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류
- 감독
- 김소영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김소영, 이연정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미관(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한성의 상설 실내극장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극장이 어우러져 극장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1902년에 건립된 희대 는 여론의 추이에 따라 우여곡절을 겪던 와중에 폐관과 재개관을 반복하다가, 1908년부터는 원각사로 이름을 바꿔 운영되었다. 별도의 극장명 없이 활동사진을 영사해 왔던 동대문의 한성전기회사 창고 건물은 1907년부터 광무대 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는 종로대로를 축선으로 삼아 장안사, 단성사 , 연흥사 가 신설되었으며, 새문 밖에서는 프랑스인 마전(馬田, martin)이 운영한 마전활동사진관 이 영업을 개시했다. 다만, 이들 극장이 본격적인 영화 상설관으로 운영되지는 않았다. 영화가 간헐적으로 상영되기는 했지만 비중이 높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며, 상영물은 대개 단편적인 활동사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극장 프로그램에서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전통연희와 가무, 신파극 등이었다. ‘활동사진관’이라는 명칭을 내세웠던 마전활동사진관 역시 명창들의 공연을 병행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원각사 극장 전경 본격적인 영화 상설관은 일본의 자본력이 동원되면서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경술국치와 함께 한성이 경성으로 바뀌는 시기와 맞물려 일어난 변화였다. 1910년에는 경성고등연예관이 영업을 개시했고, 이후 황금관 , 대정관, 유락관, 제2대정관 이 개관하면서 새로운 극장가를 형성했다. 이상의 극장들은 핵심 소구 대상으로 상정했던 재조선 일본인의 거주지인 남촌 부근에 터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일본인들만으로는 충분한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웠기에 남촌의 극장들은 조선인들의 출입을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고, 영화에 매혹된 조선인들 역시 새로운 사진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남촌의 극장을 드나들었다. 결과적으로 1910년대의 극장가는 종족 혼합적 공간 의 성격을 띠게 되었던 셈이다. 본디 극장은 입장료에 대한 지불능력만을 최소한의 문턱으로 삼는 곳이며, 수익을 보장해 줄 수만 있다면 어떠한 관객이라도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곳이다. 다만, 경술국치 이후 식민지의 백성으로 전락한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총칼을 앞세운 무단통치의 폭력 앞에서 그러한 반감이 대대적인 저항으로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잠재된 불만은 종종 불온한 공기를 형성해내곤 했다. 그리고 일본인과 조선인이 뒤섞여 있던 극장은 종족적 적대감을 징후적으로 노출하는 장면도 종종 연출해냈다. 이구영 은 영화사가 이영일 과 진행한 구술 채록 과정에서 영화를 매개로 종족적 대결의식 이 촉발된 사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 바 있다. (이구영) 그런데 거기서 사상적으로 충돌이 난 일이 한 번 있습니다.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걸 이제 내가 얘기할게요. 왜 그런고 하니, 유도하고 권투하고, 시합하는 단편영화가 있었어요. 그러면 이제 서상호가 무대에 서면, 서상호는 일본놈 편으로 무대에서 박수를 치라고 가르치고 관중들은 한국 사람이 절반이니까 와~ 소리가 나고 말이죠. 그래서 권투 시합에, 거기서 큰 혼란이 일어났었어요. 그냥. [일본놈 치고 때리고 난리 나다시피 하고, 그짝 나고 말이지.] 허허허, 이럴 때 아주 골아봐라 하고 그놈이 쫓아들어오고 말이지. 허허허. (중략) 그래 가지고는 [양자측이 있겠지만] 일본 놈은 그냥 나막신 신은 채로 구르고 몇번 구르고 한바탕 야단을 치는데, 한국 사람 심리가 그거예요. 우우 소리를, 그냥 반대로 한 거죠. 우우 했죠. 그러니까 이제 서상호는 일본 사람 편들었으니까. 무대 위에서라면 유도하는 아무개가 짜끄를 이겼단 말이야. 이렇게 소리지르면... 그러다가 이제 이기는 것이 좀 나와야 될 거 아닙니까. 이제 권투가? 그 때는 관중이 우뢰 같은 박수갈채가 나오는 데야... 흐흐흐. (이영일) 아하하하하. 그래 됐군요. (이구영) 그래서 그거 사상적으로 큰 문제가 벌어져서, 그게 중단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야단친 일이 있었어요. - 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복혜숙, 이구영』 , 소도, 2003, 195쪽. 이구영은 영화 < 쌍옥루 >(1925)로 첫 영화를 발표한 이래 < 낙화유수 >(1927), < 승방비곡 >(1930) 등을 연출한 감독이었으며, 1920년대의 대표적 영화평론가로 활동한 바 있다. 또한 단성사 선전부장으로 재직한 이력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초창기 영화가의 분위기에 대해 풍부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변사 서상호가 경성고등연예관에서 활동했던 시기에 대해 회고하면서 영화 상영이 종족 간의 패싸움으로 비화된 사건이 있었다고 밝혔다. 일본 유도선수와 서양 권투선수가 맞붙는 짧은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해설을 맡은 서상호는 일본 선수에 대한 응원을 유도했지만, 일본인 관객들의 호응과 달리 조선인 관객들은 야유를 보냈으며, 외려 서양 권투선수가 활약할 때 박수갈채를 보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인 관객들과 조선인 관객들은 서로 욕설을 주고받고 방석과 귤껍질을 서로 집어던지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경관들도 함부로 끼어들지 못할 만큼 살풍경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종족 혼합적 극장의 분위기가 치안의 잠재적 불안요소로 지목될 수 있음을 보여 준 국면이었다. 한편, 영화가 극장의 핵심적 프로그램으로 부상하게 되면서 북촌의 극장가 역시 이러한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는데, 1912년에는 우미관 이 건립되어 북촌의 영화상영관으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우미관이 조선인 관객을 독점 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 왔다는 점이다. 특히 제2대정관의 노선 전환과 관련된 맥락은 우미관의 욕망을 들여다보기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대정관 관주는 1914년 6월에 경성고등연예관을 매수한 후 제2대정관을 운영하기 시작하는데, 특이하게도 이곳은 남촌에 소재해 있었지만 조선인 관객들을 위한 전용관을 표방하면서 김덕경, 최병룡 을 비롯한 조선인 변사도 영입한 바 있다. 그러나 제2대정관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일본인 전용관으로 노선 전환을 꾀한다. 아마도 입지조건상 조선인 관객들만을 유치하기에는 수익 창출이 어려웠던 사정이 개입되어 있으리라고 추정되는데, 김승구 는 이 과정에 우미관과 제2대정관의 ‘이면계약’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우미관은 대정관이 조선인 전용관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매월 200원씩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주1 물론 이것은 북촌에 영화 상설관이 우미관 하나뿐이었을 때만 유효한 전략이었을 따름이다. 1918년에는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 이 단성사를 인수한 후 영화를 본격적으로 상영하기 시작하면서 경쟁 체제가 성립되었다. 또한 1922년에 조선극장 이 건립되자 북촌 극장가의 경쟁 구도는 3파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우미관은 점차 일류 상설관으로서의 지위를 양보하고 저가 입장료 정책을 펴며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모양새를 취했는데, 1920년대 이후부터는 단성사와 조선극장의 양강 구도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좌) 단성사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 단성사(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 (우) 조선극장 종족적 분할을 시도한 우미관과 제2대정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종족이 혼재된 객석의 풍경은 종족 간의 돌발적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정적인 운영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조선의 극장들이 점차 종족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해나가게 되었다는 점은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인다. 유선영은 조선인들이 주로 출입했던 극장들이 일본영화가 아닌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했으며, 입장료도 저렴하게 책정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일본인 전용극장들과 뚜렷한 지역적, 민족적 분할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분할을 통해 조선인 극장은 식민치하에서 거의 유일하게 허용된 ‘ 종족의 공간 ’이자 ‘ 집합의 공간 ’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극장이 스펙타클적 쾌락의 소비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족 집단의 존재에 대한 확인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위무받기 위한 공간 이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주2 더 나아가 종족공간은 지정학적으로 분할 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물론, 북촌 지역에 건립된 일본인 극장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점차 북촌은 조선인들의 공간이며 남촌은 일본인들의 공간이라는 심상지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백두산이 지적한 것처럼, 조선시대에 북촌과 남촌의 경계는 기존 거류민들의 기질이나 위치(청계천)를 기준으로 구분되었지만, 식민지배 이후 경제적이고 종족적인 경계구역으로 맥락화되는 경향이 현저해지게 되었다. 즉, 북촌 은 조선인의 종족적 공간이자 개발에서 낙후된 구도심 이라는 심상적 범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주3 이러한 변화는 치안당국의 통제를 용이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이순진 이 밝힌 바와 같이, 낙후된 북촌에 종족적 ‘게토’로서 조선인 극장가가 형성되었다는 점은 종족 간의 충돌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조건이었으며, 감시 역량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에도 좋은 조건이었다. *주4 다만, 극장 내에서 이루어진 종족 간의 갈등 상황이 어디까지나 극장의 울타리 안에서 봉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던 것과 달리, 종족의 연대를 통해 결집된 에너지가 극장 바깥으로 확산 될 가능성은 훨씬 커지게 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현 종로구 관철동에 위치했던 1937년 우미관 의 모습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미관(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둘째번 연주회를 열던 십이일 밤 우미관에는 일장 대풍파가 일어난 일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들은즉 당일밤 아홉 시쯤 되어 무대에 섰던 이왕 다동 기생의 은희 아비가 품속에 있는 금시계를 잃어버린 소동 이 생기어 형사들은 필경 사람 많이 모인 중에서 못된 스리(소매치기)란 도적이 그리함인 줄 짐작하고 대활동을 개시하여 파하기 전에 틈틈이 나아가는 사람들을 일제히 신체 수색 을 한 바 마침내 시간이 다 되어 수백의 관객은 물결치듯 솟쳐 나아가자 준비하고 있던 형사들은 나아가는 사람마다 일일이 신체 검사를 할 때, 모든 관객들은 표 사가지고 구경왔다가 신체 검사를 당하는 것은 참으로 당치 못할 일이라 하고 호성을 지르고 풍파 를 일으키어 그대로 솟쳐 나아갔으므로 한참동안 그러한 혼란은 없었고 신체검사도 마치지 못하여서 매우 살풍경을 이루었다더라.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18-1920 』, 2009, 267쪽. 기사, “우미관의 소동”, 《매일신보》, 1919. 11. 14. 우미관에서 발생했던 경찰과 관객의 충돌은 종족공간의 파급력을 엿볼 수 있는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금시계를 분실한 관객의 신고가 접수된 후 임석경관은 소매치기의 소행으로 짐작하고 증원을 요청했으며, 극장을 나가는 수백 명의 관객들에 대해 일일이 신체 수색을 시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관객들이 “표 사서 영화 보러 왔는데 신체검사가 가당키나 하냐”면서 강하게 항의하며 나가버리자 검사도 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무척이나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객들은 극장 안에서 행사된 공권력의 통제에 대해 공공연한 반감을 드러냈던 셈인데, 주목할 것은 이 사건이 3.1운동이 시작되었던 1919년 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전 조선 단위로 확대된 3.1운동의 여파가 남아 있던 경성에서 제국은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의 통제가 또 다른 저항운동의 도화선 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점차 종족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해 나가게 된 조선인 극장들은 중대한 소요사태가 예견될 때마다 치안 당국의 ‘일급 감시대상’으로 지목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해도 극장을 무조건 폐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외려 제국은 극장이 영업을 중단하게 된다면 치안에 위협 요소가 될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나 아우구스또 보알이 지적했던 것처럼 극장은 사회적 불만이 대규모 대중투쟁으로 번져나가지 않도록 방지하는 감정의 배출구 역할을 담당한 곳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은 사회통제와 치안 유지를 위한 유력한 기구로 극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제국은 조선인 극장들의 영업을 허용하되, 종족의식에 기반한 폭발력을 적절히 제어 하는 기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흥행장급흥행취체규칙”(1922)을 필두로 극장 취체규칙들이 본격적으로 입안되었던 것은 그 연장선에 놓인 조치였다. 3.1운동 이후 제국은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를 표방하게 되었던 바, 극장은 새로운 통제기술의 유효성을 확인하기 위한 유력한 시험대와도 같았다. *** 주1. 김승구, 「1910년대 경성 영화관들의 활동 양상」, 『한국문화』 53,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1. 주2. 유선영, 「극장구경과 활동사진 보기 : 충격의 근대 그리고 즐거움의 훈육」, 『역사비평』 64, 역사비평사, 2003. 주3. 백두산, 「1910년대 경성 북촌 조선인 극장가와 종족공간적 구성」, 『한국연극학』 63, 한국연극학회, 2017. 주4. 이순진, 『(조선인 극장)단성사: 1907-1939』, 한국영상자료원, 2011, 34쪽.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남촌’이란 원래 서울의 남쪽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남산 왜성대에 일본영사관이 들어선 이후 그 일대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지금의 충무로역 부근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거류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일본인 거류지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남촌의 범위도 확대됐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일반적으로 청계천이나 황금정길을 경계로 그 이남 지역을 남촌이라 불렀다. 남촌의 일본인 거류지에 언제 처음 극장이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인 흥행업자가 19명이나 거주하고 있던 1902년 즈음에는 상설극장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경성 거주 일본인 수가 급격하게 늘면서 극장 역시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 경성의 일본인 이주민의 수는 3만 8천명을 넘어섰는데, 얼마 지나지 않은 1914년에는 6만 6천명으로 러일전쟁 직후보다 6배 정도의 증가를 보였다. 1914년 당시 남촌의 일본인 상설영화관은 대정관(大正舘), 제2대정관, 황금관(黄金舘) 등 세 곳이었고, 수좌(寿座), 수관(寿舘), 어성좌(御城座) 등 몇 곳의 연극장도 존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10년 이전 경성에 일본인 극장이 몇 개나 있었고, 이 극장들을 누가 어떻게 설립했으며, 이것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등의 전모를 알려주는 확실한 자료는 없다. 경성 거주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에 그러한 내용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이 중 강점 이전 경성의 일본인 극장에 대해서는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에 소략하게 설명되는데, 이에 따르면 러일전쟁 직후인 1907년을 전후한 시기 일본인 거류지 중 수정(壽町) 3정목에 수좌, 남대문 밖에 어성좌(御成座), 욱정(旭町) 1정목에 가부키좌(歌舞伎座), 본정(本町) 2정목에 본정좌(本町座), 본정 7정목에 경성좌(京城座) 등 총 5개의 극장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2. 수좌의 모습(岡良助, 『京城繁昌記』, 東京: 博文社, 1915년.) 『경성번창기』에 언급되지는 않지만 당시 신문자료를 토대로 살펴보면, 1906년 11월 일본인 거류지인 본정 7정목에 송도좌(松嶋座)라는 극장이 있었고 여기서 활동사진을 상영한다는 기록이 있다. 송도좌는 1907년 2월 4일 화재로 전소되었는데, 당시 기사를 보면 건물은 2층 양옥으로 확인된다. 또한 화재 진압에 감사하는 신문 광고를 보면, 일본인 다니가와(谷川與一), 이치가와(市川熊太郞), 미즈노(水野庄太郞) 등이 송도좌와 관련되어 활동했다고 한다. 송도좌의 경우처럼 언제 처음 건설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06년 무렵에는 확실히 일본인 거류지에 극장이 존재했다. 당시 경성의 일본인 거류지인 수정 2정목에는 경성좌가 있었다. 경성좌 역시 설립자나 운영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바, 대신 연설회 개최를 알리는 기사가 1906년 9월 《조선신문》에 실렸고 1907년에도 인천가부키좌에서 상연했던 연극을 경성좌로 옮겨 공연한다는 기사가 실리는 등 다양한 공연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 1908년 8월 경성좌는 수정 2정목(본정 4정목)에서 본정 7정목으로 자리를 옮긴다. 보통 새로운 극장은 이전에 극장이 있었던 자리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경성좌는 화재로 사라진 송도좌 자리로 이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의 충무로역 대한극장 건너편 옛 극동극장 부근이다. <단장록(斷腸錄)>, <금색야차(金色夜叉)> 등 유명한 신파 레파토리를 공연했던 경성좌는 1911년 3월 시설 낙후를 이유로 폐관되었다. 조선인들에게는 혁신단의 임성구가 일하며 신파 연극을 배운 곳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강점 이전 경성의 일본인 극장을 대표하는 곳은 경성가부키좌였다. 1907년 1월 5일 낙성식을 거행하고 개관한 경성가부키좌의 좌주는 이토(伊藤)라는 인물이었는데, 1910년 무렵의 좌주는 노구치(野口松五郞)였다. 건물주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기간을 두고 흥행업자에게 대관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가부키공연을 할 수 있는 규모의 대극장으로 다양한 흥행물 공연이나 활동사진 상영은 물론, 경성에 주재하던 일본인들의 각종 행사까지도 치룰 수 있는 장소가 경성가부키좌였다. 1911년 8월 26일에는 ‘키네오라마’라는 장치를 설치하여 극장의 설비를 강화하는 등 경성의 일본인 극장을 대표하던 경성가부키좌는 1912년 2월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경성의 다른 유서 깊은 극장으로는 판본좌(坂本座)와 그의 후신인 수좌를 꼽을 수 있다. 판본좌가 설립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인 지금의 충무로 남산스퀘어빌딩 북편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뒤에 이야기 할 본정좌와 더불어 경성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었으나 공연 내역을 밝혀주는 자료는 많지 않고, 1907년 5월 사카이(酒井)일좌가 공연했다는 기록 정도가 남아 있다. 1908년 판본좌를 헐고 그 자리에 수좌(壽座)가 건립된다. 수좌는 남촌의 일본인 극장을 대표하며 1919년까지 영업을 지속하다가, 같은 자리에 경성극장(京城劇場)이 신축되면서 사라졌다. 사진3. 수관의 개관 광고(《朝鮮新聞》, 1912년 12월 26일 자.) 사진4. 수관의 무대(岡良助, 『京城繁昌記』, 東京: 博文社, 1915년) 본정좌는 판본좌와 마주하고 있었다. 이곳은 심훈이 19세기 말 영화가 처음 상영된 장소라고 지목한바,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보면 1907년 7월 30일 개관했고 당시 흥행주는 이토(伊藤友松)였다. 다만, 1907년 이전 동일한 이름의 극장이 다른 장소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본정좌는 경성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일본인 신파 극단 기타무라(北村)일좌의 근거지였으나 1909년 2월 16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됐다. 1912년 본정좌 자리에 새로운 극장이 설립되어 이름을 수관(壽館)이라 했다. 수관은 1920년대 중반 다시 이름을 본정좌라 바꾸어 운영하기도 했으나 곧 사라졌다. 남대문통에서 명치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한 낭화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샤미센을 뜯으며 창을 하는 나니와부시(浪花節) 공연을 위해 만든 작은 규모의 극장이었다. 현재 명동1가 65-2번지 자리로, 1909년 12월 1일 개관했으며 관주는 니시다 가죠(西田嘉三)였다. 라쿠고(落語)와 같은 작은 규모의 공연이 주로 펼쳐졌고 1930년대 영화관으로 개축되었으나, 해방 후 낭화관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명동극장으로 바꾸었다. 1974년도에 폐관되었다. 남대문 밖에 위치한 어성좌는 강점 직전인 1910년 5월 31일 낙성식을 열고 영업을 개시했다. 1913년 당시 좌주는 다나카(田中駒次郞)라는 인물이었고 조루리와 인형 연극과 같은 작은 규모의 흥행물 공연을 주로 했다. 1910년대 중반 사라진 어성좌의 현재 위치는 남대문 YTN타워 주변이다. 사진5. 1920년대 초반 낭화좌의 모습 이들 극장 외에 1910년 이전에 만들어진 극장으로 영락정(永樂亭)이 있었다. 강담(講談), 라쿠고(落語), 나니와부시(浪花節) 등 일본의 전통 연희를 전문으로 흥행하는 이른바 요세(寄席)였다. 1910년대 중반에는 신정(新町) 유곽 입구에 극장이 들어섰다. 이 극장은 시기에 따라 문락좌(文楽座), 도하좌(稻荷座도화자? 桃花座?), 낭화좌(浪花座), 조일좌(朝日座)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나아가 1910년 경성에 포함된 용산 지역에는 용산좌(龍山座), 좌구랑좌(佐久良座=사쿠라좌) 등이 있었다. 특히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발달하기 시작한 1910년대, 신용산과 구용산 지역에 각각 한 개씩의 극장이 있었다. 신용산에서 구용산으로 들어서는 길에 위치한 영정(榮町)에는 1906년 용산좌(龍山座)가 들어섰는데, 1910년대에 이름을 개성좌(開盛座)로 바꾸었다. 신용산이라 불린렸는 용산역 앞 한강통에 자리잡은 사쿠라좌(櫻座) 역시 구용산에서 신용산이 만나는 자리에 있었다. * 참고문헌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 사진1(상단). 황금유원 관련 기사(《매일신보》, 1913.06.23.) [자료] "경성 활동사진계의 내막 - 기대가 무너진 유락관과 수좌는 어떻게 되나?" - 「京城活動寫眞界の內幕-當て事の外れた有樂館と壽座は何うたる」,『朝鮮及滿洲』, 통권 103호(1916년 2월호), 122~124쪽: 김태현 편역, 『일본어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39~47쪽. 수지타산이 맞을 것인지 아닌지 눈 쌓인 북한산에서 매섭게 불어오는 찬바람이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전봇대 위에 걸쳐 있는 전선이 꽁꽁 얼어서 소리 나는 추운 밤에도, 마음이 굳세고 당찬 과부가 울며 탄식하는 듯 한 겨울 밤비가 조금 내렸다. 지나가는 저녁에도, 시내의 좁은 골목에 위치한 ‘활동사진 거리’로 불리는 앵정정(櫻井町) 부근에는 행인의 발걸음을 붙잡는 요란한 색채의 그림간판이 버젓이 걸려 있다. 그리고 펄럭이는 깃발, 향락적인 느낌을 자극하고 조장하는 녹일(綠日)날 행사의 악대소리, 이 악대 소리가 황금정의 큰 도로를 슬픈 소리를 내면서 가로지르는 노면 전차의 울림 사이사이로 간간히 들리고 있다. 재작년 연말 언저리부터 작년 여름 사이에 경성 흥행계 전체를 장악할 기세였던 활동사진은, 공진회가 결성된 전후부터 금년(1916년)까지 흥행의 변화추이를 살펴보면, 다소 열기가 식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다른 흥행물과 비교해도 여전히 현격한 차이가 날 정도로 대단한 기세이다. 현재 경성 활동사진상설관은 대정관, 황금관, 유락관, 수좌, 우미관 이외에 용산에는 황금관의 분관 용강관(龍江館)이 있다. 이것들을 세어보면 모두 6관이 있다. 그 중 조선인 전용관 우미관을 제외하면 일본인 전용 상설관이 5개가 된다. 경성과 용산을 합하여 일본인 인구 7만에 불과한 곳에 상설관 5개의 존재는 조금 많은 감이 없지 않다. 비록 조선에 육군사단 설치를 염두에 두고 장래 발전을 기대한 설립이었지만, 지금 상태로 각 상설관이 수지타산이 맞을 것인지 상당한 의문이 든다. 세계관의 권리 5천원! 이중에서 유락관, 수좌 2개관은 한 달에 2주간 밖에 흥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에는 2개관의 경영자들은 대정관, 황금관과 마찬가지로 연중 내내 흥행을 하고 싶었다. 수좌는 종전 체재를 완전히 바꾸어 활동사진 흥행 상설 전문관으로 신장개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개축은 어떻게든 허가를 받을 수 있었지만, 흥행은 총독부로부터 장기간 흥행불허 판정을 받았다. 유락관은 수좌의 전례를 여러 방법으로 검토하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판단 하에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그 결과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양척식주식회사 옆에 있었던 세계관의 권리를 5천원 가까운 금액으로 구입하였다. 이 정도 조건이라면 불만은 없을 것이며 틀림없이 장기간 흥행허가가 승인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의외였다. 기대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 근처 다카기 도쿠야(高木德彌), 미쓰코시(三越)오복점, 백삼십은행, 쓰카타니(塚谷)잡화점 등에서 “이렇게 여염집이 즐비하게 늘어진 장소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천만한 활동사진을 연중 내내 상영한다면 과연 괜찮을 것인가? 그렇게라도 해도 억지로 활동사진 흥행 전문관을 만들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도 생각이 있다.”는 강한 항의도 있어서 첫 번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5천원으로 구입한 세계관의 권리도 거의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것을 처분, 양도한다면 한 달에 2주간 했던 흥행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동일한 닛카쓰 작품으로 3개 상설관 경쟁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겨우 활동사진관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이 시기부터 활동사진에 대한 시민들의 열기도 그리 뜨겁지 않았다. 이러한 힘든 상황 속에서 생긴 2개의 상설관을 위해서 시민들이 다시 발길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시민의 활동사진 열기는 상설관 증설과는 무관하게 반대 방향으로 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연일 입장객 만원을 꿈꾸고 있던 2개관 업자들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고, 흥행하면 할수록 경영은 점점 악화될 뿐이었다. 왜냐하면 유락관이든 수좌이든 둘 다 대정관과 동일하게 닛카쓰와 계약을 맺어 닛카쓰 영화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 상설관은 서로 제휴도 연락도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 영화는 거의 같은 밭에서 수확한 작품을 반복하여 상영하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같은 회사의 영화로 경쟁하려고 하니 돈은 돈대로 나갔고 관객에게는 ‘아 그래 바로 이것이야’라는 자극도 주지 못했다. 더군다나 비록 2주간 정도밖에 할 수 없는 흥행이라고 해도 상설관 입장에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악대, 변사, 매표소 직원에게 상당한 보수를 지불하고 자리를 지키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 힘든 것은 이들의 급여는 일본과 비교하면 이외로 상당한 고액이여서 수좌와 유락관에서는 변사를 융통하는 문제가 제기될 정도였다. 하지만, 쌍방이 자신들의 주장만을 펼쳐 결국 협상은 결렬 되고 말았다. (이하 생략)
19세기 후반 외국인의 출입과 거주가 허용되면서 서울에 근대식 건축물과 일본식 가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곧이어 도로가 닦이고, 전기가 들어오고, 전차가 다녔다. 날이 갈수록 눈에 띠게 달라지는 서울에는 구경꾼들도 모여들어, 각지에서 온 ‘경성관광단’ 소식이 신문지상에 심심치 않게 보도되곤 했다. 구경꾼 무리 중에는 바다를 건너온 일본인 관광단도 있었다. 대륙으로 뻗어가는 제국의 위세를 확인하기 위해 만주-조선 시찰 중 식민 수도 경성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대개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와 조선의 부산 사이를 운행하는 관부연락선을 이용했는데, 부산항에 내려서 경부선 기차로 갈아타고 경성으로 오는 식이었다.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 산기슭에 자리 잡은 조용한 마을과 단조로운 농촌 풍경뿐이라 지겨워 졸고 있노라면 시끄러운 소음에 눈을 뜨게 되는데, 거기가 바로 가스등과 전기등이 빛을 밝히는 경성역이었다. 전차가 달리고, 자동차가 달리고, 인력거가 달리는 경성은 일본의 도시들을 부지런하게 모방하며 변해 가는 모습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경성에 도착한 그들은 번화한 일본인 거류지에 숙소를 잡고 고궁과 사찰, 유적지, 그리고 종로의 조선인 거리를 탐방한 뒤 다시 일본인 거류지로 돌아오는 식으로 관광을 했다. 자신들과 외모는 비슷하지만 말이 다르고 의식주가 다른 조선 사람들의 생활 풍속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한편으로, 한일병합 이후 총독부의 식민 통치가 조선의 경관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지 ‘흐뭇하게’ 눈에 담는, 제국주의적 욕망이 투사되는 관광이었다. 일본인 관광단에게 경성의 극장은 한번쯤 가 볼 만한 곳으로 여겨진 듯하다. 이들이 마치 조선에 대한 안내서인 양 읽었던 다카하마 교시(高浜虛子)의 소설 『조선(朝鮮)』(東京日日新聞, 1911년 6월 19일~11월 25일 연재)에서도, 주인공이 종로의 조선인 거리와 기생집을 구경한 다음 극장을 찾는 대목이 있다. 일본인의 시선으로 조선의 극장과 공연 문화를 관찰한 이 대목은 당시의 극장 문화를 상상해 보는 데에도 유익한 자료가 된다. (아마도 1908년에 세워진 원각사를 떠올리게 하는) 극장 ‘원융사(圓融社)’에 방문한 주인공은 조선인 관객들과 함께 음악 연주, 기생의 춤, 그리고 중국인 마술과 곰 곡예를 구경하면서, 그러한 극장 연예가 일본과 어떻게 다르며 조선의 관객들이 무엇에 흥겨워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 여행자에게 타지의 극장은 본국으로부터 떠나왔다는 고립감을 환기하는 동시에 이색적인 경험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림2. 곰 곡예 출처: 다카하마 교시, 『조선』 중에서 경성의 도시 경관은 계속 바뀌어 갔고, 극장은 그에 따른 풍속의 변화를 예리하게 감지할 수 있는 장소였다. 다카하마의 『조선』으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나, ‘대경성(大京城)’으로 확장된 경성을 소개하는 『신판 대경성 안내』(『新版大京城案內』, 矢野干城·森川淸人, 京城都市文化硏究所出版部, 1936)가 발간되었다. 이 안내책자는 “영화관 외에는 이렇다 할 놀 곳이 없는 경성인에게 영화 보기는 경성인의 최대 오락”이라며 경성의 여러 극장들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희락관, 낭화관, 중앙관, 약초영화극장, 송죽좌, 경룡관, 단성사, 조선극장, 제일극장, 우미관, 동양극장이 영화를 상영하는 시설이었으며, 조일좌와 경성극장이 연극을 상연하는 시설이었다. 『조선』의 일본인 여행자가 조선인 극장에서 조선인이 즐기는 것이 무엇인지 신기해 하며 관찰하는 태도를 취했다면, 『대경성 안내』는 일본인 관광객이 도시의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여러 소비 공간—카페, 바, 끽다점, 백화점—과 함께 극장을 소개하면서 소비자의 입장에서 유익할 정보들을 제공하는 모양새이다. 각 극장의 주요 프로그램이나 입장 요금, 영사 시설, 냉난방 설비 등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해 극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버스나 전차의 노선과 정류장으로 극장의 위치를 안내하는 것도 흥미롭다. 1936년 현재, 아직 명치좌(明治座)는 개관하지 않았지만 경성의 극장가가 한창 들떠 있는 듯하다. 이를 두고 『대경성 안내』는 경성의 영화 흥행계가 설비를 개선하고 신관을 건축하는 등 일본의 일류 도시에 버금갈 정도로 극장을 단장 중이라고 전한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 온 관광객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경성 영화가의 풍속도 빠짐없이 기록한다. 1935년 말 신설된 약초영화극장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극장에 ‘극장 여급(お茶子)’이 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극장 여급은 입장한 관객을 좌석으로 안내하면서 방석과 화로 등을 거의 강매하다시피 판매했다. 편의 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은 ‘50전’의 입장료를 지불하고도 방석과 화로를 따로 구매해야 해서 실제로는 ‘65전’ 이상을 부담해야 했다. 필름 영사 중에도 담배를 필 수 있게 해서 극장 환경이 위험하고, 위생상 불결하다는 점도 관광객들을 불쾌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일본의 모든 극장이 고급한 설비를 갖춘 것도, 모든 일본인 관광객의 문화 취향이 고상했던 것도 아닐 테지만, 『대경성 안내』는 제대로 된 설비를 갖추고 관객의 편안한 관람을 방해하는 관행이 없어져야 ‘문화의 전당’이라는 수식어에 걸맞다고 전제하며 일본의 문화 수준에 미달하는 경성의 극장 정보를 이른바 ‘알아두면 쓸데 있는’ 관광 정보로 제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낙후되었다고 본 경성의 극장들에 대한 기록이 오늘날 경성의 극장 문화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셈이다. 상단그림1. 원각사를 모델로 한 '원융사' 출처: 다카하마 교시, 『조선』 중에서 <자료> 1. 다카하마 교시, 『조선』, 김영식 옮김, 소명출판, 2015, 74~79쪽, 부분 발췌. 극장 앞은 아직 번잡하게 보였다. 나는 한정 없이 환락을 쫓아 돌아다녔던 학생 시절의 기분을 환기시키면서―열한 시가 되건 열두 시가 되건 잠도 피로도 잊고 등불 있는 곳을 쫓아 돌아다녔던 그 당시의 기분을 불러일으키면서―표를 사고 안으로 들어갔다. 원형의 건물은 서양풍을 가미한 것으로,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좌석에는 많은 조선인이 조용히 구경하고 있었다. 무대에는 두 사람의 총각과 세 명의 요보 1 가 마주하고 있어, 잠시 들어보니 봉오도리(盆踊) 노래 같은 것을 합창하면서 각각 손에 들거나 목에 건 악기를 요란하게 치고 있었다. 홍 상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여기는 극장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대중연예장처럼 되어 있어 음악도 하고 기생 춤도 하며 중국인 마술 같은 것도 한다고 했다. 우리는 가장 뒤의 높은 곳에 빈 의자를 발견하고 앉았다. 그곳도 조선인이 앉아 있었으나 우리를 보고 자리를 양보했다. 둘러본 바, 일본인은 나와 고조뿐으로 장내의 조선인은 모두 신기하다는 듯이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또, 남녀의 좌석은 엄밀히 구분되어 있어 여자 쪽 자리에도 의외로 많은 부인이 얼굴을 나란히 하고 있었다. 홍 상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양반 등의 첩으로 정식 부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무대의 요란한 전주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홍 상은, “이건 참 따분하군요. 무언가 재미있는 것으로 빨리 바꾸면 좋을 텐데”라고 조바심을 냈다. 그렇지만 나는 무대보다도 관람석 쪽에 더 많은 흥미를 찾아내며 그들 조선인 남녀가 어떠한 기분으로 이들의 연예를 보러 왔는지 알고 싶었다. 그들은 정숙하게 멍하니 단지 그 음악을 듣고 있었다. 우리가 내려다보는 바로 밑쪽에는 아이를 업은 총각이 의자 위에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 업힌 아이도 그대로 자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 앉아 있는 조선인은 손에 쥔 긴 담뱃대의 대통을 무릎 위에 얹고 때때로 입으로 연기를 내뿜으면서 계속 조용히 무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 좌석 쪽도 모두 딴 곳으로 보지도 않고 각종 색깔의 옷자락을 양손으로 여미고 일제히 무대 쪽을 보고 있었다. 그때, 지금 막 들어와서 뒤쪽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멀리 보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소담이 틀림없었다. (...) 과연 중국인의 마술은 재미있었다. 한 사람의 중국인은 이상한 큰 소리를 내며 뭐라고 하자 조선인은 모두 웃었으나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저건 조선말입니까?”라고 홍 상에게 묻자, “그렇습니다”라고 홍 상은 대답했다. 이윽고 중국인은 하나의 큰 상자 같은 것을 꺼내 정면의 상 위에 놓고 그 상자 안을 관객에게 보이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한 후에 곧 그 안에서 이런저런 것을 끄집어내어 객석의 갈채를 받았다. 빈 상자 안에서 물건을 꺼낸다는 것은 일본의 마술과 다를 바 없었으나 단지 그 상자가 매우 큰 상자로, 그 안에서 끄집어내는 것도 커다란 화분이나 크고 더러운 항아리 등인 것이 일본 마술의 섬세함과 비교하여 대국적(大國的)으로 보였다. 특히 중국인은 더럽게 때가 낀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마지막에는 상의를 벗어 맨몸을 보이고 변발을 뱀처럼 목에 감고 그 끝을 입에 물거나 하며 분발하는 것이 특이하게 보였다. 반주는 징이나 북이 들어간 극히 살벌하고 요란한 것이었다. 단조롭고 유장한 조선인의 음악과 춤의 다음에 나와서인지 자극이 강한 이 반주나 연희는 매우 사람의 마음을 북돋았다. 그 다음은 다시 중국인의 곰 곡예였다. 잘 훈련된 한 마리의 곰이 중국인의 명령에 따라 양 발로 일어나거나 고개를 넘거나 봉을 들거나 하는 여러 곡예를 하면 그때마다 국자 한 잔씩 먹이를 얻어먹고 요상한 소리로 짖었다. 그 소리가 참으로 맹수적으로 왠지 기분 나쁘게 들렸다. 평생 사육을 당하며 약간의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여러 가지 곡예를 부리고 슬프게 울부짖는 맹수의 소리와, 그 맹수를 질타하는 중국인의 소리와, 그것을 기쁘게 환호하는 조선인의 소리가 뒤섞여서 이채로운 느낌을 주었다. 홍 상은 매우 흥에 겨운 듯 지금까지 별로 본 적이 없는 열띤 표정을 하고 열심히 무대를 바라보았다. 곰 곡예가 끝난 후, 다시 조선인 네다섯 명이 악기를 들고 무대에 나타나 단조로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고조를 깨워서 밖으로 나왔다. 달은 기울며 점점 환해지고 밤의 서늘한 기운은 피부에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2. 야노 간조․모리카와 기요히토, 『신판 대경성 안내』, 경성도시문화연구소 출판부, 1936, 184~187쪽, 필자 옮김. 영화관 외에는 이렇다 할 놀 곳이 없는 경성인에게 영화보기는 경성인의 최대 오락이다. 상설영화관만 해도 11개에 달하고, 1년의 입장 연인원은 쇼와 9년에 2,314,914명, 그 입장료 판매 수익은 13만 3천원에 이른다. 상설관을 열거해 보면, 희락관(喜樂館) 본정 1정목. 닛카쓰(日活) 영화 직영관, 웨스턴 재생기로 수은정류기(水銀整流器)를 설비, 영사 시설로는 부내(府内) 제일을 자랑한다. 봉절은 내지보다 1개월 정도 늦다. 입장 요금은 계상 70전, 계하 50전이 봉절 흥행의 표준. 때로 오래된 사진을 재상영, 대중석 20전으로 관람이 가능하다. 장소는 본정 한복판으로 부내 제일. 다만, 스팀은 있으나 엄동설한에는 조금 춥다. 낭화관(浪花館) 명치정. (전차는 명치정 입구 하차) 쇼치쿠(松竹) 영화 봉절. 이곳은 원래 양화 전문관이었던 것을 빌려서 신관이 생길 때까지 (쇼와 11년 7월 준공 예정) 가주거 정원 350명인 베이비관. 그런 이유로 1일 3회 흥행을 하고 있다. 단 제3회째는 교체한다. 재생기는 닙톤 직류이기 때문에 화면은 선명. 입장 요금은 계상 60전, 계하 40전이 표준. 스팀 설비가 있고, 관이 작아서 겨울에는 비교적 따뜻하다. 봉절은 대체로 내지보다 1개월 정도 늦다. 중앙관(中央館) 영락정. (전차는 황금정 2정목 하차) 신코(新興), 간(寬)프로, 2 반쓰마(阪妻) 3 영화 봉절, 때로 외국물도 봉절한다. 재생기는 RCA 포토폰. 개봉은 내지보다 2개월 정도 늦다. 입장 요금은 계상 60전, 계하 40전이 표준. 스팀 설비가 있고, 엄동설한에도 비교적 따뜻한 편. 1일 3회 흥행. 약초영화극장(若草映畵劇場) 약초정. (전차는 약초정, 버스는 본정 3정목) 철근 콘크리트 3층의 모던 건축, 내지와 비교해서도 정상급 신관이다. 재생기는 로얄. 방화는 PCL 봉절, 외국영화는 파라마운트 봉절을 중심으로 각 사 봉절 재상영도 하고 있다. 입장 요금은 계상 50전 균일, 학생 30전 균일. 온풍냉풍 설비는 있지만, 엄동설한에는 조금 춥다. 1일 3회 상영. 송죽좌(松竹座) 황금정 3정목. (전차는 황금정 3정목 하차) 이름은 송죽좌지만 이전 명칭을 그대로 쓰는 것으로, 현재는 마키노(マキノ), 교쿠도(極東), 다이토(大都), 워너를 봉절한다. 옛날에 황금관, 동아구락부 등으로 사용했던 오래되고 큰 관이지만, 현재 신관을 건축 중이다. 입장 요금은 계상 30전, 계하 20전이 표준. 1일 2회 흥행. 봉절은 비교적 빠르다. 경룡관(京龍館) 용산 연병정. (전차는 연병정 하차) 2류관, 쇼치쿠와 PCL의 재상영, 입장 요금은 20전이 표준. 1일 야간 1회 흥행으로 일요일과 휴일만 주야 2회 흥행. 단성사(團成社) 종로 3정목. (전차는 종로 3정목 하차) 모던한 신관으로 재생기는 RCA. 외국영화 전문관으로서 각 사의 우수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내선(內鮮) 쌍방의 고급 관객을 끌어 모은다. 입장 요금은 계상 60전, 계하 40전이 표준. 내지인들에게는 조선어 설명이 귀에 거슬리지만, 봉절도 상당히 빠르고 양화팬이 즐길 수 있는 관이다. 조선극장(朝鮮劇場) 인사동. (전차는 종로 2정목 하차) 외국물 봉절과 일본영화 재상영, 그리고 때로 조선연극을 상연한다. 재생기는 RCA. 한때는 단성사와 나란히 양화 봉절관으로서 내지인 관객도 있어 전성시대를 누렸으나, 단성사의 신축 이후 2류관이 되었다. 입장 요금도 저렴하다. 제일극장(第一劇場) 종로 4정목. 2류관으로서 일본영화를 재상영하여 조선인 대중을 부른다. 우미관(優美館) 종로 2정목. (전차는 종로 2정목 하차) 일본영화 재상영, 외국 대중 작품 봉절을 하여 역시 조선인 대중 팬을 노리고 있다. 동양극장(東洋劇場) 죽첨정. (전차는 서대문 하차) 조선인 측에서는 가장 새로운 모던 관으로, 외국물을 개봉하거나 조선연극, 레뷰를 상연한다. 이상이 경성의 영화관 개요이다. 그 밖에 현재 쇼치쿠영화의 봉절관으로 송죽좌 신관이 건축을 서두르고 있다. 이렇게 경성의 영화흥행계도 설비 개선, 신관 건축 등으로 면목을 일신하여 내지 일류 도시의 수준에 달하고 있다. 내외의 영화배급사도 지사나 출장소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 다만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내지에서 온 사람들을 깜짝 놀랄 만큼 불쾌하게 하는 것은 ‘극장 여급(お茶子)’의 존재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유유히 들어가면, 에이프런을 걸친 무뚝뚝한 극장 여급이 안내하면서 방석과 화로를 강매한다. 방석은 5전, 화로는 10전, 따라서 가령 50전의 흥행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65전이 든다. 물론 반드시 빌려야 할 의무는 없지만, 방석이 없으면 의자가 딱딱하고, 게다가 극장 여급이 퉁명스럽게 굴어서 더욱 불쾌해진다. 극장 여급 제도에 대해서는 각 방면에서 비난과 폐지의 소리가 있으나, 약초극장만 폐지했다. 그 외에도 흥행 취체가 불완전해서 영사 중에 제멋대로 담배를 피거나 하는 그러한 불쾌한 점들이 있는데 당국에서 드디어 취체를 강화하기로 했다. 극장 경성은 연극으로는 완전히 척박한 곳이다. 필름 1편으로도 족한 영화와 달리 규모 있는 극단을 부르게 되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 부른다고 해도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입장 요금을 내야만 한다. 그래서 결국 순회 구파•신파 극단이나 만자이(萬歲, 漫才) 4 등으로 만족해야 한다. 다만 쇼와 10년에는 경성에 전례 없는 방문이 있었다. 만주황군 위문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치무라 우자에몬 일좌(市村羽左衛門一座)와 닌교조루리 분라쿠자(人形瑠璃文樂座)가 공연한 것이다. 이것은 경성의 연극애호가들이 대단히 기쁘게 했다. 경성극 흥행계의 고민은 그뿐만이 아니다. 훌륭한 대극장이 없는 것도 큰 결함이다. 현재는 조일좌 (朝日座, 본정 5정목), 경성극장 (京城劇場, 본정 2정목) 2곳이 있는데, 둘 다 내지의 3, 4류 도시의 소극장 정도이다. 경성부민들이 대망하던 부민관 대홀 (정원 1,800명)이 등장하여 이를 흥행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어서 대극장 문제는 일단 해소되었으나, 공공건물이라서 부민들 간에는 순흥행적인 새로운 극장을 요망하는 소리가 높다. 조선연극 은 내지의 가부키나 신파에 비해서 수준이 매우 낮다. 현재 직업 극단으로서 신무대(新舞臺), 태양극장(太陽劇場), 신성좌(新星座) 등이 있고, 주로 조선극장, 동양극장 등에서 공연한다. 음악 방면으로는 내지의 일류 악인이나 외국의 내조자(來朝者) 지방 순회가 신문사 주체 등으로 이루어져 그 대부분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행이다. 이들의 공연장으로는 부민관 대홀, 경성공회당 (장곡천정, 상공회의소의 누상(樓上))이 사용되고 있다. 1) 조선인을 가리키는 말. ‘여보세요’의 ‘여보’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소설 『조선』에서는 ‘大人’, 즉 ‘어른’이라고 쓰고 ‘요보(ヨボ)’라고 병기하고 있다. 이처럼 초기에는 조선인 성인 남성을 가리키던 ‘요보’는 점차 조선인을 멸시하거나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2) 아라시 간주로 프로덕션(嵐寛寿郎プロダクション)의 약칭. 3) 반도 쓰마사부로 프로덕션(阪東妻三郎プロダクション)의 약칭. 4) 원문 표기는 ‘만세(萬歲).’ 만자이(漫才)는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으며 진행하는 해학적인 화예(話藝)로 만담과 유사하다. 13, 14세기에 일본 간사이 지방에서 새해에 악귀를 쫓고 번영을 기원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쌀과 돈을 청한 사람들을 ‘만자이(萬歲)’라고 했는데, 이것이 만자이의 기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