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불안
- 감독
- 김창환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봉기한, 김욱인
연흥사(演興社)와 장안사(長安社)는 러일전쟁 직후 만들어진 조선인 극장이다. * 연흥사는 1907년 11월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송지만(宋芝萬), 이준동(李俊東), 이종진(李鍾振) 등이 절골, 즉 사동(寺洞) 장윤직(張潤稙)의 집을 개조하여 연희루(演戱樓)를 건축하고자 경시청에 청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연희장이 연흥사가 아닌가 한다. 이 정확한 위치는 탑골공원 왼편 훗날 조선극장 자리로,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30번지이다. 1912년 연흥사에서 연극공연을 본 바 있는 연극인 박진(朴珍)의 회고에 따르면, 동향(東向)에 비계목(飛階木)으로 만든 이층짜리 건물이었으며 일층 객석은 나무로 만든 장의자를 길쭉길쭉하게 놓았고 이층에는 삿자리를 깔았다고 한다. 당시 여느 조선인 극장과 마찬가지로 객석은 성별에 따라 나누어져 있어서 일층은 남자석, 이층은 여자석이었다. 1912년 여름에는 극장 천장에 선풍기를 달아 관객들로 하여금 한여름의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여 관람의 편의를 높였다. 사진 2. 딱지본 소설 『산천초목』의 표지에 그려진 연흥사의 모습(이해조, 유일서관, 1912) 초기 극장이 대게 그러하듯 운영자는 자주 교체되었다. 1908년 연흥사는 박원근(朴元根)이 총무를, 송종오(宋鐘五)가 감독을 맡았다. 개장 초기에는 창극을 주로 공연했으나, 극장을 경영해본 경험이 일천했던 데다가 전황으로 경영난이 닥치자 극장을 방매한다. 이후 전당포 주인 석숭환(石崇煥) 등이 돈을 대어 유지해 나갈 수 있었는데, 1909년 당시 석숭환이 연흥사에 투자하여 손해 본 액수만 3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연흥사가 언제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 1908년 초부터 신문지상에 연흥사 광고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대 들어 연흥사는 다른 어떤 극장보다 신파극을 자주 공연한다. 이로써 경영난을 극복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신파극은, 1910년대 초반 조선인 극장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는데, 특히 연흥사는 신파극 공연을 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신파극 전용 극장이라 선전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진 역시 연흥사에서 이뤄진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 공연을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당대 사람들에게 연흥사는 신파극의 본산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혁신단의 연흥사 공연은 1912년 2월 18일 <육혈포강도>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수전노(守錢奴)>, <소위휘선사자친죄(少尉揮善捨子親罪)> 등의 작품을 올렸는데, 쌀값 폭등으로 불경기가 도래하자 임시로 공연을 중단, 다시 개연하여 <선탐후개(先貪後改)>, <서승어적(庶勝於嫡)> 등을 공연했다. 이후 <눈물>이나 <장한몽> 같은 대표적 신파극 레퍼토리 공연이 큰 인기를 끌면서, 임성구의 혁신단은 신파극의 대표 주자로 인정받게 된다. 예컨대 <눈물> 공연을 본 ‘사동생’이라는 이름이 독자는, “나는 눈물 연극 구경을 갓다가, 부인셕에셔 일졔히 우는 것을 보면은, 졀로 눈물이, 것잡지 못하게 쏘다져요” 1 라며 극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장한몽>을 본 '애극생'이라는 관객은, “연흥샤 쟝한몽 연극은, 참 재미잇습듸다. 사람은, 엇지도 그리도, 만히 드러 가는지 매일 여젼하던 걸이오. 잇흔날브터는 즁편이라지오, 샹편 보고, 즁편 안 볼 슈 잇나, 불가불 일즉 언이 가, 보아야 하겟스니, 할인권 백인 신문이나, 오날은 일즉이 돌이게 하십시오” 2 라며 연흥사의 신파공연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을 표현했다. 신파연극의 흥행 성공과 더불어 연흥사는 탕자음부가 모이는 곳이라는 오명도 쓰게 되었다. 이에 조산부(助産婦)양성소의 자선연주회 같은 공익적 역할의 공연을 개최하는 등 인식 개선에 나서기도 했다. 1914년 10월 8일, 연극장이 협소하여 공연하기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경무청에서 허가를 취소함으로써 연흥사는 돌연 문을 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이 바로 철거되지는 않았는데, 신파극을 대신하여 김창환, 이동백 등 명창들의 판소리 공연장으로 활용되다가 1915년 5월 무렵 철거된다. 철거된 자리는 빈터로 남아 있다가 7년 뒤인 1922년에 조선극장이 들어선다. * 장안사는 동구(洞口) 내(內) 장대장동(張大將洞) 장사골에 건립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진은 장안사의 위치에 대해 “낙원동과 익선동 사이, 즉 단성사에서 동관대궐이라던 창덕궁을 향해 가는 큰 길과, 낙원동에서 경운동으로 가는 큰 길과의 사이”에 “동궐나뭇장(柴場)이라고 해서 넓은 공지가 있었는데 그 공지가 장안사가 있던 터”라고 회고했다. 장안사의 건설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성사, 연흥사와 비슷하게 1907년 말에서 1908년 초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개장 초기에는 전통 연희를 비롯하여 중국의 경극을 상연하고,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개관 초기에는 관람자가 적어 여타 극장들처럼 경영난을 맞았지만, 연흥사나 단성사에서 연행하지 않는 “꼭두각시의 홍동지, 박첨지놀음과 광대 줄타기, 남사당패의 무동 서기, 서도잡가, 경기 입창 등”의 전통 연희를 주요 레퍼토리로 삼아 공연하면서 장안사만의 전문성을 살려 나갔다. 사진 3. 장안사에서 상연된 중국연희 공연(《황성신문》, 1909년 4월 21일자, 3면.) 장안사는 최홍석(崔弘錫)이 사장이던 1910년 4월 무렵 활동사진 영사기를 도입하여 프랑스 파테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3 이에 학부(學部)에서는 장안사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을 중등 이상의 학교 교육에 활용하도록 지도하기도 했다. 4 같은 해 5월부터는 파테회사가 아닌 일본인 흥행업자 가즈토키(和常)와 필름 배급계약을 체결하고 일본에서 오는 필름을 상영했다. 5 1912년에는 잠시 서양인이 극장을 임대하여 지만관(志滿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요컨대 1910년대 초반 장안사는 활동사진관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12년 말 대정관, 우미관, 황금관 등 본격적인 활동사진관이 설립되어 운영되기 시작한 이래로는 송만갑, 김창룡 등의 명창이나 채란, 해선 등의 기생들에 의한 노래 공연이나 소위 구(舊)연극을 상연하는 장소로 더 유명했다. 장안사는 1915년경에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단성사가 화재로 소실된 뒤 단성사에서 연행하던 김재종(金在鍾) 일행이 장안사로 옮겨 연행을 계속한다는 기사가 있는 한편, 그들이 연흥사에서 연행한다 기사도 있다. 미루어 짐작컨대, 장안사의 극장 상태가 공연에 부적절했다기보다 시설이 괜찮은 연흥사를 택해 연행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장안사는 아마도 이즈음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1) 「독쟈구락부」, 《매일신보》, 1913년 10월 29일자, 3면. 2) 「독쟈구락부」, 《매일신보》, 1913년 11월 4일자, 3면. 3) 「광고」,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1일자, 3면. 4) 「교육에 활동」, 《황성신문》, 1910년 4월 17일자, 2면. 5) 「활동사진 계약」, 《황성신문》, 1910년 5월 17일자, 3면. * 참고문헌 유민영, 『한국근대극장변천사』, 태학사, 1998, 116~151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50~52쪽. * 사진1(상단). 혁신단 단장 임성구(《매일신보》, 1914년 2월 11일자, 3면.) [자료] 《대한매일신보》, 1906.03.30. 奉常劃提調李苾和氏가 人民敎育하기를 爲하야 上䟽한 全文이 如左하니 續 此臣所謂敎育一事庶可以爲日後來復之基也雖然所謂敎育者亦有古今之異其泥於古而昧於今者子莫之執也 若專尙今而棄舊則忘其本者也盖有國有民必有宗敎故宗敎興則其國興宗敎衰則其國衰環天下亘萬古不易之典也 夫孔孟之道我 國之宗敎也惟我邦國之不振由於宗敎之不興如欲振興其邦國必先懋興其宗敎也 今以遭世界更新之運不得不學今之學者又事勢之不得已也孔孟之敎係是三綱五常之道也必使幼冲之子弟經之以三經五常之道使不失其本然之彜性然後學今之學則中散萬事末合一理可以並行之不悖矣臣願 陛下深留聖意於斯亟令學部益勵敎育之責任 規模則先興孔孟道學之宗敎次修開明之新學節次則特加尊崇文廟仰瞻羹墻而俎豆絃誦升降拜揖使靑年子弟咸知慕聖之本義而尊重其宗敎焉 以成均舘爲大學校而京師則一署各置一中學校而一面各置小學校一里各置一村塾 小學校卒業之人陞之中學校焉中學校卒業之人陞之大學校焉定其課程第其高下歲拔其優等者薦之於政府而充補其相當職不出十年之間而仕於 朝者皆大學校卒業之人至於農商工亦莫不然而隨其人才派送各國各修其藝焉 又錄其敎師之勤者而薦用之又採私立學校者優施補助者而褒賞之不數年之內不費國金而學校之設必遍滿於 國中 然則三千里內養成之聰明子弟亦不少矣夫何患乎人才之不能就乎雖然敎育一事爲近日之例套語而已則終未見其效而今日之勢惟在實踐二字而已 臣願 先下詔勅令學部改定敎育一致之法上自太學至于各郡鄕校置大中小學校實行其作成人才之方 今漢城及各道道臣上 奏學校私立之人以勳章褒章以勸以奬焉臣雖不學的知今日 國家之興惟在敎育之興惟在宗敎之興故 忘其僭陋而爲 陛下國家一言之伏乞 陛下勿以臣之卑微而少 垂察其言則 國家幸甚生民幸甚 完 [자료] 《황성신문》, 1906.04.19. ●李氏上疏 奉常副提調李苾和氏가 皇帝陛下께 上䟽한 全文이 如左하니 伏以臣向以興學校振敎育一事猥陳荒說優蒙 聖批至有令政府禀處之旨旣而大 詔煥發如綸如綍使於敎育人才事方專心講究俾有實効臣伏讀 詔書感極涕發窃有少湏臾無死之願而計以爲此時此 詔不啻若大旱之逢甘霈則其舉而行之宜必汲汲如不及以對揚休命矣伏竢累日以臣之躁妄實不能無滋惑焉盖今日百獘之本惟以虛文二字爲詐飾若幷此敎育一事而亦歸虛文則臣所謂國家來復之基永無其望矣然則臣安得不心枯膓焦疾聲㪅籲於 天陛之下哉我國素穪文明而至于近日禮義都毀而學問盡味則昔之爲文明者旣不可復見矣又於新學問者亦未有一人能窺其藩籬者然則可謂東敗西傷矣爲今之計莫如尊重太學申明先聖之道責任學部篤習當時之務使宗敎復明繼聖訓開來學以忠愛爲義務然後弱可爲强野可爲文國權可以光復文運可以賁篩臣旣以敎育不行爲憂而冒此煩陳則固不當㪅攙他說而區區忠激之意有不容不一陳者尙有數事焉其一即掌禮院旌褒例納錢事也夫忠孝烈旌閭乃是國家所以扶植綱常敦尙風化之大柄也有其實者亦當精擇審知然後可許其棹楔之典况乎無其實者乎今則不然不問事行之虛實惟視例納金八百之有無而許之碍之則是行迹爲虛而例納爲實也雖有忠孝烈實蹟必湮沒於千古而不得闡揚於世矣此豈 廟堂立法之本意哉伏乞 亟下嚴勅于掌禮之臣永革其旌閭例納錢凡干係 恩典者必令道臣博釆而審知之然後 奏聞請褒若有循私納賄誣虛而爲實者該呈狀人及道臣幷論罪以勵風化千萬幸甚其一即判任官及地方官俸金與兵丁巡檢掖庭所屬吏胥皂隷之月料事也夫仕者祿足以代其耕然後可以忘父母妻子之憂而能盡心職事不生他念矣今夫判任官及地方官之俸給僅足以資其一身而不能食其父母妻子則雖持心淸白者不爲事勢所牽者鮮矣書曰旣富方糓富而後能善古昔帝王之使臣工先富其身而使善其心此所以必先重祿使之忘其憂也伏乞陛下垂察焉內而府部院廳判任官巡檢兵丁掖庭所屬吏胥皂隷之屬外而觀察守宰鄕將吏輩使喚之屬當厚其俸給使之忘其家憂而盡其職事如是而有不用命者論罪而正法綱焉則千萬幸甚其一卽協律社貽獘事也臣聞孔子於顏子以爲邦之道必曰放鄭聲今夫協律社者臣雖不知其主倡之爲何人然臣聞其通宵設戱男女雜遝鬪爭易起亂淫相屬此豈非鄭聲乎大抵習舞演劇之戱於外國亦皆有之不過是俳優丐賤之軰區區營生者而如今協律社之穪以 宮內府所管發票營利者東西列邦所未聞見事也淫聲亂色眩惑耳目傷風敗俗年少之學問實業一不留心淫風從生實爲國家人民憂者此也伏乞 陛下亟令警廳不日嚴禁以絕亂階申飭掌樂之臣復講法樂千萬幸甚右臣所言諸條雖皆當今之可行而語其最急且大者則果能上下一心務進敎育之實而國家人民之知識一開則如貪賂之俗淆雜之風亂淫之戱雖不禁而人自耻焉而不爲矣伏望 陛下留 神裁察焉하소셔하얏더라
개항장에 극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이후, 이에 영향 받은 조선인들도 극장을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은 황제가 사는 공간이라는 상징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 보니 한성의 극장 역시 황실 의례와 관련해 시작되었다. 조선인이 한성에 설립한 최초의 상설극장은 대한제국 황실에서 1902년 세운 희대(戲臺)이다. 희대는 고종황제의 망육순(望六旬) [필자 주: 육순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51세를 가리킴.] 과 어극(御極) 40년을 기념하는 칭경예식(稱慶禮式)을 위해 봉상시(奉常寺) 내에 500석 정도의 규모로 설치되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반영하는 원형의 2층 건물로 계단 형태의 객석과 직사각형 모양의 무대를 갖추고 있었다. 황실희대는 통칭 ‘협률사(協律社)’ 혹은 ‘원각사(圓覺社)’라고 불렸다. 이는 희대를 빌려 연희를 공연하던 회사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칭경예식의 날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1902년 9월 토사병이 유행한다. 칭경예식은 다음 해 4월로 연기되었으나, 다음해 4월에도 영친왕의 천연두 발병 등을 이유로 또 다시 연기된다. 이후 칭경예식은 유야무야 되거나 약식으로 치러진 것으로 보인다. 칭경예식을 위해 많은 예인들이 한성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칭경예식에 소용하는 예인들을 관리하던 삼패도감(三牌都監)의 장봉환(張鳳煥)과 모종의 세력이 합세하여 연희 회사를 세우고 이름을 협률사라 불렀다. 협률사는 칭경예식에 참여하기 위해 한성에 올라온 남녀 예인들의 공연을 희대에 올렸으며 잠시 활동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활발히 전개되던 협률사의 희대 공연은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1904년 3월경 폐지되었다. 이처럼 협률사는 황실 극장인 희대가 만들어지고, 칭경예식을 위해 전국에서 올라온 예인들을 이용하여 돈을 벌어보고자 했던 일군의 사람들이 예인을 관리하던 삼패도감의 장봉환과 함께 수익 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협률사의 등장과 더불어 비슷한 전문 연예단체들이 생겨나면서, 이들 단체에서 극장을 대여하여 흥행을 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동대문활동사진소를 빌려 사용한 광무대의 박승필을 비롯하여, 박춘재, 김재종 등 유명 연예패들과 임성구, 이기세, 윤백남 등 신파극단을 이끌던 인물들이 극단과 더불어 연흥사, 원각사, 개성좌(開城座) 등의 극장을 함께 운영했다. 러일전쟁 이후, 극장을 이용하여 수익도 얻고 선전장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협률사가 복설(復設)된다. 다방면의 노력 끝에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 2월 하순에 복설된 협률사는 김용제(金鎔濟), 최상돈(崔相敦), 고희준(高羲駿)이 조직한 순 사영(私營)의 연예회사였다. 당시 협률사의 운영비는 친일조직인 ‘일진회’(一進會)가 댔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려는 세력이 후원했다. 협률사의 복설은, 러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한 일본이 조선인의 관심을 흥행물에 돌리기 위해 강구한 조치였다. 따라서 협률사를 혁파해야 한다는 의견이 속출했다. 봉상사(奉常司) 부제조 이필화(李苾和)의 상소로 결국 고종은 1906년 4월 협률사를 혁파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일본인 임차인이 오히려 위약금 25만원을 청구하면서 협률사 혁파는 흐지부지된다. 1907년 2월,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에서 협률사가 운영하던 희대를 사용하여 각종 연희를 올리고 활동사진을 상영한다. 이어 1908년 7월 26일, 이완용(李完用)의 비서로 일제의 조선침략에 동참하고 있던 이인직(李人稙)과 박정동(朴晶東) 등이 경시청으로부터 희대를 연극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고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연희를 시작했다. 원각사에는 김창환(金昌煥)을 위시한 창부(唱夫) 40명과 가기(歌妓) 24명, 총 64명의 예인(藝人)들이 있었다. 1911년 10월, 한시적으로 《조선신문》 언문판이 발간된 적이 있었다. 그 기념호에 실린 「연극의 월조(月朝)」라는 글에는 경성고등연예관에서 상영한 <엄비국장(嚴妃國葬)> [필자 주: ‘엄비(嚴妃)’로 알려진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장례를 찍은 실사를 일컬음.] 과 원각사에서 개연한 ‘금강산 환등 대회’가 소개되어 있다. △ 일젼에 엄비국장이라ᄂᆞᆫ 활동광고를 돌이기에 본긔자가 일ᄎᆞ 구경 즉 쳐량 감상도 나고 조션 고속된 졀ᄎᆞ도 젼 야 구경치 못 ᄉᆞᄅᆞᆷ의 안목에 가히 흥감ᄒᆞᆯ 만 즉 연극 즁 활동ᄉᆞ진은 더욱 진젹 거동을 구경ᄒᆞᆯ 만 다고 탄식 얏더니 ... △ 원각 에셔 금강산환등을 갈 가 단 다 기에 슈삼 지긔를 잇글고 완상 즉 금강산 일만이쳔봉이 완연이 안즁에 나렬 지라 ( 중략 ) 일 사십여쳐를 완상 니 △ 본 긔 가 의 금강을 구경 지 우금 삼십이년이라 영숙 산쳔과 긔이 고적이 반가온 마음이 졀로 나고 조션에도 여차 셰게에 랑 만 명산 쳔이 잇슴을 감탄 엿슴으로 연극장 쥬무 를 방문 야 그 환등의 력사를 무르니 리희직 ( 李熙直 ) 김진우 ( 金振宇 ) 량씨 본래 지사인 사진사 신장균 ( 申章均 ) 씨와 동행 야 금년 오월에 금강산 탐험 로 쳔신만고를 불구 고 외산 명승고젹을 촬영 야 환등에 삽입 야 구경치 못 동포의 안공에 구경케 니 삼군의 지긔도 흠탄 거니와 구경 시 동포도 응당 감상이 게시 고 신션 졍신도 환셩 지로다 1 위 기사에서 기자는 <엄비국장>에 대해 ‘진적한 거동을 구경할 만하다’고 언급하는 데 그친 반면, 140여장의 금강산 사진에 대해서는 극장 주무자(主務者)를 만나 환등을 제작, 상연한 내역까지 물어 듣고 감탄 어린 소감을 늘어놓는다. 이는 <엄비국장> 상영보다도 ‘금강산 환등 대회’가 조선의 관객들에게 더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켰음을 의미한다. 실제로도 ‘금강산 환등’은 조선인 관객들의 환영을 받아 원각사에서 장안사로 옮겨 흥행을 이어 갔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관객들은 왜 활동사진보다 환등에 더 흥미를 느꼈을까? 당시 활동사진 설명은 전설(前說)뿐이었다. 다시 말해, 간단한 설명 후에 10분 내외의 활동사진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필름은 대부분 쇼트 몇 개를 일정한 속도로 배열한 것이었고, 그 속도에 맞춰 변사가 설명하는 중설(中說)은 당시로써 구사하기 힘들었다. 반면 환등은 하나의 사진을 변사(설명자)가 자세히 풀어줄 수 있었다. 요컨대 관객들은 활동사진보다 환등의 사진을 보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활동사진을 상영할 때나 환등을 비출 때나 다 변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이 탄생하고 나서야 조선에 변사가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경성고등연예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변사의 연행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황실희대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하는데,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이 변사들에게 활동사진 연설의 방침을 전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이다. 사진 2. 변사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애국부인회 활동사진 기사(《황성신문》 1908년 6월 24일자.) 위 사진의 기사는 경성고등연예관에서부터 변사 연행이 본격화되었다는 일반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조희문 역시 경성고등연예관 설립 이전에도 직업적 변사는 아닐지언정 일시적으로 활동사진 설명에 나선 인물이 있었으며, 단성사, 연흥사, 장안사 등 조선인이 세운 극장이 탄생하던 1907~8년 무렵에는 이미 조선인 변사도 나름의 위치를 차지했음을 여러 명의 변사가 실증한다고 주장한다. 2 나아가 위 기사는 변사의 시조로 불리는 우정식(禹正植)이 원각사에서부터 변사 활동을 시작했다는 심훈(沈熏)의 증언도 뒷받침 해준다. 기사에 언급된 관인구락부는, 상술한바 원각사의 전신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변사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극장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된 것을 계기로 등장했으며, 관인구락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서양 혹은 일본의 선진 문물을 조선의 관객들에게 소개해 주는 강사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문물을 경험해 본 관리 중에 선택된 인물들이 주로 변사로 활동했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기사에 언급된 인물 중 정운복(鄭雲復)은 오사카상업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영국유학과 구미 각국 시찰을 경험했던 인물로, 일제의 조선침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언론 계통의 인물이었다. 김상연(金祥演)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에서 활동한 바 있는 언론 계통의 친일 관료였다. 한석진(韓錫振) 역시 《황성신문》과 그 후신인 《한성신문》에 관여했다. 이처럼 최초의 변사들이라 할 만한 인물들은 서구문물을 경험한 이들로서, 신문물을 조선에 소개하고 근대화를 주장하는 웅변가의 역할을 수행했다 할 수 있다. 1910년을 전후하여 유광관(有光館)이라는 활동사진과 연극장으로 사용되던 원각사는 아쉽게도 얼마가지 못해 영업을 중지했으며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1) 「연극의 월조」 《조선신문》 1911년 10월 1일자. 2) 조희문, 『한국영화의 쟁점 1』, 집문당, 2002, 130쪽 참고. * 본문은 필자의 『조선영화의 탄생』((주)박이정, 2018) 40~42, 209~211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사진 1(글 상단). 황실희대(원각사)의 외관 [자료] "논설: 술객문", 《황성신문》 1903.01.17. ◎歲月 이 荏苒 야 於焉之間 에 陰曆年終 이 又迫 니 歲暮天寒 에 北風其凉 고 梅花淡屋 에 雪月 이 滿庭 이라 有鄕居一客 이 孤枕冷燈 에 耿耿無寐 야 起拂布袍 고 徘徊月庭 이라가 負手緩步 야 行訪一名士之家 러니 適値諸名士 ㅣ 與京鄕友朋 으로 爛漫會飮 이라 客 이 亦參座末 이러니 數盃酒闌 에 滿座酒人 이 詼諧談笑 로 各自論懷 더니 一人曰 吾輩 從今以後 로 無用於世 로다 何事 를 爲業 지 欲看書而懶厭 고 欲聚財而無資 니 除非親舊之尋訪 이면 終日老屋 에 無聊消遣 니 沁沁難耐 일셰 子 有何消日 고 一人曰 吾亦 云云 일셰 近日 某友家 에셔 西廂記 를 借來 얏더니 此亦語錄 을 難解 야 滋味 가 殊沒 일네 一人曰 我 某友某友 로 一分 기쑤시기로 漿羹飯 을 每夜 喫之 지 然 이나 細雨 도 濕衣 라고 그럭저럭 十餘元 을 見失 네 一人曰 吾儕 가 今夕 에 花鬪 나 이볼가 一人曰 且置 고 協律社 귀경이나 가셰 壯觀 일네 眞壯觀 일네 春香 이와 御史出道壯觀 일네 一人 이 顧謂鄕客曰 彼公 은 무엇 려 京來 나 朝飯夕粥 喂牛突 에 進士主 가 上福 이지 一齋郞 一主事 나 宕巾味 를 甞 랴고 旅舘客苦 何如 고 無錢 면 쓸 업 鄕客曰 아모리 無錢 야도 令監 이나 進賜 셔 數生日 만 苦待 오 說麼執事 네가 數生 야 大臣協辦 地境 에 此漢區處 아니 가 一人曰 數 무슨 數 인가 世上貌樣觀之 니 어늬 時節數生 길지 鄕客曰 齋郞借啣 은 何事故 로 아니터지 고 沓沓 여 發狂 이오 一人曰 必也 터지지 면셔 終宵諧謔 다가 聞鷄罷歸 야 爲余道其問答之說 일 余 ㅣ 曰 悲夫 라 彼好地閥 好家數之諸人 이 若在舊日則 淸班華秩 과 監留宰相 이 卽其倘來之職而不幸當此時節 × 야 官雖淸要 나 無一權利 고 如彼冷寞 이 極甚可咄 니 雖一藝一業 과 一文一字 라도 務欲勤苦做工 야 進就學識 然後 可不受他日之欺侮 어 不此之爲 고 閒游懶怠 야 只以骨牌 花套 西廂記 演戲場之類 로 以爲沁沁破寂之資 니 非但此等名士也 라 我韓全國 에 從前 兩班儒士爲名之人 은 擧皆如彼 고 鄕客 은 尙此以依賴求乞於宰相之門 으로 錮筋着髓 야 牢不可破 니 如此細瑣 가 雖若無關係於國勢 나 國勢之萎靡衰頹 에 日漸濱危 며 日漸墜險 은 實因此而然也 니 豈可謂之以細故而不深憂也哉 아 嗟乎咄哉 로다 [자료] "논설: 원각사 관광의 향객정담", 《황성신문》, 1908.10.13. ◎有兩個鄕客 이 來遊京師 라가 一夕 은 月色 이 如晝 야 九街 가 如洗 라 携手同伴 야 料理店 의 盃酒 를 沽飮 고 因 야 圓覺社 의 演劇 을 觀光 고 拾二點鍾 에 歸來旅舘 야 該社情况 을 互相評論 이 如左 더라 甲曰余 가 在鄕 야 新聞 을 閱覽 니 大韓新聞社長李人稙氏 가 我國 의 演劇 이 淫靡不雅 것을 改良 기 爲 야 圓覺社 를 設立 고 人情風化 에 有助 歌舞 로 倡夫 와 妓女 를 敎導 다 얏스니 氏 社會上開明紳士 로 拾餘年海外文明國 에 滯在 야 文明空氣 를 吸収 며 文明學術 을 鍊習 얏고 其歸國也 에 新聞 의 機關 을 掌握 며 小說 의 著術 을 發行 얏스니 國民 을 開導 고 風俗 을 改良 事業 에 對 야 宜乎好個方針 을 研究發明 지라 於是乎演劇 을 改良 主義 로 圓覺社 를 設立 이니 吾儕 가 思惟 기를 該社演劇 에 乙支文德姜邯贊 의 英雄事業 이나 論介桂日香 의 貞烈芳跡等 으로 新演劇 을 發明 야 國民 의 思想 을 鼓發 이 有 리라 얏더니 今 에 該社情况 을 目覩 則猶是舊日風流 에 沈靑歌 、 春香歌等而已 니 何者 로 演劇改良 이라 謂 지 此 로 開明紳士 의 事業 이라 謂 난지 知得 키 難 事 로다 乙曰李人稙氏 의 事業 은 姑舍 고 該社 에 對 야 同情贊成 者 가 誰也 오 면 皆我國上流社會 에 高等官人 이오 昨日今日 에 聯翩觀覽者 誰也 오 면 現政界 에 某某大官 이라 其政治改良 도 圓覺社 의 演劇改良 과 如 지 不知 거니와 目今我韓 에 國步 의 艱棘 과 民生 의 塗炭 이 何如 境遇 에 在 가 若個有志者流 가 國家思想 과 國民義務 로 敎育 을 倡導 다 實業 을 奬勵 다 야 家產 을 傾 고 心力 을 竭 야도 目下經濟 의 困難 으로 一個事業 도 略無起色 니 其舌 이 獘 고 其淚 가 枯 야 晝夜憂嘆 情况 을 凡有人心者 ㅣ 孰小矜惻 이며 加之地方騷擾 가 經年不息 야 一般同胞 의 死亡 이 不絕 고 流離 가 相續 情况 은 骨爲之冷 이오 鼻爲之酸 이거 當局諸公 은 此 를 不聞不知 지 惟是演劇塲 을 愛好 고 顧存 야 無日不額額 니 諸公 의 意向 은 維新 의 功業 을 已建 고 太平 의 福樂 이 無窮 줄노 認 홈인지 果然諸公 으로 여곰 內閣 을 愛 홈이 圓覺社 를 愛 홈과 如 면 演劇改良 보다 政治改良 의 實效 가 有 지어 胡爲乎內閣 을 愛 홈이 圓覺社 愛 만 不如 지 此 도 知得 키 難 事 라 고 長吁浩歎 타가 一大白 을 滿引 고 頹然而臥 야 東方 의 旣白 을 不知 얏다 云 有人 이 其談話顚末 을 報道 其言 이 雖涉於愚戇 이나 其意 가 實出於憂憤故 로 爲之記載如右 하노라
대학생 상원( 심희섭 )과 재수생 승준( 안재홍 )은 집안 사정 때문에 일찍 군대에 간 친구 민욱( 김창환 )을 면회하러 철원으로 향한다. 승준은 민욱의 여자 친구에게서 헤어지자는 통보를 담은 이별 편지를 받았고, 상원과 승준은 편지를 민욱에게 전해줘야 할지 아니면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지 갈등한다. 편지는 초반에 갈등을 제공하고 마지막에 작은 반전을 만들기는 한다. 하지만 영화 전체를 봤을 때 큰 역할을 할 것처럼 보이지만 기대만큼의 무게를 가지진 않는다. 영화는 남성 관객을 대상으로 한 군대 유머, 90년대 복고 정서 등을 풀어놓으며 유쾌한 코미디 영화의 분위기를 풍긴다. 복고 정서의 경우 관객의 시선을 끄는 주요한 요소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정서는 상실이다. 창원의 눈 쌓인 추운 길을 맴도는 세 젊은이를 비추는 영화는 쓸쓸함으로 가득하다. IMF라는 단어는 초반에 한 번만 등장하지만 이후 인물들의 주변을 무겁게 맴돈다. 뭔가 잘되지 않을 것 같은 무거운 정서는 주인공들이 원하는 하룻밤의 사소한 일탈을 계속해서 방해한다. 영화에는 쓸쓸함을 이겨내는 에너지 넘치는 장면이 두 번 있다. 첫 번째는 세 남자 주인공이 눈싸움을 할 때다. 만약 사회에 있었다면 혹은 같이 고등학교에 다녔을 때 아마 그랬을 것처럼 추위도 잊어가며 열심히 눈을 던지고 논다. 두 번째는 다방 종업원인 미연( 김꽃비) 이 등장해서 세 남자 사이에 긴장감을 불어넣을 때다. 그리고 미연과 상원의 만남 또한 상원에게 잊히지 않을 상실로 이어진다. 미연은 손가락이 하나 없다. 세 명의 주인공도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상처를 입거나, 물건을 잃어버리고, 물건을 빼앗긴다. 직접 등장하지 않으며 편지 속의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민욱의 여자 친구 에스더 역시 마찬가지다. 전형적인 코미디 영화라면 이런 실패는 주인공들의 욕망을 좌절시켜서 상황을 더 코믹하게 만드는, 웃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1999 면회>에서는 이 실패가 IMF라는 실체로 존재한다. 젊은이들의 희극이 비극으로 바뀌는 결말은 당시에 20대를 맞은 젊은이들이 이후 겪게 될 88만원 세대로서의 힘든 삶을 암시하는 듯하다. 배우의 앙상블이 중요한 영화인데 주연 조연 모두 뛰어난 연기로 영화를 잘 살렸다. 코믹한 군인과 상처 입은 젊은이를 오가는 김창환 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김꽃비는 독립영화에 자주 출연한 친숙한 얼굴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전에 보여준 적 없던 색다른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 변호인 >으로 익숙한 얼굴인 심희섭 이나, 이후 같은 광화문 시네마의 작품 < 족구왕 >에서 복학생 역으로 놀라운 연기를 선보인 안재홍 의 연기력을 이 영화에서 미리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