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결혼
- 감독
- 김재현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길동, 제인, 닉, 나나, 낸니, 미진, 민우
4분할 폐쇄회로 모니터 안에서 지하철 역사(驛舍)들의 이모저모가 보인다. 서울 곳곳의 지하철 플랫폼을 찍은 저화질 흑백 이미지들이 둔탁한 리듬의 편집으로 나열되는 모니터에서는 열차들이 도착한 뒤 통근자들이 타고 내리고 터널 안에서는 다음 열차의 불빛이 빛난다. 서로 다른 지점을 비추는 네 개의 프레임과 한 프레임을 확대한 이미지가 번갈아 배치되다가 체류 외국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트랙으로 내려가고 그의 마지막 순간이 열셋이나 열넷 또는 열다섯 프레임일 수도 있는 착란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리고, video off... 어두운 색깔의 점퍼를 입은 남자의 최후를 기록한 이 CCTV 이미지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창생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태양 아래로 카메라가 틸트 다운하면 스모그에 뒤덮인 서울의 빌딩 숲이 드러난다. 곧이어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건너뛰면서 라디오 채널의 잡다한 목소리들이 겹치고 도시 경관 위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조언이 흘러나온다. “이번 한 달, 올 한 해를 진정 성공하려면 나의 성과를 냉철하게 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겠죠?”, “웃을 일이 있을 때는 소리 내어 즐겁게 웃도록 하십시오. 많이 웃는 사람은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에 걸릴 염려도 없다고 합니다.” 상냥한 충고와 맞물린 이미지들의 전환은 무뚝뚝하고 가차 없다. 교통체증, 지하철역의 승하차객들, 연체동물 형상의 인쇄기, 무표정한 노동자의 얼굴, 펄럭이는 구인광고, 증기를 내뿜는 다리미, 재봉틀과 박카스 따위의 사물과 행위들이 일상과 산업 공간을 흘러 다닌다. 그 즈음 일상적 생활사의 세목들 위로 별안간 건조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끼어들어 최근 한국인의 사망 원인에 대한 통계자료를 읽어 내려간다. 미세먼지와 황색포도상구균 등의 미생물, 암이나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같은 병증에 이어 고의적 자해로 인한 사망이 4위에 올랐노라고, 내레이터는 말한다. 다시 죽음이라는 의제로 돌아와 이 메마른 통계들의 꺼풀을 벗겨내면 그 아래에서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 파산의 기술 >은 프롤로그에 제시되었던 잊히지 않는 죽음의 내막을 탐사하는 비선형 복합 내러티브 다큐멘터리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혼란스러운 지형을 매핑하는 이 영화는 4개 챕터로 구성된 느슨한 플롯을 취하는데, 서로 다른 기원과 출처에서 발췌한 이미지 자료들을 배치하고 이미지들의 좌표와 접촉면을 확장하여 형성된 문맥이 서사의 핵심이 되도록 한다. 형식과 의미 질서의 구속성을 무시하여 일견 두서가 없는 듯 보이는 서사는 디스토피아적인 도시 경관과 경제적 재난, 긴축 위기에 직면한 남녀들의 증언을 통해 1990년대 말부터 한국 사회에서 시작된 파산의 물결이 개인에게 미친 여파를 추적한다. 말과 언어, 이미지, 정보의 충돌을 전개하는 기술 방식은 번영의 뒤에 도사린 위기, 신자유주의 질서 하에서 은폐되는 착취와 고갈, 살인에 대한 총체적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상적인 확신의 목소리 위에 파산의 풍경들을 대비하는 충돌의 미학을 내세우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충돌의 이미지들이 앞을 막아선다. 불명료한 카메라의 표면 위에 철문을 두드리는 소음이 얹힌다. 채무 변제를 종용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잦아들면 전원이 켜지고 카메라는 십자가와 단란한 가족사진들이 벽에 걸린 좁은 집을 스캔한다. 젊은 엄마는 어린 딸에게 더 큰 집으로 이사할 거라는 밝은 미래를 약속하지만 웬일인지 딸은 “무섭다”고 말한다. 순간 암전, 강제집행을 고지하는 목소리를 따라 불이 켜지면 압수품에 붙은 붉은 딱지들이 보이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다. 저들의 꿈은 어떻게 살해당했는가? 말과 목소리, 이미지의 충돌을 모체로 이어지는 다음 시퀀스에서 다종다기한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은 일상 업무와 부채의 증가, 직업의 조건 따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 중 일부는 얼굴을 숨기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 또는 눈두덩이로만 나타난다. ’붉은 입술들‘이 생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신용과 부채에 의존하는 사정에 대해 말하는 동안 세계경제포럼에서는 말쑥한 비즈니스 맨들이 샴페인을 들고 어슬렁거린다. 한때 아파트 건물이 있던 공간은 크레인으로 철거되고 있으며 부서진 콘크리트 슬라브가 심란하게 흩어져 있다. 붉은 입술들의 대화는 그들의 생존 투쟁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 모닝커피, 출근 준비, 통근, 어린이집, 월세, 여가 시간을 즐기는 방법 따위의 생존 루틴들이다. 포크레인의 집게발이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철근 뭉치를 뽑아내면, ‘붉은 입술들’은 카드 돌려막기로 연명해야 하는 채무의 굴레를 한탄하고, 가족들은 집에서 쫓겨난다. IMF 이후 기업의 파산과 구조 조정이 계약 관행의 조정, 실업, 인플레이션, 대출, 개인 파산으로 이어졌던 고통의 지도가 순식간에 그려진다. 동시에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는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운동가들의 감격적인 연설이 흘러나온다. 텔레비전 안에 박제된 이미지를 제외한 주변은 모두 어둡다. <파산의 기술>은 리드미컬하고 아이러니한 몽타주, 감독 자신의 무감동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사회에서 개인을 증발시킬 위기에 처한 파산의 공기를 시적인 게릴라 영상으로 전환한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혁신을 기도한 감독 이강현은 행과 불행,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에 대한 반성적 시각을 가지고 고단한 노동의 조건과 일상, 거대한 대부 경제의 무게 아래 짓눌린 채무자들의 생존 투쟁, 승리의 확신이 무색한 죽음의 기운들을 능숙하게 대조한다. 승리를 공표하고 환호하는 사람들, 누가 이긴 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왔는가? 사태의 본류와 지류가 분별되지 않는 혼돈의 지도 안에서 생활사의 분주함, 부채의 압력, 웅장한 공공프로젝트의 역사, 노동조합주의의 쟁취, 선거의 승리, 오염된 콘크리트 도시에 대한 느낌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함으로써 <파산의 기술>은 진정한 사회적 고통과 불안을 묘사하려 한다. 이 지점에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우리들의 접하는 이미지의 두께를 이야기한다. 이미지의 표층과 심층에 쌓인 시간의 두께는 서울 영등포 어느 뒷골목 벽에 붙은 너저분한 포스터를 찍은 이미지에 대한 독해로 해설된다. 한몫에 보이지 않는 이 이미지 더미 안에는, 국제결혼을 알선하는 포스터와 사금융 대부업체 전단, 초고속 인터넷 회사의 광고, 룸 가라오케를 선전하는 포스터, 그리고 이 모든 이미지의 뒤에 쌓인 시간의 퇴적층들이 공존한다. 내레이터의 말대로, 우리는 오랜 시간을 가지고 이미지들의 안과 밖을 살펴야 한다. 한 맥락에서 이강현은 재현과 재현의 장치를 동시에 또는 번갈아 보여준다. TV 모니터, 비디오 캠 이미지는 현실과 재현의 구분을 강조한다. TV 모니터 안의 이미지와 바깥의 현실 사이에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우리들은 이미지 바깥에 서 있다. 영화에 주석을 달고 정리해야 하는 에필로그는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1987년 시민항쟁을 기념하는 집회로 이동한다. 선언과 주장, 추억, 공염불, 낄낄거림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카메라는 연사가 아닌 군중을 비추고 있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웃음을 흘리는 해사한 군중들 사이에서 투쟁가에 고양된 한 남자는 외롭게 주먹을 치켜올린다. 장면이 전환되고 흐린 하늘 아래 복면을 두른 노동자들의 집회를 시발로 하여 아파트에서 누군가의 유품을 정리하는 여인의 비디오 영상이 흐른다. 화면 위에 찍힌 날짜는 2003년 10월 17일이다. 붉은 이불이 둘둘 감겨 있는 사람은 고공 크레인 농성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프롤로그의 폐쇄회로 영상에서 보았던 남자의 죽음으로 돌아간다. 주검을 향한 통곡과 이어지는 격문, “나의 목숨을 내놓으라 하면 너의 심장을 찔러주겠다.” 승리를 기념하는 사람들의 맞은편에서 죽창을 든 노동자들은 공격을 위한 채비에 나섰다. 우리들은 이미 철거와 퇴거, 쏟아지는 절망, 그리고 지하철에서 생을 마감한 남자를 보았다. 영화의 앞과 뒤에 평행하게 놓인 죽음은 어떻게 서로를 향하는가? 상투적인 인과론의 오류를 넘어 <파산의 기술>은 간단히 정의될 수 없는 사회학적 현상으로 이 죽음들의 지도를 그린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경북 청도의 보수적인 혈통의 가장이 연쇄적으로 일본인, 중국인, 캄보디아인, 그리고 아프리카인 사위를 맞이한다면? 옛날 같았으면 이건 비현실적인 코미디의 소재였을 뿐이겠지만, 21세기 한국은 다르다. 다문화 사회, 다인종 사회로 변화한 지 오래됐다. 국제결혼은 특히 도시 지역이 아닌 곳에서 더욱 흔한 일이다. 어느 읍내나 시내에 나가도 아시아 식재료 전문 상점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런 현실 속에서 프랑스 영화 < 컬러풀 웨딩즈 >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이야기처럼 보인다. < 컬러풀 웨딩즈 >는 2014년 프랑스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다. 프랑스의 자국 영화 산업의 규모는 한국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프랑스 천만 영화’와 ‘한국 천만 영화’는 비슷한 수준의 히트라는 이야기다. 이렇게도 엄청난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는 바로 ‘연쇄 국제결혼 사건’을 다루고 있다. 영어 제목은 ‘Serial Bad Weddings’. 연쇄 나쁜 결혼 사건? 도대체 어떤 결혼이 나쁜 결혼일까. 프랑스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주인공 클로드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부유하게 살아온 노인이다. 아내와 사이좋게 대저택에 살며 딸들은 장성해 결혼을 할 나이가 됐다. 이제 완벽한 여생을 살 준비가 갖춰진 것 같은데,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 첫 딸이 데려온 예비 사위가 아랍인이다. 변호사라는 반듯한 직업을 지니고 있지만 무슬림이라니,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자식 이길 부모 없다고 결국 결혼을 허락하게 된다. 첫 딸이 결혼하는 것을 보고 둘째 딸도 이제 앞차가 빠졌으니 뒤 차가 나갈 차례라고 사윗감을 데려오는데 이번엔 유대인이다. 첫째 사위는 아랍인, 둘째 사위는 유대인이라니. 이게 무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도 아니고, 또다시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울 일이 생기지만 결혼하겠다는 딸을 말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은 중국인 사윗감을 데려온다. 앞서 아랍인과 유대인 사위를 본바, 이제는 충격이 좀 덜한 것도 같지만 여전히 달갑지는 않다. 영화는 여기까지를 일사천리로 보여주고 비로소 제목을 띄운다. 세 명의 사위 결혼은 시켰지만, 외국인 사위를 둔다는 건 그냥 피부색과 억양이 다른 가족이 생긴다는 것으로 멈추는 일이 아니다. 외국인 사위들은 자신들의 문화대로 2세를 양육한다. 특히 유대인은 ‘할례’라는 이름의 의식을 한다. 우리에게는 포경수술로 잘 알려진 바로 그 시술이다. 남자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포피를 제거하는데, 프랑스인들에게는 너무나 끔찍하고 생경한 일이다. 더구나 이 유대인 사위는 소중하게 간직해줬으면 한다면서 장인 장모에게 선물하는데, 그것은 바로 갓 절제한 손주의 ‘포피’다. 울며 겨자 먹기로 손주의 포피를 받은 클로드 부부는 그것을 직접 정원에 묻게 되는데, 짐작하다시피 순조롭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중국인 세 번째 사위까지 진용을 갖춘 이 가족들은 모이기만 하면 사위들 간의 국제적 분쟁이 일어난다. 아랍인 첫째 사위와 유대인 둘째 사위는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댄다. 인종 갈등의 현장이다. 중국인 사위는 이 모습을 소 닭 보듯 하며 무관심한 듯하다가도 깐족대기만 한다. 도무지 뭉칠 길이 없어 보이는 이 세 명의 사위는 넷째 딸의 결혼 소식을 듣고는 하나로 뭉치게 된다. 알제리 출신의 네 번째 사위 넷째 딸이 알제리 출신의 아프리카인 사윗감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인은 전통적으로 강한 남성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종적 편견. 자신들이 아프리카인 넷째 사위와 ‘비교를 당할’ 것을 두려워한 세 명의 사위들은 넷째 딸의 결혼을 방해하는 작전에 돌입한다. ‘아프리카인들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인종적 편견으로 접근한 그들은 결국 넷째 딸의 애인이 다른 여성과 호텔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제보한다. 그러나 넷째 딸은 버럭 화를 낼 뿐이다. 프랑스를 방문한 아프리카인 사윗감의 친여동생이었던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뒷조사를 한 것에 넷째는 언니들에게 화를 내고, 언니들은 넷째가 무사히 결혼할 수 있도록 돕게 된다. 그러나 산 넘어 산, 알제리 출신의 사윗감의 아버지, 사돈 감은 알제리 식민 시대를 기억하며 프랑스에 깊은 반감을 지닌 인물이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독립투사 가문의 자제가 일본 전범의 자제와 만나는 형국이랄까. 화상 채팅을 통해 결혼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사돈 감과 나누는 대화는 거의 온라인 전쟁이다. 사돈 감은 무조건 예식을 알제리식으로 할 것을 주장하고 하객도 수백 명을 데리고 가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과연 이 결혼은 제대로 될 것인가. 그래서 ‘베네통 광고’처럼 모든 인종들이 어우러지는 하나의 가족이 만들어질 것인가. 크리스티앙 클라비에: < 비지터 >의 작꾸이(좌)와 < 아스테릭스 >의 아스테릭스 < 컬러풀 웨딩즈 >은 배우들의 능력에 거의 의존하고 있다. 영화를 이끌고 있는 가장 끌로드 역의 배우는 크리스티앙 클라비에다. 이 배우가 출연한 유명한 작품으로는 < 비지터 >가 있다. 중세 기사 장 르노가 20세기의 프랑스로 떨어져 벌이는 해프닝들을 다룬 바로 그 영화다. 크리스티앙 클라비에는 장 르노의 하인인 작꾸이 역을 맡았었다. 뿐만 아니라 영화의 각본까지 맡은 바 있는 다재다능한 아티스트인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바로 < 아스테릭스 >다. 이 히트 시리즈에서 주인공 ‘아스테릭스’ 역을 맡기도 했다. < 컬러풀 웨딩즈 >는 인종차별이라는 매우 민감하고 피곤한 이야기를 너무나 밝고 화사하게 풀어낸다. 인종 간 갈등의 근원을 찾는 구도적인 시선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어쨌든 ‘어쩔 수 없이 함께 살게 되는 다른 인종들의 이야기’를 해맑게 풀어냈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방법은 한국의 현실에 대입하는 것이다. 도입부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 경북 청도의 한 부자가 연쇄적으로 외국인 사위를 맞이한다. 머릿속에 ‘비정상 회담’이 그려지며 즐거운 관람이 될 것이다.
*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개로 나뉜 화면에 두 여성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 있다. 서로를 마주보는 듯한 두 사람, 그중 한 여성이 화면 밖에서 들리는 신호에 맞추어 ‘편지’를 읽는다. 그 어떤 설명도, 자막도 없이 낯선 언어(아마도 베트남어)가 영화를 채운다. 맞은편의 여성은 가만히 눈으로 ‘편지’를 읽고 있다. 편지를 읽는 목소리는 떨리다가, 곧 울먹임이 된다. 관객은 그 내용을 모른 채 3분여 동안 그녀의 표정 변화만을 볼 수밖에 없다. 이내 맞은편에 앉은 여성이 한국어로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베트남어로 읽히는 ‘편지’ 역시 아직 끝나지 않아 두 가지 다른 언어는 마치 돌림노래처럼 들린다. 그제야 관객은 편지의 내용을 알 수 있다. “이주의 시대,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며 19살의 후안 마이는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왔다.” 영화는 위와 같은 자막으로 시작된다. 이주, 행복한 결혼, 19살. 곱씹어보면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지만, 한국의 수많은 국제결혼 광고엔 자주 보이는 조합이다. 때로는 ‘말 잘 듣는’, ‘처녀인’ 같은 단어들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거기에는 사람이 없다. ‘편지’의 화자인 후안 마이는 이렇게 썼다. “당신은 저와 결혼했지만, 저는 당신이 좋으면 고르고 싫으면 고르지 않을 많은 여자들 중에 함께 서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고르지 않아도 그만인 사람들’ 사이에서 골라진 열아홉 베트남 여자는 행복한 결혼을 꿈꾸었다. 대단한 꿈은 아니었다. 완벽하지 않은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룬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하고 노력하는 것. 그녀는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는 소망 역시 이룰 수 없었다. ‘편지’를 읽는 여성들은 울먹인다. 카메라는 편지를 읽는 내내 여성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소리 내어 편지를 읽는 건 눈으로 읽을 때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아마 혼자가 아니라, 듣는 누군가와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편지가 낭독되는 동안, 편지를 읽는 이들도, 편지를 듣는 관객들도, 한줄한줄 꾹꾹 눌러쓴 그녀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편지 중간중간 반복되는 ‘당신은 아세요?’ 라는 물음은 열아홉이란 어린 나이에 남편 말곤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겪었을 외로움과 답답함을 느끼게 해준다.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당신은 내가 쓴 이 글씨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할 텐데요.” 영화의 화면은 내내 분절되어 있다. 같은 공간에서 촬영한 장면이지만, 두 대의 카메라는 편지를 읽는 여성 각각을 비춘다. 같은 공간, 다른 언어. 어떤 부부는 그런 삶을 살았을 것이다. 서로 바로 옆에 있지만 서로의 언어도 마음도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말이다. 편지 낭독이 끝난 후, 편지를 쓴 다음 날 후안 마이가 남편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말이 덧붙여진다. 그리고 영화는 편지를 다시 한 번 읽는다. 2013년 기준, 우리나라에서 국제결혼은 전체 결혼의 8%를 차지하고 있다. 적지 않은 비율이지만, 여전히 한국사회는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편견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다문화’라는 말은 어느새 청소년들 사이에 비하의 언어가 되어 쓰이고 있고,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가정폭력 사건은 심심찮게 들려온다.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폭력은 묵인되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국가의 보호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2015년, 8년이 지나서야 관객들에게 배달된 이 편지는 우리에게도 묻고 있는 듯하다. “당신은 아세요?”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