벼려진 시인의 독특한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거의 무시되어온 사물이나 환경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면서 그것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쓰여져야 한다고 믿었다. (진은영, 김경희, 「영화 <패터슨>에 나타난 시와 예술의 공공성」, 『문학치료연구』 50호, 한국문학치료학회, 2019, 181쪽.) 윌리엄스가 다루는 대상은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그 주위의 시간과 공간은 이상하게 왜곡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오로지 평범함을 통해서 평범함을 벗어나([the] banal to escape the banal)(SE 236)고자 하였으며, 오로지 상상력을 통한 사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인해 사소한 일상 속에 감추어진 광대한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류기택,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적 상상력과 상대성 이론」. 『영어영문학연구』 41호(1), 32쪽.) 한우리(미술작가) l 물질이 만들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포털>(2024), <루프>(2024), <베르팅커>(2022) 등 작업.
1. 영화에 대한 논의는 항상 ‘보는 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가진다. 영화적 경험에서 보는 이는 존재하는 이와 동일하다. 그리고 본다는 행위는 앎과 감정, 행위를 매개하며 이를 통해 발생하는 심리적, 감정적 긴장은 영화가 제공하는 쾌락과 미적 경험뿐 아니라 미학적, 정치적 역사기술로서의 영화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된다. 이는 광학-카메라가 내포하는 소위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과 명백한 인과율 그리고 그 세계에서 구성되는 통일적 주체라는 허구가 아니라, 사건(이미지)들의 발생과 연쇄를 즉각적으로 대면하고 반응하는 ‘끊임없는 변화 속의 주체(관람자)’ 경험을 통해 파악된다. 요컨대, 영화가 수행할 수 있는 고유한 미학적 역사기술은 속박되지 않는 이미지, 그리고 안전한 관찰자의 자리를 박탈당하는 ‘보는 이’라는 이미지-시각 동학의 재구성이라는 방법론을 가질 때 비로소 권력의 시선에서 제공되는 연대기와 인과율을 벗어나 대항-역사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치로 게라의 < 뱀의 포옹 >은 영화-역사-정치가 절합(articulation)되는 흥미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영화는 신비한 효능을 가진 전설의 약초 야크루나(yakruna)를 찾는 독일 탐험가 테오와 그의 원주민 안내자인 만두카, 그리고 이들을 야크루나로 안내하게 될 젊은 무속인 카라마카테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카라마카테는 자기 종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폭압의 대상인 서구인 테오를 돕기 거부하고 서구적 관습을 흡수한 종족의 정보제공자(native informer) 만두카를 경멸하지만, 살아남은 종족의 생존을 돕겠다는 테오의 제안에 마지못해 두 사람과 함께 여정을 시작한다. 이어서 영화는 40여 년을 뛰어넘어 노인이 된 카라마카테와 야크루나를 찾으려는 미국인 에반스의 또 다른 만남을 보여주면서, 두 명의 서구인 탐험가가 떠나는 상이한 시간의 여정을 카라마카테의 존재를 통해 느슨하게 병치시킨다. 경이에 가까운 아름다움과 날것의 이미지가 자아내는 공포가 공존하는 아마존의 풍경은 그러나 서서히 원주민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식민권력의 폭력적 현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의 여행자들은 천연고무 착취를 위한 원주민 학대나 원주민 아동들을 교화시키는 가톨릭 신부의 포악한 이면 등 서구 식민권력의 경제적, 문화적 폭력을 재현하는 장면들과 조우한다. 이 잔인한 식민지배/피지배의 무대에서 영화의 여행자들은 갈등하고 충돌하고 협상하는 과정을 이어가면서 야크루나라는 목적을 향한 여정을 지속한다. 테오도르 코흐-그룬베르크, 리차드 에반스 슐츠 2. 실제로 19세기 독일인 탐험가 테오도르 코흐-그룬베르크(Theodore Koch-Grunberg)와 20세기 미국인 식물학자 리차드 에반스 슐츠(Richard Evans Schultes)라는 실존인물들의 저서에서 영감을 받은 < 뱀의 포옹 >은 식민문학의 대표적 양식인 여행기(travelogue) 서사와 긴밀한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고 있다. 프론티어리즘에 입각한 서구적 영웅 서사와 기독교적 훈육제도, 공간이동 및 자연착취의 영역을 확대시킨 과학기술과 박물학, 휴머니즘과 이국애증, 제국주의적 욕망과 부르주아적 개인성에 바탕을 둔 여행기 양식은 유럽 식민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노골적인 얼굴이다. 그러나 여행기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정치경제적 권력과 착취에 기반한 지배/피지배라는 적대적 이분법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보다 여행기 양식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질적인 문화와 언어, 전통과 가치를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기술자가 경험하는 긴장의 양태들인데, 이는 종종 기존의 제국주의 서사의 관습과 충돌하는 반-정복(anti-conquest) 서사와 연결된다. 그러나 반-정복 서사는 제국주의적 정복 서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헤게모니를 강력히 지지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결백을 지켜내고 싶었던 유럽의 부르주아 주체들이 활용한 재현 전략”(메리 루이즈 플랫)이다. < 뱀의 포옹 >이 서구 여행기 양식과 관련되는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여행기 양식의 반-정복 서사가 유럽 제국주의와 맺고 있는 공모관계의 폭로라는 것이다. 영화는 테오/에반스와 카라마카테, 그리고 원주민들로 형상화되는 식민지배/피지배, 여행자/여행되는 자(travelees)라는 단순한 대립을 넘어 상이한 신념과 언어, 지식과 감정이 만나는 접촉 지대(contact zone)에서 발생하는 훨씬 복잡한 동학을 제시한다. 영화 중반의 고무나무밭 장면은 서구 자본과 (서구화된 콜롬비아인으로 제시되는) 서구 제국의 내적 주체(domestic subject), 그리고 그들에게 착취당하는 원주민의 현실을 보여준다. 아마존 깊숙한 곳에서 고무 채취와 노동 착취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분노한 마카테가 채취된 고무액을 땅에 버리고, 이를 알게 된 원주민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를 이끄는 것은 폭압에 시달린 원주민의 팔 잘린 신체가 전달하는 강렬한 폭력의 이미지,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테오의 유럽 휴머니즘의 정서다. 아마도 롤랑 조페의 <미션> 같은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해왔던 유럽 휴머니즘의 감정은 결국 마카테가 원주민을 자비롭게(!) 사살함으로써 설 자리를 잃은 채 훼손된다. 테오의 유럽/휴머니스트/부르주아 여행자의 정체성은 그의 여정 내내 계속하여 의문시된다. 평화로운 원주민 마을의 환대를 받으며 하룻밤을 보낸 테오는 호혜라는 관습과 가치를 평화롭게 습득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가 자고 있는 사이에 한 원주민 아이가 그의 나침반을 가져가자 테오는 사유재산이자 (유럽의) 테크놀로지/지식을 위협/강탈한 원주민에게 적대와 폭력의 민낯을 드러낸다. 상심에 빠진 테오에게 카라마카테는 ‘지식을 독점하려는’ 백인의 태도를 꼬집고 타자(유럽)의 지식을 접촉하려는 자기(원주민)의 욕망을 변호한다. 결국 테오는 결코 ‘결백하지’ 않은 것이다. 도전받는 것은 기독교/가톨릭이라는 서구 종교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원주민 아이들을 콜롬비아 자본가 세력이나 원시적 폭력에서 보호하고 훈육하는 가톨릭 신부의 종교적 자비는 원주민 언어를 사용한 아동에 대한 가혹한 채찍 형벌이라는 폭력의 얼굴을 숨기고 있다. 한편 에반스의 여정에서 등장하는 사이비 교주의 커뮤니티는 메시아라는 일원신과 교회의 제도가 원주민들에 의해 ‘번역되는’ 또 다른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제시한다. 결국 제국주의적 정복서사나 여행기 양식의 반-정복 서사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이를 전유하는 < 뱀의 포옹 >의 궁극적인 전략은 유럽 중심의 다위니즘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로컬의 경험을 역사화할 수 있는 대안적인 ‘자가 기술 민족지(autoethnography)’의 의지를 담고 있다. 영화는 단순히 유럽중심의 시각에 반하는 원시 아마존의 전통을 로컬 역사의 대안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서구적 이성을 대변하는 테오/에반스와 원시 아마존의 철학을 들려주는 카라마카테의 부단한 대화라는 접촉지대,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낯섦과 몰이해 사이의 긴장에 주목한다. 영화는 결국 신비한 약초 야크루나로 향하는 목적론적 세계를 부인하고 파괴한다. 그리고 바로 그 마지막 순간 등장하는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는) 우주적 이미지는 근대의 시간을 부정하고 고대의 시원을 복원한다는 신화적 상징이라기보다, 서구 중심적 관점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로컬의 탈 식민적 역사기술을 시각화하는 창조적 카오스의 이미지 같다. 3. 플랫은 여행서사가 유행했던 근대 유럽의 소위 ‘지구적 차원의 의식’이 근거했던 과학 담론, 특히 박물학과 분류학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여행기 양식이 제공하는 가장 커다란 매혹은 낯선 공간과 이질적 문화라는 대상이다. 여행기는 이 낯선 사물들을 박물관마냥 채집한다. 어떤 사물의 이질성과 낯섦을 규정짓는 것은 그것의 낯선 배치, 즉 무질서다. 여행기는 이 사물의 무질서에 대한 보는 이의 매혹과 동시에 이를 다시 질서화하려는 어떤 욕망, 즉 분류학자의 의지를 가진다. 19세기 독일의 탐험가 테오는 전형적인 채집가이자 분류학자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면서도 그가 결코 버리지 않는 것은 나비 채집본과 기록, 그리고 원주민들의 사진이다. 채집가인 테오에게 사진은 기억의 담지물, 탐사의 증거다. 테오가 카라타마테에게 사진을 보여주자 그는 사진은 속이 텅 빈 채 마치 유령처럼 세상을 떠도는 또 다른 나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출라차키)일 뿐이라고 답한다. 카라마카테의 사진을 유럽인들에게 보여줘도 된다는 허락을 받자 테오는 그에게 목걸이로 보답하지만 그는 거부한다. 이 장면은 이미지-기억의 가치에 대한 상이한 개념과 감각이 만나는 접촉지대 그 자체를 보여준다.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에반스가 버리지 못하는 축음기 역시 마찬가지다. 테오/에반스와 카라카마테의 대화들에서 기억저장소인 복제-이미지와 그 채집은 다르게 해석되거나 혹은 부인된다. 무엇보다 테오의 여행기는 영화 안에서 완성되지 못하며 심지어 사실 에반스는 가짜 탐사가/채집가이다. 실패한 여행가/채집가로서의 테오/에반스가 서사적 차원에서 유럽 민족지 담론에서 벗어나는 전략이라면, < 뱀의 포옹 >이 담아내는 경이로운 아마존의 풍경은 ‘이미지-보는 이’라는 영화적 차원에서 타자를 대상화하는 시각적 민족지이길 거부한다. 6년이 넘는 제작기간을 거쳐 영화는 콜롬비아 아마존의 원주민 문화를 꼼꼼하게 담아내는 동시에(실제로 치로 게라는 5개 이상의 원주민 언어를 이용하여 시나리오를 완성했으며 카라마카테를 비롯한 원주민 캐릭터는 실제 원주민을 캐스팅했다) 아마존의 풍경을 경이로운 흑백 파노라마 화면으로 ‘채집한다’. 무한한 지평선을 그리는 강,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만이 존재하는 원시의 고원, 헬리캠으로 촬영된 대지는 근대 인간의 개입이 차단된 자연 그대로의 이미지, 칸트적 숭고의 이미지다. 그러나 테오/에반스는 결코 영화 안에서 이 이미지들을 포획하는 시선의 담지자로 구성되지 않는다. 쇼트-역쇼트의 구성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아마존의 풍경과 원주민의 이미지들은 테오/에반스의 시점쇼트에 대한 수동적 대상으로 제시되지 않으며, 자연과 테오/에반스, 카라마카테, 원주민들은 하나의 공간(프레임) 안에 배치된다. 나아가 이 숭고한 자연-이미지들은 광학적/디지털 복제물로서의 스스로의 본성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테오/에반스에게 포획되기도 분류되기도 거부하는 이 이미지들은 스크린-이미지를 ‘보는 이’인 우리에게도 포획되거나 분류되길 거부한다. 오히려 영화의 응시는 클로즈업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표범이나 뱀의 눈처럼 비-인간의 시선을 통해 구성되며 무질서로서의 자연-이미지는 기존의 분류/질서에 따른 풍경화(landscape)이길 거부한다. 이런 방식으로 < 뱀의 포옹 >은 흑백-파노라마라는 광학 이미지에 각인된 지배적 질서와 가치(원시로서의 아마존과 헐벗은 신체, 기억저장장치로서의 카메라/축음기, 채집된 증거로서의 복제 이미지)로부터 보는 이인 우리를 해방시키고 이미지-관람자 사이의 자유로운 접촉을 촉구하면서 서구 민족지 기술을 해체하는 정치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김응수 의 영화는 여행 없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때로는 영화촬영 작업이 여행을 위한 구실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사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실제로 그가 여행을 떠나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불현듯 그의 영화작업이 시작되어 버리곤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데뷔작 <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1996)에서 < 달려라 장미 >(2005)까지만 해도 분명하지 않았던 여행의 모티브는 별안간 < 천상고원 >(2006)에서부터 노골적으로 그의 영화를 구성하는 틀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사라진 여인의 흔적을 찾아 라다크로 향하는 K라는 사내의 여정을 좇는 로드무비 <천상고원>, 1980년대 학생운동의 기억 주위를 맴돌면서 서울과 남도를 오가는 다큐멘터리 < >(2007), 어머니가 남긴 그림 속의 풍경을 찾아가는 한 청년의 여정을 실험적인 방식으로 담아낸 에세이영화 < 물의 기원 >(2009) 그리고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의 논쟁적 저서 <요코 이야기>에 묘사된 여정을 따라 일본으로 향한 신작 다큐멘터리(현재 후반작업 중)에 이르기까지, 여행은 김응수 영화의 출발점인 동시에 그것이 그려내는 영화적 탐구의 형상이 되고 있다. 그의 영화에서 여행은 언제나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여행으로서 시작되긴 하지만, 흥미롭게도 다른 무엇(들)의 개입에 의해 그 여행의 경로가 어김없이 뒤틀리거나 산란되고 만다. 이는 김응수 영화에서의 여행이란 실은 노정을 일종의 접촉지대(contact zone)로 만듦으로써 여러 우연적 사건들이 안으로 흘러들어와 노정 자체를 변형시키는 과정을 보기 위한 형식임을 드러낸다. 그의 영화 촬영(여행) 중 종종 발생하는 이 변형과정은 고스란히 그의 영화에도 반영된다. <천상고원>에서 (감독 자신이 연기한) K라는 인물이 사라진 여인의 흔적을 찾는 과정은 히말라야의 험한 산길을 오르는 동안 감독이 실제로 겪은 물리적 고통의 기록들로 대체된다. 또한 주인공 K는 비단 허구의 인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감독(K`)과 그 둘이 융합된 복합체(K―K`) 사이를 오간다. 결말부에 이르면 감독 자신이 몇 년 전 라다크를 방문했을 때 촬영한 사진을 그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담은 장면들을 보여주는데, 이 장면들이 영화 안에서 K의 여정의 끝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인지, K`의 촬영현장의 메이킹 필름으로서 갑작스레 끼어든 것인지, 아니면 이 둘 모두인지는 사실 분명치 않다. 확실한 것은 과거(사라진 여인)에 대한 탐색으로 시작되었던 영화가 여기서는 철저히 현재적인 순간의 생생함과 활력을 전달하는 쪽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 길을 돌아온 김응수가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의 내성적인 회고의 태도(오래 지속되는 과거 안에 머물기)와 단호히 결별하고 그 어떤 감상도 없이 현재의 강렬함으로 과거와 맞서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부터다. <천상고원>에서 그가 감행한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과거를 낯선 것으로서 재발견(<과거는 낯선 나라다>와 그 이후)하기 위한 여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