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빌의 세쌍둥이
- 감독
- 실방 쇼메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미쉘 코크투, 장-클로드 돈다, 미쉘 로빈, 모니카 바이거스, 마리 로우 가우티어, 베아트리체 보니파시, 리나 보드레, 찰스 린튼
실벵 쇼메 감독의 2003년 장편 애니메이션 데뷔작 < 벨빌의 세쌍둥이 >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매 장면이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실벵 쇼메를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감독 반열에 올려놓은 이 작품이 올가을 13년 만에 국내 정식 개봉했다. 혁신적이라 평가받았던 연출은 지금 봐도 탁월하다. 무엇보다도 애니메이션 < 일루셔니스트 >와 실사영화 <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으로 작품 세계가 확고해진 실벵 쇼메의 13년 전이 거기 있다. 2D 애니메이션의 미학을 추구한 젊은 애니메이터의 초심, 씨네필로서의 취향이 한껏 녹아 있다. 이야기는 파리 외곽에 사는 노부인 마담 수자와 외로운 어린 손자 챔피언이 ‘벨빌의 세쌍둥이’가 나오는 TV 쇼프로그램을 보면서 시작된다. TV를 봐도, 강아지를 안겨줘도, 통 웃지 않는 소년 챔피언. 실은 자전거에 관심이 있다. 마담 수자가 자전거를 선물하자 신나게 자전거를 타던 챔피언은 세월이 흘러 사이클 선수로 성장한다. 하지만 사이클 대회 ‘투르 드 프랑스’에 참여했다가 대회 도중 마피아들에게 납치당한다. 곧 반려견 브루노와 함께 손자를 찾아 나선 마담 수자. 손자를 납치한 마피아들의 배를 쫓아 낯선 도시 ‘벨빌’에 도착하고, ‘왕년의 스타’ 세쌍둥이를 우연히 만난 후 함께 챔피언 구출 작전에 돌입한다. < 벨빌의 세쌍둥이 >는 그림이 주는 힘이 압도적이다.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니콜라 드 크레시의 영향을 받은 그래픽 스타일의 배경부터 캐리커처 느낌으로 그려진 캐릭터들까지 개성이 뚜렷하다. 게다가 모든 캐릭터들은 대사가 거의 없다. 그 대신 캐릭터마다 각자 독특한 동작으로 성격을 드러내고 감정을 전달한다. 마치 컬러풀한 무성영화를 보는 기분인데, 실제로 자크 타티, 버스터 키튼, 찰리 채플린을 사랑하는 ‘씨네필’ 실벵 쇼메가 의도한 바다. 그로 인해 이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사람의 일상과 움직임, 사물의 쓰임새를 예민하게 관찰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애니메이터들이 캐릭터의 액션을 만드는 데 더 많은 시간 집중할 수 있도록(!) 자동차, 자전거, 마피아들이 타는 배 등등 ‘탈 것’은 3D로 작업했다. < 벨빌의 세쌍둥이 >는 그렇게 캐릭터의 움직임과 이미지 자체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사운드를 절묘하게 조화시킨다. 대표적인 장면이 마담 수자와 세쌍둥이가 ‘벨빌’의 다리 밑에서 처음 만나 연주를 하는 장면, 그리고 세쌍둥이의 레스토랑 공연 장면이다. 마담 수자가 세쌍둥이와 우연히 만나서 함께 ‘벨빌 랑데부’를 연주하는 첫 장면은 그야말로 기발하고 유쾌하다. 이 장면과 중반 이후 나오는 세쌍둥이의 레스토랑 공연 장면은 실벵 쇼메 감독이 ‘스톰프’ 공연에서 영감을 얻었다. 레스토랑 공연에서는 세쌍둥이가 신문을 접었다 펴고, 냉장고 안 받침대를 튕기고, 진공청소기로 소리를 내서 음악을 만든다. 여기에 마담 수자가 자전거 휠을 실로폰처럼 두드려 환상적인 합주를 완성한다. 그런데 이 떠들썩한 순간, 마담 수자는 매서운 눈초리로 마피아 보스가 읽고 있던 신문 기사를 통해 그들의 음모를 알아낸다. 몇 개의 컷으로 짧게 표현되지만 애니메이션다운 편집 효과를 확실히 보여준다. 일상적인 장면들도 지나칠 수 없다. 마담 수자가 훌쩍 커버린 챔피언과 극한 훈련을 하고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 장면은 대사 없이 오직 사운드만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창문 밖으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 반려견 브루노가 짖는 소리, 축음기의 음악 소리 등으로 집안의 공기와 일상의 리듬을 전달한다. 마담 수자가 진공청소기로 챔피언의 다리를, 잔디 깎기로 챔피언의 등을 자연스레 마사지해주는 광경은 또 어떤가. 자크 타티와 버스터 키튼, 찰리 채플린이 봤다면 흐뭇하게 웃어줬을 것 같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세쌍둥이 자매가 자기 전 침대에 앉아서 TV로 실사영화(자크 타티 영화 < 축제 >의 한 장면)를 보며 깔깔대는 광경도 기막히다. 영화 후반 마피아들과의 엄청난 추격전까지, 말없이 많은 것을 말하는 이 기묘한 유머 감각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공간 디자인도 눈여겨 볼만하다. 가장 눈에 띄는 공간은 역시 ‘벨빌’이다. 1960년대 캐나다의 몬트리올과 퀘백, 미국 뉴욕의 건축 양식을 혼합해 디자인했다. 2m 길이의 종이에 애니메이터들이 직접 초고층 빌딩들을 그린 후 스캔을 해서 작업한 도시 전경이 압권이다. 뚱뚱한 자유의 여신상이 빅 버거를 들고 있고, 거리엔 온통 비만 체형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벨빌’은 마담 수자가 살아온 파리의 동네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실벵 쇼메는 자신이 경험했던 미국과 프랑스의 문화적 차이를 ‘벨빌’을 통해 다양하게 풍자한다. 그곳에서 유독 호리호리하게 나이든 세쌍둥이는 자신들처럼 대도시의 외곽에서 수수하게 살아온 마담 수자와 의기투합하는데, 이들을 둘러싼 묘한 대구와 공통점, 아이러니한 설정은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한다. 실벵 쇼메는 자신이 사랑해온 문화적 유산, 어린 시절 파리 외곽에서 살았던 추억, 애니메이터가 된 후 영국과 캐나다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한편의 애니메이션에 담았다. 유쾌하고 멜랑꼴리한 스릴러 < 벨빌의 세쌍둥이 >는 오랫동안 아끼고 추구해온 많은 것들이 일상에 뿌리를 둔 상상력을 통해 하나가 된 작품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이야말로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이 세상을 들여다보는 좋은 창이 되는지 말해주고 있다.
“마법사는 없단다” 마술사 타티셰프는 자신을 따르던 소녀 앨리스에게 이런 메모를 남기고 떠난다. 소녀는 그래서 환영의 허깨비를 벗어던지고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게 된 걸까? 마술사로서는 나름의 배려였다. 자기가 없더라도 소녀는 살아야 한다. 실뱅 쇼메의 < 일루셔니스트 >는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마술사와 여전히 마법으로 자신의 작은 욕망이라도 채워야 살아갈 수 있는 소녀의 이야기이다. 프랑스 희극 배우 겸 감독인 자크 타티가 자기 딸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원작 이야기에 기반하고 있고, 타티의 열렬한 팬인 쇼메는 기꺼이 그의 우상에게 헌정하고자 만든 작품이다. 그래서 마술사의 몸동작은 기꺼이 타티의 페르소나인 윌로씨를 따른다. 허나, 쇼메의 전작인 < 벨빌의 세 쌍둥이 >와 마찬가지로 < 일루셔니스트 >는 여전히 영화에 대한 영화, 또는 영화에 대한 애니메이션이다 (이때, 영화는 라이브 액션이 아니라 시네마를 지칭한다). 단지 타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든지, 작품 중간에 라이브 액션의 장면이 삽입되었다든지 때문만은 아니다. <벨빌의 세 쌍둥이>와 <일루셔니스트>는 분명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삼지만 (전자는 모호하지만 2차대전 무렵, 후자는 1959년),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끊임없이 영화의 탄생기로 되돌아가게 된다. <벨빌>의 세 쌍둥이가 전성기를 누렸던 보드빌 시대라든가, <일루셔니스트>의 마술사가 전성기를 누렸던 마술쇼의 시대로 말이다. 이들은 현재는 쇄락했지만, 왕년에는 나름 잘 나갔다고 여긴다. 그 잘나갔던 왕년이 바로 영화가 등장하던 무렵이다. 시네마토그래프를 비롯한 초기 영화는보드빌과 마술쇼의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 그리고 이 두가지 퍼포먼스 전통은 초기 영화의 ‘보여주기’exhibitionism 매력의 핵심적인 두 주춧돌이다(하물며 ‘벨빌’도 초창기 고몽 스튜디오가 있던 지역 이름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원의 오버랩을 배경으로 삼아 중심에 놓이는 것은 인간의 몸짓이다. < 벨빌 >의 핵심 사건인 납치극이 목적으로 삼은 것은 사이클 선수의 노동력이다. 이는 불법 사이클 도박을 위해 영상을 만들어내는 원천으로 쓰인다. < 일루셔니스트 > 역시도 마술쇼의 트릭을 만들어내는 것은 마술사의 기민한 손동작과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다양한 제스쳐이다. 뿐만 아니라 마술사가 등장하는 쇼의 다른 등장인물들인 곡예단이나 인형극 복화술사 또한 몸을 통한 표현이 중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몸짓, 볼거리로서의 몸짓을 재배치한 것이 바로 영화였다. 영화는 카메라 앞에 이들의 몸짓을 피사체로 세우고 필름에 기록하였다. 그 이후, 사람들이 바라본 것은 살아있는 피사체의 몸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에 의해 투사된 이미지였다. 기실, 영화 매커니즘은 상영 공간에서 인간 몸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지워나갔다. 납치된 사이클 선수처럼, 영사기의 크랭크를 손수 돌려가며 움직임을 만들어냈던 영사기사는 처음에는 관객 사이에 있었지만, 곧 영사실로 격리되고 이내 모터로 자동화되었다. 마술사의 트릭은 편집 기술로 넘겨졌다. 스크린은 무대를 대체하였고, 스크린과 영사기 사이에서 인간은 사라지고, 기계 장치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 일루셔니스트 >의 핵심은 마술사 타티셰프가 극장 안에 들어갔다가 그 곳에서 실제의 자크 타티 영화와 마주하는 장면이다. 그것은 단지 타티에 대한 감독의 소소한 오마주에 불과하지는 않다. 그 장면에서 애니메이션과 라이브 액션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마치 거울처럼. 앨리스가 타티셰프의 모습을 보았던, 그래서 타티셰프가 한사코 다시 서기를 거부했던 백화점 쇼윈도우와 대비되는 설정이다. 쇼윈도우는 상품에 대한욕망을 ‘환영’illusion으로 보여주는 장치이다. 영화 스크린과 유사한 원칙으로 움직이되, 스크린이 2D라면 쇼윈도우는 3D인 셈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3인조 곡예단과 마술사가 함께 작업했던 간판 그림이 매개체로 역할을 해왔다. 초기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중 하나였던 제임스 스튜어트 블랙턴도 이 직종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다) 쇼메의 작품을 영화에 대한 영화, 혹은 영화에 대한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이유는 이 지점이다. 영화의 기원과 인간의 실종 (때론 멸종)을 다루는 그의 작품들은 2D와 3D의 경계에서 이루어진다. < 벨빌 >과 < 일루셔니스트 >는 2D의 따뜻한 손맛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3D 이미지가 곳곳에 들어가 있다. 그런데 둘 사이에 어색한 긴장감이 흐르기 보다는, 2D에 기반한 현실 공간으로부터 3D로 구현된 환상과 상상, 혹은 일탈과 자유로움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굳이 실뱅 쇼메의 라이브 액션 작품인 <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이미 그의 작품들 속에는 라이브 액션과 애니메이션, 그리고 2D와 3D라는 이질적 세계들이 서로를 침투하며 녹아들고 있다. 이는21세기에 비로소 등장한 융복합적 영상 현상이 아니라, 영화의 역사 초기에 애니메이터들이 카메라를 만지작대면서 이미 넘치도록 쏟아냈던 산물들과 닮아있고, 닿아있다. (사족을 달자면, 그 당시 animated pictures는 라이브 액션 영화를, animated cartoon은 애니메이션을 가리켰다)
1998년 < 노부인과 비둘기 >라는 작품을 선보이며 프랑스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과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단편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면서 주목을 받게 된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뱅 쇼메 감독은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희생과 사랑, 유대감이란 주된 테마를 가지고 수작업이 보여주는 섬세한 캐릭터의 움직임과 생략, 절제미가 돋보이는 작품 세계를 추구하는 작가주의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감독 중 한사람이다. 감독의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경력은 1988년 영국 런던의 한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션 아티스트로 일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2003년 첫 장편 < 벨빌의 세 쌍둥이 >로 역시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장편 부분에 노미네이트되면서 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전 세계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각인 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꼭 7년 만인 지난2010년에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일루셔니스트>를 세상에 내놨다. 반갑게도 국내에서는 지난 6월에 개봉되어 다른 아트 애니메이션에 비해 이례적으로 빠르게 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 일루셔니스트 >는 프랑스의 찰리 채플린이라고 불리는 코미디의 거장이며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자크 타티가 딸에게 보내는 사랑과 애잔한 마음을 담은 미공개 된 편지를 원작으로 실뱅 쇼메 감독이 각색하여 애니메이션으로 영화한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은 1950년대 한창 로큰롤과 텔레비전 등이 새로운 대중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할 무렵이다. 주인공인 마술사는 이런 대중문화의 조류에 밀려 마술을 선보일 무대를 점점 잃게 되면서 파리에서 런던, 런던에서 스코틀랜드로 옮겨 가게 된다. 마술사는 자신의 공연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면 비록 술에 취한 관객 앞일지라도 혹은 야유를 보내는 철없는 단 한 명의 꼬마 관객을 위해서라도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공연을 펼친다. 마침내 이 도시 저 도시를 전전하던 마술사가 다다르게 된 곳은 스코트랜드의 작은 시골 마을의 술집으로 그곳에서 마술사의 존재를 믿는 순수한 소녀 앨리스와 만나게 된다. 인생의 뒤안길, 마지막 여정을 걷고 있는 한물간 마술사와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려 하는 소녀 앨리스, 두 사람의 엇갈린 여정이 교차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은 마치 아버지와 딸처럼 유대감을 느끼며 마술사는 앨리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하고, 앨리스는 마치 철모르는 딸처럼 마술사에게 원하는 것이 점점 많아진다. 왜냐면 앨리스에게 마술사는 ‘키다리 아저씨’같이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감독의 작품들 중 눈에 띄는 특징은 바로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대사를 굉장히 아낀다는 점이다. 어느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대사들이 배경음처럼 어우러지면서 관객들이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 쓰기보다 캐릭터의 움직임과 한 장면 한 장면이 들려주는 시각적 즐거움으로 작품을 읽어 줬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고 있다. 예술적 감각뿐만 아니라 음악적 감각도 뛰어난 감독은 전작 < 벨빌의 세 쌍둥이 >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직접 작곡에 참여 했을 정도로 발군의 음악적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번 작품이 자크 타티 감독에 대한 오마쥬답게 관조적인 시각에서 작품을 연출해 보고 싶었다는 감독은 화려한 카메라 연출을 극도로 자제하고 마치 관객들을 연극무대로 초대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번,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토끼를 놔주는 장면에서 360도로 회전하는 화려한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스펙터클한 영화적 연출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마치 성장한 딸을 이제는 보내야하는 애잔함과 함께 마술사로 보냈던 자신의 일부를 떠나보내야 하는 시원섭섭한 마음의 춤사위처럼 말이다. < 일루셔니스트 >는 아버지가 딸에게 들려주고 싶어 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앨리스의 외모도 화려하게 변해 가고, 결국 사랑하는 남자와 떠나가지만, 작품 속 내내 흐르고 있는 것은 바로 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해 가는 딸을 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다. “마술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메모를 남기고 기차를 타고 또 어디론가 떠나는 늙은 마술사와 자신에게 맞는 세대와 환경에 적응하며 사랑하는 이와 함께 떠나는 앨리스 모두에게는 새로운 희망을 위해 선택한 아름다운 이별이기에 그 결말은 결코 슬프거나 암울하지 않다. 더욱이 마지막 장면에서 엷은 미소를 짓는 마술사를 만나게 되면서 이 또한 인생을 보는 아름다운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