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살
- 감독
- 오진희
- 제작년도
- 2007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물며 논픽션-다큐멘터리 영화를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본다는 것은 또 어떤 일일까. 이번 인디다큐페스티발 2017 신작전의 프로그래머를 제안 받고 영화(혹은 창작자에 의해 영화라 불리고자 하는 영상)들을 보며 내내 들었던 질문이다. 웹과 하드웨어, 각종 통신망과 랜선, 창고, 위성 사이에는 (무리해서 이야기하면 뇌까지) 너무나 많은 데이터가 흐르고 있으며, 그것은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로 공유할 수도 있고 극장에서 상영될 수도 있다. 또한 공동의 공간에서 함께 모여 버튼만 누른다면 언제든지 영화가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처럼 영상에 대해 변화된 지각 체계 속에서 영화는 세계와 어떻게 통신하고 빛을 발하는가? 어, 영화의 정의가 달라졌나? 그렇다면 그중에서도 논픽션-다큐멘터리 영화는 어떻게 달라져 가는가? 몇몇 영화들은 나에게 이런 고민을 안겨줬다. 마침 이번 신작전 중 한 작품을 소개해달라는 글 청탁을 받고 긴장과 질문을 안겨준 몇 편의 영화 중 < 군더더기 > (2016)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희한한 느낌을 준다. 1인 2역을 맡은 남녀 한 쌍이 등장하는 두 개의 시퀀스가 교차 편집되며 기이한 모순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에는 그 누구도 자기 이름으로 등장하거나 소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면상 보이는 대로의 추측으로만 묘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흡연구역에서 사진을 찍는 사진사/남자, 사진에 찍히는 모델/여자의 시퀀스이고, 두 번째는 카페 테라스에서 여자와 남자의 시선이 서로 교환하는 시퀀스이다.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면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퀀스는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두 장면에서 여자와 남자의 태도는 각기 매우 다르다. 그리고 점점 영화는 더 이상해진다. 서로 붙을 수 없을 것 같은 장면과 시퀀스들이 발에 붙은 굳은살처럼 그렇게 붙어 있다. 상호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장면과 사운드가 결합되기도 하고, 입 모양과 행동, 말소리가 불일치하기도 하며, 명동과 이태원, 한강, 야외에서의 음악 페스티벌 등지를 카메라가 줄곧 떠도는 데 전혀 즐겁지가 않다. 하나로 결합될 수 없는 이야기를 카메라는 겉돌기만 한다. 영화는 마치, 각기 다른 여러 계정의 ID와 닉네임을 사용하며 말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그 ID들을 한데 뭉친 것처럼 굴기도 한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붙잡고 있는 것은 핸드폰 카메라나 DSLR로 무언가를 찍는 사람들이다. (찍힌 저 데이터들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여성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자기 인생을 살고 싶었다던 남성의 이야기는 각각 붕 떠 있기만 하다. 앗! 이 둘이 한 영화 속에 함께 나란히 등장할 수나 있는 걸까? 점차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데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혼이 나간 듯 춤추는 장면과 사진 찍는 장면이 교차하며, 거듭 들려오는 DSLR 셔터 소리에 이어 몇 개의 ID들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GPS 신호가 오류를 일으킨 듯 미친 것처럼 딩동거리는 가운데 버려진 폐허가 보인다. 논현동을 같이 걷던 ‘오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논현에 가면 하나 같이 여자들 얼굴이 다 똑같이 생겼어.” 뒤에 붙은 길거리 장면의 한 성형외과 광고는 음산한 빛을 발하고, 이 영화 속 등장인물로 출연하는 카메라들의 시선과 셔터는 그 순간 곧 어디선가 평가로 기능한다. 붕 떠 있던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상기된다. 물이 뒤덮여 흘러넘치는 거리, 거기서 아저씨들은 뒤뚱뒤뚱 걸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한강 다리 아래서 검은 비닐봉지를 깔고 앉아 페미니즘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하던 얼굴들을 떠올린다. 이후 영화는 도시 밖으로 나가 다른 것을 찾아 나선다. 마치 다른 계정을 새로 만든 듯, 작은 소나무들을 뿌리까지 보이게 재배해 전시하는 한 중년 남성의 공간과 주변 여름날의 초목 사이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영화의 마지막, 도입부와 비슷한 시퀀스가 또 다시 등장한다. 윤상의 ‘가려진 시간 사이로’가 흘러나오는 소나무뿌리주 판매 코너 속에서 흥겹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여성과 소나무뿌리주의 자태를 구경하는 아저씨들이 교차하는 시퀀스가 그것이다. 영화는 연이어 붙은 두 장면을 통해 한국사회의 말 붙히기 어려운 힘을 발생시키고 끝이 난다. 도입부에서 결말에 이르기까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도입부에서는 흡연구역과 사진사, 모델이 균등한 크기로 한 프레임 안에서 하나의 세계에 같이 존재하는 반면, 결말부의 노래 부르는 여성과 아저씨들은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컷을 통해 잘려져 있다. 세계를 본다는 것과 찍는다는 일, 장면과 장면을 붙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영화를 통해서만 지각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이상한 지각은 더 가능해질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 군더더기 >를 경유해보자. 논픽션-다큐멘터리 영화는 얼기설기 파편화된 몸을 한 채로도 세계에 대한 구체적 지각과 각성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며 여러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2016년 한 해 동안 영화제들을 통해 소개된 다큐멘터리들을 돌이켜 보았을 때 내게 떠오르는 작품들 중 다수는 단편들이다. 4.19, 5.18, 87년 6월, 2015년 촛불집회를 기록한 스틸사진들 한 모퉁이에 자리한 흐릿한 얼굴들의 클로즈업과 셰익스피어, 단테, 제발트 등의 작품들에서 인용된 독백을 내레이션으로 하여 되풀이되는 민중, 학생, 노동자, 시민들의 봉기를 상기한 백종관 감독의 < 순환하는 밤 >. 어두운 밤 스케이트보드와 디스코팡팡 위에서 빛나고 돌아가는 이미지들을 익스트림 줌인으로 잡아내고 다양한 사운드들과의 몽타주를 시도하며 디지털실험영화의 영역을 탐구하는 임철민 감독의 < 빙빙 >. 감독의 캠코더에 들어온 2016년 서울의 풍경들과 헤밍웨이, 제임스 조이스, 셰익스피어의 글귀들 속에서 ‘삶의 지도’를 발견하기 위해 애쓰는 작품으로, 이미 이 자리를 통해 소개한 바 있는 고재홍 감독의 <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 너무 다른 작업들이라, 작품들 사이의 공통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작품 외적인 것이지만 중요한 것으로, 세 편 이상 꾸준히 작업을 해오고 있는 감독들의 작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들을 꼽게 된 나름의 기준은 있다. 각 영화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각 영화들이 보여주고 들려준 이미지와 사운드로 충분히 구축해 낸 영화들이라는 점이다. 또한 감독의 다음 작품이 궁금하고 기다려지는 영화들이라는 점이다. 이 리스트에는 한 작품이 더 있다. 다른 세 작품에 비해서는 가장 적게 소개되어 아쉬운 장윤미 감독의 < 늙은 연꽃 >이다. < 늙은 연꽃 >은 한 폭의 정물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정물화는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놓고 그린 그림이고, <늙은 연꽃>에 등장하는 나이든 촌부(村婦)는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정물화 같은 느낌을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첫째로 영화가 촌부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없고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녀의 이름조차 알 수 없다. 영화 중간 촌부가 말을 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아듣기 힘듦에도 이를 자막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촌부에 대해 그녀의 방 한 켠에 쌓여 있는 늙은 호박들이 주는 정보 - 누렇게 잘 익은 호박들이 방 한 켠에 쌓여 있다 - 이상의 어떤 다른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다. 때문에 이 늙은 여인은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사람’이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두 번째는 촌부의 삶에 어떤 변화, 움직임이 있을 것 같지 않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물론 그녀는 움직인다. 여느 시골의 삶과 마찬가지로, 마른 곡식을 거두고 키질을 하며 잠이 들기 전까지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러나 이 촌부의 일상은 촬영 전이나 후에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을 것이라 짐작되고, 카메라는 별다른 의도가 없는 마냥 이를 관찰한다. 영화가 끝나기 바로 직전까지 촌부는 그저 촌부이고, 그녀의 늙은 호박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들에 머물 뿐이다. 세 번째는 촌부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가 정물화를 그릴 때 화가와 사물 사이의 거리 정도로, 아주 가깝다는 점이다. 이 스스럼없이 가까운 거리는 < 늙은 연꽃 >만의 독특한 이미지, ‘늙음 그 자체’를 만들어낸다. 좁은 방 안에서 촌부와 마주 보고 있는 카메라에 담긴 그녀의 얼굴은 주름의 깊이와 개수를 가늠할 수 있게 하고, 무덤 곁에 있는 마르고 거친 풀뿌리들을 맨손으로 뽑아내는 손의 클로즈업은 주름의 깊이만큼이나 두툼한 굳은살을 보게 한다. 그러나 <늙은 연꽃>은 이 이미지들을 < 워낭소리 >나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처럼 죽음 혹은 노쇠함의 고통으로 환원시키지도 지나 가버린 시절에 대한 회한과 감상으로 이어버리지도 않는다. < 늙은 연꽃 >의 정물과 같고, 알 수 없는 늙은 여인의 이미지를 정박시키는 하나의 쇼트가 있다. 오솔길을 따라 무덤으로 향하는 촌부를 따라가는 길에 불쑥 끼어드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줌인하는 장면이다. 허리와 목이 굽은 탓에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얼굴은, 그것도 미소 띤 얼굴은 여전히 늙어있지만 아름다움과 온기가 느껴진다. 영화의 제목인 ‘늙은 연꽃’이 상기되는 장면이다. 이 장면 이후 이 영화에 등장하는 촌부의 모습에는 늙고 노쇠함 즉, 추에 가까운 것과 연꽃 즉,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영화는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으며 이는 이 영화만의 독특하고 강한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이 힌트를 가지고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늙은 여인의 이미지를 따라가다 보면, 끝에 이르러 반전에 가까운 영화의 비밀이 밝혀진다. “할매, 그럼 설에 뵐게요. 설에.” 카메라 뒤에 있는 이는 이 할머니의 손녀다. 영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대화씬이다. 이 장면에서 할머니는 카메라 뒤에 있는 손녀를 향해 활짝 웃어 보인다. 영화 중간에 끼어든 그 아름다운 미소와 같은 미소다. 카메라 뒤에 있었던 이가 이 촌부의 손녀였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에서 촬영될 수 있었고, 그 아름다운 미소를 카메라의 정면으로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밝혀진 비밀은 곧바로 다른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 늙은 연꽃 >을 만든 장윤미 감독에 대한 궁금증이다. 그녀는 어떻게 하여 할머니에 대한 연민과 낯섦,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유혹, 설명과 이야기에 대한 강박 속에서 이 같은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혹은 이러한 것들은 애초에 고민의 지점이 아니었고, 자신이 할머니에게서 본 것들을 어떻게 이미지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단 하나의 고민만이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는 장윤미 감독의 전 작품들,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2012),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2014)를 다시 보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그녀의 다음 영화들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독립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많은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보아온 것은 아니어서 그때마다 내놓을 답이 궁색해지곤 한다. 최근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접하게 된 독립영화들을 보노라니 ‘독립영화는 고독한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때의 고독이란 ‘혼자 있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과 숙성으로 인해 형성된 일종의 ‘내성’을 의미한다. 즉, 하나의 상태로 굳어져 존재의 양식으로 깊숙이 박혀버린 어떤 것, 그리하여 개성적인 행위와 결과를 만들어내는 동력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졌다. 요컨대 독립영화는 내성과 개성을 체화한 고독한 영화이다. 최근 한국 독립영화가 이와 같은 내성과 개성을 탑재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진하게 받게 되었다. < 말하는 건축가 > < 로맨스 조 > < 이방인들 > < 이어도 > < 두 개의 문 >. 요사이 접한 독립영화들인데, 그 꼴과 그 안에 함유된 성분들을 떠나 내성과 개성이 빚어내는 고독함이 저마다 전해지는 작품이었다. 다양한 이슈로 말을 건네는 모양이나 우리 시대의 인간과 삶의 존재양식에 대한 예민한 촉수와 성찰, 그 내용과 형식이 독창적이면서도 다채롭게 이를 데 없다. 이미 존재하는 영화의 규범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반역함으로써 개성화하려는 시도들까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장르와 스타일을 불문하고 ‘고독한 영화’로서 이들의 문제제기는 새로운 영화의 발견에 밑거름이 되는 가치 있는 시도이다. 독립영화가 고독한 영화임을 입증하는 두 번째 근거는 그 존립의 기반과 관련이 있다. 홀로 분투하는 고독 속에서 더욱 치열해지는, 그 안에서 창작의 정수가 추출되는 영화라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발판, 지주가 강인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독립영화는 또한 ‘고독’하다. 여기서 ‘고독’은 독립영화가 점진적으로 극복해가야 할 문제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재개관한 민간독립영화관 ‘인디스페이스’는 고독한 영화로서 독립영화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것이다. 한 차례 아픔과 단절을 겪고 다시 섰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들에게 기대를 갖게 된다. 고독에 대한 보완양식으로서 인디스페이스와 같은 민간 독립영화전용관, 서울독립영화제와 인디포럼 같은 독립영화제는 고독한 영화로서 독립영화의 문제를 풀어가는 한 전형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독립영화전용관이나 영화제 같은 보완 양식들이 곤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준다손 치더라도, 독립영화가 독립영화인 이유는 존립의 기반이 튼실하고 완전무결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또한 나의 생각이다. 굳은살이 박힌 기성의 가치,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존재의 근간으로 삼는 영화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고독하지 않을 도리가 있단 말인가? 언제나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독자적인 가치를 추구하려는 선택 안에서 독립영화는 자신이 믿는 영화의 완성에 근접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그들이 딛고 선 지주가 허약하다는 차원에서의 ‘고독’은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근원적으로 훼손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본과 구조, 시스템의 완전무결함을 거부함으로써 유발되는 고독은 독립영화로서는 신념과 자랑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내쳐 ‘고독’은 소중하게 품어야 할 독립영화의 토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되돌려 생각하면 앞서 기술한 두 가지 고독의 의미는 서로 내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존립의 기반이 무르고,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어떤 의미에서는 완전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독립영화의 내성과 개성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의 근거가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여기에 고독한 영화로서 독립영화가 가지는 아이러니가 있다. 허약하고 불완전한 기반을 풍성하게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제도와 시스템이 존립을 위협하는 완전성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는 승인과 부인의 아이러니. 이 두 가지 힘의 긴장과 협상이 독립영화의 견인차가 아닐까. 결국 언제나 독립영화는 ‘고독’의 상태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고독을 기꺼이 껴안는다는 점에서 독립영화는 고독했고, 또 계속 고독해 할 것이다. 언제나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고독하게 스스로를 채찍질을 하는 영화들의 벗이 될 2기 인디스페이스가 이와 같은 과정을 보여주었고, 입증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