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逆)
- 감독
- 김원진
- 제작년도
- 1999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영화를 좋아해 자주 극장을 찾는 편이었지만, 유난히 집중적으로 영화를 보았던 시기가 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파리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시절이다. 그때 나는 북역(北驛) 근처의 작은 스튜디오에 살았다. 아랍인, 인도인, 중국인, 아프리카인 등 여러 지역에서 흘러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거리는 낡고 허름했지만, 이상한 활력과 혼돈으로 가득했다. 향신료 냄새가 뒤섞여 풍기는 공기에는 흥분과 불안이 실려 있었고, 길을 지날 때 들려오던 언어들은 바벨탑에서나 흘러나왔을 법한 다성(多聲)의 소음이었다. 그 자체로 ‘영화적’이던 이 온갖 감각들이, 마치 모래시계의 바닥에 쌓여가는 부스러진 시간처럼, 서서히 나의 내부에 침전되어 갔다. 여가라 부를 만한 것이 없던 일상에 유일한 출구가 있었는데 그것이 극장이었다. 파리는 시네마의 도시였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영화관이 서너 개 있었고, 생미셸의 낡은 옛날 극장들에서는 고전영화가 끊임없이 돌아갔다. 일 년 내내 열리던 회고전들, 퐁피두센터의 특별 상영들,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작품들, 한국 감독들의 전작(全作), 영화 교과서에서 이름만 보았던 옛날 작품들을 관람하는 기회를 누렸다. 논문을 쓰던 스튜디오와 극장은 삶의 두 극점(極點)이었다. 외로움, 침잠, 우울의 극을 이루는 스튜디오. 그리고 놀라운 이미지들이 주는 충격, 활력, 기쁨의 극을 이루는 극장. 나는 이 두 지점 사이를 오가던 진자와도 같았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은 특별한 외출이 아니라 습관화된 생활 방식의 하나였다. 영화를 연구하거나 전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내가 몰두한 공부는 이미지의 문제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나는 벤야민의 저술들을 탐구하고 있었고,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그의 이미지 철학과 (수업에서 다뤄지던) 아비 바부르크의 문화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미지의 물질성, 역사성, 능동성, 생명력에 대한 감수성을 이론적 사유의 동력으로 전환한 사람들이다. 특히 바부르크와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의 길을 연다. 바부르크가 바라본 이미지는 태어나고 변이하며,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생명 현상이었다. 이미지에 스며 있는 이 시간적 리듬을 그는 ‘잔존(Nachleben)’이라 불렀다. 이미지도 생명체처럼 고통을 겪고, 변형되며, 살아 나간다. 파토스(pathos), 곧 겪음, 시련, 고통이라는 문제의식이 바부르크의 사유를 관통한다.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지진파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지진계처럼, 그것이 행사하는 힘을 겪어내는 일이다. 바부르크가 “파토스적 패러다임” [1] 을 실험한 이론가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바부르크가 던진 주제들을 한층 더 밀고 나가, 로고스를 중심으로 조직된 예술사 전통을 해체하고, 이를 징후학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각 경험 고유의 현상학적 특성, 다시 말해 ‘본다(voir)’는 행위가 언제나 ‘응시당한다(regarder)’는 역관계와 함께 작동한다는 사실이었다. [2] 그는, 주체가 자신이 보는 것에 의해 찔리고 상처 입는 촉각적 경험, 그리고 이미지가 주체 내부로 스며들어 탈주체적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이미지란 유령이자 파토스이며, 동시에 징후다. 이는 이미지를 의미나 사실, 표상으로 고정하고 물화하여 상징계에 예속시키려는 지적 경향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당시에는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파리에서 천착하던 이미지 철학은 (지금 나에게 익숙한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다음의 세 가지 항목으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째, 이미지는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 동등한 위상을 갖는 생명이며 힘이며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존재론). 둘째, 인간이 이미지를 선험적 인식의 틀에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가 인간에게 침투하여 그를 흔들고 변화시키는 행위자라는 점(정동론). 셋째, 이미지를 보는 인간은 이러한 실효적 이미지에 의해 감응되어 변형되는 감수자라는 점이다(페이션시의 이론). [3] 『세계에 대한 믿음』 중 소개된 작품들 (상) < 부운 >(나루세 미키오, 1955), < 황혼의 빛 >(아키 카우리스마키, 2006) 중 (사진: “ Ukigumo ”, “ Laitakaupungin valot ”, IMDb) (하)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나의 해방일지 >(김석윤, 2022) 중 (사진: “ 헤어질 결심 ”, 네이버영화 / “ 나의 해방일지 ”, JTBC) 서설이 길어진 이유는, 작년 겨울에 출판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지를 (청탁을 받은 후에) 곰곰이 떠올리다 보니 그 기원이 20여 년 전 파리 시절의 이미지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집필의 실제 시간대만 놓고 말하자면, 저 책은 2021년에서 2024년 사이에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서울리뷰오브북스》, 『안과밖』, 《뉴래디컬리뷰》 같은 지면에 발표한 영화평들을 책으로 묶었고, 거기서 다룬 작가들은 나루세 미키오, 타르코프스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지아장커, 코엔 형제, 아키 카우리스마키, 켈리 레이카트, 박찬욱 , 박해영 등이다. 한눈에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듯, 저들을 묶는 단일한 주제나 특정 경향, 시대나 지역적 동질성 같은 것은 없다. 아마도 가장 느슨한 공통점은 내가 저들의 작품에 깊게 감응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책을 쓰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시네필’이나 ‘비평가’가 아니라 영화를 겪는다는 의미의 ‘시네-페이션트(cine-patient)’라고 불렀다. 시네-페이션트는 이미지를 겪는 자다. 영화에 의해서 변형되는 자. 영화를 바이러스처럼 삼켜 그것과 함께 하나의 어셈블리지로 생성되는 숙주다. 최근에 내가 제안한 한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봄의 겪음(suffering seeing)”의 주체라고 부를 수도 있다. [4] 이런 존재는 도대체 영화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쓸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이 책의 저변에 흐른다. 나는 영화를 정신분석이나 기호학, 또는 사회학이나 매체이론으로 ‘분석’하는 대신, 영화가 가져온 감각적, 감정적, 지적 변용을 ‘보고’하는 방식을 선택한 셈이다. 이는 책에서 자주 인용된 들뢰즈의 방식이기도 하다. 영화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동맹자로 만드는 것. 감독을 철학자로, 사상가로, (또는 나의 경우에는 사회학자로) 대우하는 것. 영화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영화에 ‘의해’ 감응되어 쓰인 글. 이것이 내가 책에서 시도했던 비평의 한 방식이라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앞에서 언급한 디디-위베르만과 바부르크의 ‘파토스적 패러다임’에 닿아있다. 시네-페이션트는 영화가 눈동자에 던지는 세계의 이미지들을 겪고, 견디고, 앓는다. 나는 책에서 여러 차례 영화의 힘의 바탕에 이런 수동성이 자리 잡고 있다고 썼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봄을 겪는다.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겪는다. 극장에서, 우리의 눈동자는 그 안으로 세계가 침투하는 열린 상처, 또는 벌어진 구멍이 된다. 상처가 상처를 통해 상처를 바라본다. 기쁨이 기쁨을 통해 기쁨을 바라본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볼 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런 체험의 파편들이 책 곳곳에 흩어져 있다. < 스토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79) 중 (사진: “ Stalker “, IMDb) 아쉽게도, 이제 영화를 이런 방식으로 살아내는 이들을 만나는 일은 매우 드물어졌다. 우리는 이미 포스트-시네마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영화의 황혼이며, 극장의 황혼이며, 영화를 보러 가던 마음의 황혼이고, 영화를 보고 난 뒤 스며오던 그 막막하고 어둡고 따스한 기분의 황혼이며, 그 기분을 나누는 대화와 관계의 황혼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슬프지는 않다. 쇠퇴해가는 매체만이 마지막 순간에 방출하는 구원의 힘(벤야민)을 믿기 때문일까? [5] 『세계에 대한 믿음』은 영화를 통해 인간과 세계와 맺는 관계를 고민해 온 한 시네-페이션트의 기록이다. 이미지가 우리를 통과하는 겪음의 시간이 어떻게 사유와 행위로 전환될 수 있을지를 묻는 소박한 실험. 이 책이 독자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지를 겪고 말할 수 있는 영감을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시네-페이션트가 또 다른 시네-페이션트에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당신은 무엇을 보는 것을 겪었는가? *** [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잔존하는 이미지』, 김병선 옮김, 새물결, 2022, 270쪽. [2] Georges Didi-Huberman, 1992. Ce que nous voyons, ce qui nous regarde , Paris. Minuit, 1992. [3] 페이션시는 행위능력(agency)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감수자의 위치, 경험, 힘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하는 힘이 아니라 겪는 힘이며, 겪음을 통해서 형성되는 잠재력이기도 하다. [4] 김홍중, “시대횡단의 징후학1.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사회와이론』 52, 2025. [5] 로절린드 크라우스, 『북해에서의 항해』, 김지훈 옮김, 현실문화A, 2017, 87쪽. 김홍중(사회학자) l 사회이론과 문학, 예술, 문화사회학을 전공한다. 그간 인간의 심적 활동이 어떻게 사회를 형성,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심리사회 연구를 수행해 왔다. 최근에는 21세기 생태파국에 대한 대안적 사회이론과 새로운 문화적 실천들을 탐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마음의 사회학』(2009), 『사회학적 파상력』(2016), 『은둔기계』(2020),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2024), 『가까스로-있음: 브뤼노 라투르와 파국의 존재론』(2025)이 있다.
장률은 새로운 척도로 국경의 의미를 재창조하여 인간의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장소의 중요성을 형상화해 온 초국적 영화작가이다.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특정 지명과 관련 있다는 것(< 중경 >(2007), < 이리 >(2008), < 두만강 >(2011), < 경주 >(2014), <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2018), < 후쿠오카 >(2020))은 그냥 우연이 아니다. 중국의 독립영화와 한국의 디아스포라 영화를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는 장률의 작품 목록 안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다큐멘터리이자 한꺼번에 여러 장소들이 등장하는 희귀한 사례가 < 풍경 >(2013)이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지원을 받아 단편영화로 기획되었다가 장편으로 확장된 이 영화는 아시아 전역에서 한국으로 와 이주노동자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외국인들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이다. 아시아 지역 출신으로 한국으로 이주하였다는 것 외에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그들은 모두 다른 나라에서 하눆으로 이주하였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으며,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이유로 영화에는 중국어, 타갈로그어, 베트남어 등 다양한 언어가 등장한다. 장률 그 자신도 조선족 출신으로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주 예술가’의 처지라는 점에서 저들과 상통한다. <풍경>은 이 노동자들의 개인사, 처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소재로부터 연상되는 르포르타주적인 접근법 대신 장률이 선택한 것은 저들의 꾸는 꿈의 내용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다. 꿈은 다큐멘터리 서사의 통례들을 초월한 독특한 서사의 영역으로 이 영화를 데려간다. 영화의 도입부는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야심한 밤 영종대교를 달려 우리가 당도하는 곳은 인천공항이다. 사람들이 떠나고 떠나오는 장소인 공항에서 질문은 시작된다. 한국에서 꾼, 가장 기억에 남는 꿈은 무엇입니까?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을 떠나 동티모르로 돌아가게 된 아우구스티노 씨는 한국에서 밤마다 어머니의 얼굴이 나오는 꿈을 꾸었노라고 고백한다. 장면은 전환되어 꿈을 꿀 때 하얗게 꺼져 가는 의식 마냥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의 숲을 이룬 영종대교 위를 미끄러져 가는 초현실적 광경이 펼쳐진다. 시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의 오프닝은 꿈의 입구를 지나 꿈의 세계로 깊어져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후부터 혼몽(昏懜)의 세계를 거니는 것 같은 로드무비가 시작된다. 무의식의 극장으로 해석되는 꿈은 희망(길몽)과 공포(흉몽)의 상반된 양태를 띄고 우리 앞에 나타나곤 한다. 대부분은 사라지지만 기억에 남는 꿈에는 현실과의 특별한 연결이 존재한다. 기억하는 꿈에 대해 물었을 때 누군가는 사장님, 사모님, 직장 동료와 함께 고향 스리랑카의 아름다운 사원을 여행하는 광경을 떠올리고, 다른 누군가는 아내와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한국에서 로또에 맞을 날을 상상한다. 반면 20년 동안 시름시름 앓은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맞는 꿈을 꾸었다는 베트남 여인, 떨쳐지지 않는 유령의 악몽에 시달리는 태국 남자, 자신을 악독하게 다루었던 한국인 사장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반추하는 가구 기술자도 있다. 간질 치료를 위해 한국에 온 조선족 소녀는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이라고 포교를 일삼는 사진사 앞에서 여자 경찰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풍경>은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매개된 관점을 배제한 채 인간과 풍경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에 몰두하는 관찰 다큐멘터리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장률은 객관적인 자리에 카메라를 두는 것을 초월하여 자신이 듣고 보았던 이미지를 흐릿한 기억에 의존하여 주관적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는 꿈의 서사라는 접근을 취한다. 이 영화를 끌고 가는 동력은 실향과 선회, 유랑, 귀향의 경험, 간단치 않은 삶의 역정을 살아온 자들 앞에서 느껴지는 숙연함, 말과 이미지의 이율배반적 표현이다. 꿈에 관한 질문에 화답하는 이주민들의 실존적 억류상태는 철 대문 옆에 방치된 개나 골목 모퉁이에 버려진 쓰레기 봉지, 도살장에 뒹구는 잘린 소의 머리, 쓸쓸한 여공 모집 광고, 공터에 방치된 그네로 형상화되고 있다. 스리랑카, 필리핀, 태국, 방글라데시, 네팔, 타슈켄트에 두고 온 이주민들의 꿈은 먼 거리에서 물끄러미 응시된다. 사전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 이주민들의 꿈은 행복에 대한 인간의 보편 의식으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장률은 <풍경>에서 꿈이 삶이 놓친 시간과 그 흔적의 축적이며, 소망충족의 욕망이 남루한 현실과 교차하는 풍경의 집적물이라는 생각을 보여준다. 대다수의 장면에서 장률은 정적이고 긴 쇼트를 용의주도하게 배치한다. 이주노동자들의 일상은 꿈의 맥락에서 분리되면서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 노동의 시간과 나란히 놓인다. 사람이 전혀 없는 동네의 무작위적인 스냅 쇼트는 기이한 인상을 만들어낸다. 스스로 움직이다가 멈추는 세발자전거, 지하철 역사(驛舍) 벤치에 앉았다가 열차가 지나간 뒤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두 명의 남자, 코끼리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 이 장면들은 어떤 이유로 그곳에 들어가 있는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현실 세계에 뚫린 구멍, 세계의 내부로부터 열린 미스터리한 출구로 표현할 수 있는 이 장면들에서 장률의 복화술사적인 능력은 발휘되고 있다. 이웃에 산다는 것은 그 이웃에 있는 물건을 지속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풍경>의 카메라는 너무나 정적이고 자의적인 사물들에 집중함으로써 관객들이 서사와의 연결을 추정하기 힘든 사물과 순간들을 실제로 경험하도록 강요한다. 동질적 요소들을 나란하게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특성을 함축한 쇼트의 충돌(몽타주)이 우세한데, 이를 위해 동원된 것은 말과 이미지 사이의 패러독스이다. 거대한 기중기의 운동, 염색 천을 뽑아내는 지루한 과정, 가구를 만들고 운반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카메라에 기록된다. 꿈속의 장소들은 온기가 충만한 선량의 천국으로 기술되지만 그들이 놓인 장소는 냉혹한 현실이다. 제주도를 환상의 섬쯤으로 상상하는 남자의 이야기에 이어 우리는 황량한 제주의 풍경을 보게 되고, 아버지의 폭력을 두려워하는 여인의 이미지 뒤에는 단란한 가족의 저녁식사가 배치된다. 이쯤 되면 꿈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소망충족의 대리 기제라는 의미로 쓰이거나 현실의 평화를 위협하는 공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풍경>은 삶과 꿈의 아름다운 공생을 상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동시에 그 공생의 사회적, 정치적 조건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장률은 꿈과 현실이 조화롭게 합치되는 삶이 이 땅에서 불가능한 소망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영화에는 안과 바깥, 이산과 귀향, 방랑과 정주(定住) 같은 극단적 풍경이 기록되어 있다. 이주민들이 꾸는 미몽과 현실, 실재와 상상 사이의 부조화, 균열의 찢김은 한국 사회의 패배이고 무능의 자인이다. 한 맥락에서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은 공명한다. 서두에 이야기했듯이 오프닝은 떠나려는 자의 이미지로 열리고, 클로징은 무언가를 맹렬하게 좇다가 하늘을 응시하는 익명의 시선으로 닫힌다. 헐떡거리는 카메라의 격렬한 움직임 위에 비행기의 굉음이 입혀진다. 그러니까 떠나는 장소(공항)에서 시작하여 떠나는 행위(비행기 소리)로 끝이 나는 셈이다. 아마도 향수병에 시달리던 동티모르인 아우구스티노 씨는 한국을 떠났을 것이다. 꿈에 그리던 어머님을 만나게 될 아우구스티노 씨에게 그것은 떠남이 아닌 귀향이다. 그러나 떠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몸이 놓인 장소와 정신이 열망하는 장소의 괴리는 자본주의적인 체제가 만들어낸 소외의 풍경이기도 하다. <풍경>에는 다시 꿰어맞추기에는 희미해진 삶의 흔적과 이방인들의 꿈, 그 소망을 배신하는 풍경이 한 프레임 안에 응축되어 있다. 이 충돌은 어느 곳에도 머무를 수 없는 영혼의 쓸쓸한 표류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스케치하고 있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4분할 폐쇄회로 모니터 안에서 지하철 역사(驛舍)들의 이모저모가 보인다. 서울 곳곳의 지하철 플랫폼을 찍은 저화질 흑백 이미지들이 둔탁한 리듬의 편집으로 나열되는 모니터에서는 열차들이 도착한 뒤 통근자들이 타고 내리고 터널 안에서는 다음 열차의 불빛이 빛난다. 서로 다른 지점을 비추는 네 개의 프레임과 한 프레임을 확대한 이미지가 번갈아 배치되다가 체류 외국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트랙으로 내려가고 그의 마지막 순간이 열셋이나 열넷 또는 열다섯 프레임일 수도 있는 착란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리고, video off... 어두운 색깔의 점퍼를 입은 남자의 최후를 기록한 이 CCTV 이미지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창생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태양 아래로 카메라가 틸트 다운하면 스모그에 뒤덮인 서울의 빌딩 숲이 드러난다. 곧이어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건너뛰면서 라디오 채널의 잡다한 목소리들이 겹치고 도시 경관 위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조언이 흘러나온다. “이번 한 달, 올 한 해를 진정 성공하려면 나의 성과를 냉철하게 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겠죠?”, “웃을 일이 있을 때는 소리 내어 즐겁게 웃도록 하십시오. 많이 웃는 사람은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에 걸릴 염려도 없다고 합니다.” 상냥한 충고와 맞물린 이미지들의 전환은 무뚝뚝하고 가차 없다. 교통체증, 지하철역의 승하차객들, 연체동물 형상의 인쇄기, 무표정한 노동자의 얼굴, 펄럭이는 구인광고, 증기를 내뿜는 다리미, 재봉틀과 박카스 따위의 사물과 행위들이 일상과 산업 공간을 흘러 다닌다. 그 즈음 일상적 생활사의 세목들 위로 별안간 건조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끼어들어 최근 한국인의 사망 원인에 대한 통계자료를 읽어 내려간다. 미세먼지와 황색포도상구균 등의 미생물, 암이나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같은 병증에 이어 고의적 자해로 인한 사망이 4위에 올랐노라고, 내레이터는 말한다. 다시 죽음이라는 의제로 돌아와 이 메마른 통계들의 꺼풀을 벗겨내면 그 아래에서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 파산의 기술 >은 프롤로그에 제시되었던 잊히지 않는 죽음의 내막을 탐사하는 비선형 복합 내러티브 다큐멘터리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혼란스러운 지형을 매핑하는 이 영화는 4개 챕터로 구성된 느슨한 플롯을 취하는데, 서로 다른 기원과 출처에서 발췌한 이미지 자료들을 배치하고 이미지들의 좌표와 접촉면을 확장하여 형성된 문맥이 서사의 핵심이 되도록 한다. 형식과 의미 질서의 구속성을 무시하여 일견 두서가 없는 듯 보이는 서사는 디스토피아적인 도시 경관과 경제적 재난, 긴축 위기에 직면한 남녀들의 증언을 통해 1990년대 말부터 한국 사회에서 시작된 파산의 물결이 개인에게 미친 여파를 추적한다. 말과 언어, 이미지, 정보의 충돌을 전개하는 기술 방식은 번영의 뒤에 도사린 위기, 신자유주의 질서 하에서 은폐되는 착취와 고갈, 살인에 대한 총체적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상적인 확신의 목소리 위에 파산의 풍경들을 대비하는 충돌의 미학을 내세우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충돌의 이미지들이 앞을 막아선다. 불명료한 카메라의 표면 위에 철문을 두드리는 소음이 얹힌다. 채무 변제를 종용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잦아들면 전원이 켜지고 카메라는 십자가와 단란한 가족사진들이 벽에 걸린 좁은 집을 스캔한다. 젊은 엄마는 어린 딸에게 더 큰 집으로 이사할 거라는 밝은 미래를 약속하지만 웬일인지 딸은 “무섭다”고 말한다. 순간 암전, 강제집행을 고지하는 목소리를 따라 불이 켜지면 압수품에 붙은 붉은 딱지들이 보이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다. 저들의 꿈은 어떻게 살해당했는가? 말과 목소리, 이미지의 충돌을 모체로 이어지는 다음 시퀀스에서 다종다기한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은 일상 업무와 부채의 증가, 직업의 조건 따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 중 일부는 얼굴을 숨기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 또는 눈두덩이로만 나타난다. ’붉은 입술들‘이 생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신용과 부채에 의존하는 사정에 대해 말하는 동안 세계경제포럼에서는 말쑥한 비즈니스 맨들이 샴페인을 들고 어슬렁거린다. 한때 아파트 건물이 있던 공간은 크레인으로 철거되고 있으며 부서진 콘크리트 슬라브가 심란하게 흩어져 있다. 붉은 입술들의 대화는 그들의 생존 투쟁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 모닝커피, 출근 준비, 통근, 어린이집, 월세, 여가 시간을 즐기는 방법 따위의 생존 루틴들이다. 포크레인의 집게발이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철근 뭉치를 뽑아내면, ‘붉은 입술들’은 카드 돌려막기로 연명해야 하는 채무의 굴레를 한탄하고, 가족들은 집에서 쫓겨난다. IMF 이후 기업의 파산과 구조 조정이 계약 관행의 조정, 실업, 인플레이션, 대출, 개인 파산으로 이어졌던 고통의 지도가 순식간에 그려진다. 동시에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는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운동가들의 감격적인 연설이 흘러나온다. 텔레비전 안에 박제된 이미지를 제외한 주변은 모두 어둡다. <파산의 기술>은 리드미컬하고 아이러니한 몽타주, 감독 자신의 무감동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사회에서 개인을 증발시킬 위기에 처한 파산의 공기를 시적인 게릴라 영상으로 전환한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혁신을 기도한 감독 이강현은 행과 불행,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에 대한 반성적 시각을 가지고 고단한 노동의 조건과 일상, 거대한 대부 경제의 무게 아래 짓눌린 채무자들의 생존 투쟁, 승리의 확신이 무색한 죽음의 기운들을 능숙하게 대조한다. 승리를 공표하고 환호하는 사람들, 누가 이긴 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왔는가? 사태의 본류와 지류가 분별되지 않는 혼돈의 지도 안에서 생활사의 분주함, 부채의 압력, 웅장한 공공프로젝트의 역사, 노동조합주의의 쟁취, 선거의 승리, 오염된 콘크리트 도시에 대한 느낌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함으로써 <파산의 기술>은 진정한 사회적 고통과 불안을 묘사하려 한다. 이 지점에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우리들의 접하는 이미지의 두께를 이야기한다. 이미지의 표층과 심층에 쌓인 시간의 두께는 서울 영등포 어느 뒷골목 벽에 붙은 너저분한 포스터를 찍은 이미지에 대한 독해로 해설된다. 한몫에 보이지 않는 이 이미지 더미 안에는, 국제결혼을 알선하는 포스터와 사금융 대부업체 전단, 초고속 인터넷 회사의 광고, 룸 가라오케를 선전하는 포스터, 그리고 이 모든 이미지의 뒤에 쌓인 시간의 퇴적층들이 공존한다. 내레이터의 말대로, 우리는 오랜 시간을 가지고 이미지들의 안과 밖을 살펴야 한다. 한 맥락에서 이강현은 재현과 재현의 장치를 동시에 또는 번갈아 보여준다. TV 모니터, 비디오 캠 이미지는 현실과 재현의 구분을 강조한다. TV 모니터 안의 이미지와 바깥의 현실 사이에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우리들은 이미지 바깥에 서 있다. 영화에 주석을 달고 정리해야 하는 에필로그는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1987년 시민항쟁을 기념하는 집회로 이동한다. 선언과 주장, 추억, 공염불, 낄낄거림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카메라는 연사가 아닌 군중을 비추고 있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웃음을 흘리는 해사한 군중들 사이에서 투쟁가에 고양된 한 남자는 외롭게 주먹을 치켜올린다. 장면이 전환되고 흐린 하늘 아래 복면을 두른 노동자들의 집회를 시발로 하여 아파트에서 누군가의 유품을 정리하는 여인의 비디오 영상이 흐른다. 화면 위에 찍힌 날짜는 2003년 10월 17일이다. 붉은 이불이 둘둘 감겨 있는 사람은 고공 크레인 농성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프롤로그의 폐쇄회로 영상에서 보았던 남자의 죽음으로 돌아간다. 주검을 향한 통곡과 이어지는 격문, “나의 목숨을 내놓으라 하면 너의 심장을 찔러주겠다.” 승리를 기념하는 사람들의 맞은편에서 죽창을 든 노동자들은 공격을 위한 채비에 나섰다. 우리들은 이미 철거와 퇴거, 쏟아지는 절망, 그리고 지하철에서 생을 마감한 남자를 보았다. 영화의 앞과 뒤에 평행하게 놓인 죽음은 어떻게 서로를 향하는가? 상투적인 인과론의 오류를 넘어 <파산의 기술>은 간단히 정의될 수 없는 사회학적 현상으로 이 죽음들의 지도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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