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겨울
- 감독
- 신가연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기주봉
사진: “ 세계의 주인 ”, 네이버영화 * 본 글에는 극중 일부 장면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세계의 주인 >(윤가은, 2025)을 아무런 정보 없이 관람할 때, 관객은 필연적으로 오류 혹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초반의 시퀀스들은 수수께끼에 가까운 불규칙한 배열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은 교복을 입은 커플이 학교로 보이는 폐쇄된 장소에서 키스에 몰두한 모습이다. 곧 영화의 중심이 될 주인( 서수빈 )은 키스 도중 남자 친구( 김예창 )의 얼굴이나 손을 지속해서 교정한다. 이 장면은 성행위를 묘사한 웹툰 스케치로 넘어가는데, 마치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처럼 보인다. 방금까지 키스를 나누던 주인은 단짝 유라( 강채윤 )가 그린 웹툰이 담긴 화면을 바라보면서 다음 상황을 궁금해한다. 체육 시간에는 운동장에서 배구 연습을 하는 도중 자리를 이탈해 장난을 치다가 다른 학생에게 부딪히기도 한다. 이때 부딪힌 남학생 수호( 김정식 )와 주인은 이후에도 부딪히는 일이 잦다. 수호의 어린 여동생은 주인의 엄마( 장혜진 )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다닌다. 주인은 엄마를 따라 방문한 병원에서 팔에 깁스를 한 수호의 동생을 만난다. 그날 수호는 동생을 씻기다가 목덜미 근처에 난 꼬집힌 자국을 본다. 다음날 어린이집에 찾아가 CCTV를 보여달라고 말하지만, 어린이집 교사는 곤란해하며 자리를 피한다. 수호는 마을 어귀 담벼락에는 빨간색 라카로 성범죄자의 집이라고 적힌 곳을 지나친다. 주인의 동생 해인(이재희)은 마술을 배워서 가족 앞에서 상연하는 것을 좋아한다. 빨간 공을 손안에서 사라지게 하는 마술 등 대부분 무언가를 사라지게 하는 마술이다. 해인은 주인의 앞으로 온 편지를 몰래 숨겨두거나, 신발에 흙을 묻혀 오는 등 어떤 비밀이 있어 보인다. 주인의 엄마는 텀블러에 양주를 넣어서 몰래 마시곤 한다. 주인은 진로를 정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선생님( 이상희 )과 개별 면담 시간에 파티션 위에 놓인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숨쉬기 곤란해하는데, 알레르기가 있냐며 당황해하는 담임에게 주인은 장난이었다며 웃어버린다. 정확한 숏의 순서를 정리하기 어려운 일련의 몽타주 속에서 특정 인물이나 상황에 마음 두기 힘들다. 그러다 개별적인 상황을 한데 모으는 꼭짓점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복역 기간을 끝낸 성범죄 피의자의 학교 인근 마을로의 복귀가 임박해지자, 수호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성범죄자 복귀 반대 서명을 받는다. 주인은 홀로 서명에 반대하는데, 이유는 서명을 독려하는 문구 중 피해자의 아픔을 과장해서 묘사한 부분 때문이다. 피해자는 이 일로 인해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는 문구는 클리셰에 가깝지만, 이것이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과 피해자성을 강요하는 문구가 될 수도 있다. 주인이 문구에 이의를 제기하는 순간, 어쩌면 그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일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네가 뭐 성폭력 피해자라도 돼?”라는 일갈에 주인은 “그래, 나 성폭행 피해자다.”라고 답한 뒤 곧이어 농담이라고 무마해 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농담이 아님을 관객은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주인과 그를 둘러싼 모든 비밀스러운 상황과 행동에 하나의 질서가 생긴다. 아버지의 부재도, 편지를 숨기거나 마술을 배우는 동생도, 술을 마시는 엄마도, 주인의 활발함도, 모두 성폭력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불규칙한 것처럼 보였던 배열이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질서로 통합되는 것을 느끼면서, 이에 대한 경계와 의심이 동시에 피어오른다. 이러한 해석이 결국 인물을 사건에 가둬두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서명문 속의 클리셰와 비슷한 짓을 내가 인물에게 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느낀다. 서명을 부탁하는 수호와 반대하는 주인 (사진: “ 세계의 주인 ”, 네이버영화) 사실 확정을 위한 고백은 일종의 법정에서 이뤄진다. 문구를 수정했다는 수호의 말이 거짓임을 간단히 확인한 주인은 자리를 피하지만, 수호가 끈질기게 붙잡으면서 몸싸움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표출된 주인의 분노는 그가 가진 본래의 성격만을 표시할 수 있는가. 그 안에 잠재한 성폭행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그의 행동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문제의 그 문구를 상연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과연 영화가 지속하는 동안 인물은 이러한 잣대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교장실에 불려 간 주인과 수호는 서로를 마주 본 위치에 앉는다. 수호는 서명받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주인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며 결국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차분히 고백한다. 가장 문제적인 장면이 이어진다. 차 앞좌석에 나란히 앉은 엄마와 주인은 세차장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것은 다소 노골적인 의식이자 클리셰다. 세차가 이뤄지는 공간 내부의 소음이 주인의 울부짖음을 가리는 동안, 주인은 엄마를 향해 원망의 말을 마구 쏟아낸다. 세차가 끝나고 울음이 잦아질 즈음 엄마는 말없이 휴지와 물을 건넨다. 그러고는 ‘한 바퀴 더 돌까?’라고 묻는다. 이 장면에서 수호가 쓴 서명문 속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문구가 속절없이 떠올랐다. 세차장 장면은 이를테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씻으려 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상처의 당사자인 이들은 상처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 다행히 그 안에서 주인은 혼자가 아니다. 주인의 엄마는 바깥에서 상처를 바라보거나 낫게 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상처 안쪽에 함께 있는 사람이다. 이들과 함께 뒷좌석에 무단 탑승한 카메라 역시 상처 안쪽에 자리 잡으려 한다. 세차장 장면의 핵심은 무언가를 씻어내는 정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들의 위치에 있다. 외면했던 안쪽에서 여전히 울부짖거나 억눌린 상처들이 존재하고, 주인은 잠시 그 상처가 되어 아우성쳐 보았을 뿐이다. 세차장 기계 속 차 안, 엄마 태선과 주인 (사진: “ [세계의 주인] 메인 예고편 ”, 바른손이앤에이) 안쪽에 자리한 사람들이 있다. 법정 장면에서 친족 성폭력 피해자인 미도( 고민시 )가 피고 측 변호인의 심문에 맞서 증언할 때, 미도의 뒤편에서 슬쩍 손수건을 건네주는 인주( 백현주 )와 동료들은 상처의 안쪽에 있는 사람이다. 심문을 마치고 식당 부엌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미도는 가족이 찾아왔다는 동료의 말을 듣는다. 두려운 듯 커튼 뒤에서 슬쩍 바깥을 내다보았을 때, 뜻밖에도 창밖에 있던 주인이 시선에 잡힌다. 미도는 주인을 그 장소에서 가장 깊은 곳인 주방 안쪽으로 들인다. 둘은 그렇게 상처의 안쪽에 있다. 사건 이후 주인은 무리 짓던 친구들과도 어쩐지 데면데면해진다. 주인의 교실 책상 서랍 안쪽 깊숙한 곳이나 책 사이에서는 적대적인 느낌을 주는 쪽지가 발견되기 시작한다. 그 쪽지를 쓴 자가 누구인지는 관객 역시 알 수 없다. 그리고 복도를 촬영하는 카메라의 시점이 불현듯 등장했을 때, 카메라 뒤에 있는 자가 쪽지를 쓴 미지의 인물일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방금 카메라 앞을 스치고 지나간 주인이 갑자기 렌즈 가까이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방금까지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깨어진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사건 이후 유독 멀어진 친구 유라다. 유라와 주인은 머리를 대고 방금 찍힌 영상을 함께 확인한다. 이로써 유라, 혹은 미스터리한 쪽지를 쓴 이들 역시 상처의 안쪽에 자리한 사람이 된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대개 카메라 안에서 벌어진 일들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이라 여겨지지만, 이들 역시 내부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침범과 공유다. 영화는 거의 모든 이들을 상처의 안쪽으로 초대한다. 나 역시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 켄 로치의 영화, <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에서 제목이 곧 개인의 존엄을 표시하는 모두의 구호가 된 것처럼, <세계의 주인>에서도 ‘나, 주인’임을 기억할 수 있는 이들을 소환한다. 내 몸과 내 상처의 주인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 상처의 안쪽에서 때로는 욱하는 마음이 들고, 상처의 바깥에서 이 마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의심스러워도 상처와 함께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물론 여기에 동참할 수 없는 이들이 존재하리란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탓은 아닐 것이다. 사진: “ 세계의 주인 ”, 네이버영화 김소희(영화평론가) ㅣ 영화를 보는 동안 느낀 감정의 격랑이 내가 쓴 글 안에 거짓 없이 찍혀 있기를 바랍니다.
1993년 여름의 나를 사로잡은 질문은 그것이었다. 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는가? ‘충격적인 컬트’라는 수식어와 함께 심야 시간대 KBS2에서 방영되었던 데이빗 린치의 <트윈 픽스> 1화 오프닝은, 그때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의 내가 돌이켜보건대, 지금까지 내 인생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이 드라마는 1화 첫 장면부터 ‘시체를 던진다’. 금발머리에 푸른 눈, 학교 축제에서 여왕으로 선정될 만큼 트윈픽스 마을의 최고 미인으로 꼽히던 고등학생 로라 파머가 강가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차가운 강물 속에 몇 시간 동안 떠다녀서인지, 그의 피부는 잿빛으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입술도 생기를 잃은 채 푸르죽죽했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그대로 ‘박제’된 시체가 주는 불편한 매혹. 또래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부유한 가족의 외동딸로서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심지어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어서 누구에게나 칭찬을 듣던 밝고 화사한 소녀 로라 파머가 시체로 발견된 뒤, FBI 요원 데일 쿠퍼가 전담 수사관으로 트윈 픽스 마을에 도착한다. 그리고 비밀이 하나씩 드러난다. 한낮의 햇살 같던 로라에게 실은 암흑 같은 어두움이 스며들어 있었고, ‘공인된’ 남자 친구는 한명이었지만 다수의 남성들이 로라 주변에 존재했다. 심지어 마약과 매매춘, 새디스트의 고문이라는 엄청난 단어들이 FBI 요원의 입술에 오르내린다. 트윈 픽스는 어떤 곳인가. 침엽수림이 우거지고, 큰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새들이 평화롭게 우짖으며, 미국 최고로 맛있는 체리 파이와 뜨거운 커피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영업 중이고, 새롭게 유입된 사람은 거의 없이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끼리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지내는 그런 마을이다. 따스한 세피아 톤 화면 속에서, 서로 마주치면 미소와 덕담을 주고받은 마을 사람들의 과장되게 따뜻한 관계가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나오미 왓츠가 처음 할리우드에 도착하여 노부부와 주고받는 밝고 희망차고 부자연스러운 연기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대화가 끝나고 뒤돌아서면 그 사람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표정이 떠오른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거나, 음험하고 차갑고 비열한 표정은 시청자들만 볼 수 있는 일종의 ‘방백’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냐고? 모두에게 혐의가 있고, 모두가 비밀을 숨기고 있으며, 모두가 떳떳하지 않다. 심지어 가장 선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제시되는 데일 쿠퍼마저도 극이 진행됨에 따라 모종의 변화를 겪는다. 종국엔 가장 무시무시한 표정이 그의 얼굴 위에 얼어붙는다. 애거사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고전 미스터리의 익숙한 전제이지만, 드라마로 이런 이야기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누군가 살해당했고, 모두가 수상하고, 모두가 그 죽음에 책임이 있다. 겉으로는 그토록 아름답고 아늑해 보이는 마을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과 부패와 심지어 악마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 린치의 <블루 벨벳>의 유명한 오프닝 신처럼, 장미꽃 아래 떨어져 있던 사람의 잘린 귀 같은 그런 세계. 그리고 <트윈 픽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육체관계로 얽혀 있는데, 문제는 이 모두가 치정 혹은 제도적으로 용인받지 못할 관계라는 것이다. 배우자 몰래 저지르는 불륜이라든가, 죽은 친구의 연인과 사랑에 빠진다든가, 재산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맺은 관계라든가.... 그들은 우울한 현실과 복잡한 삶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연애를 선택했고, 그 말로는 당연히 모두 처참하다. 배신과 기만, 거짓된 정체성의 폭로. 이별과 살인과 자살. 이 복잡한 치정 관계들은 로라 파머 사건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지만, 중요한 단서로 작동하면서 정교한 추리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제시되진 않는다(시리즈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데일 쿠퍼는 추리하지 않는다. 그는 ‘계시’를 받는다). 로라 파머의 죽음 이후 연루된 이들의 사소한 비밀이 수사 과정에서 밝혀지거나, 당사자가 그 폭로를 막기 위해 어떤 행동에 나서면서 연쇄적으로 다른 사건들이 터지는 식이다. 즉 확실한 인과관계 없이 충동적인 생존본능에 의해 저질러지는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주요 플롯을 이룬다. 그런 면에서 <트윈 픽스>는 일일드라마적 전통(내지는 미국의 소프 오페라, <가이딩 라이트>라든가 <제너럴 호스피털> 같은 드라마의 전통을 다시 쓰기 한 작품) 1) 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물론 회가 거듭할수록 악령과 명상, 신비로운 체험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장르는 오컬트 스릴러의 색깔이 상당히 진해지지만 말이다. 작년부터 왓챠를 통해 <트윈 픽스> 시즌 1, 2를 다시 본 다음 가장 최근작인 (25년 만에 돌아온) 시즌 3의 초반까지 챙겨보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데이빗 린치가 이끄는 대로 넋을 놓고 따라가며 그 낯선 세계의 토끼 굴을 탐험했다면, 이후의 무수한 자칭 타칭 ‘포스트 <트윈 픽스>’들까지 충분히 경험했던 2021년의 관람자로서 새롭게 느낀 점은 <트윈 픽스>가 얼마나 느슨한 이야기였나 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마크 프로스트가 로라 파머 살인 사건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실제 사건이 있다. 스무 살의 헤이즐 드루(Hazel Drew)는 1908년 강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수사 기법이라는 게 전혀 확립되지 않은 20세기 초의 그 살인 사건은, 남자들과 쉽게 어울렸고 낯선 사람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던 예쁜 아가씨의 죽음을 둘러싼 수상쩍은 호기심과 무성한 소문과 함께, 이 남자 혹은 저 남자 모두가 의심스러운 정황에 대한 모호한 가능성만 여럿 남긴 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마크 프로스트가 헤이즐 드루 사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꼬마 시절 할머니가 잠자리에서 들려준 일종의 유령 이야기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할머니는 꼬마들이 밤에 집 밖으로 나가 놀면 안 된다는 교훈을 심어주기 위해 미제로 끝났던 헤이즐 사건을 다소 무시무시하게 각색하며 초자연적인 무언가와 섞어서 마크 프로스트에게 들려주었다고 했다. 프로스트에게는 그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 헤이즐에 대한 상상이 뇌리 어딘가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고, 결국 수십 년 뒤 헤이즐은 로라 파머로 재탄생했다. 2) 그리고 그 수수께끼 같은 죽음의 이야기가 재탄생한 1990년 전후의 시기는 어떨까. 인터넷 등의 각종 통신 수단이 발달하기 직전이었던,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 이전의 시기다. 비밀은 얼마든지 감출 수 있었고 이중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했으며 심지어 악마가 인간 세계에 끼어드는 것도 가능했던 시기다. 그래서 프로스트와 린치는 그 모호한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확한 전개라든가 캐릭터의 일관성 같은 요소들은 거의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유연상 작용처럼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그런 헐거운 흐름과 자유로운 리듬이 전형적인 드라마투르기에 익숙했던 당시 시청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 같다. 작가가 완전히 장악하여 정확하게 짜놓은 세계 속에서 편안하게 누워 감상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구전 설화를 듣는 것처럼, 화자가 말하던 도중에 갑자기 잊어버리고 다른 주제로 휙 건너가는 것처럼 다소 맥락 없고 뒤죽박죽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쩌면 눈으로 본다기보다 귀로 듣는 옛 이야기의 부활을 목격한 것 같은 착각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드라마 내내 과잉처럼 쓰이는 바달라멘티의 음악 역시 그 효과를 강화시킨다).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다시 큰 그림을 보자. 데이빗 린치는 드라마 <트윈 픽스> 이후 영화 <트윈 픽스(Twin Peaks: Fire Walk With Me)>(1992년)를 재차 만들었다(웨이브와 구글 플레이 무비즈에서 대여 혹은 구매로 볼 수 있다). 이는 시즌 1의 프리퀄로서, 드라마에서는 늘 누군가의 회상 신이나 대사를 통해서만 언급되던 로라 파머가 처음으로 주인공으로 극 전체를 장악하며 살아 움직인다. 드라마에선 ‘냉혹한 미녀’처럼 그려지던 로라 파머가 영화에선 좀더 순진하고 따뜻하고 가련한 인물로 재해석되었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데이빗 린치의 딸이자 영화감독 겸 작가인 제니퍼 린치는 소설 <로라 파머의 비밀 일기(The Secret Diary of Laura Palmer)>를 썼다. 이것은 로라 파머가 생전에 썼던 비밀일기장의 내용을 상상하여 완성한 책이다. 1990년의 드라마 시즌 1과 시즌 2사이에 출간된 스핀오프다. 당시 22살이던 제니퍼 린치는 데이빗 린치와 마크 프로스트로부터 로라 파머에 대해 처음 듣고 자신이 그 인물과 대단히 가깝다고 느꼈으며, 마치 ‘자동기술’을 하듯이 즉각적으로 이 소설을 써내려갔다고 밝혔다. 3) 헐거운 ‘트윈 픽스’ 세계관에서 작가와 감독이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혹은 않았던) 빈 공간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을 때, 시청자들이 의외로 그 여백에 열렬히 반응하며 새로운 디테일을 적극적으로 요구했을 때, 감독은 별개의 영화와 그리고 25년만의 새로운 시리즈로 그에 응답했다. 감독의 딸이자 또다른 크리에이터는 거기서 파생된 로라의 일기라는 새로운 픽션을 완성했다. <트윈 픽스> 시즌 1이 시작될 무렵에는 미처 계획하지 않았던 디테일과 주석이 지속적으로 덧붙여지면서, 트윈 픽스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도 그만큼 확장된 것이다. 드라마 시즌 1~3, 독자적인 장편 영화와 장편 소설까지, 이것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상당히 널리 알려진 팬픽션 혹은 유니버스와 그렇게 많이 다를까? 어쩌면 유니버스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확고하게 대중적인 무언가로 정착되기 이전의 초창기 버전의 형태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트윈 픽스> 제작진마저 데일 쿠퍼처럼 트윈 픽스의 세계에 갇혀 버린 건 아닐까? <트윈 픽스> 시즌 3의 2화에서, 외팔이 남자는 데일 쿠퍼에게 묻는다. “이건 미래인가요? 아니면 과거인가요?” 과거에서 상상한 미래라고 해야 할까. *** 1) 아래 아티클에 따르면, 각본가 마크 프로스트는 극중극 형태로 등장하는 <사랑의 초대(Invitation to Love)>를 소프 오페라의 노골적인 패러디로 작심하고 썼다고 한다. https://www.dazeddigital.com/film-tv/article/40177/1/invitation-to-love-soap-within-twin-peaks-david-lynch 2)https://www.dailymail.co.uk/news/article-4336146/The-real-life-murder-Sand-Lake-NY-inspired-Twin-Peaks.html 3)https://en.wikipedia.org/wiki/The_Secret_Diary_of_Laura_Palmer
고등학생 문영은 캠코더를 가지고 다니며 지하철에서 본 사람들을 몰래 촬영한다. 술에 취해서 남자 친구와 싸우던 희수를 보고 녹화하다가 이를 들키면서, 문영은 희수와 이상한 우정을 쌓아간다. 스마트폰이 발달한 요즘 굳이 캠코더를 가지고 다니며 영상을 찍는 취미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생 문영은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 때문인지 혹은 불행한 가정환경 때문인지, 세상과 담을 쌓은 듯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하며 캠코더 너머를 관조한다. 그가 있어야 할 가정에서는 늘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가 딸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이를 피해 집 밖으로 도망치지만 세상에 섞이지 못하고 떠돈다. 그가 희수를 촬영하다가 들킨 순간, 그리고 희수와 몸싸움을 벌이는 순간, 영화는 그가 지금까지 촬영해온 영상들처럼 문영과 희수의 싸움을 응시한다. 이제 그는 자신이 바라만 봐온 세상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긍정적이고 활발한 희수는 문영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도우려 하고 친해지려는 희수가 문영은 그저 불편하다. 그러나 가족이 없는 문영은 새로운 친구인 희수와 함께 천천히 새로운 삶 속으로 빠져든다. 술을 마시는 아버지를 싫어하는 문영은 희수에게 술을 배우고, 훔친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치면서 잠시 해방감을 맛보기도 한다. 물론 영화는 두 여성의 우정을 마냥 낭만적으로 그리지만은 않는다. 영화에는 문영과 문영의 아버지, 희수가 마치 사이좋은 가족들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희망은 엎어진 밥상의 이미지를 통해 보기 흉하게 부서진다. 친구와 혈연처럼 가까워진다면야 좋겠지만, 싫더라도 같이 있어야 하는 혈연관계와 달리, 우정은 같이 있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순간이, 침범하지 말아야 할 선을 긋는 시기가 반드시 온다. 이제 문영은 이 선을 긋는 방법 역시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그토록 보고 싶지 않던 가족에게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영화는 추운 겨울, 어두운 밤거리를 방황하는 문영과 희수를 에너지 넘치는 화면 안에 담고 있다. 이들은 주로 밤에 도시의 골목을 헤매는데, 이는 문영을 둘러싼 사회의 폭력적인 환경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문영은 계속해서 거칠고 어두운 이미지 속을 방황한다. 서로 다른 두 인물의 충돌이 중요한 이야기인 만큼,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필요한 이 영화에서 김태리와 정현 두 배우는 각각 개성 강하고 에너지 넘치는 인물을 잘 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