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폴로의 모험
- 감독
- 아치 마요
- 제작년도
- 1938
- 출연
- 게리 쿠퍼, 시그리드 구리, 바실 라스본, 조지 바비에리, 비니 바네스
1. 시네마테크 파사주 여정의 시작: 영화관의 문 시네마테크 여행기 프로젝트의 제목을 ‘시네마테크로 가는 통로(길목)’라는 의미를 담아 ‘시네마테크 파사주(Cinematheque Passage)’로 결정했던 날이었다. 나는 그 늦은 새벽 시간에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은 베를린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지구(Prenzlauer Berg), 카스탄니엔알레 77번가(Kastanienallee 77, Berlin)에 위치한 32석 규모의 단관극장, ‘희망의 빛 영화관(Lichtblick Kino)’의 정면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베를린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지구 카스탄니엔알레 77번가에 위치한 32석 규모의 단관극장 ‘희망의 빛 영화관(Lichtblick Kino).’ (사진: LICHTBLICK KINO ) 나는 분명 이 영화관의 출입문에 매료가 되었던 것 같다. 영화관을 세상과 연결하는 문은 영화를 보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지만,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 문은 접촉할 수 없는 사물이 되었다. 대부분의 복합상영관, 영화를 소비문화로 바꾼 이곳에는 문이 없기도 하다. 보통 쇼핑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드넓게 매표소와 팝콘과 음료 판매대가 보인다. 영화관 입장 시간이 되면 입구는 이미 열려 있다. 건물 입구부터 영화관에 들어갈 때까지 모든 문은 자동으로 열리기도 한다. 수많은 유동 인구를 위해 모든 통로는 최대한 개방되고, 자동으로 여닫힌다. 하지만 ‘희망의 빛 영화관’의 문은 영화만을 위한 통로를 지키듯이, 영화관에서 영화 보기를 고수하는 파수꾼과도 같이 서 있다. 문 옆 창문에는 아마도 현재 상영 중인 듯 보이는 장-뤽 고다르의 < 네 멋대로 해라 >(1960), 제베타 스틸이 부른 ‘Calling You’가 떠오르는 퍼시 아들론의 < 바그다드 카페 >(1987),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 지옥의 묵시록 > (1979) 포스터가 붙어 있다. 다음 사진에서는 좁은 직사각형 모양의 극장 내부가 보였다. 한 열에 2~4석 정도밖에 없는 좁고 길쭉한 아주 작은 영화관이다. 내부는 흰색 벽에 몬드리안풍의 단색의 장식이 군데군데 걸려 있다. 이 화려하지 않은 영화관 내부는 어딘지 모르게 창백한 배우의 얼굴과 같이 보였지만, 어떤 소박한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 그건 내 시선을 빼앗긴 스크린 앞에 놓인 참나무색 피아노 때문이었다. 음악 공연이 열리기도 하고, 때로는 무성영화 반주용으로 사용되리라 생각했다. 2. 시네마의 유토피아 파리 드골 공항에서 파리 13구에 있는 오스떼를리츠(Gare d’Austerlitz)역으로 이동해 첫 번째 시네마테크 파사주 목적지이자, NECS(European Network for Cinema and Media Studies, 유럽 영화미디어학 네트워크) 학회가 열리는 몽펠리에로 가는 야간열차를 탔다. 출발이 지연되어 열차는 11시 가까이 되어 출발했다. 열차 출발과 동시에 거의 잠이 들었다. 시차로 인해 잠에서 깼을 때 새벽 4시가 조금 지났다. 생각보다 깊은 잠을 잤다. 열차 침대가 생각보다 편안하다는 생각에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새벽을 달리는 기차, 창밖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잠시 어느 역에 정차했다. 내리는 이는 없을 것 같은 그런 기차역. 아마 기차도 잠들 시간이었나 보다. 다시 잠들 수도 있는, 잠의 통로에서 난 이 여정에 대해 생각했다. 시네마테크 파사주는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등 이 영화관 기행문을 구상하면서, 찾았던 정보들을 떠올렸다. 이미지를 역사 개입의 도구로 사용하는 존 아캄프라(John Akomfrah)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남긴 말을 영화관의 설립 취지에 넣은 시애틀 컬럼비아 시티(Columbia City, Seattle)에 있는 예술영화 전용관 ‘비콘 시네마(the Beacon Cinema)’를 알게 되었을 때 다른 무엇인가 새로운 생각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에 들어선 느낌을 받았다. 특히 영상 아카이브와 같은 곳은 야누스 얼굴의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난 한 곳에 있으면서 다르게 존재할 수가 있지.’ 여러분들이 요청하는 좀 더 다른, 아카이브에는 없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는, 그것은 몽타주 철학이어야 합니다. 몽타주는 재개입의 가능성과 새롭게 재설정된 목적을 가지고, 즉 다른 야망을 지니고 이미지로 되돌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1] 그렇다. 영화관은 이미지의 낙원이어야 한다. 처음 나의 계획은 각 국가의 대표적 시네마테크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히트블릭크 키노와 비콘 시네마(모두 빛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처럼 도시 곳곳에 흩어져서 자생하는 보통 아트하우스 시네마라 불리는, 예술영화 전용관에 관해 알게 되면서(이렇게 무작정 표를 끊고 의자에 앉아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화를 보고 싶은 영화관은 찾을수록 나왔다), 나는 시네마테크의 범위를 국립 영화 아카이브에서 유럽 전역의 예술영화관으로 넓혀야 한다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시네마(cinéma)와 도서관(bibliothèque)의 합성어인 시네마테크는 영화와 영화 관련 자료를 수집, 보존, 상영하는 장소다. 나는 이 ‘시네마테크’에 영화를 보러 가는 곳의 의미를 더 확대하고 강조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찾지 않는 서점이 문을 닫듯이 영화관도 그럴 운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가야 보존과 수집도 의미가 있고, 그 반대로 계속해서 상영되기 위해서 수집하고, 보관하고, 보존하는 등의 수고롭고, 때로는 시간을 다투는 영화적 실천을 누군가는 하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시네마테크에 수집될 영화들이 이 수많은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시네마테크에 보관된 영화들은 이 영화관들에서 빛의 이미지가 되어 새로운 관객을 만난다. 스위스 바젤에 위치한 예술영화 전용관 키노 쿨트(Kult Kino)로 가는 길에 놓인, ‘THEATERPASSAGE’라는 이름의 굴다리. AI를 이용해 ‘CINEMATHEQUE PASSAGE’로 수정. ‘시네마테크 파사주’ 프로젝트를 떠올렸던 시점에 내게 많은 예술영화관 정보의 원천이 되었던 곳은 유럽의 예술영화 전용관 협의체인 유로파 시네마(Europa Cinemas)에서 구축한 ‘유로파 시네마 지도’였다. 이 온라인 지도 에는 소속 예술영화관들의 좌표가 붉은색 점으로 표시되어 있다. 나는 지구본 형태의 유럽 대륙 지도에 붉은 점으로 환원된 예술영화관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서, 한 나라의 영화문화를 상징하는 거대한 시네마테크 집합체를 구상했다. 프랑스에는 총 107개 지역에, 208개의 예술영화관이 곳곳에 퍼져있다. 총 스크린은 440개이다. 아마 유로파 시네마에 속하지 않은 예술영화관을 포함하면 그 이상의 거대한 시네마테크를 떠올려야 할 것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시네마테크에서 보기 어려운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는 지금의 영화들을 만날 수가 있다. 이탈리아에는 208개의 영화관이 있고, 스크린 수는 254개이며, 총 116개 지역에 고르게 흩어져 있다. 이들 예술영화 전용관은 모두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대체로 그해의 대표적 예술영화, 독립영화를 상영하지만, 각 영화만의 고유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이 정체성은 영화관 이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특히 프랑스에는 영화 종주국답게 감독의 이름을 딴 영화관이 많다. 여러분이 떠올릴 수 있는 감독은 대체로 있다. ‘시네마 장 비고’, ‘자크 타티 시네마’, ‘시네 막스 린더’, ‘마르셀 파뇰 시네마’. 시네마테크의 창립자 앙리 랑글루아의 이름을 딴 극장도 물론 있다(‘시네 앙리 랑글루아즈’). 배우의 이름을 딴 ‘장-폴 벨몽도 시네마’, 그리고 아마 이즈음에 여러분들이 기대할 장-뤽 고다르의 이름을 딴 영화관은 프랑스가 아닌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어 아쉽지만, 누벨바그를 함께 이끌었던 프랑수아 트뤼포의 이름을 딴 영화관(Cinéma François Truffaut)과 그의 영화 제목을 딴 ‘400번의 구타 영화관’이 있다. 이탈리아에는 당연하게도 문학가의 이름을 딴 ‘시네마 단테’가 있다. 특히 문학 또는 예술 사조를 딴 영화관들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작은 도시 카스텔 볼로네제에 있는 ‘시네마 모데르노(Cinema Moderno)’와, 페루지아에 있는 ‘포스트모데르니시모 시네마(PostModernissimo Cinema)’다. 아마도 포스트모데르니시모 시네마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은 곳, 가장 출입구가 아름다운 곳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 페루지아에 있는 '포스트모데르니시모 시네마'로 들어가는 문. (사진: POSTMODERNISSIMO ) 유럽 전역에는 총 779개 지역에 1,246개의 예술영화 전용관이 있다. 총 스크린은 2,921개다. 이렇게 전 세계 곳곳에 자리 잡은 예술영화관을 모아 거대한 시네마테크 집합체를 이룬다면 그것은 아마 오직 ‘세계의 영화관’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영화(시네마)의 유토피아이지 않을까? 어쩌면 시네마테크와 예술영화 전용관은 하나의 건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보관된 필름과 자료들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딘가에서는 오래된 영화가 다시 상영되고, 누군가는 작은 극장의 문을 열고, 다른 누군가는 어둠 속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본다. 이 모든 장소와 시간과 영화가 연결될 때,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시네마테크라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곳으로 가는 통로를 걷고 이어서, 지도책을 만들고 싶었다. 시네마테크 파사주. 영화관을 찾아가는 길. 영화관의 문으로 이어지는 통로. 3. 6월 20일 밤의 기억: 시네마 유토피아 나는 오늘, 시네마 유토피아(Cinema Utopia) 체인 중 하나인 몽펠리에 시네마 유토피아 (Cinema Utopia Montpellier) 문 앞에 서 있다. 문은 닫혀있다. 몽펠리에를 떠나기 전날 밤, 난 시네마 유토피아로 갔다. 마지막 상영작 중 하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숙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정류소에서 몽펠리에 폴 발레리 대학(Université Paul-Valéry Montpellier)으로 가는 5번 트램을 탔다. 지난 18일부터 오늘 20일 오후까지 내가 참석했던 NECS 학회가 이 대학에서 열렸다. 몽펠리에 도착 후 학회 일정과 예기치 못한 일들로 인해 저녁 시간에 이곳에 가는 것을 연일 놓쳤기에, 오늘 밤이 마지막 기회였다. 시네마 유토피아는 학회장에 가는 길에 항상 지나쳤던 곳이기에 익숙한 발걸음으로, 이미 마지막 영화가 시작했기에 조급한 마음으로 1층 높이의 계단을 올라, 마호가니색의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미 가와세 나오미(Kawase Naomi) 감독의 <야큐시마의 환상>은 시작한지 40분이 지났고, 히치콕이 아닌 캉탱 뒤피외(Quentin Dupieux) 감독의 공상과학 미스터리 코미디 애니메이션 <현기증(Le Vertige)>은 곧 있으면 끌날 시간이었다. 내가 희망을 품고 뛰어온 영화인 마르코 응웬(Marco Nguyen)과 니콜 아타네(Nicolas Athané) 감독의 애니메이션 <짐 퀸(Jim Queen)>은 시작한 지 10분이 지났다. 회색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매표소 직원이 먼저 눈짓과 손짓과 말로 들어갈 수 없다고 알려 주었다. 마치 오늘의 막차를 놓친 마음으로 난 포스터가 걸린 벽에 놓인 붉은색 벨벳 의자에 앉았다. 의자 옆으로 영화관 1, 2관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길게 이어졌다. 물론 영화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차단기 앞으로 지나가는 열차의 속도 사이로 새어 나오는, 건너편 내가 가야 할 곳의 풍경의 빛줄기처럼, 영화관의 닫힌 문 틈새로 이미지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돌아서 떠나야지만 사라지는 빛의 소리였다. 시네마 유토피아는 일종의 예술영화 전용관 체인으로, 프랑스 남부 및 북부 지역의 주요 도시에 흩어져 공동의 영화 프로그램으로 연결되어 있다. 몽펠리에에서 동쪽으로 기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아비뇽(Avignon)’에, 서쪽으로 3시간 거리에는 ‘툴루즈(Toulouse)’에, 그리고 거기서 북서부 방향으로 더 2시간 30분을 기차로 가면 도착하는 ‘보르도(Bordeaux)’에 시네마 유토피아가 있다. 북쪽 지역에는 트루와(Troyes)에서 멀지 않은 마을인 ‘퐁생트마리(Pont-Saint-Marie)’와 파리 북서부 발도와즈 주 생투앙라우몬(Saint-Ouen l’Aumône)에 다른 2곳의 시네마 유토피아가 있다. 시네마 유토피아는 모두 유럽 예술영화관 협의체인 유로파 시네마 회원관이다. 특히 시네마 유토피아의 독특함은 자체 프로그램에도 있지만, 이 영화관이 추구하는 영화를 알리기 위해 사용한 광고 문구에서 드러난다. “Cinéma garanti sans 3D.” 직역하자면, “3D가 없는 영화임을 보장합니다.” 다소 프랑스식 또는 시네마 유토피아식의 유머로 이해하자면, ‘겉모습만 화려하거나 속임수 같은 효과가 가미된 영화가 아님을 보장한다’는 의미이다. 일종의 식품이나 농산물에 유전자 조작이 아님을 알리는 ‘GMO-Free’ 표시와 같은 것이다. 오로지 조작되지 않은 현실의 기록으로서의 영화를 추구하는 이 영화관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구이다. 시네마 유토피아를 수호하는 존재는 그래서 천사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예술영화 전용관 체인 ‘시네마 유토피아’의 로고. (사진: Utopia Montpellier ) 나에게 영화관에 들어갈 수 없다는 수신호를 알린 점원이 물과 음료는 원하는 금액을 내고 자유롭게 마실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지갑에 있던 1유로를 음료 테이블에 놓인 돼지 저금통에 넣고 시원한 물을 한 컵 따랐다. 매표소와 관객 대기 장소는 마치 가정집 응접실처럼 아담했고, 이 공간의 주인인 것처럼 고풍스러운 의자와 커다란 괘종시계가 우아하게 놓여있었다. 매표소 옆 계단을 통해 3관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있지 않아 <현기증>이 끝나고, 관객들이 나왔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살짝 영화관 내부로 들어갔다. 마치 예배당과 같이 고요한 침묵이 흐르는 분위의 영화관이었다. 스크린 오른쪽에 걸린 회화 때문에 더 그러한 인상을 받은 듯하다. 회화 속에는 촛불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는 여인의 고요하고 평온한 몸짓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성경책이 놓여있을 법한 나무로 만들어진 스탠드 위에, 이달 몽펠리에 시네마 유토피아 영화 프로그램 책자가 놓여있다.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을 찾아 떠난, 아니면 영화의 본질을 찾아 떠난 순례자를 위한 안내서라도 되는 듯이 그렇게 놓여있다. 에필로그: 밤이 오면, 우리는 시네마테크에 간다. 세실리아: “오늘 밤에 새 영화를 개봉한대” - < 카이로의 붉은 장미 >(우디 앨런, 1985) © Orion Pictures Corporation 여러분은 어떤 날에 시네마테크에 가시나요? ‘시네마테크 파사주, Episode 2&3’부터 뤼미에르 영화박물관, 판테온 시네마, 로잔 시네마테크, 그리고 룩셈부르크 시네마테크 방문기가 펼쳐집니다. *** [1] Haley Weiss, “ John Akomfrah and the Image as Intervention ,” Interview Magazine , June 27, 2016. (접속일: 2026. 8. 2) 정찬철(영화미디어학 연구자) l 국립부경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영화와 미디어에 관한 논문과 글을 쓴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The Apartment Pictures) 1978년 3월 16일 아침 9시 10분. 이탈리아 총리를 2번이나 역임한 기독교 민주당 대표 알도 모로가 붉은 여단에 의해 납치되었다. 그날은 기독교 민주당이 서구 사회에서는 처음으로 공산당과의 연합정부를 구상하고 신임투표에 들어가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일명 ‘역사적 타협’의 설계자였던 모로는 당 안팎의 우려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납치, 살해, 테러, 총격전이 횡행했던 이탈리아의 가장 어두운 시기, 이른바 ‘납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서는 좌우간의 타협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이 가장 폭력적인 시대의 희생자 아이콘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모로는 납치 당한 지 55일 만에 시신으로 돌아왔다. 다섯 명의 경호원이 죽고 모로가 납치된 그날로부터 빨간색 르노 자동차 트렁크에서 모로의 시신이 발견되는 날까지, 수백만 명의 시청자가 TV에 붙어 있던 55일 간의 일을 벨로키오는 오랫동안 곱씹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모로 사망 40주기가 되던 해에 그는 국가적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그 55일의 이야기를 다성적이고 기념비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기로 결정했다. 모두의 간절한 바람과 기도를 저버리고 거대한 비극을 상영했던 (벨로키오의 비유에 따르면) ‘거대한 TV 극장’은 실제 사건으로부터 44년 후에 (이번에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이탈리아 TV를 통해 다시 한번 송출된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The Apartment Pictures) < 익스테리어, 나잇 >(2022)은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의 첫 시리즈 작품이다. 6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러닝타임 330분에 이르는 이 시리즈는 애초 TV 방영을 위한 프로젝트로 시작되어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자 극장용 영화로 확장되었다. 제작 방식뿐 아니라 작품의 릴리스 방식 또한 무척 이례적이고 예언적이다. 시리즈물로서는 영화제부터 극장, TV, 무료 스트리밍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배급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례적이고, 이 사례가 예외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예언적이기도 하다. 사실 시리즈물이 유수 국제영화제의 한 섹션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2022년 칸영화제는 <익스테리어, 나잇>을 칸 프리미어 섹션에 초청했다. OTT 영화에 대한 거부를 공식적으로 표명해온 칸일지라도 83세 이탈리아 거장의 시리즈물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익스테리어, 나잇>은 칸에서의 프리미어 상영 즈음에 두 파트로 나눠 이탈리아 극장에 순차적으로 개봉됐고, 이탈리아 TV에서 방영된 다음 이탈리아 넷플릭스와 무료 플랫폼 라이플레이(RaiPlay)에서 다시 공개되었다. 적어도 이탈리아인이라면 누구나, 언제나, 쉽게, 다양한 통로로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럼 그들은 여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1978년의 TV 극장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엇을? 벨로키오는 2003년에 모로 사건을 이미 한차례 영화로 만들었다. < 굿모닝, 나잇 >(2003)은 붉은 여단의 관점으로 밀실에 감금된 모로를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내부 시선의 영화라면, <익스테리어, 나잇>은 시선을 외부로 전환하고 확장한, 리버스 버전의 영화다. 자연스럽게 여기엔 주인공이 여럿이다. 벨로키오는 정치인, 교황, 가족, 붉은 여단원을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 삼아 사건에 얽힌 그들의 내면 풍경을 자꾸만 반복 변주되는 악몽의 사이클로 재현한다. 에피소드 1에서는 기독교 민주당과 공산당의 연립정부를 구상하는 모로의 정치적 이상 뒤에 숨겨진 그의 불면과 연약함, 관용과 사랑을 그린 다음, 에피소드 2에서는 그의 정치적 동지인 내무부 장관 코시가의 죄책감과 정신분열적 망상을, 에피소드 3에서는 모로를 구하기 위해 온갖 방도를 강구하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절박한 무력감을, 에피소드 4에서는 붉은 여단 내부에 번져가는 정치적 의심을, 에피소드 5에서는 모로의 아내 엘레오노라의 고통과 소외를 거쳐 에피소드 6에 이르러 환상과 상상, 꿈으로는 바꿀 도리가 없는, 총체적인 파국으로 맺는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The Apartment Pictures), IMDb (촬영: Anna Carmerlingo) 에피소드마다 불현듯 끼어드는 초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환상과 꿈이 구현하는 것은 대개 알도 모로의 환생이다. 역사적 비극을 다각도로 재고하는 벨로키오의 상상력은 불가역적인 역사의 결말을 그렇게 뒤집는다. 공히 모로 사건을 다룬 <굿모닝, 나잇>과 <익스테리어, 나잇>에 또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면 바로 그 점이다. 역사에 환상과 상상, 그리고 꿈의 이미지를 덧대어 숨겨진 진실의 일단을 들춰 보이는 것. 어쩌면 결론이 바뀔 수도 있었다는 깨달음. 그 환영의 세계에서 모로의 운명은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 <익스테리어, 나잇>은 그렇게 <굿모닝, 나잇>의 엔딩에서 다시 시작한다. <굿모닝, 나잇>은 감금된 밀실에서 탈출한 모로가 새벽 거리를 비척대며 걸어가는 몽환적인 장면으로 끝나고, <익스테리어, 나잇>은 로마 병실에 누운 모로가 문병 온 동료 정치인들에게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매우 초현실적이고 거의 신화적이기까지 한 이 오프닝의 환영은 러닝타임 330분을 관통하는 일련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거기서 모로는 코시가의 방음된 밀실 문을 열고 들어오고, 침실 의자에 앉아 불면의 밤을 보내고, 홀로 십자가를 진 채 고난의 길을 걷고, 동료 정치인들과 함께 익사한 시신으로 강물에 떠내려가고, 르노 자동차 트렁크에서 마침내 눈을 뜨고 걸어 나온다. “그 남자는 그리스도처럼 죽어야 했다.” 벨로키오는 감독 노트에 그렇게 적어놓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의 수사가 아니라 실제의 이미지로 우리 눈앞에 재현해 보인다. 그는 아무것도 새롭게 밝히지 않으면서도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간다. 허구를 통해, 오직 상상력만으로. (좌) <굿모닝, 나잇> 중 / (우) <익스테리어, 나잇> 중 / 사진: IMDb( 1 , 2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탈리아가 기묘한 열병을 앓고 있던 시기다. 벨로키오는 그 시대의 풍경을 장대한 프레스코화처럼 펼쳐놓고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걸어 나온 듯한 인물들을 차례로 무대 중앙에 세웠다. 1막이 오르고, 2막이 오르고, 3막에서 또다시……. 그렇게 여섯 개의 장에 330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다. 모로의 정치적 동지와 정부가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사실을 영화는 낮은 톤으로 서늘하고 선명하게 우리에게 일러준다. “이 영화, 아니, 시리즈, 이게 뭐라고 불리든 간에” 벨로키오는 자신의 첫 시리즈물을 만들면서 그걸 무어라 규정하든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이 영화, 아니, 시리즈, 이게 뭐라고 불리든 간에’ <익스테리어, 나잇>은 영화제와 극장 스크린, TV와 OTT 플랫폼을 가로지르며 시네마의 경계가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지를 즐겁게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완전한 몰입의 330분이 지나고 나면, 이걸 뭐라고 부르든 간에 저 멀리 제 길을 가는 시네마의 발걸음을 좇느라 바빠진다. 실은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영화는 매번 시네마의 경계를 탐문하느라 머뭇대는 우리를 저만치 앞질러 간다. 강소원(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l 영화제에서 일한다. 매년 엄청난 편수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
사진: <키노 프라우다> 제1호 중 (사진: “ KINO-PRAVDA ”, MUBI)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단순하게 설명할 수도 있다. 지가 베르토프, 1896년 제정 러시아 시기에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비아위스토크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집안. 태어났을 때 이름은 다비드 아벨레비치 카우프만(David Abelevich Kaufman), 1918년에 데니스 아르카디에비치(Denis Arkadievich)로 개명했다. 문헌에 따른 소개. 1917년 11월 7일 볼셰비키 공산당을 이끄는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 아래 무장봉기를 일으켜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켰고 데니스 아르카디에비치, 그러니까 지가 베르토프는 키노 프라우다(Kino-Pravda, 영화-진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통해서 혁명의 진행 과정을 기록하였다. 기계적인 설명. 영화사의 문장을 옮겨쓰는 것은 ‘세계영화사의 순간(들)’ 연재의 목표가 아니다. 나는 순간(들)이 하늘의 별자리처럼 펼쳐져서 성좌(Kostellationen)를 이룰 뿐만 아니라 그 순간들이 서로 충돌하여 새로운 섬광을 만들어내면서 고정되었다고 생각한 자리들이 동요하기를 바란다. 상투적인 순간이란 없다. 상투적인 지식이 있을 뿐이다. 지가 베르토프는 언제 영화사의 지식 안으로 돌아왔는가. 서로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있다. 대부분의 설명. 레프 쿨레쇼프와 함께 러시아 혁명 시기에 아방가르드 미래주의자로 불렸으며, 영화의 기록이라는 성질에 관한 ‘이념적인’ 테제를 제시하였고, 그것을 실천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라는 설명에서 끝낸 다음 에이젠슈테인과 그의 세대에 관한 몽타주 이론과 작품들에 관한 설명으로 넘어갔다. 언제 다른 설명이 시작되었는가.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사 안에서의 좌표는 언제 이동하였는가. 1969년에서 1970년 언저리. 파리. 그 가운데에는 물론(!) 고다르가 있었다. 공식적인 발언은 고다르가 장-피에르 고랭, 제라르 마르탱, 나탈리 비야르, 아르망 마르코와 함께 마르셀 마르탱의 질문에 인터뷰하면서 선언하였다. 이 인터뷰는 1970년 12월 《시네마 70》 제151호에 실렸다. 고다르는 장-피에르 고랭과 함께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고다르만 지가 베르토프에게 눈을 돌린 것은 아니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1970년 5월-6월호, 220/221호 특집호에서 ‘20년대 러시아’ 영화를 다루었고, 이미 지가 베르토프를 에이젠슈테인보다 앞에 놓은 다음 영화사학자 조르주 사둘에게 재평가의 지면을 맡겼다. 한 해 뒤에 1971년 5월-6월호, 229호에서 지가 베르토프를 표지로 다룬 다음 베르토프의 글을 번역해서 실었다. 물론 1968년 5월이 끝나지 않았다는 정치적 입장이 포함된 것이었다. 그때 카이에를 이끌었던 편집장은 장-루이 꼬몰리와 장 나르보니였다. 마오주의에 경도된 극좌파. 그들은 파리에서 문화혁명이 가능할 것인가, 라고 질문했다. 누구에게 이 관점을 배운 것일까. 그때 그들은 루이 알튀세르를 열심히 읽었다.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은 마르크시즘이 1924년 1월 21일 ‘이후’ 소비에트에서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좌) 고다르와 고랭이 지가 베르토프 그룹 결성 후 제작한 < 동풍(Le Vent d’est) >(1969) (사진: “ Le Vent d’est ”, IMDb) (우) 카이에 뒤 시네마 1971년 5월-6월호(229호) (사진: “ 1971 CAHIERS DU CINEMA French Movie Magazine #229 FN+ 6.5 Dziga Vertov ”, ebay) 자, 알겠다. 고다르와 카이에는 먼저 역사의 좌표를 수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에이젠슈테인이 늘 맨 앞에 있었다. 그 이름을 끌어내리고 베르토프로 수정한 다음 몽타주의 개념을 다시 질문하자고 제안했다. 정확하게 같은 방법을 되풀이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고다르(와 고랭)는 베르토프의 몽타주를 다시 검토하였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이 자리로 되돌아왔을 때 따져 물어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가 베르토프는 에이젠슈테인의 곁에 있는 이름이 되었다. 다시 소비에트의 1920년대로 돌아가자. 지가 베르토프는 이미 레닌의 지시로 러시아 전역에서 진행되는 혁명을 인민들에게 전하는 프로파간다 순례 열차를 타고 ‘키노 네델리아(주간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1] 지가 베르토프는 이 방법을 좀 더 밀고 나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신의 동생인 촬영기사 마하일 카우프만과 그의 아내이자 편집자인 엘리자베스 스빌로바와 함께 볼셰비키 공산당의 일간지인 《프라우다》의 영화 신문인 <키노 프라우다>를 제안하였다. ‘프라우다(Pravda, Правда)’는 러시아어로 ‘진리’라는 뜻이다. 《프라우다》는 1912년 5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 기관지로 창간되었고, 1918년에 모스크바로 편집국을 옮긴 이후 소비에트 공산당 공식 기관지가 되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1922년 5월 21일 《키노 프라우다》 1호가 제작되었다. 첫 호는 혁명에 성공한 인민들을 위한 여흥과도 같은 것으로 내용을 구성했다. <키노 프라우다> 제1호 중 (사진: “ KINO-PRAVDA NO. 1 ”, MUBI) 하지만 지가 베르토프는 혁명이 진행되는 지금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배워나갔다. 무엇보다도 그는 학습효과를 통해서 제작하는 순간마다 성장했다. 에이젠슈테인이 이론에 몰두하고 있었다면 지가 베르토프는 끊임없이 새로운 개념을 발명해 나갔다. <키노 프라우다>가 진정한 ‘키노 프라우다’가 된 것은 5월 26일의 <키노 프라우다>가 제작되었을 때였다. 혁명 지도자 레닌은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에서 공장 연설을 마치고 나오다가 볼셰비키 숙청에 반발한 좌파 사회혁명당원 파니 카플란의 암살 저격 총에 맞았다. 파니 카플란은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좌파 사회혁명당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34명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모두 총살형 판결을 받았다. 지가 베르토프는 이 재판을 촬영하였다. 이 촬영 과정에서 베르토프는 기록에서 멈추지 않고 영화와 당파성이라는 문제, 그리고 기록과 편집의 관계에 관해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놓치면 안 된다. 이 질문과 대답은 그 자체로 지가 베르토프의 투쟁이었다. 공산당 내에서 토론이란 사상투쟁이며, 이 투쟁은 패배하면 자기비판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사상을 검증받아야 했다. 레닌은 영화가 인민을 위한 ‘교육(pedagogy)’이 되어야 한다고 교시했다. 지가 베르토프는 그 말을 단순히 세상에서 벌어지는 뉴스를 통한 혁명의 교육에서 멈추지 않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혁명적으로 교정하는 교육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키노 프라우다>는 수명이 짧았다. 모두 23편이 제작되었고, 매호 상영시간은 20분 정도였다. 매번 구성이 바뀌긴 했지만 대부분 3개 정도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베르토프는 점점 더 <키노 프라우다>에 기술적인 실험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인민의 일상생활을 전달하는 뉴스라기보다는 실험영화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키노 프라우다>는 1925년에 끝났다. 하지만 지가 베르토프가 <키노 프라우다>를 만들면서 발표한 1922년 선언문은 어떤 영화가 상영되는 어떤 자리에 가서 낭독하고 싶어진다. “부르주아 연애소설로 만든 영화들은 문둥병에 걸린 것이다. 이런 영화들을 멀리하라, 이런 영화들을 보지 마라, 이런 영화들은 생명에 위험하다. 전염에 주의하라. 그런 영화를 만나면 도망쳐라!” 지가 베르토프 (사진: “ DZIGA VERTOV ”, Collection at the Austrian Film Museum, MoMA) *** [1] ‘세계영화사의 순간들’ 연재에서 이 순간을 이미 다루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1918년 8월 13일 로 되돌아가기를 권한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