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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of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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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POWER REFUE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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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manii]메인보드 케이스 선 변경 연결 방법 설명 POWER SW POWER 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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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ra super power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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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ra super power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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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FM POWER MUSIC-18 MOST AIR PLAYED POWER PO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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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wer of Power, More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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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MIX-VARIOUS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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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OLUTE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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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of Kangwon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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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wer of Kangwon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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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AN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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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RANGERS - TH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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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RANGERS TH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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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Misses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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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Desire, and Power in Italian Cin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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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도서관(상암), 대구분원이관(2024)
Carnal Knowledge and Imperial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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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안성기를 기억하며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성장 잔혹사와 ‘귀여움’의 레짐 사이
<소년시절의 너> 중 / 사진: Far East Film Festival 대만, 중국, 홍콩을 아우르는 동시대 중화권 청춘영화는 어딘가 안전한 자리로 호출되곤 한다. 이는 가볍고 말랑한 감정의 외피를 두른 ‘틴 로맨스’나 ‘학원물’이 지배적인 인상으로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골목과 방 한 칸을 배경으로 한 ‘도시 로맨스’, 혹은 성적 지향이나 계급적 주류 범주에서 벗어나는 ‘아웃사이더’의 지난한 성장 서사 또한 그 반경을 꾸준히 확장해왔다. 거짓 없는 미소와 서툰 고백에서 길어 올린 풋풋한 청춘의 초상과, 체제와 현실의 제약 속에서 너무 이르게 마모되어 버린 성장의 잔혹한 기록. 두 계열은 서로 다른 미학과 정서를 지닌 채 엇갈린 방향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성장의 희미한 슬픔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교차하고 중첩된다. 우리가 중화권 청춘영화로 부르는 범주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이 영화들은 어떻게 하여 이토록 ‘범아시아적’ 생명력을 유지하는가? 질문은 자연스레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누군가는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구파도, 2011)나 <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조미, 2013)을 기점으로 삼을 테고, 또 다른 이는 < 남색대문 >(이치엔, 2002)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 더 긴 역사적 궤적 속으로 옮기면, 중화권 청춘영화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동시대 현상만은 아니라는 점이 보다 분명해진다. 우선, 대만 뉴웨이브와 중국 6세대 영화, 그리고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논의되어 온 홍콩 뉴웨이브의 성취 속에서 그 정서적, 미학적 뿌리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나 아닌 여럿: 중화권 청춘영화의 기원들 누구나 겪지만 결국 지나간 과거로 남게 될 통과의례의 순간. 대만 뉴웨이브는 이러한 청춘을 형상화하는 데 탁월했던 시기로 기억될 만하다. 교복 입은 인물들의 초상이 전면에 놓인 작품도 가히 많았다. 그 출발점에 자리한 < 광음적고사 >(에드워드 양 외 3인, 1982)의 옴니버스 구성 가운데 타오더천과 에드워드 양이 각각 연출한 첫 두 에피소드(“작은 용 머리”와 “기대”), 그리고 진곤후 감독의 < 샤오피 이야기 >(천 쿤하우, 1983)는 소년·소녀들의 작고 애틋한 바람결 같은 초상을 내세운다. 그 물밑으로는 미국 이민, 대학 진학, 도시 중산층 진입이라는 당대 사회적 분위기의 기대와 규범이 조용히 도사리고 있다. 학교와 가정을 중심으로 일상의 반복을 미묘하고 리드미컬하게 포착한 이 감각은 <남색대문>과 같은 영화들의 정서적 결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일깨우는 동시에, 오늘날 중화권에서 ‘작은 청신함’이라 불리는 샤오칭신(小清新, Xiao qingxin)의 감정 구조와 그것이 하나의 서브 장르로 체화되어 온 흐름의 잠재태를 내포하고 있다. [1] 그러나 이 계보는 허우샤오셴의 < 연연풍진 >(1986)을 비롯한 성장영화에서 에드워드 양의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91)까지 대만 뉴웨이브 1세대가 소외된 젊은 세대를 응시해온 흐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영화들은 포스트-경제 기적 시기에 접어든 관점에서 계엄령 시기의 역사적 조건을 되비추는 장치로서 청춘을 호출하며, 어쩔 수 없이 감내하며 통과해야 했던 국면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그 풍경은 담담한 일상으로, 때로 서늘하고 비정한 상태로 각인되는 한편으론 감독들의 노스탤지어와 자전적 경향을 투사한다. 도시로 향한 젊은 연인들이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을 흘려보낸 기억으로 남기거나(<연연풍진>), 백색 테러의 광풍과 외성인이라 불린 본토 이주민들의 불안정한 삶의 궤적을 통과하던 청년이 끝내 파국적인 폭력으로 치닫는 시간(<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속에서, 청춘은 이미 상실을 예감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광음적고사>,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중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Asian Film Archive ) 이러한 정조는 중국 6세대 영화에 이르러 또 다른 시선으로 변주된다. 1989년 이후 중국에서 독립영화 [2] 로 분류될 수 있는 체제 외부의 작품들이 활성화되어, 급격한 시장화 한복판에서 방향성을 잃은 청춘의 초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아장커의 < 소무 >(1997)를 기점으로 가시화된 이 흐름은 로우예, 왕샤오슈아이, 장위안 등의 작업으로 이어지며 6세대라는 미학적 진영으로 일컬어졌다. 소매치기인 주인공과 ‘사업가’로 변신한 옛 동료를 대조하며 중국 소도시 시장경제의 비루한 풍경을 날것으로 포착한 <소무>의 감각은 < 쑤저우강 >(로우예, 2000), < 여름궁전 >(로우예, 2006), < 북경 자전거 >(왕샤오슈아이, 2001), < 북경 녀석들 >(장위안, 1992) 등에서 목표를 갖지 못한 채 그저 머물고 떠밀리며 시간을 견디는 젊음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6세대는 이처럼 국가 주도 계획경제와 개혁개방 사이의 격변기에 놓인 청춘이 조기에 소진되어버리는 감정 상태를 대변하는 성취를 보였고, 이는 세계 영화제 회로에서 환대를 받았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중국 본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독립영화’ 정신이 만개했던 때로 기록된다. 작가영화마저 상업영화 및 주선율 영화의 논리에 함몰되어가는 현 풍경을 떠올릴 때, 동아시아 청춘영화의 한 모델―즉, 비관적이지만 정직한 모델―을 제시한 당시 6세대의 성취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2010년대에 들어서며 독립영화의 ‘죽음’이 목격되기 전 [3] , 이러한 계보를 근과거까지 계승하며 그 정서적 맥을 잇고 있는 작품으로 리위 감독의 < 관음산 >(2010)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소무>, <관음산> 중 / 사진: IMDb( 1 , 2 ) 홍콩영화의 경우 상황이 조금 달랐다 할 만하다. 서극의 < 제일유형위험 >(1980)이 보여주듯, 초기 홍콩 뉴웨이브에서는 청춘의 권태와 분노를 폭발할 듯한 폭력과 뒤섞어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담가명이 호화롭고 자신감 넘치던 당시의 홍콩을 배경으로 도시 노마드들을 그려낸 < 열화청춘 >(1982)과, 왕가위의 < 중경삼림 >(1994)을 비롯한 1990년대 작품들은 청춘의 감정 구조를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이어진 프룻 챈의 < 메이드 인 홍콩 >(1997)은 포스트-반환 시기 처음으로 등장한 뛰어난 청춘영화가 아닐까. 영화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두 소년과 이에 합세한 소녀로 구성된 아웃사이더들이 비가역적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는 점에서는 <제일유형위험>을 환기시키면서도, 한결 차분한 시선으로 홍콩의 내면적 심상에 집중한다. 한편 왕가위와 같은 홍콩 뉴웨이브 2세대의 동시대에 함께 활동한 임영동의 <학교 풍운>(1988)은 전형적인 청춘영화의 문법과 거리가 있을지라도, 학교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성장기 소년·소녀들의 위태로움을 그려낸 가장 ‘홍콩적인’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될 만하다. <제일유형위험>, <메이드 인 홍콩> 중 / 사진: IFFR , IMDb 중국 문혁 세대와 Z세대의 초상: <방화>, <소년 시절의 너> 그렇다면 지난 10년으로 범위를 좁혀 중화권 영화로 시선을 옮겨보자. 동시대 작품들은 어떤 청춘의 풍경을 담아내왔을까? 이 작품들을 한눈에 조망하기란 쉽지 않고 필자의 한계도 있기에, 이어지는 글은 그 흐름을 가늠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몇몇 인상적인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를 제공하고자 한다. 먼저, 중국에서 제작된 청춘영화들은 대만발 ‘샤오칭신’ 장르가 중화권 전반에 끼친 영향력을 입증하듯 캠퍼스 로맨스가 주류를 이룬다. 매력적인 주연 배우들의 청신함, 푸르른 여름 하늘, 첫사랑과 서투른 고백 등 이 장르의 관습으로 간주될 만한 요소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공부’ 자체가 단순한 성장담의 소재를 넘어 과열된 입시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짓눌린 청춘 서사의 엔진이 된다는 점은, 중국 청춘영화만의 독특한 지점이다. 모범생 소녀가 불량스럽지만 순수한 문제아 소년의 공부를 도와주며 사랑이 싹튼다는 대만 영화의 공식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가 보여주듯 다소 귀여운 수준에 머물지만, 중국의 대히트작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2013)에 이르면 사뭇 다르게 변주된다. 이는 공부만이 ‘흙수저’인 자신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라 믿으며 로맨스를 아예 거부하는 주인공의 철벽같은 마음을 공략하기 위한 작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중 / 사진: IMDb( 1 , 2 ) 증궈샹 감독의 < 소년시절의 너 >(2019)는 중국발 학원 영화들의 흐름 속에서 가장 성공한 판본인 동시에 사회성 짙은 텍스트로 각인된다. 대입 시험인 ‘가오카오’를 코앞에 둔 시기, 주인공 첸니엔(주동우)이 한 소녀가 학교에서 자살한 현장을 목격한다. 죽은 소녀는 교내 가해자들의 악명 높은 괴롭힘에 희생되었음이 드러난다. 가해자들의 다음 표적이 된 첸니엔은 자신을 보호해 주려는 십대 거리의 소년(이양천새)과 운명적으로 엮인다. 영화는 입시 위주 고등학교를 지배하는 잔혹함의 심리를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탐구하며 시작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온 세상에 맞서 싸우는 두 십대의 서로를 향한 헌신과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순수한 로맨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처럼 교육의 살풍경과 두 연인의 낭만적 비극을 대비시키는 방식은 미덕이라기엔 다소 한계를 노출한다.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에 책임이 있는 체제 내부의 어른들(교사와 경찰들)이 지나치게 선량하고 도덕적인 인물로만 묘사되고, 가해자들 역시 충분한 전사나 깊이 없이 평면적 캐리커처에 가깝게 제시되면서, 두 상처 입은 영혼들의 고립은 사회적 압박 못지않게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려는 관계의 내향성에 의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오카오’ 점수가 부르주아로의 격상과 잔인한 빈곤의 삶 사이 간극을 결정짓는 상황에서, 첸니엔이 통과해야 하는 절박함의 정동은 한 편의 ‘십대 오페라’ 같은 이 영화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요소일 테다. <소년시절의 너> / 사진: IMDb <방화>(2017)는 문화대혁명 말기, 문공단(문화예술선전대)에 입대한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공간이 당대의 예술학교나 사실상 다름없었던 현실이 재현될 뿐 아니라, 영화 역시 학원영화의 문법을 상당 부분 따르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블록버스터와 풍자극을 넘나들며 < 집결호 >(2007), < 아부시반금련 >(2016) 등을 연출해온 중국의 대표적 감독 펑샤오강의 야심작이다. 무용수가 되기를 꿈꾸는 샤오핑은 문공단에 입성한 첫날, 자신을 마중 나온 선배 류펑에게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이타적이고 충직한 성정의 류펑은 정작 자신의 호의를 이용하기만 하는 피아노 반주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영화는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 숙청, 그리고 1979년 중-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약 5년간의 격동을 통과한다. 그 사이 샤오핑은 재교육 시설에 수감돼 있던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류펑과 샤오핑 모두 전쟁에 참전한 뒤 정신적·신체적으로 소진된 상태로 귀환한다. 하지만 <방화>는 문화대혁명이 야기한 전면적인 비극을 정면으로 성찰하기보다는, 학교 청춘물의 형식을 빌려 이들에게 고통을 안긴 공산당 간부나 상하이 상류층 자녀들과의 격차를 부각한다. <소년시절의 너>의 첸니엔처럼, 샤오핑 역시 수줍음과 서투름, 그리고 계급 지위로 인해 조롱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즉, 시대의 광기보다는 오늘날 중국사회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비판 가능한 엘리트 부유층의 부패와 계급적 소외에 비극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제목인 방화(芳华)는 ‘꽃다운 청춘’ 혹은 ‘향기로운 시절’을 뜻한다. 세월이 흘러 1990년대 중반, 두 주인공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문공단 시절은 노스탤지어 깃든 기억으로 남고, 그 공식적 종언을 알리는 해산식 장면에서 샤오핑은 생애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춘다. 대만 청춘 영화의 속삭임: <조니를 찾아서>,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한편 오늘날 대만 청춘영화의 흐름이야말로 젊은 시절을 ‘아팠지만 예뻤던’ 감정으로 재배치하는 ‘샤오칭신’ 감성 구조와 떼어내 설명하기 어렵다. 동시에 그 한편에서는 이전 세대 영화들이 간직했던 불안과 공허의 정조를 일정 부분 봉합하면서도, 이를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변주하려는 흐름 또한 포착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만 청춘 영화들은 불확실한 현재를 견디기 위한 하나의 정서적 피난처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작고 사소한 것들, 곧 ‘작은 행복과 미세한 슬픔’을 섬세하게 건드리는 이 방식은 개인주의적 정서를 중시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로부터 물러나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려는 태도를 전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평론가이자 제작자인 페기 차오는 자신의 제작 영화 <남색대문>이 ‘샤오칭신’ 장르로 호명되는 데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내놓는다. 그 미덕이 “대만 사회에 뿌리를 둔 일상적 디테일의 축적을 통해 그려낸 삶의 초상이자, 자비로 가득하며 악의가 없는 세계”의 포착에 있다는 것이다. [4] 후앙시 감독의 < 조니를 찾아서 >(2017)는 이러한 설명에 잘 부합하는 텍스트다.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한 세 젊은 인물의 이야기는 인상 깊은 오프닝으로 시작된다. 지하철에서 작은 상자를 들고 탄 여자에게 한 청년이 다가와 새장이 아니냐고 묻는다. 여자는 나중에 답을 주겠다고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전에 그런 상자에 새를 담아온 적이 있다고 덧붙인다. 같은 빌라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걸어가는 긴 시퀀스를 통과할 때까지도 이들이 우연히 스친 타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후앙시는 허우샤오셴의 < 남국재견 >(1996)과 < 자객 섭은낭 >(2015) 제작부를 거치며 선배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롱테이크를 체득한 인물이며, 이 영화에는 실제 허우샤오셴이 제작자로 참여했다. 영화는 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주변을 어떠한 판단 없이 평등한 시선으로 관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일상의 미스터리를 낯설고도 신선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이를테면 화면에 익숙해진 뒤에야 청년의 티셔츠 무늬가 작은 새들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순간처럼, ‘조니’라는 사람을 찾는 이상한 전화들을 계속 받아오던 여자는 문득 옛 애인을 조니라고 부른다. 앵무새를 키우는 여자와 자폐 성향을 지닌 청년, 그리고 탈출한 앵무새를 계기로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된 수줍음 많은 집수리공이 왜인지 모를 기분 좋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이야기. 이는 느슨하며, 너그럽고, 명확한 해답은 없지만 삶에 대한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조니를 찾아서>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2020)을 논하기 위해서는 대만발 청춘영화의 또다른 국면을 호출해야 한다. 전형적으로 이상화된 여성성보다는 강인하고 때로 보이시한 여성 캐릭터가 선호되고, 완성된 사랑보다는 첫사랑의 어슴푸레하고 틀이 잡히지 않은 감정에 집중해 온 흐름 말이다. <남색대문>, < 영원한 여름 >(2006), <여친 남친>(2012) 등이 보여주듯, 대만 청춘영화에는 퀴어 서사와 삼각관계의 묘사를 통해 장르의 영토를 확장해 온 하나의 계보가 존재한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미묘한 긴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종 촉발되는 모호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섬세한 터치는 대만 청춘영화만의 고유한 미학을 구축해왔다. 패트릭 류 감독의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막 계엄령이 해제된 1980년대 후반 대만을 배경으로 한다. 아한은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버디를 만나 단짝 친구가 되고, 두 소년 사이에 형성된 감정은 학교가 여학생을 받기 시작하면서 시험대에 오른다. 신입 여학생 반반의 등장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직면하도록 압박하는 계기가 된다. 표면적으로는 삼각관계를 통한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테마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네 마음>은 정통 퀴어 영화라기에는 터치가 다소 가벼웠던 기존의 청춘영화 흐름에서 한 발 더 묵직하게 나아간다. 기숙학교 내에 공공연히 만연한 호모포비아와, 스스로 게이였음에도 아한에게 ‘교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캐나다인 신부의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는 계엄령 해제라는 조용한 변화의 출발점에서 시작해,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시간으로 닿는다. 과거의 고통과 열정을 다시 마주하며 잃어버린 줄 알았던 시대의 기억을 되찾으려는 듯, 주제곡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이 흐르는 가운데 두 주인공은 죽은 신부의 교구가 있던 퀘벡의 밤거리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결말로 향한다. 홍콩 독립 청춘영화의 새로움: <쪽빛 하늘>, <좁은 길> 마지막으로 최근 홍콩 독립 청춘영화는 대만의 청춘물이 제공하는 감정의 완충 지대나, 중국 본토 학원영화의 서사와는 사뭇 다른 궤적을 그려낸다. 이 글을 준비하며 마주한 가장 큰 수확은 홍콩 반환 이후 감독들의 본토행에 따른 영화 산업의 공동화나 정체성의 약화라는 오랜 우려를 불식시키는, 독립영화 진영의 새로운 세대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저예산으로 제작되면서도 도시 청춘들의 표정과 삶의 결을 세밀하게 기록해 온 이 영화들은, 때로는 홍콩을 향한 러브 레터처럼 읽히기도 한다. 아모스 와이의 <닷 투 닷>(2014), <냅핑 키드>(2018), <먼 곳에서>(2022)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주목할 점은 홍콩영화발전위원회(Hong Kong Film Development Council)가 주관하는 신인 감독 지원 사업(First Feature Film Initiative)을 통해 입봉하는 신예가 점차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업은 신인 감독의 데뷔작을 지원할 때 홍콩 영화계의 거장 감독이나 베테랑 제작자를 멘토로 매칭해 주는 방식을 취한다. 2013년부터 시작된 이 세대 간 유기적 결합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 덕분에, 최근 홍콩 독립영화를 보면 타이틀 크레딧에서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익숙한 홍콩 감독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쪽빛 하늘>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그중에서도 <쪽빛 하늘>(2017)은 동시대 홍콩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중 하나인 청킹와이의 극영화 데뷔작이다. <천하태평>(2008), <음악 인생>(2009), <하나의 국가, 두 개의 도시>(2011), <테이스트 오브 유스>(2016) 등 홍콩의 현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들과 허안화의 <밤과 안개>(2009)의 각본을 쓰며 다져온 청킹와이의 서늘한 시선은, 부모 살해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를 통해 홍콩 사회가 청춘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냉정하게 응시한다. <쪽빛 하늘>에서 부모의 시신이 지역 저수지 인근에서 발견된 뒤, 어린 코니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이 강렬한 스릴러는 누가 저질렀는가를 이미 알려주고 시작하기에, 질문의 중심은 ‘왜’라는 동기로 집중된다. 빈곤과 학대로 점철된 코니의 가정환경, 그녀가 학교 친구를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과정, 그리고 사건에 깊이 관여하면서 점차 자신의 사적인 삶까지 흔들리기 시작하는 여성 수사관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선정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세심하게 펼쳐지는 이 탐구의 형식은 평소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코니와 같은 인물들이 스스로 말하게끔 유도한다. 대만이나 중국의 청춘 학원 영화에서 ‘파란 하늘’이 젊음의 자유를 상징한다면, 이 영화의 어스름한 ‘쪽빛’은 홍콩의 비좁고 폐쇄적인 공간을 짓누르는 색채로 활용된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채 위협받는 십대들을 압박감 가득한 스릴러에 담아낸다는 점에서 <학교풍운> 같은 홍콩영화의 고전적 전통이 환기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부모 살해를 자행한 소녀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거부하는 젊은 여경의 윤리적 딜레마는 평행선을 달리는데, 이는 세대 갈등의 단면이자 출구 없는 미로 같은 도시에 갇힌 홍콩 현세대의 실존적 질식 상태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좁은 길>(2022)은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당시 자살을 예고한 어린 시위대를 구하려는 청년 구조대의 이야기를 담은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기를>(2021)을 렉스 렌과 공동 연출했던 람섬 감독의 단독 연출작이다. 이 영화 역시 대만의 낭만이나 중국의 열망과는 또 다른, 도시 속에서 존엄을 지키려는 홍콩 청춘들만의 정직하고도 아픈 초상을 그려낸다. 코로나19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영세 청소 대행업체의 일원인 노동자 자크가 늦은 밤 식당을 방역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주로 가라앉은 팬데믹 시기의 밤 장면으로 구성된 <좁은 길>은 조용한 노동계급의 고독을 포착하지만, 음울하거나 비관적이기보다는 사회 주변부의 고단한 상황을 응시하면서도 어딘가 미묘한 위로와 해방감을 안겨준다. 일손이 절실하지만 도시를 덮친 팬데믹 탓에 자크의 형편은 넉넉지 않다. 그는 충동적으로 지원한 캔디의 비공식적인 구직 요청을 받아들이고, 매일 밤 일당을 현금으로 지급한다. 비교적 어린 여성인 줄로만 알았던 캔디는 사실 어린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두 사람은 감정적 방어 기제를 세우면서도 서서히 비즈니스 파트너에서 친구 사이로 발전하지만, 영화는 연애담을 전형화하지 않는 선에서 결말을 열어둔다. 람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지난 몇 년간 힘든 시간을 보낸 홍콩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고, 우리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5] 취약함을 인정하는 용기는 <좁은 길>의 가장 큰 미덕이자, 고립 속의 유대를 형성하는 두 주인공의 서사에 깊이 공감하게 만드는 동력일 것이다. 청춘영화라는 틀 안에서 보자면 입체적으로 그려진 젊은 청소 노동자와 싱글맘의 묘사 자체가 인상적인 ‘캐릭터 스터디’라 할 만하다. <좁은 길> / 사진: IMDb *** [1] Papan Yang, “The Taste of Ice kacang: Xiaoqingxin Film as the Possible Prospect of Taiwan Popular Cinema”, The IAFOR JOurnal of Asian Studies, 2:1, 2016, p. 75. [2] Chris Berry, “Cinema: Reconsolidation of Party-State Hegemony in a Market Economy,” in M Dahl, M. Szatkowski & H. Kups (eds.), China under Xi Jinping: An Interdisciplinary Assessment , Leiden & Boston: Brill, 2016, p. 351. 중국 독립영화는 일반적으로 정부 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영화를 말한다. 이는 체제 내 상영이 허가된 예술영화(艺术片, yishupian)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공식적으로 상영되지 못하는 독립영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중국 내 독립 영화제(난징, 베이징 등)나 대안적 상영 공간을 통해 소개되거나, 주로 해외 영화제를 거점으로 유통되는 경향을 보였다. [3] Chris Berry, ibid., p. 350. [4] Song Hwee Lim, Taiwan Cinema as Soft Power: Authorship, Transnationality, Historiography , London & NY: Oxford University Press, 2022. p. 129에서 재인용함. [5] Elizabeth Kerr, “ Portrait of a City: The Narrow Road ” , ZOLIMA citymag (접속일: 2025. 12. 26.). 박은지(영화 연구자) l 프랑스 탈식민주의 영화와 동시대 동아시아 영화를 연구하고 글을 쓴다.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머. 지은 책으로 『지중해의 영화』, 주요 논문으로는 「장-뤽 낭시를 경유한 클레르 드니의 여정: ‘신체-지리학’ 영화, 생태적으로 그려내기」, 「부산 프랑스문화원과 트랜스로컬 시네필리아」, 「홍콩 누아르에서 포스트-홍콩 누아르까지 성찰적으로 바라보기」, 「두기봉의 밀키웨이 제작사와 포스트-1997 홍콩영화 정체성의 문제」 등이 있다.
[KOFA 특강노트]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어느 한국영화학자 성장기와 아카이브의 발견
올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정혜승 교수 는 영화와 미디어를 인종이나 정체성 등의 개념과 관련지어 연구해왔다. 미국과 동아시아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경험되는 대중문화 콘텐츠를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한편, 영화사 고문헌을 탐독해 한국영화 검열사를 연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Cinema under National Reconstruction: State Censorship and South Korea’s Cold War Culture(2024), Movie Minorities: Transnational Rights Advocacy and South Korean Cinema(2021, 공동 집필), Hollywood Diplomacy: Film Regulation, Foreign Relations, and East Asian Representations(2020), Movie Migrations: Transnational Genre Flows and South Korean Cinema(2015, 공동 집필) 등이 있다. 하와이대학교 마노아캠퍼스 미국학과와 오클랜드 대학교 영어·영화학과에서 강의한 후, 현재는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할리우드 키드에서, 실증적 영화연구자로 영화학자의 길에 들어서기 전, 그 시작을 만들어준 계기를 꼽자면 어린 시절 접했던 할리우드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께서 < 애정이 꽃피는 나무 >(에드워드 드미트릭, 1957)를 보고 감탄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미군정 시기부터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몸소 경험한 세대는 이 시대에 대량으로 수입된 할리우드 영화에 매료되곤 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군사 정부 시절에 유년기를 보낸 나도 < 헐리우드키드의 생애 >(정지영, 1994)의 내용이 자서전에 가깝다고 느낄 만큼, 20세기를 통과한 한국인들이 영화에 처음 눈을 뜨는 데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로 할리우드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특히 미국 현실과는 동떨어진 판타지적 서사를 지닌 작품들(거의 엠지엠 스튜디오MGM Studios가 제작했다)에 눈길이 갔는데, 인물과 세계관(또는 서사)이 비현실적으로 설정된 콘텐츠를 즐기며 내가 처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욕망을 작품에 투사했던 것 같다. 언뜻 보면, 현재 미국의 사회적 소수자들이 한국의 아이돌을 보고 정서적으로 위안을 얻으며 K팝 팬으로 거듭나는 과정과 유사한 흐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좌) 유년기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할리우드 영화 / (우) 한국영화 검열사에 관한 저서 Cinema under National Reconstruction (2024) 본래 나는 미국에서 활동하며 영화와 사회문화 이론을 중심으로 한국영화를 연구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영화의 역사적 측면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론보다는 ‘ 실증적 ’ 방법론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고, 필름 아카이브에 대한 연구자들의 의존도 도 당연히 높았다. 여러 아카이브를 방문해 대량의 자료를 조사하고 그 결과물을 비교하는, 미국 영화연구의 이 주된 경향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박사 과정 재학 시절부터 들어왔다. 이후 학계에 입문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2021년 풀브라이트 연구원으로서 한국을 찾아 1960~80년대 한국영화 검열사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이 공개한 검열서류 컬렉션 속 방대한 1차 자료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으며, 연구 결과는 저서 Cinema under National Reconstruction(2024)에 정리해 곧 출간할 예정이다. 한편, 이때는 < 오징어 게임 >(황동혁, 2021)이 넷플릭스에서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시기기도 했다. 한국 콘텐츠의 전례 없는 흥행에 세계가 놀랐고, 마침 CNN이 인터뷰를 요청해왔기에 여기에 응하기 위해서 이 작품에 대한 연구까지 병행했다. 그래서 검열사와 OTT라는, 교집합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듯한 두 주제를 동시에 들여다보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카이브의 힘과 한국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상호작용하면서 영화연구의 새로운 방향성을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국영화와 콘텐츠의 세계화, 그리고 넷플릭스 내가 미국에 처음 도착했던 1997년만 해도, 미국 현지에 알려져 있던 한국영화는 비디오 가게 ‘킴스비디오’에 소장된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배용균, 1989)과 < 삼공일 삼공이(301, 302) >(박철수, 1995)가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홍상수 등 몇몇 예술영화 감독들의 이름이 해외에 알려졌고, 한국형 블록버스터 속 스펙터클 역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넷플릭스가 2010년대 자사의 스트리밍 및 DVD 대여 서비스 대상 작품에 한국영화 약 200여 편을 포함시키면서(물론 지금은 넷플릭스가 제작에 참여한 오리지널 콘텐츠가 주를 이루지만) 인지도는 더욱 높아졌고, 넷플릭스의 스트리밍 서비스 제공 범위는 2016년에 아시아 문화권을 포함한 전 세계로 갑작스럽게 확장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극장 보호를 위한 통상의 홀드백 기간을 두지 않고 봉준호 감독의 < 옥자 >(2017)를 이례적으로 동시 스트리밍한 플랫폼으로도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공개된 < 킹덤 >(김성훈, 2018)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가입자 수까지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세계 OTT 시장에서 한국형 시리즈물의 두각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고, 이 기세는 <오징어 게임>을 비롯해 그 이후에 공개된 여러 작품을 통해서 국내 오리지널 시리즈가 넷플릭스의 주력 콘텐츠로 자리매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넷플릭스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특정 지역의 문화와 정서에 맞는 콘텐츠를 기획해 글로컬리티를 선보임으로써 흥행을 꾀한다. 또한 더 많은 지역으로 빠르게 배급하기 위해 콘텐츠의 IP를 자사가 전적으로 보유하는 방식으로 오리지널 시리즈를 기획하곤 한다. 이렇게 제작된 국내 오리지널 시리즈로서 해외, 특히 미국에서 성공한 콘텐츠들은 대체로 액션 위주의 자극적인 구성이나 기괴한 분위기로 미국인들의 취향을 겨냥하고 있다고 본다. 이뿐만 아니라 넷플릭스는 한류 스타를 내세워 아시아 팬들을 사로잡는 시리즈들(주로 멜로드라마 장르에 치중한다)에도 투자하는데, TV 드라마를 기획하는 국내 콘텐츠 대기업과 공동으로 제작한 후 전 세계 배급을 위한 권리를 획득하며 아시아 시장에서의 수익 창출을 꾀한다. 이러한 전략을 바탕으로 제작된 국내 콘텐츠들이 해외에서 불러일으킨 반응들 몇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미국의 지인 한 명이 내게 <갯마을 차차차>(2021)에 대한 감상을 여러 번 전해준 적이 있다. 그는 삶의 어두운 면을 다루면서도 작품 속 갈등이나 미스터리를 차분하고 완곡하게 풀어나가는 한국 드라마만의 서사 전개 방식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인물들의 성격을 인위적으로 설정하지 않고 극의 흐름과 복합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사실적으로 탄탄하게 구성한 점 역시 놀랍다고 말해주었다. 작품 속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서사에 몰입하도록 하는, 한국 콘텐츠의 흡인력이 효과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좌) 아시아 콘텐츠 시장을 겨냥해 넷플릭스와 국내 콘텐츠 대기업이 공동 제작한 드라마 (우)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에 관해 미국의 지인이 직접 전해온 감상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내 콘텐츠 산업에 침투한 넷플릭스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는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넷플릭스는 자사의 유명 오리지널 시리즈를 통해 한국의 창작자들과 기업들까지 관심을 받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기존의 작업을 모두 OTT 시리즈의 형식에 끼워 맞추는 양상이 과연 긍정적일지에 대한 의문도 존재하는 것이다. 연구자로서 이렇게 양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현상이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확정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국내 창작자들과 기업, 그리고 전 세계 OTT 플랫폼 간의 상호작용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 콘텐츠가 어떻게 발전해나갈지는 현 시점에서 진단하기보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분석해나가야 할 과제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영화 검열사 연구와 아카이브의 중요성 이제부터는 강의 서두에 언급했던, 필름 아카이브의 소장자료를 참고해 실증적으로 연구한 주제 ‘ 1960~80년대 국내 영화검열사 ’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를 간략히 짚고 가자면, 국내 영화검열은 미군정 시기인 1946년, 군정법령 제115호 가 공포되면서 주무 부처가 영화의 상영허가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허가를 담당하는 부처의 명칭(공보부, 문교부, 문공부 등)은 자주 변경되었지만 1996년에 사전심의가 위헌 판결을 받기 전까지 이 법은 계속 시행되었다. 영자원이 공개한 검열 관련 소장자료는 대부분 1960~80년대에 상영허가를 담당한 부처에서 작성된 행정서류들이었고, 한국에 온 나는 이 자료들을 토대로 관련 주제를 연구했다. 연구를 소개하기 전, 우리가 검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를 먼저 공유해보자. 어느 사회에서든 ‘검열’은 대부분 독재나 반자유를 암시하는 부정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나는 영화나 문학이론에서 이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검열에 접근하는 경향을 살펴봤는데, 푸코의 담론 일부를 인용해 이를 설명해보고 싶다. *주1 푸코는 ‘권력(power)’이 정복이나 지배의 도구가 아니라 사회 도처의 여러 주체들 사이에 다양한 모습으로 편재되어있는 관계의 일부라고 말한다. 다수가 욕망하거나 획득하고 타도해야 할 실체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간의 관계 속에서 유동적으로 형성된 무정형의 네트워크라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에는 ‘저항’이 수반되는데, 나는 여기서 말하는 저항 역시 권력과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권력과 상호작용하거나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 또는 움직임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국내 영화검열 역시 검열자가 피검열자를 억압하려는 시도로만 인식되기보다, 두 주체가 활발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영화 창작과 배급의 생산성을 더하는 요소로 읽힐 가능성도 있음을 제안하고 싶다. 국내 영화검열, 특히 박정희 집권 당시 영화검열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영화가 시장에 효과적으로 진출하도록 돕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할리우드의 자체 검열이 목표로 하고 있는 바와 유사하다. 영화를 개봉시켜 더 넓은 시장으로 배급하기 위해 제작자는, 그 안에 담긴 표현과 내용이 다양한 관객에 의해 무리 없이 수용될 수 있게 하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특정 인종, 지역, 젠더 등에 대한 혐오 섞인 시선을 반영하거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작품은 윤리적 논란에 휩싸일 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더 많은 관객에 의해 향유될 기회 또한 잃게 된다. 산업 육성이 최대 목표였던 박정희 정부에서, 개봉한 영화가 시장에서 공유되지도 못하면서 관련 산업의 활성화까지 저해하는 사태는 반기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영화 감상이 세계화된 오늘날, 텍스트는 창작자에게 종속되지 않고 전 세계의 감상자들에게 열려 있다. 이들을 구성하는 여러 집단을 존중하고 시장 내 더 많은 관객에 대한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좋은 의미’의 검열(good censorship)의 필요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때이다. 피에르 부르디외 역시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창작자는 시장의 구조를 고려해 무언가를 ‘완곡하게’ 표현하고, 이를 수용할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해 이후에는 스스로 자체 검열을 진행한다고 논의한다. *주2 이처럼 산업과 더불어 사회적 소수자를 보호하는 검열의 경우 올바른 방향으로의 창작을 활성화할 수도 있다고 본다. 1983년 이래, 미국영화협회(Motion Picture Association of America)는 마가렛 헤릭 도서관(Margaret Herrick Library)을 통해 2만여 점의 자체 검열 관련 서류들을 공개했는데, 이 자료들을 연구한 몇몇 학자들 역시, 자체 검열이 영화로 하여금 젠더와 폭력, 인종, 국적 등의 주제에 좀 더 세심하게 접근하도록 하며 미국 영화산업에 생산성을 더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한국영화 검열서류의 디지털 스캔본을 대량으로 공개한 영자원 한국영화 검열의 역사에도 이러한 측면이 나타날까? 영자원에서 1960~80년대 영화검열 당국(공보부, 문공부 등)이 작성한 행정서류들의 디지털 스캔본을 공개하면서 이에 관한 연구가 가능해졌다. 현재까지도 507편의 작품에 대한 서류가 온라인으로 게시되어있어 어디서든 확인할 수 있고, 영자원 내 영상도서관 멀티미디어석을 이용하면 온라인으로 노출되어있지 않은 4,000여 편에 달하는 작품에 관한 서류 스캔본을 열람할 수 있다. 국가가 직접 작성했던 방대한 규모의 행정서류를 공개하는 공공 필름 아카이브는 국내에서 이곳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이전까지 구술사나 신문기사 등의 2차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 검열사 연구자들이, 실존하는 1차 자료를 근거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영화는 물론 국내 문화예술 행정의 역사가 궁금한 연구자들이라면 이 검열서류 컬렉션 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검열자외 피검열자의 관계, 그리고 <오발탄> 저서 Hollywood Diplomacy (2020)에 적었듯이, 중국의 영사(미국인)가 1933년 현지 영화계를 주제로 미국영화협회에 쓴 한 서신에서, 당시 중국의 영화들이 ‘ 승화(uplift) ’라는 기제를 영화에 어떻게 적용하는지가 나타난다. 영사에 따르면, 당국은 국가나 자국민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영화의 개봉을 검열로 통제했고, 대중에게 삶에 대한 낙천적인 의지를 주입하고 자국 문화에 성실히 적응하도록 하는 ‘승화’적 요소의 배치를 장려했다. 이 ‘승화’라는 개념은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이념과도 일맥상통한다. 당시 박정희는 이승만 집권기 동안 사회 전반에 번져버린 부패를, 전방위적인 개발을 통해 근면하게 척결해나가겠다는 정치적 목표를 내세웠다. 국민들의 ‘문화’ 역시 이를 바탕으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러지 못할 경우 나타나는 패배주의, 즉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어떠한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단정하는 나약한 관념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이런 패배주의나 비관주의, 허무, 우울 등의 개념은 그야말로 ‘문화적인 적’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도 고된 여정을 지나 마침내 그 위기를 극복하는 인물형을 보여주면서 ‘승화’의 순기능을 강조해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맥락을 참고해서 < 오발탄 >(유현목, 1961)의 검열 과정을 이해해보자.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불순영화가 재검열되고 상영중지 처분이 내려졌다. 이때 상영이 중지된 국내 영화가 <오발탄>인데, 중지 처분의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극중 한 노파가 “가자!”라고 외치는 장면이 월북을 암시했고, 반공 기조가 심한 박정희 정권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점을 자주 거론한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서류를 보면 조금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당시 내무부 치안국이 검열 당국인 문교부에게, <오발탄>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한 선전 자료”라는 내용으로 심의를 의뢰한다며 보낸 공문을 보면, 작성일이 쿠데타 발생 전인 1961년 4월 19일이다. 1960년대 초, 문화 정책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중앙정보부가 영화검열에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위 서신에서 보듯이 이러한 타 부처의 간섭은 치안국 등이 검열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5·16 군사정변 이전부터 나타났다. 이어서 5월 28일에, 치안국은 문교부에게 <오발탄>을 둘러싼 여론을 홍보한다는 취지로 다시 공문을 보낸다. 이들이 문서에 적어둔 “부분적인 인상”에서, “기타 제대 군인, 실직자, 박봉 생활을 하는 소시민 빈민층의 절망만을 나열하여 결론적으로 아무런 해결의 암시도 없이 비참하게 끝을 맺는 점 등”이라는 표현이 두드러진다. 영화가 시대적 고난이 야기한 상황만을 강조해 승화의 의지를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비관주의로 일관했다는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후 7월 20일 재검열을 거친 <오발탄>에 대해서는 결국 국내 상영 보류라는 결정이 내려진다. 중앙정보부 소속의 검열자가 작성한 의견서에도 “현 국가 재건 도상에 상반되는 내용”이라는 검열 이유가 적혀있어, 동 시기 건설적 미래에 대한 낙관적 희망을 가로막는다는 견해가 재검열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좌) 국산 영화 "오발탄" 심의 의뢰의 건(1961. 4. 19. / 발신: 치안국장, 수신: 문교부 문화국장), 그리고 한국영화 "오발탄"에 대한 여론 홍보(1961. 5. 28. / 발신: 치안국장, 수신: 문교부 문화국장) (우) 검열 의견서 (종합 재검열 분)(1962. 2. 6.) 검열이 검열자와 피검열자 간의 쌍방향적이고 미시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진행된 흔적도 엿볼 수 있다. 1963년, 제작자 김성춘 은 문제가 된 대사를 수정하고 혁명공약 일부를 마지막 크레딧에 명기했으며, 해당 작품은 본래 정부의 이념을 지지하려는 의도로 제작(주제의식이 ‘승화’임을 설득)되었기에 상영중지를 재고해달라는 진정서를 공보부에게 보냈다. 그러던 중 같은 해에,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의 영화학과 교수 리차드 맥캔(Richard Dyer McCann)이 국립영화제작소에 기술고문직을 수행하기 위해 방한했다. 그리고 그가 <오발탄>이 베니스영화제에까지 출품될 만한 수작이라고 평가하자, 영화계에는 작품 상영중지 해제를 요구하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좌) <오발탄> 제작자 김성춘이 중앙정보부장에게 보낸 진정서 (우) 리차드 맥캔 교수가 당시 공보부 공보국장 이성철에게 보낸 서신 이에 공보부는 대사와 화면 일부를 수정하는 조건으로 한 차례 상영보류 해제를 통고했지만 얼마 안가 시기상 상영이 적절치 못하다는 이유로 금세 결정을 번복했다. 그러자 김성춘은 본 작품이 제7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로부터 출품 제의를 받았고 미국 엠지엠스튜디오도 수입 의사를 밝혀왔다며 재상영 허가를 다시 한 번 요청했고, 공보부는 다시 정식으로 상영보류 해제를 결정한다. 당시 공보부가 김성춘의 진정서 내용을 바탕으로 작품에 대한 리차드 맥캔의 평가와 해외 수출의 필요성을 적시해 중앙정보부와 내무부 모두에 공문을 배포한 것으로 보아, 검열 당국인 공보부가 작품의 수출과 홍보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제작자의 협력자로도 기능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더군다나 외환위기가 심각했던 이 시기에 <오발탄>의 해외 수출 제의는 외화 보유액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서 정부 차원에서도 반갑게 다가왔을 것이다.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 8. 23. / 발신: 공보부, 수신: 중앙정보부 제5국장) 샛길 위에서 찾는 또 다른 목적지: 검열과 영화연구 한국영화 검열의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미국에서는 국가나 민간 소유 아카이브에 대량으로 소장되어있는 각종 자료를 참고하곤 했지만, 내가 검열사 연구를 시작한 당시 아쉽게도 영자원을 제외한 국내 유관기관에 관련 1차 자료가 보존된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신문기사, 구술사, 시나리오 등 주제와 직결되지 않은 자료들을 참고하면서 연구의 근거를 색다른 결의 자료들로 보충하기도 했다. 제약으로 여겼던 환경에서, 조금 다른 경로이더라도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최선을 다함으로써 의외의 창작성을 발견한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연구 과정에서 얻게 된 이 깨달음이 검열의 일면과도 맞닿아있음을 느낀다. 여러분 역시 ‘제한’된 환경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주변에 숨겨진 다른 선택지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는 효능감을 느껴보길 바란다. * 질문과 답변 * (질문1) 서두에서 말씀하셨듯이 할리우드 키드이셨던 어린 시절을 지나 지금은 해외 영화학자의 길을 걷고 계신다. 영화팬이자 연구자로서 현 시점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셨을 때 소회 가 어떠실지 궁금하다. (답변1) 최근 ‘한국문학과 영화 속의 여성’이라는 주제로 열린 학회에 갔다가 임순례 감독님께서 전해주신 말씀을 들었다. 본인도 OTT와 드라마 콘텐츠 진출을 앞둔 상황에서, 한국‘영화’의 위기는 어느 때보다 심각함을 강조하셨다. 임 감독님께서도 프랑스에서 영화를 공부하셨고 국내 영화문화의 발흥기에 시네필의 일원으로 활동하신 바 있다. 영화에 각별한 애정이 있으신 그 역시,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는 영화라는 매체의 위기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전해주신 것이다. 나 또한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했지만 지금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테두리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동시대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연구한다면 OTT 등의 뉴미디어는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주제이다. 현재 미국 콘텐츠 산업 내 주요 기업들도, 영화와 드라마, 기타 뉴미디어 콘텐츠들을 수평적으로 통합해 기획 및 제작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영화를 별도로 분리해 고유한 예술성을 되새기려는 움직임이 유용할지에 대해서는 사실 조금 회의적이다. 넷플릭스가 IP를 보유하고 있는 국내 오리지널 시리즈 영화 제작이 좌절된 <오징어 게임>은 오히려 넷플릭스에서 시리즈로 공개되면서 큰 성공을 거뒀다. 이제는 영화도 동시대 뉴미디어 매체를 이용해 전 세계에서 감상할 수 있는 콘텐츠 중 하나로서, 특정 작품만의 브랜드를 확립하고 지속적으로 부가 가치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한국의 경우 이러한 변화가 넷플릭스를 중심으로 발생하면서 콘텐츠 제작을 위해 미국 자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보이는 것이 우려되기는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20세기 국내 관객에게는 할리우드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발전을 거듭한 우리나라 콘텐츠가 이제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 여기에 계신 분들을 포함해, 앞으로 더 많은 젊은 세대가 이 기세를 이어받아 한국영화와 콘텐츠가 지닌 역량을 널리 알렸으면 한다. (질문2) 선생님께서 추구하시는 1차 자료 기반의 실증적 연구는 아카이브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인지, 아니면 실증적 연구가 먼저 이뤄졌기에 아카이브가 비로소 유지되고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인지가 궁금하다. 선생님의 개인적인 의견을 듣고 싶다. (한국영상자료원 원장 김홍준) (답변2) 실험영화 위주의 영상자료를 보존하는 뉴욕의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Anthology Film Archive)에 가보면, 말씀하신 일기나 편지 등의 사소한 기록들이 무척이나 많이 소장되어있다. 국내에서도 영자원 외에, 이렇게 넓은 스펙트럼으로 방대한 자료를 관리하는 사설 아카이브가 더 많이 설립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규모로 축적된 서류들을 분류하고 보존할 수 있는 인력 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아직 여기에 대한 투자가 부족하다는 점이 안타깝다. 최근 문화예술 정책의 예산과 역량은 거의 한류 콘텐츠의 해외 홍보에만 집중되어있는데, 이중의 일부만이라도 문헌 보존에 투자되어 한국영화사 연구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질문2에 대한 코멘트) 40년 전 미국에서 유학했던 경험을 돌이켜보면, 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영화 관련 도서들의 주제가 아주 실증적이었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같은 시기에 이론 위주의 영화 도서가 많이 읽혔던 국내와 달리, 미국에서는 무성영화 시대의 배우나 시나리오 작가의 회고록 등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소재를 바탕으로 영화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 것 같다. 오늘 전해주신 말씀을 참고하면, 이런 소재들이 연구되고 세상 밖으로 나와 이야기될 수 있었던 데는 아카이브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카이브가 소장하고 있는 다채로운 1차 자료들을 토대로 작지만 새로운 영화학적 주제를 발굴 하고, 이와 연관된 다른 자료들도 살펴보면서 경험적인 연구를 진척한 후에야 이론이 성립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자원도 각기 다른 잠재력을 지닌 영상자료들의 소재를 빠르게 파악하고 수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자료의 원 소장자들(기증자 등)이 본인이 보유한 자료의 가치를 정확히 평가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다소 안타깝다. 예를 들어, 필름이나 동영상, 포스터 등은 영화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면서 ‘수집될 만한’ 가치를 지닌 자료로 인식되지만, 영화연구 세미나 도중 작성된 발제 자료, 영화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의 중요성은 그에 비해 평가 절하되기 쉽다. 당장 눈에 띄지는 않더라도 영화사의 어느 한 순간을 간직한 채 향후 영화 연구자들의 자양분이 되어줄 1차 자료들은 형태와 관계없이 모두 소중하다 는 인식이 보다 많이 공유되었으면 좋겠다. (한국영상자료원 원장 김홍준) 김신재 배우가 박남옥 감독에게 보낸 성탄 카드(1989. 12. 6.)_이경주 기증 (편집자 삽입) *** 주1. 미셸 푸코(Michel Paul Foucault), The History of Sexuality: An Introduction , Vintage, 1990. 주2.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Language and Symbolic Power , Blackwell Publishers,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