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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영화]순열(존 휘트니, 1966)
존 휘트니는 모션 그래픽의 아버지로 기술되는 경우가 많다. 휘트니는 1955년부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UPA(United Productions of America)에서 일했다. 여기서 그래픽 디자이너인 솔 배스(Saul Bass)를 만났고, 둘이 함께 영화의 타이틀 시퀀스와 광고의 특수효과를 제작해서 유명세를 얻었다. 이때 제작했던 대표적인 타이틀 시퀀스가 히치콕의 < 현기증 >(1958)(사진1)이다. 이 시퀀스는 지금도 모션 그래픽 교재들에서 모범 사례로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기 때문에, 휘트니를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오해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휘트니가 1960년에 설립했던 회사의 이름이 모션 그래픽이었기 때문에, 그를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설명하는 것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휘트니의 이름 앞에 굳이 무엇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붙여야 한다면, 컴퓨터를 이용한 생성예술 혹은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의 아버지라고 붙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휘트니를 컴퓨터를 통해 소리와 빛을 연결하는 구조를 생성하고자 했던 작가로 설명하고자 한다. [사진1]<현기증(1958)>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4CZfSc6nJ8U'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휘트니는 1980년에 「디지털 하모니: 음악과 시각예술의 상보성에 관하여 Digital Harmony: on the Complementarity of Music and Visual Art」를 펴낸 바 있다. 이 책의 제목과 부제는 휘트니의 관심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데, 자전적 배경, 음악과 영화에 대한 사유들, 비디오디스크와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이해, 작업 방식들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휘트니는 1917년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태어났는데, 자신이 살았던 동네는 예술로 먹고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다고 회고하였다. 휘트니는 퍼모나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학교에 실망하고, 21살이었던 1938년에 네 살 아래 동생인 제임스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찾겠다는 희망을 품고 유럽으로 떠났다(이 글에서 휘트니는 존 휘트니를 지시하고, 제임스 휘트니는 제임스로, 둘을 함께 언급할 때에는 휘트니 형제로 표기한다). 그 희망은 비록 1년간의 유럽 체류로 끝이 났지만, 휘트니 작업의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휘트니는 로테르담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의 작업의 단초가 되고, 경력을 관통하는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를 보았다. 흰색으로 도장된 비행기 날개의 곡선, 철판의 모서리들, 철판을 연결하는 못의 기하학적 형상들과 떨림들 그리고 이 요소들이 비행에 따라 그려내는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이다. 휘트니는 이 부분들을 촬영해서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 생각은 단지 발상으로만 남았지만, 휘트니가 영화라는 매체에 설정한 질문과 과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휘트니에게 비행기의 날개와 그 부속들은 역동적인 구조와 부분들의 운동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한 대상이었다. 휘트니는 원래 음악을 하고 싶어 했는데, 음악에 비해서 세계는 너무나도 정적이라고 생각했다. 휘트니가 설정한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에게 세계는 베토벤의 음악과 비교했을 때 따분할 정도로 정적이다. 빛은 소리보다 빠른데도 불구하고, 소리를 재료로 하는 음악은 역동적이지만 빛을 재료로 하는 영화는 음악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무겁다. 그 이유는 영화가 카메라로 정적인 세계를 찍기 때문이고, 세계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카메라가 움직임이 큰 대상들을 클로즈업으로 찍거나 카메라를 빠르게 움직이고 편집의 호흡을 짧게 가져가서 역동적이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이 음악보다 가벼울 수는 없다. 또한 사람들은 집요하게 카메라로 촬영된 이미지에서 무엇이 어디서 찍힌 것인가를 찾으려고 애쓰며, 그것들을 분별해낼 수 없다면 사진적 이미지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즉 휘트니에게 영화의 기본적 문제는 음악만큼 추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휘트니가 영화에 설정한 과제와 목표는 ‘유동적인 건축 liquid architecture’이라는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다. 유동적 건축은 변화와 구조를 동시에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쾨테가 “음악은 유동적인 건축이고, 건축은 응고된 음악이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휘트니는 유럽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유동적인 건축이라는 개념을 접했고, 유동적이라는 말을 시공간 상에서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휘트니는 20세기에 이르러 시각예술이 마침내 자신의 참된 구성요소들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표면, 색채, 형태, 선, 질감과 같은 요소들은 시각예술의 알파벳이었고, 이 요소들을 발견함으로써 시각예술은 음악의 유동적 구조를 획득할 수 있었다. 반면에 휘트니에게 영화는 늘 현실의 어떤 장소에 속박되어 있는 매체였기 때문에, 영화가 유동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현실에 속하지 않는 어딘가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휘트니가 영화라는 매체에 요구했던 것은 음악에 준하는 역동성과 추상성을 갖추는 것이었고, 스스로에게 설정한 과제는 카메라로 매개되지 않으면서 빛을 구조화하여 음악에 상응하게 하는 것이었다. 빛과 소리의 구조적 상보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오래되었기 때문에, 휘트니의 생각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는 판단 역시 새로울 것은 없었다. 휘트니에 앞서 만 레이, 한스 리히터, 비킹 이겔링, 발터 루트만과 같은 작가들이 카메라 없이 빛을 매개하여 음악에 상응하는 구조를 만드는 방법을 탐구했었기 때문이다. 또한 카메라가 현실의 대상을 찍는다는 이유 때문에, 영화가 음악과 같이 유동적이 되기 위해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는 결론이 곧바로 내려질 수도 없다. 이를테면 이 연재에서도 다루어질 구조영화 작가들을 생각해보면, 굳이 음악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카메라를 버리지 않더라도 영화의 구조를 유동적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휘트니에게 고유하고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 계기는 쇤베르크의 음렬주의로부터 비롯된다. 휘트니의 유럽 체류는 1939년 파리에서 막을 내리는데, 이때 르네 라이보비츠(Rene Leibowitz)를 만나서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을 배웠다. 이 기법을 구성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한 음렬(tone row)은 반음계의 12음을 특정한 순서로 배열한 것이다. (2) 한 음렬 내에서 어떤 음도 반복되지 않는다. (3) 기본(Prime, P), 반행(Inversion, I), 역행(Retrograde, R), 역행-반행(Retrograde-Inversion, RI)을 각 음정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적용한다(P, I, R, RI를 각각 사분면에 표시한다고 할 때, 기본 P를 1사분면에 놓으면 기본과 좌우대칭을 이루는 역행은 2사분면에, 좌우/상하대칭을 이루는 역행-반행은 3사분면에, 상하대칭을 이루는 반행은 4사분면에 위치시킬 수 있다). (4) 음렬은 반음계에서 네 가지 변형 중 어떤 것으로부터도 시작할 수 있다. 이 원칙들을 적용해서 음렬을 구성하면 [그림1]과 같은 기본적인 구성이 가능하다. [그림1]12음기법을 이용한 음렬 구성의 예시 12음으로 이루어진 한 음렬에 대한 기본, 역행, 반행, 역행-반행을 행렬로 표시하면 [그림2]와 같다. 행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화살표는 기본을 지시하고 행에서 왼쪽으로 가는 화살표는 기본에 대해 역행을 하고 같은 도수만큼 이동(transposition)한 것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열에서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는 기본에 대한 반행에 같은 도수만큼의 이동을 지시하고, 위로 향하는 화살표는 그 역행에 도수이동을 나타낸다. 이렇게 하면, 기본 12, 역행 12, 반행 12, 역행-반행 12 음렬로 총 48개의 음렬을 얻을 수 있다.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은 제2빈악파의 작곡가들인 베베른이나 베르크 등에게 계승되어 음렬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림2]음렬의 행렬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의 핵심은 음악을 순수한 데이터와 문법으로 전환시켰다는 데 있다. 위에서 서술한 원칙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초기에 유한한 수의 원소를 갖는 집합과 이 원소들을 매핑하는 함수를 정의하고 나면, 나머지 절차들은 자동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즉 음악에서 유사 오토마타가 가능해진다(초기 상태와 상태 전이에 대한 정의는 있지만, 결과를 판단하고 종료하는 절차에 대한 규칙이 없다). 쇤베르크는 1926년에 12음기법을 처음 적용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에 착수하고 나서, “소리의 생산과 소리들의 관계의 정확성을 보장하고, 소리들을 초보적이고 믿을 수 없으며 무심한 음악가들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모든 악기의 장점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쇤베르크의 목표는 음악가의 일시적인 감정이나 직관으로부터 음악을 해방시키고, 음악을 생성하는 문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음악을 하나의 예술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형식언어로 전환하겠다는 의지이다. 음악이 형식언어가 될 수 있다면, 컴퓨터라는 추상기계에 의해 연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쇤베르크가 휘트니에게 미친 영향은 역동적 구조라는 측면에서 음악과 영화에 접근했던 휘트니를 생성적 구조라는 방향으로 틀게 했다는 데 있다. 또한 데이터와 문법으로 소리를 생성할 수 있다면, 빛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발상을 가능하게 했다. 요약하면 휘트니가 유럽 체류 기간에 스스로에게 설정했던 과제는 카메라를 통하지 않고 빛을 매개하여 소리에 상응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이 과제는 쇤베르크의 음렬주의를 통해서 빛과 소리가 생성되는 구조를 발견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이 모든 생각들이 유럽에서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 뿌리는 유럽 체류 기간에 내리고 있으며 도래할 매체인 컴퓨터를 향하고 있었다. 1939년 유럽에서 돌아온 휘트니 형제는 1936년부터 파라마운트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던 오스카 피싱거의 작품들을 보게 되었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휘트니 형제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패서디나에 있던 그들의 스튜디오에서 8mm 작품들을 만들었다. 이때 완성한 작품들은 <원본 주제에 대한 24개의 변주곡>이라는 제목으로 묶여졌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쇤베르크의 이론을 적용한 작품들이었다(공교롭게도 쇤베르크는 1934년부터 남가좌주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은 아래에 삽입한 제임스의 <원에 대한 변주곡>(1942)이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TnU88XWYjE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1]제임스 휘트니의 <원에 대한 변주곡>(1942) 휘트니 형제는 ‘변주곡’ 시리즈를 만들면서 피싱거의 방식(카드보드지를 기하학적인 형태로 잘라내서 움직이는 방식)을 차용했지만, 피싱거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소리를 삽입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각적인 요소들이 자동적으로 소리를 생성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고, [사진2]와 같은 장치를 고안했다. 사진에서 보이는 진자를 흔들면, 필름의 사운드트랙 부분에 사인파를 그려서 소리의 패턴이 새겨질 수 있도록 만든 장치였다. 이 장치를 이용해서 만든 작품이 <필름 습작 No. 1-5>(1943-44)[영상2]이다. 휘트니 형제는 사운드트랙 위에 그림을 그려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자신들이 고안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그러한 방식을 먼저 실험했던 작가 역시 오스카 피싱거였다. 오스카 피싱거는 [사진3]과 같이 그래픽 패턴을 그려내서 소리를 생성하는 실험을 1932년에 수행했던 바가 있고, 이 결과가 <장식 사운드 Ornament Sound>이다(이 작품은 비주얼 뮤직 센터(Center for Visual Music)에서 복원되었고 비메오(Vimeo)에서 유료로 스트리밍하고 있다 https://vimeo.com/ondemand/26951 ). [사진2]진자를 이용한 소리 생성 장치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kuZbgM8yxtY'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2]휘트니 형제의 <필름 습작 No.1> [사진3]오스카 피싱거의 <장식 사운드>의 그래픽 패턴들 제임스는 <필름 습작> 시리즈를 완성한 직후 뉴욕으로 가서 힐다 르베이(필자가 쓴 마리 멘켄의 < 노트북 > 리뷰에도 등장하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초대 디렉터, 이름이 다소 길어서 힐라 르베이, 바로네스 르베이 등으로도 불렸다)를 만나서 작품을 구매해줄 수 있는지와 새로운 작품을 위한 기금을 줄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르베이는 <필름 습작> 시리즈뿐만 아니라 <원본 주제에 대한 24개의 변주곡> 역시 구매했고 1944년과 1945년 초에 상영하였다. 이 상영회에는 토니 스미스, 존 케이지, 테네시 윌리엄스, 마르셀 뒤샹 등이 참석했었다. 그런데 성격이 괴팍하기로 유명했던 르베이는 휘트니 형제의 작품을 보다가 영사실로 뛰어가서 작품 상영을 중단시켰다. 다행히 이 상영회에 잭슨 폴록 역시 참석해 있었고, 폴록이 개입해서 상영회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후에 이 작품들은 구겐하임에서 정기적으로 상영되었다. 또한 휘트니 형제는 1949년 브뤼셀 영화제에서 <필름 습작>으로 1등상을 수상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휘트니는 록히드사에서 초고속 미사일 사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M5 대공포 디렉터(Antiaircraft Gun Director)라는 대공방어 미사일 유도 시스템을 접하게 되었다. 이 장비는 원래 영국에서 개발했던 것으로 록히드사가 개조해서 사용 중이었는데, 무게가 850파운드에 11,000개가 넘는 부품으로 구성된 아날로그 컴퓨터였다. 휘트니에게 M5는 미사일 유도 시스템이 아니라, 카메라 없이 빛을 매개하고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그의 목표에 부합하는 장치였다. 전쟁이 끝나고 휘트니는 불용품으로 경매에 나온 M5를 구입하고, 추가로 중고 부품들을 모아서 M5를 그래픽 생성 장치로 개조하였다. 휘트니가 만든 장치는 요즘으로 치면 모션 콘트롤 카메라에 해당한다. 휘트니에게 유명세를 안겨 주였던 영화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들은 그가 개발한 장비로 만들어졌다. 휘트니는 영화 타이틀과 광고 특수효과 작업으로 얻은 수익금으로 1960년에 모션 그래픽이라는 회사를 설립해서 상업적인 작업들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그가 개발한 장치로 만든 첫 작품 <카탈로그>[영상3]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에는 휘트니가 고안한 슬릿-스캔(slit-scan) 방식이 적용되었는데, 이 방식은 요즘에도 미디어 아트 작품들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휘트니가 개발한 장치로 작업하는 방식은 <컴퓨터: 인간의 지배에 도전하다>[영상4]라는 다큐멘터리의 일부에서 볼 수가 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TbV7loKp69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3]휘트니의 <카탈로그(1961)>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5eMSPtm6u5Y'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4]휘트니의 아날로그 컴퓨터 작업 방식 휘트니는 아날로그 컴퓨터로 한 작업들로 평가를 받아서 1966년에 IBM 아티스트 레지던스에 초청되었고 1969년까지 후원을 받았다. 여기서 GRAF(Graphic Additions to FORTRAN)의 개발자인 잭 시트론과 만나 협업할 수 있게 되었다. 시트론은 IBM 모델 360 컴퓨터와 2250 그래픽 디스플레이 콘솔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그래픽 콘솔은 다소 복잡한 방식으로 작동되었는데, 4000 * 4000개의 점을 실시간으로 표시할 수 있었다. 휘트니는 GRAF를 배웠고, 이 언어를 사용하여 1966년에 < 순열 >[영상5]을 만들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kdYxJ85RSd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5]휘트니의 <순열>(1966) < 순열 >은 휘트니가 디지털 컴퓨터로 만든 첫 작품이었다. <순열>은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매 프레임이 총 281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왜 281개의 점이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짐작건대 소수들 중에서 시스템이 처리하기 용이한 수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순열>은 총 281개의 점의 초기 위칫값과 일련의 명령어를 이용하여, 프레임별로 점들의 위치를 변화시키면서 만들어졌다. 그 명령어들의 일부를 글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스크린의 중앙에서부터 시작하라. 계산한 거리만큼 오른쪽으로 이동해라. 계산한 각도만큼 원주를 따라 왼쪽으로 회전하라. 거기서부터 외곽 방향으로 새로운 반지름을 계산하고, 원주를 따라 새로운 각도만큼 회전하라. 그 위치에 하나의 점을 찍고, 나머지 280개의 점에 대해서도 동일한 절차를 반복하라. < 순열 >의 시각적 패턴은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알고리즘으로 짜여있다. 반지름과 각도를 매개변수로 하는 일대일 대응 함수들이 전부이다(휘트니는 「디지털 하모니」에서 반지름 변수를 RT로, 각도 변수를 DT로 표시하면서 이 두 변수가 달라짐에 따라 어떤 패턴이 생성되고, 이에 대응하는 음계는 무엇인지 상세하게 설명해놓았다. 다소 분량이 많은 관계로 이 글에 옮기기가 어려운데, 관심 있는 분들은 56-59페이지와 70-71페이지에 삽입된 그림만 참조해 봐도 좋을 것 같다). 휘트니가 <순열>에서 수행했던 작업 방식은 <스크리닝 룸>(하버드 대학의 인류학과 교수이자 대학 내 필름 연구 센터를 설립했던 로버트 가드너가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진행했던 프로그램으로, 휘트니가 첫 번째 출연자였고 이외에도 미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가들이 출연했었다. 이 중에서 20여 편은 DVD로 발매되어 판매 중이다)이라는 TV 프로그램[영상6]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BaW4DTKNflA'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6]<스크리닝 룸>에 출현한 휘트니의 인터뷰 휘트니가 < 순열 >에서 사용했던 작업 방식은 디지털 컴퓨터에서 포트란(FORTRAN)과 같은 형식언어를 사용했을 때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는 절차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휘트니에게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쇤베르크의 12음기법에 대응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휘트니의 작품들에서 원형의 패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가 특별히 반지름과 각도라는 두 변수를 통해서 생성되는 패턴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변수를 사용했을 때 만들어지는 패턴들(대표적으로 장미꽃잎과 같은 패턴)들은 사전에 계획되었던 것이 아니라, 두 변수들의 비율을 변경해가면서 생성되었던 것이다. 휘트니는 반지름과 각도의 비율을 변경했을 때 특정한 패턴이 생성되었다가 점이 분산되어 임의로 흩어진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긴장과 이완의 반복으로 이해했다. 그가 유동적 건축이라는 개념을 이해했던 방식대로 <순열>을 만들었던 것이다. 쇤베르크의 이론에 받은 영향을 고려하면 휘트니가 말하는 하모니가 어색해 보이지만, 이때 하모니는 화성이 아니라 가로 대 세로, 반지름 대 각도 등의 비율에 따라 긴장이 생성되고 해체된다는 것을 뜻한다. 휘트니가 < 순열 >에서 디지털 컴퓨터를 처음 사용했다고 해서, 카메라와 필름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 카메라와 필름은 촬영장치가 아니라 하드 디스크를 대신하는 저장장치였다. 휘트니는 아날로그 컴퓨터를 사용했던 <카탈로그>부터 컴퓨터를 시각적 패턴을 생성하는 데 사용했고, 녹화와 후반작업은 필름으로 했다. 컴퓨터로 시각적 패턴을 생성하고 난 다음에 한 프레임씩 흑백 필름으로 촬영하고, 색깔은 옵티컬 프린터를 이용해서 입혔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당시의 컴퓨터 시스템의 저장과 그래픽 능력이 빈약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휘트니가 비로써 카메라와 필름을 내던진 것은 <아라베스크>(1975)를 만들면서부터였다. <순열>에서 사용된 음악은 순다람 발라찬더(Sundaram Balachander)가 연주한 남인도 음악이었다. 휘트니 형제가 피싱거의 작품을 기성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음악의 사용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선택 역시 당대 컴퓨터의 연산 능력으로 하나의 코드로 그림과 소리를 동시에 생성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만약 휘트니가 동시대와 같은 컴퓨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면 그가 설정했던 과제들을 고려해볼 때, 실시간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에 가까운 작업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 순열 >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색채에 있다.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한다는 과제에 비추어본다면, 색채 역시 일련의 규칙들을 따랐어야 했다. 그러나 특정한 규칙을 발견할 수 없고 임의로 선택된 것처럼 보인다. [영상4]에서 카메라가 위에 고정되어 있고 회전하는 이미지 디스크 아래에 휘트니가 컬러 필터를 삽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색채만큼은 작가의 선택과 회전하는 디스크의 속도가 조합되어 반쯤은 의도적이고 반쯤은 우연히 결정되도록 남겨두었다. 색채에서 어떤 규칙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라베스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 점들의 위치를 계산하는데 있어서는 엄밀한 규칙을 적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색채와 관련해서는 작가의 결정도 아니고 완전히 우연도 아닌 둘 사이의 애매한 중립을 선택했던 것일까? 앞서 설명했듯이 휘트니가 사용할 수 있었던 컴퓨터의 그래픽 시스템으로는 색채를 실시간으로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색채를 실시간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은 필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필름은 현상과 프린팅 과정에서 색을 균일하게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당시의 휘트니에게 색채는 계산 불가능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한계가 휘트니가 비디오라는 매체의 미래를 낙관했던 이유이다. 비디오에서는 실시간 피드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휘트니는 색채를 온전히 계산 가능한 영역으로 옮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휘트니는 색채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다소 복잡한 심경을 밝혔다. 화가에게 색채는 일반적으로 물감, 손, 눈이라는 세 요소간의 직접적인 일대일 상호작용으로서 직관적으로 경험된다. 이토록 친밀한 스스로 직접 하는 상호작용은 이성보다도 창의적인 마음을 요구하며, 컬러 필름으로 작업하는데 필요하다. 컬러 필름의 현상 과정을 화가처럼 통제하고자 했던 나의 노력들은 종종 좌절되고 말았다. 현상실과 프린팅 단계들에서 걸리는 시간은 순간적인 직관과 실제적인 색채 효과 사이를 단절시켰다. 휘트니는 색채에 관해서 만큼은 화가의 직관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휘트니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휘트니와 동시대에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을 했던 스탠 반더빅, 벤 라포스키, 메리 엘렌 뷰트에게도 규칙에 온전히 주도권을 넘기지 않고 마지막까지 창조의 신비성이라 불릴만한 영역을 고집하는 태도가 발견된다. 그래서 동시대에 독일에서 컴퓨터 예술을 개척했던 프리더 나케는 “미국/캐나다의 접근 방식은 이론이 없다. 그냥 즐기고 네 작업을 하고 창조적이 되며 뭔가 흥미로운 것을 하라는 식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캐롤린 케인(Caroly L. Kane)은 「색상 알고리즘: 코드 이후의 색채 합성, 컴퓨터 아트와 미학 Chromatic Algorithms: Synthetic Color, Computer Art and Aesthetics after Code」에서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독일 방식과 신비주의적이고 주관적인 미국 방식을 비교하였다. 이 책에서 케인은 미국 방식을 주체와 저자성(authority)이라는 낭만적인 관념을 유지하려는 태도로 해석하고 있다. 케인의 해석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만 개인적으로 좀 더 흥미로운 해석은 자벳 패터슨(Zabet Patterson)의 「대포 제어기로부터 만다라까지: 존과 제임스 휘트니의 사이버네틱 영화 From the Gun Controller to the Mandala: The Cybernetic Cinema of John and James Whitney」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논문에서 패터슨은 휘트니가 개발한 M5 대공 방어 미사일 유도 장치가 영화 제작에 사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패터슨은 영화라는 매체와 미사일 유도 장치가 인간의 시각과 신체를 구조화하는 방식의 차이를 강조하였다. 영화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기반한 매체이다. 반면에 미사일 유도 장치는 목표물을 쫓는다는 점에서 전투기에 부착된 반구형 포탑과 같은 계열의 장치이다. 영화와 반구형 포탑 장치 모두 객관성과 투명성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카메라 옵스큐라에 기반한 영화는 성찰적이고, 관객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게 한다. 반면에 반구형 포탑 장치는 시야에 들어온 목표에 신체가 즉각적으로 개입하고 반응하도록 훈련하여 시스템 회로의 일부가 되게 만든다. 패터슨은 휘트니의 < 순열 >을 분석하면서, 관객이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흐르고 변화하는 패턴들을 기억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의 순수한 지각한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고 보았다. <순열>은 사용자의 시선을 목표물에 고정시키고 신체가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반구형 포탑 계열의 장치로 만들어졌지만, 휘트니가 순수한 추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관객이 사이버네틱 시스템의 일부로 종속되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타당하다면 휘트니가 색채에 대해서 주저했던 이유도 M5와 영화라는 이질적인 시각체계가 교차할 수 있는 비결정적인 영역을 남겨두려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글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패터슨의 논의를 좀 더 전개시켜보면 요즘에 유행하는 VR영화가 논리적으로 가능한 개념인지와 이질적인 시각체계를 결합하기 위해서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따져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휘트니는 「디지털 하모니」에서 1960, 70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두 가지 흐름-영화에서는 언더그라운드, 미술과 음악에서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에 불만을 표했다. 휘트니는 1960년대에 한때 뉴욕에서 20세기 초반 유럽 예술의 기준을 가장 젊은 예술인 영화에 이식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전위를 자처하는 영화작가들이 그 노력들을 한 번도 제대로 평가한 적이 없었다고 보았다. 그 노력들 대신에 들어선 작가들과 관객들은 스스로를 언더그라운드로 격하시키며, 성행위나 개척하는 것을 언더그라운드라고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휘트니는 1960년대 당시에 우연과 주역에 열광했던 지식인 부류의 태도에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우연과 주역에 대한 관심을 마치 우연이라는 신비에 의지하면 시나 음악이 저절로 완성될 것처럼 간주하는 태도라고 비난하였다. 휘트니는 1970년대 초반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유행했던 것도 우연에 대한 열광이 연장된 것이라고 보았다. 컴퓨터가 난수를 발생시키는 최상의 장치였기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하면 우연이라는 원칙을 따르는 예술 창작이 가능하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휘트니는 뉴욕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이 당시 컴퓨터 기술이 가장 앞섰던 캘리포니아로 몰려왔지만 이내 곧 물러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당시의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밑바탕부터 스스로 만들어가거나 이미 완성된 기술을 활용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는데, 이 두 가지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휘트니는 그가 활발하게 작업했던 당대에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 양쪽에서 모두 환대를 받았지만 동시에 배제되기도 했다. 그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영화 쪽에서 휘트니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작가 정도로 치부되고, 미술 쪽에서 컴퓨터 예술을 논의할 때 막스 벤제의 정보미학과 프리더 나케와 같은 독일 작가들 위주로만 다루어왔다.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미술, 음악에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은 이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휘트니는 양쪽 모두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암묵적인 가정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 가정은 생성 문법에 의존하고 있다. 휘트니는 촘스키가 두 가지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새로운 문법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가의 여부이고, 두 번째는 음악과 예술이 당연히 언어인가의 여부이다. 휘트니는 이 두 질문에 응대함으로써 새로운 문법과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 모두의 과제라고 보았다. 지난 20여 년 간 국내에서 전개되어왔던 디지털 영화와 미디어 아트에 관한 논의들을 돌아보면,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분리되어 별다른 교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40년여 전에 휘트니가 설정했던 과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탐구해야 할 영역으로 남아있다. ※ 이 글에서 언급된 영화들과 휘트니 형제에 관한 사실과 일부 견해들은 다음의 책과 논문들을 참고하였다. Carolyn L. Kane, Chromatic Algorithms: Synthetic Color, Computer Art and Aesthetics after Cod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4. Paul J. Karlstrom(ed.), On the Edge of America: California Modernist Art, 1900-195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John Whitney, Digital Harmony: On the Complementarity of Music and Visual Art, Kingsport Press, 1980. Zabet Patterson, “From the Gun Controller to the Mandala: The Cybernetic Cinema of John and James Whitney,” Grey Room 36, Summer 2009, pp. 36-57.
[칼럼][내 마음대로 각색해보는 영미문학 프로젝트 #3]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혹시 읽어본 사람이 있는지 부드럽게 묻는 미국인 교수의 질문에 손을 드는 학생은 아무도 없다. 나는 그가 강의실 연단에 서서 들어 보인 그 책을 「벙어리」라는 제목의 번역본으로 먼저 보았다. 열아홉 살, 진로상담을 하고 난 다음 날 저녁 시간에 담임선생이 나를 중국집으로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며 함께 건넨 선물이었다. 손때가 많이 타 있던 그 책은 살짝 접어놓거나 흐릿하게 밑줄이 그어진 페이지를 곳곳에 숨겨놓고 있었는데, 나는 시험 답안지라도 미리 전달받은 사람처럼 몰래 숨겨가며 그것을 읽었다. 그중에 거의 통째로 괄호가 처져 있던 페이지들이 기억난다. 그것은, 청각장애가 있는 주인공 ‘존 싱어’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러 간 부분이다. 그동안 존 싱어가 편지로 다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정신없이 빠르게 수화로 늘어놓으면, 친구는 다 이해한다는 듯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짜증을 내며 침대를 발로 쾅쾅 찬다. 그러다가 또 졸린 눈이 되어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면서 존 싱어의 얘기를 듣는 것이다. 마음속에 쌓아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당황할 시간조차 아까운 존 싱어는 친구와 같은 병실을 쓰며 매일을 함께 보내는 환자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면회시간이 끝나고, 병실을 나서던 그는 작별인사 대신에 조용히 주먹을 꽉 쥔다. 열아홉 살,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의 내 머릿속엔, 존 싱어의 그 ‘조용히 꽉 쥔 주먹’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의 비주얼이 너무 생생해서 그대로 그려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라고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The Heart is a Lonely Hunter」이란 책을 소개하던 미국인 교수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매번 속으로 대답한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열아홉 살 때는 미처 몰랐지만.’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고 이름마저 확신을 할 수 없게 된, 당시의 미국인 중년 남자는 ‘현대 미국소설’이라는 소설강독 수업시간으로 처음 만난, 내 대학 시절 영문과 교수였다. 지금의 내 독서편력과 취향의 척추를 만들어준 사람이기도 한 그가,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라서 맥주 한잔하며 읽기에 좋습니다.”, “이 책은 커버에 손을 대고만 있어도 뜨거운 것 같습니다.” 식의, 마케팅용 한 줄 카피처럼 책에 대한 소개를 시작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그러니까 나는 책 그 자체 보다 그의 소개말에 더 관심이 가고, 간혹 소름마저 돋는 것이다. “존 싱어의 꽉 쥔 주먹은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 이야기인 것이죠.” 언젠가 강의실 연단에 서게 되면 나도 그렇게 얘기할 것이다. 카슨 매컬러스 Carson McCullers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은 카슨 매컬러스가 스물세 살일 때 쓴 장편 소설이다. 거의 평생을 소아마비, 뇌졸중, 흉막염, 패혈성 질환, 유방암에 시달리며 휠체어에 앉아 지내다가 쉰 살의 나이에 세상을 뜬 그는, 뭔가 심한 벌을 받고 있는 듯한 신체적 외양과 고독한 내면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룬 작가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보면, 그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조금씩 분리해 만들어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결혼식의 멤버 The Member of the Wedding」의 주인공 프랭키는 열두 살이라는 나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구인 소녀이고, 「슬픈 카페의 노래 The Ballad of the Sad Cafe」의 야비하고 인색한 카페 주인 아멜리아는 엄청나게 큰 키와 근육, 사팔뜨기 눈을 가진 주인공으로, 꼽추와 사랑에 빠진다. 「황금빛 눈동자에 비친 그림자 Reflections in a Golden Eye」라는 중편소설엔 자신이 혐오하는 아내를 밤마다 훔쳐보는 군인에게 도착적인 매력을 느끼는 성불구자 남편이 등장한다(67년에 만들어진 영화 버전에선 무려 말론 브랜도가 그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의 주인공이자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존 싱어’와, 그의 유일한 친구 ‘스피로스 안토나풀로스’는 둘 다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들. 공통적으로, 뭔가 되게 암울해 보이는 환경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결국엔 다 비극을 맞이하면서 끝날 것 같은 불길한 암시를 시작부터 던져주는 이야기들이지만, 지금 이렇게 ‘내 마음대로 각색하기’ 같은 칼럼에서 시간과 지면을 들여 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적어도 내겐 이 책이 ‘술 한잔하고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다, 책 커버에 손만 대고 있어도 뜨거운 느낌을 주는, 진짜 러브 스토리’ 이기 때문이다. 이 책엔 말 못 하는 두 명의 청각장애인들 외에, 음악가가 되고 싶은 사춘기 소녀, 흑인 인권운동에 삶을 바치는 흑인 의사,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노동자, 그들이 모이는 카페의 주인 남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서두에 언급한 ‘존 싱어’와 ‘스피로스 안토나풀로스’의 만남과 이별을 다룬, 첫 번째 챕터의 오프닝 십여 페이지를 유난히 많이, 또 자주 생각한다. 이 짧은 챕터는 그 자체만 따로 떼어놓고 보아도 하나의 독립된, 아름다운 단편소설에 다름없다. 그래서 몇 년 전에 구한 오디오북 파일에서 이 오프닝 챕터만 따로 잘라내 핸드폰에 넣고 다니면서 자주 듣는다. 총 열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의 이 오디오북을 읽은 사람은 체리 존스(Cherry Jones)라는 배우로, 영화 < 다우트 >의 원작인 연극무대에서 원장수녀로 나와 토니상을 수상한 브로드웨이의 베테랑이다. (영화버전에선 아시다시피 메릴 스트립이 그 역할을 연기했다) 미드 <24>의 팬이라면 위풍당당한 앨리슨 테일러 대통령으로 나왔던 그를 기억할 것이고.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처럼 마르고 가차 없는 체리 존스의 목소리가, ‘마을에 벙어리가 둘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함께 다녔다.’ 는 문장을 읽으며 시작하는 오프닝 챕터를 듣고 있노라면, (어쩌면) 이 책의 ‘존 싱어’라는 남자는 영미문학 역사상 가장 외롭고 고독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와중에도 그 목소리에 물기가 묻은 것처럼 들리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오프닝 챕터의 마지막 문단으로, ‘존 싱어’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리를 질질 끌며 홀로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이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도, 차가운 비가 내려도,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오는 날에도, 그의 걸음은 주저하고 얼굴은 고요했다고, 매우 슬프거나 아주 현명한 사람의 얼굴에서나 볼 수 있는 ‘생각에 잠긴 듯한 평화로움’이 그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그런 얼굴과 걸음으로 여전히 그렇게 마을의 거리를 혼자서 돌아다녔다고, 항상 조용히, 혼자서. 자, 그렇다면, ‘일방적인 사랑의 대가는 가늠조차 하지 못할 고독함’ 이라는 것이, 이 두 청각장애인 친구의 만남과 이별을 다룬 오프닝 챕터를 ‘내 마음대로 각색한’ 버전의 테마가 될 것이다. 두 주인공이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설정도 지금 당장 내게 꼭 필요한 도전이다. 등장인물이 항상 말이 많고 수다를 떨어야 안심이 되고 직성이 풀리는 이야기를 주로 쓰고 만드는 나로선, 러닝타임 내내 한마디의 말도 없이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창작자들에 대한 매혹과 질시가 어쩔 수 없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신병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친구를 향해 ‘존 싱어’가 버스 아래에서 미친 듯이 수화를 하며 마음속의 말을 내뱉던 그 순간, 친구는 아침에 싼 도시락이 잘 있는지 확인하느라 바빠서 그를 보지 못한다. 책을 읽을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에서도 이 부분에선 보는 이들의 가슴이 으깨지거나 찢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버스가 출발하면서 ‘존 싱어’는 도시락을 확인하고 마음이 편해진 친구와 아주 잠깐 눈이 마주치는데,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그 친구는 ‘이미 저 멀리로 가 버린 듯한 눈빛’으로 ‘존 싱어’를 바라본다. 결국, 친구는 그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존 싱어’는 휘청대는 걸음과 자포자기와 체념이 섞인 평화로운 얼굴로, 마을을 돌아다니게 된다. 조용히, 혼자서... 그리고, 디 엔드. <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1968) 포스터 이 책은 1968년도에 영화로 한 번 만들어진 적이 있다. 당시 ‘존 싱어’를 연기해 아카데미 후보지명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알란 아킨’이다. 그게 누구냐면, < 미스 리틀 선샤인 >의 그 괄괄한 할아버지. 나는 오로지 그를 비극적 멜로드라마의 히어로인 ‘존 싱어’로만 기억하고 있어서,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이는 손자에게 “젊었을 때 섹스를 많이 해야 해~” 라고 능글맞게 충고하던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할아버지로 나온 그를 처음 봤을 때 조금 충격을 받았다. 죽었던 ‘존 싱어’가 무덤에서 돌아와서 내는 것처럼 허스키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 <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1968)의 알란 아킨 (위) < 미스 리틀 선샤인 >(2006)의 알란 아킨 (아래)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다시 돌아간 그곳은 학교 근처의 중국집으로, 담임선생과 마주 앉아 짜장면을 먹고 있는 당시의 나는 뭔가 비밀이 많은 척하는 열아홉 살이다, 전날 있었던 진로상담에서 그에게 신방과에 진학해 방송국 피디가 되겠다고 적어냈지만, 사실은 작가가 되어 소설을 쓰고 싶다는 얘기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털어놓았었다. “고개 들고 만두도 좀 먹으라”며 군만두 접시를 밀어주는 담임은 자기도 대학생일 때 소설을 몇 편 쓴 적이 있고 신문에 투고까지 했다고 말한다. 그러다 큰 상도 한 번 탄 적이 있는데 시상식에 참석하러 서울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내내 발을 동동 구르고 속으로 끅끅대며 고함을 쳤다고도 한다. 좋아서... 그러더니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지금 내가 읽으면 좋을 만한 걸 하나 가져왔다며 손때가 많이 탄 책 한 권을 건넨다. 추상으로 그려진 사람 얼굴 그림이 있는, 칙칙한 색깔의 커버엔 「벙어리」란 제목이 보인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라는 원제를 몇 번이나 강조해서 말해주는 담임선생의 담당 과목은 ‘화학’이다. 열아홉 살, 그해 고3 수험생이 된 나는 학급일지를 작성하는 ‘서기’ 였고, 매일 정규수업시간이 끝나면 교무실에 들러 담임선생의 사인 받는 일을 했다. 당시 담임선생은 중년의 나이도 훌쩍 넘겨 슬슬 노년으로 접어들던 시기의 남자였고, 빈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엄격한 분위기의 사람이었지만, 학급일지의 사인을 해주며 내게 한 마디씩, 두 마디씩 건네던 그의 목소리는 매번 친절하고 따뜻했다. 나는 그 후로도 가끔씩 그로부터 손때가 탄 책을 몇 권 전달받았다. 어떤 책은 읽고 나중에 돌려달라는 것도 있었고, 그냥 가지라고 했던 책도 있었다. 그게 뭐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중에서 단 한 번도 책에 대한 감상이나 소회를 그가 내게 따로 물어보거나 내가 그에게 먼저 얘기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뭔가 신기하면서도 왠지 송구스런 기분을 들게 한다. 그가 그런 비밀스런 호의를 일부러 내게 건넬 이유가 없었다는 걸 굳이 떠올려보면, 그 후 근 이십 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그가 내게 최초로 선물한 「벙어리」란 책이 어떻게 내 안에서 살아남고 오랫동안 가지를 쳐서 < 장례식의 멤버 >라는 내 첫 번째 장편 영화의 무의식이 되었는지, 그 영화의 주인공 소년과 ‘존 싱어’ 사이에 놓여있는 브리지라고 해야 할까, 뉴욕 카페의 손님들이 ‘존 싱어’를 붙잡고 자기 얘기를 늘어놓듯, 영화 속 소년을 둘러싼 가족들이 어떻게 그 아이에게 자기들의 외로움을 토로하고 있는지, 에 대해서 다소 두서없는 이야기일지언정 편지로 써야 하지 않을까, 싶은 거다. 그렇다면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것은 사랑 이야기네요. 그동안 저도 조용히 주먹을 몇 번씩 꽉 쥐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존 싱어처럼.” #1 펀 홈 #2 안녕, 내일 또 만나 #3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4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5 이모와의 여행, 그 외 몇몇
[테마연재]③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혹시 읽어본 사람이 있는지 부드럽게 묻는 미국인 교수의 질문에 손을 드는 학생은 아무도 없다. 나는 그가 강의실 연단에 서서 들어 보인 그 책을 「벙어리」라는 제목의 번역본으로 먼저 보았다. 열아홉 살, 진로상담을 하고 난 다음 날 저녁 시간에 담임선생이 나를 중국집으로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며 함께 건넨 선물이었다. 손때가 많이 타 있던 그 책은 살짝 접어놓거나 흐릿하게 밑줄이 그어진 페이지를 곳곳에 숨겨놓고 있었는데, 나는 시험 답안지라도 미리 전달받은 사람처럼 몰래 숨겨가며 그것을 읽었다. 그중에 거의 통째로 괄호가 처져 있던 페이지들이 기억난다. 그것은, 청각장애가 있는 주인공 ‘존 싱어’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러 간 부분이다. 그동안 존 싱어가 편지로 다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정신없이 빠르게 수화로 늘어놓으면, 친구는 다 이해한다는 듯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짜증을 내며 침대를 발로 쾅쾅 찬다. 그러다가 또 졸린 눈이 되어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면서 존 싱어의 얘기를 듣는 것이다. 마음속에 쌓아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당황할 시간조차 아까운 존 싱어는 친구와 같은 병실을 쓰며 매일을 함께 보내는 환자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면회시간이 끝나고, 병실을 나서던 그는 작별인사 대신에 조용히 주먹을 꽉 쥔다. 열아홉 살,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의 내 머릿속엔, 존 싱어의 그 ‘조용히 꽉 쥔 주먹’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의 비주얼이 너무 생생해서 그대로 그려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라고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The Heart is a Lonely Hunter」이란 책을 소개하던 미국인 교수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매번 속으로 대답한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열아홉 살 때는 미처 몰랐지만.’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고 이름마저 확신을 할 수 없게 된, 당시의 미국인 중년 남자는 ‘현대 미국소설’이라는 소설강독 수업시간으로 처음 만난, 내 대학 시절 영문과 교수였다. 지금의 내 독서편력과 취향의 척추를 만들어준 사람이기도 한 그가,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라서 맥주 한잔하며 읽기에 좋습니다.”, “이 책은 커버에 손을 대고만 있어도 뜨거운 것 같습니다.” 식의, 마케팅용 한 줄 카피처럼 책에 대한 소개를 시작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그러니까 나는 책 그 자체 보다 그의 소개말에 더 관심이 가고, 간혹 소름마저 돋는 것이다. “존 싱어의 꽉 쥔 주먹은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 이야기인 것이죠.” 언젠가 강의실 연단에 서게 되면 나도 그렇게 얘기할 것이다. 카슨 매컬러스 Carson McCullers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은 카슨 매컬러스가 스물세 살일 때 쓴 장편 소설이다. 거의 평생을 소아마비, 뇌졸중, 흉막염, 패혈성 질환, 유방암에 시달리며 휠체어에 앉아 지내다가 쉰 살의 나이에 세상을 뜬 그는, 뭔가 심한 벌을 받고 있는 듯한 신체적 외양과 고독한 내면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룬 작가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보면, 그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조금씩 분리해 만들어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결혼식의 멤버 The Member of the Wedding」의 주인공 프랭키는 열두 살이라는 나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구인 소녀이고, 「슬픈 카페의 노래 The Ballad of the Sad Cafe」의 야비하고 인색한 카페 주인 아멜리아는 엄청나게 큰 키와 근육, 사팔뜨기 눈을 가진 주인공으로, 꼽추와 사랑에 빠진다. 「황금빛 눈동자에 비친 그림자 Reflections in a Golden Eye」라는 중편소설엔 자신이 혐오하는 아내를 밤마다 훔쳐보는 군인에게 도착적인 매력을 느끼는 성불구자 남편이 등장한다(67년에 만들어진 영화 버전에선 무려 말론 브랜도가 그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의 주인공이자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존 싱어’와, 그의 유일한 친구 ‘스피로스 안토나풀로스’는 둘 다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들. 공통적으로, 뭔가 되게 암울해 보이는 환경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결국엔 다 비극을 맞이하면서 끝날 것 같은 불길한 암시를 시작부터 던져주는 이야기들이지만, 지금 이렇게 ‘내 마음대로 각색하기’ 같은 칼럼에서 시간과 지면을 들여 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적어도 내겐 이 책이 ‘술 한잔하고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다, 책 커버에 손만 대고 있어도 뜨거운 느낌을 주는, 진짜 러브 스토리’ 이기 때문이다. 이 책엔 말 못 하는 두 명의 청각장애인들 외에, 음악가가 되고 싶은 사춘기 소녀, 흑인 인권운동에 삶을 바치는 흑인 의사,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노동자, 그들이 모이는 카페의 주인 남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서두에 언급한 ‘존 싱어’와 ‘스피로스 안토나풀로스’의 만남과 이별을 다룬, 첫 번째 챕터의 오프닝 십여 페이지를 유난히 많이, 또 자주 생각한다. 이 짧은 챕터는 그 자체만 따로 떼어놓고 보아도 하나의 독립된, 아름다운 단편소설에 다름없다. 그래서 몇 년 전에 구한 오디오북 파일에서 이 오프닝 챕터만 따로 잘라내 핸드폰에 넣고 다니면서 자주 듣는다. 총 열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의 이 오디오북을 읽은 사람은 체리 존스(Cherry Jones)라는 배우로, 영화 <다우트>의 원작인 연극무대에서 원장수녀로 나와 토니상을 수상한 브로드웨이의 베테랑이다. (영화버전에선 아시다시피 메릴 스트립이 그 역할을 연기했다) 미드 <24>의 팬이라면 위풍당당한 앨리슨 테일러 대통령으로 나왔던 그를 기억할 것이고.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처럼 마르고 가차 없는 체리 존스의 목소리가, ‘마을에 벙어리가 둘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함께 다녔다.’ 는 문장을 읽으며 시작하는 오프닝 챕터를 듣고 있노라면, (어쩌면) 이 책의 ‘존 싱어’라는 남자는 영미문학 역사상 가장 외롭고 고독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와중에도 그 목소리에 물기가 묻은 것처럼 들리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오프닝 챕터의 마지막 문단으로, ‘존 싱어’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리를 질질 끌며 홀로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이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도, 차가운 비가 내려도,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오는 날에도, 그의 걸음은 주저하고 얼굴은 고요했다고, 매우 슬프거나 아주 현명한 사람의 얼굴에서나 볼 수 있는 ‘생각에 잠긴 듯한 평화로움’이 그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그런 얼굴과 걸음으로 여전히 그렇게 마을의 거리를 혼자서 돌아다녔다고, 항상 조용히, 혼자서. 자, 그렇다면, ‘일방적인 사랑의 대가는 가늠조차 하지 못할 고독함’ 이라는 것이, 이 두 청각장애인 친구의 만남과 이별을 다룬 오프닝 챕터를 ‘내 마음대로 각색한’ 버전의 테마가 될 것이다. 두 주인공이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설정도 지금 당장 내게 꼭 필요한 도전이다. 등장인물이 항상 말이 많고 수다를 떨어야 안심이 되고 직성이 풀리는 이야기를 주로 쓰고 만드는 나로선, 러닝타임 내내 한마디의 말도 없이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창작자들에 대한 매혹과 질시가 어쩔 수 없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신병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친구를 향해 ‘존 싱어’가 버스 아래에서 미친 듯이 수화를 하며 마음속의 말을 내뱉던 그 순간, 친구는 아침에 싼 도시락이 잘 있는지 확인하느라 바빠서 그를 보지 못한다. 책을 읽을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에서도 이 부분에선 보는 이들의 가슴이 으깨지거나 찢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버스가 출발하면서 ‘존 싱어’는 도시락을 확인하고 마음이 편해진 친구와 아주 잠깐 눈이 마주치는데,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그 친구는 ‘이미 저 멀리로 가 버린 듯한 눈빛’으로 ‘존 싱어’를 바라본다. 결국, 친구는 그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존 싱어’는 휘청대는 걸음과 자포자기와 체념이 섞인 평화로운 얼굴로, 마을을 돌아다니게 된다. 조용히, 혼자서... 그리고, 디 엔드.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1968) 포스터 이 책은 1968년도에 영화로 한 번 만들어진 적이 있다. 당시 ‘존 싱어’를 연기해 아카데미 후보지명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알란 아킨’이다. 그게 누구냐면, <미스 리틀 선샤인>의 그 괄괄한 할아버지. 나는 오로지 그를 비극적 멜로드라마의 히어로인 ‘존 싱어’로만 기억하고 있어서,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이는 손자에게 “젊었을 때 섹스를 많이 해야 해~” 라고 능글맞게 충고하던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할아버지로 나온 그를 처음 봤을 때 조금 충격을 받았다. 죽었던 ‘존 싱어’가 무덤에서 돌아와서 내는 것처럼 허스키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1968)의 알란 아킨 (위), <미스 리틀 선샤인>(2006)의 알란 아킨 (아래)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다시 돌아간 그곳은 학교 근처의 중국집으로, 담임선생과 마주 앉아 짜장면을 먹고 있는 당시의 나는 뭔가 비밀이 많은 척하는 열아홉 살이다, 전날 있었던 진로상담에서 그에게 신방과에 진학해 방송국 피디가 되겠다고 적어냈지만, 사실은 작가가 되어 소설을 쓰고 싶다는 얘기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털어놓았었다. “고개 들고 만두도 좀 먹으라”며 군만두 접시를 밀어주는 담임은 자기도 대학생일 때 소설을 몇 편 쓴 적이 있고 신문에 투고까지 했다고 말한다. 그러다 큰 상도 한 번 탄 적이 있는데 시상식에 참석하러 서울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내내 발을 동동 구르고 속으로 끅끅대며 고함을 쳤다고도 한다. 좋아서... 그러더니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지금 내가 읽으면 좋을 만한 걸 하나 가져왔다며 손때가 많이 탄 책 한 권을 건넨다. 추상으로 그려진 사람 얼굴 그림이 있는, 칙칙한 색깔의 커버엔 「벙어리」란 제목이 보인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라는 원제를 몇 번이나 강조해서 말해주는 담임선생의 담당 과목은 ‘화학’이다. 열아홉 살, 그해 고3 수험생이 된 나는 학급일지를 작성하는 ‘서기’ 였고, 매일 정규수업시간이 끝나면 교무실에 들러 담임선생의 사인 받는 일을 했다. 당시 담임선생은 중년의 나이도 훌쩍 넘겨 슬슬 노년으로 접어들던 시기의 남자였고, 빈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엄격한 분위기의 사람이었지만, 학급일지의 사인을 해주며 내게 한 마디씩, 두 마디씩 건네던 그의 목소리는 매번 친절하고 따뜻했다. 나는 그 후로도 가끔씩 그로부터 손때가 탄 책을 몇 권 전달받았다. 어떤 책은 읽고 나중에 돌려달라는 것도 있었고, 그냥 가지라고 했던 책도 있었다. 그게 뭐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중에서 단 한 번도 책에 대한 감상이나 소회를 그가 내게 따로 물어보거나 내가 그에게 먼저 얘기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뭔가 신기하면서도 왠지 송구스런 기분을 들게 한다. 그가 그런 비밀스런 호의를 일부러 내게 건넬 이유가 없었다는 걸 굳이 떠올려보면, 그 후 근 이십 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그가 내게 최초로 선물한 「벙어리」란 책이 어떻게 내 안에서 살아남고 오랫동안 가지를 쳐서 <장례식의 멤버>라는 내 첫 번째 장편 영화의 무의식이 되었는지, 그 영화의 주인공 소년과 ‘존 싱어’ 사이에 놓여있는 브리지라고 해야 할까, 뉴욕 카페의 손님들이 ‘존 싱어’를 붙잡고 자기 얘기를 늘어놓듯, 영화 속 소년을 둘러싼 가족들이 어떻게 그 아이에게 자기들의 외로움을 토로하고 있는지, 에 대해서 다소 두서없는 이야기일지언정 편지로 써야 하지 않을까, 싶은 거다. 그렇다면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것은 사랑 이야기네요. 그동안 저도 조용히 주먹을 몇 번씩 꽉 쥐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존 싱어처럼.”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영화란 무엇일까? 다시 1년이 지나갔다. 소통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영화는 자꾸 숨 막히는 현실의 탈출구가 되고자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은 꼭 봐야 할 영화가 되었고, 꼭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들조차 그런 영화로 호명되었다. 비루한 현실은 그렇게 영화를 프로파간다化 했다. 우리는 그런 영화들로 위안을 얻었고, 그렇지 않은 영화들조차 그런 의미가 되어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급변하는 정치 환경 속에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속에서, 영화 속 현실이 영화적 상상이 아니라 현실의 재현이라는 걸, 아니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으며 모두가 분노하고 허탈해했다. 굳이 극장에 가지 않아도 영화보다 더 스펙터클하고 흥미진진한 말과 이미지 속에서 기대와 불안으로 지난 한 해를 마무리했다.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봐도 최근 몇 년간 극장에서 개봉하고,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수없이 많은 영화들을 본 우리들은 한 영화를 두고 치열한 논쟁하지도 않았고, 뭔가 새롭고 흥미로운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게 영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리들 때문이었을까? 문득, 영화의 죽음이라는 말이 떠올랐던 건,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다시 떠올랐던 건 그 때문이었다. 올해의 리스트 사사로운 리스트를 만들기 위해 2016년 한해 본 영화들의 리스트를 뒤적거렸다. 베를린 영화제에 다녀와서 그 결과가 리스트에 반영이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뽑아보니 생각보다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먼저 영화를 보는 순수한 즐거움을 다시 느끼게 해준, 그리고 장르 안에서 예측을 깨뜨리며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가지고 논 영화 두 편.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 비거 스플래쉬 >와 폴 버호벤의 < 엘르 >. 특히 <엘르>는 영화가 가지고 있던, 아니 내가 가지고 있던 강간의 신화를 해머로 내리치듯 깡그리 부숴버리고, 오랜만에 영화가 선사하는 순수한 쾌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윤가은 감독의 < 우리들 >, 호평을 받을 만한 영화가 호평을 받았으므로 더 말을 보탤 필요가 없겠지만, 그래도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완벽하진 않아도 기존의 제작 시스템의 틈을 비집고 나온 소중한 결과물이라는 걸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래서 더 반가웠던 영화였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 다시 라브 디아즈, 그는 이제 어떤 경지에 도달한,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현재 진행형이면서 전진하는 작가라는 걸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로 다시 한번 증명했다. 미셸 프랑코의 < 크로닉 >,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영화를 계속 전진시키는 파격적인 엔딩은 현대 영화의 결말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고, < 다가오는 것들 >을 보면서는 미아 한센 러브의 전진하는 보폭이 커서 이 감독의 차기작은 도대체 어떤 영화일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2011년 그의 세 번째 장편 <자이언츠>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 해지고는 새까맣게 잊고 있다가, 올해 베를린 영화제 상영작에서 이 감독의 이름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 보았던 보울리 레너스의 네 번째 장편영화 < 더 퍼스트, 더 라스트 >. 난 그가 연기한 영화보다 연출한 영화가 더 보고 싶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두 편. 먼저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잔 프란코 로시의 < 화염의 바다 >, 처음 보고 갸우뚱했다. 이탈리아 시골의 한 가정과 이탈리아에 유입된 난민들의 행렬을 대비시킨 이 다큐멘터리는 축이 되는 두 이야기의 교차 지점의 인과관계가 약해 보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일 년 내내 마음 한 켠에 껌딱지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또 한 편의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작업과 사회운동이 밀착되어 있거나, 대상에 대한 감독의 입장이 명확한 최근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경향 속에서 대상과 카메라의 거리를 지켜내려는 두 감독의 의지로 완성되어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다시 확장시킨 소중한 결과물, 김일란 , 이혁상 의 < 공동정범 >. 그리고 마지막으로 키들랏 타히믹의 <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 이 영화는 올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MMCA필름앤비디오의 기획 프로그램 <이야기의 재건>의 첫 번째 시리즈와 국제무형유산영상축제를 통해 두 번에 걸쳐 한국에서 공개된 바 있는데, 올해에는 사사로운 리스트에 있는 영화들 중 이 영화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할까 한다. 키들랏 타히믹 - 고요한 번개. 키들랏 타히믹 감독은 일만 불의 제작비로 만든 데뷔작 <향기어린 악몽 Perfumed Nightmare>(1977)이 베를린 영화제 포럼 창립자이자 당시 포럼 디렉터였던 울리히 그레고르에게 극적으로 발굴되어 상영된 후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화려하게 국제영화계에 등장했다. 그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영화사에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가장 중요한 아시아 영화감독 중 한 명이며, 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장르를 통해 아시아적인 소재와 관점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필리핀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자 아티스트이다. 1912년 필리핀 바기오 시에서 출생한 키들랏 타히믹은 필리핀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필라델피아의 와튼 비즈니스 스쿨에서 MBA를 취득했다. 이후 5년 동안 파리에 위치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OECD를 나와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에 실패하고 뮌헨의 예술가 공동체에서 잠시 지내다가 베르너 헤어토크를 만나 그의 영화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1974)의 배우로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에 길을 걷게 된다. 그가 초기에 만든 세 편의 영화는 - <향기어린 악몽>(1977), < 누가 요요를 만들었나? 누가 월면차를 만들었나? >(1979), <투룸바>(1983) - 은 그를 후기 식민주의 제3세계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 세 영화는, 말하자면 트랜스내셔널 시네마 Transnational Cinema에 속하는데, 사실 영화 이론 쪽에서 이런 개념이 정식으로 사용되기도 전에 영화가 먼저 만들어진 셈이다. 키들랏 타히믹 감독은 지금보다 훨씬 덜 네트워크화된 시대에 정치, 경제, 문화적 세계화 Globalization의 문제를 영화적으로 기록한 영화사의 첫 감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프레데릭 제임슨이 자신의 이론에 그의 영화를 끌어들인 것도, 수잔 손탁과 오에 겐자부로로부터 환대받은 이유도, 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주제의식과 독특한 스타일 때문이었다. 그는 세 번째 영화 <투룸바>(1983)를 완성한 후 필리핀 토착민들과 함께 살면서 주로 필리핀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가족에 대한 가치를 바탕으로 한 비디오 에세이 형식의 영화들을 주로 제작해왔다. 요요, 쌀, 지붕, 바학, 가족의 가치, 필리핀의 역사들을 소재로 한 그의 영화들은 필리핀의 역사와 필리핀 고유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해 분명하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특정한 영화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선형적인 내러티브 대신 가지가 뻗어 나가듯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입체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하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절대로 유머를 잃지 않는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와 실험영화 사이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왔다. 그의 영화는 ‘고요한 번개’라는 자신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뜻대로, 고요하면서 날카롭고 지적이면서 유쾌하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꼿꼿이 자신만의 길을 닦아온 키들랏 타히믹과 그의 영화들은 많은 필리핀 감독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젊은 감독들에게 강한 영감을 주기도 했는데, 그 영향력은 브리얀테 멘도사와 제프리 제투리안의 사회적 리얼리즘부터 존 토레스와 라야 마틴의 개인적 에세이, 라브 디아즈와 카븐 데 라 크루스, 쉐라드 안토니 산체스의 영화적 실험에까지 이른다. 특히 자신만의 형식과 스타일로 필리핀의 역사를 영화적으로 재현하며 끊임없이 전진해온 라브 디아즈는 키들랏 타히믹의 영화와 정신을 계승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가장 독창적인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2015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첫 공개 되어 호평을 받은 그의 최신작 < 발릭바얀 #1―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Ⅲ >은 1980년에 촬영을 시작하여 30여 년이 지난 2010년에 미완성된 채 공개된 33분짜리 단편영화 < 과잉개발의 기억 Memories of Overdevelopment >의 두 번째 확장판이자 첫 완결판이다. 키들랏 감독은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를 한 인물이 포르투갈 출신의 항해사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의 노예였던 믈라카 Melaka 출신의 엔리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단편영화에 담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시아인의 관점에서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을 재해석하려고 했던 이 야심 찬 시도는 한동안 미완성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키들랏 타히믹 감독은 2010년 이후 이미 1차로 완성된 33분 분량의 단편영화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2013년부터 2015년 사이 감독이 살고 있는 1천 5백 미터의 고지에 위치한 바기오시 이푸가오족 마을에서 촬영한 장면들을 뒤섞고 편집하여 140분 분량의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완성했다. 그의 영화는 프리 프로덕션 과정을 거쳐 촬영하고 편집한 후 하나의 영화를 완성하는 기존의 영화제작방식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는 늘 카메라를 곁에 두고 관심 있는 대상을 촬영한 후 모아두었다가, 이야기가 떠오르면 감독이 의도하는 대로 기존의 영상들을 배치하여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따라서 <투룸바> 이후의 그의 모든 영화들은 계획에 따라 ‘이미지를 메이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콜렉팅’ 한다는 점에서 현대 디지털 영화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또한 자본의 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간과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 제작기한을 정해두지 않으며, 돈이 없으면 작업을 중단하고, 돈이 생기면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 ‘기름 한 컵 영화 만들기’라고 불리는 이런 독특한 영화 제작 방식 때문에 그가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기간을 일정하지 않다. 이처럼 가장 독립적인 영화제작방식으로 평가받는 그의 영화제작방식은 영화가 완성된 후에도 계속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가장 독창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발릭바얀 #1―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Ⅲ >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약 1시간 40분 정도 분량의 전반부는 구조적으로 보면 크게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하나는 화자가 과거의 시점으로 들려주는 마젤란의 노예 엔리케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마젤란과의 세계 일주 과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는 현재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한 젊은이가 바닷가에서 엔리케의 후예로 보이는 한 노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그 후 사라진 노인을 쫓던 젊은이가 결국 노인과 다시 만나기까지의 여정을 담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 두 이야기가 교차하고 노인을 찾던 젊은이는 결국 노인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젊은이의 이름은 엔리케이고, 노인의 이름은 페르난디드 마젤란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미 한 편의 완결된 영화이기도 한 전반부를 보고 있으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영화감독이자 이야기꾼이고, 자신만의 영화제작방식을 통해 자신의 영화를 오랜 세월에 걸쳐 어떻게 진화시켜 왔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감독 스스로 ‘디렉터스컷’이라고 부르는 약 40분 분량의 후반부는, 전반부에 대한 해설서이자, 감독이 평생에 걸쳐 필리핀인으로 추정되는 엔리케의 삶을 통해 탐구해온 자신의 삶과 생각을 정리한 철학서이자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실천해온 철학적 방법론은 주로 후반부를 통해 다루어진다. 특히 키들랏 감독은 ‘제3세계 영화’의 핵심이기도 한, 불평등의 문제에 주목하는데, 감독이 직접 새로운 언어를 배우다가 스페인 학자 안토니오 데 네브리아의 “언어는 제국의 가장 완벽한 무기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되는 상징적인 시퀀스는 제국주의의 핵심에 대한 통찰과 함께 탈식민주의의 방법론까지 제시한다. 장난기 많은 동네 할아버지 같던 키들랏 타히믹 감독의 날카롭고 유쾌한 통찰이 다시 한번 번뜩이는 순간이다. < 발릭바얀#1 - 돌아온 과잉개발의 기억 III >은 이렇게 ‘첫 번째 외국인 노동자’를 의미하는 ‘발릭바얀#1’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대로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 속에 있었던 한 아시아 출신의 첫 외국인 노동자 엔리케의 여정을 통해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한편 현재 시점으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반복되는 역사적 전통과 순환의 문제를 흥미롭게 고찰하고 있다. 또한 과거 식민주의 시대의 기억을 호출하여, 아시아의 관점에서 아시아의 역사를 재해석해 온 35년간의 실천적 과정을 탁월한 통찰력으로 유쾌하게 엮어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키들랏 타히믹 감독의 영화 세계를 집약한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2012년 전주국제영화제를 떠나기 전, 다음 해 디지털 삼인삼색 감독 중 한 명으로 키들랏 타히믹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문득, 그에게 5천만 원의 제작비가 주어졌다면, 그는 < 과잉개발의 기억 >을 어떻게 완성했을까? 여전히 멈추지 않고 진화하고 있는, 올해로 75세가 된 키들랏 타히믹의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떠오른 첫 번째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한국영화걸작선]망종(芒種)
장률 감독의 영화 중 재중 동포의 디아스포라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는 < 망종 >인데 거기서 최순희는 아들 창호에게 “너는 조선족 새끼다. 조선말을 알아야지”라고 말하면서 말을 가르친다. 창호는 ㅁ, ㅂ, ㅊ을 ‘므브츠’라고 발음하면서 조선어를 학습하는데, 별로 내켜 하지는 않아 하면서 TV를 사달라고 조른다. 최순희는 남편이 사람을 죽여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관계로 고향을 떠나 북경 근처 공장 지대, 기차 길 옆 버려진 집에 성매매 여성들과 이웃해 살면서 김치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간다. ‘조선포채’라고 쓰인 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행상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김없는 중국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조선인이다. 그녀는 허가증이 없어 경찰에게 자전거와 김치를 모두 빼앗기기도 하면서 힘들게 살아간다. 이런 최순희에게 김치를 사러 오는 남자들은 이러저러한 호의를 베풀거나 그녀의 육체를 요구한다. 김치를 사러 오던 경찰은 음식 판매 허가증을 내주고, 조선족 자동차 기술자 김 씨는 그녀를 노래방에 데리고 간다. 또 아들이 유리창을 깨어 사과 차 찾아갔던 이웃집 남자는 김치 납품을 주선하겠다면서 자신과의 육체적 거래를 요구한다. 이러한 와중에 최순희가 어느 정도 마음을 여는 것은 조선족 남자 김 씨다. 처음 김 씨가 김치를 사러 왔을 때 최순희는 그의 조선어에 반응하지 않고 중국어로 말한다. 김 씨는 최순희가 담배를 꺼내 물자 조선 여자가 웬 담배냐며 질책하듯 말하다가 괜한 간섭을 했다고 말을 거둔다. 이후 김 씨가 김치를 사러 다시 오자 최순희는 “뭐 사겠습니까?”라고 조선어로 묻는다. 그가 배추김치를 사자, 다른 김치를 덤으로 얻어 준다. 그러고 나서 최순희는 공안들에게 김치와 자전거를 빼앗긴다. 혼자 길을 걸어가던 최순희를 발견한 김 씨는 그녀를 자신의 자전거에 태우고 가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그녀의 배경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지 않자, 이곳은 조선 사람 보기 힘든 곳인데 조선 사람끼리 터놓고 이야기하자고 권유한다.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그래 남편은?” “사람 죽였어요.” “뭣 때문에?” “돈 때문에” “그래서?” “벌 받았지요.” 이후 김 씨는 최순희의 집을 찾아가 잠자리를 함께한다. 최순희와 이웃해 사는 성매매 여성들은 김 씨가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만류하지만 “나도 그리 좋은 여자는 아니지.”라고 대꾸한다. 김 씨의 부인이 경찰들을 데리고 오자 김 씨는 최순희가 매춘을 한 것이고, 자신이 돈을 주었다는 거짓 정보를 부인에게 흘린다. 경찰은 최순희에게 김치 파는 여자가 몸도 판다는 비방을 한다. 최순희는 경찰에 끌려가서 자신의 신상명세를 털어놓는다. 길림성 연길시에서 살던 조선족이며 32세다. 이후 자신의 김치를 사주며 호의를 보이던 왕 경관에게 바로 경찰서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아들을 잃는다. 왕 경관의 약혼녀가 그들 결혼식 연회 음식으로 김치를 부탁하자, 최순희는 김치에 쥐약을 섞어 버무린 후 배달한다. 결혼식장으로 많은 앰뷸런스들이 도착하고 최순희는 집을 나와 기차 길을 건너 보리밭을 향해 걸어간다. 조선족의 기표인 김치는 여기서 일종의 카타스트로프, 재앙의 기호로 바뀐다. 김치는 쥐약과 인접한 죽음의 기호가 된다. 영화의 이러한 결말에 다다르기까지 최순희의 김치는 여러 것들과 치환되는 은유이자, 그 이전 7위안의 돈과 교환되는 물물이었다. 영화가 그려내는 일상은 많은 부분, 김치를 담그기 위해 무를 손질하고 배추를 씻는 그녀의 노동의 과정이 차지하고 있다. 이 영화는 중국의 조선족이 구성하는 기호적 공간의 미장센을 김치 만들기와 그렇게 만들어진 김치가 팔리고 빼앗기고 또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과정을 따라간다. 김치 파는 사람이 몸도 판다는 조롱과 질타는 남편의 범죄로 조선족이 주로 살고 있는 길림성 연길 시에서 북경 근처의 산업 지역으로 이주했고 가부장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조선족 여자가 무엇을 매매해야 하는가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조선족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풀려난 후, 그녀는 창호가 조선어를 연습하는 것을 보고 연습장을 찢으면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창호의 죽음 후 그녀는 김치를 독극물로 바꾸어버린다. 장률 감독은 인터뷰에서 김치와 조선족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성일: < 망종 >은 김치를 파는 32살 조선족 최순희의 이야기다. 중국 사람들에게 김치란 어떤 음식인가. 별미로 찾아 먹을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결혼식에 김치를 가져다 달라고 하는데, 전통적인 의례인 결혼식에 김치를 올리는 것이 한국인에겐 굉장히 낯설다. 이 영화에서 조선족 최순희가 다른 걸 팔 수도 있었을 텐데, 김치를 팔 때 어떤 울림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나. 장률 : 중국에 200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 한국에서 4,700만 명 중 200만 명은 굉장히 크지만 그것을 14억 중국 인구 중에 흩트려 놓으면 찾지도 못한다. 옌볜에만 가면 조선족이 많지만, 중국 다른 지방에선 알아보지 못한다. 생긴 것도 같고. 그런데 딱 한 부류의 사람들은 보면 안다. 전국 각지 어디나 김치 파는 아줌마들이 있는데 보면 다 조선족이다. 조선 부녀들의 생명력은 대단하다. 김치 팔아서 잘사는 사람은 없는데, 가난해도 성실하게 계속 그 김치를 밀고 다니며 판다. 중국에서 김치를 아는 사람이 그래서 많다. 그건 <대장금> 때문이 아니다. 그전부터 알았던 거다. 중국에는 행상이 많은데, 그중에서 제일 깨끗한 게 바로 김치 파는 사람들이다. 그건 모두가 인정하는 거다. 먹어도 문제없고 배탈 안 난다고. 그렇게 깨끗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볼 때는, 항상 멀리서 바라본다. 고생하면서 저렇게 열심히 사는구나, 라면서. 그들을 볼 때는 항상 나의 친척 같고 자매 같다. 그리고 김치를 중국 결혼식에 놓는다는 게 한국인들에게는 이상할 수 있지만, 중국은 요즘 급격히 변하고 있어서, 결혼식 음식이 완전 짬뽕이다. 중국 물만두 올라왔다가, 서양식 요리가 올라오고.... 32살 최순희가 김치 파는 아줌마로 등장할 때, 그녀는 위와 같은 김치-조선족 여자-성실-청결 등의 기호적 작용 속에서 감지된다. 조선족 여성의 김치에 관련된 재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김치가 독약으로 바뀔 때, 문화적 접촉이나 번역이 이루어지는 경계를 가지고 있는 세미오스피어(semiosphere)가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로 바뀐다. 두 세계를 잇는 마술사 대신 앰뷸런스가 등장하고, 조선족 여성과 나머지(여기에는 조선족 남성도 있다)의 적대는 폭발한다. 남편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가고, 그래서 연변을 떠나 이 북경 근처의 공장 지대에 왔던 최순희는 아들을 잃고, 생계의 수단이었던 김치에 쥐약을 타 몇 대의 앰뷸런스가 오는 재앙을 만든다. 청결한 맛은 치명적인 독으로 바뀐다. 김치는 두 개의 문화를 매개(catalyst)하는 대신 재앙(catastrophe)이 된다. 그녀가 독김치로 의미화하는 것은 급진적 거부다. 자신의 김치를 필요로 하고 샀던 모든 남자들에 대한 부정이다. 그녀의 김치는 7위안이라는 돈으로 교환되는 것이 기본이지만, 조선족 김 씨, 이웃집 남자, 왕 경찰관 등은 늘 덤, 잉여, 그녀의 육체를 원했다. 그래서 김치에 독을 탈 때 그녀는 그 잉여에 독을 놓는 것이다. 잉여가 저주의 몫이 되는 것이다. 특히 그녀의 독김치가 작용하는 곳은 왕 경관으로 대변되는 공안, 국가 소 권력 집단이다. 그녀의 복수는 국가로 향한다. 그녀는 헐벗은 삶, 무능력 즉 자유의 박탈 외에는 어떤 잠재성도 지니고 있지 않은 삶으로 가고 있는 듯 보였으나 세미오스피어의 변경을 보여주고 번역 행위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정적인 카메라, 장식이 없는 미장센, 판타지의 틈입이 없는 방식을 고수하다가 한 장면에서 다른 논리를 따라간다. 최순희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다. 이전 최순희의 아들 창호는 용이 그려진 연을 푸른색 스프레이로 뒤덮었다. 창호가 푸른색으로 색칠해나가는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자신만의 특이한 세계의 고집이고 창조다. 기차 길 옆, 집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최순희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그 프레임 속, 기차 길 옆 사람들이 모여 있고 앰뷸런스가 보인다. 사람들은 최순희를 본다. 최순희가 그들을 본다. 앰뷸런스의 닫혔던 문이 열리고, 최순희는 슬픔과 패닉에 빠진 표정이다. 이때 최순희를 보는 시선이 최순희에 포커스 인했다가 포커스 아웃되면서 그들의 집에 맞추어진다. 망자의 시선, 죽은 창호의 시선이다. 이 소년 망자의 엄마 최순희는 연변에서 살다가 남편이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가자 북경의 외곽 지대에서 김치 행상을 하게 된다.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연변을 떠나 북경 외곽 지대에 있는 최순희는 두 번의 이주를 겪은 것이다. 한번은 그녀 부모나 더 먼 조상들이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것이고, 또 중국 내에서 다시 한 번 조선족 집단 거주지를 떠난 것이다. 최순희는 창호와 이곳에서 성매매 여성들과 이웃해 지냈다. 사는 집은 온기 없이 황량하고 쥐가 출몰한다. 나는 망자의 시선, 이러한 집을 들고나는 죽은 어린 소년의 시선으로 포착되는 엄마, 집 그것의 그러한 유령성, < 망종 >이 사유하는 모국, 엄마, 집의 문제가 흥미롭다. 친숙한 것이 낯선 것으로, 낯선 것이 친숙한 것으로 동요하는 이 운동. 예컨대 이 집, 폐가는 이들의 집이 아니지만 또한 집인 것이고 망자의 시선이 엄마에게 머물다 이 집에 머문 후 떠날 때 익숙한 것의 부재와 현존(un-home-liness)의 느낌이 지극하다. 친밀한 낯섦의 깊은 동요(the deep stirring of the uncanny)라고 부를 수 있는 망자의 시선으로 포커스 인 되는 이 장면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머무르거나 소유할 수 없는 집과 소수자의 관계를 보여준다. 자리를 잡았으나 머무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자의 시선이다. 나의 삶의 거주지로서의 세계(Oikos), 나의 존재노력으로서의 거주의 관리(Oikonomia). 이 사건이 종결되는 순간 엄마에게 부여되었다 집으로 이동하는 시선. 엄마의 얼굴과 집이 포커스 인, 아웃되는 이 장면을 레비나스 윤리학과 영화적 재현을 가능하면 관통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레비나스는 광학으로서의 윤리학, 즉 윤리학이 존재론적 철학이라기보다는 주체와 타자의 구제적이고 다양한 관계를 조명하는 광학(optics) 혹은 영혼적 광학이라고 본다. 이때 일종의 광학으로서의 윤리학은 개요적이고 전체화 시키며 객체화하는 시각의 특성을 배제한 이미지 없는 또 다른 시각이며 완전히 다른 종류의 도상이나 관계라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에서 얼굴의 클로즈업은 유리 로트만에게 있어서는 ‘친밀함’ 과 ‘내밀함’ 이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의 관찰이라는 일상의 경험을 자동적으로 연상시킨다.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세계나 지극히 친밀한 세계의 특징이다. 영화는 이를 통해 모든 등장인물- 친구와 적들 -이 관객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로 우리를 옮겨 놓는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의 친분 관계란 인물의 특징을 상세히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핏줄의 불거짐과 얼굴의 주름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매우 내밀한 관계인 것이다.” - 김수환, 「영화 기호학과 포토제니: 로트만의 ‘신화적 언어’개념을 중심으로」, 『문학과 영상』 208, 43쪽. 반면 엡스탱, 발라즈(Bela Balazs), 그리고 바르트(Roland Barthes)는 바로 얼굴에서 의미심장한 ‘타자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클로즈업된 인간의 얼굴, 그것은 기호학의 잠재적 위협으로서의 ‘자족적 실재’에 다름 아니다. 언제가 엡스텡을 그토록 매혹시켰던 클로즈업(그는 클로즈업을 영화의 영혼이라고 불렀다)은 발라즈의 이른바 “인상학적(physiognomic)” 영화 이론의 중심 테마이기도 했다. 이러한 클로즈업의 포커스 인과 아웃의 운동에서 아이를 잃은 소수자 여성의 얼굴은 타자성과 내밀함을 동시에 극대화한다. 이후 그녀는 자신을 경찰서에서 성폭행한 경찰관의 결혼식에 피로연 음식으로 가져간 김치에 독극물을 탄다. 그녀가 이렇게 얼굴을 잃을 때, 체면을 버릴 때 그녀의 괴물성이 생산한 중국 공안의 괴물성이 드러난다.
[칼럼]애니메이션의 플랫폼이 바뀌고 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다니던 1970년대, 친구들과 밖에서 뛰어놀다가도 오후 5시면 어김없이 집에 뛰어들어온다. TV 애니메이션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이제 생각해보니, 모두 일본수입 애니메이션이었지만, 당시로써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TV 프로그램이며, 그 애니메이션이 그려진 만화잡지와 동화책, 그리고 화보집과 캐릭터 상품을 꼬깃꼬깃 용돈을 모아 사모으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방학 때마다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 기껏 챙겨보던 유일한 극장방문 기억은 < 로보트 태권브이 >와 < 마루치 아라치 >와 같은 국산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이었다. 영화주제가를 크게 따라부르며 이제는 뵐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시는 김청기 감독님이지만, 당시로써는 우상이었던 감독님을 연호하던 시절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일본애니메이션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친구들과 캐릭터의 연표와 역사를 우겨가며 싸우던 시간도 있었다. 우리가 경험해온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플랫폼은 이처럼 TV, 극장, 그리고 비디오였다. 애니메이션을 기획할 때마다 가장 먼저 정하는 것은 플랫폼이다. 그 플랫폼에 맞추어 시간과 장르, 캐릭터와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애니메이션 제작펀드를 받기 위해 기획서를 작성하는 프로듀서들은 대개 TV용 시리즈 애니메이션과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그리고 DVD로 배급할 작품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고민한다. 그러나 최근 애니메이션 플랫폼의 대세가 바뀌고 있다. 전환되는 시점을 넘어 이제 주된 배급시장의 유통구조와 제작시스템이 혁신적으로 재배치되고 있다. TV 시리즈의 경우, 지상파 중심의 타임벨트(time belt, 오후 4시~5시의 애니메이션 방영 시간대)가 급격하게 붕괴되고 있다. 수 십 년 동안 지켜오던 지상파의 애니메이션 고정시간대가 더 이상 맞춤형 관객과 만날 수 없는 시간대임을 자인하기 시작했다. 대개 오후 4시에서 5시까지 방영하던 신규 국산 애니메이션 방영 시간대에 TV 앞에 달려와 애니메이션을 봐줄 관객들이 없다. 대부분 방과 후 수업과 학원 수강으로 프로그램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EBS처럼 취학 전 아동을 위해 아침 8시~9시, 오후 3시~4시라는 맞춤형 시간대 전략을 성공적으로 편성한 지상파 방송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방송사가 애니메이션의 유용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환되었던 방송플랫폼이 케이블의 애니메이션 전문채널 PP(Program Provider)였다. ‘투니버스’로 시작된 애니메이션 전문채널의 인기는 ‘애니원’, ‘챔프’, ‘애니박스’, ‘애니맥스’ 등으로 신규채널의 신설 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채널들도 프라임타임에 집중적으로 배치한 일본애니메이션 붐이 잦아지면서 결국 마니아 중심의 채널로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극장용 장편의 경우, 2014년 초 디즈니 애니메이션 < 겨울왕국 >의 흥행신드롬이 그나마 플랫폼의 생명력을 연장시켰다. 연속되는 드림웍스의 흥행실패와 새로운 신작 시리즈의 출현이 더뎌지면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도 이제 그 수명이 다 된 것처럼 여겨졌는데, 블루스카이,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 라이카 스튜디오, 소니픽쳐스 등의 영화사들이 신작을 새롭게 선보이고, 역시 디즈니라는 찬사와 함께 2014년의 문을 열었던 <겨울왕국>은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의 신화를 재현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산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의 기획과 제작, 그리고 배급 및 상영은 힘들고 어둡다. 최근, IPTV를 통한 VOD 배급이 본격화되면서 애니메이션의 유통배급망이 실시간으로 구매하여 스마트기기에 저장하고, 언제 어디서나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도록 하는 VOD 구매로 전환하고 있다. 특히 취학 전 아동 및 유아를 동반한 부모들의 애니메이션 구매는 거의 IPTV와 앱 및 포털사이트의 VOD 구매로 이어진다. 식당, 장보기, 대중교통 등에서 필요한 아이들을 달래주고 봐주는 콘텐츠로 스마트 기기에 저장된 애니메이션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글의 유튜브와 네이버 티비캐스트(tvcast) 등 OTT(Over The Top)서비스를 통해 애니메이션 클립으로 상품을 소비하는 세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결국 무료로 애니메이션을 즐기고 그러한 영상서비스 전에 보여지는 광고를 소비함으로써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 즐기는 실속소비자가 애니메이션 수요의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플랫폼의 혁신은 애니메이션 제작 장르의 변화까지 주도하는 추세다. ‘라바’의 성공 이후, 1분~2분 이내의 초단편 애니메이션 클립이 옴니버스식 에피소드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다. 대사 없는 넌버벌(Non verbal), 몸개그를 통한 슬랩스틱 유머, 3D 캐릭터 디자인, 유머러스한 반전과 반복적인 음악 등 장르화 되고 있는 작품의 유형이 국산 애니메이션의 제작 트랜드를 형성하고 있다. 공공 사이니지와 시내버스 및 지하철의 영상방송 등으로 소개되면서 이러한 초단편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공략은 스마트한 소비시대에 맞춤형 고객 찾기 라는 새로운 전략을 이해시킨다. 플랫폼이 변하면 콘텐츠도 변해야 한다. 콘텐츠가 플랫폼이 되는 시대, 애니메이션도 이제 변해야 한다.
[초이스]나이키 풋볼: 더 라스트 게임
웹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인터넷에 ‘브랜드 웹툰’이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는 인기 웹툰의 캐릭터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광고형식의 웹툰인데, 흥미 있게 읽다 보면 브랜드를 기억하게 된다. 또 그런 효과 때문에 웹툰 형식의 다양한 시도들이 광고시장에 독특하고 차별화된 이야기들을 등장시킨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모든 홍보영상과 프롤로그 및 에필로그 행사 영상이 모두 옐로우(yellow)기반 색조가 완연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편성되었다. 마치 블루스카이 스튜디오의 최신작 < 리오2 >에 등장하는 브라질 ‘삼바축제’의 화려한 색감과 역동적인 움직임을 그대로 ‘월드컵 축제’에 옮겨놓은 느낌이다. 다른 월드컵보다 브라질 월드컵이 갖는 판타지(fantasy)가 더욱 뛰어나게 보이는 것 또한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된 행사의 아름다움이 실사영사보다 더욱 강력한 정서적 몰입을 관객들에게 느끼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브라질 월드컵 애니메이션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단편 애니메이션은 스포츠브랜드 나이키가 제작한 광고영상 < 더 라스트 게임 The Last Game >이다.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는 각 대륙예선을 통과한 총 32개 팀이 출전했다. 그 팀들은 각자의 국가가 계약한 스포츠브랜드에 따라 유니폼과 축구화 등을 후원받아 국가대표 경기복으로 사용한다. 가장 많은 국가를 후원하는 브랜드는 브라질 월드컵 공인구인 ‘브라주카(Brazuca)’를 제작 공급하는 아디다스(adidas)와 지난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부터 후발주자로 뛰어든 나이키(NIKE)이다. 아디다스는 스페인, 아르헨티나, 독일 등 9개국, 나이키는 프랑스, 포르투갈, 네덜란드, 미국, 브라질, 카타르, 호주, 폴란드, 크로아티아, 한국 등 10개국의 국가대표 축구복을 제작해서 공급했다. 스포츠브랜드 뿐만 아니다. 현대기아자동차, 소니, 코카콜라, 비자카드, 에미레이트 항공 등 이제 월드컵은 자본주의의 브랜드 전쟁터로 진화하고 있는 형국이다. 나이키에서는 이번 브라질 월드컵의 ‘애니메이션 축제’ 영상 콘셉트에 힘을 더하며 나름대로의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광고영상으로 제작했다. 이런 목적과 내용, 그리고 필요성에 의해 기획 제작된 단편애니메이션이 < 더 라스트 게임 >이다. 결국 엄청난 광고단가를 자랑하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한꺼번에 등장시킨 광고를 기획하기 보다, 실제 캐릭터보다 더 실제같이 과장되고 화려하게 보일 수 있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을 익살스럽고 더 영웅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기획한 것이다. 본격적인 브랜드 애니메이션의 장르적 출현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 더 라스트 게임 >은 날카로운 프로구단주의 선수들 비판으로 시작된다. 첫 대상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이다. 훈련장에 여자 팬들과 스포츠카를 타고 등장했다는 과거의 뉴스를 앞세우며, 선수들의 낮은 성공률과 일반화된 도덕적 해이를 비판한다. 이 외에도 잉글랜드의 웨인 루니, 브라질의 다비드와 네이마르, 스웨덴의 즐라탄, 스페인의 이니에스타, 미국 골키퍼 팀 하워드, 프랑스의 리베리 등이 드림팀의 멤버로 소개되면서 본격적인 축구 3D 애니메이션이 시작된다. 그리고 지구 축구드림팀으로 불릴 수 있는 스타플레이어들의 소개와 함께 그들의 성공률이 50%도 채 되지 않는, 선수에 따라서는 30% 미만도 나올 수 있는 공격과 수비 성공율에 대해 비판한다. 무모한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와 스포츠선수들의 슬럼프와 스캔들까지 조목조목 꼬집는다. 이렇게 실제 선수들이 갖고 있는 단점이 부각되면서 축구는 스타인 척하면서 실수만 거듭하는 선수들로 이루어질 수 없는 스포츠임을 구단주가 주장한다. 그리고는 각 포지션별 완벽한 능력을 소유한 클론을 개발하여 완벽한 축구팀을 만들었다고 제시한다. 이 축구팀의 연승가도 때문에 결국 모든 스타들은 실업자가 된다. 각자 어울리지 않는 일자리에서 인생을 허비하는 선수들 앞에 왕년의 스타인 브라질의 호나우두가 등장한다. 본래 현재의 모습보다 조금은 날씬하게 그려진 호나우두는 인생바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한 명씩 찾아내어 전설 속의 명예의 전당으로 모아낸다. 그들 앞에 밝혀준 횃불은 축구라는 경기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져야 하는지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주장하는 함성과도 같다. 그들의 팀은 다시 클론들과 마지막 운명의 경기를 하게 되고, 각자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서 자신 있는 개인기와 멋진 팀플레이로 클론팀을 박살 낸다는 5분 30초의 애니메이션은 또 다른 장르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계적으로 통계적으로 하는 축구가 아닌 정신과 마음, 그리고 즐기면서 하는 축구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떻게 인간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의 미학적 표현을 통해 현란하게 보여준다. [Nike Football: The Last Game]
존 포드에 대한 짧은 전기적 사실
존 포드에 관한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다큐멘터리 < Directed by John Ford >(1971)의 한 장면. 연신 시가를 질겅이며 모뉴먼트 밸리를 배경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존 포드에게 젊은 보그다노비치가 조심스레 묻는다. -< 3인의 악인 >으로 대작 서부극의 길을 처음 닦았습니다. 이 영화를 어떻게 찍었습니까. “카메라로” -당신의 웨스턴은 뒤로 갈수록 비애감이 깊어집니다. 예를 들어 < 리버티 발란스를 쏜 사나이 >를 < 웨건 마스터 >에 비교하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당신도 이 변화를 의식합니까. “아니” -이 문제에 대해 다른 할 말은 없나요. “무슨 얘기 하는지 모르겠소” -처음부터 서부극의 어떤 특별한 요소에 이끌렸나요. “모르겠소” -< 아파치 요새 >에 나타난 것처럼 개인보다 군의 전통이 더 중요하다는 데 동의합니까. “컷” 존 포드는 영화사상 인터뷰하기에 가장 어려운 감독 중의 하나였다. 그는 단답형의 대가였고, 그나마 대답을 피하거나 아니면 본심과 반대로 말하기 일쑤였다. 특히 지적인 질문, 미학적인 질문에 대해선 고의적으로 심술궂게 대답했다. 그의 영화를 더 많이 아는 인터뷰어일수록 그와의 인터뷰는 고통스러운 체험이 되기 십상이었다. “어떻게 할리우드로 오게 되었나요.”라고 질문하면 그는 “기차로”라고 대답했다(장 나르보니, 앙드레 라바라트와의 인터뷰, 1965년). 주목할만한 연구서 「John Ford」(1975)를 쓴 조셉 맥브라이드가 1970년에 그를 인터뷰할 때 포드는 악명 높은 단답 몇 마디를 내뱉은 뒤 이제 그만 하자면서 쏘아붙였다. “당신네들, 질문이 다 똑같아. 답하기 지쳤어. 난 답을 몰라. 난 못생기고(hard-nosed, ‘고집 센’의 뜻도 있음) 열심히 일하는... 전직 감독일 뿐이야. 그냥 우아하게 은퇴하고 싶을 뿐이야.” 존 웨인 John Wayne, 빅터 맥라글렌 Victor McLaglen 저널리스트나 평론가에게만 고약하게 군 것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일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도 포드는 감당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존 웨인이나 < 밀고자 >(1935)를 비롯한 포드의 중기 걸작들의 주연을 맡은 빅터 맥라글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포드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확성기로 소리쳤다. “어이, 맥라글렌, 당신, 내가 거리에서 당장 구한 아이도 더 잘할 수 있는 그런 연기로 일주일에 1,200달러나 받고 있는 거 알아?” 당대 최고의 배우이자 거구의 마초 아이콘인 웨인이나 맥라글렌도 포드의 가혹한 말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 없지 않았다. < 3인의 대부 >(1948)를 찍을 때에는 해리 캐리 주니어가 연기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고 커다란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연극을 스크린에 옮긴 < 미스터 로버츠 >(1955)를 촬영할 때, 주연을 맡은 헨리 폰다와의 다툼도 유명하다. 걸작 < 젊은 날의 링컨 >(1939)을 비롯해 전성기 존 포드의 아홉 작품을 함께 했으며 동명 연극에서도 주연을 맡았던 헨리 폰다는 존 포드에게 ‘웃음의 타이밍을 모르는 연출’이라고 말했다가 주먹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한 시간 뒤에 포드가 사과하긴 했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다시 회복되지 않았고, 재개된 포드의 폭음 습관과 잠적, 담낭 파열 등으로 결국 중도에 감독이 머빈 르로이로 교체되기에 이른다. 포드에 관한 글들에 종종 등장하는, 그의 성격을 묘사하는 단어들에는 일관성이 있다. ruthless, sarcastic, gruff, cranky, curmudgeonly, crotchety, cantankerous, peevish, oddball, nutcase, eccentric .... 말하자면 그는 거칠고, 까다롭고, 심술궂고. 가학적이고 변덕스럽고, 괴팍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때로 예측할 수 없는 지혜와 선의와 배려의 사람이기도 했다.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1941)이나, < 조용한 사나이 >(아일랜드의 연풍, 1952) 등의 주요작품에서 포드의 여인으로 출연한 모린 오하라는 이렇게 말했다. “다정하고 품위있고 유머감각이 뛰어나지만 한편으론 악의적이고 야비해요. 존 포드의 이런 장단점을 다 받아들인다면 사랑하게 될 거예요” 존 포드 그의 예측 불가능한 성품을 알려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공황기의 어느 날, 궁색한 차림의 노인이 포드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포드가 유니버설에서 일할 때 안면이 있던 배우였다. 딱한 노인이었다. 중태의 아내가 응급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병원에선 200달러의 선금이 없다고 받아주지 않았다. 노인에겐 동전 한 닢 없었다. 노인이 사정 이야기를 하는 동안 사무실 사람들은 점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존 포드는 겁먹은 듯이 뒤로 물러나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뛰쳐나와 노인을 때려눕혔다. 그는 소리쳤다. “당신이 누군데 감히 이렇게 와서 나한테 그따위로 말해?” 그리곤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노인은 벌벌 떨면서 기어나갔고, 사무실 사람들은 존 포드의 돌발 행위에 충격을 받고 들끓었다. 배우 프랭크 베이커도 분노해 사무실을 나갔다. 사무실 밖에서 서성이던 베이커는 포드의 비서 프레드 토트먼이 그 노인에게 1,000달러 수표를 주고, 포드의 운전사가 노인을 태워 집으로 데려가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거기엔 앰뷸런스가 기다리고 있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술을 하러 온 의사도 곧 도착했다. 얼마 뒤, 포드는 노인 부부를 위해 집을 사주었고, 평생 생활비를 보냈다. 존 포드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특히 역사서를 탐독했으며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하와이어, 아일랜드, 유대어에다 나바호족의 언어까지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의 부를 허름한 작업복 안에 감췄고, 자신의 예민함을 검은 선글라스 안에 감췄으며, 자신의 박식함을 거친 말과 행동 뒤에 감췄다. 이 인물에 대해 정확히 말한다는 게 가능할까. 태그 갤러거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아마도 존 포드에 관한 만족할만한 전기는 불가능하며, 정확한 인물 묘사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만큼이나 많은 포드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가련한 노인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존 포드의 형 프랜시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잭(존 포드의 애칭)이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왔지만,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존 포드의 어린 시절 존 포드는 1894년 2월 1일, 메인 주 케이프 엘리자베스에서 아일랜드 이민자 부부 존 오거스틴 피니(John Augustine Feeney)와 바바라 애비 큐란(Barbara “Abby” Curran)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숀 알로이셔스 오피니(Sean Aloysius 0’Feeney)였고 영화계에 진입한 뒤 한동안 잭 포드라는 예명을 쓰다가 1923년부터 존 포드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술집과 농장 일을 했던 포드의 집안은 중산층과 중하층을 오르내렸으며, 포드는 학창 시절에도 배달부, 농장일 보조, 식당 종업원 등의 일을 멈추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 독서광이며 미술과 어학에 재능이 있었지만 수학은 낙제했던 포드는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다. 메인 대학교에 들어가지만 몇 주 만에 그만두고 허드렛일을 전전하다 1914년 7월 17일 무일푼으로 그의 형 프랭크가 활동 중인 할리우드에 도착한다. 존 포드보다 13살이 많은 프랭크는 16세에 결혼하고 곧 이혼한 뒤 서커스단에 합류한 뒤 종적을 감췄다가 10여 년 만에 멜리에스의 영화에 배우로 등장해 극장에 갔던 가족 모두를 놀라게 했다. 존 포드가 할리우드에 도착할 무렵 프랭크는 프랜시스 포드라는 이름의 감독-배우-작가로 유니버설에 제작사를 갖고 있는 스타 영화인이었다. 존 포드는 형의 도움으로 유니버설의 소품 담당 자리를 얻고 이후 스턴트맨, 단역, 조감독으로 일의 범위를 넓혀갔으며, 1917년 첫 장편 <스트레이트 슈팅>을 연출한다. 1921년 폭스사로 이전했고, 1924년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한 < 철마 > 이후 존 포드의 명성은 국제적으로도 알려지며 성공적인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프랜시스 포드 Francis Ford 형 프랜시스의 이력은 존 포드의 이력과 반대로 20년대부터 몰락해가지만, 동생에게 미친 영향은 작지 않았던 것 같다. 돈 벌기에는 완전히 무관심한 실험가이자 모험가였던 프랜시스는 당대 최고의 연출가 중 하나로 꼽혔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존 포드 영화에 대한 논평을 연상시키는 당시 언론의 프랜시스 영화에 관한 논평들은(‘무심함 뒤에 감춰진 진지함’, ‘냉소 뒤에 감춰진 따뜻함’ 따위) 13살 어린 동생에게 드리운 형의 거대한 그림자를 짐작게 한다. 프랜시스의 영화 동료이자 인류학자였으며 존 포드의 배우이기도 했던 프랭크 베이커는 존 포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나서 깨달은 건 존 포드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라는 것이다. 진짜 존 포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칠고 무례하고 냉소적인 존 포드와는 너무 다르다. 진짜 존 포드는 매우 상냥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그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설의 존 포드는, 다정하고 감상적이고 부드러운 또 다른 존 포드를 보호하기 위해 포드 스스로 만들어낸 존재다. 존 포드는 엄청난 열등감으로 심각하게 고통받았고 그 열등감의 밑바닥에 그의 형이 있다.” 존 포드라는 인물을 말하는 데, 그가 평생 군인을 동경했고 해군 장교를 꿈꿨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낙방했을 뿐 아니라, 1차 세계대전 때는 입대를 지원했다가 지독한 근시 때문에 거부당했다. 하지만 그는 태평양 함대에 소속된 친구들 도움으로 1934년에 예비역 해군 소령 계급을 얻게 되고, 정보 제공 활동을 자처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포드는 동료 영화인들을 모아 야전 촬영단을 조직한다. 성원들이 나이가 많고 야전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이 촬영단은 해군에 의해 거부당하지만 곧 OSS(CIA의 전신) 소속 부대가 되고 존 포드는 촬영단의 지휘관이 되어 하와이와 북아프리카 등의 전투 현장에 투입된다. <미드웨이 해전 The Battle of Midway>(1942) 촬영 당시 (아래 중앙이 존 포드) 1941년부터 종전까지 4년간 이 부대는 여러 편의 전쟁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그중에는 존 포드가 16mm 카메라로 직접 찍은 장면들이 담긴 걸작 < 미드웨이 해전 >(1942)이 포함되어 있다. 명예 해군 준장으로 제대한 포드는 죽기 5개월 전인 1973년 3월 31일, 그의 AFI 평생 공로상 수상식에 참여한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명예 제독 진급이라는 선물을 받는다. 전국에 방영된 이 수상식에서 포드는 “리처드 닉슨에게 신의 축복을”이라는,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극우적 망언으로 각인되었을 소감을 남긴다. 호전적 애국주의로 비칠 수도 있는 이런 행적의 내면적 이유를 정확히 알기는 힘들다. 다만 포드는 한 인터뷰에서 이례적으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정말 겁쟁이다. 내가 그렇다는 걸 안다. 그게 내가 바보 같은 짓들을 한 이유다. 내가 겁쟁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여덟 번이고 아홉 번이고 치장을 하지만, 그게 끝나면 나는 여전히 겁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앞장서 뭔가를 하지만 끝나고 나면 무릎이 후들거리기 시작한다.” 포드의 가장 뛰어난 해석자인 태그 갤러거의 논평을 덧붙이는 게 좋겠다. “그는 전쟁에 뛰어들었다. 철저한 몰두와 완전한 초연함이라는 예의 그 모순적 태도로 말이다. 이것은 항상 그의 비극이었고 천재성이었다. 어떤 열정도 그를 소진시키지 못했다. 그의 일부는 여전히 그것의 외부에 외롭게 그리고 불만족스럽게 남아있다. 전쟁기의 그의 사진은 종종 숨 막힐 정도로 낭만적이다. 그의 눈은 검은 안경 밑에 숨어 있고, 그는 가죽 재킷을 걸치고 있으며, 파이프를 과시하듯 피운다. 그의 포즈는 항상 과장되어 있다. 포드는 군인의 장식을 좋아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멍청한 살육을 혐오했다. 아마도 그는 소년 시절의 판타지를 실현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총이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총탄의 샷을 필름의 샷으로 대체한 것이다.” <조용한 사나이>(1952) 촬영 당시. 왼쪽부터 프랜시스 포드, 존 웨인, 빅터 맥라글렌, 존 포드 이런 몇 가지 전기적 사실들이 존 포드의 영화를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영화 세계를 조화로운 전체로 구성하려는 시도는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거기엔 적어도 둘 이상의, 여러 명의 포드들, 서로 모순된 포드들이 있을 것이다. 혹은 그의 작품들이야말로 포드의 진짜 얼굴(들)일지도 모른다.(계속)
[비장의OST]소셜 네트워크 (데이비드 핀처, 2010)
두 남녀가 술집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화이트 스트라이프의 ‘Ball And Biscuit’이 그들 사이에 인상적으로 흐른다. 중국의 천재들이 미국 인구수보다 많다는 믿지 못할 주제로 시작해 수능 만점에 교내 사교 클럽과 조정팀 얘기까지. 좌충우돌 동충서돌 이리저리 오가는 남자의 속사포 잡담에 여자는 도통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 결국 말꼬리 잡기와 의심, 오만과 독단 그리고 변명이 뒤섞인 대화에 지친 여자는 화를 내며 일어나고 남자는 허무하게 끝나버린 관계에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른 채 술집에서 빠져나간다. 이 5분 30초간의 인트로 씬을 통해 감독 데이빗 핀처와 각본가 아론 소킨은 이 남자의 성격과 미래를 조망한다. 넷 기반의 소셜 네트워크에 혁신을 가져다주었지만 자신은 현실적 소셜 네트워크가 불가능했던 아이러니한 천재, 페이스북의 개발자이자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인 마크 주커버그에 대해 말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진실 여부에 관심이 없다. 실제 주커버그와 영화 속 주커버그는 다른 인물이다. 페이스북 설립과 이를 둘러싼 소송에 대한 사건들만이 사실일 뿐, 아론 소킨은 주어진 현실보다 더 극적이고 인위적으로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각색했다. 소송의 당사자 중 하나인 에두와르도 세브린의 증언을 바탕으로 삼은 영화의 원작은 다소 편향적이긴 했지만, 소킨은 이에 그치지 않고 서로간의 증언과 주장을 교묘히 대립시키고 그들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주커버그란 인물과 그를 둘러싼 사건 그리고 관계들을 입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여지를 주었다. 이를 리드미컬한 감각으로 쪼개 숨 가쁘게 재구성한 데이빗 핀처의 신들린 연출은 뻔한 전기물과 지겨운 법정물 사이에서 방황할 수 있는 드라마를 강렬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심리극으로 치환해냈다. 생생한 캐릭터들의 압도적인 대사, 탁구시합을 보듯 빠르게 주고받는 플래시백 향연에, 정교한 카메라 워크와 좋은 연기가 곁들어진 영화는 상투적일 것 같은 성공담의 신화를 넘어 그 뒤에 감춰진 장중하고 세련된 희비극에 집중한다. 21세기판 <시민 케인> 이자 IT버전의 <라쇼몽> 이다. 이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건 그러한 반목과 오해, 번민들을 백일몽처럼 희석시켰다 다시 증폭해내는 트렌트 레즈너와 아티커스 로스의 공감각적인 스코어다. 트렌트 레즈너. 소음도 충분히 상업적인 음악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인더스트리얼 사운드의 대부. 그는 세기말 ‘나인 인치 네일스’란 원맨밴드로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파괴적인 노이즈, 불길한 엠비언트 등을 버무려 기존의 아름다운 화성의 곡과는 다른, 새로운 감성을 창조했다. 방법은 이전부터 존재해왔지만 실험성을 넘어 대중적 환호까지 이끌어낸 건 그가 처음이었다. 왜곡되고 변형된 보이스를 통해 섬뜩하고 진중한 의미를 전달하는 한편, 불협화음과 극단적인 음악적 해체에 가까운 효과들, 철저하게 계산된 사운드 디자인을 통해 종교에서 탐욕, 성별, 명성, 중독, 자기기만, 후회, 허무주의 그리고 정치적인 이슈까지 암울하고 혼란스런 시대상의 모습과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반영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요즘 인더스트리얼의 파급력은 그때보다 약해졌지만, 그가 시도하고 창안하는 사운드가 주는 의미와 충격파는 여전히 유효하다. 프로그레시브한 사운드 못지않게 스토리텔링의 앨범 콘셉트나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연출, 기괴한 뮤직 비디오 같은 비주얼적인 측면도 인정받으며 자연스레 영상과 관련된 작업들에 조금씩 관여했는데, 음악적 컨설턴트로 참여한 <내츄럴 본 킬러> 나 <로스트 하이웨이> 같은 할리우드 영화는 물론, <둠> 시리즈로 유명한 id소프트사의 FPS 게임 <퀘이크>의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고, 여러 단편 작업에 참여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을 보였다. 특히 데이빗 핀처와의 인연은 드문드문하지만 오랜 기간 이어져 왔다. 타이틀 시퀀스의 고전이 된 <세븐> 의 오프닝 크레딧에 ‘Closer’가 편곡돼 쓰였고, 원작자 척 팔라닉의 강력한 추천으로 <파이트 클럽> 음악을 맡을 뻔 했지만 그 당시 발표한 세 번째 앨범 ‘The Fragile’ 활동과 겹쳐지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 2005년 발표한 ‘Only’의 뮤직비디오를 핀처가 감독하며 둘은 비로소 조우하는데, 그 인연으로 핀처는 <소셜 네트워크> 의 음악을 레즈너에게 부탁한다. 오랜 투어와 레코딩 작업에 지친 그는 핀처의 제안을 수차례 거절하지만 결국 자신의 앨범을 함께 했던 아티커스 로스와 공동으로 처음 영화음악에 도전하게 된다. Only 최첨단의 트렌드가 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개발해 억만장자에 오른 남자의 이야기에 산업화된 사회에 반기를 든 인더스트리얼 뮤직의 대부를 골랐다는 점도 의미심장하지만, 이 미니멀하고 반복적인 사운드를 통해서 고립된 인물의 내면과 단절되어버린 인적 교류 관계를 시니컬하게 묘사해 나간 것도 탁월하다. 디지털 시대 넷이란 가상의 공간에서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정작 현실에선 점점 더 외로워지고 마는 인간의 뒷모습을 역설적으로 담아낸 영화에 이 먹먹하고 혼돈스런 일렉트릭 사운드는 잔인한 비가(悲歌)이자 기존 스코어에 이별을 고하는 송가로 비친다. 종종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음색은 일말의 휴머니즘을 상징하지만 이내 사라져버릴 듯 가녀리고 얄팍하다. 그 주변을 감싸는 건 시끄러운 노이즈와 식상한 패턴의 음향들뿐이다. 이는 초조하게 고조되고, 무겁게 침전되었다가, 몽롱하게 허공을 부유한다. 차가우면서도 복합적이고 실험적이며 누구보다 공격적인 그들의 사운드스케이프는 핀쳐가 그려낸 캐릭터들의 심리와 방황에 너무나 잘 부합된다. 감성적인 엠비언트 사운드로 현실의 무게감과 감정들을 담아내는 레즈너와 로스의 이 놀랄만한 협업물은 <파이트 클럽>에서 들려준 더스트 브라더스의 일렉트로니카 충격을 넘어선다. 더스트 브라더스가 화려하고 리드미컬한 DJ 믹스의 트립합을 통해 파멸적이고 분열적인 내면을 감각적으로 묘사했다면, 나인 인치 네일스는 단색의 모노크롬과 같은 기계적 음색으로 세상의 알고리즘을 거부하고 부정한다. 모든 트랙에 걸쳐 들리는 스산하고 씁쓸한 뒷맛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Ghosts I-IV, Peer Gyunt suites <소셜 네트워크>의 스코어는 불균질하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2008년에 발표한 앨범 ‘Ghosts I-IV’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실제로 3번 트랙을 비롯해 몇몇 트랙들은 ‘35 Ghosts IV’의 변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음악적인 부분을 넘어 음향적인 기능까지 수행하는 아슬아슬하고 모호한 경계가 분분한 이견을 만들어낸다. 주로 호러 영화에서 나타나는 사운드 디자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미키마우징과 라이트모티브에서 빗겨난 이 소리들의 배치는 시종일관 밋밋하게 보이는 변호사 사무실과 대학교, 방안과 술집 같은 평범한 공간에 긴장과 심리 상태를 직간접적으로 부여한다. 사정없이 옥죄고 느슨했다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의 리듬감은 바로 이 소리들 때문에 생겨난다. 따로 떨어뜨려 놓으면 단조롭고 재미없게 들리지만 영상에 종속되는 순간 폭발적인 힘과 짙은 공허함, 애수와 분노를 가지고 꿈틀댄다. 의미가 만들어낸 스코어인 셈이다. 사운드트랙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노르웨이 작곡가 에드바르트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제1번 Op.46 제4곡 산의 마왕의 전당에서’을 가져온 12번째 트랙이다. 핀처는 <시계태엽 오렌지>의 웬디 카를로스 스타일이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냈고, 트레너와 로스는 이에 맞춰 곡을 찾고 편곡해 조정 경기 씬에서 독특한 효과를 보았다. 장난스럽지만 동시에 처절한 감정을 농축시켜 결국 윙클보스 형제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가 되었다. 트렌트 레즈너는 첫 영화음악이란 한계가 무색하게 아티커스 로스와 2010년과 11년의 시상식에서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를 비롯해 8개의 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해 데이빗 핀처와 두 번째 결과물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를 내놓으며 성공적으로 2년차 징크스를 극복했다. 이쯤 되면 차기작이 기다려지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Hand Covers Bruise Track List 1. Hand Covers Bruise 2. In Motion 3. A Familiar Taste 4. It Catches Up with You 5. Intriguing Possibilities 6. Painted Sun in Abstract 7. 3:14 Every Night 8. Pieces Form the Whole 9. Carbon Prevails 10. Eventually We Find Our Way 11. Penetration 12. In the Hall of the Mountain King (Edvard Grieg) 13. On We March 14. Magnetic 15. Almost Home 16. Hand Covers Bruise, Reprise 17. Complication with Optimistic Outcome 18. The Gentle Hum of Anxiety 19. Soft Trees Break the F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